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구려 땅 오녀산성에 올라 주몽 시절의 자취를 살피다.
(이하네모 안에 둘러싸인 사진은 blog.daum.net/abamtol에서 인용함)
점심을 먹고 우리는 비류수를 따라 오녀산성을 찾는다.
저 멀리 기이한 형상을 한 산 하나가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험한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고 그 절벽 위에 평평한 산마루가 있어 그 산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요새다.
어떻게 이런 자연의 요새가 여기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 우리는 환인시의 외곽을 흐르는 비류수(혼강)를 따라 간다.
한참 올라가다가 보니 이 비류수의 푸른 물줄기를 크나큰 댐이 가로막았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흐르는 물을 막았다.
처음에는 곡식을 얻기 위해서 작은 물줄기를 막았지만 인간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큰 물줄기를 막았다.
물줄기를 막는 것은 자연을 거역하는 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 일대는 과거의 모습을 잃으면서 기후풍토가 변한다.
그리고 댐이 생기면 사람의 오랜 터전은 수장된다.
그렇게 물속에 잠기고 나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물속에 갇힌다.
댐을 뒤로 하고 우리는 오녀산성 관람을 위해 산 밑 널따란 정류장에 도착한다.
2004년 이 일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관광객이 많아지니까 새로이 개발을 한 것이다.
아직도 허수롭게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곳에서만 타는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탄다.
산을 한참 올라 우뚝 솟은 바위절벽 아래까지 오른다.
여기서 서문터로 올라가는 옛길은 999개의 수직계단으로 되어 있다.
길은 매우 가팔랐고 계속되는 반복운동에 무릎이 약간 이상하다.
일행 중 연세가 높은 분 하나는 가마를 타고 오른다.
그 분은 내가 걸어올라가는 것이 부러운 눈치다.
나는 아직은 걸을 만한 것에 감사하면서 땀을 훔치고 올라간다. 이런 것도 하찮아 보이지만 작은 행복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작은 행복을 보지 않고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면서 상실감을 가지기 십상이다.
<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이라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으로 바로 고구려의 첫 수도,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이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간추려 보면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 도읍을 세운 곳은 홀본(졸본)인데 홀본은 비류골에 있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광개토대왕비보다 수 백 년 늦게 쓰여진《삼국사기》동명성왕편에는 "졸본촌(卒本村) (《위서(魏書)》에는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 했다) 에 다다라 바라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경치도 좋았으며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하였다. 마침내 도성으로 정하였는데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가에 간단한 집을 짓고 살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비류수와 홀본이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있지만 오녀산성이 홀승골성이라면 비류수는 혼강(渾江)이고 홀본은 환인, 그리고 수도 또는 홀승골성은 환인의 오녀산성이라는 것이 일반론이다 >
지금 나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오르고 있다.
참으로 느꺼움이 많다.
아득한 역사의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는 이 나그네는 안개 속처럼 비밀스런 신화 속으로 빠져든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가 나눈 사랑과, 유화를 만난 동부여 금와왕의 사랑과, 유화부인이 낳은 알과 알에서 깨어난 어린아이(해모수의 아들로 천손) 즉 주몽의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유화부인은 새 나라를 세우도록 주몽을 도망하도록 하는 그 이야기 말이다.
< 한때 오녀산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초기 도성설이 부정되기도 하였으나 1986년 도기, 철기, 동기, 자기, 옥기, 금, 은 등 풍부한 고구려 유물이 발굴되고, 주위의 수많은 무덤떼들이 발견됨에 따라 최근에는 고구려 초기 도성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
대체로 잃어버린 시간 속의 역사란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구석이 많다.
