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시동인지29집 2007년도

저 언덕 넘어 2023. 10. 28. 20:17

우리들의 말

  해마다 그래 왔듯이 계절은 끊임없이 바뀌고 빈 들판과 옷 벗은 나무들과 거대한 침묵들만 하늘을 향해 무겁게 버티고 서 있다. 한 해를 정리 하는 이 계절은 우리에게 온갖 세상사에 대하여 사색하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란스럽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당연히 그렇겠지만 뉴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전하는 뉴스의 기본 줄거리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이름들만 조금씩 바뀌어 나타날 뿐.
  글밭 29집을 세상에 내 놓는다. 우리나라 동인지로는 드물게 오랜 지령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한 편으로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연륜에 버금가는 작품 수준을 지속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혹자들은 말한다. 동인지 시대는 갔다고. 과거에는 동인지 활동이 문학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매월, 매 계절마다 수많은 문학 전문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개는 자기네 출신 문인들만이 필진이 되고 구독자가 되는 동호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문학이 건전하게 발전해 나가기는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우리 문학이 건전하게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동인지 중심의 문학 논의의 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전국의 문학지들에게 우리나라 동인회 활동에 대한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한다.
  기존의 문학지들의 동호인회는 스스로 문학을 친목단체화 하는 쪽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문학지들에서도 전국 동인단체 만의 문학 논의의 장을 고정화하여 문학사의 일부로 끌어들일 때 동호인회가 아닌 전국적인 문학지로서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전국에서 생산되는 동인 단체들도 단순히 일 년에 한 두 차례 작품집을 내는 수준을 넘어 동인 전체가 문학적 이슈를 공유하며 전국 동인지 들 간에 당당하게 작품 수준을 가지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우리 동인지는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역사성만으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다. 우리 동인들도 스스로 더욱 노력을 배가하여 수준면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동인지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힘써 나갈 것이다.
  거대한 우리나라 문학사에 비추어 볼 때 아직 우리 동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활동이 우리나라 문학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기간 그래왔던 것처럼 오로지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우리 손아귀에 힘이 남아 있는 한 글밭의 괭이질은 우직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거듭 밝힌다.   특히 이번 호에 새로 작품을 선보이는 동인들의 작품이 침체된 동인 활동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해 본다.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김 금 숙
부산의료원 603호  10
보자기  11
의성 천주교회 공동묘지 12
들풀 13
동백꽃 14

강 희 동
自警錄 26   16
自警錄 27   17
自警錄 28   18
自警錄 29   19
自警錄 30   20
自警錄 31   21
自警錄 32   22
自警錄 33   23
自警錄 34   24
自警錄 35   25

김 명 동
월봉사 28
연어 29
포맷 31

김 진 택
보드카를 마셔요 죽여요 34
피구왕 통키  35
어떤 개인 날 36
까빼 캉가루   37
캉가루표 주점  38
마르는 기억  39
피구왕 통키  40
돌아가는 길  41

김 여 선
죽변 버스 정류소  44
그 해, 가을 을숙도에서 46
폐교  48
바닷가에서  50

임 두 고
꽃과 열매  54
자화상  55

권 기 태
하이마 가는 길  58
고백성사  60
들국화  62
무대  63
돌팔매질  65
허수아비  66

류 민 기
봄  68
아침나절  69
안식  70
우리들의 그리움은  71
사랑은  72
회고  73
겸허해진 저녁  74
봄날엔 의문 뿐 75
소식 76

강 수 완
작약 봉오리에 진이 있다 78
은행나무 아래에서 79
사람이 상하면 80

김 혜 원
창을 닦으면 82
풍선 84
달팽이 85
12월의 세상 86
산을 오르며 87

이 형 복
가을 유혹 90
오 열 92
갈라산에서 94
5월 우중에 96
하행열차를 타고 97

이 선 남
빈 집  100
사과 꽃잎이 지던 밤  101
독작  103
봄 1   104
거미줄을 거두며  106
난 동백꽃 되리라   108

김진회
詩   110
소식 111
아궁이 112
쑥대궁 113
똥간 시 115
낮잠 116
내 소식 117
독 118
겨울이야기 119
냉장고 121

김 윤 한
풀어진 녹음 테이프 124
그림자 125
좌탈입망 126
보길초등학교 127
바람소리 128
호곡 129
헨델 ‘사라방드’  130

글밭略史   131




김 금 숙


부산의료원 603호
보자기 
의성 천주교회 공동묘지
들풀
동백꽃

  시인의 말
  부디 시건방스럽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다.
  감히 내 시가 저녁 어스름녘의 미미한 바람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한 장의, 딱 한 장의 꽃잎처럼 간결하기를, 그럼에도 그게 이 세상 모든 꽃의 대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늘 설명이 너무 많았다. 설명하기에 지쳤다. 내 허공의 삶 또한 그러하다.
  실은 한 마디도 너무 많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고, 설명을 들으려고 한다.



부산의료원 603호

누군가가
아픈 마음을 기대고 앉아
간 안 된 국에 밥을 말아 먹던 
그 자리에 내가 또 그렇게 앉아 
오전 7시에 하루를 먹어치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픈 사람 아픈 사람끼리 모여 밥을 먹는 법이라네 
때로는
머리 속에 새 지도를 그려 넣고 
가슴 속에 새 심장도 그려 넣고 
쓸데 없어진 쓸개는 싹 지우고 
너무 긴 창자는 조금 지우고 
닳은 위는 아주 조금 지우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뭐 하나씩
지워버린 사람 지워버린 사람끼리 모여 밥을 먹는 법이 라네

뚝딱 뚝딱 쓱싹 쓱싹
이런 마술은 이런 마술을 믿는 사람들 끼리 모여 사는 법이라네




보자기

각진 세월 동그랗게 말아 옭아 매여진 지점 
그 곳에 나는 머문다




의성 천주교회 공동묘지

늦가을 문득
위장색이 사라진 미루나무 잎맥 앞에서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실은
어리석게 서럽게 싱싱하던 
날들에 가려진 채
항상 거기에 미루나무 잎맥이 있었다는 것 
그것에
나는 다시 경악한다




들풀

비가 철사줄처럼 온다
복날 맞아 누렁이 제 인연 따라 떠나가고 
마당의 텅 빈 개밥그릇
빗물 고여 막 벙그는 연꽃이다
그 곁에서 갸웃 흔들려 보는 강아지풀 
왕소금에 절여지지 않고도
이 긴 장마에
맛이 상하지 않는 것은 들풀 뿐이다.




동백꽃

발가벗은 바람에 불길이 붙는다
오오, 그늘도 태워버린 저 양잿물 같은 햇살 
허무의 벌판을 덮치며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잉걸불 
뚝뚝 떨어져 내 자궁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불꽃





강 희 동



自警錄 26
自警錄 27
自警錄 28
自警錄 29
自警錄 30
自警錄 31
自警錄 32
自警錄 33
自警錄 34
自警錄 35


  시인의 말
  올해도 어김없이 날들이 저물어 연말에 이르렀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떠밀려 살아가는 듯하다.
어떻게 시를 써야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 쯤 되면 객기 반쯤은 버려야 함을 인정하게 되는 듯하다. 쉰 살, 참 어려운 나이에 진입하는 것 같다. 세상살이도 어렵고 더구나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이끌어 내기란 더욱 어렵다. 세상이 바보스러울 때면 더불어 바보가 되는 것이 현명한 삶의 방법인 것 같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보법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버둥거리는 것 같다. 올해도 자경록 26-35 까지 전 10편을 상제 한다. 작품의 질과 울림에 대한 판단은 세상에 맡긴다. 건강한 삶과 맑은 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自警錄 26
- 사월

사월
여린 나뭇잎이
애써 내미는 푸르름은 
가을까지
붉은 열매를 달기 
위함이다.




自警錄 27
- 연인

눈 감아도 
그대 얼굴
또렷이 밝아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들어앉은
그대의 자리




自警錄 28
- 갱죽

머얼겋다 
건더기 없다 
훌훌 떨치고 
김으로 오른다 
내 눈동자 빠져 
헤엄친다.




自警錄 29
- 삶

삶은 죽음을 위한 
비즈니스다 
윤택한 삶과
여유로운 죽음을 위하여 
넉넉한 거래를 한다 
허전하지 않기 위하여 
죽음과 삶의
치열한 거래를 한다.




