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말
귀향하여 28집의 머리말을 쓰면서
돌아왔다. 이십여 년 만에 내 젊은 날의 숱한 기억으로 점철된 안동으로 돌아왔다. 유사(有事)의 부탁을 받고 묵은 원고 철에서 게송(偈頌) 형태의 노래 몇 편을 28집에 게재하노라니 문득 처음 ‘글밭’을 만들던 37년 전의 옛일이 아련한 추억인양 떠오른다. 그 때 그 시절 동인지를 만들었던 성영이, 병국이, 홍범이, 변호섭…….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동인들의 얼굴도 꽤나 바뀌고 벌써 고인이 된 사람도 둘이나 된다.
병호와 백형은 이미 유명을 달리 했고 금녀의 금기도 깨어져 여성 동인도 두 명이나 들어왔다. ‘글밭’ 동인들이 주체가 되어 문협 안동지부를 결성하던 일도 벌써 옛날 일이 되었고 교대 후배와 ‘말’ 동인지를 만들던 일이며, 최유근 씨와 의기투합하여 수필동인회를 조직하고 ‘안동수필’을 5호까지 편집한 일도 한 세대 전의 아득한 전생사(前生事)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재직하던 교직도 때려치우고 출가위승의 길을 걸었다. 늦깎이 신출내기 승려 시절, 나는 문학도 선반 위에 얹어 놓고 간경과 선 수행에 몰두하면서 수행자의 본분에 충실했으나 깨달음은 아득하고 번뇌망상은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경기도 이천의 됫박만한 암자에 바랑을 내려놓고 불교 근현대사와 차문화 (茶文化)에 관한 연구서 몇 권을 집필, 발간하면서 다시 문자와의 숙연(宿緣)을 이었는데 휴간한 ‘글밭’이 순수 시문학지로 복간되었다. 복간 이후 ‘글밭’ 은 임병호가 오랫동안 주도하였으나 수 년 전 그도 타계했고 그가 없는 ‘글밭’에 수즉욕(壽卽辱)을 들먹일 나이는 아니지만 가로 늦게 다시 어줍잖은 운문 몇 수를 들고 새삼 동참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노릇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속언처럼 비록 산문에 기대어 살면서도 나는 한 번도 내 자신이 ‘글밭’ 동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지섭이, 기태, 내가 글밭의 가장 오래된 멤버이고 김윤한, 임두고, 김명동, 강희동, 류민기 등의 후배들이 동인회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는 가운데 ‘글밭’ 28집을 간행하게 된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미흡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40년 가까이 동인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한다는 것은 이광수, 김동인의 2인 신문학 이래 희유한 일임이 분명하다.
나는 열망한다. 내 젊은 날의 열정이 배어든 ‘글밭’이 28집이 아니라 38 집, 58집, 68집……. 이 땅에 한글이 존재하는 그날까지 속간되기를 간절히 기원 드린다.
소태 같이 쓰디쓴 사바의 고해(苦海) 속에서 청량한 솔바람 같은 시구가 수집합(二水之合)의 학가산 아래에 오래 읊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동인들만의 바램이 아니리라.
육사의 절절한 노래가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도 겨레의 심금을 울린 이 영가(永嘉) 땅에서 ‘글밭’의 시인들은 그의 심혼을 잇는다는 각오로 원고지를 메워가고 있다.
나는 ‘글밭’ 후배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이 진정한 육사의 후예가 되리라는 조짐을 예감한다. 혹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편이 있더라도 강호의 선학들께서는 너그러이 포용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2006년 가을
말석을 차지한 ‘글밭’의 임혜봉이 서문을 쓰다.
차 례
우리들의 말 3
강 희 동
自警錄 16 10
自警錄 17 11
自警錄 18 12
自警錄 19 13
自警錄 20 14
自警錄 21 15
自警錄 22 16
自警錄 23 17
自警錄 24 18
自警錄 25 19
류 민 기
동반 22
바람의 말 23
여정 24
연정이 밀릴 25
가을 언저리에 26
그윽한 밤 27
두고 온 남자 28
임 관 혁
가을의 기도 30
우는 새 31
찔레꽃은 아직도 피지 않았는데 32
봄 밤 33
귀향 34
세느 강 35
김 윤 한
감꽃 38
마중물 39
담배꽃 40
지장보살 41
아픈 봄 42
뻐꾹새 43
이슬비 44
얼음사랑 45
김 명 동
안개꽃 48
그 해 가을 원산폭격 50
내비게이션 52
김 여 선
가을, 건널목에서 56
폐차장 58
검정고무신 60
수련 62
감은사지 64
강 수 완
콩 68
과분한 점심 69
탁발 70
매미 71
기억 72
나팔꽃 73
광한루 춘향 74
종가 앞에서 75
게으른 봄에게 76
천연염색 77
김 지 섭
도법, 생명 평화 탁발에 부쳐 80
어머니 산 82
病中 83
행복 시트사 김씨 84
마수 85
권 오 규
최서방 다녀가다 88
잠바 89
국민학교 동창생의 주름살 90
낙엽 91
쑥을 뜯으며 92
콱 맥혀 93
제7부두의 저녁 94
임 두 고
누이 96
폐교 일지 98
새 봄 100
김 금 숙
토마토 102
냄비와 국자의 전쟁 103
마야미용실 104
은행나무 105
풍경 106
김 진 택
HOTEL DARCY 108
제주도 110
궹이 밥풀 111
조용한 시간 112
깊은 가을입니다 113
잊어야지 하면서도 114
레일이 놓여 있는 긴 둑 115
권 기 태
간이역 118
금잔화 120
산촌에서 121
강릉 가는 길 123
고물상에서 125
잃어버린 날들을 위하여 126
∥특집 1∥ 서평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의 문제
- 백승초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
김윤한(글밭 동인) 128
∥특집 2∥
혜봉(慧峰) 스님의 偈頌 143
글밭略史 147
강 희 동
自警錄 16
自警錄 17
自警錄 18
自警錄 19
自警錄 20
自警錄 21
自警錄 22
自警錄 23
自警錄 24
自警錄 25
시인의 말
작년에 걸쳐 연작시 ‘자경록’을 계속 써 나가고 있다. 글밭 제 27집에 수록된 ‘자경록 1-8편’ 이후 15편까지는 이미 다른 문예지에 발표되었으므로 생략한다. 금번 28집에 ‘자경록 16-25’ 전 10편을 상재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세상의 순리를 체득하는 마음으로 쓰고자 한다. 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이미 접하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쓰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먼 후일 한 권 정도 분량의 시작(詩作)이 완성되었을 때 다듬어 단행본으로 묶고자 한다. 그 날의 희열을 위해 완성도 높은 시의 앞날을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이다.
自警錄 16
- 가위
가위는
자르기 위해
두 입 오므려 맞추며
절단을 낸다
갈라진 세월의 바위틈
어느 풀이
봉합할 수 있을까
自警錄 17
- 작은 것이
맨발로
돌 자갈밭을
걸어 보라
작고 가냘픈 돌이
더욱 아프게
발바닥을
찌른다
自警錄 18
- 진공청소기
세상을 갈아 치우려면
먼저 내 배를 비우고
입을 오므려 모두어야 한다
힘껏 빨아 흡입하면
시간의 선반과 삶의 바닥에
흩어진 먼지와 휴지 조각조차
빨려 들어 와 내 스스로
쓰레기가 되는
공복의 청소
自警錄 19
- 새
울어 소리로 교태한다고
새가 아니다
허공에 날갯짓하여
솟구칠 때 아득히
새가 되는 것이다
창공의 제 길 접어 두고
새장에 갇혀 비법(飛法)을 잊은 시간들
언젠가 유유히 기류를 타고
피안의 언덕에 이르기 위해 새는
튼실한 날개 간직하고 있다
自警錄 20
- 그림자
그늘에 갇힌 나무는
제 그림자 모른다
빛을 이고 선 따가움 아래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쉬어가는 여유
무자기 한 여백을 위해
나무는 온몸을 하늘로 펼쳐
빛을 빨아들이고 있다
自警錄 21
- 마네킹
니
뭐하고
있노
갇힌 유리벽 속
거리의 움직이는 족속
그들의 수의를 걸치고
그들 날 드려다 보고
나 그들 유행을 응시하고
니
뭐하노
自警錄 22
- 상사화
그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
붉은 꽃 시들자
살아 오르는 푸른 잎
그대 결코 나를
잊지 못하리
自警錄 23
- 술병
병(甁)은 눕기 위해 제 속을 비운다
몽롱함을 위해 허전한 분노를 내리려고
스스로 허허로워지는 병
그대의 가슴에 불을 당기고 달려 온
꽃피는 시간의 둔덕
쓰러진 병의 시체
몸으로 들어 온 병, 고단한 육신
병이 누울수록 일어서는 취기
뜨겁게 제 몸 달구다
넘어진 그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
自警錄 24
- 담장
허전할수록 꽃 핀다
브럭 담벼락에 기대어 번지는 장미다발
가득 흐드러 번질수록 묻히는 담
꽃 지자 알몸 드러내는 담장
집도 허전해지지 않으려
담장을 둘렀다
나 홀로
담
自警錄 25
- 사내(男)
때로 사내는 집이 답답해
들판으로 나간다
할퀴고 긁혀서 지친
숨소리로 돌아온다
때로 사내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대숲 아래 짐승처럼 운다
제 울음도 알지 못하면서
여인의 눈물을 생각한다
때로 사내는 이유 없이
술에 취한다
달빛도 바람도 사내의
들먹이는 어깨를 모른다
사내는 안으로 흘리는 제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이유 없이 키들거린다
제 어깨를 누르는 무게를 덜기 위하여
쓴 술을 마신다.
류 민 기
동반
바람의 말
여정 연정이 밀릴 때
가을 언저리에 그윽한 밤
두고 온 남자
시인의 말
세월 속에서 지나온 올해는 톡톡히 시에 젖어 살고 싶었지만 시 앞에, 기어이 평안보다는 아직 모든 게 안타까움이었다.
화평한 구월 밑에서도 심정은 늘 젖어 있었고 심사는 세월 앞 에 늘 토라져 있었다.
계절을 거쳐 불어오는 시절의 바람 앞에 나는 적당히 계절들 의 바람을 인지해 내 일과의 모습과 자취들을 적어보았다.
늘 띄우고 후회로워지고 아쉬움이 남는 말들이지만 오늘도 글발이라고 몇 작품을 심는다.
그래 가을은 한 소절 더 깊어지고 바람은 더욱 나의 계절을 몰고 오겠지. 돌아보면 늘 아쉬움인 세월이어서 한 날부터 적 게 된 시, 어느 날엔가는 반석같이 꿋꿋한 시를 적을 날이 있겠나?
