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말
2016년, 올해는 1969년 시문학 동인지 『글밭』 첫 호가 발간된 지 48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간 안동지역 문예부흥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마련된 글밭이라는 밭에 발을 들여놓고 마음을 경작하며 많은 동인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머물러 있기도 하며 양질의 밭을 위해 밑거름을 뿌렸습니다.
안동의 빛나는 문화의 중심축이라고도 과감히 말할 수 있는 동인지 <글밭> 제 40집 발간을 맞아 여러분들 앞에 우리들의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그 시간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내 온 내력이 쌓여 역사로 남았습니다. 내 마음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 ‘시’라는 한 낱말 안에서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어놓고 순간순간 툭 던져 놓은 말 한 마디에서 낚싯줄처럼 줄줄이 생각들을 낚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목 언저리에서 맴도는 마음을 뭐라 표현 할 수가
없어 썼던 글을 지웠다가 다시 쓰길 반복하며 날밤 새우기도 하고,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없어 애를 태우기도 하면서, 시를 쓰는 일이란 주어진 목숨을 붙들고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아 끊을 수 없는 시어를 몸에 칭칭 감고 형벌처럼 살아내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살아가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기에 글밭이라는 터 안에서 동인들과 함께 우리라는 울타리를 단단하게 매만지며 해마다 글밭 동인지를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김주영․이오덕․신승박․김성영․임병호․임명삼 등의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글밭문학동인회는 청포문학회를 전신으로 출발하여, 1969년 7월 시문학 동인지 『글밭』 첫 호를 대한인쇄소에서 발행하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 경제적인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안동의 빛나는 문화를 살찌우고 문예발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동인지를 제작하였습니다.
『글밭』 동인지는 7호까지 출간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의 결성을 위해 1972년 12월 잠시 동인 활동을 중단하고 『안동문학』을 창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85년 5월 속간하여 2008년 30호를 출간하였습니다.
창간호를 발간하던 시절 동인들은 비싼 인쇄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뽑고 조판을 짜서 인쇄를 하였고 2002년 동인지 콘테스트에서 2등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글밭』은 창간호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말을 빚는 문예지이면서, 침체된 향토 문학의 부흥 운동으로 지역 문학회를 통해 향토 문학을 복원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인지가 목적과 취지에 따라 출판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과 달리 『글밭』은 순수 ‘詩’ 동인지 가운데 안동을 비롯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지이며, 동인 활동을 통해 시인으로 인정받는 비중 있는 동인지입니다.
2014년부터는 봄과 겨울, 연 두 차례 발행하면서 2016년 봄 ‘40회’를 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40회’, 그 안에 불고 있는 숱한 바람과 숱한 눈물과 숱한 기쁨과 아픔을 시를 읽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내 마음과 네 마음이 서로 위로하고 안아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더 많은 젊은 세대가 글밭에 발을 묻고 마음을 심어 양질의 토양에서 진실한 시어를 길러 창간호에서 밝히고 있듯이 침체된 ‘향토문학 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봄이 와서 기쁘고 봄이 와서 아픈 우리는 마음 밭에 글을 심으며 이 봄을 건너가기를 바랍니다.
