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시동인지30집 2008년도

저 언덕 넘어 2023. 10. 28. 20:30

우리들의 말

글밭 30집, 두께와 깊이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동인지를 만들어 왔는데 어느덧 30집을 상재하게 되었다. 30이라는 숫자가 갖는 무게가 어느 때보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다. 글밭이 창간된 것은 1969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인회의 연륜도 어느 덧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록하게 되었다.
  글밭이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참으로 여러 가지로 파란과 어려움도 많았다. 1972년부터 1984년까지 안동문학 창간을 위하여 휴간하기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1985년 8집을 복간하면서 글밭의 저력과 명맥을 다시 잇게 되었다.
  동인지 창간 초기에는 그래도 독자들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 있었고 시인들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오히려 대단했었다. 동인 활동을 희망하는 문학청년들도 지금보다는 층이 더 두터워 그나마 신명나게 활동을 해왔다고 들었다.
  창간 당시 동인 활동을 해 왔던 분들은 벌써 나이가 환갑 줄을 넘나들고 있고 이미 임병호 동인과 백승초 동인은 유명을 달리하는 등 동인회의 구성원도 많이 바뀌었다.
  창간 초에는 20대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문학 인구의 축소와 시창작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동인회 멤버의 주 연령층이 40대 후반 에서 50대에 이를 정도로 평균 연령이 높아졌다.
  물론 연령층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문학적 연륜과의 관련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쉬운 점은 젊은 동인의 부족으로 앞으로 동인회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하는 염려가 앞서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30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서재에 꽂혀 있는 동인지 30집까지의 두께는 누가 보기에도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껍게 느껴진다. 우여곡절을 넘어 참으로 오랜 세월 꾸준히 동인지를 내어 왔다는 뿌듯한 생각.
  이러한 연륜으로 말미암아 문학, 특히 동인지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글밭’을 제쳐 두고는 지역의 문학동인지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도 되었다.
  하지만 글밭 30집의 두께와 함께 과연 우리는 문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깊이를 확보해 왔느냐를 곰곰 생각해보면 한 편으로는 반성과 함께 솔직한 심정으로 부끄러운 감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그러한 ‘깊이’의 문제는 후세의 문학 연구가들이 꼼꼼히 짚어주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나마 최근 글밭 동인회에는 젊은 층의 참여와 관심, 그리고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글밭 동인회의 지속적 활동에 대한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글밭 40년 동안 30집이라는 동인지를 내어 온 데 대해 스스로 다시 한 번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자축의 의미도 함께 새기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적어도 우리 세대까지 만이라도 글밭이 지속적으로 살아남게 되기를 함께 걱정한다.
  30집이 있기까지 함께 염려해 주시고 행을 세어가며 해마다 동인지를 꼼꼼히 아껴 읽어주신 아름다운 독자들께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아 글밭이 두께에 못지않게 깊이도 한층 더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김 금 숙
압곡사   12
임플란트   13
행복여인숙   14
그믐달   15
은행나무   16 
냄비와 국자 전쟁   17

강 희 동
취자시론   20
취자 선문답   21
엽신   22 
길동 가는 길   23 
필리핀 필(feel)   24 
지금 백운호수에는  25
등산   26 
삼복 하오   27

김 혜 원
풀   30
성난 촛불   32
밤에   33
거미   34

김 진 회
십자가에 박힌 어깨 36 
코스모스 38
월식  39
▽▽의 유희   40
승화 41
합주(JH's Rap Style)  42

이 선 남
황혼 44
비 오는 날 45
자유인 46
가을을 손에 낚으려 47
설악산 48

김 진 택
고향 50
울고 간 새 51
풍경 52
접시가 나를 본다 53
노래 54
풍경 55
노래 56
근황 57
소주의 전개 59

김 여 선
벌판에서 62
봄의 새벽 64
우리들이 외출하는 도시는 65

권 오 규
봄비 72
가랑잎 73
왼 손 74
아들 75
함께 일일일선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77
약간 굵은 초생달 79
母子를 보며 80

류 민 기
축복 82
귀로 83
봄비 84
기다림 85
낮술 86
사랑이 무너져 내릴 때 87
빗줄기 89
사랑은 90
애증(愛憎) 91
은하다방 92

이 형 복
설난(雪亂) 96
로스트(Lost) 98
랑데부  100
상사화  102

김 명 동
회상일기 106
접선 108
길  109
눈 110

권 기 태
팔월의 한 가운데서 112
일월산 등산 114
다랑이 마을 115
어둠이 지워질 때 116
2008년 10월 117

임 관 혁
노귀재 120
솔밭 새 121
동행 122
기도 123
귀향 124
동백꽃 125
사월 126
실향 일기 127

김 윤 한
고물상에서 130
뽁뽁이 131
하늘 132
법당 안 파리 133
가을을 찾아서 134
높이뛰기 135
오래된 사진 136
차마고도 137
삼강 주막  138
그림자 139
거울 140
묘목장수의 꿈 141
금강경 읽으며 142

글밭略史  143






김 금 숙


압곡사
임플란트 
행복여인숙
그믐달 
은행나무
냄비와 국자 전쟁


  시인의 말
  내가 내 텃밭에서 키우는 것은 무덤이다.
와병중인 배추와 무와 파 그리고 배추벌레, 지렁이, 개미, 흙, 바람, 비, 기타 등등
백리 안개 속에서 생명의 순환에 마음 기울여 보는 지천명의 겨울이다.




압곡사

길 끊어진 첩첩산중
벼랑 끝에 둥지를 틀고 앉다니! 
족두리도 못 푼 채
소박맞은 그년 
당그라니
그렇게 한세상 다 보내고 
마침내
고이 벗어 벼랑 끝에 걸쳐놓은 족두리

진즉에 색 바랜 만월이구나




임플란트

이런 묘비라니 원, 
살아서 잇몸 속에 세워 
죽어서 빈 몸속에 세워
그래, 끝내 혼자임을 새기겠다는 은빛의 각오인가 
지천명에 묘비를 잇몸 속에 심어주는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팔월의 정오 
내 묘비는 이제부터 잇몸 속에 있겠구나 
뭐라고 쓸 것인가




행복여인숙

태백의 철로변 한 마리 북어로 누워 있는 행복여관 
주인 노파의 긴 저녁 햇살을 빨아들이는 부서진 흔들의자 
오래 전 지붕이 내려앉은 시간
오늘 숨을 놓다




그믐달

그 깊고 무거웠던 몸 
살점 다 털어내고
이제 떠오른다, 떠올라
은사시나무 이파리들 은회색으로 출렁이는 
물이랑 사이로 희미하게 떠오른다, 떠올라

달의 지느러미




은행나무

사는 것의 옆구리가 결린 지 오래다 
아줌마 한시가 급해요
갑자기 한시가 급해진 몸 벌컥 움켜쥔다 
낯선 이웃처럼 다가온 몸
할 말이 없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잠이 든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창 밖에서 흔들리는 노란 수천의 돛단배 
팔랑팔랑 따라가면
그 곳 나라 봉창 열어놓고
늙은 선인장 호텔처럼 속 칸칸을 비워 
새와 벌 나비 개미 지렁이 전갈 지네 
바람이 비가 천둥이 번개
칸칸이 들어 앉아 사는 몸 한 그루

밤새 가을비 내린 먼 길 돌아
노란 돛단배를 접으며 어머니 창문 밖에 서 계신다




냄비와 국자 전쟁*

이틀 전 안동의 서점에 주문을 해서 
지구를 깔고 앉아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냄비와 국자의 전쟁을 사서 온 밤
내 냄비와 국자는 잘 있는가
싱크대와 수저통에서 각각 단잠에 빠진 냄비와 국자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감자를 삶다가 숯이 된 냄비를 깔고 앉은
코팅이 벗겨진 냄비 오늘 아침 애호박 볶은 흔적이 선명해서
다시 한번 마음이 놓인다
불 위에서 담금질 당하는 게 일상인 냄비에게 
국자가 할 말이 있다한들 뭐 그리 대수인가 
혼자 궁시렁거린다
다 끓여 놓은 국이든 찌개든 푸기만 하는 게 
뭐 그리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한번 궁시렁거린다
그러다가 수저통에서 눈이 움푹 패인 국자와 눈이 마주 친다
움푹 패인 눈의 그림자가 깊다

*냄비와 국자의 전쟁:마하일 엔더







강 희 동


취자 시론
취자 선문답
엽신 
길동 가는 길
필리핀 필(feel)
지금 백운호수에는
등산
삼복 하오

  시인의 말
  세상이 어렵게 흘러간다. 경제도 어렵고 사람 살아가는 시류도 녹녹하지 않다. 한 집에 한 명 정도는 파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삶이 더럽게 구질구질하다.
  가파른 현대의 언덕을 오르면서 내려다보이는 평온의 원시를 꿈꾼다. 편리를 떠난 불편함이 더 진솔한 삶의 맛을 낸다는 것 을 알 때도 된 듯한데......!
  시도 그렇다. 남루하다. 그간 써 오던 “자경록" 시를 올해는 두 편밖에 쓰지 못했다. 역량의 한계인 것 같다. 억지로 쓰기 보다는 뒤쪽으로 좀 밀쳐두고 어쩔 수 없이 삶 속에서 흘러나온 구질한 내용을 상재한다. 시가 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계속 끌쩍거리는 것은 그것도 인생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못마땅해도 계속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취자 시론

달도 찌그러진 늦은 밤
취자 왈
학문은 똥구멍이요
시(詩) - 이는 오줌 떨치는 소리라 
흐흐흐 ----.




