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안중근, 그 위대한 이름
(1)
자루비노항을 떠난 버스가 벌판뿐인 평원지대를 얼마나 달렸을까? 차창에 어리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며 처음 도착한 곳은 그라스키노라는 한 작은 고을이었다. 아주 작은 면소재지 쯤 되어 보이는 곳이다.
<길가에 들어선 집들과 빈터에 주차된 차들>
< 관공서 건물 >
포장이 반쯤 된 넓은 도로를 따라 걸었다. 안내도 처음 가는 길인지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길가로는 수풀이 우거졌다. 큰 길에서 갈림길을 더듬어 한 곳에 이르니 우거진 수풀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부서진 건물의 흔적이 을씨년스런 곳에 비가 하나 섰다.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기념비였다. 저 건물의 어느 한 칸 방안에서 그는 무명지 하나를 잘랐다. 흥건히 흐르는 붉은 피를 받아 혈서를 썼을 그날을 생각함에 내 오만상이 찌프려지고 간이 쪼그라든다.
<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 기념탑 >
이토오 히로부미, 그는 이제까지 야만국으로 취급받던 일본을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청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겉으로는 독립시키는 듯하였다. 그러한 일본이 이제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김새가 얄궂어서 도저히 친할 수 없을 것 같은 또다른 침략 세력 러시아인들을 몰아내는 러일전쟁을 지원해 주면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양 평화(이토오의 동양평화론)를 약속한다. 드디어 고종황제는 일본군을 적극 지원하라는 훈령을 내리게 된다. 조선의 문명개화와 사회독립을 추구하던 사회지도층들마저 이토오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세계에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영웅'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었던 때였다.
러일 전쟁 때 우리 백성들은 당시 일본군의 군수물자와 짐을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날라주고, 토목공사에 자원해서 길을 닦아주었다. 특히 직접 전쟁의 무대가 된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의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정탐까지 돕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선전을 응원한다. 그러나 일본과 이토오는 종전 후, 바로 마수를 드러내게 되고 내정간섭을 시작하더니 을사조약까지 가게 된다. 그때까지 조선에서 동양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던 이토오를 바야흐로 선각자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보게 된 것이다, 이 일의 맨 앞에 선 사람이 바로 안중근 의사다. 그도 처음에는 이토오를 믿었다고 한다.
이토오가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 10월 하순경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동지들과 이토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는 당시 <대동공보>의 사장인 유진율이 가지고 있던 성능 좋은 7연발 권총을 구했다. 1909년 10월21일 안중근은 러시아 옷을 입고, 그 위에 반코트를 걸쳤다. 그리고는 일행과 함께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쯤, 하얼빈에서 이토를 쏘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체포당한다.
처형 한 시간 전 안중근 의사는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한다. “유해는 고국에 못 돌아가고 감옥묘지에 묻히게 될 것이다. 만약 너희들 손에 건네지면 하얼빈공원 인근에 묻었다가 고국에 묻어다오” 라고 했다. 교수형을 받은 안 의사의 시신은 가로로 된 송판의 침관(寢棺)에 담겼고 성당에서 마련한 십자가가 양편에 꽂혔다. 그러고서 찬 봄비 내리는 저녁 마차에 실려 감옥묘지로 간다.
묻힌 지 96년이 지났다 그리고 광복된 지 60년이 지났다. 아직도 궂은비 내리는 쓸쓸한 이역 하늘 아래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을 안 의사의 원혼은 언제 이 땅에 돌아오는가?. 그 동안 남북한에서 그의 유해 찾기가 꾸준히 벌어져 왔다. 그러나 그 현장이 개발되고 변형되어 아직 그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비장한 민족 역사의 한 장면이 이역의 우거진 수풀 속에 초라한 비석으로 섰다. 그 위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의사의 자취를 더듬는 나그네의 마음도 핏방울처럼 탄다.
(2)
만약 그 때 이토오가 부상만 당하고 안 의사만 잡혔다면 사태는 어찌되었을까? 대한 제국안의 친일론자와 이토오 숭배자들은 안 의사를 욕하고 이토오의 병문안을 갔을 것이다. 이미 기울어진 국운이요 외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세력은 일본뿐이니 이토오가 일본으로 가서는 안 되고 한양으로 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선각자들과 애국지사들은 이토오를 아주 죽여야 한다면서 저들에 대항하여 일어났을 것이다.
백 년이 지난 오늘은 어떤가? 우리나라가 두 동강이로 분단된 역사의 당사국인 미국은(물론 가장 근본은 우리 탓이지만) 이 땅에서 자유수호라는 명분 아래 우리를 도왔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우리를 위하여서만 여기 왔던가? 그들은 우리를 속국 아닌 속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시작정통제권을 우리에게 주겠다는 데도 그러면 안 된다는 이 땅의 숭미 사대주의의 주장에 정말 아연해지지 않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예 우리가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자주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오직 미국이 우리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지만 현실만 생각한다면 새로운 미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사고방식대로 한다면 그 당시의 친일파의 생각이 옳고 바른 것이 된다. 어찌 이것이 기막힌 일이 아닌가? 언제나 우리는 홀로 역사의 주인이 될까? 약소국의 설움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이 쓸쓸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떼이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7. 우스리스크의 고려인들
우스리스크는 블라디에서 북쪽으로 112키로미터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쯤 걸린다. 작은 도시다. 도시는 평지에 있고 바둑판처럼 나 있는 도로는 너르다. 한국처럼 땅이 좁지 않으니까 도로가 좁을 일이 없다.