차례
우리들의 말 3
김 윤 한
타자기의 시간 12
교련시대 13
오래된 성탄절 14
전화번호를 지우며 15
송장메뚜기 16
분수 17
밥풀 18
아이스크림 19
건조증 20
노란 샤쓰의 사나이 21
먼지 22
딸꾹질 23
멸치들의 생존법 24
천 승 현
빈 그네 26
버리고, 내려 놓는 일 28
길 위에서 30
섬 2 32
청량산에서 33
향일암 34
새벽도로 35
동백꽃 36
별이 떨어지는 화분 38
이 위 발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40
빈 집 41
여우 굴 42
기억의 집 43
김 진 택
헤어지는 연습 46
어떤 풍경 47
겨울 기차 48
어떤 단락 49
난 이 말이 좋아 50
롬바르디아 들판 51
南行 52
김 미 현
그 사람 54
흙냄새 55
돌아오지 않는 강 56
동 틀 무렵 57
민들레의 뿌리 58
여울목 59
꽃의 기다림 60
길을 가며 61
먼 산 보기 62
간이역에 서성이며 63
김 지 섭
그 남자 66
겨울 명사십리(鳴沙十里) 67
하관(下棺) 68
마지막 69
세월에 기대어 70
강 수 완
꽃분홍이 좋아졌다 74
나무의 얼굴 75
도다리쑥국 76
돈 77
등신불 78
매창 무덤가에서 79
소래포구를 지나며 80
수양매 81
섬진강 재첩국수 82
出世 83
조 용 식
보훈병원에서 86
상 추 꽃 88
초 승 달 90
임 관 혁
봄이 오면 94
나의 삶 95
주저앉은 꽃에게 96
겨울밤 98
뻐꾹새 100
꽃반지 102
통일벼 103
탈춤 104
뿌뜨리 105
화진포 106
못 잊어 107
김 여 선
가을은 110
겨울나무 111
늦가을 주산지 112
밀려나기 114
만휴정 115
영천 가는 길 116
소나기 118
봄날의 설계도 119
이팝꽃 120
김 진 회
돌연변이 연작 9 122
돌연변이 연작 10 123
돌연변이 연작 11 124
돌연변이 연작 12 125
돌연변이 연작 13 126
강 희 동
고려장(高麗葬) 128
십구공탄 130
입춘가관(立春可觀) 131
흔적 132
이천십육 년 설날 133
새날 눈길을 걸으며 134
아프지 말아요 135
회귀 136
둥지 137
건강검진 138
권 기 태
바람 140
안막골 식당 142
글밭 略史 143
김 윤 한
타자기의 시간․교련시대
오래된 성탄절․전화번호를 지우며
송장메뚜기․분수․밥풀․아이스크림
건조증․노란 샤쓰의 사나이
먼지․딸꾹질․멸치들의 생존법
|시인의 말
그동안 시를 써 오면서 숱한 실험을 시도해 봤지만 결국 시는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좋은 시도 풀 수 없는 암호라면 그것은 제대로의 시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시들을 보면 30년 동안 시를 써온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시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현대시가 난해함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아마도 둘 중의 하나임은 틀림이 없다.
시가 비유와 상징의 산물인 만큼 어느 정도는 ‘암호 풀기’의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시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암호’라는 것은 결국 풀릴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보통사람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감상할 수 있는 시를 쓰고자 노력한다. 술자리에서도 부담 없이 낭송도 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를 꿈꾼다. 물론 내가 쓴 시도 읽기 어렵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능력의 한계이다.
타자기의 시간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자음과 모음이 되어
낯선 기계음과 만나고 헤어지며
낱말의 바다 위를 떠다녔을까
문득 아득한 저편에서
톡톡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로는 오타가 난 음절이
발을 삔 채 절룩이기도 했고
겨울바람이 울며 지나기도 했지만
벌겋게 달은 주철난로가 있어
오히려 후끈했던 시절,
그러나 검은 잉크리본을 따라
낱말은 순서대로 하나씩 지나가고
손잡이를 돌려 줄을 바꾸자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들이 되고 말았다
오래된 책 속에서 문득 떨어진
낡은 종이 한 장, 그리운 활자
잊고 지냈던 세월이 바스락
햇빛 아래 부서져 내린다
교련시대
군복 입은 교련 선생님 선글라스에
학교 앞산 구름이 걸려있었다
사격자세 훈련을 하다 보면 가끔씩
붉은청년근위대 아이들이 떠오르곤 했다
교련검열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방과 후에도 각개전투 훈련을 했다
진짜 사나이 군가 흥얼거리며 하교하는 길에
찰리 채플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악대부 브라스밴드 행진곡에 맞춰서