취자 선문답

아주 늦은 귀가 길 
브럭 담벼락 틈에
내 자지 뜨거운 물 솟구칠 때 
용케 살아남은 달맞이꽃 
빙긋이 날 쳐다보며 하는 말 
“좆또 아직 살아있냐”
정신이 몽롱한 환청에도 
하얀 포말이 넘쳐흐르고
나 또한 혀 꼬부라진 취설로 
“니는 내 오줌꽃이야”
달도 없는 어중간한 허리춤 
노란 꽃 대가리에 걸죽한 
오줌맞이 꽃 우습다고 
흐흐흐

비틀 비틀




엽신

너무나 쓸쓸하여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다

누군가가 잊혀진 오랜 지난 날
삐걱이는 목조 교실을 벗어나는 풍금소리나 
초가지붕 굴뚝을 벗어나 오르는 아련한 연기 같은 
가녀린 떨림들이 조금씩 살아올라
문풍지 떨리는 두근거림으로 손 내밀 때
떨림은 쪽마루를 내려와 이내 뒷단장 댓잎을 흔들고 
마을 고샅을 휘돌아 추운 세상에 맞서 
사시나무 떨듯 삭막과 암담에 몸 움츠리다 비로소
오래 떠나 감감해진 기차소리를 듣는다

길이 끊기어진 기차와 간이역
먼 모습과 환청으로 오가는 엽신

너무나 쓸쓸하여 나에게
오래 머무르던 편지를 보낸다



길동 가는 길

살 길 찾아
길(吉)동 가는 길 
총신대 환승역 즈음 
내 발길 싣고
먼저 앞질러 가는 길
길도 제 방향으로 움직이는구나 
주마가편(走馬加鞭)길 에스컬레이터 
성큼성큼 시간을 가로질러
길을 밟으면 아득히 
뒤로 멀어지는 발길
앞길 뒷길 골목길 헤매다 
고개 들어 눈길 두리번거리면 
길동에 사방팔방에 길이다 
길동엔 갈 길이 없다




필리핀 필(feel)

난생 처음 외국 다녀오다 
필리핀
필릴리리 필리이핀
필(feel) 핀 뽑으면 똥피리 소리
쾡한 아이 눈동자 속에 빠진 코리아 똥파리 
젖몽우리 솟아오르면 지지배배
제비처럼 엉⑨이 흔들며 검은 거리로 쏟아지고 
클락의 붉은 하늘 저물어 내리면
뒷골목 여기저기 휴지조각으로 몸 파는 처녀들 
로칼촌 어두운 골목 어디선가
비파음으로 흐르는 따갈로그 노래 
애비가 누군지 모르는 원시림의 모계
파리날개 소리로 부딛는 야자수 잎들의 흐느낌 
미이국 이일본 하한국 애비 없는 아새끼 젖 물리고 
피일유(feel you) 피일미(feel me) 피일리핀.




지금 백운호수에는

심산유곡 떠난 가녀린 샘물 
길고 고단한 여행을 지나 비로소 
깊고 푸른 물 되어 몸 섞는다

눈보라에 마음 보태고 한 시절 
폭풍우에 위태롭게 넘치다 
이윽고 다다른 넓고 그윽한 호수

가을산이 제 얼굴 씻고 내려다보는 명경지수 
흰 구름 한 점 뜯어 넣어 산들바람 간지리면 
조용히 구겨지는 화엄의 수면

고이지 마라 흔들리지 마라
고요 속에 움직임 속에 고요 제 몸 흔드는 오색자수 
물 밑 속 은밀히 자맥질하는 만산홍엽

한 골 성큼 건너 뛴 청계사 모종(暮鐘)소리
파아랗게 젖어 호수에 내리면 소리는 간 곳 묘연하고 
나뭇잎 우수수수 종소리에 날려 법문 청하는 저녁 즈음.




등산

사람들 제 살 길 찾아 산으로 오르고 
산, 숨차 오른 능선으로 길을 낸다 산길
이윽고 길 밟을수록 단단해지며 허물어지는 표피 
나무, 넘어지지 않으려 앙상한 뿌리로 땅 부여잡고 
더 넓고 많은 햇볕 받고자 저마다 키를 높인다 잎들 
주름진 이 골 저 능선에 모두들 붙어 서서
잘 살아 보려고 저 마다 영역을 내어주고 깃들인다 
지친 그늘 아래 엷은 빛마저 넉넉지 않는 음지에도 
축축이 땅을 흥정하며 양치류 같은 풀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빛을 외면하지만 정작 
산꼭대기를 장악한 형형색색의 사람들
야호 소리 지르면 땀을 딱는다 
등짐 진 산은 말이 없다.




삼복 하오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온통
하늘 향해 양산 펴든 나뭇잎들 
작열하는 태양볕 가리려
아니, 맞으려 정원을 그늘 지우며 막아선 하오 
때마침 매미들 합창 소리에
뭇 화초들 꽃, 잎, 덩굴손 펴자 
하모니로 올라오는 정동(靜動)의 교차 
콘크리트벽 개구멍 낸 창문들
일제히 눈알 굴리며 더불어 열리고
살아 공간을 팽창시키는 하모니에 동참하고 있다 
빛을 향하여 그늘을 위하여 거친 숨소리로 살아 
저 마다 알지 못할 꿈의 잠을 청하는 삼복의 하오 
저 부지런한 푸른 생명의 바다에 모여
어쩔 수 없는 아파트 전시장에 삼복더위가
욱-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며 파도가 출렁한다.








김 혜 원



성난 촛불 
밤에
거미



  시인의 말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잠시 커피를 잊고 있었다. 한 달이 되니 그 향기가 내 코끝에 맴돌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습관을 이기기란 역부족일까.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오자 미각, 후 각, 촉각이 살아 있는 듯 일렁인다. 맛을 기억하는 뇌가 나를 부채질한다. 몹시 허기를 느끼는 몸과 달리 의식은 더욱 또렷해져 옴을 느낀다. 배고픔과 의식의 또렷함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유혹을 견디는 이 순간이 즐겁다. 詩를 쓸 때도 그렇다. 언어의 집을 지으며 알맹이를 집어넣어 나중에는 문을 단다. 그 과정 이 심하게 고통스럽다. 고통 속에 피어나는 꽃알맹이 하나를 건지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를 통해 조금의 온기로 많은 이 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시가 하는 일이 아닐까.






풀이 눕는다*
구석 자리에 몸을 숨기고 
바람에 기대고 앉으면 
풀은 눕고
설풋이 잠들었던 바람이 
온 들을 휘휘 돌아
우리 몸뚱이 통째로 말아버리고 
어디선가 피어나는 어둠에 검붉은, 
죽은 피가 솟아올랐지

풀이 눕는다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끝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부딪치며 
또한 영원히 울고 있네
가능한 멀리 자신을 뱉어내는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온 시간들은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오늘도 아픈 손길로 
여기 남은 흔적 속에 
깊이 처박힌 풀뿌리들
고요히 흔적 없이 스며들고 싶어하지

* 김수영 詩 ‘풀’을 기억하며.





성난 촛불

밤이 깊어도 꺼질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성난 촛불
불꽃 틔우며 솟아 오르는 
너와 나의 한 점 눈물로 
거리를 가득 메운다

귀 닫고 
눈 닫고 
입 닫고
소통의 숨구멍 몽땅 닫고서 
감히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아
땅 위를 저리도 들끓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핑그르르 성난 촛불은 우리 땅을 휘감는다

끝끝내 놓지 않는
“그래도, 나는 한다!”의 한마디
백성은 성난 촛불이 되어 성난 마음을 
휘휘 돌릴 뿐이다.

하늘은 가끔씩 귀를 열고 세상의 소리를 엿듣는다더라




밤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 
별을 찾아본다
검은 밤 반짝이던 별은 어디로 간 걸까 
밤 내내 산 위에 자리를 잡고
반짝대며 자기를 소멸하는 별 하나 
오래전 너를 희망이라 불렀지
너를 찾아 차가운 밤을 달리던 어린 시절 
유난히 붉은 빛을 뿜는 너를 잊지 못하지 
뜨겁게 움켜쥔 별 하나를 내려다보며
눈 속에 갇힌 별 하나 떠올린다 
이내 움켜진 별 하나가 흔들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시간 내내 오래오래 걸어야 할 것을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
오늘도 별을 찾아본다




거미

저것은 무엇일까
아무렇게 널브러진 세면대 위 물방울, 
아치형의 물벽을 만들어 세상을 반사한다 
다시 보니 검은 한 점의 물방울,
그 속에 갇힌 거미 새끼 한 마리가 
파르르 떨며 솜털을 추켜세우고 있다 
그토록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 
안다, 너의 어미는
숲을 떠나 콘크리트에 줄을 치고 너를 낳았겠지 
차라리 허공에 집을 짓고 살았어야 했다
얇은 막을 뚫지 못해 울고 있을 너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거미 새끼가 가여워진 나는 
물방울 밖으로 내보내주려 애쓴다 
이내 물먹은 화장지 너머
물방울 너비만큼 몸을 말고 있는 너를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폐 가득 고인 물을 토해내며 
햇살 사이로 사라지는 너에게 
또 다른 물방울이 기다린다








김 진 회


십자가에 박힌 어깨
코스모스 
월식
▽▽의 유희
승화   
합주(JH's Rap Style)


  시인의 말
  또 한 번 시에 기대어 좌절하고 또 한 번 기대어 일어난다. 아직 어린 글들에게는 한숨이 있어, 써 놓은 시를 펼칠 때 마다 바람이 불어온다.
  여물지 못한 실험들이 과연 시가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실험들을 내놓지 않으면 언제나 과거를 추억하게만 될 것 같아, 또 한 번 태어나기 위해 글을 올린다. 써 놓은 시가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덜 자란 시들이 외출한다.




