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기억 속 아득한 평원과 몽마르트 언덕
(1)
산이 많은 곳에서 살아온 내가 고등학교 수학 여행길에서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망망하게 펼쳐진 그 수평선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멀리 낮은 언덕들이 보일 뿐 끝없이 펼쳐지는 호남평야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 번 여행에서 보는 지평선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이란 육지를 등 뒤에 두고 앞면으로만 전개되는 것이고, 호남평야의 경우도 멀리는 산들이 보여 사방이 완전한 평원인 그런 경험과는 또 달랐다.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면 사방에 가로막힘이 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지지만 육지에서의 경험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는 평야지방은 그 지형이 시원한 느낌은 있지만 너무 단조로워서, 나는 사람이 사는 땅이란 역시 산들이 알맞게 배치된 곳이 풍광이 멋스럽고 좋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거의 사방에 막힘이 없는 프랑스 땅의 대평원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막힘이 없이 펼쳐지는 그 평원에서 안온한 평화를 느꼈고, 지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동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다에서 바라보이는 수평선은 그 휘어짐이 지평선보다는 더 급한 듯 보인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 그 멀리 어디쯤에서는 결국은 육지가 나타날 것이지만, 왠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평선까지 가득 찬 그 물들이 그 너머에 있을 낭떠러지로 흘러넘칠 것 같은 생각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내가 이 번에 보는 그 지평선에서는 그 너머에는 여기보다 더욱 아름다운 마을이나 세계가 펼쳐질 듯한 생각이 들었다.
(2)
프랑스 땅에 와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지평선을 보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초등학교 미술책에서 본 밀레의 그림 만종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배경으로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시각,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교회의 저녁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일어서서 기도하는 부부의 경건한 모습… 그 그림은 농촌에서 살고 있던 내 어린 감성에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명화라는 설명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지만 그 그림은 명화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우리세대로서 나는 거기서 지평선이란 것을 처음 보았던 셈이었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 본 파리 시내
사람은 열 살 전후에 경험한 일들이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아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술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선천적인 소질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하여튼 나는 어린 시절 밀레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나는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면서 그 언덕에 얽힌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화가들 생각으로 좀 들떠있었다. 해발 130미터쯤 된다는 이 언덕에서는 반경 68킬로까지 보인다고 한다. 파리 시내(해발 평균25미터)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멀리 에펠탑도 보인다.
이 언덕은 이미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그런 낭만적이고 전원적인 언덕은 아니었다. 수많은 계단이 층층으로 되어 매우 가팔랐다. 정상 부근에는 성당과 집들이 들어찼다. 정상에는 데르트르라는 광장이 있었고 주위에는 카페와 간이식당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광장 한가운데는 초상화 그리기를 권하는 거리의 화가들이 있다. 프랑스판 100년 전의 저잣거리 모습 그대로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서 한산하였다. 까페 안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포도주와 맥주를 마시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맥주를 한 잔 사 마셨다.
이 언덕에는 그 옛날 프랑스군과 프로시아군 사이의 전쟁이 끝난 뒤에 자유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적으로 전원적인 풍치를 이루었고, 또 이 언덕 꼭대기 근처에 물이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자연을 사랑하는 가난한 화가, 시인, 행위 예술가 들이 모여들게 되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에 고흐, 로트레크를 비롯한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인상파, 상징파, 입체파 미술의 발상지가 되었다고 한다.
평일에는 화가들은 물론 판토마임을 하는 아마추어 배우들도 있고 거리의 연주가들도 있다 한다, 특히 한여름의 몽마르트 언덕에는 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새벽 두세 시, 특히 주말인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이튿날 아침 4~5시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낭만스런 밤을 즐기는 이방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기야 낮보다는 밤이, 거기에 또 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사랑이 있어야 인간의 시간은 한껏 낭만으로 가득해지는 것이다.
데르트르 광장의 거리의 화가들
거기엔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걸어놓고 있었다. 내 눈에 덥석부리 수염이 야단스럽고 키가 임꺽정처럼 큰 화가의 그림이 확 들어왔다. 멀리 검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해변이 보이는 그림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어려운 흥정을 하여 그림 한 점을 샀다. 어릴 적 나의 뇌리에 가득한 밀레의 나라에 와서 밀레의 생가에는 가 볼 수 없었지만 밀레의 후예가 그린 그림 한 폭 산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것은 비록 유명 화가가 아닌 그림팔이 화가의 그림이지만 이 번 여행의 좋은 기념으로 삼을 만한,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 될 것이다.
'유럽4개국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하나님의 나라 바티칸 시국(市國)에 들어가다 (0) | 2006.11.17 |
---|---|
24. 고색창연한 거리의 로마 사람들 (0) | 2006.11.17 |
22. 평생을 선생으로 살면서 내린 결론 (0) | 2006.11.13 |
21 자유분방한 성 풍속도 (0) | 2006.11.13 |
20. 무시무시한 지하묘지에 들어가다 (0) | 2006.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