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 생애 가장 슬픈 아리랑 9. 우정의 마을에서
8. 내 생애 가장 슬픈 아리랑
우리는 다시 고려인 기념관에 있는 작은 강당에 가서 아리랑 가무단의 공연을 보았다.
이 가무단은 1995년에 우리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 북한 피바다가극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교사 조영희 씨를 초대하여 시작된 뒤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한다. 그 동안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많은 활동을 하여 이제는 성공했다고 한다. 가무단 단장인 듯한 고려인 선생은 우리말에 능숙하지 않은 듯 러시아 말로 공연을 진행하였다. 초중고의 어린 딸아이들이 보여주는 무용이었다.
부채춤도 보았다. 미국 이주 백년 기념 공연 때도 참가했고 한국에도 일 년에 한 번 씩 방문 공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 중국 북한 기타 여러 나라에서도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아리따운 춤사위는 참으로 훌륭했다.
어느 춤이었던가. 음악으로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의 그 슬픈 곡조를 배경음악으로 고려인 5세 아이들의 춤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는 곧이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디아스포라. 이들은 누구였나. 못살고 견디지 못하여 국경을 넘어 유랑의 가시밭길을 걸었을 그들의 선조들. 그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도 겪고 타국인으로 여러 가지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으리라. 또 나라가 없는 민족이었기에 몇 만 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 당하면서 숱한 고생을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으리라.
눈물을 흘리는 것이 무어 잘못되었으랴만 구경꾼들 속에서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은 것을 겨우 꾹꾹 눌렀다. 아리랑이야 언제 들어도 슬픈 우리 민족의 한의 노래인 것을 누가 부정하랴만 태어나서 이제까지 내가 듣던 어느 아리랑보다 슬픈 아리랑을 들은 것이다. 그렇게 슬픔이 벅차오르는 나의 뇌리에는 비참한 역사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연해주에 살던 10만명에 이르는 우리 동포들이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한인들은 약간의 식량을 준비하여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행선지도 없고 탑승원도 누구인지 몰랐다. 강제이주의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나라 없는 설움에 통곡하면서 굶주림과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수송열차의 행렬은 다시 옮겨져 가족들은 흩어지고 이주 도중 번진 홍역과 천연두에 반이 넘는 어린 아이들이 죽어갔다. 1938년 봄까지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한인 중 60%는 다시 재이주를 한다. 작게는 도보로 20km 길게는 철도로 4,000km 까지 장사진을 이루어 영구 정착지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강제 이주에 불만을 나타내며 저항하던 수백 명이 체포 또는 죽음을 당했다.
사람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에 그들은 버려졌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 속에서 겨울의 거센 모래바람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굴을 파고 움막을 짓고 남의 농가의 헛간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들은 그 땅에서 해가 뜨면 벌판에서 일을 하고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불굴의 정신으로 다른 토양 다른 기후를 이겨내고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
왜 나는 그 장면에서 그토록 진한 슬픔을 느꼈을까?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생에 나는 이 연해주에서 떠도는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보는 그 유려한 연해주의 산하에 그렇게 정을 느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저 5세들이야 조국이 있다는 정도지 그들은 이미 우리의 말을 잃어버린 러시아인인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데 저들이야 한국어를 배운들 우리가 듣는 러시아어처럼 생경한 언어일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 한국은 몽매에도 잊지 못해서 자기들의 뼈를 묻을 나라가 아니다. 오랫동안 타향에 산 사람은 그 정겨운 고향에 돌아오더라도 한편은 반갑지만 이제 그 고향에 피붙이 하나 없고 보면 고향이 다시 타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다시 한 번 더 잃어버리는 실향의 아픔을 겪게 된다. 하물며 저 아이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 땅에 다시 찾아오더라도 말을 잃어버렸고 말을 걸 아는 이 조차 없으니 말이다. 이제는 잘 살고 있다는 조국이니 그냥 한 번 쯤 가보고 싶은 나라일 뿐 더 이상 조국이 아니리라.