여기서 오녀산성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역사란 애매모호하게 된다. 오녀산(五女山)에서 오녀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다섯 여장들에서 유래하는데 고구려 이전에 다섯 여장수가 이곳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중국의 전국중점문화재,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지정 문화재인데 작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고구려 옛 수도로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받았다면 명칭이 졸본성이나 홀본성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공식명칭이 오녀산성으로 되어 있다. 동북공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중국이 자기네 역사의 일부를 원용해 고구려 역사를 감추려는 속셈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역사란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왜곡되게 마련이다.
사실은 엄연히 다른데 기록에 의해 진실은 묻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기록은 믿지 못할 것이 많다.
그래서 유물이 중요한 것이다.
오직 유일한 근거자료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럭저럭 가쁜 숨을 몰아가면서 올라가니 정상의 직전에 거대한 암벽들이 서로 엉켜있는데 여기가 바로 하늘에 닿는다는 천창문(天昌門)이다.
<서문쪽 통로>
그 바위들을 쳐다보고 오르니 오른쪽으로 큰 자연석 바위를 의지한 서문쪽 통로가 보이고 그 통로를 지나니 서문터에 다다른다.
<서문터>
서문터를 중심으로 이천 여 년 세월에도 반듯하게 성벽이 잘 쌓여진 곳도 있고 일부 허물어진 곳도 보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벽을 쌓은 석축공들의 노고가 오랜 역사에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드러난다.
서문터에서 잠깐 쉬다가 나무그늘이 터널을 이룬 능선을 따라
남동방향으로 돌아 일선천을 거쳐 동문으로 내려가다 보면 왕궁터가 나타난다.
주춧돌 몇 개만이 보인다.
진입금지의 표시가 보인다.
<궁궐터 설명판>
왕궁터 옆에는 사원터도 있다.
비류수의 물줄기를 보인 안내판
여기를 지나면 장대(將臺)가 나타나는데 조망이 가릴 것 없이 시원하다. 사방 일대를 조망하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국운의 융성을 빌었을 주몽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류수의 물줄기가 환인을 끼고 태극문양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주 보기 드문 사행하천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소점장대라고 부르는 또 다른 장대에 오르면 해발 800미터가 넘는 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환룡호 풍광이 아름답다.
요령성 제1경이라고 하는데 멀리 만락도 유원지가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 환인댐과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저 댐 안 어느 쯤일까?
주몽이 대소의 무리들에게게 쫓기다가 만난 그 강 엄체수 말이다.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였더니 고기들이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신화의 배경이 된 그 곳도 그만 저 댐 속에 묻혔을 것이다.
저 댐이 건설되면서 수많은 고구려의 묘가 있다 해서 붙여진 고구려 묘자촌 마을과 초기 수백 기의 적석 무덤군이 수장되었다고 한다.
세월 속에서는 강고한 쇠붙이가 녹이 슬어 부서져 내려 형체를 잃듯 사람의 자취란 모두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지만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성 안에는 아직 사람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어 초기 고구려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참 인상 깊게 보았다.
성만 보고는 정말 여기에 사람이 살았으려니 하였는데 말이다.
한 곳에 이르니 큰 물웅덩이가 보였다.
이 높은 산에도 신기하게 샘이 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식수로 썼거나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일 것이다.
지금도 풍부한 수량을 간직한 이 웅덩이의 이름은 천지(天池)였다.
< 해발 820미터의 산꼭대기에는 남북 1000미터, 동서 300미터의 넓은 평지가 있는데 물이 나오는 샘과 물이 고여 있는 작은 못이 있다. 현지에서는 이 못을 천지(天池)라고 부르는데 이 못의 물은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샘이나 천지나 모두 사용하고 있지 않아 그 곳의 물을 마실 수 없다. 다만 동쪽 성벽의 북쪽 성안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데 이곳의 물은 계속 흘러 내려 맑고 맛이 좋은 물로 마실 수 있다
조금 더 가니 크고 작은 집단 거주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사람들이 살았을 집터였다.
안내원은 여기에 온돌의 자취가 남아있는데 이 온돌을 보면 고구려가 우리 민족임을 확실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곳에서는 곡식을 가공할 때 썼을 연자방아의 흔적도 있다.
