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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르바트 거리에서

저 언덕 넘어 2019. 2. 10. 09:20


      1 아르바트 거리에서


   우리는 크레믈린 궁전을 나왔다. 뭉게구름이 유난히많이 일고 있는 저편 하늘 아래  육중하게 자리한 여러 건물들도 함께 멀어져 간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온다.



 

  저 멀리 크레믈린궁 안에 자리한 수많은 사원들의 첨탑이 그 큰키를 자랑하며 휩쓸려 오가는 관광객들을 마중하듯 배웅하듯 거인처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다.



   크레믈린 광장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아르바트 거리가 있다. 아래 건물 앞에 둥근 조형물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아르바트 거리를 알리응 상징물이다.  그 건물에  '아르바트 홀'  '아르바트 비어'  '아르바트 그릴'이라는 영문자로 쓰인 간판을 볼 수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여기서 시작 된다.

  모스크바 지하철 아르바트스코-포크롭스카야선 아르바츠카야 역과 스몰렌스카야 역 사이 구간이다. '구 아르바트'와 '신 아르바트'로 나뉘는데 신 아르바트 거리는 전형적인 현대 유럽식으로 바뀌었다. 인기가 더 많은  구 아르바트거리는 옛날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본 것은 신아드바트거리이다.
 최근 들어서는 모스크바의 유명 관광지가 되면서 과거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아르바트 거리의 역사를 알아보자.

  이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15세기 무렵이라고 하는데 그 역사나 어원 등에 대해서는 정설은 없다고 한다.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아르바트는 '교외' '외곽'의 뜻이라고 한다.

 

  15-16세기 모스크바 근처로  크림반도의 타타르족들이 쳐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부터 중요한 교역로로 등장한 이곳은 처음에는 공예장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상업지역으로 발달한 이곳은 18세기에는 귀족들의 최고의 거주지가 되었다 한다.


  그리고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점령하여 페허가 되었기도 했으나 그 뒤에는 소귀족이나 예술가 학자들이 많이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구소련 때는 고위관료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 뒤 도시의 변화로 차들이 통행금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차차 문화 예술의 거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곳이 으레 그렇듯 카페나 식당 그념품 가게 등이 많다. 그런데 흔히 볼 수 있는 피에로로 단장한 행위예술가나  거리의 악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한산하다. 한두 군데 거리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주는 모습이 가끔 보이고 기성그림을 파는 화상들과 헌책방 가게, 유명한 러시아 인형 마뜨료스키 등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거리의 곳곳엔 맥도날도나 스타벅스 긴핀들도 눈에 띄고 우리는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아픈 다리를  잠깐 쉬었다.








   한곳에 이르니 음유시인 '블랏 아쿠자바'의 조각상이 보인다.  우울한 얼굴에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좀 처량하게 조각되어 있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루지아의 뿌리를 가진 시인이다. 200여곡의 노래를 작곡하여 본인이 부른 싱어송 라이터로서.1950-80년대의 그의 노래가 유명하다.

  스탈린을 비판하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연민 동정 슬픔등을 버무려 노래한 대중시인. 그의 작품들은 출판금지되어 입에서 입으로 녹음 테이프로 전해지다가 80년대 이후에 출판된다.  문득 안치환이 생각난다. 그래도 안치환은 그에 비하면 시대를 더 잘 만난 가수다.




  여기 보이는 것은 이상한 가건물 같은 것 같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하니 건물 신축공사를 하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아마 여기도 대형 업체 같은 것이 헌 건물을 사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것 같은 것이 아닐까?   대자본이 소자본을 점령하는 소위 젠트리 피케이션 같은 현상이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돈 없는 자들이여! 자본의 파도에 휩쓸려 힘없이 쓸려다니는  가난한 자들이여....



   한 곳이 이르니 1인 시위를 하는 모양인데 내용을 알 수가 있나? 안내는 어디 두고 나는 이렇게 혼자 해매는 것일까? 키릴문자는 한 자도 모르니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문맹인의 심사를 조금은 알 것 같다.








        2.세계적 시인 푸슈킨



http://blog.daum.net/wongis/7086325 위 사진




위의 집은 푸시킨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푸시킨이 신혼초에 살았다고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알렉산드르 푸시킨-



<푸시킨은 러시아문학을 푸시킨 이전과 푸시킨 이후로 나눈다는 평을 받는 러시아문학의 아버지, 또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근대 100년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러시아 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이 대시인은 어릴 때부터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우수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제도와 전제정치를 반대하는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백과사전 등에서 인용


 이 위대한 시인의 죽음에 관한 일화가 있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나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총상으로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는....