自警錄 30
- 늦가을 하오

차울수록 웃음 노랗다 
은행잎
질린 노란하늘
건듯 건들린 바람의 웃음에 
놀라
노란 시간을 엎고 
가을볕 사이로 
사정없이 몸 
날린다




自警錄 31
- 잊혀진 노래

시집을 읽다가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기로 했다 
항상 거들떠 봐 주지
못하는 페이지 
기다리다 오래 지친 
그것을 먼저 
사랑하기로 했다




自警錄 32
- 동굴

동굴은 종일 
입 벌려도
속 시리지 않나 
검은 속내
다 내 보이고
맑은 햇살 들이키면 
하얀 등불 커질까




自警錄 33
- 바보들의 행진

살다보면 
바보가 더
편안 할 때가 있다 
세상이 바보스러울 때면 
나는 ---




自警錄 34
- 아버지

옛집
마루기둥에 기대어
먼 산에 눈길 주시는 아버지 
무너질 듯 흘러내리는 
흙담처럼
서산마루에 어둠살 
함께 내린다




自警錄 35
- 학의천변

먼 동 트기 전 
학의천변
흰 외가리
긴 주둥이 곤두세우고 
개피리 줍는다
기름 낀 사람들 헐떡이며 
걷고 뛰고 있다
모두들 살아 보려고 
코스모스도 키 낮은 
바랭이를 누르고 
하늘거린다







김 명 동


월봉사 
연어 
포맷


  시인의 말
  어김없이 또 한 계절을 맞는다. 낙엽을 보고도 순리를 알아야 하는 나이다. 한눈 팔다 정신을 차려보면 정작 중요한 일은 멀리 두고 시시한 일에 열중했다.
  내세에 다시 인간이고 져 한다면, 어찌하든지 살아있는 동안 자연 그대로 풋풋한 인간이어야 한다. 스산한 계절, 월봉사 마당에 서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간절하게 그립다.




월봉사

  임동면 아기산 월봉사, 서리 찬 늦겨울 안개비 내리는 스무 평 남짓 작은 절, 눈을 감으면 댓돌 위 반짝이던 흰 고무신, 한 줄기 불꽃으로 기상하던 소원 담은 소지* 문종이, 우우 가늘게 떨던 억새풀 더미, 할매보살 거칠게 주름진 손등, 하염없이 관세음을 주문하던 어머니, 천금 같은 피붙이 넷 보내고도 한결 같이 하나는 살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 기도, 더러 잊을라 치면 더욱 사무쳐 애간장이 탔을 어머니, 쓰디쓴 일생 새겨져 있는 아기산 월봉사 그 적막한 마당에 서면, 어디선가 나를 스치는 바람 속 어머니 가쁜 숨결 들리는 듯, 내 안에 일던 바람도 울컥 풍경을 치고.

* 소지[燒紙]: 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




연어

관습대로 
대처로 간다
이산 저산 굽이 돌아 
길을 나서면
이윽고
동해를 거슬러 북태평양 
거친 바다
겹겹이 출렁이는 남색 천지 
어지럽지 않을까
짠물에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위태롭던 적응기

언제나 바다는
사나운 족속들로 포악해 
잡아먹히면 끝나는 생명 
아프구나
귀향 전 낯선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 사정이란 
심란하다
절박했던 성장기

길고 긴 타향살이
강이든 바다든 가릴 것 없는 나는 
분명 연어다
때가 되면
아득한 유년 바다를 향해 
가던 길 기억하며
눈부신 물줄기
부서지고 모이는 내 고향 
거울 같은 개울가
장엄한 산고를 위하여 
초심대로 귀향이다.




포맷*

이것은 쉽게 접수할 수 없는 포맷이다. 계약직 혹은 파트타임으로만 받아들이는 포맷이다.

지들 마음대로 세운 줄에다 치밀하게 계산 된 속임수로 일방적인 포맷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된 음모다.

스스로 선택할 여지가 없는 배열, 점령할 수 없는 구조, 길이 안을 수 없는 땅이다. 이상한 포맷이다.


* 포맷[format]: ①미리 정해진 자료의 배치 방식. 각 항목의 위치 간격 구두점 행 등의 정보 ②데이터의 저장이나 전송 시의 구성 방법







김 진 택


보드카를 마셔요 죽여요
피구왕 통키 
어떤 개인 날
까빼 캉가루
캉가루표 주점 
마르는 기억
피구왕 통키
돌아가는 길


  시인의 말
  연속극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요즘. 남자와 함께 밥을 먹다가 여자가 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운다.
  여자가 아주 오래 운다. 아주 오래 우는 여자. 저걸 시로 만들 수 있을까. 시를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시간이 지나면 포도가 썩어서 포도주가 되듯이 그 여자의 눈물이 시로 변환될 때가 있다. 차를 타고 동해를 올라가다 보면 저 쪽 돌출한 바위 앞의 바다 색깔 이 초록색이다. 저 초록바다. 저건 시가 될 것인가? 이 생각은 수년 째 머릿속을 돌아다니지만 어찌 그것은 썩 계란처럼 발아가 잘 되지 않는다.
  마음 속을 얼마나 더 돌아다녀야 시가 될까. 한때는 연애질 한다고 술꾼인 그녀와 지옥이란 술집을 뻔질나게 드나든 적이 있다. 그때 술질을 하면서 쓰잘 데 없는 얘길 많이도 나누었다. 이 쓰잘 데 없는 얘기란 어떻게 보면 세속을 멀리 떠난 얘기란 것도 된다. 예를 들면 동파 선생의 조보지에게 라는 시제가 웃긴다는 둥 그런 얘기다.
  그 술집의 불빛. 벽에 붙어있던 이사베르 위페르 같은 배우의 사진. 그런 풍경들이 오랜 시간 발효되어 시가 되기도 한다. 이 저녁 그때의 일이 시가 되어 가슴으로 오기를 숨죽여 기다린다. 소설이 작가의 자화상이라면 시는 시인의 자화상이란 어설픈 말이 왜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가




보드카를 마셔요 죽여요

잔 속에 달이 떠 있었는 시절이 있었다. 

한 때
달 속에 토끼가 살고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토끼의 눈 속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가슴속에
눈깔이 새까만 계집애를 품은 
소년과
달빛에 흔들리는 소나무 그림자

오늘은
잔 속에 빠알간 전등이 떠 있네




피구왕 통키

소년이 오지 않았던
오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차가 끓는 시간 
꽃이 피는 시간 
구름 흐르는 시간
고개 너머로 사발이 차가 
흔들리며 사라지는 시간 
그냥
물 흐르듯 지나갔다

소년이
내게로 돌아 온단다 
그러면
잊었던
눈물도 오겠지
먼 세월전에 마련해 둔 
쓸쓸함 다시 오겠지

오늘 저녁
샛별 심하게 반짝이다




어떤 개인 날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 이름 하나 두고 가면 
그 일생이 행복하단
얘길 하던 그 사람도 
먼 길을 갔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 내 이름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가고

춥고 어두운 길
먼 길 아직 가 본적 없지만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만히 불러 볼 이름 
가슴에 있기나 한건가

오늘
비오는 운동장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 이름하나 두고 가면
……




까빼 캉가루

  있잖아. 옛날에 그러니깐드르. 당나라. 조행덕이가 있었대. 과거장에서 나무밑 장의자에 앉아서 잤대. 시험치는 시간에, 에이 또 그 얘기. 취했나봐. 이거 재밌어 일분에 이노 우에 라는 작가가 쓴거야. 듣기 싫어. 그럼 방원의 처 얘기 해줄까. 그 여자 엉덩이가 팍. 그 얘기 저번에 했잖아. 했어? 그럼 청송여대 가지밭에 가지가 하나도 없단거는? 그 건 내가 네게 해준 얘기잖아. 그런 저질시런 얘기말고 좀 고질스런 얘기 해봐. 그럼 이제껫 얘긴 하나도 안 무거준거 네. 물론이지 맨날 재방송이잖아.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그럼 이 얘긴 어때 이건 비장의 무기야. 함 해봐. 내가 3학년 때 까지 글을 못 읽었잖냐. 듣기 싫어. 나 참. 할 얘기 드럽게 없네
  돌쇠씨. 토요일날 퇴근길 그림자가 짧지. 그걸 보면 어떤 생각나? 난. 아무생각. 안 나. 그래. 아무생각이 않나. 그럼 무념무상이네? 그럼 무념무상이지. 에이씨. 나 집에 갈래. 집에 간다구? 그럼 안되 같이 가야지 같이 가면 안되 돌쇠 네 집은 저 밑으로 가잖아 근데 어떻게 같이가. 그런가. 그렇지. 오늘 내가 바래다 줄게 그럴래? 그러지 뭐.




