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러시아(연해주)기행문

16, 거기 내가 만난 사람들

저 언덕 넘어 2006. 11. 8. 02:31
 

 


① 올랴

 

  올랴는 대입을 준비하고 있는 처녀다. 하바에서 하루 동안 우리 안내를 맡았다. 언뜻 보면 한국아이 같다. 한국어를 너무 잘 한다. 그의 어머니는 고려인이고 아버지는 러시아인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면 눈이 파란 벽안의 소녀일 뿐 쌍거풀이야 거의 다 있으니 러시아인처럼 키도 크지 않다. 머리카락이 까맣고 누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까.

 

  앞으로 한국에 있는 대학 -그녀는 스카이 대학까지 알고 있다 - 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한국어를 전공하여  번역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어머니가 한국어를 알면 얼마나 알까? 그녀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연속극을 보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데 일상어를 우리와 막힘없이 나누고 있다. 가을에 어학 시험이 있는데 성적이 아주 좋으면 스카이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도 한 번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인천공항이 얼마나 으리으리하고 큰 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또 서울은 얼마나 크던지, 서울의 휘황찬란한 야경에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한국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아마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년 쯤 서울의 어느 좋은 대학에 합격할 것 같다. 성격도 적극적이고 사교성도 있었다. 수수하게 차린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어가 얼마나 능숙한지 나나이촌을 가면서 그 민족에 얽힌 민화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유창하게 해 나갔다.

 

내가 다시 하바에 갈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서 다시 올랴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올랴 너는 한껏 푸른 꿈을 펼칠 수 있는 나이다. 그런 시절에 세상일 너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은 꿈을 지워버려야 했던 내 젊은 날을 생각한다.


② 장은주


  장은주도 하바에서 우리를 안내한 학생이다. 그는 선교일로 사할린에 갔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선교활동은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일이다. 종교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선교 또는 포교활동이다. 연전에 이라크에서 비참하게 죽은 김선일씨도 사실은 선교활동에 희생된 것이다. 이런 것을 순교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인들은 순교를 그 어떤 죽음보다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은주는 사할린에서 일이 잘 되지 않았는지 이곳 하바로 왔다. 여기서 선교할동을 하고 있다. 은주는 참 기특한 쳐녀로 보인다. 그는 우리들한테 자기를 소개하였다. 비록 지금은 미미한 존재이지만 앞으로 러시아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지금은 많이 뒤떨어진 나라지만 자기한테는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교민회에서 한국의 사업가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자기 회사에 일을 해 달라는 요청도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당차고 역동적인 힘까지 느낄 수 있었다. 보는 사람들한테도 어떤 힘을 느끼게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진취성이 엿보였다. 정말로 믿음직해 보였다. 20년 뒤에는 여러분 앞에 성공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겠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수 만 명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정말 한심스러운 현상이다. 요새 아이들은 너무 안이한 생활자세를 가지고 있다. 어려움에 도전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③ 연변 동포 김씨

 

  이 분은 새동춘호에서 일하는 갑판원이다. 내가 밤에 선실에서 나와 바람을 쐬는데 승무원 복장을 하고 있는 김씨를 만났다. 여행에서는 현지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한 시간을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씨는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다. 많은 돈을 들여서 승무원으로 취직한 것 같았다. 중국에서보다는 벌이가 훨씬 좋은 것 같이 보였다. 배에서 승선하고 하선하는 생활이고 집에도 자주 가지 못하지만 지금의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어 보였다.

 

  그는 나를 동년배쯤으로 본 것 같았다. 처음에 나도 그를 그렇게 보았다. 그는 이미 나처럼 초로의 늙은이였다. 허리도 조금 굽었다. 사실은 그는 57년생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보다는 십 년 위라고 말하자 그는 놀랐다고 한다. 그가 놀란 것만큼 나도 상당히 놀랐다. 그렇다. 생활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조로현상이 나타난다. 60년대에는  우리도 그랬다. 마흔을 넘으면 벌써 허리가 굽어서 노인 행색을 했으니까….

 

  연변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되고 서구식 자본주의 물결이 홍수처럼 휩쓸었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회로 나가고 외국으로 나간다. 촌에는 늙은이들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은 아직 기계화되지 못하고 있다. 손으로 모를 심는다고 하며 기계로 모를 심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고 한다. 모두 더 잘 살기 위해서 돈을 찾아 어디든 떠나가고 돈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처녀들은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할 꿈에 한껏 바람이 들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혼이 많이 생기고 가정이 깨지는 수도 많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꿈으로 가득하다보니 현실에서 악착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왕창 돈을 버는 헛꿈을 꾸는 일이 많다고 한다. 농경사회의 미덕은 자본의 바람 앞에 점령지의 성곽처럼 무너져 간다.

