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검은 옷을 드리우고 구걸하는 여인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데 군데군데 거지들이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검은 가운 같은 옷을 드리우고 앉아서 우는 소리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이방의 관광객에게 동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로마의 관광지들에서도 주저앉아 동정을 청하는 그들을 보았다. 바울 성당 앞에서는 여인이 그의 딸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사회 복지가 그렇게 잘 되어있다는 나라에 웬 거지가 자주 눈에 띄느냐고 물었을 때, 안내원은 집시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걸하여 번 돈으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정말 말만 들었던 집시들이다. 집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나는 자료들을 찾아 아래와 같이 재구성하는 동안 매우 흥미를 느꼈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구걸하는 여인의 모습(로마 바울 성당 앞)
<중세 말 유럽에 이국적인 차림을 한 유랑자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헤미안’ 혹은 ‘이집트 사람’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떤 민족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한 외모, 외부의 공격을 거부하는 강렬한 눈빛, 마차를 타고 무리지어 다니며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유랑하는 습성을 가졌다. 멜랑콜리 가득한 음악과 신비로운 점술세계, 공동체 생활과 축제 등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워온 집시들…. 이들은 타고난 강한 근성과 체력 덕분에 16~18세기 동유럽 영주들의 용병으로 활약했는가 하면 탁월한 음악성을 인정받아 궁정음악가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위치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이 각박해지는 근세에 와서는 유럽인들이 집시를 대하는 태도 속에는 신비감 대신 의심이, 매혹 대신 불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집시들은 잇단 추방령과 정착화 정책, 독일 나치즘의 인종말살 정책 등 불행한 운명과 맞서 싸웠다. 물론 그들 중에는 일찍이 유럽사회에 동화되어 주류사회로 편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유럽 연합에서도 매년 수백만 유로를 집시문제 해결을 위해 지출하고 있다. 집시에 대한 투자는 주로 고용과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집시들은 정착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0.84%만이 중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취업이나 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90% 이상이 실업상태이며, 실업급여 등으로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알고 나니 집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 속에서도 집시는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처럼 떼로 몰려다니지 않는 점에서 집시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말이다. 현실이 사람을 아프게 하고 극도로 지치게 할 때 사람들은 그 현실로부터 떠나고자 한다. 현실을 벗어나 아득한 미지의 곳으로 떠나면 거기에는 나를 반겨줄 그 어떤 것이 기다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는 현실을 떠나보지만 나를 반기는 곳은 결국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그 현실의 구속으로 돌아온다. 이런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아예 현실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생활을 한다. 영원한 유랑인이 되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길 가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곳이 아무리 살기에 좋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낯익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면서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환경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영원한 방랑자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멋있는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정형화된 사회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 보헤미안이란 말을 쓴다. 여러분들도 언젠가 한 번은 그들처럼 방랑자의 흉내를 내어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들의 주위에서도 이러한 집시들은 더러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런 류의 인간형들은 많다. 나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행운유수처럼 흘러다니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제일 집시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코 한 곳에 정착하며 미련을 갖지 않고, 끊임없는 구도의 길을 밟는 운수승(雲水僧)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한 곳에 붙박여서 차꼬에 매인 죄인처럼 오도가도 못하는 우리 일상인들을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정형화된 사회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러한 사람들을 자기만의 가치기준에서 편향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영원한 자유혼을 가진 참다운 인간일지 모른다.
그리고 서구 여러나라들이 자기들 나라의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이들을 정착시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소수자로서 그들의 생활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정착인들이 자기들에게 보내는 경멸의 눈초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특한 사고와 고유한 문화를 전승하면서 살아가는 그들, 그들의 존재는 인류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다 쓴 뒤에 어떤 글에서 보았는데 이들 걸인들 중에는 근자에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유민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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