모든 와중에도 나의 가장 속상했던 곳만을 살폈던 시. 그렇게 오늘도 글밭이라는 시의 지평위에 내 정신의 소산을 실어본다.
동반
스쳐 지나가는
한 소절의 바람에라도
동반을 생각하는
그런 오후엔 이 심사 궂었다
노변으로
코스모스 흔들리고
사루비아 빠알간 가을
손잡지 못한 사랑이라
늘 서로 품기만 했던 연정인데
언제부턴가
이 나이 되도록 나이 들어도
나의 길 위에 내 오르면
사랑은
늘 함께 걷고 있는
늦은 오후 무렵이었으며
황혼의 모퉁이었다.
바람의 말
시간과 세월의 언덕을 지나
묻어온 이끼 같은
아직은 푸른 고적
미풍에 떨고
키 큰 가로수 길을 빠져나가는
낮은 바람소리처럼 알싸한
내 탁성의 주문 같은 기도
미몽같이 아득한 계절처럼
저녁 하늘을 품고.
여정
끝내 산만해진 겨울 시가 위에
봄비 같이 내리는 황혼
이 가슴에 쏟아지고
비명 같은 북풍소리가 횡단보도 건너 갈 때
나의 말은 옹알이 같은
독백 한 소절이었는데
어디서
생을 찾고 길을 거쳐
이 거리에 부유하는가
노정의 길목에서 상념은
어느덧 네온인 듯
심정에서 빛나지만
오늘도 무의미하게 밟아온
아침과 정오 무렵과 저녁이
일과의 뒤로 내몰릴 땐
한 세월의 뒤에서
나는 어둠이 걷어가는 황혼을
앙망할 수밖에 없었다.
연정이 밀릴 때
너의 소문은
바람 같은 밀물인 듯 되밀리고
세월을 건드려
물머리처럼
탁했던 세월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오늘도 이 세월 다듬어야 할 저녁은 와
한 줄기 그립다는 시
고쳐야 하는데
너 없어 고칠 수 없는 그리움
너 없어 고쳐야 하는 이 그리움.
가을 언저리에
사루비아 빠알갛게
하늘 향해 고개를 내밀 때
난 정원 모서리에서
이 가슴에 얹어둔
가을일들을 헤아린다
지나온 모든 게
가을 오후의 그림자 같이
까아만 미몽으로 남을 때
흔들어 깨우는 나의 세월은
가을바람 한마디인 듯
그래, 한 잔술의 취기로
불러보는 말
낙엽 같은 가을빛 꿈의 언저리 위에다
그려 보는 말
아직은
오늘보다 가쁜 어제라는 말이다.
그윽한 밤
고개 돌리면
떠오르는 하룻밤의 설원인데
창문에 걸리는 건
호젓한 화음 같은 전율인 듯한 바람 소리다
천정 위로
뽀오얀 아린 담배 연기 걸릴 때
감성에 젖게 하는
유독 내 심사만을 누르는
우리들의 고르지 않은 추억 앞에
나는 창백해지고
오래 전 고개 돌린 입맞춤은
그렇게 긴 밤처럼 흘러 흘러와
토굴 같은 이 방안에
그을음처럼 까맣게 눌러 붙고,
두고 온 남자
우리 가을 사랑은
먼 곳에서는 마악 달려왔지만
가까이 와 스치고 말았던
만남은 옷깃을 스치는 하루 같았다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는
너를 따라 가던 나는
세월이 굽이진 곳을 돌아가
너의 흔적은 잡을 수가 없다
가끔 노변에 가랑잎들 나부낄 때
공원길 옆 벤치에 함께 했던 남자
바바리 깃 슬펐던 남자
계절이 익어가는 허공을 보면
문득문득 바라다 보인다
이 가을 마지막 가랑잎 날릴 때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경대(鏡臺) 앞에 앉아
밤색 루우즈 입술에 바르며
그윽했던 세월을 치장하다 보면
문득문득 경대 안으로
문득 비치인다.
임 관 혁
가을의 기도
우는 새
찔레꽃은 아직도 피지 않았는데
봄 밤
귀향
세느 강
시인의 말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땀 흘리고 일한만큼의
수확을 하는 때
나는 별로 거두어들일 게 없다
갈대꽃 핀 내 회갑의 들판에 서서
나는 떠난 새를 그리워하고
그를 위하여 음치의 목소리로
노래 한 구절 불렀을 뿐이다
이제 조금은 부지런해지고 싶다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 손으로 작은 국화꽃 한 송이도
심어 피워보고 싶다
바보처럼 오늘을 살아도
이슬처럼 맑은 시 한 편 써 보고 싶다
가을의 기도
그리움이여
능금처럼 익어라
사랑이여
단풍처럼 붉어라
정이여
농주처럼 익어라
추억이여
국화처럼 피어라
슬픔이여
낙엽처럼 져가라
우는 새
꽃 피는 날도 울었다
밤도 낮도 없이
꽃 지는 날도 울었다
낮도 밤도 없이
봄날이 깊어 갈수록
더 진한 울음 울었다.
밤 낮 없이
찔레꽃은 아직도 피지 않았는데
- 백승초 시인 추모시
물안개 피어오르는 낙동강에 발 담그고
먼 산 바라보던 산 노루 눈 닮은 시인아
바라보던 먼 산엔
아직도 진달래꽃은 지지 않았는데
좋아 노래하던 하얀 찔레꽃은
아직도 피지 않았는데
갈 길이 그렇게도
그렇게도 바쁘던가
겨울이 와도 문 닫지 않고 청상주점에서
술잔 기울이는 청야가 오라던가
가려면 지는 꽃 피는 꽃 보고나 가지 그래
그렇게 좋아 노래하던 누이 속살 같은 찔레꽃
피는 꽃을 몇 해나 더 보고나 가지 그래
억새풀 사이로 달 떠오르는 산마루에 서 있는
산노루 눈 닮은 시인아 참시인아
찔레꽃 지천으로 피는 해마다
찔레꽃 노래하던 그대를 그리워하겠네
봄 밤
잠재워도
잠재워도
바람기는 잠들지 못 하고
목련꽃 피는 밤부터
목련꽃 지는 밤까지
바람기는 미쳐 돌아다녔다
귀향
내 눈뜨고 못 가면
진정 못 돌아간다면
내 죽어서 돌아가리
죽어서도 내 못 돌아가면
고진동 계곡 연어 되어
내 돌아가리
남강 물길 따라
북천고향 돌아가
다시 죽는 연어가 되어도
내 돌아가리
세느 강
그 강변엔 늘 우리가 있었다
밤이 밤이 아닌 낮으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주태백이가 아니어도
막걸리 독에 빠져 소주 독에 빠져
늘 우리는 허우적거렸다
우리가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끝내 물이 되어
우리네 해우소가 되었던 세느 강*
물빛은 죽어 가서도 그 강변에서
토해내던 시는 별밤처럼 아름다웠다
추억의 세느 강 지금도 흘러갈게다
우리들처럼 그 때 그 사람은 다 없어도
* 세느 강 - 안동시 남북을 흐르는 소하천을 안동 시인들이 이름을 붙임
김 윤 한
감꽃
마중물
담배꽃 지장보살
아픈 봄
뻐꾹새
이슬비
얼음사랑
시인의 말
임병호 시인에 이어 백승초 시인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떠난 사람들을 제 외한 채 해마다 동인지는 또 나온다.
죽음이 나와는 전혀 별개로 생각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자꾸 떠나니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올해 출판기념회 때는 현재형의 사람들만 모여서 시끌벅적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이 공간을 수없이 떠돌아다니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도 한 번쯤 세어보면서 술 마시리라.
올 겨울은 유난히 길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도 유별나게 크게 들릴 것이란 막연한 생각.
감꽃
소아마비 걸린 누나 허기 참아가며
꽃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었다.
음악시간, 아이들 풍금을 옮기러 간 사이
운동장 가로질러 급식용 밀가루 빵차가 왔다.
향긋한 이스트 내음 때문에 배는 더 고프고
돌림노래 합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국민교육헌장 못 외운 아이들 슬리퍼 짝으로
선생님한테 얻어맞은 볼따귀가 빨갰다.
학교 소사가 잡은 이무기 때문에 소풍날이면
맨날 비가 왔지만 검정고무신 어머닌
사이다를 사고 동장 댁에 쌀을 꾸러 갔다.
배고파도 우리 용케 모두 잘 자랐지만
10월 유신의 노래 잘 부르던 눈 동그란 재호
달리는 석탄 트럭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파트 앞 떨어진 감꽃 하나 씹어본다.
수십 년 잊었던 그 떫은맛
다시 일어서 소리치며 달려온다.
마중물
펌프 목구멍에 마중물 한 바가지 부어
깊은 땅속 맑은 물 소리치며 함께 불러내듯
우리 서로서로 섞이며 이끌며
이 세상 더 환하게 밝힐 수 있다면.
누군가 도무지 잠 못 드는
커다란 울음 있다면
우리가 가진 물 한 바가지로
시커멓게 타들어간 눈물 다 길어 올려
먼 강물에 흔적 없이 흘려보내고
오늘밤 모두 함께
아주 편하게 잠들도록 할 것을.
누군가 홀로 고이 간직한
아름다운 샘물 하나 있다면
우리가 가진 물 한 바가지로
물보라 힘차게 길어 올려서
가문 땅에 벅찬 단비로 흩뿌려
시들은 세상 모든 풀들 눈부시게
다함께 함박 꽃피우게 할 것을.
담배꽃
담배꽃이 처연하게 피고 있었다.
피곤한 벌들 꽁보리밥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튼실한 잎을 위해서는 아름답든 아니든
꽃은 모조리 잘라버려야 한다.
이오덕 선생이 편집한 산문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에 보면 담배꽃 따느라
학교를 결석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가 나온다.
빈혈 걸린 아우가 담배밭 이랑 속에 들어가면
무성한 줄기 때문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담뱃잎 따느라 피곤한 저녁을 물리고도
어머니와 소박맞은 누이는 지친 담뱃잎을
새벽이 지나도록 아프게 엮어냈다.
온통 빚이었다. 비료며 농약이며 양식까지도
선도금까지 갚고 나면 빚은 더 늘어날 것이다.
아버진 온통 절망뿐인 탄가루를 반죽해
건조창고 아궁이에 활활 울홧불을 지폈다.
노랗게 건조되어 나오는 마른 잎담배가
빚을 갚기 위한 지폐처럼 보였다.
몰래 담배 한 개비를 피면 머리가 핑 돌았다.
피곤하기만 했던 70년대 아픈 일상들
아버지 새마을 담배연기 위로
유령처럼 어질어질 날아올랐다.
지장보살
빈 들판 가르며 바람은
저렇게 울고 지나는데
어디에 계시나요. 지장보살님.
