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지막 행선지 독일
(1) 독일까지
우리는 레오나르드 공항에서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반도의 등줄기인 아펜니노 산맥을 따라 올랐다. 반도의 북부 포강이 이룬 곡창 지대인 포평원 상공을 지나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 남부의 산록지대를 지났다. 그리고 유럽 최대의 환승 공항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에 이르렀다. 두 시간이나 흘렀을까? 이 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다. 이제 집 생각이 날 때도 되었으나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간다는 것은 늘 가슴 설레는 일이지 않던가. 워낙에 여행을 좋아하는 때문에 그런지, 이제 긴 나그네 생활도 길이 들어서 그런지 그렇게 피로하지도 않았다.
호텔에 들었는데 시설이 퍽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한국 손님도 없고 깨끗한 차림의 외국 손님들이 많았다. 나 같이 주머니가 얇은 서민들이야 이런 곳에 자주는 못 드나들 곳이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생각이 달라진다더니. 하물며 이런 곳도 하찮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어디 보통 사람들이 자기들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가난한 이가 부자를 욕할 것이 못되는 것이 그도 돈이 있다면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뀔 테니까 말이다(사실 이것은 부자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비장의 무기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이 어떻게 이렇게 딱 들어맞는고? 그러나 조상 대대로 서민으로 살아온 나는 이제 부자를 주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해 보는 생각일까? 아니 그래야만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정체성이 손상 받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마지막 밤,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고 하는 맥주를 마시기로 하였다. 좁은 실내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조선에서 마시는 맥주 맛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하기야 나는 맥주보다는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맥주의 참맛을 알 턱이 있나만….
한 무리의 외국인들은 자리가 없다. 서서 지껄이면서 마시다가 한식경을 머물다가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일행들만 남는다. 로마에서 우리 일행이 묵은 호텔에서는 종업원들이 일과 시간이 넘었다면서 빨리 마치라 해서 쫓겨 들어왔단다. 우리는 왜 술잔만 들면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니 왜 그러노? 그것은 넘쳐나는 힘 때문인가, 한인가, 자학인가, 낭만인가? 유전자 속에 면면히 흐르는 곰사람의 강인한 저력인가? 방에 들어와서 한국에서 가지고 간 남은 술을 마저 비웠다. 내가 유럽에 와서 얻어간 것은 많지만 남기고 간 것은 안동 소주병 몇 개와 마른안주를 싼 비닐 포장과 화장실에서 남겼으나 이제는 대서양과 지중해로 들어갔을 더러운 것들과 헤아릴 수도 없는 숱한 발자국들뿐인가?
(2) 하이델베르크 가는 길
프랑크푸르트 외곽지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프랑크푸르트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위치상 전모는 볼 수 없었다. 집들이 다른 나라들과 달랐는데 지붕들이 붉은 색깔을 띤 것이 많았다. 옛날집들이 많았으나 현대식 건축물도 많이 보였다. 멀리 지평선이 한껏 두꺼운 구름 아래 희뿌옇게 흐려 보였다. 오늘은 고성으로 유명하고 최고(最古)의 대학가로 이름난 하이델베르크로 간다. 버스를 타고 떠난다.
독일은 하루 일정이니 주로 들은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독일은 주변 나라들에 비하여 구경거리가 적다고 한다. 오랫동안 통일이 되지 않았고 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로마 스페인 프랑스 등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고, 근대에 이르러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했다. 독일은 지방분권이 잘 되어 인구 100만이상의 도시가 세 군데 일 뿐 50만이 넘는 도시가 많지 않다는 얘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서울처럼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올챙이떼처럼 모여서 산다는 것은 참 비극적인 일이다.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1930년경에 히틀러가 군수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속도제한은 없다. 화물차는 휴일에는 고속도로 이용을 할 수 없다고 한다. 혹 다니기도 하나 단속도 별로 않고 단속을 하지 않아도 잘 지킨다고 한다. 전철이나 지하철도 표를 잘 점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 걸리기만 하면 40유로(우리 돈 육만원 정도)의 벌금을 문다고 한다. 단속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지킨다고 하니 생활의 여유로움보다도 정직하고 순진한 국민성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할 만하단다. 그리고 고속도로는 옛날에 만든 것도 지금 것과 비교해도 별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규정상 버스는 100킬로 이상 달릴 수 없다.