십자가에 박힌 어깨

  죄 많은 인간이 걸어간다. 벌어진 뼈 사이로 사랑이 하나 둘 떨어지는 일, 살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건은 순식간에 덮쳐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는 그를 관통 해 그녀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용서는 그가 흘린 피와 그녀가 흘린 눈물 사이에서 자라는 일, 벌어진 뼈 사이로 사랑이 하나둘 떨어진다.

  그
  그날 저의 손에는 분노 한 움큼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랑은 흘러간 노래처럼 이별이 되고 되고 되어도 용서하세요.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녀
  그날 저의 손에는 미움 한 줌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별은 흘러간 음악처럼 사랑이 되고 되고 되어도 용서하세요. 그를 사랑합니다.

  용서
  벌어진 뼈 사이로 용서가 스미어 드는 건 사랑이 시킨 일, 벌어진 뼈 사이로 사랑이 하나 둘 자란다.

  


코스모스

그녀에게는 죽음을 선택할권리가있다. 
이미던져진돌의과거가몇번의도전에도그자리에돌아갈수없듯이,
설사우연과도같은일로돌아간다해도지나간시간의일임이분명하듯이,

버려진종이조각은 죽음에대한일기로 가득차있었다. 
외롭다는것은 단어의조각보다더 진실같은일, 그
녀의몸에서쉬었다간 남자들의분비물만큼이나 
자주있던일이다.
이름이생기면서부터얻은 쾌활한슬픔은 
단지 조화(造化)와도같았다. 
쏟아버린거짓말들을추억하기위한 
마지막말도 외롭다는것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의만남은거짓이여서 
아무도 거짓을말한적이없다.
그날 시계의초침이 컴퓨터의떨림과대화를나누었지만 
그곳에는아무도없었다.
누군가만들어놓은 가구들처럼 그도그녀도아무도없었다. 
단지 잘만들어진가을이 살며시 웃어주었다.




월식

햇살은 빗발처럼 지면으로 내렸다. 숨이 
막힌다.
여인의 익숙한 향기처럼,
지면에서는 살을 섞는 냄새가 피워 올랐다.

달의 아랫도리가 촉촉이 젖어드는 날, 
흥분한 그림자가 달의 가랑이로 파고들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던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나고,
달의 신음소리에 놀라 급히 잠을 청해도 
쉽게 잠이 들 수 없는 그럼 밤이었다.




▽▽의 유희

바다에누워 중력과부력의유희를즐기자.
▽은 그의애인
난아직 어디로자랄지모르는-이다. 
불안속에서불안의자식을낳자. 
안정은이미늙은유부녀 
강요된안정은 너의애인
△의유희를찾아라.
그보다더낳은 그의애인을훔치자. 
금홍아! 금홍아! 
너의가슴을보여라.
▽은그의늙은애인
▽▽은나의애인이다.




승화

무엇이 무서운지 알아본 적 없다. 
오래전 폐부를 스며든 어린 종생이
「플로지스톤 + 산소 = 기억의 소실」 이다. 
설명된 적 없는 C의 정체
산소와의 만남은 언제나 
불완전이었으며 그을음이었다. 
고체가 나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래 남을 일이였다.

Give Me 시가렛또 Please. 
연기는 고체인가? 기체인가? 
참 지랄 같은 의문 하나
내 심장은 겨울 이불 사이에 놓인 
천 원짜리 나프탈렌이다.




합주(JH's Rap Style)

밀랍인형 오케스트라 
슈퍼 울트라 펀치
설익은 사과를 쪼으는 까마귀의 외침 
졸음을 노래하는 칠판의 끊임없는 비트박스 
그 장단이 아니란 듯 강렬한 비트로 
책상들이 만들어낸 마이애미풍의 합주 
찾아온 건 가을이야 가을 노래 한 곡
그 시인의 노래처럼 기도하는 아이들 
학교 종이 땡땡땡 울려퍼지는 소리와 
그 사이를 파고드는 이국적인 갱스터 
만성 알코올 중독자의 소주병 사이를 
하나 가득 파고드는 니코틴의 연막술 
취해버린 나무들은 바람에도 비틀비틀
강한 비트 댄서들의 브레이크 댄스 타임 
딱딱 끊어지는 각기에 열광하는 관중 
관중들의 열광소리 그리워진 바다는
그 옛날 소리 없이 흘러버린 유행가 
책상장단 내 노래는 흐리지도 않지만 
후회 따윈 하지 않는
슈퍼 울트라 마인드








이 선 남


황혼
비 오는 날
자유인 
가을을 손에 낚으려
설악산


  시인의 말
  어느덧 1년 그 가을의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던 날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부끄러움은 마찬가지인 것을 
높아진 하늘만큼 나의 시세계도 높아져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의 단어만 
맴돌 뿐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원고를 보내라는 문자에 답도 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몇 편의 글을 찾아 보내며 또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된다.




황혼

새들도 쉴 곳을 찾아 돌아가고
하루 종일 구부려 땅만 파던 노인도 
허리를 펴 돌아간다.
굽은 허리는 더 이상 펴지지 않고 
저녁노을 속으로 밀려간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얼마나 많은 꿈을 꾸어왔던가 
열매 맺어 결실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가
굽은 허리만큼 희망도 낮아지고 
태양은 노인의 바람보다 더 빨리 
저 산 봉우리를 넘어 가고 있다.

저녁놀에 붉게 물든 하늘가엔 
지나온 삶의 아픔보다
더 진한 슬픔이 배어 있고
드리운 산 그림자 속 작은 집으로 
고단한 몸을 누이려 돌아가고 있다.




비 오는 날

키 큰 나리꽃이 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옆으로 드러 누었다.
작은 보라색 무궁화꽃은 조용히 
피우려던 봉오리를 숨기고 서있고
붉은 장미의 화려함이 빗방울과 어울려
비 오는 날 안개 속에 휩싸인 작은 오두막의 
정취를 살려주고 있다.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태풍 닐의 꼬리인 비가 오는 날 
비의 무게에 눌린 꽃과 나무들이
삶의 무게에 눌린 사람을 위로하고 있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지고
외로운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다.




자유인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봄
이 되어도 아프지 않으며
꽃이 피어도 들뜨지 않으며
바람에 꽃이 져도 울지 않을까. 그래 
아무데도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리라
잠시 자유를 떠나 속박에 기대려 하였지 
자유인이 되려면 아무데도 기대지 마라.

꽃잎을 밟으며 걷는 마음에 슬픔을 두지 마라. 
나무는 새파란 잎을 틔우고 있음을 알지 않는가. 
어지러운 바람이 불어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도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 
대지의 변화에도 초연함을 보이는 나무
잠시 난 자리 불편하여 손을 내 밀었지. 
힘들어도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다시 자유의 마음을 잡는다.




가을을 손에 낚으려

예쁜 소녀 가지 끝에 앉은 
고추잠자리 잡으려
살금살금 조용히 손을 내민다.

하늘보다 높은 꿈들을 쫒아 
바람을 손에 잡으려
두 팔을 활짝 벌려 손을 내민다.

고추잠자리 사뿐히 날아 
그 꿈보다 더 높이 오르고 
바람은 손가락 사이로
가을보다 더 빨리 빠져나간다.

손에 잡히는 것은 가을의 낙엽들 
가을의 짙은 우수뿐
낚아든 가을은 떼구르르 굴러 
저만치 앞서 간다.



설악산

단풍이 들지 않은 설악은 한가하고 
오르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삶에 있어 등반의 시작처럼 자신이 있어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을

그 가벼움은 흔들바위까지였다.
자신 있게 오르는 울산바위의 길은 삶의 
고난이다.
어떤 이는 이런 길은 등산이 아니란다. 난 
고난이다.
팔백팔 계단이란다. 철 계단이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부러운 것은 등산뿐 
꼴찌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환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 
안개구름이 자욱해 산 아래 경치를 포기해야 했다. 
하산길에 만난 비의 촉감도 나쁘지 않다. 
목적지까지 갔다 온 나의 몸은 관대하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차창에 기대어 
상쾌함과 피곤이 공존하며 눈을 감는다.








김 진 택

고향
울고 간 새
풍경 
접시가 나를 본다
노래
풍경 
노래
근황
소주의 전개


  시인의 말
  ㄱ의 얼굴은 누렇게 변했다. 지난 10개월 동안 하루의 대부분을 야외에서 보내게 된 때문이다. 아무튼 누런 얼굴을 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걸 보면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돌아간다. 이제껏 배워온 앎이 아무 필요가 없어졌다. 비교적 사소한 일도 그 인과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어딜 가나 어깨에 힘을 주고 뭔가를 설명하는 사람이 흔한데 그들의 말이 도무지 믿기가 어렵다. 모두들 거짓말쟁이 같기도 하고 헛말만 일삼는 한심 한 사람 같기만 하다.
  이러고 보니 경전에 있는 말들도 필경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 그것도 믿기가 어려워졌다.
  세상만사가 믿기 어려우니 세상만사가 시들하다. 친구가 미국을 간단다. 네 놈이 미국 가봤자 지. 친구가 공부를 한단다. 네 놈이 공부해 봤자 지.
  ㄱ의 얼굴색은 누렇게 변했다. 나이를 많이 먹어서 고물이 된 거다. 직장에서도 쫓겨 나오고 몇 안 되는 친구도 없어졌다. 주머니엔 용돈도 없다. 이제 할 일은 책 읽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지나간 세기의 사람들은 비교적 거짓말을 적게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들은 그런대로 신용이 간다. 시를 얼른 써서 보내란다. ㄱ은 시를 쓴다고 안간힘을 썼다. 이상하다. ㄱ도 이젠 맛이 갔는지 “고향” 이란 말이 떠올랐다. 고향이란 제목을 붙이고 그 시를 읽어보니 자신이 애늙은이 같은 기분이 든다. 싸구려 감상에 젖은 철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고향이란 말을 쓰고 나면 그 담엔 쓸 것이 없을 것 같다. ㄱ의 세월도 어지간히 기울었나보다.