9. 우정의 마을에서
우스리스크 시내를 나오면 계속 평야지대다. 아주 멀리 산지가 구릉처럼 보 일 뿐 허허한 벌판이다. 집들이 띄엄띄엄 있을 뿐 한 곳에 이르니 예쁜 지붕을 한 신식 양옥들이 여기저기 몇 채씩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우정의 마을이다. 우수리스크 인근 미하일로프카에 위치한 고려인 정착마을인 것이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여러 개의 공화국들이 독립을 한다. 1937년 연해주에 살던 한민족이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으로 쫓겨나 버려지게 된다. 두 달 석 달이 걸려 화물차를 개조한 열차에 가축처럼 실려 추운 시베리아를 횡단하게 된다. 가다가 죽은 노약자들이 숱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무 곳에나 내려놓아서 겨울 추위 속에서 움집을 만들고 짐승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자식을 놓고 자리잡고 살게 되었는데 다시 사정은 달라졌다. 소련이 없어지고 민족국가들이 세워지자 러시아어도 쓰지 않게 되고 현지에 살던 고려인들은 국적도 없어져 버렸다. 여러 가지로 심한 차별 속에서 다시 그들은 옛 땅을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옛날 자기가 살던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98년도 주택공사에서 이 우정의 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관리비만 내고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사업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몇 차례 중단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래는 1200ha에 1000채의 규모의 농장을 예정하고 러시아 가구를 6% 공동 조성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물론 농업 정착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가 흡인력이 약해 여의치 못하고 현재 36가구가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우정의 마을이다.
그들은 왔다. 그러나 재산을 정리하여 돌아오니 비행기 삯을 제하고 나니 주머니에 남는 돈은 없었다. 그런 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오고 다음에는 어머니와 자식들이 오고 마지막에는 늙으신 부모님이나 친척들을 모셔오는 경우가 있다고도 했다. 이들은 국적 취득이 어려워 무국적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흘러들어온들 어디 직업이 있는가? 처음의 목적은 농사짓는 것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아 대부분이 막노동이나 일자리를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한참을 가면 꼬레오 마을과 무슨 농장이 있다고 하는데 조선족들이 이룬 삶의 터전이라고 한다. 거기서는 벼농사도 하고 있다고 한다.
< 우리 동네 아줌마인 듯한 고려인 아줌마 >
마을 주민인 고려인 아줌마한테 말을 붙여 봐도 아주 쉬운 말만 알아들을 뿐 깊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물어물어 대표되는 분과 만났다. 그리고 우리를 한 곳에 인도했는데 거기에는 부산 대학교 봉사활동반이 농활을 와 있었다. 동북아 평화연대 등 몇 단체가 이 마을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지인들에게 우리 역사와 우리말을 가르치고 살아갈 방법으로 유기농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또 그들이 재배한 콩과 차가버섯을 이용하여 청국장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활동하는 방으로 들어가 자세한 셜명을 들었다. 그리고 멀리까지 온 이 원정대원들한테 격려의 말을 하였다. 이들은 말하자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시민단체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시민 단체의 힘은 일본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다는데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고 있으니 참 대단하고 눈물겹다.
<농활대 본부 옆 건물에 그려진 그림>
<농활대가 농업에 필요한 내용들을 그린 학습자료들>
< 고려인 문화의 날을 의 모습을 그린 그림 >
그 마을 한 곳에는 가게를 차린 고려인이 한 분 있었다. 잠깐 기웃거려보니 생활필수품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이 고려인이 돌아와서 가장 성공한 예라고 한다. 어려운 처지에서 제일 빨리 살아남는 직업은 생산자나 노동자가 아니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모습은 우리네 농촌 사람 모양을 하고 있으나 말을 붙여보니 알아들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말을 잃어버리면 민족이라는 것도 이름뿐이다. 말이 통하였더라면 해볼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고향에 오래 가지 않으면 고향 사람을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만, 그래도 나는 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아 이들의 고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조국을 떠나 이국의 하늘 밑에 살다가 또다시 나라 없는 설움으로 그 터전마저 빼앗기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유배당했다가 거기서도 배척을 받아 또다시 돌아온 그 고향 아닌 고향에서 그들의 유랑의 삶은 이제 여기서 끝날 것인가? 그들이 하는 일에 성공해서 빨리 이 터전에 복지를 이루어가길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