캉가루표 주점

여름 저녁 
나는 아름답다
잿빛 눈동자의 풀이도 아름다워

그 때는 그랬어
노랑색 오래비아 누튼존의 
빗속에 잠기는 푸른눈동자 
슬픈 멜로디
기쁘게 들렸어
내 앞에 너가 있기에

일월이 가고 
성진이 가고 
계절이 가고 
사람이 가서
머리에 흰 눈이 내려

아직도
너에게 들려 줄 얘기가 남은 
그는
꽃무늬 타이를 매고
문을 나서 어디로 바삐 걸어간다




마르는 기억

푸른 아이 셰도우 
밑으로 조는 듯 눈동자 
스르르 미끌어지는 시간 
희미한 등불아래
너는 기우뚱 떠 있다

잿빛 주근깨 
광대뼈 부근
늦은 오후의 반짝이는 
먼지가 흐르고

김현철의 우울한 목소리 
쓸쓸하다는 너의 몸짓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안개

이런 날 집으로 돌아간 너는 
잿빛 골방에서
밤 늦도록 
알라바마 노래 
듣고 듣고 하겠지




피구왕 통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여자와 
그 앞에서 묵묵히 서 있는 남자와 
흐릿한 불빛 알전구의 왼쪽 탁자 
꽃병엔 고개숙인 장미 몇 송이

자꾸만 먼 길 나서려는 사내와 
그만 자기와 살자는 아줌마 
아이는 잿빛 시선으로
벽의 이방연속무늬를 헤아리고
식은 난로위의 국물에 흔들리는 그림자 
식당은 안개 속에 잠기고
바람은 그냥
유리창을 드드드 흔들고
밤은 단감처럼 바알갛게 익어간다




돌아가는 길

잘 못 끼워진 단추는 
다시 끼우면 되지만 
건너온 세월의 다리는
되돌아 갈 길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 때 버린 그 길을 갔어야 하는데 
그 길을 두고 왔기에
이 곳
저녁 연기 오르는 산곡 
혼자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거기 두고온 달빛 쌓이는 
소나무 길
반짝이는 
눈동자
비둘기표 몽당연필 
그리고
지우개
잃어버린 뽀얀 발자국 발자국들
그들이 있는
저녁연기 오르는 골목길로 
돌아가자

거꾸로 돌아가는 흑백 필름을 따라 
잃어버린 유리구슬이 묻힌
옛 담길로 가자






김 여 선

죽변 버스 정류소 
그 해, 가을 을숙도에서   
폐교
바닷가에서



  시인의 말
  테니스를 친다.
  빠른 공이 올 때 거의 반사적으로 라켓을 휘둘러야 되는데 만약 공을 치는 것을 의식하면 오히려 공을 잘못 칠 수 있다고 한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은 상태’ 
  ‘동물적 감각으로 행동하는 것’
  이렇게 반사신경이 작용할 때는 머리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척추에서 다 처리한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나 감각들은 거의 척추 수준에서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더 확실하고 빠르고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도 이런 감각적인 시 한 편 만들어 보고 싶다. 이 겨울이 오기 전에…….




죽변 버스 정류소

컨테이너 박스가
회색빛 어항으로 떠 있는 
죽변버스정류소의 시월 아침은 
말려가는 피데기*가 먼저 맞고 있다.

살 오른 고등어처럼 둥근 
버스 한 대
고개 너머로 자맥질할 때도 
햇살은 쓴 담배연기 같은
안개 속을 빠져나오질 못했다.

정류소 앞
앉은뱅이 마루에 걸터 앉은 
바다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 몇몇 
갓 떨어진 은행잎처럼 노란
버스표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는다. 
도시 네온사인의 황홀함이 
갈매기처럼 끼룩끼룩 지나간다.

어젯밤 숙취가 겔포스 빈 껍질로 
검은 아스팔트 위에
낮은 포복으로 미끄러지고
구겨진 담배갑처럼 뒤틀린 위장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말려지고 있다.

바람이 분다 

안개가 걷히고
바다는 금세 푸르름을 토해내고 
피데기 가득 실은 버스 한 대 
지나가고 있다.

* 피데기 : 완전히 말리지 않은 반건조 오징어




그 해, 가을 을숙도에서

상강(霜降) 지난 아침 
강과 바다가 만나는
눈썹달로 떠 있는
그 해 
을숙도에서
연줄처럼 휘어진 갈대가 
여인의 머리카락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홑이불 같은 안개를
푸른 단청으로 산란시키고, 
갈대 사이로
그물을 펼쳐놓은 거미줄의 
둥근 아날로그 시계 너머로 
완행버스 한 대 육지로 육지로 
멀어지고 있었다.

가을
강과 바다가 만나는 
눈썹 위를 걸으면
내 젊은 바다와 강물이 만나 
갈대를 키우던
그 해, 
을숙도의
희미한 모습이 떠오른다.




폐교

달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새 산 밑으론
시루떡 같은 어둠이 켜켜이 쌓이고, 
머리 깎은 아이처럼
생장점을 전정 당한
운동장 울타리의 측백나무 너머로 
목 잘린 수수의 메마른 잎들이 
사그락사그락 맨살을 부비고 있다. 
운동장 생선 가시로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은 하늘에 올라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꼭지가 잠겨 버린 수돗가에
잡초로 자란 무서리 맞은 메리골드의 
축 쳐진 어깨 너머로
어둠에 침식당하는 숙직실이 보인다. 
인두화처럼 노랗게 번져가던 별들이 
수신되지 않는 텔레비전 안테나 위로 
뚝뚝 떨어진다.
흑백사진 피사체로 잡혀진 
페교를 바라보면
마른 기침으로 쿨럭이는 바람은
옥수수 튀밥으로 흩어지는 은행잎들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떨어진 별들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바닷가에서

가을
바닷가를 걸어보면
잘 익은 해바라기로 고개 숙인 
가로등 하나
바닷가의 속살을 훑고 있다.

항문처럼 움푹 패인
낮에 찍힌 내 젊은 날의 발자국들 
낡은 영사기처럼 스르륵 돌아가는 
파도의 괄약근으로 사라질 때
희미한 어둠은 는개비로 내리고 있다.

퇴색된 쓰레이트 지붕 위로 
무서리 맞은 호박잎들은
어머니 손등 정맥으로 일어서고, 
속이 비어야
제 목소리를 내는 목어처럼 
마른 북어 한 마리
처마에 걸려 있는 
바닷가의 집 한 채에
저녁 연기는 칼국수로 풀어진다.

가을
바닷가를 걸으면 
안개처럼 희미한 
가로등 하나
내 추억의
속살을 훑고 있다.







임 두 고


꽃과 열매
자화상

  시인의 말
  이미 말해진 말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며, 아직 말 하지 못한 말만이 무엇인가를 더 말하리라. 이미 말해진 말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하다고, 내 게으름이 내 발목을 자꾸 잡는다. 오리무중(五里霧中), 안동의 짙은 겨울 안개처럼 내 게으름이 곧 내 시의 덫이고 감옥이다.




꽃과 열매

  꽃이 눈뜨는 열매라면, 열매는 눈감은 꽃이다. 그리하여 꽃이 열매를 기다리는 눈빛이라면, 열매는 꽃을 추억하는 탄성이다.

  꽃이 다소곳이 벙그는 여성이라면, 열매는 당당히 도발하는 남성이다. 그리하여 꽃이 뿌리 깊은 여자의 바람기라면, 열매는 뿌리 깊은 남자의 바람기다.

  꽃이 향기로운 유혹과 뜨거운 쾌락의 여름 표정이라면, 열매는 쌉쌀한 충고와 차가운 인내의 가을 표정이다. 그리하여 꽃이 무화(無化)를 꿈꾸며 낙화(落花)하는 젊음이라면, 열매는 부활을 꿈꾸며 낙과(落果)하는 늙음이다.




자화상

千의 얼굴 萬의 가슴으로, 千의 눈빛 萬의 언어로 
세상에, 그대에게, 넝쿨지다.

