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
우리는 이제 곧 이탈리아를 떠나야 한다. 나는 조용한 틈에 안내원한테 물어 보았다.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에 대해서 아느냐고,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 전의 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언론에서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느꼈고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었다.
옛 로마의 나라 원형극장이 있는 나라 아름다운 나폴리의 나라 가극의 나라 피사의 사탑이 있는 나라 요새 와서 축구가 성한 나라 교황청이 있어 더욱 유명한 나라 돈이 없어 한 번도 외국을 가보지 못한 내가 어쩌면 영원히 가보지 못하고 죽을 나라 뭐 그렇다고 원통할 거야 없는 나라 참으로 먼 먼 나라 그 나라의 어느 한 구석에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이 있다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 그 곳까지 팔려간 한 조선인 노예의 후손들이 모여 만든 이태리 속의 작은 한국, 알비 마을이 있다네. 문득 거기 가보고 싶네 짚신 몇 켤레 삼아 어깨에 메고 걸어가고 싶네 바랑 속엔 잘 말린 대구포 하나 조선 대추 몇 낱 누룩 한 장 넣어 매고 떠나 가겠네 몇 년이나 걸어야 할까 가다가 쓰러지면 길가에 누워 자고 밥은 못 얻어먹으면 나무 열매라도 따서 먹으며 걸어가겠네 가서 안토니오 코레아의 무덤 찾아 한 사흘쯤 엎드려 있다가 오고 싶네.
<글밭12집 1990년>
나는 그 날 이후 ‘이탈리아’ 하면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생각에 빠지고는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 번 가 보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막연한 동경에 가까운 것이었고, 이탈리아를 간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 여행지에 이탈리아가 끼어있지 않은가! 내 마음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래서 현지에 가면 혹시나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이 기행문을 쓰려고 자료들을 뒤졌다.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
① <플랑드르의 유명한 화가 루벤스(1577-1640)가 1598년부터 이탈리아 로마에서 생활할 때 그린 그림이라고 짐작되는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의 모델이 된 남자가 있었다. 이 그림이 1983년에 런던의 경매장에서 세계 최고가인 32만 4천 파운드에 팔려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사람이 로마에 노예로 팔려온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연대로 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린 뒤 다시 이탈리아인에게 팔려 로마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후에 자유의 몸이 되어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이 이탈리아 남쪽 이탈리아 남부 카탄차로 인근 알비(Albi)시에서 모두 22가구 80여 명이 '코레아'라는 성씨로 살고 있다. 1990년 11월에 그 자손들이 대한민국 초청을 받고 찾아와 '조상의 나라에 와서 기쁘다'고 말하여 뉴스의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들의 유전자를 검사하였는데 몽고계의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난센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② <지난 연말 국내 언론은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ꡐ한국인 그림ꡑ으로 유명한 바로크 미술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1577~1640)의 드로잉 ꡐ조선 사람ꡑ(Korean Man)을 연이어 화제로 올렸다.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ꡐ루벤스-반 다이크 드로잉전 ꡑ(2003년 12월19일~2004년 2월8일)을 통해 미국 게티 미술관이 소장한 이 그림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면서 각종 미스터리들이 다시 제기됐기 때문이다.>
③ <부산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오랜 시간 자료를 수집했으며, 게티 미술관 인근의 UCLA를 택해 1년간 방문학자로 갈 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루벤스의 ꡐ조선 남자ꡑ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를 알비 코레아 씨들의 조상으로 단정짓는 것은 무리이며 절제되지 않은 민족주의가 낳은 신화라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 곽차섭 지음 / 푸른 역사)
④ <알비 마을은 1505년부터 스페인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데 스페인에도 코레아라는 성씨가 존재하므로 스페인의 코레아 씨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유럽의 ꡐ쿠리아(Curia)ꡑ라는 성씨가 우여곡절 끝에 개명해 코레아 씨가 됐을 수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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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정리하면 대개 이렇다. 루벤스가 그린 그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노예로 팔려간 안토니오 코레아가 맞다. 그러나 알비 마을의 알비 코레아씨들의 조상은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안토니오 코레아는 어디 있는가? 그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조선 청년 안토니오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들 앞으로 남은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은 숱한 내우외환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럴 때마다 숱한 백성들은 갖은 수난을 겪고 나라밖으로 흩어져 유민이 되어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의 설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숫자가 지금 수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련에서 살고 있는 까레이스키(고려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연해주에 살던 10만명에 이르는 우리 동포들이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한인들은 약간의 식량을 준비하여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행선지도 없고 탑승원도 누구인지 몰랐다. 현재까지 알려진 강제이주의 이유는 그들이 일본의 첩자 역할을 할 위험이 있는 적성 민족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송열차의 행렬은 다시 옮겨져 가족들은 흩어지고 이주 도중 번진 홍역과 천연두에 반이 넘는 어린 아이들이 죽어갔다. 1938년 봄까지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한인 중 60%는 다시 재이주를 한다. 작게는 도보로 20km 길게는 철도로 4,000km 까지 장사진을 이루어 영구 정착지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강제 이주에 불만을 나타내며 저항하던 수백 명이 체포 또는 죽음을 당했다.
사람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에는 겨울의 거센 흙바람만 불어왔다. 이들은 그 땅에서 해가 뜨면 벌판에서 일을 하고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불굴의 정신으로 다른 토양 다른 기후를 이겨내고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 … 까레이스끼들은 아직도 김치를 먹고, 아리랑을 기억하며, 한국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픈 향수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다.>
옛 소련이 무너진 뒤 그들은 이제 그 옛날 떠나간 그 고난의 길을 따라 연해주에 다시 돌아들 오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그런 꿈을 꾼다. 울라디보스토크를 가자. 그 땅에 가서 그 옛날 그들이 당한 수난의 자취를 살펴보자. 그리고 하바로프스크에서 그들이 탄 열차를 타고 며칠을 걸려 황량한 대륙을 가로질러 찾아가자. 한 맺힌 땅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자. 거기서 지금 한국꿈으로 가득하다는 동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자, 한 일년만이라도…. 멀지 않는 날 그 일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내가 평생을 국어교사로 지낸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나는 이 순간도 가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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