27. 상트를 떠나면서
정말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착한 순간부터 아주 북유럽과는 매우 달랐던 그 이색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도시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을 관광하면서 아주 특색 있었던 여러 면모를 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먼저 이 도시는 '러시아의 베니스'라는 별명을 가진 물의 도시였다. 네바 강 델타 지역의 101개의 섬 위에 서 있는 이 도시는 시 면적의 약 15%가 수면이고 350개 이상의 교량이 있다. 조금만 이동해도 운하이거나 네바강과 발트해가 나타난다. 그래서 경치가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거의 전체가 광광자원이 될만한 곳으로 보였다. 수많은 유적이 한곳에 모여 있는 도시로서 구경거리가 숱하게 많다. 여기 와보기 전에는 그이름이 아주 이색적이어서 그런지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도시였었다. 아주 좋은 경험을 했다.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곳이다.
또 하나는 이 도시를 이룬 표트르 대제에 관한 것이다. 도대체 이 인물은 어떤 정치적 이력을 가졌기에 그 의 이름이 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의 이름앞에 성(Saint)이란 칭호가 붙었을까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력을 백과사전에서 찾아 요목별로 대강 정리해 보았다.
* 복잡한 가정환경, 왕위 계승 같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래서 크렘린 근방의 외국인 마을에서 지내며 실리적이고 과학적인 서구 문물을 접했다.
* 1689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즉, 터키와 전쟁을 시작했으나 패배하기도 함
* 조국으로 돌아와 표트르는 자신을 따르는 소년병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
* 1721년 원로원은 표트르에게 '대제'라는 칭호를 붙였고, 이때부터 러시아에서 절대주의 왕정이 확립되었다
* 표트르가 즉위한 뒤 낙후된 국내 경제를 끌어올려 서유럽을 따라잡겠다는 내정부터 군대까지 여러 부문에서 개혁을 시작했다.
*. 1724년에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도 세우고. 대사절단을 이끌고 서유럽을 순방했다. 표트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서유럽 각국을 시찰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런던 조선소에서는 선공의 도제로 일해 선박 건조를 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기도 했다.
* 부동항인 발트 해로 관심을 돌렸다. 그 진출을 가로막던 장애물인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시작했다. 표트르는 장장 21년간 계속된 이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 전쟁 도중에 네바 강변 스웨덴 땅에 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으며, 끝내는 스웨덴을 정복함
* 뛰어난 지성에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던 표트르는 러시아의 이익과 자신의 계획을 추구하기 위해 당시 정세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유럽 및 국제 정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 표트르는 정치가로서 여러 가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2미터가 넘는 큰 키에 잘생긴 외모는 외교에 힘을 발휘했으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등용. 또한 검소하고 정의로웠으며, 매사에 정력적으로 일했다고도 한다.
* 밑바닥부터 시작한 자신의 경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본부터 충실히 익힐 것을 바랐으며, 능력과 성과에 합당한 보상을 내렸다.
* 그런 한편으로 매우 잔인하고 무서운 면도 있어서, 화가 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손주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1세뿐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억압적이고 권위적인데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우하였다.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표트르의 외가 친척 두 사람이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만성질환으로 인해서 사실상 황제의 직위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던 표트르의 형 이반 5세(Ivan Alexeyevich Romanov) 가 표트르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였다. 심신이 허약한 청년과 열 살 먹은 소년을 명목상의 차르로 세워 놓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표트르의 이복누나인 소피아(Sofia Alexeyevna)였다.
*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쿠테타 겅험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실각과 불행한 결혼 생활 등등
* 아들은 정치를 하지 않으려고 하여 수도원에 가두었다. 다시 유럽으로 도망갔는데 비엔나에서 찾아내 반역죄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Bronze Horseman)〉의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슈킨은 그를 위하며 3장 476행으로 구성된 서사시를 썼다.
< 위 백과사전 인용 >
그를 정리하라면 비록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영욕을 동시에 겼었고, 대단한 열정과 불굴의 의지로 거대한 제국의 차르가 된 뛰어난 천재이고, 전쟁을 많이 해서 많은 살상을 했고, 오만한 독재자 이면서도 의협심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는 불우한 사람이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요약하면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왜 상트 즉 성(Saint)이란 칭호가 붙었을까라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성인은 생존시에 영웅적인 덕행으로써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어, 로마 가톨릭교회가 보편적인 교도권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하는 사람 또는 《성인록》에 올라 장엄한 선언에 의해서 성인으로 선포된 사람''을 가리킨다. 생존시 덕행이나 순교 등을 한 사람에게 주는 칭호였다. 인용은 위키백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표트르 같은 너무나 세속적인 인간에게는 '성인'의 칭호는 가당찮은 이야기다. 여기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980년 블라디미르공은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키예프대공이라는 전제군주의 자리에 올랐다.이후 러시아를 국가적으로 통일히가 위해 보다 보편적인 종교를 찾게 되었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동방정교, 로마 카톨릭교, 이슬람교, 유태교 가운데 이중에서 동방 정교(그리스 정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공이 동방 정교를 수용하게 된 이유는 슬라브인들의 현세 지향적이며 신인동격체인 민간신앙의 전통이 동방 정교(그리스 정교)와 가장 잘 맞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러시아 정교회는 국민들의 큰 저항이 없이 슬라브인들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동방정교(그리스 정교)가 전파 되면서 문자가 같이 전파되어 슬라브민족에게도 드디어 문자를 가지게 되었다.
1917년 볼쉐비키 혁명 직후까지 러시아 정교는 국교였으며 다른 종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출처: https://sjleeblog.tistory.com/20 [SJLee Blog]
정리를 하면 러시아 정교의 특징은 교권이 세속적 권력, 즉 왕권 또는 국가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원시사회의 제정일치처럼 말이다. 그러니 국왕의 존재는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말이다. 그러니 표트르 대제를 성인으로 부를 수 있다. 이제야 의문은 완전히 풀리었다,
상트(Saint) 페테르(표트르의 독일식 발음) 부르크(도시)
또 영어식으로 하면 '성피터의 도시'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도심을 벗어나...
도심을 벗어나니 한가한 도시의 외곽 서녘 하늘엔 구름이 한가하게 졸고 서서히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