방아의 아랫부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방아를 찧어 식량을 마련하고 한 끼의 소박한 밥상을 물리고 밖에서 부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따뜻한 온돌위에서 등을 지졌을 고구려인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사람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런 사람의 흔적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산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절벽 사이 좁은 비밀 통로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보급 받거나 소식을 전하던 교통 정보상 매우 중요한 곳인 일선천을 내려 동쪽 성벽을 가다 보면 곳곳에 막사터가 보인다.
동벽
동벽은 인공적으로 쌓은 부분이 420미터 정도이고 나머지는 천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특히 동문터의 성벽이 보존 상태가 좋은데 최고 높이가 약 7미터 정도에 이른다.
지금도 고구려 초기 옹문(瓮門)의 형식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잘 남아 있다.
밑돌은 크고 무거운 돌을 깔고 그 위에 다듬은 돌을 수평으로 맞물려 쌓았기에 지금껏 보존되어 있다.
동문터와 남문터를 본 후 원래의 서문으로 빠지면 산성을 한 바퀴 도는 셈이다.
우리는 동성을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하산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하고성자 성터와 상고성자 터가 있다는데 시간상 가보지 못하였다.
하고성자 성터 표석
< 하고성자(下古城子)성터는 혼강 가에 있다. 이 성터는 하고성자촌에 있는데 성터위로 마을집들이 들어서 있어 자취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서북쪽 귀퉁이 토성의 기단부 흔적과 이곳이 성터임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성터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5만㎡의 규모에 네모꼴의 토성이라고 한다. 이를 현지에서는 고구려 초기 도성터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도성체계의 기본이 왕궁성과 피난처인 산성, 왕족이나 귀족들의 묘지인 고분떼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곳 하고성자를 왕궁성으로 보고 상고성자의 고분떼를 귀족급 이상의 공동묘지로 볼 수 있다 >.
상고성자무덤떼
< 상고성자(上古城子) 무덤 떼는 고구려의 가장 이른 시기 무덤들이다. 이 무덤 떼는 여기서 남쪽으로 1.5㎞쯤 떨어져 있는 평지성인 하고성자(下古城子)에 살던 사람들의 무덤들일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가 보면 무덤이 없고 옥수수 밭만 연이어 있다. 웬일일까? 실상은 옥수수들이 하도 커서 무덤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덤을 찾기 어려운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 무덤들은 고구려시대 돌로 봉분을 한 적석무덤들인데 몇 기를 빼고는 대부분 기단이 네모난 방단형식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고구려무덤에 비해 규모가 작다. 아주 가까이 가지 않으면 옥수수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본래는 무덤이 아주 많았었다. 1960년대에 조사할 때 만해도 200여기나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파괴되어 1988년 조사할 때는 27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무덤들도 훼손이 심하다. 이러한 이유로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
2대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40여 년 간을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환인을 우리는 이제 떠난다.
또 이곳을 다시 찾을 일이 있을까?
아마 거의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어제 본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리고 광개토대왕 비 장수왕의 무덤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취를 본 것은 내 생애에서 희귀한 경험이 되었다.
그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은 모두 이 지방에서만 살아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그 옛날에는 거의 인구의 대이동이 심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상당히 많은 후손들이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
소설이나 역사책에서 본 고구려는 흔히 광대한 영토와 만주벌판을 호령하면서 한족들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번성했던 국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땅이라기보다는 자꾸만 중국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먼 시기의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며 지금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석꾼인 할아버지의 옛 땅을 돌아보는 손자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 거다.
이미 잃어버린 조상의 땅은 지금 그 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후손에게는 오히려 뿌듯함보다는 상실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과거가 비참하더라도 현재가 그렇지 않을 때 그 과거는 오히려 자랑스러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버스로 환인을 출발하여 다시 통화로 왔다. 용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밤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에 도착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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