그날은 잔뜩 날씨가 찌푸렸는데 그게 전형적인 독일 날씨라고 한다. 늘 음울하게 찌푸린 날씨 탓인지 독일말은 거친 느낌이 들고 살갑지 않게 들린다. 겨울에는 그렇게 춥지 않은 날씨지만 사계절 햇빛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서 휴가를 즐기고 어니서나 햇빛을 보면 바로 옷을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는데 이제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겠다. 흔히 우리는 남의 문화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올리는데 자기와 다른 남에 대하여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불쌍한 사람들…’ 하고 중얼거려본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밝고 환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실내생활을 주로 하고 사색과 독서를 즐긴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때문에 옛날부터 신학과 철학이 아주 발달되어 왔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철학 하면 독일 관념 철학을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런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프랑스 사람이 낙서를 하면 시가 되고 이탈리아 사람이 낙서를 하면 노래가 되고, 독일 사람이 낙서를 하면 철학이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 헤겔 칸트 피히테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마르쿠제 등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들이 떠오른다. <영국철학은 중용, 프랑스 철학은 명석, 독일철학의 문체에는 이상적인 점이 있으면서도 어둡고 깊은 정념이 서려있다고 한다.> 문화란 곧 환경의 산물이지 않던가?. 음악은 브람스 바하 헨델 베토벤 하이든 멘델스죤 슈만 같은 유명한 작곡가가 많고 지금은 성악을 배우러 이태리로 유학을 많이 간다고 한다. 미술과 조각은 크게 발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대학은 모든 자격 있는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국비로 무료 개방되어 있고 입학률은 30% 정도지만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유학생 수는 15만을 넘는데 우리 유학생은 삼천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2년 이상의 대학과정을 마친 뒤에 오는데 정말 실력이 있어야 한다. 35세 이상이 되어야 학위를 다 마칠 수 있어 무척 힘이 든다고 한다. 또 독일 학생들은 부모로부터 학업을 위한 생활비와 학자금의 보조를 받을 수 없을 때, 국가로부터 학자금 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 학자금은 정규교육기간 동안에는 반은 장학금의 형태로, 나머지 반은 무이자융자로 대출되며, 융자받은 금액은 일반적으로 졸업 후 5년 이내에 상환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삼대 경제대국이며 특산품은 자동차다. 벤츠, BMW, 지멘스 등은 다 사람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차도 더러 볼 수 있고 기아 광고도 보였다. 우리도 이젠 제법이다.
독일인들은 단순하고 고지식하다. 집은 자기가 손수 고친다. 신중하고 겁이 좀 많다. 역사적으로 늘 남한테 당하고 살아와서 불안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체구가 크다. 화장실의 소변기 높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키가 낮은 우리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소변기에 까치발로 소변을 보듯 불편하다. 내가 마음대로 보기로는 태음인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은 무뚝뚝한 편이다. 외식의 예를 들면 토요일 6시 똑같은 식당 똑 같은 자리에서 한다. 또 그들은 대체로 융통성이 없고 실수가 없다고 한다. 1000달러를 환전하려고 하면 한꺼번에는 안 바꾸어 준다고 한다. 꼭 500불씩을 두 번으로 나누어 주는데 우리가 볼 때는 너무 답답해 속이 터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반면 휴양지 같은 데서는 새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 고성방가를 하고 × 판 오분 전이 될 때도 있다고 하던 안내원의 말도 인상적이다. 음산한 날씨와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온 게르만의 후예들이라 그런가?
고속도로가의 빽빽한 숲들
길가로는 숲들이 많이 보였는데 여름이면 울창해서 대단할 것 같다. 독일은 남부지역이 산이 많은데 숲이 울창한 지역이 많아 흑림지대라고 불린다고 한다. 독일 청소년들은 말을 타고 활동하는 산림관리원이 되는 것을 상당히 멋있는 직업이라고 좋아한다는 말을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이들과는 너무 다르다. 고속도로에서는 속도 제한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운전대를 잡으면 대체로 순해지고 지킬 것은 다 잘 지키고 사고율은 낮다고 한다. 독일인들의 자신감을 이런 데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차들이 크고 좋은 차들이 많이 보였다.
눈으로는 이것저것 차창 밖을 유심히 보며 귀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로는 또 갖가지 생각을 한다. 한 시간 가량 달려 하이델베르크 가까이 온다. 들에는 보리맥주가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벼농사는 거의 안 하니 논을 볼 일은 없다. 옥수수밭이라든가 포도밭 같은 과수원이 있고 목초지로 비어 있는 땅이 많다. 농지들은 거의 평지에 있으니 우리네 들풍경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3) 하이델베르크에서
언덕위의 고성과 네카강 위의 카를테오 다리
하이델베르크는 산록 사이에 있고 멀리 평원이 보인다. 네카강이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데 흐름도 빠르고 물은 그래도 맑은 편이고 수량도 많아 보인다. 여기서 몇 십리를 거슬러 오르면 로렐라이 언덕이 나온다던가? 유람선들이 보인다.