세상의 불빛 저편에는
예측불허의 어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그건 어찌 걷어내려 하나요.
그대 계신데 왜
밤은 더욱 깊어만 가나요.
목이 메도록 그대 이름 불러도
마침내 내 속에 있는 티끌 하나도
건져낼 수가 없나요.
애타게 이름 부르다 잠든
저 많은 중생들을 보셔요.
그대, 언제까지 이 세상
귓밥 펄럭이며 홀로 감당하려 하나요.
범종소리, 운판소리
무심하기만 하네요.
아픈 봄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언 땅 송곳질하며
싹이 다시 돋고 있었다.
목련꽃 터질 듯한 망울을
가슴 벅차도록 참고 있었다.
나비와 새들 몇이서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 뒤를 따랐다.
모든 것들 다시 돌아온 봄
정작 돌아와야 할
가엾은 이름 하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홍매화 꽃비가 눈부시게
떨어져 내렸다.
뻐꾹새
뻐꾹새 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이미 구름이 되었는데
무어라 뻐꾹뻐꾹
또다시 부질없이
잊혀진 이름을 되뇌는가.
울음, 온 들판 침묵으로 잠재우고
영혼들 하릴없이
메아리 되어 허공을 맴돈다.
뻐꾹새 날카로운 부리
아리고 쓰리도록
내 가슴팍을 쫀다.
이슬비
조팝꽃 이파리들이
붉은 벽돌 교회당 내리막길을
아다지오 풍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소복한 어느 여인이
목구멍에 걸린 울음 삼키며
낮은 허밍을 하고 있었다.
슬펐지만 쏟아 붓지 않고
모래시계처럼 천천히
사연을 빗질하고 있었다.
하늘도 입술을 굳게 닫고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습기 찬 언어들 잠시
어깨 눅눅하게 했지만
이내 비도 그치고
세상에 흐르거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얼음사랑
우리 함께 만나
부대껴도 녹지 않고
서로서로 온전하게 남아서
사랑할 수 없을까.
하지만 사랑은
꾸준하게 움직이는 것
무언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냉동실에 온전히 남아 있는
얼음조각 아니라
갈라지고 깨어지든
한 사발 팥빙수가 되든
한 잔의 냉차가 되든
서로서로 한데 섞이어
둘만의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 나야 하는 것.
김 명 동
안개꽃
그 해 가을 원산폭격
내비게이션
시인의 말
나는 요즘 내비게이션을 달고 운전을 한다. 한 번 갔던 곳을 다시 찾지 못하는 길치인 탓이다.
목적지를 정하면 거의 틀림없이 찾아가는 기능에 감탄한다. 그 동안 내 짐작으로 다니다 쓸데없이 시간과 기름을 소모한 적이 엄청나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고속도로로 가던 길을 이탈하여 비포장 산길을 헤매다 엉뚱한 지점에서 다시 경로를 수정한 적이 많았다. 신호위반에 과속에 과태료를 낸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명쾌하기 보다는 초보운전처럼 아슬아슬하다. 이쯤 해서 다시 경로를 점검해 보고 남은 길을 가야 한다.
안개꽃
집을 나서면
색깔 있는 꽃들 키에
나란히 맞추어
적당히 재단되고
알록달록
오만 잡것들
합해 묶을 때 마다
내가 어울려
오히려 빛났던
무리여
잘 보일 수만 있다면
중심과 변방을 가르던
어두컴컴한
족속들
비록
칼바람 몰아쳐도
구차하게 기대어
비비지 않아 당당하다
살아있는 동안
자연 그대로 자오록하게
치우침 없이 반듯하게
그렇게 유유히
내내.
그 해 가을 원산폭격
K
다시 말 할게요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결국
역사는 파편으로
서약은 무효라고
순순히
접수할 수 없었던 제안
날밤을 새며
분노하는 것 보다
차라리 철조망 넘어
끝을 내고 싶었던
스물 다섯 피어린 광기
그 해 가을
땡볕은 따갑게
빛바랜 군복에 꽂히고
맨대가리 땅에 박는
잔인한 얼차려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대책 없이
겨울이 다 가도록
순간순간
환장할 정도로
역류했던 피.
내비게이션
시동을 건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설정한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다음 안내 시까지 계속 직진입니다.
약 500미터 전방에서 안전운행하십시오.
제한 속도 70킬로미터 구간입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다음 교차로에서 우회전입니다.
이어서 5시 방향입니다.
전방에 연속으로 과속 방지턱이 있습니다.
목적지 주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마칩니다.
명쾌한 길 찾기다.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내비게이션이 묻는다.
당신은 목적지를 선택하였습니까?
선택은 했는데 좀 급했습니다.
안전속도는 지켰나요?
종종 과속을 했습니다.
교차로 통행은 제대로 했습니까?
딴 생각 하다 접촉사고를 낸 적 있습니다.
경로이탈은 없었나요?
엉뚱한 길로 간적 있습니다.
경고 수준이군요.
앞으로 목적지를 재설정하고
안전 운행하십시오.
나의 내비게이션
아슬아슬한 길 찾기다.
김 여 선
가을, 건널목에서
폐차장
검정고무신
수련
감은사지
시인의 말
여름부터 어깨가 고장났다. 그렇게 열심히 치던 테니스도 치지 못했다. 지난 해 가을부터는 6개월 정도 엘보로 고생하더니……. 테니스 치는 것이 조금 나아지려고 하면 항상 이런 부 상의 연속이다. 몸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욕심을 내서 무리한 것 같다. 내 몸에 맞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대신에 그 동안에 써 놓은 시들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는 기회를 가졌다. 욕심을 부려 비대해진 시들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시를 쓴다는 것, 욕심부리지 않고 자연의 순리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한 해였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내 어깨도 어느 정도 고쳐지겠지.
가을, 건널목에서
굳은살이 밴 아버지의 손마디처럼
무뚝뚝한 차단기 위로
해거름의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정지
차단기가 허리를 굽히면
털털털
마른기침 소리를 내는
아버지의 경운기 한 대
건널목 앞에 서고,
객지로 떠나는 막내의 보따리에
배추의 고갱이 같은
노란 햇살이 쌓인다.
아버지 머리카락처럼 허연
시멘트를 실은 화물열차가
독 오른 한 마리 파충류처럼
스멀스멀 남쪽으로 달릴 때,
스스스
수수밭에서 불어오는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막내의 가슴을 파고든다.
출발
차단기가 차렷 자세로 일어설 때
서쪽 하늘에 마지막 햇살이
하혈하는 가을강으로 되살아나고
경운기 한 대
가을의 건널목을 건너고 있다.
폐차장
기름때는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세탁기로 검은 내음만 대강 씻기우고,
녹색의 철망에 손목 잡힌
붉은 고무가 칠해진 목장갑이
바닷가 오징어처럼 말려지고 있었다.
가슴 속 동그랗게 말리는
자동차 미터기의 숫자판 너머로
잎 떨군 입동立冬의 포도밭이 보인다.
오후 햇살에 낮잠 든 늙은 포도나무가
날카롭게 각이 선 콘크리트 기둥에
십자가로 팔 벌려 깁스 당하고,
아직도 떨어지지 못한 몇몇의 잎들이
목장갑으로 손을 흔들 때,
폐차장 안으로 입동立冬의 목 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263746.2km, 10년 1개월, 보라색, 액센트
우린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같이 달려왔어.
도축장 한우의 마지막 울음처럼
엔진에서 잦아드는 천식의 콜록거림이 ‘
폐차’라는 화인으로 찍히고 있다.
서릿발처럼 어둠은 하얗게 일어서고
도로에는 이마에 불을 켠 자동차들이
거대한 절지동물로 줄을 서 도시로 진군할 때,
기중기에 매달린 폐차된 자동차가
보라색 잎 하나로 흔들리고 있다.
검정고무신
섬돌 위에
김을 붙인 이빨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검정고무신이 신고 싶어요, 아버지
여름
맨발로 검정고무신을 신으면
검은 땟물이 발바닥을 적셔도
해거름 미루나무 그늘 아래
툭툭
신발을 던져버리고
하얀 모래로 물기를 털어내면 되니까요.
참
부웅부웅
서울 삼촌이 사다준
때깔 좋은 장난감 자동차를 자랑하는
철수가 부러워서
짐차*도 만들어 보았지요.
다 알지요. 짐차 만드는 방법 말이죠.
한 짝은 그대로 두고
다른 한 짝은 아버지
전신만신 ‘백구소주’에 찌든 창자처럼
한 바퀴 꼬아서
그대로 검정고무신 앞 주둥이에 쭉 밀어 넣으면
봉분처럼 툭 솟은 운전석이 되었지요.
모래 위에서는
때깔 좋은 장난감 자동차는
흙이 묻을까 벌벌 떨었지만
검정고무신 짐차는 잘도 갔었지요.
몇 해 전
제방공사로 팽팽한 활시위로 늘어선
방죽을 바라보며
사라진 미루나무
팔려나간 백사장이
희미하게 떠올랐지요.
그럴 땐
까만 구두를 벗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싶어요. 아버지
* 트럭, 옛날에 짐을 실어 나르던 차를 짐차라 불렀음.
수련
어느 새벽
선술집에서 만난 사람
그 사람 이름이 수련이랬지.
희미한 밤무대의 불빛 같은
진흙에 두 발 담구어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는
항아리에 담긴 수련 한 포기
도시의 새벽하늘을
희미하게 품고 있었지.
어젯밤 숙취는
강호식당 선짓국으로 피어오르고,
가로등 아래
한 송이 수련의 꽃봉오리가
새벽 안개 속에서 꿈틀거렸지.
“아지매,
내일 또 올게요.”
어린 시절 고향처럼
가로등 불빛은 희미해지고
둥근 항아리 닮은
옥탑방으로 퇴근하는
수련의 발등 위로
가느다란 아침 햇살은 비추고 있었지.
감은사지
콤바인에 베어진
벼 밑둥으로 줄을 선
감은사 터의 주춧돌 위로
겨울 오후의 햇살이
깨어진 사금파리로
반짝이고 있다.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여름날의 강아지풀 한 포기
다 닳아진
외투의 깃을 세우고,
대왕암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관광버스 한 대 주차할 때,
뽕잎차를 파는 할머니의
까칠한 푸른 손마디 위로
짧은 겨울 햇살이
푸른 단청으로 일어서고 있다.
천년의 영화도 욕심도
말없이 지켜보는
금당 앞 두 탑이
석공의 굳은살이 밴
푸른 화강암으로 녹이 슬 때,
줄을 선 동그란 주춧돌 위로
여름 들판처럼
대웅전이 한 채 솟아오르고 있었다.