전교생이 교련복 입고 목총 메고
시가행진하며 교련실기대회에 나갔다
오색 연막탄 자욱한 대회장을 누비며
화생방훈련도 열병식도 실수 없이 잘 마쳤다
교련복은 때도 타지 않고 구김이 없어
외출할 때나 여학생들 만나러 갈 때도
교련복 바지에 티셔츠 하나면 되었다
예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가을날
엠원 소총 보관된 학교 무기고 위로
참새 떼 한 무리 후루루 날아가고
전투기도 고함치며 뒤따라 날아갔다
오래된 성탄절
회칠한 벽 군데군데 벗겨져
흙벽돌 속살 드러난 시골 교회당
나무 종탑 무쇠종이 천당 천당
초가집 지붕 위로 성탄절을 알렸다
은박지 빛나는 트리에 어둠이 내리자
남포등 불빛 아래 작은 무대에선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가 열렸다
옷소매 반질거리는 아동부 아이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풍금에 맞춰 부르는 합창이 끝나고
성극 속 동방박사들이
천정에 뜬 별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남루한 유리창을 바람이 연신 흔들어대고
벌겋게 달은 장작난로 위
주전자 뚜껑 흔들며 물이 들끓고 있는 시간
마침내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별이 왔다
댓돌 위 가지런한 검정 고무신마다
눈발 평화롭게 쌓이는 새벽녘
전화번호를 지우며
아득한 바다 너머로
검은 돛배 하나 떠나가고 있었다
빈 바다 불빛 빤한 등대 하나
외롭게 달빛에 젖고 있었다
별 하나가 스러져도 지구는
여전히 빠르고 어지럽게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 소리 안 나게 울고 있는 밤
외로운 한 사람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흔적 없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깊고 적막한 밤 우주에서 홀로 깨어
습관처럼 이름 하나를 지운다
별 하나를 지탱해 왔던 창백한 숫자들이
마른 뼛조각으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가로수 아득한 낡은 흑백영화 속
홀로 가는 나그네의 뒷모습이
석양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송장메뚜기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도 죽은 이름을 하고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세상
가슴 속 검은 울음 삼키며
서럽게 서럽게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도 힘든 길 가야만 한다
갈 곳 많아 오히려 갈 곳 없는 저 들판
남루한 외투 자락 펄럭이며
숙명처럼 지친 걸음 옮긴다
태고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고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가
고통은 절망을 낳고
송장메뚜기는
다시 송장메뚜기를 낳고
분수
힘차게 솟구치지만
부질없는 욕망
치솟는 순간 이미 과거형이 되고 만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빠르게 떨어지고
더 아프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
화려한 도약만을 보지 말고
떨어지는 순간을 생각하라
물은 반드시 낮은 데로 흐르는 것
분수를 알라
분수를 알라
물보라 흩날리며
낮은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밥풀
식기 바닥에 남아 있는
한 알 밥풀을 본다
보잘 것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숱한 비바람과 뙤약볕 끝에 맺혀진
한 방울 땀,
눈보라 뚫고 돌아와 대문 앞에 선
등 굽은 가장의
한 방울 눈물이다
한 끼 양식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몰아치는 북풍 속을 헤매고 다녔을까
체했을 적 바늘로 손끝 따면
검붉게 돋아나는
한 방울 피 같다
아이스크림
참을 수 없이 더운 것은
기온 때문만은 아니다
한겨울에도 활활 타오르는
답답한 이 속을 어찌할까
차디찬 얼음 삼켜 보지만
잠시나마 시원한 것은
입과 목 사이 그리고 얼얼한 콧잔등 뿐
물과 만나 더 뜨거워지는 카바이드처럼
오히려 더 달아오르는 열기
온천수에 뛰어드는 눈발처럼
가당찮은 몸짓인줄 알지만
답답하여 하도 답답하여
오늘도 부질없이 얼음을 삼킨다
주체할 수 없는 이 속을
누가 좀 어찌해다오
건조증
안구 건조증 있는 친구
언제나 안약을 갖고 다닌다
눈물샘이 건조해져서
눈이 피곤해지는 증상이라 한다
나도 요즘 감정이 너무 건조해져서
사는 게 시시하고 늘 피곤하다
그래서 친구는
눈으로 안약을 마시고
나는 오늘도
술을 마신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한명숙이 1961년에 불러서
전국을 노랗게 물들였다던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
동네 전파사 쌍나발 전축