고향

곡마단 
나팔이 
울던 
그 곳

아버지 
무덤
억새꽃 피어나던 
그 곳

청솔 연기 
굴뚝 
피어오르는 
그 곳


고무신 발자국 
땅거미에 묻히는 
그 곳




울고 간 새

작년과 
올해
늦봄과 여름 동산에서 
뽀 뽀 뽀삐요
울고 간 새가 있었습니다.

그 옛날
고구려의 어느 왕이 부른 
노랫속의 그 새

난 
아직
그 새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풍 경

팔월
햇살은 따갑다

백일홍
꽃그늘 아래로 
햇보지 서넛 
걸어오고 있다.

실직한
사내 앞을 지나간다

엉덩이가 
몹시 
뺑뺑하다





접시가 나를 본다

엉덩이가 펑퍼짐한 
접시를 보고 있다

접시가 나를 쳐다본다 

중국 땅
촉나라에서 
이곳까지 와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접시

아우! 
소리를 낸다
고향이 그리운가 보다

목련꽃 피부가 
환하다



노래

높은 곳에서 저 밑으로 펼쳐지는
여름 들판을 내려다보고 싶어지는 기분은 
왜일까?

소나무 그림자 길게 끌고 저무는 해가 비추는 
잡목림
수만의 입새 속에 숨어서
재잘거리는 새떼가 부르는 노래가 그리운 건 
왜일까?

내리는 저녁안개 
서걱이는 대밭쪽으로 
흐르는 자색 연기

너무 일찍 떠서 
엄마 찾는 저녁 별

허전한 세월의 모퉁이서 
나는 왜 이런 노래 부르나?




풍경

꽃잎 
기우뚱
대문 발치에 
쌓였다

사흘 굶은 단골거지
八字걸음으로 
정류장 쪽으로
간다

시를 쓴다던 
그 아이
보들레르를 닮아 
아편을
피우고

꽃잎들 
그 남자 
빈 집
댓돌 밑에
소복이 모여 있다




노래

잿빛
길바닥을 너무 오래 걸어 왔나보다 
신라 사내 혜초
가물가물 천축 고갯길 넘어가듯 
그렇게 추운 길 걸어 왔나보다.

돌아 온 길목 어디쯤
눈이 깊은 그 아이 먼 곳 쳐다보며 
서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근 황

한 때는 
소나무 가지
달 그림자 밝으며 
밤길
돌아온 적 
있었습니다

한 때는
잔 속으로 떨어지는 
꽃잎
마신 적 있었습니다

요즘은
밤이 되어도 별이 뜨지 않는 
귀양지
4월이 와도 
소쩍새 울지 않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눈이 샘물 깊은 이여 
6월
햇빛 눈부신 날 
모시옷 차려입고
한 번 오시지 않으렵니까?




소주의 전개

그 새낀 꼭 좀비 같이 생겼어
맨날 열두 살 때까지 국어책을 읽지 못했다는 
사설을 주어 섬겨
또 한 놈은 입만 벌리면 자신의 삶에 태클을 거는 악당의 짓거리에 대해
내게 하소연을 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찰랑이는 순수의 물
빠르게 지나치는 저녁 여섯 시와 
밤 열 시
기우뚱한 주탁.
바삐 벽을 타고 흐르는 바퀴벌레의 행렬 
저쪽에서 홍콩강시 같이 펄쩍 뛰는 술꾼

여우는 고기 반찬 
나는 나물 반찬

명치가 무지룩한 좀비가 가고 난 후 
새로 참가한 청년이
한 잔 술을 마시고 난 후
마리린 몬로의 기막힌 방중술에 대한 비밀을 
얘기해

저쪽에서 
입술이 새빨간
사향 여우가 이쪽으로 온다








김 여 선


벌판에서
봄의 새벽 
우리들이 외출하는 도시는
이 가을엔
몸살 나는 새벽이면
싸락눈

  시인의 말
  마른 풀밭을 뛰어다니는 송장메뚜기를 보았다. 살이 토실토실 찐 벼메뚜기와 달리 마른 풀밭에 사는 송장메뚜기는 마른 장작처럼 어설프게 보였다.
  올해는 유난히 시 농사가 흉년이었다. 그래도 매월 한 번씩 만나 소주를 나누는 유사의 독촉 전화를 받고 나의 치부를 드러낼 요량으로 오래 전에 써 놓았던 작품 몇을 살펴보았다. 송장메뚜기처럼 모나고 딱딱한 작품들뿐이었다. 시어를 수집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는데……
내년 이 때쯤은 누런 들판을 뛰어다니는 벼메뚜기처럼 살이 찐 시를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겨울이 오기 때문일까?




벌판에서

서리 내린 아침 
발목 잘린 수숫대의
단청으로 되살아나는 
햇살들의 입자들이
영하 3℃ 전봇대에 걸린 
폐비닐을 흔든다.

좁은 골목 사이
경운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등은 
밀려 나간 지게의
슬픈 혹처럼 툭 튀어나오고 
가늘어진 손가락 끝 손톱 밑에는 
붉은 흙의 흔들림이 숨쉬고 있다.

뽑히지 못한 배추들이 
주춧돌로 줄을 서 있는 배추밭 
서리 맞은 하얀 신문 사이로 
‘F T A’
외국의 무거운 언어들이 
한글도 해득 못한
아버지의 흰 눈자위를 얼게 하고
벼의 밑동은 초겨울 벌판에서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다.

쟁기의 차가운 혓바닥은 
오늘도 흙을 한 곳으로만 몰고 
제자리를 지키기 위한
붉은 흙의 몸짓이
맨몸으로 북서풍을 맞고 있다.




봄의 새벽

할머니의 허리 척추만큼 고개 숙인 
가로등 불빛도 조을고
빗물은 불빛 사이로
 밤 새 내려
산들을 깨우고 
뜰 앞 백목련이 
어둠 속에서 
여행 전 날 
아이의 설렘으로 
한 겹 한 겹
하얀 옷을 벗을 때 
라일락 보랏빛 가슴으로 
허리까지 차오른
봄의 새벽을 맞고 있다.




우리들이 외출하는 도시는

달팽이들이 덮어쓴 인생의 각질로 
우리들이 외출하는 도시는
기름칠한 각목으로 깁스 당하고 있다.

아,
벗길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콘크리트의 하얀 뼈대 사이로 
솟구치기 위해 증발한 물방울들이 
아황산가스를 임신한 몸으로 
가로등 모가지에서 흐느적거리고 
새벽을 가르는 기적 소리는 
회색빛 안개 속으로 잠기고 있다.

가끔 해녀들의 거친 호흡들은 
망막 속으로 잠수하고 
퍼덕이는 숨결로도
한 평
도시를 밟지 못한 채 
피사체로 굳어가고,
쟁기에 끌려가는 남정네들의 
한 쪽 디스크를 앓은 목에는

땅을 지킨 햇살의 무게만큼 
멍에가 메어져도
갈라진 손바닥 크기의 
콘크리트를 만지지 못하고 있다.

솟구치면 솟구칠수록 두꺼워지는 
안개의 껍질 속에는
거친 호흡보다 
디스크를 앓은 목보다
아황산가스들이 깁스를 한 채 
콘크리트 위로 떨어지고 있다.




이 가을엔

새큼한 하늘을 만삭으로 보담은 
안동댐 물들도 파란 비늘로 
번뜩이고 싶어라

벗어나는 구비마다
노란 햇살만 솎아낸 들판에서 
허리 굽혀 벼 베는
농부들의 기쁨으로 
살아가고 싶어라

길모퉁이 돌아서면
손 흔드는 사과나무 사이로 
햇빛 받은 새악시들의 
부끄러운 색깔들이
뚝뚝 떨어지는

이 가을엔

혼자만 갖고 싶은 
가을 색깔로 
수채화 한 폭 
그려보고 싶어라.




몸살 나는 새벽이면

세포마다 밤송이로 찌리는 현기증을 느끼며 
겨울을 맞이한다.
살아간다는 건 겨울나무로 버티는 게 아닐까? 
화려한 수사법을 팽개쳐
빈 껍질만 남은 언어들이 
겨울 속으로 침식 당하고 
뻣뻣한 활자들이 토해내는 
역겨움 사이로
몸살 나지 않는 곳이 있을까? 
온갖 인플루엔자로 가득 찬 
신문들의 멜라닌 활자들이 목
에 가시처럼 걸린다.
몸살 나는 새벽이면 꿈을 꾼다. 
편도선이 부어 오른 목으로 꿈을 꾼다. 
개꿈을 꾼다.