강 수 완
콩
과분한 점심
탁발
매미
기억
나팔꽃
광한루 춘향
종가 앞에서
게으른 봄에게
천연염색
시인의 말
세상에서 잘 하는 일이라고는 시 쓰는 것뿐인데, 시를 쓰는 일이 세상에서 잘 하는 일이 되는지 모르겠다.
아이 둘 낳아 놓은 것 외에는 잘 한 일이라고는 없는 세상에 이제 시라도 잘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누가 봐도 미숙하다.
누가 봐도 잘 하는 일 하나만으로, 한 세상 잘 살아가고 싶다.
콩
단단한 걸 깨치는 일은
무릇 부드러움이 우선이다
입에 넣어 깨물어도 완고하던 저항이
흙에 물려 며칠 만에 푸른 움이 텄다
어금니에 딱딱 튀기만 할 때는
나도 저도 성가신 오기뿐이었다
콩이 제 어깨로 흙을 살짝 건드렸는지
흙이 제 먼저 겨드랑이 비켜
부풀린 길의 처음을 알렸는지
둘의 자초지종은 모르겠으나
아하- 흔쾌한 소통의 세상이란
무르고 부드럽고 느긋한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걸
미혹에 들어서야 깨쳐보는
부끄러운 어금니.
과분한 점심
자연산이라고, 회 한 접시에 팔만 원!
눈만 껌뻑이다가
에라 눈 딱 감고 한 번 먹어보기로 했다
한 끼에 서너 달치의 양식값을 물고 나올 길이
물고기 간 만할 지경인데
머리 속 구구한 계산을 두면
입은 굶기 마련
낯선 곳 방언에 취해
먹고 죽자, 때깔 좋게 죽자
극단의 작정으로
심장은 내가 벌렁대는데
상 위에 오른 도미는 제 입을 다 벌리고도
입만 한 눈알이 껌뻑껌뻑.
탁발
실비 집 밥상 둘레는 모서리가 없다
각 없이 둘러진 자리에 어깨 곁대고
마음 맞는 수만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등받이 없는 의자는 허리를 더욱 세우라는데 그
러면 자연 똥배에도 바짝 힘이 들어 가
없는 사람끼리 왁자한 맛을 내는 것이다
절대 기죽지 마라 실비집 둘레는
둥글게 붐비는 탁발이 된다
매미
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개과천선할 옷 한 벌 있었으면 좋겠다.
기억
이승을 건너가는 목숨보다 더 중한 일 있으려고,
시간 맞춰 다니는 버스도 한 발 늦춰서고
예식장 다니러 가는 내 차도 멈추고
깜빡깜빡 비상등 켠 긴 행렬을 앞세우며
바쁜 사람들 잠시 숙연해진다
살아 있는 사람들 가는 길 느릿느릿
순순히 비켜 주는 것은
가슴마다 한 번씩 굵게 그어진
멍 자국 같은 중앙선 노란색이
선명하기 때문일 게다
나팔꽃
서로를 그렇게 동여 감고
구렁이마냥 친친 동여 감고
동여 맨 자리 표 날까 이파리 하나씩 달아놓고
이파리 수 많아지자 활짝활짝 큰 꽃 매달아
남의 눈 피하자고 작심해놓고
기어이 제 입 먼저 열어
아침마다 발설되는 지독한 사랑아!
광한루 춘향
저를 귀히 여겨 넘치는 사랑인지
넘치는 정끼로 귀히 여겨진 사람인지
몽매간 궁금하고 궁금하온데
그네 뛰던 첫 날 그날 이후로
도련님만 바라 기다리다가
남원 땅 떡하니 정자까지 갖춘
이 몸이사 죽어 여한도 없는
단정한 여인네로 살아납니다.
종가 앞에서
나이 들면 푸석하기 마련인 세상인데
기와는 몇 대째 아직도 꼬장하다.
늙은 기와는 그래서 이게 자식인 셈인데
더러는 글 잘 읽어 출세한 와송 몇도 높이 솟아
한 무릎에 거느리고 사는 것이다.
先代가 저리 꼬장할진대
솟을 대문 밖 위엄이야 어디 갈 텐가.
게으른 봄에게
말 못하는 맨 가지에도 꽃불 놓을 줄 아는 네가
그 사람을 딱 한 번만 깨우는 건
왜 못 한다는 게냐?
천연염색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숨길 수 없다
응큼한 수작 부리지 못하고
있는 대로 곱게 내어 놓는 일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씨실날실의 오장육부 살살 다스려
색을 낸 후 공중에 걸어 놓노라면
어김없는 주홍 글씨 금세 파다해질 소문
밝은 물 붉게 되고
푸른 물 푸르게 되는
발색된 천의 겨드랑이가
정직하게 펄럭일 때마다
세상사 다 그럴 것이다 꼬박꼬박 믿으며
결리고 묵직한 어깨 비로소 한번 펴 보는 일.
김 지 섭
도법, 생명 평화 탁발에 부쳐
어머니 산
病中
행복 시트사 김씨
마수
시인의 말
한 때 나에게 시는 지고의 가치였다. 그러나 시가 구원이 되지못하리라는 것도 오래 전에 알았다. 한 일 년 전부터 나는 어 떤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의 미가 큰 만남이다. 일상에서 조차 그 명상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고 하니 시가 멀어지고 있다. 제행무상이라더니, 이제 나의 시여
도법, 생명 평화 탁발에 부쳐
맨머리 사나이 하나 바랑 메고 간다
걸음걸음 마다 목탁소리 난다.
흙먼지 속 그 사나이
질주하는 차들 향해 손 흔들어도
수상하다는 듯 차들 더 빨리 그냥 스친다.
어쩌다가 신작로에 차가 나타나면
손 흔들어 주던 어린 시절 생각난다.
차 탄 사람들 흐뭇하게 반기면서 멀어가고
우리도 그 시절도
세월 먼지 속으로 까마득 사라졌다.
몇 날 며칠을 달려야 종착역에 닿는다는
어느 꿈같이 먼 나라의 이야기도 들었었지
인적 드문 외딴집 어린 소녀는
오래오래 철길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다가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 흔들면
기관사도 따라 손 흔들고
그러던 그 소녀 한참을 보이지 않아
역도 아닌 그곳에 기적소리 멈추고
열병에 잦아들던 소녀의 들것이 차에 오르고
그리고 그리고 다시 소녀는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 흔들게 되었다는,
그 사나이 오늘도 걷는다.
그 길 방방곡곡으로 이어지고
길 위에서 나부끼는 장삼자락
참 크나큰 법문이다.
어머니 산
어머니 산의 품안에 있으면
전설 속 이야기처럼 길을 잃어 어머니 산의 정상을
오를 수가 없습니다.
눈물로 어머니 산을 여의고 나서
그 긴 산 그림자도 닿지 않는
아스라이 먼 곳에 이르러서야
은빛 잔설을 덮어쓴 채
어머니 산의 꼭대기가
어슴푸레 보일까요.
病中
이제껏 저 불빛
가물가물 반짝이고 있다.
끊임없는 바람에도
꺼질 듯 꺼질 듯
다사로운 저 불빛
어머니 아직도
날 지키고 있다.
행복 시트사 김씨
행복 시트사 주인장 김씨는
날마다 헌 곳을 깁는다.
소파나 의자의 헌 곳을 깁고
고장 난 선풍기도 고쳐 깁고
황소바람 구멍은 따스한 입김으로 깁는다.
깁고 기우면서 헐어가는
김 씨의 작업복을 기우면서 늙어온
그의 부인은 오늘 옆에서
지난 여름 쏠아버린 김씨의 수의를 깁는다.
오늘처럼 한가한 날 김씨는
젊은 날 따습던 한 시절을
추억으로 깁지만
지붕 위를 건너다니면서 피고 지는
세월의 누더기는 기울 수 없어
자꾸 앞으로만 휘어지는 허리를 펴고
먼 하늘에 눈을 둔다.
마수
아직 꽃샘바람 시새우는 날
이제 막 좌판을 벌이고 있는 난전 앞에서
껑껑 언 동태 값을 묻는다.
사겠다는 허락도 채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칼질을 해대는
주인 아줌마의 비린 앞치마 자락에
이른 햇살 한 자락 얼핏 비껴든다.
마수손님인데 하면서
살찐 꽁치 두어 마리
머리와 꼬리 잘라내고
수입 꽁치라 맛은 덜 하이더만
잘 익으라고 몸통에 슬쩍 칼금도 내고
왕소금을 술술 친다.
나 평생
고객들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는
정한 시간에 들고나는 일터에서
그 어느 아침 한 때가
저렇듯 살뜰하고
싱싱하게 번쩍인 적 있었을까
권 오 규
최서방 다녀가다
잠바
국민학교 동창생의 주름살
낙엽
쑥을 뜯으며
콱 맥혀
제7부두의 저녁
시인의 말
한 때는 삶에 있어 시는 무용지물이 아니겠나 생각했다. 병들 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도 될 수 없기에.
하지만 요즘 와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시가 생명을 구하거나 밥처럼 주린 배를 채워주거나 하지는 못해도 시는 사람들의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빗질해 주는 그런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최서방 다녀가다
굳이 막을 수야 없다 해도
어차피 흐르고 또 흐르는 세월 속에
하루라도 더 묵었다가 갔으면 좋으련만
뒷동산 가랑잎도 잠이 깊은 마음 편한 冬三인데도
오늘은 아마도 간다고 하던 것 같은데…….
먹고 사느라고 물도 공기도 지옥 같은 서울서
금방 왔다가 금방 가는 최 서방
不富無以合親
不施無以爲人
是故人必 從事於富
사람은 돈이 있어야 된다는 말인데
겨울바람 같이 빈한한 처남 살림
두터운 안개처럼 인정 한 번 못 펴 보고
부끄러운 낯으로 또 보내야 하나 보다.
꿀
한 병
이
가벼운 무게.
잠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닳고 또 닳아도
꿰메고 또 꿰메고 입고 또 입을 것을
황닥불 놓다가 팔꿈치 눋고
색깔이 그렇다고 덜렁 내다버려
종적을 감춰버린 30년 전 잠바 하나
입고 살았으면
매사에 신중한 중후한 성격으로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라도 됐을지 모를 것을
그만 나는 가장 큰 스승을 버리고만 셈이었다.
담배 수납해 가지고 장날 맞추어
잿마루 10리 지겟길 걸어 나와
아부지가 사 주었던 ×표 잠바
만약에 내가 지금도 그 옷을 입을 수 있다면
슬픔과 기쁨에도 꿈적 없음은 물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겠다.
국민학교 동창생의 주름살
산다는 게
뭔 지…….
저눔아 볼때기에도
어느덧 굵게 패인 주름살을
봐야만 한다.
수준 맨날 그렇고
고집 늘 맨날 고모양이었고
안 지려고 욕하며 대들던 새끼가
주름진 얼굴로
맥빠진 기색으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이래도 내가 이눔아를 계속 미워해야 하나.