집터들도 또한 너르다. 집들의 외관은 허름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많고 시내에는 구소련 시대 때 지은 연립 주택들이나 아파트들로 우중충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신식 아파트들도 가끔 보인다. 가로수도 많고 키가 크고 자작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인구는 18만쯤 된다고 한다. 중국시장 안에 들어가니 조선족 연변 아줌마들의 식료품 가게가 많았다. 중앙 재래시장은 우리나라의 칸막이 상설시장처럼 보인다. 우스리스크에는 사범대학도 있다.
< 우스리스크 땅에는 과거 발해의 5경 12부 중 한 부가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 중국 영토가 되었다가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자 점차 한인의 이주가 시작되어 항일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 되었다. 우수리스크는 의병운동을 활발히 지원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 등이 총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 도시에는 최재형이 일제에 체포돼 순국하기 직전까지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가옥 2채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최재형 가옥 주변에는 191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었던 고려족중앙총회,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한국민의회 등의 사무실이 있었고 이곳이 1919년 3월 17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됐던 중요한 장소라고 현지인들은 설명한다. 최재형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정책이 본격화되자 1908년 이범윤 이휘종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 의병부대의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우수리스크 치체리나 거리 54번지에는 고려사범전문학교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학교는 1917년 고려족 중앙총회에서 거금을 들여 지었다. 지금 이 건물은 우수리스크 사범대학 물리수학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이렇게 유서 깊은 유적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곳을 볼 수가 없었다. ‘발해를 꿈꾸며’라는 이번 여행에서 이런 곳을 여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먼저 러시아 글자들 밑에 ‘아무르스끄야’ 라고 한글 문패가 적힌 입구를 지나 허름한 건물들이 보이는 넓은 마당을 지나 들어갔다. 조금을 더 들어가니 연해주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참관단을 환영하는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보였다. 밑에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단체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가 바로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이다. 대지 3000여평 건평 13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었으나 시설은 아주 허술하였다. 현재 이 기념관의 문화센터에서는 한국어교실,컴퓨터교실 ,부기교실, 도서실과 같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고려인만이 아니라 우수리스크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나왔다. 해송도 몇 그루가 있고 라일락도 있고 화단에는 낯익은 꽃들도 있다. 마당 저쪽에 건물 두 채가 보인다. 철골구조를 세우고 벽들이 다 쌓아져 올랐고 이제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기념관의 일부라고 한다. 그 기념관을 만드느라고 고려인들이 돈을 모으고 손닿는 대로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많지 않은 돈을 보탰다. 생각 같아서는 좀 많이 내고도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 속 핑계가 늘 이렇게 남을 위해서는 강하게 작용한다.
짧지 않는 긴 지난 세월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금의 이 허름한 건물에서 그들이 결속을 다진 것은? 조국을 떠나와 타국 하늘을 떠돌며 살아왔던 140년 그들의 한 많은 삶이 어떠했을까? 하기야 땅위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이 무수한 고생과 고통의 연속으로 편안할 날이 많지 않은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고려인들의 삶은 조국을 잃어버린 떠도는 삶이었기에 더욱 가열하였으리라.
<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공을 가지고 운동하는 학생들>
이 기념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우수리스크 제3학교가 있다 우리는 이 민족학교를 찾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한인의 높은 교육열은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학 중인데도 러시아 부교장이 안내를 하였다. 이 학교는 지난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고려인 한민족학교로 연방정부로부터 정식허가를 받아(국립학교) 수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국어는 필수이며 전통노래, 춤, 한국문화 등 한국 관련 과목이 포함된다. 학생은 742명이다.
< 한국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각종 자료들>
<고려인들로서 독립운동과 러시아 근대사에 이바지한 인물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어 이채롭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국립대학에 한국학대학이 설립되어 한국의 위상을 세우듯이 이 고려인 민족학교는 우스리스크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연해주에서 가장 고려인이 많다고 하는 우스리스크 에는 2-3만이 있다고 한다. 과거 고려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러시아 연해주는 민족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37년 강제이주로 당시 200여개가 되던 민족교육의 장은 모조리 사라지고 이제까지 고려인 사회의 우리글과 말, 그리고 문화 등 모든 것이 점점 색깔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민족 교육의 횃불이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민족 학교는 러시아 전체에 세 개 뿐 (모스크바에는 92년에 설립, 쌍테페테스부르크) 이라고 한다. 어디에 가서 살든 먼저 학교를 세운 우리 민족들이건만 러시아에 많은 동포들이 있는 것에 비하면 민족인 학교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세워진 이 학교의 개교식에서 우리말과 혼을 잃어가던 고려인들은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였을까? 그러나 민족학교에는 교실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 시설도 미흡하며 한국어교사와 교재가 부족하여 3부제 수업을 하고 토요일에도 수업을 해야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이 고려인 사회에서 국적이 없어 또 다시 걸음을 돌려야 하는 이들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교육은 꿈도 못 꾸는 가난한 아이들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한국어 교습을 돕는 자료들>
학교 내부를 둘러보았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과 구 소련시절에 사회 국가 발전에 이바지했던 조상들의 사진과 업적을 기리는 역사관(위의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조국의 모습을 알리는 홍보관의 자료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또한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언어교재와 학습자료들도 보았다. 이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인 학생도 조금 있다고 한다.
< 학생들의 그림 작품 >
< 삼성 컴퓨터가 보이는 교실 >
조용히 교사들과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참 아쉬웠다. 이렇게 나마라도 훑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 구경군의 처지로서는 다행이었다. 안내를 하는 러시아인 여자 부교장은 물론이고 고려인 교사가 몇 있었지만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는 초중고가 병설되어 있는데 11학년제라고 한다. 저학년에서는 인성교육을 중시한다고 한다. 서구나라들의 교육 제도와 같아 보였지만 인성교육과 지식교육을 병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뒷줄 중앙 빨간 옷이 안내원, 그 오른쪽이 부교장 그 옆이 교사이며 나머지는 여행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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