집들은 평지와 산기슭에 있는데 붉은 색이나 짙은 고동색 지붕들이 많아 우중충해 보이기도 하고 중후한 느낌이 들었다. 시내는 길에 면한 곳은 3-4 층 정도의 건물들이 주로 있고 시청 광장 대학 성당들이 좁은 도심 안에 몰려 있다. 수 백 년이 된 옛날식 건물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니 자세히 알고 보면 구경거리가 너무 많은 도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다. 언뜻 보기에 현대적인 건물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중세의 유럽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화려한 느낌이 들었다.
태극기가 달린 한국인 식당
태극기가 걸린 식당 건물이 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심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좁은 길들을 보았는데 깨끗이 정돈된 인상을 준다. 독일에서 역사가 가장 긴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86년에 설립됐다. 독일에는 5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대학이 많다고 한다. 이 도시는 학문의 메카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나고 낭만적인 젊은이들의 도시다. 발랄한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이 도시의 곳곳이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인구가 17만의 도시이니 안동만한 아담한 전원도시다. 유학생들이 살 수 있는 방세가 한 달에 30만원쯤 한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을 다녀가는 여행객들이 가장 감명 깊고, 오래 기억에 남는 도시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와서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은 이번 여행 가운데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경력이 짧아 보이는 안내원의 잘못인 듯하였다. 하여튼 하이델베르크에는 오랜 역사의 전통을 느낄 수 있다. 고딕과 르네상스 및 바로크 양식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낸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다.
거대한 고성의 일부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찾아 간다. 밑으로는 강이 있고 산언덕에 있으니 요새다. 두껍고 두꺼운 높은 벽으로 이루어진 고성인데 내부는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벽의 두께가 7미터가 넘는 성문탑이 있고, 종탑 감옥탑 화약탑 군주분수대 궁성정원 사슴방목성호 등이 있다.
고성전망대 쪽에 오르니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인다. 왕은 그 높은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쯤으로 생각하는 가여운 백성들을 굽어보시며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충직한 신하들은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진 자는 그렇게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봉건시대 지배자들의 삶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고성이 아닐까?
엘리자베트문
고성 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술통관이었다.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주통이라던가? 사람을 강아지 크기에 비하면 이 술통은 큰 코끼리만 할까? 그곳을 나오니 엘리자베트문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이 고성의 주인이었던 한 왕이 그의 아내의 생일 선물로 하루 밤 사이에 몰래 세워 아내를 기쁘게 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요새는 연인들이 그 문 밑에서 사랑을 다짐하면 결혼으로 연결 된다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거기에 갔을 때는 한 부자 일본인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와서 그 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같은 초로들은 그 옛날 신혼시절을 생각하면서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일행들 중 좀 젊은 축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부유한 그 신랑신부의 축복을 빌어주기보다는 이유도 없는 시큰둥한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도 있었을 것이었다.
이 문의 일화에서 생각나는 게 있다. 사람 역사를 보면 겉으로는 여자가 남자의 하인인 듯하지만 실은 남자가 여자의 머슴노릇을 해왔다. 하룻밤 동안 ―물론 이것은 허구지만― 에 그런 성문을 만들었다면 그 사랑의 힘이 참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뒤집으면 사랑에 눈이 먼 남자의 엉뚱한 짓으로도 보여 좀 씁쓸해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꿈속에서라도 한 번쯤 백마 타고 찾아올 왕자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들으면 좀 섭섭해 할 일이지만 그것이 어찌 대장부 남자가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평소에 나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신부나 스님은 위대한 남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성을 내려와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카를테오다리에 이르렀다. 그 다리를 건너 철학자의 길이 있다고 하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거기에는 가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돌아와서 철학을 공부한 이동백 시인이 쓴 기행문을 읽었다. 그이는 우리보다 한 달 먼저 이곳을 다녀왔다. 마침 그 이야기가 실려 있어 여기에 싣는다.
<철학자의 길은 이 다리를 건너서 작은 포장로를 지나, 언덕바지로 난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이 골목길이 참 인상적이었다. 돌담이 쌓인 아주 좁은 길이었는데, 돌담에는 푸른 이끼와 돌버섯이 피어 있어 고색창연하였다. 이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만의 사색이 가능해질 것 같다.
숨이 차다 싶을 때, 철학자의 길이 나섰다. 철학자의 길은 평범했다. 오른쪽으로는 산을 끼고 왼쪽으로는 과일밭이다. 시선을 왼쪽으로 던지면, 바로 하이델베르그성이다. 바로 바라보이기 때문에 칼테오도르 다리에서 볼 때의 위엄은 사라지고 성은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선다.