그래도 내가 이눔아를 끝까지 미워해야만 할 것이냐?
그걸 몰라 또 다시 속상할 적에
새끼의 볼때기에 깊은 주름살이
허무의 산을 넘어
눈물의 강을 건너
날카로운 검이 되어
나를 겨눈다.
낙엽
길가에 구르는 묵은 낙엽조각을 보면
포장마차에라도 데려가서
술 한 잔 사주고 싶다.
한 마디 말없이 앉아 있어도 좋아.
지쳐 쓰러져서 잠이 들어도 좋아.
나그네, 마지막을 향한 이웃 나그네
그의 맵호한 이력사 앞에서
나도 지나간 고운 추억에
수위 높게 깊이 잠길 수 있을 테니까.
쑥을 뜯으며
“쑥아 너는 집이 어디냐?”
(앉은 자리가 집인지 아무 말이 없구나)
“쑥아 너는 왜 사노?”
(영문도 모르고 사는지 아무 말이 없구나)
콱 맥혀
콰악 맥혀
콱-콱 맥혀
단풍 든 감잎 맞중이 치이고
지도 같이 맞중이 치이고
숨만 그저
벌턱 벌턱.
제7부두의 저녁
내 너와
살지 못하고
허물어진 성둑 위에 달빛 같이 되었다가
어쩌다 오늘은 여기서
홀대했던 소금들의 본색을 바라본다.
남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행복이란
여자의 사랑인 것을
저기 꽃같이 피어나는 영도의 불빛은
행복의 증거일까?
불행의 고통일까?
사람마다 배신하고
사람마다 원수가 된
이상한 사람
낯설어서 더 좋은 부산 제7부두의 저녁
덕도 해도 없는
먼 바람만
소금처럼 찾아와서
집적거린다.
임 두 고
누이
폐교 일지
새 봄
시인의 말
세상을, 삶을 보는 눈도 귀도 다 멀었다. 내가 너무 낡았다. 아니 늙었다. 이제는 녹 쓴 창도 칼도 다 내려놓고 덜컹거리는 방패 하나로 남은 세월과 맞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궁극의 삶은 이렇게 버리면서 채워야 하는 것일진대, 끝내 시조차 버리면 서 남은 생의 여백을 마저 채워가야 할 일이 허허하다.
누이
울 아부지 허우대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서 있던
마을 앞 들판은 푸른 청보리 바다.
장승이 굽어보는 들판 저 건너 산허리를
에둘러 지나가는 철길 따라
아지랑이들 아물아물 떠나가는지 돌아오는지.
남몰래 서울행 새벽 열차를 탔다가
꼬리표를 등에 달고 되돌아 온 누이의
실룩거리는 입 언저리 같기도 하고,
말없이 눈만 부라리시던 장승 같은 울아부지 넘어뜨리고
기어이 방직 공장으로 떠나가는 누이의
맨 종아리에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같기도 하던
아지랑이, 개울가 방뚝길에도 아물아물.
장승처럼 허우대 큰 울아부지
흰 고무신에 베잠방이 걷어 올리신 채
그 방뚝길로 들일을 나가셨다.
나비들이 까불락까불락
지천의 꽃향기를 나르고 있는 방뚝길에는
찌를래찌를래 온 몸에 가시를 두른 찔레꽃들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탈치거나 꼬집어 내 몫의 맛난 것을 앗아가면서도
언제나 가시 손톱은 숨겨 둔 채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찔레꽃 누이여.
그 방뚝길을 떠난 멀지 않은 훗날에
장승도 지켜보지 않는 낯선 시멘트 길바닥
난데없는 바퀴에 찢기고 만 새하얀 찔레꽃이여,
누이여.
지금은, 전생에서 본 듯한 어느 방뚝길의
찔레꽃으로 피어 있는가.
장승으로 서 있는가.
폐교 일지
겨누고 겨누어 겨우 찾아든
이 시골 벽지 학교.
선생님 여섯 명에 전교생은 겨우 네 명뿐이라나.
이미 시골 마을은 너무 늙어 고꾸라져
넓은 들판도 높은 산봉우리도
짊어지기 버거워 보이는구나.
웬만하면 버리고 떠난 이곳을
끝내 버리지 못한 학생들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니
그도 학교냐며 비웃는 아내가 그지없이 야속하다.
애와 람이, 그리고 명이와 헌이 이렇게 네 학생을
우리집 아이들인양 가르치리라 허허한 마음을 달래며
곰팡이 핀 사택 벽지를 뜯어내고
주위 땅을 일구어 갖은 씨앗을 묻는다.
그 씨앗들이 채 꽃을 피우기 전에
소리소문처럼 폐교 선고가 날아들고
학생들과 둘러앉은 점심시간
내가 거둔 푸성진 상추쌈도 씁쓸하기만 한데
끝내 폐교로 남겨질 운명인 줄
아는지, 아랑곳하지 않는지.
여름 내내 채송화며 해바라기꽃은 뜰을 밝히고
호박꽃은 사택 둘레둘레에 서성거린다.
시나브로 학생들의 자전거에도 가을바람이 실리고
나 홀로 외딴 사택 방에 꿀밤처럼 떨어진 채
시를 껴안고 뒹구는 깊은 밤.
이제 그만 이 학교도, 시도 놓아주라며
인적 끊긴 창 밖 감잎 지는 소리가
툭, 툭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데
다 늙은 시골의 밤이 너무 깜깜하기만 하다.
새 봄
버들강아지 숨을 쉰다.
삶을 이겨
죽음을 빚어내던 진흙 같은 꿈들일랑
지난겨울 깊은 눈 속에
깨끗이 순장하라.
산수유 진달래 살구꽃…….
봄 숨결이 미치도록 확확거리거든
그 펄떡이는 가슴으로
술잔을 채우 듯
다시 꿈을 채울 일이다.
김 금 숙
토마토
냄비와 국자의 전쟁
마야미용실
은행나무
풍경
시인의 말
어둠은 장식을 지우고 나는 뼈대로만 남는다.
토마토
다 익은 것은 없나요?
다 익으면 안 되지요, 익기 전에 따야지요
몽고반점처럼 여기저기가 푸릇푸릇한 토마토
그럼 언제 익나요?
이 삼일 그냥 두면 빨갛게 되요,
그럼 익은 건가요?
빨갛게 된다니까요!
그럼 그게 익은 건가요?
그냥 드시면 된다니까요!
죽은 뒤에야 숙성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토마토밭
주인 여자는 절대 풋풋함이 사라진 다 익은 것을 따지 않는다
포주 같다
냄비와 국자의 전쟁*
이틀 전 안동의 서점에 주문을 해서
지구를 깔고 앉아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국자와 냄비의 전쟁을 사서 온 밤
내 국자와 냄비는 잘 있는가
싱크대와 수저통에서 각각 단잠에 빠진 냄비와 국자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감자를 삶다가 숯이 된 냄비를 깔고 앉은
코팅이 벗겨진 냄비 오늘 아침 애호박 볶은 흔적이 선명 해서
다시 한번 마음이 놓인다
불 위에서 담금질 당하는 게 일상인 냄비에게
국자가 할 말이 있다한들 뭐 그리 대수인가
혼자 궁시렁거린다
다 끓여 놓은 국이든 찌개든 푸기만 하는 게
뭐 그리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한번 궁시렁거린다
그러다가 수저통에서 눈이 움푹 파인 국자와 눈이 마주 친다
움푹 패인 눈이 그림자가 깊다
*마하일 엔더의 동화책
마야미용실
마야미용실에는 마야부인이 살고 있지요
팍팍한 먼지뿐인 읍내 거리
양철지붕 옛 경찰서 자리를 지나
농협 옆 골목에서 몸을 기역자로 꺾어
좁은 골목을 나뭇가지처럼 확 휘어잡으면
엄동설한에도 마야부인 공중에서 그네를 타고 있어요
빙글빙글 도는 그네에 새겨진 빨간 줄 파란 줄
마야부인의 피와 살이지요
파마약은 마야부인 손가락 지문을 먹고 살지요
할매들의 허연 머리카락
새까맣게 물들여 뽀글뽀글 탱그르르 말아 올리는 찰나
마야미용실 룸비니 동산 바람처럼 즐거워지지요
이 때다 싶어
벌겋게 단 연탄난로 위 알루미늄 주전자 속
배 생강이 잘 만난 피와 살처럼 바글바글 끓지요
두부가 왔습니다, 손두부가 왔습니다!
두부장수 아저씨의 갓 만든 따끈한 종소리
홀로 사는 할매들의 질긴 저녁이
한순간에 말랑말랑해지고
매일 속세의 온갖 번뇌 싹둑 잘라내는
의성읍 후죽리 마야미용실에는
마야부인이 정말로 살고 있지요
은행나무
보건소에 간다 사는 것의 옆구리가 결린 지 오래다
아줌마 한시가 급해요
갑자기 한시가 급해진 몸 벌컥 움켜쥔다
엉컹퀴꽃 가시 같다
낯선 이웃처럼 다가온 몸 초인종 소리처럼 나를 불러낸다
할 말이 없다
대학병원 응급실 잠이 든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창 밖에서 흔들리는 노란 수천의 돛단배
돛단배를 타고
달맞이꽃처럼 얼굴을 포개고 잠이 든
노란 갑사 저고리
팔랑팔랑 따라가면
그 곳 나라 봉창을 열어놓고
늙은 선인장 호텔*처럼 속 칸칸을 비워 내
새와 벌 나비 개미 지렁이 전갈 지네가
바람이 비가 천둥이 번개가
칸칸이 들어 앉아 사는 내 몸 한 그루
밤새 가을비 내린 먼 길 돌아
노란 돛단배를 접으며 어머니 창문 밖에 서 계신다
* 선인장 호텔: 브렌다 기버슨의 동화
풍경
제주도엔 당근밭에도 문이 있더라
배추밭에도 쪽파 밭에도 문이 있더라
검은 담을 치마처럼 빙 둘러 입고
핀침처럼 슬쩍 꼽는 흉내만 내고 있더라
바람이 구멍 숭숭 뚫린 치마 속으로 들락날락
오멍가멍해도 문은 빙긋이 웃기만 하더라
김 진 택
HOTEL DARCY
제주도
궹이 밥풀
조용한 시간
깊은 가을입니다
잊어야지 하면서도
레일이 놓여 있는 긴 둑
시인의 말
거짓말을 두어 가지 하기로 했다.
나를 가진 어머니는 다르시 호텔의 앞마당에서
담장너머에 무리지어 핀 무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뱃속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사실 다르시 호텔은 파리 시내의 어느 누추한 골목의 끝에 서 있는
누추한 몰골의 건물이다.