  자기는 한국의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굴리는 일이 꿈인데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또 명절 때 귀향하는 고속도로의 자가용의 물결이 신기하다고도 하였다. 그네들은 우리의 70년대 초처럼 돈을 지갑에 많이 가진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도 그때 그런 적이 있다. 불룩한 지갑을 열어 돈을 헤아리는 것을 보면 꿈속처럼 희한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고 혹 돈뭉치가 있으면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보이면서 자랑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니까.

 

  또 한국 사람은 한 가지씩 전문 기술을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선반이면 선반, 용접이면 용접 기타 한 가지씩 기술을 가진다는 것. 우리가 기능 올림픽에 참가해서 세계를 놀라게 한다면서 홍보하고 선전하던 때의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돈을 많이 아낀다고 하였다. 술을 먹어도 연번사람들은 실컷 먹는데 한국인은 딱 먹을 만큼 먹고  일어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돈을 아끼지 않으면 못 살아간다고 하자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냥 돈을 아낀다고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먹어보는 닭고기나 쇠고기는 맛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양계장 이야기며 돼지 소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두고 영양제 항생제 먹여가면서 키우는 이야기를 하자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 옛날 우리 농촌처럼 닭 몇 마리 키우고 돼지 한 마리 키우던 이야기밖에 몰랐다. 요새 우리나라 삼계탕 맛이 어디 맛이 있는가? 나는 닭고기를 먹을 때 사료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출국 전에 전화권을 한 장 샀는데 러시아에서는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배에서 다시 김씨를 만났다. 내가 이것을  드릴 테니까 긴요하게 쓰라고 하였다. 처음에 자기는 러시아에 전화할 일이 없으니 필요 없다고 하였다. 혹시 승무원 중에 쓸 사람이 있을 테니까 선물로 주라고 하였더니 받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나를 만났을 때 자기는 정말 필요 없다면서 나한테 돌려주었다. 나는 모처럼 만난 동포에게 준 선물인데 그는 무척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도로 받긴 했으나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자꾸 캐물을 수도 없었다.

 

  아마도 김씨는 내가 준 그 전화권이 무척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난들 만 오천 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았을까만 처음 만난 동포에 대한 정으로 주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으나 그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서로 체제나 문화가 다른 사회에서 살아와서 그럴까? 아니면 남의 나라에 온 그들이 지켜야할 어떤 행동수칙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상당히 기분을 잡쳐버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닳은 우리와 아직도 돈에 그렇게 노예가 되지 않은 사회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니 또 하나 배운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같으면 웬 공짜냐 하고 쾌재를 불렀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도 찜찜하다. 이제는 다시는 못 만날 우리의 핏줄인데 말이다. 김 정덕씨한테 웬가 빚진 마음이 든다.


④ 북한 노동자 아무개씨

  하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북한 노동자 두 사람을 만났다. 얼굴이야 우리와 같지만 좀 왜소해 보이고 행색이 초라하였다. 우리는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들도 우리를 반겼다. 안내의 말로는 일당 1200원을 받고 일한다고 하였다. 그럴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부러 저만큼 가는 그들한테 따라가서 물었다. 국내에서 일하는 것보다 얼마만큼 더 벌 수 있느냐고? 수입을 묻는 것은 실례지만 그렇게 물어볼 수는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우리는 애국심으로 일할 뿐입니다” 였다.


  참으로 이외의 답에 나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아마 그는 나의 질문을 받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팔자가 좋아 놀러 다니는 남조선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 외국까지 와서 노동일을 해야 하는 그로서는 남조선사람들이 관광하는 꼴을 보고 배가 많이 아프기도 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남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하지 않은 아주 생각이 얕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애국심을 들먹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들은 외국까지 조국을 위하여 일하러온 노동자이며 노동영웅이 되기 위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받들어야 하는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도 어쩌면 자기들의 처지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이렇게도 생각이 다른 한민족의 불행한 사실 앞에 나는 그만 슬플 뿐이었다.


⑤ 극동대 교수 아무개 여사

  우리가 그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유적지를 보고 점심을 먹고 버스를 기다리던 중국인 호텔 마당에서 우리는 그녀와 만났다. 러시아인들이 지나다니는 이국에서 만난 우리를 닮은 그 여자분은 블라디의 유명한 극동대 한국어과 교수라고 자랑하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려인이고 오십대 초반의 수수하고 마음이 퍽 좋아보였고 입은 옷도 우리들의 이웃 아줌마 차림이다. 그는 훈춘에서 오는 중국인 교수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통관절차가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다. 벌써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불라디에서 우리를 실으러 오는 버스가 오다가 중간에서 펑크가 나 몇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하던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니까 그이의 할아버지 때의 이야기가 된다. 내가 책에서 본 그 움막집이나 헛간에서 살던 이야기를 조금 꺼내었을 때 그녀는 ‘사람 사는 것이 다 고생 아니요’ 며 말꼬리를 돌렸다. 정말로 말 못할 수난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도 익히 들었을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고국의 후손들로부터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조상들이 겪었을 그 아픈 역사를 돌이키며 마음 한 구석이 쓰려왔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화제가 끊긴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그렇게 나빠지지도 않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지금 이렇게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⑥ 농업 경영인 엄 태원 선생