푸시킨의 신혼집 맞은편엔 푸시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챠로바의 동상이 있다(위 사진). 그들은 여느 부부들처럼 손을 꼭 잡고 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푸시킨의 손 위에 아내의 손이 닿을 듯 살짝 얹혀 있기만 하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동상을 만든 그 조각가의 마음을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예술가의 뛰어난 감성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작품에 긴 여운을 남기고 우리가 그 작품을 오래 오래 기억하게 한다.



역사적 인물사이에서 사진 한판 찍는 여유를 누리는 관광객들


삭막한 도회의 건물사이 담장을 오르는 담쟁이 덩굴의 푸른 손들에서 힘찬 생명력을 느낀다.


       3. 전설적 록 가수 빅토르 최에 대한 기억


  출처: https://2kcountries.tistory.com/255

 

  이건  우리가  오늘날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의 초상이다. 내가 아르바트거리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난 이 젊은 이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정보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 기행문을 쓰려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찾던 중 그가 이곳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당황하였다.

    사실 나는 그전에 지면을 통해서 빅토르 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깊이 알지 못했으므로 러시아 여행 내내 그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이곳에서조차 그것을 몰랐으니 참으로 안타까웠던 일이었다. 다른 이들의 자료에서 인용하여 모스크바를 찾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아르바트 거리 한 곳 건물 37번 벽에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팬들을 위한 낙서용 벽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я)'이  있다는 것이다.


http://blog.daum.net/yoji88/2201에서 인용  



그러면 빅토르 최에 대한 기록을 보자.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21일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로 이민하신 고려인 2세이고 어머니가 러시아사람이었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보다는 교사였던 어머니가  빅토르 최의 능력과 자질을 키우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 빅토르 최는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해 아름다운 선율과 자유분방한 음악을 선보여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빅토르 최는 1990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관중은 공식 집계로 62000여명에 달했다. >

(국민일보 기사중에서 )http://blog.daum.net/yoji88/2201


  <록음악을 서구의 퇴폐문화로 치부하던 구소련 시절에 자유를 갈망하는 반체제적 노래를 발표했는데, 러시아 대중들로부터 워낙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터라 당국에서도 눈엣가시었던 그를 그냥 놔두었다고 한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차를 타고 낚시 여행을 가다 버스와 충돌해 즉사했다. 향년 28세. 그의 죽음에 KGB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러시아 록의 선구자였으며 살아생전에도 입지전적 인물였으며, 그가 죽은 뒤 그 충격으로 투신하는 사람도 여럿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상실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사후 30년이 다 되도록 러시아 음악계의 큰별로 칭송받고 있는 전세계급 수퍼스타이다>


 그 초이 벽에는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바로 이날 아르바트 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는 문구가 검은색으로 쓰여졌으며, 그 아래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곳은 팬들의 성지가 되었는데, 그 벽 아래에 놓인 재떨이에 불을 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이다

위 https://j-travelog.tistory.com/488 에서 인용 재구성


   한편 그의 아버지나라인 카자흐스탄에도 빅토르 최를 추모하여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아래) 그가 얼마나고려인으로서 러시아에서 그 명성을 구가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https://2kcountries.tistory.com/255에서 인용



파일:external/rockcult.ru/victor-tsoi.jpg

                                         위키 백과에서 인용한 최의 모습


   지난 2018년 빅토르 초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토가 러시아에서 제작,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출품되었다.


  당시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는 지금도 러시아의 록가수 중에서는 아직까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곽  보고슬로프스코예 묘소에는 무보수 묘지기를 자처하는 극성 팬들을 늘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 거리의 건물 외벽 곳곳에서도 빅토르 최나 악단 키노와 관련된 그래피티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아버지 로베르트 최는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이후 가난하게 살다 2010년경 병원 수술비 문제로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후원을 위해 러시아 TV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엄청난 후원금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서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전체주의 사회의 탄압 속에서 이 정도로 정제되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는 극히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이 만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없었기 때문에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위에도 언급한 전설의 음유시인이자 배우였던 비소츠키나, 프리 재즈를 소련에 도입하고 꾸준히 발전시킨 재즈 뮤지션인 뱌체슬라프 가넬린 등과 함께 소련 반체제 음악인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고려인 3세였다.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일하던 고려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최(한국어 이름 최동열)였고, 어머니는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키예프인(현 우크라이나) 발렌티나 바실레브나 구세프였다.

  아버지의 본관은 원주 최씨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증조할아버지 최용남(1893~1917) 씨가 함경북도 성진시(현 김책시) 출신이었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같은 고려인 여성이었던 안나 바실레브나 유가이(1896~1985)와 결혼해 빅토르의 할아버지인 막심 페트로비치 최(한국명 최승준, 1914~1985)가 출생했다고 한다. 이후 1937년에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며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갔고 거기서 나제즈다 김(한국명 김혜정, 1917~2001)과 결혼해 빅토르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최(한국명 최동열, 1938~ )가 출생했다.