싸락눈

경칩 지난 아침 
싸락눈이 내린다.

바람 없는 운동장 
밑둥 잘린 수양버들의 
둥근 시간 위에 
알갱이들이 박힌다.

‘자유무역협정’의 북서풍을 맞으며 
뽑히지 못한 배추의 하얀 고갱이들이 
해빙으로 녹아내리는데
하늘의 그림자를 안고 도는 
낙동강 상류의 강물은
누구의 수액으로 흐르고 있는가?

생장점이 전정당한 
겨울 사과나무 사이로 
풍년의 모습들은 
아지랑이로 가물거리고 
황소들의 느린 울음이
맨살로 일어서는 봄을 맞고 있다.








권 오 규

봄비
가랑잎
왼 손
아들 
함께 일일일선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약간 굵은 초생달
母子를 보며


 시인의 말
타고난 재주 없으면 시를 쓰면 안 되나? 
강 건너 저기 시의 벌판을 향하여
배도 뗏목도 없이 
헤엄쳐 간다.
여기 남이 욕하는 줄도 모르고 
미쳐 부시대는 
짐승 하나
또 실수를 하고 있다.




봄비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만나서 서로서로 정답게 살면 될 걸 
차창에 부딪쳐 퍼지는 모습
어데 가서 살면서
그 때 마음 전하는고

샘물 같이 맑던 그 때의 사랑도 
이젠 안 된다는 걸 그대도 알기에 
일부러 추운 봄날 찾아와 보는 건가 
잘못 찾아든 허탕 인생길 위에
어둠 더불고 싸늘히 내리는 
저녁 봄비.




가랑잎

왔다간 가고 
왔다간 가고

산 아래 어디 가시덤불 밑이거나 
개천가 어디 자갈 뚝섬 속이거나

왔다단 가고 
왔다간 가고




왼 손

죄 많은 오른 손이 하는 짓 따라서 
슬쩍 슬쩍
거들며 도우며 한사코 따라다니다가

이제
늙어 한통속 된 신세로
차가운 새벽 벼르빡을 짚은 왼 손

오늘은 작취미성에 
무궁화꽃
같구나




아들

저기 

덩치 큰 사람

한 많고 
눈물 많은
내 집에 어이 와서

네 살 때 
못난 어미 
잃고

치매 걸린 할매 
병구환이며 
뒷수발이며……

무서워라 

누구길래 저리
꿈적거리고 있는가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온 
가장 가까운 
낯선 사람아!




함께 일일일선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식당에 가도
앉자말자 일어나 수저 먼저 챙겨서 
남의 앞에 놓아주고

먹기 전이거나 먹은 후이거나 
항상 물부터 떠다 주고
밥 한 그릇이라도 더 가지고 와서 
언제나 더 먹으라고
권하는 사람

어릴 적 클 때도 힘든 일 도맡더니 
어른 된 지금도 무거운 것 뺏어 든다 
우애와 효도는 勿論之事요
가여운 이웃들 못본 채 않았고 
오직 본심 일변도로
어릴 적 마음 그대로 살고 있는 
이 시대 유일한 사람.

불알친구
교량공사 전문 도대목 
H

유독 커피를 좋아하는 그대 
입 맑고 손 깨끗은 이 사람을
누가 감히 어리석다 여길 텐가 
새발의 피들아!

그 정성 깊어깊어 
언젠가는 필시
복이 되어 돌아오리.




약간 굵은 초생달

어예 그렇게 
변하지 않느냐?

초가지붕
벗겨진 지 그 어느 땐데

아직도 그 지붕 
떠들고 다니느냐?




母子를 보며

가방도 옷도 
아이에겐
다 거추장스러운 것

목멘 송아지처럼 끌려가야 하는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사실은 다 불필요한 것

살아가야 할 인생길이기에 
챙겨야 할 행구요
가야만 할 장소였다면

서럽구나

차를 기다리며
숨어서 지켜보고 섰는 엄마도 
떨어져
꼼지락꼼지락거리며
운김 달아하는 저 아이도.








류 민 기

축복
귀로
봄비
기다림 낮술
사랑이 무너져 내릴 때 
빗줄기
사랑은
애증(愛憎)
은하다방


  시인의 말
  습성이 되어버린 회고에다가 나는 또 하나의 회한(悔恨)도 실었었다. 그러나, 회한도 세월 앞엔 무기력해 결국은 회한보다 얇은 회상(回想)이 되었지. 내게 쓴다는 건 늘 회한이요. 회상의 일 이었는데 언젠가 변변찮은 한 사람의 변명의 일갈(一喝)에 회한이 싹텄고 회한을 즐기며 이때껏 흐르고 흘러 왔는데 오늘은 그게 회한보다 가볍다는 회상이 되었다.
  이제 돌아본다는 건 가쁜 슬픔이요, 견딜만한 고독이 되었는데 또 나에게 회한 같은 장막이 내 생각에 그늘을 드리울 날은 있을 건가. 그러나 그런 날이 다시 온다해도 가쁘다는 회상쯤일거라 다짐해 본다.
  어느 날 내게 진한 기쁨이나 독한 슬픔은 떠났나 보다. 그러나 무기력 할 지도 모를 공허한 상황 속에서라도 나는 문학의 대지 위에서 무얼 찾으려 하겠고 건지려 할 거라는 걸 모든 게 엷은 우수로 물들어 가는 이 가을에 엷은 우수로 물들어가는 이 가슴에다가 기어코 심는다.





축복

지나간 메아리들을 우리 
그리움이라고는 말아요
그냥 생각이었을 뿐이었다고 얘기해요 
그냥 10월에 시드는 잎이고
11월에 날리는 낙엽이라고만 얘기해둬요 
쏟아놓은 얘기들을
추억이라고 말아요
그냥 쏟아져 내리는 한밤의 유성인 듯 얘기해요 
그냥 그것뿐인 게 인생이듯이
만남도 그냥 그것뿐 이예요 
사랑했다 얘기 말아요
그냥 저녁은 다가오는 거여서 
사랑은 다가왔고
시간이 가 저녁이 깊어지듯이 
까만 밤 안에, 그래요,
그날도 우리들의 하늘 위엔 별은 있었고 
오늘도 내일도 별은 하늘위에 있을 거잖아요





귀로

발버둥쳐야 찾을 수 있고 
발버둥쳐야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인데 
간 날은 멀고
빠져나올 날도 아득한데 
연정에 몰입하던 찻집에서 
돌아와야 할 길은 골이 깊다 
너와나 할것 없이
함께 가던 길은 한길이었지만 
사랑은
언젠가 빠져나와야 할 길 
돌아설 뿐
나 아직 눈 멀어 
길을 찾지 못하는
그걸 이별의 길이라 말들 하지.




봄비

봄비 가을비처럼 내리고 
봄꽃 가을꽃 같이 
꽃잎은 스산하다
스산히
비 몰고 온 봄바람도 오늘은 
가을바람 같이 스산한데
봄 가운데 만나는 가을 기분은 
사랑의 와중에서 겪어본 
서늘한 미움 같기도 하고 
오늘은 왠지
세월에 젖고 
비에도 젖고 싶은 
봄비 오는 날.




기다림

사랑은 기다림이어 
기다리는게
사랑이라 얘기하더니만 
이 사랑은
안개에 쌓여 도도히 흘러가는 
저 강 같은
아리고 긴 기다림은 길구나 
바람은 남몰래 저녁을 타고 앞
 마당으로 기어들 때 
바람은 언제 기별이 되나 
가을꽃은 모래성 같이 
쓸쓸히 무너질 때
차라리 기쁨이기도한 
내 기다림은
차마 내일 아침은 
소식이 되려나.




낮술

낮에도 고독은 찾아와 
낮에도 고독한 술 마신다 
방구석에 뒹구는 술병처럼 
이 한낮에 누가 불렀나 
숙취 같은 저 고독 
잔치같이 술 마시면 
창너머 파란 하늘가엔 
점점이 박힌 먹구름인데 
향방없이
취기는 무심히 빗물처럼 흘러갈 때 
취기는 소줏잔처럼 더 투명해져갈 때 
바라다보이는 건
창틀 위로 빤히 보이는 
새하얗게 고독에 찌든 낮달 
취기는 한낮의 고독과 함께
차라리 여물어가는 대낮 같은 건데 
오후의 고독 같이 깨어나지 못하는가 
이 한낮의 취정.




사랑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소중한 믿음하나 갖고 살았어 
내 마음의 기쁨이요 한편은 
설움이던 바램이었어
그러나
무수한 꽃바람은 불었 쌓는거지 
그래 간직하고픈 과거가
또 다른 연정에로의 기미 앞에 
흐느적이기 시작했고
어느 날 기어코
이 가슴에 새로운 문신인 듯도 한 
망울이 서고 있었던 게지 
사랑이야 이별이 열매이어
난 오늘도 하나의 열매를 맺었는데 
먼 과거는 가까운 오늘이라는 날들이 
메워만 간다.
무너지는 사랑 앞에 
한때는 허망했어 
잊지말고 살리라던
소중히 하고픈 그 미련하나 
기어코 무너져
새로운 기억이
이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을 때 
사랑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을 때
기어코 새로운 기억이 이별이라는 사랑의 열매로 
이 가슴에
새로운 내 과거로의 기미 앞에 나설 듯도 한 그 와중에 서는 나
허망도 했어.