  돌아오는 길 자루비노항에서 우리는 또 그 예의 시간이 많이도 걸리는 통관절차를 기다려야 했다. 많은 손님들이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내 바로 건너편에 한국인 부부가 나란히 많은 짐을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다. 또 나는 그들한테 말을 걸었다. 그들도 무료하던 터라 긴 시간을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는 51세다. 벌써 육 년 전에 우스리스크로 가서 농업을 하기 시작했다. 큰 기업농이다. 임대료가 3000평에 1달라이니 그저 오라는 것이다. 하기야 황무지로 노는 땅이 지천이니 찾아오는 것만도 고마울 일이다. 품삯은 월 12만원이다. 중국에서 종자와 농약과 비료를 사온다. 한국보다 훨씬 더 싸다. 임대 받은 땅을 휴경하면서 돌려짓기를 한다. 일은 거의 기계로 한다. 일 년에 상당한 수입을 올린다.

  4월이 되어 농사를 시작해 10월까지 한 6개월 동안 농사를 짓는다. 감자 콩 배추를 주로 한다. 아득히 너른 배추밭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침에 점심밥을 싸서 차를 타고 나가서 들까지 갔다가 오면 하루가 끝난다. 거의 평원인데도 밭의 경계지역을 다 볼 수 없다고 한다. 감자 캐는 데만도 한 달이 걸린다고 하니까…. 이 지역은 강수량이 풍부하다. 태풍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백야현상으로 여름의 일조량이 너무 풍부하다. 그러니 그야말로 수확량이 많다고 한다. 거기다가 자국민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악착같이 돈을 벌겠다는 의욕도 없고 더욱이 이농 현상으로 농촌은 비어있고 식량은 거의 전부를 이웃나라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그러나 식료품값은 우리나라와 거의 맞먹는다. 그래서 정말로 수익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는 그냥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니었다. 일찍이 세계로 눈을 떠 각국을 순례하면서 마침내 러시아가 자기가 살 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도 농대를 나온 것 같이 보였다. 또 그는 학식도 풍부하고 말씨도 유식해 보였다. 강단이 있어 보였고 지사적인 풍모도 엿보였다. 얼굴은 약간 그을려 있을 뿐 준수한 외모를 지닌 분이었다. 그런 분을 만나 명함까지 얻었으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나는 러시아의 그 너른 초원과 능선이 편안한 노년기의 산하에 반하고 있던  차에 그의 말을 듣고는 내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나도 여기 와서 한 십년을 농사나 짓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나는 또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농촌으로 들어가는 것을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농촌 총각들은 가난해서 한국꿈을 꾸는 이국의 처녀들에게 장가를 들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말이다. 그리고 수십 대 수백 대 일의 공무원 시험에 목을 걸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얼마 전에 내가 브라질에서 온 교포 한 사람을 만났다. 거기에는 일본인들이 비행기로 농사를 지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고 한다. 우리 교포들은 처음에는 농사를 짓다가도 모두 써비스업으로 바꾼다고 했다. 지금 뉴질랜드에는 농업인구가 늘고 젊은이들이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저 엄태원 선생처럼 러시아로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⑦ 그리고 나


  여행자는 보이는 모든 것들에 신기함을 느끼게 되고  궁금증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만 하게 되면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안달하게 된다. 그러다가 보니 만나는 사람들한테 덤벼들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럴 기회만 노린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번 여행에서도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실수를 하게 된 점이 있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말을 조심하여야 한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격의 없이 대하려고 한 것 같았다. 아니 요새 사람들은 너무 개인적이며 자기만의 껍데기를 두껍게 두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들에게 정보를 얻자는 생각만 앞서 너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이렇게 되고 보니 신문 기자의 고충을 알 것 같다. 사건 현장에서 일의 전말을 알자면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때로 기자들은 취재원한테서 욕설을 얻어먹으면서  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가시로 남아 오래 잊히지 않는다면 나는 잘못된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아 그들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사과라도 하련마는….


  또 하나가 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 각자는 한국인을 대표하게 된다. 한 한국인의 행동이나 말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이라난 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한국인에 대한 의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개별적인 나이지만 결국은 한국인의 상징으로 그들에게는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