     (위키 백과의 내용에서 재구성)


   나는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다. 동영상에서 보이는 청중들의 환호와 열광하는 모습에 비해 그의 노래는 대체로 톤이 굵고 차분한 것들이 많았으나. 스케일이 크고 깊이가 있고 조용하게 내면으로 파고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큰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그를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나라 잃고 떠돌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방황하면서도 한시도 조국에 대한 동경과 향수로 지냈을 그의 선대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간직한 소수민족의 아들로서 러시아인들로부터 차별도 분명히 받았을 그의 뼈저린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내 아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가 우울하고 반항적이었던 것은 그의 선조때부터 받은 고국의 국권상실과 가난으로 인한 국경 탈출과 거기서 얻은 고난과 아픔, 끝내 중앙아시아로 내팽겨쳐진 민족의 비애,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러시아까지 가서 어려운 삶을 살면서 겪은그 고초가 그의 유전자 속에서 각인되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라는 데 대한 아픈 각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도 그렇다. 당시의 어두운 시대적 배경과 폭압적인 정권이 소수민족인 그의 성공과 인기가 젊은이들의 불만을 부채질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를 의도적으로 죽게 했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소수민족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의 신분이 러시아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을까? 또한 그의 아내가 시신확인을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의문에 앃여서 묻혔다는 점 때문이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  데뷔 겨우 십년도 안되어서도 큰 결실을 거두었지만, 그의 성공이 더 큰 빛을 보기도 전인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에 요절한 그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내 간절한 기도와 그 억울한 영혼에 대한 진혼사를 바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윤도현도 불렀다는 최의 '혈액형'의 가사를 한 번 보자.






Группа крови[그루빠 끄로비] -알송의 가사 지원에서 박토채
혈액형

1절.
Теплое место, но улицы ждут [쬬쁠라예 몌스따, 노 울리쯰 쥐둣]
따뜻한 곳, 그러나 거리는 기다린다.
Отпечатков наших ног. [앗삐차꼬프 브 나쉬흐 녹]
우리의 발자국을.
Звездная пыль - на сапогах. [즈뵤즈드나야 쁼-나 싸빠가흐]
구두 위에는 별의 먼지.
Мягкое кресло, клетчатый плед, [먁까예 끄례슬라, 끌롓차띄 쁠롓]
푹신한 안락의자, 체크무늬의 커버
Не нажатый вовремя курок. [녜 나좌띄 바브례먀 꾸록]
때맞춰 당겨지지 못한 방아쇠.
Солнечный день - в ослепительных снах. [쏘니치늬 젠-바슬례삐쩰늬흐 스나흐]
찬란한 꿈속의 햇볕 내리쬐는 날

[후렴]
Группа крови - на рукаве, [그루빠 끄로비-나 루까볘]
소매위에는 혈액형
Мой порядковый номер - на рукаве, [모이 빠럇꼬븨 노미르-나 루까베]
소매위에는 나의 군번(순번?).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в бою, пожелай мне: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바유, 빠줼라이 므녜~]
싸움에서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나를 위해 빌어다오.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빠줼라이 므녜~우다치]
나의 승리를,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2절.
И есть чем платить, но я не хочу [이 예시찌 쳄 쁠라찌찌, 노 야 니 하추]
값을 치를 것(수단)은 있지만,
Победы любой ценой. [빠볘듸 류보이 쩨노이]
나는 값싼 승리따윈 원치 않는다.
Я никому не хочу ставить ногу на грудь. [야 니까무 니 하추 스따비찌 노구 나 그루찌]
나는 누구의 가슴도 짓밟고싶지 않다.
Я хотел бы остаться с тобой, [야 하쩰 븨 아스땃짜 쓰 따보이]
나는 너와 함께 남기를 원했다.
Просто остаться с тобой, [쁘로스따 아스땃짜 쓰 따보이]
단지 너와 함께 남기를.
Но высокая в небе звезда зовет меня в путь. [노 븨쏘까야 녜볘 즈볘즈다 자뵷 미냐 프 뿌찌]
그러나 하늘의 높은 별은 나를 길로 부른다.

[후렴]
Группа крови - на рукаве, [그루빠 끄로비-나 루까볘]
소매위에는 혈액형
Мой порядковый номер - на рукаве, [모이 빠럇꼬븨 노미르-나 루까베]
소매위에는 나의 군번(순번?).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в бою, пожелай мне: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바유, 빠줼라이 므녜~]
싸움에서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나를 위해 빌어다오.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빠줼라이 므녜~우다치]
나의 승리를,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http://cafe.daum.net/zipseal/9Ms3/애서 가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