빗줄기

오늘은
하늘의 이름이 비인가 
구름째로 쏟아지나
이 비
굵은 비 굵은 설움처럼 
쏟아진다.
길 건너엔
빨간 우산 조금씩 흔들리는데 
빨간 단풍 빗줄기에 
흐드러지듯 한데
이젠 벌써 가을비란 말인가 
바람에 실려 더 쏜살같이 
흩어지는 빗줄기
하늘의 이름이 설움인가 
자꾸자꾸 쏟아지는
빗속 가을날의 설움 줄기들 
그게
오늘의 비였다.




사랑은

사랑은
늘 기쁨이 되었다가 슬픔이 되었다가 
미움이 되었다가 한다.
공연히 불러 본 이름이라 생각한다 
노오란 은행잎 길거리에 날릴 때 
공원벤치에서 기울이는 깡소주 한 잔으로 
늘 기쁨이 되었다가 슬픔이 되었다가 
간혹 취정이 되었다가 한다
가로수 사이를 알싸하게 
빠져나가는 가을
근근이 이어가는 목숨처럼
근근이 기울일 수 있는 소줏잔처럼
술인 듯 세월에다 타 마시는 독한 쓸쓸함처럼 
사랑은 고독이 되었다가 이별이 되었다가 
가을에 찾아나서는 그 무엇을 향한
발길이 되기도 한다.




애증(愛憎)

밉다는거나 사랑한다는 온갖 것이 
모두 사랑이 되어버린
이 세월의 말미에 
봄비 뿌리는 냇가엔 
봄풀이 초원 같다. 
타인이란 말도
이젠 기쁜 말이 되어 
미움 잊고
계절위에 애달픔만을 뿌리는 
오로지 사랑이 되었나 
시냇가에 앉아
이름모를 봄풀을 뜯어 
냇물 위에 뿌리면 
미워한다는, 사랑한다는
아직은 아렸던 삶의 목록들일 뿐인데 
시냇가에 던져놓은 풀잎은
등처럼 시간을 밝히며 
흘러가고
밉다는 것이 탄식되고 사랑한다는 것이 탄식이 되는 
애증의 뒷풀이는
이제는 눈물뿐이다.




은하다방

은하다방 J양과 사랑했어 
가끔 내 농담에 자지러져
홍등(紅燈)같이 빠알간 뺨이 되었던 J양 
화류계 여인과 무슨 사랑이랴만
난 사랑을 했지
블랙커피 갈 때 마다 한잔 듬뿍 더 주던 
그리고
농담 한 마디
옆 테이블 나 보다 더 낳은 사내보다 
한두 마디 더 던지고
커피 나르면서 눈길 한두 번 더 
던졌던 J양
서로의 찻잔이 쌓였어 
나도 진한 그리움이 있고 
너도 짙은 그리움이 있어 
이 찻집에서
우리 이렇게 마주 해 보는 거라고 
J양의 인생을 신파조로 일러 바쳤던 너 
하루에도
수차례 커피 배달 다니며
가로수 은행도 노랗게 물들어 갈 때 쯤 
내게 어느날
가을이 깊으면 딴 도회로 간다고 
한날 다방 밖에서
함께 마신 소주 몇 잔의 볼이 발그레한 
취기와 함께 속삭이던 J양

그래 너 가고
J양 얼굴 한 번 적어 보겠다 했고 
그러던 어느날
난 다방 밖으로 나와 버렸어 
문득 왔다가
안개처럼 머물지 못하고 
가버리는 홍등(紅燈) 아래의 사랑 
이 가을도
갑자기 가로수 길을 걸었어 
내 얼굴에 안개가 꼈어
너가 갔음으로 차라리 사랑은 온 거지 
이런 공간속의 사랑
그 사랑은 보내고 오는 그리움이니까 
어느 날
난 블랙커피에다
그리움 한 잔 듬뿍 타 마시고 
다방 밖으로 아주 나와 버렸어.








이 형 복

설난(雪亂) 
로스트(Lost) 
랑데뷰
상사화

  시인의 말
  글은 자기 내면의 표현이라고 하던가? 무심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또는 그 낙엽을 밟으면서 글쟁이들은 글은 남긴다. 자연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장면 에서 색다른 느낌이 생겨 울컥 쏟아지는 감성적인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글쟁이와 일반인과의 차이점이다. 작품 중에 “설난”은 눈 덮인 산을 오르면서 시상이 떠올라 휴대폰으로 메모해 놓았고 나중에 정서를 해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올해는 나 에게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내년에는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설난(雪亂)

줄곧 참아 왔던
금수산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며칠간 내린 눈
온 산 나무 가지 위에 
무거운 눈으로 쌓여 있다가.

산 위에서 내려치는 강풍으로 
그동안 참아 왔던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는다.

여인의 속눈썹 위에 얹혀진 마스카라처럼 
가지 위에 얹힌 하~이얀 속눈썹은
천년의 한을 품은 여인의 차가운 미소.

무섭게 흔들리는 가지는
설풍광선검의 서릿발 같은 검무(儉舞)처럼 
하얀 옷을 입은 무희들의 손동작에 
마리화나 같은 미립자가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올라 
내 미각을 자극한다.

조용했던 금수산이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그 옛날 내 어머니 시집을 때 가져온 
솜이불 속에 꼭꼭 감추어 놓은 
고달픈 사연을 헤쳐 뒤집고 
가지가지마다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털어 내기 위해 기지개를 편다.

* 금수산(錦繡山)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에 있는 높이 1,016m의 산이다. 백암산 (白岩山)이라고도 불렸는데, 이황이 군수 재임 시에 그 경치가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하여 금수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비상’이란 식물이 자생하는데 먹으면 즉사한다고 한다.




로스트(Lost)

숨겨지고 감춰진 잃어버린 시간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채로
머릿속 구석에 레지스터로 남아 있다.

쓸모가 없으면 잘라라. 
잔뿌리까지.

필요가 없으면 버려라 
송두리째.

너도 느끼느냐 
내가 느끼는 것을

내 안에 있는 이 음흉한 미생체는 
나를 무시한 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 멋대로 행동하고 
날 조롱하고 비웃는다.

끝장을 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이 무감각의 시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밉다.




랑데뷰

처음도 끝도 없는 이야기
때로는 침묵으로 공간을 메우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전화를 통해
그는 그의 글을 읽고 
마음을 내게 전하려 한다.

둘이 공유하는 시간 
만나고 또 만나고 
부딪치고 부딪쳐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만추 같은 사랑

언제나 내 몸뚱이 속엔
그의 신체 일부가 깊숙이 박혀 있음이 
느껴지지만
만질 순 없다.

우린 이야기를 통해
생의 페이지들을 채워 나가고 있다. 
결말이 없을 이야기들을

해답을 찾기 위한 생각의 고리
확신을 얻기 위한 심한 몸부림
인연의 빗장을 얽어매기 위한 강렬한 저항

더욱 더 처절하게 변해질지도 모를 
미래를 향해
마부 없는 마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고 있다.

설령 이 사랑으로 인해
내 모든 것이 파괴된다 하여도

내장이 터져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피가 역류하여
검붉은 피가 두 눈에서
수 미터 높이로 솟구친다 하여도 
이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독사의 이빨에 물린 나의 심장은 
사랑의 독기(毒氣)가
전신의 실핏줄까지 스며들어
뜨겁게 
뜨겁게
신음하고 있다.





상사화

그대가 보고싶어 
마음이 메어집니다.

그렇게 먼 곳도 아니고 
갈 수 없는 곳도 아닌데 
차마 가지 못하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대의 향기를 맡으려고 
가슴속 흔적을 뒤져보지만 
무심한 겨울바람이
다 지워 버렸나 봅니다.

이루지 못한 우리의 사랑을 
내 안에 숨겨진 그리움들을 
한쪽 구석에 고이 접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동면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사랑하는 그대
한번, 두우~번, 세 번…….
천만번…. 
꿈속에서 되뇌며

* 상사화 :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방에 따라서 개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 명 동


회상일기 
접선




  시인의 말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앞에 서면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디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어디서 생겨 어디로 온 건지 알 길 없다. 다만 지나 온 과거만은 투명하다. 물을 건너 듯 첨벙 지나온 세월, 오랜 일상들을 해체하여 순수의 무게를 달면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유리하다 싶으면 비굴했던 저 자세도 그렇고, 마음에 안 차면 취한 공격적 자세도 그렇고, 속이고도 태연한 척 한 일들이 거울 속에 보인다. 거울 앞에 서면 그 속이 너무 투명해 순수하지 못한 사건들이 몹시 부끄럽다. 계속 성찰이 필요하다.




회상일기

모년 모월 모일
산행에서 폐가를 발견하다 
8부 능선 황량한 외딴 터에 
화전 일구며 살았던 이 
누굴까 용기가 비상하다

마당을 둘러보자 풀은 자옥하고 
무너진 흙더미 틈으로 보이는
빛바랜 미원봉지 빗물 고인 소주병 몇 
무심하게 누워있네

어느 장날인가
말표 고무신에 돈표 성냥 
간 고등어도 한 손 
소소한 장보기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 서성이다 
선술집 주모 청에 끌려 마신 
막걸리 몇 잔에도 얼얼하게 
하루의 수고가 마비되던 시절 
그래도 5일장은 흥겨웠지
날이 저물면 돌아오는 산길

내딛는 걸음마다 바삭바삭 낙엽소리 
유행가도 몇 곡 불렀을 것이다

해가 바뀌어도
늘어날 리 없는 팍팍한 살림살이 
비가 오는 날은 25도 금복주 낮술에
왼손엔 술 주머니 오른손엔 부자방망이 든 
복영감 꿈을 꾸기도 했을 것이다

겨울바람이 나무를 흔들면
밤 새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뒤척이고 
끝내 말 못할 사연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산에 사는 사람은 
보는 것이 숲이라 
마음은 그저 파랗고
꿈은 무성했을 것이다.