이 길은 숱한 철학자와 시인이 거닐었던 길이다. 칸트가 걸었고, 헤겔이 걸었고, 하이데거, 야스퍼스가 걸었으며, 괴테가 걸었던 길이다. 칸트는 정확한 시간에 칼테오도르 다리를 건너 이 길을 걸으면서 정언(正言) 명법(命法)을 생각했을 것이고, 헤겔은 하이델베르그 연구실에서 이 길에 이르는 과정에서 변증법의 얼개를 얻어냈을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해법을 찾기 위하여 야스퍼스는 신을 데리고 이 길을 걸었을 것이지만, 괴테는 하이델베르그성을 바라보며 파우스트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눈발이 날린다. 철학자가 걸은 그 어느 날에도 오늘처럼 눈발이 날렸을까. 그 눈발도 흰색이었을까.> |
(4) 마지막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며
한국 손님에게 ‘당신은 할아버진가?, 오리지날 총각인가?’ 하며 한국말로 농담을 걸어와서 즐거웠던 식당 주인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시내 구경을 조금하고 마지막 장보기 시간을 주었는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프랑크푸르트에는 한국교포들이 많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많은 광부들과 간호사가 돈벌러 가서 거기에 자리잡은 분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 도시는 우리 기업들이 들어와 유럽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융과 상업의 도시로 독일 최대의 공항과 유럽 내에서 가장 빈번하게 열차가 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고층빌딩사이로 한 건물 옥상 간판에 삼성이라는 영문자가 커다랗게 보였다. 멀리 다른 나라에 와서 우리의 간판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던가? 우리의 국력이 서방 선진국들까지 뻗쳐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일행들은 내 일처럼 반가워했고 우리들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프랑크푸르트의 집들과 플라타나스 가로수
도심은 깨끗했다. 집들도 독일 특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백화점등을 둘러보며 눈요기를 즐겼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은 물건을 사느라고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곳에서는 우리 일행들이 모여 독일칼이 좋다고 하여 구경을 하였다. 별난 칼이 다 있었는데 매우 견고하게 보였다. 나도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칼날이 너무 섬뜩 하여 그만 두었다.
프랑크푸르트 거리에서 본 차들은 크고 견고하고 멋져 보였으며 고급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눈에 많이 띄었고 화려한 가죽옷을 입은 여인네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2차대전 뒤에는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성냥불 한 개를 켜서 세 사람이 담뱃불을 붙일 정도로 독일 국민은 검소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검소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도심 한 곳에서는 중학생인 듯한 두 소년이 흥분된 어조로 임시로 만든 연단에 올라가 거리 연설을 하고 있었다. 매우 흥분된 어조로 무슨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귀가 있어도 한 마디를 알 수 없었는데 나라가 바뀌면 귀는 거의 장식품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모든 외국어들이 자동 번역이 되는 희한한 보청기를 만들어 다른 나라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요술나라의 임금님 같은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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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심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간다. 온 도시에 어스름이 하루의 마지막을 고하듯 어둠이 나래를 펴며 내린다. 이제는 한 번 날아버리면 유럽 땅은 밟을 수가 없다. 정말로 다시 이 땅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인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뿐일까? 공항 면세점에서 갖가지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였다. 술 한 병에 100만원이 넘는 게 있다. 그러나 마지막이란 생각 때문에 싸구려 술 한 병 산다.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팔순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자식과 부모 사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인고? 내가 자식을 낳아 길렀으면서도 무엇이라 딱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 공항 면세점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람 사는 것이 별 것 있는가? 누구한테나 작은 물건 하나라도 건네고 받을 수 있다면 그저 고마운 것 아닌가?
어둠으로 쌓여가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불빛으로 찬란한 공항, 이륙시간이 지연된다. 이제 날자, 저 캄캄한 상공으로…, 대붕을 타고 아득히 높은 창공을 쏜살같이 날아올라 수만 리 대륙 너머 저편 내가 다시 머물러야 할 땅으로 가자. 이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여행으로 마음 부풀었던 많은 날들은 갔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보고들은 신기한 것들도 이제 기억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떤 것들은 세월이 흘러도 또렷이 내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있다가 잿빛 회억의 순간을 맞을 것이다. 아니면 깊디깊은 무의식의 심연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잠드는 것도 있으리라. 그러다가 그것들은 다시 어떤 순간에 섬광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퉁겨나올 것이다.
아, 아, 한 시절의 빛이 서서히 이울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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