어느날 문득 나타난, 이십 년 터울의 제대 군인 친형이 낯설어 쭈뼛거리면서도
추녀 끝에 말랑말랑한 곶감은 남몰래 잘도 빼어 먹는 일 곱 살의 내가,

시퍼런 조선 낫 두어 자루를 지게에 꽂은 채
한겨울 민둥산 꼭대기까지 땔나무를 하러 가는 열네 살의 내가,

등굣길 빼곡한 입석 버스 속 책가방을 받아주는 낯익은 여고생 앞에서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열여덟 살의 내가,

군기가 빳빳이 남아있는 중고참 시절, 난데없이 ‘父親別世急來’ 전보를 받아들고는
내무반이 터져라 엉엉 울고 있는 스물세 살의 내가,

긴 생머리에 치마가 어울리는 착한 여자,
칼국수를 잘 삶을 줄 아는 그런 신부를 구하리라는 스물 일곱 살의 내가,

야간 완행열차의 조명 아래서 한 처녀에게 눈멀고는
삼 년여 수십 통의 연애편지 끝에 결혼식을 올리는 노총각 서른 살의 내가,

사글세방 전세방으로 옮겨 다니며
딸 아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서른여섯 살의 내가,

응급실, 내 손에 손을 넘기신 채 스르르 맥을 놓으시는 어머니,
다시 못 뵈올 당신 앞에서도
응석받이 막내둥이로 칭얼거리는 불효자식, 불효자식, 마흔 무렵의 내가,

크게 잃은 것도 이룬 것도 없는 인생
가끔은 돋보기를 쓴 채 시를 읽거나 시를 쓰기도 하는, 만년 학교 선생인 반백의 내가,

千의 얼굴 萬의 가슴으로, 千의 눈빛 萬의 언어로 
세상에, 그대에게, 넝쿨지다.

장미넝쿨이듯 가시넝쿨이듯 인동넝쿨이듯…….







권 기 태


하이마 가는 길
고백성사
들국화
무대 
돌팔매질
허수아비



  시인의 말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자신의 노력보다는 요령부리기, 한탕주의, 가로채기, 부풀리기, 줄 대기 등을 잘 하는 변질된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데 문제가 있다.
더 큰 규모의 세상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FTA 등 세계는 강국의 이익이 우선시되고 소수의 전문인이 다수의 돈을 쓸어가는 금융시장의 행태 등 ‘세상의 사막화’가 적합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병든 세상에 내 시가 무슨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정서적으로 조그만 휴식의 의미라도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뿐 이다.




하이마 가는 길

들꽃 활짝 피어 바람에 한들한들 
길섶 잠자리떼 한가롭게 쉬어가는 길 
개울엔 도란도란 거리는 물의 노래 
발아랜 파아란 하늘이 고여 있고
구름 한 무리 사이로 무당의 춤사위가 좋다

심술쟁이 바람이 치마깃 방긋 들치며 
솔가지 흔들어 낮잠을 깨우는 골짜기 
물장구 소금쟁이 신명나게 생매질하고 
붕어떼 실뿌리 돌틈으로 숨어드는 여울

때늦은 귀갓길 구름에 얼굴을 담그고 
맨발로 조개를 주우며 땀을 식히던 
백사장 맑은 개여울 언덕 호젓한 숲길
용바위에 오르면 긴 그림자로 나는 서 있다

그 신비의 날들을 앞세워 달려온 반백
그 추억의 아름다운 날들은 사라지고 없네.

지금은 거품을 물고 물때가 쌓이는 여울 
사변 후 36사단 박격포 사격장이 되었고

산그늘 아래에는 축사들이 여기저기 들어와 
쇠똥더미 사이로 소떼를 태운 차량이 간다.

붉은 개울물엔 육순의 내 모습이 드리우고 
하늘이 고인 웅덩이에 악취가 목을 조인다. 
잃어버린 날들의 아픔이 울컥거리는
유년의 향수 그리웠던 고향마을 사람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갈까?




고백성사

1983년 가을은 유난히 서리가 많이 내렸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모든 이에게 
감미로운 축복으로 내려오신 분이 있었다.

하늘 아래 바람과 물과 불을 거느리시고 시
작과 끝이 없는 한가운데 자리 하시어 
하늘과 땅 사이에 흥망과 존재를 일관하며 
샘물과 같은 영혼과 지성으로 살게 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진정한 용기를 주시었다.

만물이 빛을 향하여 시샘하게 하시며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소금이 되도록 
순명하는 미덕으로 참평화를 가꾸시었다.

현실이 비록 고달프고 암울하여도 
스스로 기쁜 희망을 키워갈 것이며 
후회도 좌절도 미움도 없게 할 것이다.

술수와 모략으로 억누르고 짓밟아도
진리의 깃발은 휘거나 꺾이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내린 영원한 보람과 가치로 
가식 없이 부지런하게 살아갈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주어진 삶을 봉헌하여 
정성스런 날들로 가득 차게 할 것이다.

자세를 낮추고 낮추어 수평선을 이루면 누
구와도 벽과 울타리가 없을 것이고 
갈등과 시비도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허물을 보듬어 주실 것이고 
하는 일 마다 지혜와 용기를 주시어 
온 땅에 지어진 만상과 화합케 하며 
큰 사랑을 성취하게 할 것이다.




들 국 화

어느 사내가 짝사랑한 여인일까 
아지랑이 현란한 봄날부터 
하늘에 수만 폭의 그림 그리며 
들꽃의 유혹에도 시샘 아니하는 
긴 한숨 가다듬어 수절하는 꽃 
애타는 마음 사리사리 접어
차가운 봄비 가슴을 두드리게 두고 
폭우 속 천둥소리 두렵게 울어도 
삼복더위 폭염에 타는 목마름으로 
긴 설움 추스르며 계절을 달려와 
깊은 밤 맑은 샘물 머금고
푸른 새벽 물안개 마시며
속으로 속으로 가꾼 정절의 자태 
고고한 사랑 그리워 발돋움하여 
품안에 가득히 안기는 꽃 향기 
서리 내린 외진 벼랑길에 홀로 서 
연인으로 송이송이 피어난 님이여.




무대

어둠의 장막을 비집고 등장하였다. 
명암과 소리와 원소로 가득한 
꾸며진 배경과 무한의 장식을 들고 
태초의 순수한 모습으로 분장하여 
태양계의 어느 유성을 방황하다
이 땅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밤사이 사랑하여 피어난 꽃들로 
하늘의 별들은 은하의 강을 쏟아내고 
젊은 배역들은 태백의 준령을 넘는다. 
관객은 광야를 따라 무대로 향한다.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하고 
폭죽이 피어오른 별밭이기도 했다 
열광하는 관객이 쏟아내는 함성
관객은 끼 있는 아이에게 갈채를 보냈다 
때로는 맹인과 귀머거리로 나와 
길들여진 나귀처럼 관객을 따라갔다. 
관중의 야유와 비난에 이끌려 나가면 
생명을 다한 텅 빈 천상에 이른다. 
객석엔 만장과 영정이 펄럭이고
작별의 시토질 소리 서걱인다.
흙으로 돌아가는 흐느낌의 무대 
어두운 검은 장막 속으로 퇴장한다. 
한점의 영혼이 하늘을 배회한다.




돌팔매질

공깃돌 한 개를 앞뜰에 던졌다 
정오를 알리는 긴 울음을 울던 
검붉은 장닭 한 마리가 맞았다 
쓰러져 다리를 떨며 숨을 거두었다

공깃돌 한 개를 연못 안에 던졌다 
갯마름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황소개구리 한 마리가 맞았다
연꽃잎 사이에 배를 하늘로 뒤집고 죽었다.

공깃돌 한 개를 군중 속에 던졌다
피켓을 들고 비정규직 보호법 반대를 외치던 
어느 근로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민중의 열사가 되어 노제를 지내고 떠났다.

공깃돌 한 개를 스님이 세상에 던졌다. 
조중동 신문들이 거품을 물고 짖었다. 
신가짜와 변남용이 큰 돌을 맞았다. 
속세의 번뇌에서 진실 게임이 공방전이다.




허수아비

안개꽃 피는 빈 들녘에 
핫저고리 걸치고 홀로 있네. 
아비 어미도 없이 
자식새끼도 없이
지난 봄 찾아들어 길 높은 언덕 밭에 
오뚝이 서서 바람에 옷깃 펄렁인다. 
오가는 길손 흔들어 배웅하는
딸린 식구 없어 팔자 좋은 사나이 
어디론가 거침없이 떠날 순 있지만 
빈 들녘 떠나지 못하는 사연들은 
못잊어 그리운 참새 떼의 지지배배 
아련한 새벽안개와 박꽃의 유혹 
마르지 않고 흐르는 지르네 물소리
등굣길 달음질하는 아이들 발자국 소리 
정들어 떠날 수 없다고 소리치며 서 있다.








류 민 기



아침나절
안식 
우리들의 그리움은
사랑은
회고 
겸허해진 저녁
봄날엔 의문 뿐
소식


  시인의 말
  누구에게나 먼 곳이 있듯이 나에게도 먼 곳이 있다. 오늘도 발뒤꿈치 들고 그곳을 살펴보았지만 볼 때마다 차라리 안개 자욱했던 기억 속의 풍경 같다. 나는 오늘도 야무지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새참한 가을바람을 업고 먼 곳을 살펴서 응시한다.