접선

  디데이는 비오는 날 아지트를 떠나면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교신은 최신 버전 이모티콘을 사용 할 것 중요한 보고는 심야에 흔적은 쥐도 새도 모르게 소각할 것

  경계가 강화되면 무인 포스트를 이용하고 공습이 예상되면 일 단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릴 것

  다시 한 번 키포인트를 말하면 어떤 수를 쓰든 은밀한 접선이 목표라는 걸 잊지 말 것 작전 기간 중 발각되어 포로가 될 경우 태연하게 죽는 경우도 각오할 것.






암담한 시간도 새벽이 되면 끝내 하얗게 풀어지고 마는 것 무참히 무너진 것들도 언젠가는 밋밋하게 채워지고 마는 것

어느 날 두고 보자던 결심 부질없다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가슴 한 구석 적막한 빈자리 서서히 채워 가는 것이기도 하지






사람이 사람 같아야 사람으로 본다 
짐승도 사람 같다면 사람으로 본다 
사람이 짐승 같다면 짐승으로 본다








권 기 태


팔월의 한가운데서 
일월산 등산
다랑이 마을 
어둠이 지워질 때
2008년 10월


  시인의 말
  일상의 쳇바퀴를 돌아 무자년 한 개가 저물어 간다. 
  40년 직업 전선에서 헤어난 지 넉 달 째.
  할 것도 할 일도 많았으나 무엇 한 가지 뚜렷이 목적을 두고 몰두한 것이 없다.
  직장 일로 포기하고 참고 살아오며 퇴직 후로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챙기고 정리정돈하며 남은 여생의 시간을 보내면서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이슬방울 같은 아름다움을 시로 쓰고 싶다.
  이러한 내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빌어 본다.




팔월의 한가운데서

1
불가마 내려붓는 하늘과 땅 사이 
우리는 갈증의 목졸림으로 비틀거린다 
잡초들 시들시들 비틀어져 쓰러진다 
화염에 둘러싸인 분노의 황무지에 
불신과 욕망의 불꽃이 이글거린다 
한줄기 소낙비를 그리는 대지의 갈망 
사랑과 신뢰가 갈라져버린 지표에 
어우러져 한 덩어리가 되는 꿈을 꾼다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하늘은 누구인가

2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펴지는 날이다 
갈라산 상봉에 먹구름 내려오고 
우람하게 쏟아내는 폭우가 몰려오면
굶주려 죽어가는 산하는 울타리처럼 솟고 
황토물 여울목에 선어 떼 웅성거린다 
하늘 가득히 달개비꽃으로 덥히고 
연초록의 여름은 신들린 무당처럼 뛴다
산록에는 더위에 시달린 영혼들이 신음한다

3
땡볕에 달금질해서 온몸은 굽힌 빈대떡 
거리엔 감홍시처럼 익은 얼굴이 달려있다 
의욕을 잃어버린 석수암 부처님 모습으로 
법흥다리 밑 여울목에 더위 먹은 잡탕들 
반목과 단절로 돌아온 고달픈 여름이 
독사들 똬리 틀어 온 몸 조여오는 오후 
뜨거운 강물에서 더위를 헹구는 사람들 
이상한 세상 이야기 실꾸리처럼 감아도 
더위에 열병 걸린 도시는 잠 못 이룬다

4
무삼단 쪄내는 진흙벽에 불꽃 아지랑이 
땀띠 벗어져 씨린 목언저리 물수건 덮고 
짜른 땀내음으로 푹푹찌는 작업장에는 
숨죽여 드나드는 삼곳 머슴살이 피 흘린다 
매운 연기에 눈물 훔치며 쇠경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 날이 몇 년이던가 
느티나무 그늘에 멍석 깔고 누우면
먼 산 언덕 위로 흰구름 타고 
다정한 옛 친구들 꿈속에 찾아온다




일월산 등산

잎 진 나무들 허허로이 팔벌려 웅성이고 
산전 무서리쳐 풋대궁 슬어진 개울 넘어 
갈잎 잠깨우며 다람쥐 다래줄기 타는 숲길 
이끼 푸른 바위돌아 스무길 폭포가 걸려있고 
굴참나무 환호하는 낙엽 한아름 껴안은 계곡 
인적 끊이어 지워진 흔적 아련한 옛길 따라
 산객이 쉬어간 오르막 낙엽에 묻혀진 하늘길

흰눈 쓰고 어사화 꽂은 정수리 아득히 솟아 
오십 리에 팔 벌려 버티어선 장대한 기상 
흰구름에 세수하고 찬이슬 먹고사는 일월 
폭풍우 끌어안고 인내한 장고한 가을 속 
응어리진 가슴 쓸어 눈꽃으로 태어나고 
가련한 품안에 묻어둔 그사랑 어딜 갔을까

비구름에 멱감고 흰옷 갈아입는 봄이면
청노루 뛰면 계절의 꽃이 피고 새 우는 앙가슴 
물소리 바람소리 몰아 푸른 숲 합창하는 
오르는 구비구비 계곡마다 굽이치는 절경 
산막에 염소 잡고 굽고 산채에 조밥 씹으며 
세상 버리고 일월 한 자락 베고 누워
눈 쌓인 긴 겨울 그 품안에 있으련다




다랑이 마을

남해 섬길 돌고돌아 찾아온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 위로 
끊어질 듯한 벼랑길 따라 가면 
설흘산 쏟아부어 내려앉은 곳 
제비집처럼 매달린 산촌마을

하늘처럼 푸르고 파도처럼 힘찬 
섬 사람들이 숨어서 살고 있다 
넓고 좋은 세상 다 버리고 
뉘인가 개울가 다락논 일구어 
목숨 연명하며 살았던가

파도와 갯바위 구름이 놀고가는 산정 
벼랑길 따라 오르는 산들바람 쉬어가는 
바다에서 해뜨고 해지는 고운 마을 
날마다 접어 쌓아가는 전설의 고향 
끈기와 역경을 먹고 사는 사람들

하늘과 바다 벼랑에 기대어
지난 날 고난의 삶을 바다에 띄워서 
뗏목을 타고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층층이 다랑논에 모내기하여
전설과 전통을 먹고 사는 고도의 사람들




어둠이 지워질 때

찬 바람이 창문을 열어 잠을 깨운다 
찌그러진 시간을 길게 늘려서 기지개를 켠다 
먼산 어둠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소리
오고 가는 사람들로 메워졌던 한산한 거리에 
별들이 총총하게 이마 위로 쏟아지는 길
먼 발치에서 어둠을 가르며 따르는 그림자 
숲속 굽이쳐 오르는 하늘길에 함께하며 
꿈꾸던 사십년 열망의 시간들이 열린다 
푸르던 젊은 날의 자취는 한때의 파노라마 
반백의 연륜으로 돌아와 숲을 이룬다 
바람은 숲들을 일깨워 낙엽을 뿌리고 
등불이 하나 둘 꺼지는 길엔 꽃잎도 진다 
푸른 달빛이 호수에서 길어온 물안개 
온산의 정수리를 무지개 색으로 칠한다 
도토리 떨어지는 후드득 후드득
산꿩 몇 마리 소스라치며 사라진다
무서리 치는 하늘을 바라보면
새로이 열리는 날들을 펼쳐 마름질 한다




2008년 10월

몇 푼이나마 돈벌이 할 곳이 그립다 
정수리를 에이는 빗속에 갈 곳이 마땅찮다 
젖은 신문지처럼 풀이 죽어서
아스팔트 길 위를 휩쓸어 간다
힘께나 쓰고 컴퓨터 잘 하고 정직한 놈이 
어디 백만 원 벌이 한 자리 없을까 
을씨년스런 바람은 땀구멍을 가르며 
아황산가스에 오염된 세상이 목을 조른다 
난장의 싸구려 떨이 아우성에 목줄이 탄다 
전단 신문 구직광고란을 뒤적인다 
빈대떡에 막걸리 한사발이 그리운 우리들 
거품 삭아지는 소리에 치솟는 물가 
낙엽들이 돌풍에 우수수 지는 아우성 
하강하는 가치곡선에 매달린 욕망들 
아픔을 삭이며 빈 자리로 돌아가는 계절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하고 잔인한 시간들









임 관 혁


노귀재
솔밭 새
동행 
기도
귀향
동백꽃
사월
실향 일기


  시인의 말
잎 지는 소리 따라 들려오는 원고 독촉 
맘과 연필이 따로 논다
챙겨 다니던 연필도 잊고 다닌 지 오래다 
아마도 세월 탓인가 보다
올해 따라 유난히 빛 고운 능금이 부러울 뿐이다 
푸르른 글밭에 티가 아니 되었으면 좋으련만