이 거짓말 역시 먼저 살다간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을 약간
각색한 것이다. 늘상 말하지만
시는 독자에게 새로운 느낌을 촉발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느낌이 길고 강하게 가면 시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시를 덮고 나서도 시의 여운이 오래가는
우리의 녹차 내음 같은 시를 쓰고 싶다.
HOTEL DARCY
포른한
십자화
무밭
담장 너머 그 쪽은
시간이 고여 있어
바람이 자고 있었다
1951.02.21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새끼고래 뛰노는
녹색바다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세상은
풍찬노숙
안개 자욱한
시장 낮은 처마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동네였다
가끔씩
슬픈 노래가
맘을 달래주는 때가 있었다.
제주도
30년 전의
유도화
바람 부는
용두암
갈색 평원
저 너머
뿌우연 구름산
귤밭 건너
몇 군데
소나무
가슴에 걸리는
수평선
궹이 밥풀
유년의 내
공책 찢어 만든 딱지 같은
구름 몇 장이
누런 얼굴로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나는 땅바닥에
코를 박고 사는 사람
다 핀 담배
하수구에 던지고
침을 뱉는다
낮은 담장 위에서
노란 눈의 도둑 궹이가
이야옹!
그 놈이 보는 데서 오줌을 눈다
조용한 시간
가을
강물
느릿느릿
저녁 햇살 받아
저물고
젊은 아버지
빈 지게 지고 시오리 장길 돌아오신다
저쪽 산전엔
고추대궁 매운 연기 배 깔고
낮은 고랑으로 기어가고
안개인가
저녁 안개인가
뭐 그런 것 수런수런 피어나고
나는
연필심 빨며빨며
삐뚤삐뚤
갈짓자 필법
누런 말똥 일기장에
길었던 왼 종일을
적고 있다.
깊은 가을입니다
또 다시
10월입니다
그리고
내 사념의 갠지스 물은 평원을
뱀이 되어 구불구불 저녁 햇살을 받아
화려하고
화려합니다
무릎을 갉아먹는 결핵균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그들도 쉬고 있는 오늘은
지팡이 고쳐 잡고
길 위에 서려고 합니다.
앞서간 시간들
잃어버린 사람들
어디쯤 흘러갔는지
저 먼
은하수 모래언덕까지
쉬어쉬어 가려고합니다
정말 가을이 깊었나봅니다.
잊어야지 하면서도
멀리멀리 갔다가 혼자 다시 돌아오는
산울림
살아도
살아봐도
목마른 소금세상
가끔씩은
오월의 담장에
장미꽃이 피지만
그 꽃길 따라 주욱 걸어가면
울고 있는 너의 그림자
주고 간 아미타불 물병
그 속의 세월이 모두 다 휘발될 때까지
날 잊지마 하던
서걱이는 모래의 목소리 아직 귀에
에코에코 들려오는데
넌
지구 밖 어느 먼 별에 갔다가
메아리로 돌아와
내 가슴 울리려나
레일이 놓여 있는 긴 둑
그해는 건조했었다
그해는 건조했었어
오래오래 가물어
저 아래 철길 담장엔
먼지 뒤집어쓴 맨드래미
먼지 뒤집어쓴 나팔꽃
피지도 않는
나팔꽃 낭구
드르르르
드르럭드르럭
치키긱치키긱
대포나 쓰리쿼터
장갑차
혹은
시멘트를 싣고
귀신소리를 내면서
멀리 사라지던
화물차
곱배열차
50량이 넘다 넘어
왼쪽 입술 밑
노상 버즘을 달고 다니던 아이
자라고
늙어서 지금은
창밖 나팔꽃 얘기나 하고
권 기 태
간이역
금잔화
산촌에서
강릉 가는 길
고물상에서
잃어버린 날들을 위하여
시인의 말
세월이 한 해씩 더해가니 나와 관련된 주위의 일들의 빈도수 도 더해지는 것을 어쩌랴. 책임과 의무는 점점 늘어 가는데 능력은 점차 쇠퇴해지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아온 생활, 늘 잘 하려고 다짐하면서 앞으로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나 잘 될지는 모르겠다.
시를 쓴다고 덤벙댄 지도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되었다. 남들은 시집을 몇 권씩 내었으나 여유를 가지고 시집 한 권 만들지 못했으니 면목이나 염치가 없는 무지한 형편이다. 엉뚱한 짓을 하거나 쓰는 일을 접은 것도 아니었다.
형편이 허용치 않았음을 핑계로 그냥 궁색한 변명을 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남에게 의지하거나 평가받지 않고 나의 힘과 능력으로 건강이 허용하는 한 열심히 순수한 시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동인들의 순수하고 신선한 마음과 늘 함께 함을 기쁨과 보람으로 생각하며 원고 독촉을 여러 번 받아 금회 동인지 발간을 늦춘 데 대하여 죄송하다.
간이역
측백나무 푸른 울타리를 따라
끝없이 늘어선 평행선 길
몇 개의 외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벤치에는 기다림에 지친 바람이 감돌고
그 옆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떠난
언젠가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며
언젠가 떠나야 할 시간을 기다리며
긴 고요를 깨우며 달려올 열차를 기다린다
어디선가 금방 달려와
이 허전하고 외로운 공간을 가득 메울
오랜 친구 같은 어둠을 가르는 기적소리
긴 기다림 끝에 반가와 부둥켜안고
한 아름 환희를 나누고자 하는
그 고즈넉한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세월의 뒤안길에 묻었던 추억의 공간
측백나무 둘러선 안개속의 간이역
철길을 달려가는 마음의 빈터에
한 줄기 불빛으로 다가오는 연인처럼
우리들 모두는 그렇게 또 만나고 싶다.
금잔화
가고 싶다
보고 싶다
부둥켜안고 싶다
어느 옛날에 만났던
아리따운 새악씨
타는 입술
불타는 눈빛
보름달 같은 자태
나지막한 키
실루엣 곡선의 몸매
지는 단풍잎처럼
흔들리는 바람의 손짓
찬 바람 불어 서리 내리면
돌아서 가야할 이별의 꽃.
산촌에서
해동한 후 오랜 가뭄 끝에
비탈밭 비닐 덮인 이랑 사이
오늘은 한가한 봄비가 내린다
이발하다 도망간 아이의 머리처럼
산불이 그을고 지나간 언덕배기
몇 해 전 살다 떠난 민초들은
땀 절은 황토색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쉬고 있다.
고무신 거꾸로 쥐고 땅을 치던 아비가
농사를 접고 떠난 빈 집
풍우에 퇴락해가는 초벽
기울어 쓰러지는 흙담장
끊어진 길엔 인적소리 없고
산밭 뙈기는 잡초에 묻혀있다
도시로 떠난 자식 돌아오지 않고
아비 어미는 살귀재에 뉘우니
가다리는 누가 하고
메 거두기는 누가 할고
들은 산이 되고
길은 숲에 묻혔으니
노랗게 핀 밤꽃 진한 향기
아비 어미의 환생인가.
강릉 가는 길
동해방면 무궁화호 완행열차는
때늦은 봄안개 속으로 떠난다
졸참나무 소나무 울창하고
더덕 칡꽃 솔향기 가득한
영동선 철길 위를 달린다
속박에서 벗어난
모처럼 홀가분한 단신으로
손바닥만한 들판을 가로질러
손바닥만한 하늘을 가로질러
국토의 허리를 가로 질러
내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며
심장의 터널을 통과하여
협곡과 협곡 사이사이
철교를 건너 시원하게 달린다
급류를 이루는 강물의 웅장한 포효
파아란 손을 흔드는 감자꽃
노란 물감을 칠하는 보리밭
하늘 향해 키 자랑하는 수수들
간이역 마당에 신음하는 벌채목
옹기종기 모여 꿈꾸는 마을 따라
하얀 포장길은 하늘로 굽이쳐 오른다
잎담배 넓은 잎사귀들의 노래
하늘 향해 열창하는 산밭 한 자락
콩밭머리 늙은 허수아비 허리춤
땀냄새 찌든 옷깃에 쉬어가는 바람
열차는 협곡을 따라 산맥을 넘어
분천 승부 석포 동정 철암 백산 심포리
흥전 도계 신기 상정 미로 동해역을 향해
612호 열차는 달린다.
고물상에서
쓰다가 버린
낡고 부서지고 찌그러진 몸으로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와
빈터에 나뒹구는 처지가 처량하구나
온갖 혼잡한 세상 한가운데서
찢어진 소파에 기대어서
아기 젖병을 물고 있는 자전거
찌그러진 깡통더미에
브래지어에 스타킹을 걸친 냉장고
고철더미 녹슬은 쇠붙이에는
힘겨운 세월이 매달려 있고
비수 같은 무수한 과거가 잠들어 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공간
버림받은 군상들이 쓰러져 울고 있다
기구한 일생을 다하여
꺾이고 부서지고 퇴색된 몸으로
허물 많은 일상을 접고서
아무렇게나 던져진 잔해로
그들은 울고 있다.
잃어버린 날들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넘기는 나의 노트는
기억할 수 없는 날들을 위하여
기억하고 싶은 날을 기록하고
모든 이 앞에 떳떳하기 위하여
사랑의 환희와 고뇌를 쓴다
죽은 이와 이별을 되살리고
헤어진 이들을 기억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삶에 대한 신뢰와 약속을 정리하고 인
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죽음 앞에 초연하기 위하여
나는 하루 한 장씩 메모를 한다
과거를 거울삼아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초연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먼 훗날의
잃어버린 날들을 위하여.
∥특집 1∥
2003년 임병호 시인에 이어 백승초 동인이 2006년 4월 9일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동인회의 맏형으로서 우리를 묵묵히 이끌어 오시던 백승초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정리하는 지면을 특집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고 백승초 동인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의 문제
- 백승초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
김윤한(글밭 동인)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의 문제
- 백승초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
김 윤 한(글밭 동인)
1. 백승초 시인의 삶과 문학의 편린
백승초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수년간 투병생활을 해 오던 간 암으로 말미암아. 시가, 시인이 도무지 돈이나 삶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한 평생을 시문학과 함께 해 온, 어쩌면 세상 물정과는 동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나마 그 시대의 시적 순수를 간직한 드문 시인이라는 평과 함께.
백승초 시인의 본명은 백부강이다. 궁핍하게 살 무렵 ‘부자로 건강 하게’ 잘 살라고 지어진 이름인 듯싶다. 백승초라는 필명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식적으로는 글밭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대외적으로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승초 시인은 1945년 안동시 명륜동에서 아버지 백동춘과 어머니 권남숙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주위의 이야기로는 막내로 태어난 탓에 부모나 형, 누님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안동초등학교와 안동중학교, 경안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경제학과에 다녔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3년 몇 개월을 다니다가 군 제대 후 병무청에 잠시 근무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권혜숙 여사와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이후 1975년부터 작고 직전까지 안동시내에서 가게를 운영했다.