커피 잔 앞에서
밤처럼 까만 꿈을 꾼다. 
정원엔 목련이 하얗다,
한 몇달 전 하얀눈 내리는 날 
까만 커피 독주 같이 삼키던 날 
이젠 목련 앞에 취한다. 
부끄러워도 내미는 봄날엔
지난 계절의 낙엽이 
차라리 내 명함 같이 
봄마다 꺼내 보는 
추억 같은 건데
거실의 사월에 마시는 까만 커피는 
봄날에 무엇에 취하게 하는
차라리 독주 같은 거.




아침나절

봄 아침이 소란스러울 땐 
심정의 길 위에 올라보자 
피곤도 보내고 걷는 
이방인 같은 방랑 
꽃노래가 슬픈 사월에
계절 앞에 꽃도 부산한 아침 
엊저녁 해가
가늘게 눈을 뜨는 아침
새는 빨랫줄 같은 전선에 감전된 듯 
지저귀는 아침
외출은 배낭같이 등짐일 뿐인
번민 같은 그래도 차라리 기쁨일 
때 몇 만 리라도 가고 싶은
열매이고 싶은 사랑이라 해두는 
이젠 독백인데
길 나서야 세월 하나 건질 것 같은데 
세월은 바람 같고.




안식

돌아앉은 얼굴이라도 
얼굴이어
보고자 하는데
면전 향해 다가가는 게 
나는 구만 리다. 
사월은 늘 오는 거여서 
미운 생각없이 맞지만
생각한다는 건 늘 힘겨운 거 
순간을 지나
부는 바람소리 같던 목소리 
연기처럼 흩어지고
목마른 미루나무 위에
이제도 본 정든 까치 한 마리 
힘없이 울고



우리들의 그리움은

하루가 저물어 석양이 될 때면 
그리움은 일출처럼 더 밝아온다. 
밤의 휴식은
차라리 그리움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지 
어둑해질수록 더 또렷해지는 
그리움이란 선 새벽별 같이 더 빛나는 
그리운 전망들인데
나의 이별은
이렇게 솟아나는 그리움이지 
어스름도
어쩌면 시절이 몰고 온 
그리움의 그림자인 듯한 
오늘도 일몰은 깊어 가는데 
조금 후
태양이 빨간 전등 같은 얇은 어둠 속 석양이 되면 
외려 그리움은 대낮같이 또렷해질 거라고



사랑은

그리워하라고 사랑은 있나 
한때 놀라워
그래 사랑은 경기(驚氣) 같은 것 
보았을 때 놀라워
보지 못해 어느덧 서러워 
그리워 길을 잃는 게 사랑이지
길 잃어 이 가슴 새가슴 되는 것도 
기쁨인데
간혹 깡소주 몇 잔 마시고 
공원 벤치에 머무는 거
늘 기쁨이 되었다 슬픔이 되었다 하는 
그래
어느덧 그리워져
기어코 보고파지는 거지.




회고

한 번 준 마음은 돌이킬 수 없고 
이 가슴을 떠나간 마음도
한 날 뱉어버린 나날도
이 세월 위에 주워담을 수 없다. 
나의 말은 이미 주어버린 언어여서
이 마음 속에 재차 불러들일 수 없을 때 
사랑은 외려 더 스산해져
속절만 깊어가고
오늘도 가로수에서 떨어져 쌓이는 
흩어져 날리는 나뭇잎 같은 엽서인 듯 
나만의 행복이었던 맹서 하나를
다시 주워들었다.




겸허해진 저녁

저녁이면 신앙이 내리지 
어둠처럼 밀리지
그래 나는 신앙인이 아니어도 
신앙처럼 행동하고
강신처럼 기도가 내 이마 위에 내려온다.
 아슴해 오는 하늘과 가끔 서편 하늘에 걸리는 
믿음 같은 저녁별
신앙은 기쁜 고독이 되어 
세월이라는 인생을 앙망하고
저녁이면 내 마음에 강신 같이 피어나는 것 
밤에 피는 장미 같이 어둠이면
어느 종파인지도 알 수 없는 
빨간 저녁노을 아래에 서면 
이름 모를 신앙이 온다.




봄날엔 의문 뿐

사랑인지 알지 못하고
떠난 건지 머무는 건지 알지 못할 눈짓은 
새싹 같이 심중의 벌판에 눈을 내밀 때 
바람은 먼저 논두렁을 거쳐
이 마음을 타고 흐른다.
기쁜 말 한 마디에 슬펐던 한방울 눈물 
오늘은 마냥 아슴하고
기쁘다던 말도 슬프다던 말도 
아직 고치지 못하고 길을 건널 때 
봇물 흐르는 도랑엔
졸졸졸 사랑의 신음인데
신음은 아파서냐 기뻐서냐 이 봄이 기뻐서냐 
볼 수 없는 건 얼굴 뿐이 아닌 사랑의 심사.




소식

소식은 엽서인 듯
너의 마을에서 나의 마을로 
띄우는 거지만
강바람 타고 
세월을 건너 오는
축축히 젖은 아침까지 울음이기고 하지 
소식은 귓전으로 받아야 할 것이지만 
가슴 속 펼쳐진
추억이라는 풍경 속으로 파고들지
 그래 어느덧
우리 눈시울 물빛 되어
소식은 유리창에 흐르는 그치지 않는 빗물처럼 
끝없이 끝없이
뺨 위로 눈물 되어
자꾸자꾸 흘러 내리기도 하지








강 수 완


작약 봉오리에 진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사람이 상하면


  시인의 말
  세월을 느끼니 일 년이 짧다. 일 년이 짧으니 하루가 고맙다. 붙잡고 사는 나날 오롯이 잡고 싶은 맘. 그 맘 간절하니 더욱 몽매한 가을.




작약 봉오리에 진이 있다

어머나, 세상에!
저리 큰 밥주발 하나를 품고 사느라 
오뉴월 해 같은 잔칫상 마련하느라
더운 김 포옥 폭 뜸을 들이고 있었구나.




은행나무 아래에서

가을,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구리고 독한 냄새에 줄행랑 놓다가 
혼자 무참해져 자리에 선다.

이리저리 구부려진 열두 자 길이 똥자루 
허구헌 날 뱃속에 담아 살면서
제 속 더 구린 줄 왜 모르냐고 
싸잡은 코앞에
약이 되는 단단한 소리 열매로 맺혀든다.




사람이 상하면

과일은 상하면 날벌레라도 꼬이는데 
사람 상한 자리는 표가 없다
어디 한군데 호되게 찢어진 자리에 
새 잎 돋는 나무는 보았어도
사람은 스스로 제 상처 수습할 줄 모른다.

상처는 상처끼리 내통하여 서로 잘 알아보는데 
그리하여 비슷하거나 똑같은 무늬끼리
얼른 친해지기도 하여서 
때로는 각자의 물성 유지하여
최종의 하나를 이룩하기도 하는데

땅에 저항한 아름다운 꽃이 어디 있냐고 
굴복한 흙이 꽃을 어루만져 봄이 오는 거라고 
물살에게 제 살 아무렇지 않게 내어준
벼랑이 타이른다.

드러내 보아라, 
곰살맞거나 대담하여서
표 없는 상처일랑 사람아, 품지를 말아라.







김 혜 원


창을 닦으면
풍선 달팽이
12월의 세상
산을 오르며


  시인의 말
  시를 멀리했다. 7년이란 침묵 속에서 난 뭘 보아왔던가. 삶에 물들어 그저 인간의 일을 열심히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살지 못했기에 시를 대하기가 그만큼 부끄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는 이미 내가 잉태되고부터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이 詩가 되고 삶이 되고 소중한 그 무엇이 되 듯. 시란 내게 따뜻함을 주는 안식처가 되었던가. 어둠과 비참함 그리고 쓸쓸함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란 것을 믿는다. 누군가 나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시를 통해 밝음을 찾게 된다면 좋겠다.




창을 닦으면

창을 닦으면
마치 세상의 부끄러움을 쓸어내리는 것 같다. 
내 손길은 부산하지만
오늘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해 버렸는지. 
가끔은 어둠에 놀라 넘어지고
언 손을 감싸면서 
바람만 소슬한 마당에서
별에 대고 고해성사를 해본다. 
슬슬 웅크려 다가오는
또 다른 내 모습
보이지 않는 굴레를 꼬리표로 달고 
구석 어디선가 잠들어 있을 빛에게 
나직히 말하고 싶다.
넌 할 수 있어.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별의 반짝임이
빛을 던지는 따뜻한 달빛이 
밤에도 늘 깨어있는 나뭇잎들이 
핏발선 눈을 비벼대며
어둠을 이고 일어나고 있다.
밤의 문을 열고
풀뿌리 밑에서 자라나는 눈 
창을 닦으면
세상의 무수한 부끄러움을 쓸어내리는 것 같다.