노귀재

구비구비 돌아 
산빛 십여 리 
산길 십여 리

구름도 쉬어가는 
하늘 고개
땅 고개

노예의 족쇄 풀고 
돌아간
하늘 땅 산마루

* 노귀재:청송 영천경계의 재 이름




솔밭 새

솔빛이 좋아 
솔향기 좋아 
둥지 틀고 산다

솔바람이 좋아 
솔 그림자 좋아 
솔밭에 산다

떠나면 못 살 것 같아 
못 떠나고 산다 
떠나면 죽을 것 같아
죽어도 못 떠나고 산다




동행

해 가듯 낮이 가고 
달 가듯 밤이 간다

해 가듯 달이 가고 
달 가듯 달이 간다

해 가듯 해가 가고 
달 가듯 해가 간다

해 가듯 나도 가고 
달 가듯 너도 간다

해 가듯 너도 가고 
달 가듯 나도 간다




기도

이 가을로 하여 그리움을 잊게 하소서 
이 가을로 하여 길이 열리게 하소서 
이 가을로 하여 님이 오게 하소서
이 가을로 하여 품에 안기게 하소서
이 가을로 하여 뜨거운 눈물 흘리게 하소서 
이 가을로 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귀향

가리라 
훌훌 털고

가리라 
미련 없이

가리라
빈 손으로

가리라 
돌아보지 않고

가리라
침 뱉지 않고

가리라
빈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백꽃

눈밭에
하이얀 눈밭에 
가시내
열다섯 가시내가 
밤새껏 솟아 놓은 
거시기
거시기 
거시기
온 천지가 붉어라




사월

목련꽃이 지고 있었습니다
하얀 목련꽃이 지고 있었습니다 
바람에
바람결에
하이얀 목련꽃이 줄줄이 지고 있었습니다 
많이도 슬펐습니다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실향 일기

보고 싶다
꿈에라도 보고 싶다 
참말로 보고 싶다 
보고나면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다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다 
눈물이 난다
주르륵








김 윤 한

고물상에서
뽁뽁이
하늘 
법당 안 파리
가을을 찾아서
높이뛰기 
오래된 사진
차마고도
삼강 주막 
그림자
거울
묘목장수의 꿈
 금강경 읽으며


  시인의 말
  찬바람이 분다. 또 한 해가 지나간다는 소식이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하면서 내년에는 더 부지런해야지 얼마나 되풀이했던가? 그러나 올 해도 어김없이 애꿎은 후회만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안타까운 시 구절들 버리지 못하고 여태껏 가엾은 이 고깃덩어리와 함께 이끌고 왔음은 잘 한 일인가? 부질없는 집착인가?
  그러나 결국 그런 것들이 무어 소용이 있는 일인가를 되뇌며 바람은 떠나자떠나자 온갖 나무들을 일깨우며 북녘으로 치닫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깃털이 되어 바람의 품으로 휩쓸리게 될 것 이다.




고물상에서

황토 먼지 안개로 가득한 비탈길을 
참 오래도록 돌고 돌아서 왔구나. 
자정이 넘은 시간
온 세상이 하루를 접고 잠들어 있는데 
저마다 살아온 길 모두 다르듯
제각기 다른 시간을 돌아 
멀고 먼 공간을 돌아
오늘 밤 이렇게 한 자리에 도란도란 모여 
수런수런 흘러간 이야기들을 하고 있구나. 
발바닥 불어터져 쓰리고 아프도록
걸어온 길 너무도 험하고 힘들었다고
이제 멈춰진 시계바늘은 더 이상 돌지 않고 
이 밤을 넘어 흔적 없이 떠날 일만 남았구나. 
폐품이 된 가위소리 쩔렁쩔렁
차디찬 달빛을 깨트리고 있구나.




뽁뽁이

황동규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고 했듯이 
나는 뽁뽁이를 보면 터트리고 싶어진다. 
치밀하게 계획된 목표나
꼭 터트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옆에 뽁뽁이가 있음으로 해서
그냥 터트리게 되는 것이다.
뽁뽁이가 하나씩 내 엄지에 눌려 뽁뽁 터질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촉감
쾌감이랄까 알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 
그런 것 때문에 뽁뽁이만 보면
특별한 이유 없이 끝까지 터트리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신문을 보면서도
오래된 일상처럼 뽁뽁이를 하나씩 누르던 사이
 어느덧 뽁뽁이 한 장이 거의 다 터지고
허무한 비닐 조각만 걸레처럼 남아 있다. 
문득 뒷머리를 스치는 그 무엇
나 자신도 이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흔들리며
하릴없이 내 나이도 벌써 이만큼 먹었구나. 
허무한 거울에 얼굴 비춰보는 사이
창밖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하늘

어릴 적 하늘은 
그냥 하늘이었는데 
오늘 문득
짓 푸른 가을 하늘 올려다보니 
얼음덩이 삼킨 듯
가슴이 시리다. 
흐르는 구름 바라보니 
먼저 떠난 사람들의 
애처로운 이름이 
바늘이 되어
하나씩 달려와 가슴팍에 꽂힌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프다. 
아프다.




법당 안 파리

나는 어디에서 와서
마침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법당 안에는 아미타 부처님
알 듯 모를 듯 미소하고 계시고 
부처님 손바닥에는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넘어
파리 한 마리 웅크리고 앉아 
퀭한 눈 부라리며
노스님이 치는 목탁소리를 
하품하며 세고 있다.



가을을 찾아서

가을은 어디에 있는가. 
내장산을 돌아 
속리산을 돌아
계곡을 건너 산을 넘어 멀고 먼 길 돌아 왔건만 
가을은 어디에도 없고
비발디만 굳게 입 다물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아무리 찾아도 헤매도 
가을은 어디에도 없는가.
이 세상 모든 길 지나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옆 단풍나무
술에 잔뜩 취해 눈부시도록 붉은 빛으로 
투명한 가을 하늘을
말없이 가리키고 있다.



높이뛰기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매일매일 그 나무를 뛰어넘다가 보면 높이뛰기 실력도 무한정으로 늘어 마침내 아무리 키 큰 나무라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릴 적 중국 무협영화를 보면서 자주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나무를 뛰어넘기도 했었다.
  어릴 적에는 모든 걸 잘도 뛰어넘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가로질러진 높이를 뛰어넘는 것보다는 
  걸려 넘어지는 적이 더 많았다.
  무릎 까져 피 흘린 적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작은 높이에도
  달려가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서버리고 만다. 
  높이뛰기는 뛰어넘는 높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저하된 체력 때문이 아니라 
  쌓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는
  나이의 무게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고
  온 세상 나뭇가지 세차게 흔들며 
  하느님이 휘파람을 불고 있다.




오래된 사진

책장을 정리하다가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 
나와 생일이 같았던 친구 하나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몇 해 전
장례식장 영결 사진에서 웃던 모습도 
그랬다.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돌아가 바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고깃덩어리 하나로 남아 있다. 
추위에 햇살도 꽁꽁 얼어 
얼음처럼 차갑게
빛나는 겨울 아침.




차마고도

천만 년 
세월을 넘어 
해발 4,000
하늘로 지나는 설산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구름은 어디서 왔는가 
마침내 어디로 가는가
가도 가도 아득한 차마고도 
침묵이 얼음으로 굳어 있는 
아찔한 비탈길을
티벳 인 서너 명 
자벌레가 되어 
오 체 투 지
세상의 아득한 넓이를 
재고 있다.




삼강 주막

세 군데 물길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삼강
그 강 건너기 직전에
낡은 주막이 섬처럼 앉아 졸고 있다. 
마지막 주모조차 떠나고
밤은 옻칠처럼 검게 침묵하고 있는데 
그 사이 강물은 잠시
소리 없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주막을 지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삼강 나루터가 잠시 소란스럽다.
행인들이 흘리고 간 투박한 말 몇 마디 
곰삭은 막걸리 냄새가 마당을 떠돈다. 
이 세상 목숨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떠나갈 것이다.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500살 회화나무가
주막 지붕 너머
흘러간 강물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미소 짓고 있다.




그림자

잠잘 때까지도
하루 종일 내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무척
신기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한결같이 
그림자는 나를 따라 울었고 
내가 웃을 때도 함께 웃었다.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누울 때까지도 
가엾은 나의 분신은
내 주위를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내 그림자 얼마 동안
나와 함께 피곤한 발 문지르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서녘 하늘 불 지르며 
노을이 타고 있고
내 그림자 
슬프도록 기다랗게 
드리워져 있다.




거울

한밤중에 홀로 깨어
거울을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나는 여태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가로 세로로
파란 많은 주름 그려진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여태껏 이 거울 속에 비친
면상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왔는지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
똑바로 바라보기에
나 자신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먼 훗날 다시 바라보는 
거울 속 내 모습은
어떤 몰골로 남아 있을까. 
한밤중에 홀로 깨어 
거울을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묘목장수의 꿈

식목일 가까운 어느 날 
안동 구시장통 
대추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묘목장수 봄볕에 졸고 있다. 
지금은 다만 한 그루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만 
묘목장수의 봄꿈 속에는 
벌써
나무들 가지를 키우고 
탐스런 꽃들을 피워내고 
온 세상 찬란하게 
색칠하고 있을 것이다. 
꽃벌들 윙윙 날아올라 
탐스런 과일들
온 들판 가득 주렁주렁 
열리고 있을 터이다. 
줄지어 선 묘목 위로 
한 무리 나비들
춤추며 
날아오르고 있다.



금강경 읽으며

아득한 옛날
중국 양 나라 어느 산골 
병풍처럼 높은 산자락 
이름 없는 서생이 읽던 
그 금강경.
햇살 밝은 날 오후 
나 오늘 다시 태어나
새로이 금강경을 읽다. 
여시아문
부처님은 아직도
기원정사에 정좌하고 계신데 
수보리는 아직도
부처님 전에 합장하고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세상은 그대로 다 있는데
내 이름만 허공에 걸려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찾을 수가 없구나 도무지
만날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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