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북간도의 서울 용정을 찾아
(1) 일송정 푸른 솔
멀리 산이 둘러싼 커다란 분지가 시작되었다.
연길까지 가는 도로는 꽤 넓다.
논이 많이 보이고 마을들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붉은색을 한 팔작 기와지붕들이 보이고 더러는 초가지붕도 나직이 엎드려서 정겨움을 느끼게 하는 농촌 풍경이다.
초가지붕을 저렇게 많이 본 것은 유년시절 이후 처음이리라.
정감어린 옛 시절에 대한 추억이 문득 그립다. 집집마다 서 있는 높은 굴뚝에서는 금방 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를 것 같다.
분명 조선족들이 사는 마을인 것이다.
마음 같아선 차에서 내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만나 두 손을 덥석 잡고 싶다. 그러면 내 눈에서는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히겠지.
그 길을 한참 가다가 보니 가까이 야산 하나가 보이는데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는 한 봉우리에 정자 하나가 점처럼 오롯이 섰다.
아, 아 저것이 바로 일송정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우리는 그 산을 지나쳐 용정 시내로 들어가다가 다시 차를 돌렸다.
공사 중인데 비가 와서 차가 빠져 못 들어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걸어서라도 가기로 하였다.
이쯤 와서 일송정을 못 가다니 중국인 기사는 무슨 심보가 그럴까?
자기차가 새것이라서 그런 것 같다.
조금 길이 나쁘긴 했으나 차는 산 밑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휴게소로 만든 듯한 빈 건물 하나가 그냥 방치되어 있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 그랬을까? 오르는 길은 그냥 말 그대로 야산이다.
푸나무들이 늘어선 산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난 소로가 있다.
숨이 가빠지기도 전에 작은 봉우리에 닿았다.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산은 비록 낮았으나 동남쪽 말고는 시야에 가리는 것이 없이 먼 곳까지 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해란강은 용정 시내를 지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북에서 남으로 구불구불 흘러내리다가 비암산 밑에서 시야에 가려진다.
동남방향은 비암산의 한 봉우리가 높이 솟아 이 커다란 분지를 둘러싸고 도는 산맥을 가리고, 남쪽으로는 다시 너른 들판 사이로 해란강이 흘러내리면서 넓은 평야를 이룬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연길 가는 길이 보이면서 낮은 구릉지대 너머에는 산들이 보이기도 한다.
멀리 북으로 용정 시내
일송정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비암산의 다른 봉우리 능선 휴게소가 보인다
해란강이 흐르는 남쪽 평야
일송정으로 오르는 길 건너 서북쪽으로 보이는 풍경
내 바로 앞에 한 십년은 되어 보이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고 일송정이라 씐 정자가 있다.
옛날에 원래 여기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무는 심은 지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 용정에 처음으로 조선인마을이 형성된 것은 1877년 봄으로, 조선 평안북도의 김언삼과 함경북도의 장인석, 박윤언 등이 열서너 세대의 남녀노소를 거느리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에 이른 다음 또다시 오랑캐령을 넘었다. 그리고는 육도하를 따라 산림만 울창한 곳을 걷고 걸어서 해란강과 육도하의 합수목에 이르렀다. 이곳은 키를 넘는 잡초가 무성하여 황량하기 그지없으나 토지가 비옥하고 우량이 풍부한 기후로 벼농사 짓기에 더없는 좋은 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합심하여 움막을 짓고 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고 밭 갈고 씨 뿌려 한해 농사를 지었다. 첫해 농사가 잘 되어 이듬해부터 집을 짓고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농민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점차 큰 마을을 이루게 되였다. 육도하 기슭에 있다하여 이때로부터 육도구라고 부르게 되었다 >.
물론 용정에 조선 이주민들만 산 것은 아니었다.
북쪽에서는 목단강 연안에서 여진족도 들어왔고 산동성 하북성 료녕성 길림성등에서 온 한족도 있었으나 조선인들이 가장 일찍 이주하였고 인원수도 제일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용정 인근에서 흩어져 살면서도 두고 온 고국 땅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고향을 생각하면서 망연히 바라본 남녘 하늘가 비암산 꼭대기에서 유난히 우뚝 선 큰 소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두고 온 정든 고향산천의 소나무 한 그루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러구러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슬프거나 몸이 아픈 날 그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사철 푸른 빛깔로 변하지 않은 그 소나무는 멀리 이역에 있으면서도 한시도 떨칠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으로 새겨졌으리라.
그리하여 이 정자솔은 언제 어느 누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지 몰라도 어느새 그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존재가 되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신앙이 되어갔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비암산에 올라 그 후덕한 그늘에 몸을 누이기도 하고 봄이면 인근의 동포들이 모여 그 나무 아래서 화전을 하기도 했을 터다.
조국을 떠난 지도 한 세대가 훨씬 흘렀을 때 조국이 망했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고 드디어 간도땅마저 일본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빼앗긴 땅에서 살기가 어려웠던 동포들의 무리가 두만강을 건너 이 용정 땅으로 모이기도 하고. 조국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쫓기어 숨어들기도 하면서 간도 땅에는 조선인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뜻있는 이들은 후세들에게 교육을 통해 나라를 찾을 생각을 하였고, 독립군들이 조직되어 암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비암산 소나무는 민족정기의 상징이 되어갔다.
저간의 소식을 짐작하게 하는 노래가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가 아니던가? (이 노래의 가사와 작곡에 얽힌 배경과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런 노래를 속으로 읊조려보면서 용정을 살다간 우리 조상들을 생각하였다.
사람의 삶이란 언제 어디선들 고난의 나날이 없겠는가만 남의 땅에 깃들여 사는 이민족의 삶이란 마치 부잣집 행랑채에 든 머슴처럼 더 고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간직한 소나무가 어느날 일제의 손에 그만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나무에다가 구멍을 파고 독약을 넣었다고 한다. 조선 땅의 혈자리나 명당에다
가 쇠말뚝을 박은 그들의 행패가 머나먼 이역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동포의 땅에까지 자행된 것이다.
용정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서 푸르던 그 소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고, 그 소나무가 당한 시련처럼 그들 앞에 펼쳐진 수난의 역사는 더욱더 가열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광복이 오고 비록 남의 땅이지만 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사람들은 모여서 의논하고 소나무를 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을 들여도 소나무는 심을 때마다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찌해서 살지 않던 소나무가 이제 저렇게 청청하게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 민족의 앞날에 서광이라도 비쳐올 듯한 예감을 용정 사람들은 느끼면서 그 소나무는 다시금 그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거기에 아담한 정자까지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사실은 중국 정부에서 지었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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