풍선

오랜만에 풍선을 불어본다 
가능한 멀리 자신을 뱉어내지만 
조금씩 목을 치밀고 올라오면서
자꾸만 헛헛한 기침이 쏟아져 나온다 
이내 풍선은 탱탱하게 부푸르지만 
어디선가 마음이 새는 소리가 난다 
풍선이 터지는 것은 쉬운 일,
그러나 무거워진 절망을 
그냥 두고 지켜보자니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차마 찌를 수 없어서 
가만히 손 놓아 밀어내면 
바람을 타고 올라
깃털보다 가벼이 날아가 버린다




달팽이

달팽이는 새벽이 되면
단단한 껍질을 등에 업고 
풀잎이 젖은 길을 떠난다. 
이제 막 갈구어진
연한 마음을 부비며 
달팽이는 왜
가지런히 뻗은 촉수 느리게 늘이며 
온 몸 밀어부치는 건지.
밤새 꾼 꿈을 떨구며 
풀잎이 일어나면
말 못할 그리움으로
흔적 없이 기어간 그곳에 
아침이슬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진다.




12월의 세상

12월의 세상은 
언제나
굶주려 있다

삭정이 끝에 걸린 별들이 
아주 쉽게 꺾여 버리는 
12월의 세상은,
희망 한 폭 껴입은 줄기마다 
잔금이 생기고
말라붙은 가지 끝에 자꾸만 찔려 
나를 적신 모든 물이 눈물이었음을 
그 방울들 똘똘 맺혀
풀리기를 거부하는 상처가 된다

12월의 세상은
가파른 시간의 한 때를 
저만치 물러서서
찢겨지는 눈들로 부둥켜 안고 
젖은 공기 속에 알갱이들 
단추를 잠그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산을 오르며

그때 내 속에는 
제것이 아닌 잎들이 
바람에 몸을 맡겨
소란스레 풀밭을 헤 짚고 다녔지요 
제자리 걸음 같은 평평한 길을 
한없이 가는 게
헛것이라 여겼지만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산을 오르는 것은
마음의 단추 촘촘히 채우고,
무거워진 잎들을 밟고 가는 것이지요.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산은 허리를 숙여 속삭였지요 
내가 밟고 있는 줄기는
벼랑 끝으로 내몰던 세월의 시간일 거라고, 
여기 남은 흔적 속에
깊이 처박힌 뿌리들은
고요히 흔적 없이 스며들고 싶어하지요

* 나희덕 詩 ‘속리산에서’ 인용.








이 형 복


가을 유혹ㆍ오 열 갈라산에서ㆍ5월 우중에
하행열차를 타고


  시인의 말
  시를 쓴다는 것은 잘 지어낸 밥을 정결한 사발에 담는 것과 같다.
  좋은 밥을 만들려면 좋은 쌀을 선택하고 적당한 물과 함께 솥 에 부어 서서히 열을 가한다. 밥이 끓기 시작하면 한동안 강하게 가열하고 그 뒤엔 약한 불로 뜸을 들여야만 맛난 밥이 지어진다. 난 이곳에 밥을 지었고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분들은 ‘조기’나 ‘산채’ 같은 맛난 반찬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아니 거기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지, 물론 반주로 소주 한 잔이다. 이제 막 심은 나무가 내년 봄에는 새싹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초록 잎으로 덮여질 것이고, 지나가던 새들이 그 가지에 앉아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들려 줄 것을 기대하면서 곧 다가올 추운 겨울을 나려 한다.




가을 유혹

가을 유혹에 산문에 들어서니 
청솔가지 백학 노닐다가
방금 날아간 자리에
녹색의 빛깔이 너무 고와라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행여 널 만날까
네가 아니면
그 가을 흐느낌 서성이던 
그 눈부신 햇살과 같이
나뭇가지 사이의 잔광이라도 만날까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다가
물감을 뿌려 곱게 배어든 치맛자락 
바람에 날려 얼굴 비비대니 
부드러움에 취해
이내 잠들고 만다

잠시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너의 요염한 자태에
할 말을 잊은 채 
눈을 감아 버리고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뒤돌아선다

스스로가 선택한 자유로의 갈증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잊은 채 
아무도 모르는 오차원의 공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작지만 힘 있는 발걸음을 
내 딛는다

나의 이야기는
가슴으로 가쁜 숨을 몰아 
시공을 넘나들며
땀으로 얼룩져 뒤범벅된 
낡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차분히 채워 나간다.




오 열

얼마를 더 살아야
생의 모든 잡념과 괴로움이 
사라지려나

지치도록 서러운 
과거의 記憶속에 
모나게 튀어나온 
나의 ‘에고’

머리 껍질을 벗겨 
뇌세포를 들어내고 
과거의 기억들을 
도려낼 수 있다면 
아픈 기억이 사라질까

지하에 묻어버린 너의 뭄뚱이는 
차츰 썩어 들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나는 
미치도록 슬픈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든 아픔을 안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터져 버린 너의 영혼을 
부둥켜 안고
다시 뜨는 태양을 보기 위하여 
기약 없는 날들을 세고 있다.




갈라산에서

행여 널 만날까 
네가 아니면
그 가을 흐느낌 서성이던 
그 눈부신 햇살과 같이

숲속의 잔광이라도 만날까 
갈라산에 가 보았지 
아스라한 벼랑끝
소나무 가지는
전보다 더 설운 몸짓으로 
바다를 그리워 뻗고 있었고

쌓아 올린 바위색 
짙기는 여전 했지만 
네 그림자는
한 치도 드리워져 있지 않더라 
깊은 바닷물속에 가면
널 만날까
행여 동백잎 그늘에서라도 
널 만날까
낮이 다 가도록
너 닮은 물새 한 마리도 
날아 오르지 않고 
초가집 낡은 창틀 
동백잎만
지고 있더라




5월 우중에

비가 오면 누가 나를 부릅니다 
아득한 소리로 부릅니다.

죽음처럼 먼 나라에서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나를 부르는 그 사람은.

그는 내 손을 잡고
머리에 비를 털며 눈물짓습니다. 
우리는 우는지 웃는지 모릅니다.
그냥 터질듯 가슴이 벅차서 서로 말도 잊은 채 바라보다가

어디서든가요?
붉은 꽃잎이 우수수 우수수 우수수……




하행열차를 타고

산자락 풀어내듯 제 몸 태워 노을로 지는 바람을 본다 
어느 골 어느 자갈밭을 딩굴던 야문 바람이던 것이 
이 저녁 무렵
더러는 안개가 되고 
더러는 노을이 되어
갈대밭 머리 아이들 입에 문 바람개비에서 되살아나 
사람들 머리맡에 목숨처럼 푸르게 출렁이는 잠이 된다

머언데 담배연기처럼 가느다란 산모퉁이 길을 돌아 
한 점 버스 불빛이 외로운 모습으로 가고
바람으로 설레임으로 
흔들리며 젖어오는 어둠사이
일손 끝난 뜨거운 들판을 지나
지친 가슴에 켜 보는 등불 하나, 둘……

손끝을 파고들던 그리움 
길 없는 세상을 떠돌아
어둠 속에서도 묻어나는 설움이었을까 
헐벗은 몸 가리는 밤에도
시름겨운 눈시울로
어두운 차창으로 흐르는 세월을 딛고
이 땅의 사람들 너나없이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시리고 시린 가슴 밑바닥 부여안고
아프고 쑤신 형광 불빛 하나 켜놓고 힘겹게, 올곧게. 
창가엔 사람들 옷소매 묻어난 땀방울 별로 떠오르고 
덜컥이며 기차는 달린다.








이 선 남


빈 집
사과 꽃잎이 지던 밤 
독작
봄 1
거미줄을 거두며
난 동백꽃 되리라


  시인의 말
  소녀 시절부터 나에게는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잠재해 있었는가 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항상 시와 연관 지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갈망에 비해 뼈를 깎는 실천이 없었기에 난 항상 부끄럽다. 쓰고 지우고 다 불태우고 다시는 하지말자 꿈을 접고, 다른 일에 매달려 보지만, 또 다시 뒤 돌아보는 나의 꿈, 저 납작한 옛 집의 시렁 위에 올려놓은 먼지 쓴 나의 꿈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지 가슴이 떨려온다.
  어느 시인은 “어떠한 성찬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굶주림이 있다.”고 하였다. 과연 무엇으로 어떠한 언어로 자신의 굶주린 창자를 채울 것인가. 어떻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




빈 집

풀숲에도 꽃은 피고 있었다.
무궁화꽃 장미꽃, 이름 모를 들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보는 이 없어도 살구는 익어가고
약을 주지 않아도 복숭아는 익어가고 있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되어 부끄러워하고 있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숨어 있었다.