문학인의 삶을 되짚어 보면 크게 영향을 받은 스승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중학교에 다닐 때 국어를 담당했던 수필가 김시헌 선생1)의 영향이 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고등학교에 들면서 본격 적으로 문학의 습작기에 돌입한다.
그 당시 동료 중에는 고등학교 때 이미 개인시집을 낸 바 있는 신승박 시인과 함께 문학 활동을 했으며 당시에 현재까지 안동에 이어져 내려오는 ‘맥향’ 문학동인회 결성 멤버로 참여하고 나중에 맥향 시화전과 함께 백승초 개인 시화전을 따로 열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술은 마시지 못했으나 문우들과 술을 즐겨 마시기도 하였고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등 어린 시절 습작기에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의 객기도 상당했다고 한다.
친구였던 백양만과 부인 권혜숙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책을 많이 읽었으며 젊었을 적에는 자신 스스로 염세주의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인 의 범주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평소 문학 활동을 하 면서 지켜본 바로도 속내를 좀체 내색하는 법이 없이 우리 동인회 의 인자한 맏형으로 남아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한 시기는 글밭 동인회 가입 시기와 때를 같이하는 1988년경부터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작품 에 대한 자기 검열이 투철하여 쓴 작품이 있음에도 어느 정도 완성도가 확보되지 않은 작품은 발표를 하지 않았다.
1) 백승초 시인과 중고등, 대학 동기인 영문고등학교 교장 백양만의 술회, 학창시절의 이야기는 대부분 백양만의 증언에 의하였다.
2. 그의 문학 - 삶과 죽음에 대한 관조 또는 응시
그가 남긴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2)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흐름은 삶 - 생활 - 죽음에 대한 담담한 성찰 또는 관조의 시각 이다.
이러한 시 세계는 그가 남달리 사색을 좋아하고 또 독서에 있어 서도 그러한 편향을 보인 것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수업 당시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신승박 등 그의 문우들이 그랬던 우울한 시대의 그림자와 연관 이 있다.
아울러 결국은 그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던 근본적 원인, 20년 넘게 B형 간염균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그의 일상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회복하기 힘든 병과 직접 마주하면서 죽음이 바탕이 된 그의 삶과 문학이 보다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부 인 권혜숙 여사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무척 예민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소한 일도 그냥 흘러 넘기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소개할 몇몇 시편에서도 사소한 일상에 대 해서도 생활 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20년 가까이 그의 적성과는 전혀 무관한 상업에 종사했던 것도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20년을 상업에 종사했지만 우리 가 보기에 철저한 프로정신을 가진 장사꾼은 못되었다. 그러한 현 실과의 부조화는 오히려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그의 시 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던 결과를 갖고 오게 된다.
(사람은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나는 다만 염세주의적인 범주에 속할 뿐, 남들이 특히 내 가족이 그걸 이해하지 않을 뿐입니다.)
- ‘무제 3’ 일부
시인은 스스로 시에서 자신을 ‘염세주의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규청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그의 ‘가족이 이해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말과 같이 염세철학의 범주에 있지는 않다. 그의 세계가 그 쪽에서 출발한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유고집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의 세계는 죽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되 역설적으로 삶과 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사랑의 시각이 짙게 배어난다.
유고집 전반의 단어 사용 빈도에서 보더라도 ‘죽음’이 단연 으뜸 을 차지하는 것처럼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삶의 일부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단절이 아니라 삶의 한 분야로서의 죽음이다.
그의 시 세계는 삶의 최종적 완성단계로서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일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상의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의 성실한 준비 단계’등으로 작품을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문을 포함한 시 전반을 읽어보기로 한다.
2) 백승초, 이제 바람이 와서, 사람과 문화, 2006. 5. 27
3. 일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상의 문제
유고집에서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문제는 미리 언급한 것처럼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의 문제이다. 책에서는 1부 발표 시, 2부 미 발표 시, 3부 문학청년 시절의 시로 나누어 싣고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죽음’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 가운데 초기 습작의 시들에서는 비교적 ‘죽음’의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근본적인 방향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편의를 위해서 발표 시기를 무시하고 비교적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는 않으나 죽음을 포함한 삶의 문제를 비교적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는 시들을 대상으로 ‘일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상의 문제’라는 시각에서 읽어 보고자 한다.
고층 아파트 피뢰침에 걸린 / 초사흘 달이 파르르 떨고 / 스산한 초겨울 밤은 더욱 깊게 와 있는데 / 노모는 바람이 되고 싶어 / 내 난감한 가슴에다 가파르게 점을 찍는다. / - 아범 내 죽으면 어데 묻 힐꼬.
- ‘실향’ 일부
비교적 이미지가 순화되어 나타나는 시에서도 이처럼 일상의 문제는 일상 자체의 감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대한 성 찰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나이 오십이면 이제 물드는 단풍인데 / 나는 어느 나무 어떤 색깔 의 단풍일까요. / 농염한 단풍나무의 붉음도 아닐 테고 / 노랗게 멋스런 은행잎도 아닐 텐데 / 나는 그저 누렇게 메마른 굴참나무 잎이나 될까
‘내장산 단풍 열차’ 일부
아내가 잠들면 / 새벽차를 타고 나는 떠나와야 하는데 / 영 잠들지 못하는 아내는 / 까닭없이 시들어 파리하게 가슴만 떨고 / 바람 설치는 복도 긴 의자에 잠시 몸 뉘어 보면 / 야속하게도 내겐 잠이 / 오랑캐처럼 오는구나.
‘병실의 아내 2’ 일부
손 내밀 듯 아내는 내게 / 모든 걸 맡겼는데 나는 왜 / 어루만져 간 수하질 못하고 / 중환자실 딱딱한 참대 위에 눕혀 놓고 / 깎아도 자라나 는 손톱처럼 / 가슴에 자라나는 후회를 나는 어쩌지 못한다.
‘병실의 아내 3’ 일부
앞의 시는 단풍 구경을 하러 가서 느끼는 감회를 적은 것인데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서도 시인이 느끼는 감정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화려한 단풍을 보고서도 자신을 빗대어 ‘누렇게 메마른 굴참나무’ 정 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시인이 보는 시적 관점에는 이처럼 일생의 관점에서 일상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든 아내를 병실에 두고 ‘야속하게도’ ‘오랑캐처럼’ ‘잠이’ 쏟아지는 시인의 자책을 통해서는 부부 사이의 잔잔한 일상의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시에서도 병실에 누운 아내를 바라보며 갖는 심사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간은 외출 가고 / 쓸개는 어디 장기출장이라도 갔을까. / 내장 죄 다 떼어 바치는 장사꾼 십오 년 / 내 일상의 매듭은 / 거기 긴 그림자로 누워 / 속절없이 황폐한 쑥대밭이다.
- ‘고독이란 짜식이’ 일부
산다는 건 승부가 아니야. 그저 하나씩 소리 없이 무너지는 거지. 등신처럼 아득하게 위안도 삼으며 오늘도 나는 비스듬히 꺾어지는 내 가난한 술잔의 아픈 각도를 얼마큼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 ‘부부싸움, 그 무모한 변천’ 일부
시인이 평소 질환을 갖고 있었던 내용이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앞의 시는 삶을 위하여 ‘내장 죄다 떼어 바치는 장사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은 ‘속절없이 황폐한 쑥대밭’임을 되뇐다.
또한 부부싸움을 통해서도 젊을 적에는 치열했지만 나이 들수록 ‘하나씩 소리 없이 무너지며’ ‘가난한 술잔의 아픈 각도’를 느낀다. 부부싸움 하나도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닌 단편적인 문제가 아닌 ‘일생의 관점에서 나타나는 일상’으로 생각한다.
4.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그의 죽음은 여느 사람들처럼 슬픔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 은 시인이 오랜 기간동안 이에 대한 조용한 관조와 성찰의 시간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생명을 달리하기 오래 이전부터 그의 시에서는 죽음의 문제들이 자주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 순한 죽음의 문제가 아닌 삶을 통해서 죽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관점으로 나타난다.
청야(靑野)3)가 묻힌 묘비 옆에 피어 있는 / 하얀 찔레꽃을 보았나요. / 가슴 저린 그리움으로 피어 있는 / 그것이 정녕 조용한 울음인 것을
‘하얀 찔레꽃’ 일부
친구 잃었으니 저승 가져가지도 못할 까짓 돈 몇 푼 잃은들 뭐 대 술까, 애꿎은 술이나 먹고 죽은 친구 술도 내가 먹고 오늘은 술이란 놈이 내 설움 족히 마시는구나. 술 취해 인사불성이면 소락소락 지껄이다 친구 옆에 드러누워 코 골고 잠이 들어 새벽이면 바람에 몸 눕히는 잡풀처럼 다시 일어나면 되지만 저 관속에 누운 친구는 꿈에 지쳤는가. 이제 영영 일어나질 못하는구나.
- ‘문상’ 일부
2003년도에 작고한 고 임병호 시인의 무덤가에 피어 있는 ‘찔레꽃 을’보고 죽음과 그에 대한 조용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시 는 죽은 친구를 문상하는 자리에서 왁자지껄 고스톱을 치면서 죽은 사람 앞에서 돈 몇 푼 딴들 그게 뭐 대수냐고 반문한다. 술이 취해 죽은 ‘친구 옆에 드러누워 코 골고 잠이’들면 시인은 다시 일어나지만 ‘저 관속에 누운 친구는’ ‘영영 일어나질 못’하는 것을 비유해 삶과 죽음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약속 받으면 / 삶이 얻어지고 // 낙엽 됨을 서러워 않으면
/ 봄을 움트게 한다. // 내가 뜬금없이 여기 앉아 있음은 / 죽음 때 문일까? / 삶 때문일까?
- ‘약속’ 전문
‘죽음을 약속 받으면 / 삶이 얻어‘진다’고 말한다. 시인이 보는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닌 연장선상에 서 바라보는 삶의 일부인 셈이다. ‘낙엽’을 보고 ‘서러워 않으면 ‘봄’이 ‘움트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묻는다. 자신이 존재함은 ‘죽음 때문일까? / 삶 때문일까?’라고.
어느 날 갑자기 울고 싶을 때 / 벗어놓은 내 옷가지가 / 의자 모서리에 후줄근히 걸려 있을 때 / 그 때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 내 영혼이 말없이 빠져나오면 / 내 육신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 나는 허공인 것을 / 나는 무적인 것을
- ‘생각’ 전문
어느 날 문득 우울한 심사와 만난다. ‘벗어놓은 내 옷가지’ ‘의자 모서리에 후줄근히 걸려 있’는 옷가지를 보며 문득 그 옷가지가 자신 의 ‘영혼이 말없이 빠져나’온 뒤의 ‘초라한 육신’처럼 덧없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일상에서 이처럼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이에 언제나 일상과 함께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결국 그 모든 것이 결국 ‘허공’임을 간파한다.
