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고아시아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15. 고아시아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 오른쪽 건물이 블라디의 박물관 >
하바와 블라디에서 본 두 박물관에는 많은 유물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땅의 아득한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사료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도 구석기 신석기 등 아득한 고대 문화의 자취를 관심 있게 보았다.
< 거기서 발해의 와당을 보았다. 또 투각벽돌에 새겨진 무늬를 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민화세계를 입체로 그대로 보는 듯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발해의 유물이 분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경복궁 꽃담장 장식과도 비슷하고 민화 닭과도 비슷하다고 한다. 정감 있고 우람하고 구성진 감성을 표현한 양식으로 새벽닭이 복을 부른다고 하고 봉황이 무늬로 둘러쳐진 벽돌이라고 한다. 하늘의 태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도상인데 이는 동아시아의 하늘 숭배사상, 즉 천손족의 세계관이 투영 돼 있다고도 한다 >.
그리고 발해 것인지 금나라 것인지 요나라 것인지 모를 불상과 또 언제 것인지 모를 머리 부분이 날아간 문인석과 무인석들과 돌거북 받침 등 등 중세문화에 관심이 갔다.
<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이곳에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수 천 년 동안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문화를 고고학계에서는 고아시아족의 문화권으로 설정하고 있다. 4대 인류문명을 말하는 서구인들의 용어로 친다면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발상지다. 유전자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을 포함한 이들 소수민족들과는 혈연적 근친성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언어문화, 종교관, 통과의례 풍속에서도 범동아시아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나나이족들의 정신문화에서는 동물과 식물도 인간처럼 신령한 영혼이 깃든 존재로 보고 대화를 한다고 한다. 사람의 말을 짐승들도 알아듣는다고 믿어 사냥을 갈 때는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냥도 필요한 만큼만 했다고 한다. 영혼을 가진 생명을 모두 존귀하고 신비스럽게 보았고 영적으로 평등하게 보던 시대였다. 그렇다. 동물들에게도 분명 낮은 단계의 영혼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육식을 하는 것은 오랜 동안의 관습의 소산일 뿐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문화는 전승되어 오고 간다. 사람은 아주 옛날에는 채식을 한 것이다. 어금니가 발달하고 대장이 발달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지금도 문명권에 따라서는 채식을 하는 곳이 많다. 내가 채식을 하며 명상을 배운지 이제 꼭 일 년이 되었다. 아직도 과거의 업보가 남아서 채식이 따분할 때도 있지만 이제 다시는 그 야만의 육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 향토박물관 안에는 장승, 솟대, 승천하는 날개 달린 짐승, 나무에 통째로 새긴 조각들, 명경, 주술대가 보였다. 그리고 샤먼들이 입던 의상, 부족신화 그림, 동굴, 가죽으로 덮은 시옷자의 츔 집 들이 있다. 이것들은 나나이족(여진족)의 문화만은 아니다. 여러 동아시아 소수족들 에벤키, 캄차키, 올치, 니기달, 우데기, 브리아트 등등의 것이었을 것이다 >.
이러한 샤먼이즘의 문화는 우리와 근친한 문화다. 우리 단군은 바로 샤먼이었다. 또 아직도 뿌리 깊게 우리에게 남아있는 무당의 문화 - 이것도 물질문명으로 심히 왜곡되었지만 - 가 바로 샤먼의 잔재가 아니던가?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우환이 많았었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 초혼굿을 한 기억이 있다. 그때 나타나신 할아버지는 생존시의 육성을 하였다고 어른들이 말하던 것이 오랜 동안 깊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내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 나나이 샤먼의 역할은 문화의 담지자로서, 전통의 계승자로서, 약제사와 치료사로서의 기능인데 그것은 작은 샤먼의 일이다. 큰 샤먼은 죽은 이를 관에서 꺼내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영매다. 또 나나이 샤먼의 우주는 천상계 아홉, 인간계 아홉, 지하계 아홉으로 도합 스물일곱계의 세계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한민족사상의 중심흐름이라 할 ‘신(한)-이승·저승(울양)-천지인(천상·인간·지하)’의 길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나이 샤머니즘의 현대적 의미는 인간끼리의 평화공존이고 자연생명의 보존이다 >.
내가 이제야 확실히 인식하게 된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또한 기독교의 천국이나 지옥. 불교의 극락과 지옥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무수한 하늘세계와 내세의 문제 등등…. 그 전에는 내가 볼 수 없는 세계의 존재를 어떤 상징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다. 현재의 이 삶의 뒤에 영혼이 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현재의 삶의 지평이 한없이 넓어지고 그것은 드디어 영원한 시간과 공간의 저 끝없는 우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라도 요 정도라도 깨달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늦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었는지 모른다.
제정러시아의 개척문화와 소련 사회주의 문화 앞에 이들 고아시아인들의 문화는 조금씩 파괴되어 갔고 오늘의 물질문명 앞에 또 그 고유의 빛깔을 더 잃어가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계급과 국가와 물질적 소유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아시아 대륙의 마지막 문명이었던 셈이다. 대지를 어머니로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며 모든 자연에는 영혼이 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가 유럽인들의 지배와 억압과 착취의 문화에 파괴된 것처럼 연해주 지방에서도 지금 이들의 문화는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오늘 이 세계의 것이 문명이고 이들 토착민들의 것이 야만인가?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것은 정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끊임없이 지구 오지 곳곳으로 자연파괴, 영혼파괴의 서구식 문화는 파고들고 있다. 그렇게 병 든 인류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이 지역의 옛 문화의 자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맑게 흘렀을 유장한 아무르 강의 물결 따라 흘러오던 인류의 맑은 영혼의 문명은, 현대의 물질문명으로 더러워져가는 저 아무르의 탁류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잃을 것을 다 잃어버린 21세기의 인류는 이제야 탈근대의 문명전환기에서 생태 생명 문화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소수자들의 애타는 부르짖음일 뿐 자본의 거대한 물질문명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녹색대학교 김봉준 교수의 글과 김지하의 글 등에서 배경지식을 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