길은 풀 속에 숨어 있어도, 문은 풀숲에 가려 있어도 
세월은 가고 오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나뭇잎들은
한 낮의 열기에 늘어져 있지만 
살랑거리는 바람과 도란거리고 있었다.




사과 꽃잎이 지던 밤

당신이 처음 이 곳으로 왔을 때
무성한 잎 사이에서 발그레한 수줍음으로 
피어났답니다.

미풍이 당신의 온 몸을 감싸 안을 때 
당신은 고운 미소로 살포시
얼굴을 들었답니다.

벌 나비 당신의 주위를 맴돌 때 
당신은 함박웃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기뻐하였답니다.
달이 훤한 어느 늦은 봄밤
온 사과밭은 흰 소복을 한 여인들의 춤이 
시작되었답니다.
너울너울 춤을 추며 사뿐히 내려앉는 과수밭가의 
객석에는 개골개골 개구리의 합창이 
시작되었답니다.
달님 별님 모두 나와
가는 봄이 아쉬워 춤을 추는 
무대를 향해 술잔을 기울일 때
잠 못 들던 밤새의 울음소리는 
깊어가는 시각을 알리고 있었답니다.

붉은 꽃망울이 하얀 꽃잎이 되어 지던 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그네는 밤새워 울었답니다.




독 작

홀로 마신다.
홀로 마시면서 허공에 내 마음을 꺼이꺼이 토해 낸다. 
비워낸 술병만큼 내 마음도 빈 병이 되었건만
내 말들은 어디에 담겨졌을까
나의 친구는 나의 말을 어디에 담아 두었을까 
내가 마음을 비워 낸 만큼
나의 친구는 마음을 내게 주었을까

모두가 떠나 버리고 
홀로 창가에 서서
밤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속에 달을 보며 
내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단어들을 
생각해 본다.
버리면 얻어질 것이라는 말을 알면서도 
버려지지 않는 삶의 욕망들……

오늘도 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을
가슴 속에 묻어둔 말들을 꺼이꺼이 되뇌인다. 
욕망의 찌꺼기를 다 토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는 말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봄 1

어둑새벽에 문을 열고나서면
찬바람이 아직은 드러난 살갗을 매섭게 스친다.

긴 밤을 열정으로 몸살을 하던 너의 몸에서 
거스러미와 함께 품어 나온 진액으로 해감내가 난다.
 네 속에서는 아우성이다. 단단한 막을 벗어나려

너의 몸은 달구비를 원한다. 
황사바람은 바삭한 몸을 핥고 지나고 
너의 소망은 목을 내밀다 움츠려든다

눈설레 속에서도 산수유는 씩씩하게 피고 
부족한 2%에도 욕망으로 대지는 들썩인다. 
찬바람이 살갗을 때려도 봄날은 밝아온다.

꽃이 피기 전에 싹도 나오기 전에 
달구비는 견디기 어려워 봄에는 
보슬비가 내리는가보다

땅속을 들썩이던 욕망의 씨앗들은 머리를 내민다. 
이름 모를 싹이지만 신비롭구나.

긴 겨울을 대지의 품에서 싹을 틔워 생명을 얻은 어린 순은
험한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세상 밖으로 목을 내밀었다. 
뿌리째 뽑힐지 모르는 운명을 앉고

안타까운 마음에 살며시 만져보니
야들한 생명의 숨결이 나의 몸속으로 흘러온다. 
이제 이곳이 모두 파란 언덕이 되겠지,
그래
언제까지 파란 언덕으로 나에게 남아다오. 
오늘도 너희들의 변하는 모습을 보며
이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서로의 위안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거미줄을 거두며

나와 함께 십오 일을 동거했다.
난 그에게서 불빛을 찾아 날아드는 
벌레들을 양식으로 삼으라고 두었다.
나의 이기심이 그를 나와 동거하게 둔 것이다. 
그대로 그 장소에서 매달려 꼼짝을 하지 않기에 
나도 허락을 했다. 그런데 오늘
그 거미줄에 거미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을까
구석은 먹을거리가 모자라나 보다
많이 자란 놈은 식욕이 왕성한 모양이다 
거미줄까지 모두 거두어 이사를 했다. 
창문 쪽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거미들의 왕래도 많고 날파리들의 왕래도 많은 번화가로, 
나의 끓는 속은 그곳을 허락할 수 없었다.
매일 그곳을 통해 나는 외부의 소리를 듣고 외부의 동태를 살핀다.
나의 시야에 그들의 보금자리는 내어줄 수 없는 
이기심이 가득한 공간이다.
또 다른 이기심이 거미들의 양식이 풍부한 거리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와 나와의 동거는 오늘로써 끝이 났다.

그가 구석에서 조용히 있을 때는 나도 그의 영역을 인정 했으나
나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상 그의 생명을 저 나락으로 보내고 말았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내일이면 또 다시 기어 올라올 것 이다.
이제 다른 곳을 향한 생존의 행렬이 시작될 것이다. 
나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난 동백꽃 되리라

난 동백꽃이 되리라
붉은 송이 째 툭 하고 떨어지는 동백꽃 되리라

남보다 먼저 피어나 자태를 뽐내다 누런 꽃잎이 되어 
나무를 붙들고 애원하는 꽃보다
보는 이 없어도 북풍한설을 지나
붉은 상처로 피어나 송이채로 툭 져 버리는 
난 동백꽃 되리라








김 진 회



소식
아궁이
쑥대궁 
똥간 시
낮잠
내 소식 

겨울이야기
냉장고


  시인의 말
  정답이 없는 곳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생각 하고 쓰는 일….
  처음으로 글을 내보낸다. 그저 쓰는 게 좋아 모여 있던 나의 글들이 처음 세상구경을 한다. 여기저기 부딪히고 깨지고 때로는 울고 싶은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글 여기저기로 상처가 생기는 일에 좌절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겠다. 쓰러지는 만큼 새롭게 일어나 나도 시도 한층 자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나의 시에 이름을 붙인다.
나도 시도 이름도 쾌활한 슬픔이다.






Ⅰ.
시가 아닌 것들이 시가 되기 위해 꿈틀거린다. 
너는 나를 닮지 않았지만, 나는 너를 닮았다.

Ⅱ.
그 보단 그들이 무섭다.
난 아무런 힘이 없고, 나의 언술은 삼류들의 독백이다.

Ⅲ.
그의 시가 그들에게 가다 떨어졌다. 
급히 주워, 주머니 깊숙이 숨겨두었다.




소식

  어제는 어머니의 발 위에 낙엽이 떨어졌습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의 소식인 듯 기침 같던 바람이 전해 준 고요입니다. 아버지의 소식은 이번 달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통장으로 돌아오고 아버지는 더 멀리 태양을 쪼이러 떠나셨습니다. 그곳은 아직도 더운 날의 연속이겠지요. 저희는 올 겨울을 위해 아버지의 소식을 연탄과 바꾸었습니다. 지난 겨울 기침이 심했던 막내도 기술을 배우러 떠나고 둘째는 저의 통장으로 근근히 소식을 전해옵니다. 저는 그 소식을 핑계로 책과 바꾸고 아버지와 둘째의 소식 위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깨어납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부끄러운 신물을 소식들 위에 토해내고 저의 소식은 이렇게 편지로 부칩니다.

P.S. 12월의 겨울을 조금 떼어 아버지께 보냅니다.




아궁이

할머니는 빈 아궁이로 불을 넣으셨다. 
아버지는 지붕 위에서 이름을 부르셨고
아버지의 동생들은 일 년에 한 번 오르는 산으로 
길을 만들었다. 그의 아내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새벽녘에서야 찾아온 침묵은
빈 아궁이를 통해 흘러 나왔다.
초저녁에 잠이든 막내가 무거운 듯 울었고 
그날, 빈 아궁이에서 흐른 연기는
유난히 매웠다.




쑥대궁

Ⅰ.
은행나무 사이로 그녀가 
내려앉는다.
낙하는 살며시
그늘 밑으로 낮잠에 빠진 
쑥대궁이 바르르 떤다. 
떨림 사이에서 다시 
그녀가 태어난다.

Ⅱ.
15세 소년의 노동은 
아버지의 노름빚이다. 
끌려간 소년의 송아지다.