지지직거리며 엘피판 레코드는
부지런히 세월을 물고 돌아가고
‘노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은’
아직도 잘 살고 있을까
거울 속 추억을 세고 있을까
‘야릇한 마음’에 가슴 콩닥거렸던
그 시절 볼 붉은 처녀들은
다 어디로 떠나갔을까
은행잎 눈부시게 쏟아지는 공원길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하나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다
먼지
해가 비친다
보이지 않던 무수한 먼지들이
실내를 떠도는 모습이
보인다
해가 진다
보이지 않던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떠도는 모습이
보인다
눈을 감는다
지구가 작은 별이 되어
우주를 떠도는 모습이
보인다
그 속에는
작은 먼지가 되어
세상을 떠도는 내 모습도
보인다
딸꾹질
내 안에 나 말고
또 다른 내가 있는 게 틀림이 없어
내가 누군지는 잊어버린 채
앞만 바라보며 남들만 바라보며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는 일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 졸이며 살아왔는데
너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숨길도 한 번 가다듬고
물도 한 모금 마시며 쉬어가라고
바쁘더라도 가끔씩
내 자신도 한 번 찬찬히 돌아보라고
아무리 참으려 해도
끊임없이 돋아나는 그리움처럼
아무리 참으려 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고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고
횡격막을 톡톡 두드리며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멸치들의 생존법
흩어져 도망가면
혼자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 먹이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상어나 고래를 만나더라도
수천수만의 몸을 한데 모아
장엄하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들과 맞서는 것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
때로는 자신이 희생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모두가 살 수 있는
이치를 잘 알고 있다
강한 것들은 멸종되기도 한다
하지만 약하기에 몸을 뭉쳐 더 큰 하나가 되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것
멸치 건조대 위
잘 마른 바다의 전설이
햇볕 받아 사리로 빛나다
천 승 현
빈 그네․버리고, 내려 놓는 일
길 위에서․섬 2․청량산에서
향일암․새벽도로․동백꽃
별이 떨어지는 화분․은하수 홀씨
|시인의 말
사람 사는 일은 별 게 아니라는데
별일 아닌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아
마음을 자꾸 긁힙니다
상처난 자리에 딱지가 않고
떨어질 즈음 부스러기들이
말이 되고 글이 되고 詩가 되어
나비처럼 사람들 사이로
날아다니며 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빈 그네
아이들이 놀다가
두고 간 그네에
바람이 와서 앉았다
햇살이 와서 앉았다
누군가 허한 마음이
와서 앉았다
앞으로 가는 것 같으면
어느새 뒤로 가 있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 같으면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가 있는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세상살이의 곡예와 닮아있다
생이라는 지지대에 붙잡혀 오락가락,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도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서도
태어남과 돌아감 사이에서도…
아이들이 놀다가
두고 간 그네에
바람도 떠나고
햇살도 떠나고
내님의 그리운 마음만
남아있다
버리고, 내려 놓는 일
늦은 오후
하루 한낮,
한 송이 꽃처럼 피었다
노오란 꽃잎으로 물들은
가슴을 털어내면
아마 금가루 같은 꽃가루들이
폴폴폴 날아다니겠지
제 시절 다 놓친 꽃도 꽃이라고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쯤
친절하게 날아오겠지
지나간 것들이 모두
소금 벽처럼 쌓이기 시작하는 건
삶을 짊어지고 온 중년이라는
무게 때문이 아닐까
살아온 날이 길어지는 만큼
돌아보는 날도 길어지고
돌아보는 날이 길어지는 만큼
아쉬움도 길어지며
시도 때도 없이 지나온 시절들이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있음을
사는 일은 스스로를
조금씩 손에서 놓고
조금씩 버려 가는 일
사람도 버스도
오면 가고 가면 오는,
더러는 사라지기도 하는,
오래된 터미널 마당에는
묵은 추억들이 서성이고 있다.
