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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다시 여행길에 오르다. 3,공해상에서 4.멀리보이는 곳, 자루비노항

저 언덕 넘어 2006. 10. 28. 06:46
 

1. 다시 여행길에 오르다.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세계는 신비의 안개를 두르고 있다. 그 신비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야기로만 듣고 그림으로 보던 것을 새로 경험할 수 있다, 또 여행은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좋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우리에게 지극히 먼 곳이었다. 냉전 시대에는 금기의 땅이었다. 붉은 빛깔의 체제를 가진 종주국으로서, 분단국으로 오랜 동안 이념의 대립을 겪은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두렵고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간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 러시아는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는 땅이고 가서 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지구 위에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은 북한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2. 공해상에서


  속초항을 떠난 배는 곧장 선수를 북쪽으로 돌리고 육지로부터 멀어져 갔다. 바람 한 점 없이 해면은 호수처럼 잔잔하였다. 만 2천톤의 거구를 한 이 배는 성수기에는 1주일에 3회 비수기에는 2회를 다닌다고 한다. 선원은 41명인데 그 중 16명은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족 중국인이라고 한다. 대략 5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다. 오늘은 거의 만선에 가깝다. 여름 관광객들과 백두산을 답사하는 어린 학생 단체 손님들이 많다. 주고객은 보따리 상인이 60여명이고 대부분이 중국과 러시아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다. 러시아인들이  더러 있고 중국과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거나 사업상 혹은 특수한 목적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배는 물살을 가르고 간다. 흰 물거품들이 고요한 바다에 파문을 일으킨다. 선미 쪽은 배가 지나온 길을 따라 물길의 흔적이 멀리 이어져 간다. 고요하던 해면을 갈라놓으니 물살들이 오랜 동안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다. 물결이 흔들려서 이루어진 뱃길이 아득하게 펼쳐있다. 그러나 그 길은 멀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땅에서는 지나다닌 흔적이 오랜 동안 상처로 남지만 물에서는 그 흔적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물의 마음은 은원(恩怨)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 성자의 마음을 가진 것 같다. 남한테서 당한 사람 마음의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저렇게 깨끗이 잊혀진다면 어떨까?


3. 멀리 보이는 곳, 자루비노항


   밤에 잠이 깨어 선상에 올라도 사위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바다만 보일 뿐이고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공기가 맑은 곳에서는 하늘에는 지천의 별들이 쏟아질듯이 찬란할 터인데 날이 흐려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깝다.

  거의 요동을 느끼지 못하는 고요한 선실의 밤은 깊어가고 천 리를 달려온 나그네는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다시 눈을 뜨니 선창 밖으로 검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흐린 하늘이 보였다. 점점 동쪽 하늘이 환해지면서 해가 뜰 모양이었다. 구름 속에서 해가 잠깐 보이는 듯 떠서는 다시 구름 속에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망망한 바다를 간다. 저 멀리 육지가 보였다. 잇닿아서 시야에 가득히 펼쳐진 산맥들이 차츰 그 모양을 드러내고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노년기의 산봉우리 하나가 유독 평안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 땅이었다.

          위 - 맨 처음 만난 무인도, 아래 - 처음 만난 러시아 배(검역관이 내렸다)  

 

  왼쪽으로 더욱 가까워오는 섬에는 등대가 보이고 저 멀리 항구의 모습이 다가오고 배위에서는 러시아 깃발을 올리고 있다. 러시아의 작은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검역관이 내려 우리 배로 들어왔다.

 

  왼쪽에 섬처럼 이어진 곳에 조금은 낯선 낡은 아파트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였다. 내가 본 러시아 첫 동네다. 숲들이 집들 가까이 우거지고 지붕모양이 좀 독특하다. 연이어 기중기들이 몇 대 있고 을씨년스런 창고 건물이 길게 늘어섰다. 그 너머 묵직하고 칙칙한 모습의 사람의 마을이 보였으나 그 위에 좌우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고 있는 산봉우리에 나무도 없는 민둥산에 풀만 파랗게 보이는 것이 목장처럼 아늑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로 하나가 고개 너머로 나고 차가 한 대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룻밤도 더 걸려 공해 위를 달려가 닿은 첫 러시아 땅과 작은 항구 자루비노항은 높이 쌓인 고철더미와 몇 대의 기중기가 섰고 능선을 따라 송전탑이 보이는 보잘것없이 작고 초라한 시골 항구였다. 그러나 목장처럼 초원을 이룬 그 편안하게 사람을 반기는 노년기의 산 경치는 그 위에 누워 잠들고 싶은 휴양지처럼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