Ⅲ.
은행나무 사이로 
살며시 내려온다. 
가난 또한 살며시
그늘 밑으로 낮잠에 빠진 
소년이 파르르 떤다. 
떨림 사이에서
내가 태어난다.

Ⅳ.
은행나무 태양이 살며시 
비켜나간 곳
쑥대궁이 자란다.




똥간 시

난 변비이고 긴 시간 
똥간에서 시를 쓴다 
꿈틀거리던 몇 개의 상상이
덩어리로 떨어지고
숨이 막힌 듯 꿈틀거린다.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상상은 
허공에 닿은 적이 있었던가
없다
그건 나의 두통과 숙취이다 
가끔은 술이 빠져 나오는 
물컹한 쓰라림의 일종이다 
변비가 있는 난
오늘도 시로 뒷거리를 하고 
휴지통 속으로 던져버린다 
상상은 물속으로
깊이 헤엄을 친다 
이제 작별이다



낮 잠

  마당에 널부러진 메리와 나의 차이는 간단하다 난 말을 하고 메리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럼 말할 수 없는 사랑은 더 간단한가. 불안의 공습이다.
  ㅅ ㅏ ㄹ ㅏ ㅇ 이다.
  결국 양심은 나의 언어를 주워 모아 괄호 속으로 던져 넣는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메리 옆에서 잠드는 일
  ㅅ ㅏ ㄹ ㅏ ㅇ 이다.




내 소식

별빛이 그렇게 빠르다기에 
내 소식 별빛으로 전하고는 
행여 그대 놓칠세라
내 가는 길 내내 붉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주 다섯 잔 훔치고 
잠이 든다 저 잘래요 어제의 여독이 풀리지 않았어요 
마당 구석 독 안으로 들어가 깊은 잠이 든다
나른한 아침이다
겨울이야기

가영아,
그해 겨울 우린 시 쓰는 아버지를 잃었지. 
그렇다고 시를 모두 잃어버린 건 아냐. 
벌어진 상처에 빗물이 조금 스며들었을 거야. 
흉터를 지우기 위해 몇 번의 수술을 했고 
수술은 언제나 성공적이었지.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 
더 깊은 곳이 먼저 썩어갔나봐. 
아물지 않는 상처는
유난히 더운 여름 탓으로 돌리고 
함께 잠이 드는 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한 우리의 의지겠지.

가영아,
다가 올 겨울이 조용한 건, 
아직 털이 자라지 못한 것들이 
먼저 잠들기 때문일 거야.
벌어진 상처로 빗물이 들어오던 날 
네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 했었니. 
상처를 들여다보며 같이 울던 날은 
잊지 못할 시를 한 편 쓰고
깊은 잠이 들자.
겨울 사이에도 체온이 닿으면 
심장이 개구리처럼 뛰겠지.




냉장고

이런 어처구니없고 하찮은 일들을 
또 하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낡은 관념의 덩어리가
금방 잡아 올린 메기처럼 꿈틀거린다. 
창자가 모두 씻겨나가고도
얼마간 살아있을 고통처럼,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너무 빨리 
늙어버렸다.
익숙한 더위처럼 단말마의 교성도 
흐르지 않았다.

낡은 관습은 버려진 냉장고다.
가늘고 긴 고무자석들은 아이들의 손에서 
흥분한 메기처럼 꿈틀거린다.
냉장고의 소음이 어린 창녀의 
신음소리 같던 밤
낡은 냉장고로 늙은 도덕을 넣고, 
잠이 들었다.
시간은 보기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김 윤 한


풀어진 녹음 테이프
그림자 
좌탈입망
보길초등학교
바람소리
호곡
헨델 ‘사라방드’


 시인의 말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가 버렸다. 연말 동인지를 만들면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내년에는 좀 덜 부끄러운 시를 써야지 하다 보면 벌써 잎사귀들이 발등에 떨어지고 그럴듯한 시 한 편 쓰지 못한 채 또 한 해가 지나가고 만다. 또 후회하면서 그렇게 아쉬운 생각만 해마다 되풀이하면서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그 동안 내 시가 보폭이 짧기는 하지만 조금이 나마 향상되었다는 자위와 함께 그래도 여태껏 이 가엾은 시를 버리지 않고 가슴에 꼭 품고 여기까지 온 것은 어쨌든 우리 동인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풀어진 녹음 테이프

아까시 나무 가지에 
어지럽게 풀린 녹음 테이프 
펄럭이며 걸려 있다.
한 때는 찬란했으리라 
말씀은 사방으로 나부끼고 
두두다다 헬리콥터도 
돌아와요 조용필도
힘찬 사운드로 되살아났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잔바람에도
흔적들만 부질없이 흩날리고 
화장장의 휴일 같은 
말라버린 뼈 같은
무거운 고독만 한가로이 
흘러간 시간을
재고 있다.




그림자

옅은 회색빛 어스름한 언덕길을
한 사내가 힘겹게 걸어 오르고 있었다.
피곤한 그림자도 그 뒤를 따라 오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오랜 인연이었다. 
그림자는 사내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언제나 앞서는 법 없이 반백 년을 넘게 
충실한 하인처럼 묵묵히 따라온 것이었다. 
마침내 그 그림자가 돌아가 안식을 맞을 
그 아득히 먼 나라는 어디일까.
저녁 어스름 뚫고 오르는 매캐한 연기 너머로 
쓸쓸한 북소리가 툭툭
들판의 침묵을 건드리고 있었다. 
모두들 영원을 꿈꿨지만
세상은 끝이 있다는 걸 마침내 깨닫듯이 
언젠가는 그 사내도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일평생 따르던 피곤한 그림자도 이윽고 
허공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좌탈입망

이 냄새나는 똥덩어리 
어디에서 생겨나 마침내 
어디로 떠나는가

백양사 서옹 스님 
한평생
‘이뭣고’만 하다가

푸른 장검으로 
허공을 한 번 
서늘하게 내리긋고는

마른 고깃덩어리 하나 
가부좌로 남겨두시고 
홀연 사라지시다.




보길초등학교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노송, 입 다문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있고 
속절없이 동백꽃만
연못 위로 툭툭 떨어졌다. 
역사는 다만
한 장 풍경화로만
남아 있다. 생각하는 순간 
담장 사이 보길초등학교 
푸른 풍금소리 타고
한 무리 아이들
병아리처럼 재재거리며 몰려왔다. 
야외 수업 시간
어부사시사, 합창이 되어 
세연정 추녀 끝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긴 침묵을 깨고 나무들도 
일제히 수런거렸다.




바람소리

바람은 본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무들은 왜 저다지 괴로워하며 
울부짖으며
무시로 펄럭이는 것일까 
외로운 대금 한 토막 
끊길 듯 이어지고 있다 
이윽고 밤은
연못 속으로 침몰하고 
마을이 슬픔으로
전설처럼 침묵하고 있을 때 
어두운 벌판 가르며
하늘 끝에서부터 달려오는 
검은 휘파람 소리 
어디론가 급하게 
아우성치며
달려가고 있다.




호곡

날카로운 칼날 같은 
서늘함만이
마을을 돌고 있다. 
습지식물들 하나씩 
스멀스멀 덩굴을 올리고 
끝끝내 돌아오지 못할
먼저 떠난 자들의 뒷모습이 
요령소리에 묻힌다.
이윽고
무서운 고요가 깨지고 
보름날 밤 깊은 강물처럼 
푸르디푸른 슬픔만이 
파도처럼 흘러넘쳤다. 
날은 저물고
마침내 우리도 떠날 것이다. 
고요를 찢는
날카로운 해금 소리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고 있다.




헨델 ‘사라방드’

나무 한 그루 없는 
아득한 벌판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한 사내의 
초라한 뒷모습이
석양에 잠겨들고 있다. 
피곤한 이승의 살점들과
헤진 옷자락과 신발을 이끌고 
참으로 먼 길
험하게도 걸어 왔구나.
이 세상 영원한 동행은 없는 법 
홀로 지쳐 쓰러지는 곳이 바로 
영원히 쉴 수 있는 곳.
부르튼 발 눈물로 문지르며 
아득한 저 지평선을
오늘 밤 또 홀로 넘어가야 한다.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기고
낡은 첼로의 저음이 
힘줄 불거진 종아리에 
척척 감기고 있다.

'글밭 기발간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동인지31집 2009년도  (0) 2023.11.05
시동인지30집 2008년도  (2) 2023.10.28
시동인지28집 2006년도  (2) 2023.10.24
시동인지 글밭27집 2005년도  (2) 2023.10.21
시동인지 글밭 26집 2004년도  (4) 202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