3) 임병호 시인의 호
5.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이글의 텍스트가 물론 그의 유고집이지만 ‘죽음’은 시인의 유고집이 라는 선입견을 떠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적 관점은 마침내 ‘죽음을 맞는 시인의 자세’와 연결 되어 나타난다. 삶과 죽음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가지고 마침내는 자 신의 죽음을 침착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응시 또는 관조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을 두고 시인으로서의 일관된 시 세계 또는 그가 지녀온 삶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나면 / 남은 건 빈 껍데기 육신뿐인걸 / 어느 날 느닷없이 / 저승사자가 내게 와서 / 내 호주머니 박박 뒤지면 / 그땐 벌써 풀칠하다 버린 풀솔처럼 / 뻣뻣한 침묵뿐인걸 / 아마 저승사자도 그땐 / 바짝 약이 오를게다 // 잠 안 오는 날 장롱을 달달달 뒤지며 / 밤이 하얗도록 / 나는 버릴 것을 찾는다.
- ‘죽음준비위원회2’ 전문
‘잠 안 오는 날’이면 시인은 ‘장롱을 달달달 뒤지며 / 밤이 하얗도록’ 이승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찾는다. 어차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라면 시인은 찬찬히 하나씩 일상을 정리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실로 인식한다.
자신을 데리고 갈 저승사자가 밉기도 하겠지만 이미 학습한 대 로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구걸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승의 모든 일상을 정리하고 나면 저승사자가 ‘호주머니를 박박 뒤 지’더라도 ‘풀칠하다 버린 풀솔처럼 / 뻣뻣한 침묵’만 남게 될 것 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시인은 결코 슬퍼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노려보는 시인의 퀭한 눈빛과 유달리 밖 보다는 안으로 강했던 시인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남들 보기에는 푸근한 애처가로 보이지만 실은 노곤한 햇살에 찌든 중년 인 걸 계산대 위에 놓인 물건을 하나씩 스캐너로 찍으면 금세 가격이 나오는데 문득 나는 내 값도 알고 싶다 삭아버린 내 몸값을. 내 몸값도 찍어봐 요. 계산대를 지나오는데 아가씨가 이만 삼천오백육십 원입니다라고 말한 다. / 그래도 아직은 몸값이 나오기는 하는구만, 아가씨는 깔깔대고 웃는데 아내는 또 쓸쓸하게 따라 웃고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고 싶은 것을. 문을 열면 어느덧 갈잎 지는 황혼녘이다.
- ‘죽음준비위원회4’ 일부
병이 깊어진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슈퍼마켓에 간다. 거기서 물건 값을 계산하는 것을 보고 병마에 찌든 서글픈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나가는가를 계산대 점원에게 묻는다.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점원은 우스개로 ‘사람 값’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너무나 잘 아는 아내는 ‘쓸쓸하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따라 웃을 수가 없다. 죽음이란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힘든 과정이리라. 슈퍼마켓을 나오면 상황 의 절박함과 애처로움과는 무관하게 밖은 ‘어느덧 갈잎 지는 황혼녘이다.’
백양나무 잎이 아스팔트 위에 / 은화처럼 누워 있는 / 긴 방죽엔 쓸쓸한 아침을 기다리는 / 안개가 있다. / 강바닥에 스멀스멀 기어 나 오는 / 과격한 입자들의 시위가 있다. / 그들이 정오 가까이가 되면 / 이제 그들은 삶의 허물을 벗고 / 지친 바람처럼 잠시 휴식을 취할 것 이다. / 그들이 서서히 옷을 벗을 때까지 / 나는 내가 빌려다 쓴 / 투명한 시간의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 ‘죽음준비위원회6 - 안개’ 일부
안개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스팔트 위에’ ‘백양나무 잎’은 ‘은화처럼 누워’ 있다. ‘긴 방죽엔 쓸쓸한 아침을 기다리는 / 안개가 있다.’ 시인이 보는 안개는 ‘쓸쓸할 수밖에 없다. ‘강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안개들, 그들은 ‘정오 가까이가 되면’ ‘삶의 허물 을 벗고 / 지친 바람처럼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처럼 마침내 ‘그들이 옷을 벗을 때까지’ ‘빌려다 쓴 / 투명한 시 간의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이승에서 가졌던 시간들 은 안개처럼 잠시 ‘빌려다 쓴’ ‘시간의 부채’와 다름 아니다. 이승에서 의 마감은 ‘투명한 시간의 부채를 상환’하는 일이다.
아픈 것이 죄가 될 것 같아서 / 터벅터벅 걸어가는 강둑 길섶에 / 철모르는 개나리가 노랗게 피었네요. / 한줌 흙으로 빚어졌다가 /세월의 풍파에 휩쓸리다가 / 다시 한 줌 흙으로 흩어지는 공허 / 나는 지금 무슨 인연으로 / 가슴이 시릴까요. / 저 가는 세월을 누가 잡을 수 있나요.
- ‘무제 7 일부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픈 것이’ 오히려 ‘죄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날을 생각하며 걸어가는 ‘강둑 길섶’에는 한 사람의 일생을 알 턱이 없는 ‘철모르는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 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사라진다는 말은 흔히 듣지만 ‘무슨 인연으로 / 가슴이 시릴까요’라고 되묻는다. 우리가 유행가로 부를 때와 달리 죽 음을 앞둔 한 사람의 심정에서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나’는 물음은 처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는 그가 쓴 산문 ‘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착잡한 심정으로 결코 흔들리거나 흐느끼지 않으며 나직하게 죽음을 앞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시인의 절제된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야 할 사람까지 무거운 삶을 살 필요는 없으며,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나도 이제부터 편안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 누구나 때가 되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 / 그러나 결코 피하고 싶은 죽음, 내가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죽 음의 그림자를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좀 더 당신과 아이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여망을 버리지 못한다. / “이 밤이 지나면 나는 가리라. 새벽안개 자욱한 강으로 나가, 과연 죽음이 무엇인지 외쳐 물으리라.”
- 산문 ‘유서’ 중 ‘아내에게’ 일부
6. 글 마치며
시인과 함께 어울린 것은 그가 우리와 함께 글밭 동인회를 함께 한 1988년부터이다. 그는 오랜 기간 시를 써 왔음에도 누구에게도 시를 쓴다는 사실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작고한 임병호 시인이 우연히 주위를 수소문해서 백승초 시인을 우리 동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는 그를 ‘장로’라고 불렀다. 함께 동인 활동을 한 이래 줄곧 그는 우리 동인들의 맏형으로서 우리 모임을 묵묵히 이끌어 왔기 때문에 따로 회장이나 회를 대표하는 직책을 두지 않는 우리로서 는 ‘장로’라는 이름이 실제로 우리 동인회를 대표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평소에 단편적으로 글밭 동인지에 싣는 시들은 그간의 생각으로 회상해 보면 ‘생활과 밀착한 시’ 정도로 해석을 해 왔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일상의 풍경들이 목소리 이상으로 감동을 주곤 했었다.
그런데 유고집을 찬찬히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승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관조하며 죽음의 문제에 누구보다 도 깊이 천착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편의상 ‘일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상의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을 준비하는 단 계’로 나누어 그의 시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
십여 년 전 어느 봄날 백승초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술이나 한잔 하자고. 우리 동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의 아파트로 불려갔다. 푸짐하게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의문에 차서 웬 일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이유인 즉 생전의 임병호 시인이 그에게 매화 분재를 선물했는데 마침내 매화가 폈다는 것. 그래서 동인들과 함께 분위기 있게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불러 모았다는 거였다.
백승초 시인이 작고한 금년 초입에도 연락이 왔었다. 다음 주말에 우리 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두 번의 암 수술 끝에 병세도 많이 호전된 것으로 듣고 있었고 글 모임에도 더러 자리한 적이 있어서 함께 매화를 보며 기분 좋게 술 한 잔 할 수 있으려니 생각 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행사는 연기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병세가 또다시 악화되고 마침내는 이승에서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글픈 영정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시인이 떠난 뒤에도 매화는 해마 다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인의 모습은 이승에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잔잔한 그의 목소리도.
∥특집 2∥
혜봉(慧峰) 스님의 偈頌
혜봉(慧峰, 속명 임명삼) 스님은 글밭 동인 창립 멤버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다 출가하여 현재 경기도 이천의 부석암 주지로 있다.
임 혜 봉 출가 이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활동과 함께, ‘친일불교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종정 열전 1ㆍ2’ ‘친일승려 108인’ ‘한국의 불교 茶詩’ 등의 역작을 출간 하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동인회에서 수 년 전부터 시작품 제출을 요구했으나 극구 사양하여 싣지 못하다가 스님이 10여 년 전에 쓴 偈頌을 우연히 접하고 빼앗다시피 하여 동인지 특집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혜봉 스님의 게송 1
혜봉 스님의 게송 2
혜봉 스님의 게송 3
혜봉 스님의 게송 4
혜봉 스님의 게송 1
漢江風情
此身兩親中受生
猶如本來無一物
心識肉身夢中事
漢水流流江南風
한강풍정
이 몸은 양친에게서 태어났으나
본래는 한 물건도 없었으니
心識과 몸은 꿈속의 일인데
한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강남에서는 바람만 부누나.
혜봉 스님의 게송 2
朝雨
回耐西流水不回
只催詩景惱人來
含情朝雨細复細
弄艶好花開未開
아침비
서해로 흐르는 물 돌이킬 수 없는데
어이 시경 재촉하여 사람의 마음을 태우나
아침비는 정을 머금고 가늘게 흩뿌리는데
애교어린 아름다운 꽃 필 듯 말 듯하여라.
혜봉 스님의 게송 3
丈夫本有
日暖野鳥來小屋
月明遠風響空山
丈夫本有四方志
吾豈匏瓜繁此間
장부의 뜻
햇살 따스한 날 작은 집에 들새 날아들고
휘영청 밝은 달밤에 먼 산 바람소리 들린다.
대장부로 태어나 사방에 뜻이 있는데
내 어이 박과 오이처럼 덩굴에 끼어서 살리.
혜봉 스님의 게송 4
北漢山
北漢山色映人衣
慘淡煙光送洛暉
岩溜洛空輕作霧
春蘿拱木碧成幃
북한산
북한산 푸른빛이 사람들 옷마다 비치고
쓸쓸한 연기 빛은 떨어지는 해를 보내누나
바위에서 떨어진 물 흩어져 엷은 안개로 피어나고
봄나무를 둘러싸서 푸른 장막을 이루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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