길 위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한 눈에
외로운 사람을 서로 알아본다
알아본다고 해서
그 외로움을 같이 나눌 수 있다거나
동질감으로 친근해 질 수 있다거나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닮은꼴을 만나고
인사 한 마디 없이
눈길만으로 비켜가면서도
알 수 없는 안도감이나
위안을 얻고 있는 건 사실이다
더러더러
젊은 사람들의 召天* 소식에 마음 먹먹해진다
펼쳐놓은 일 마무리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채 하늘로 돌아가는 이의 심정은 어떨지
이 세상 잠깐 사는 건 꿈이었다고
머뭇머뭇 하늘가를 떠돌다
고개 숙이고 돌아갈까
가던 길가에 서서 뒤 돌아보면
웃을 일 많았을까
그리운 일 많았을까
가슴 메이는 일 많았을까
사무치는 일 많았을까
모두 두고 떠나야 하는
길 위의 또 하루
* 召天:기독교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는 의미.
섬 2
하늘에 있는 섬에는
갈 수 있어도
땅 위에 있는 섬으로
가는 길은 찾을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은
그 가는 길이 고단하고
바다 건너 있는 섬에는
가난이 꽃잎처럼 떨어져 있다
청량산에서
비 내리는 하늘 아래 깊은 산
궁금한 세월을 물으면
무엇이든 늘 메아리로
돌려줄 것 같은 청량산*
청량사 마당 한쪽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 온 소나무와 늙은 소나무의
삶이 궁금해서 입 안 가득 질문을 물고
바라보고 있는 탑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에
돌담과 바위산이 서로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주거니 받거니
오래도록 함께 살아낸 부부처럼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산
* 청량산: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산.
향일암
바위 꼭대기에서
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향일암.*
위로만 치솟아 있는 절을 향해
뙤약볕을 이고 가파른 길을 걸어
숨 몰아쉬며 절 마당에 올라서니
정신이 아득하더라
살아왔던 세상살이 이렇게 힘들었을까
절 찾는 길 내내 발끝만 보고
안간힘으로 오르고 올랐더니
대웅전을 눈앞에 두고도
더는 걸을 힘이 부쳐
마당 가운데 우뚝 서있으니
그대로 바닷바람에 떠밀리는
풍경소리 되고 싶더라
* 향일암:전라남도 여천군 돌산읍 율림리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절.
새벽도로
멈춰버린 시계 앞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
남아있는 시간은 얼마인지
문득 두려울 때가 있다
저 길 끝 소나무 닮은 푸르디 푸른
내 젊음이 서 있을 것 같다
파도 같은 시절이 서성이고 있다
동백꽃
가슴 터질 듯 한 붉은 동백을 본 적 있는지
혈관 타오르며 붉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백과 눈을 마주해 본 적 있는지
파도소리가 슬프다하는
동백과 이야기해 본 적 있는지
바람소리가 아프다하는
동백의 말을 들어 본 적 있는지
어머니 젖무덤 닮은 우유빛 구름 지나갈 때
눈을 감은 동백을 본 적 있는지
세상 모든 꽃들이 돌아간 뒤
홀로 피어 가혹한 겨울 견뎌놓고
어느 날 바람도 모르게 툭하고
생을 마감하는 동백을 가슴에 새겨 본 적 있는지
피멍 들은 꽃 덩어리를 두고 돌아 선 적 있었는지
순결한 봄
그대를 만나기 위해 붉은 생을
내려 놓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별이 떨어지는 화분
꼬박꼬박 물을 챙겨 주면서
좁쌀만한 꽃송이가 맺힌 것만
기특하다 눈여겨봤었지,
꽃이 다 핀 자리
꽃이 다 진 자리
별이 떨어져 내린 것도 몰랐었네
순간을 놓치면 생의 중요한 것도
놓치고 만다는 깨달음
별꽃 떨어진 이 작은 우주에
소망하나 주워본다
은하수 홀씨
은하수 건너가면
그대 기다리는 맘
나처럼 기다리는 맘 같을까
내 사랑이 머물렀던 자리
그대 그리워서 내 작은 마음 여기에 있네
홀씨 흐르는 밤하늘 끝자리 별꽃 수놓은 길 따라
나 그대 찾아 가네
* 세월호 아이들을 위한 노래.
이 위 발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빈 집․여우 굴
기억의 집
|시인의 말
집은 나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이다. 떠남과 돌아옴의
길에서 서성거리다. 집이란 공간으로 들어서면 마음은 흐
르는 강물이 된다. 요즘 밖에 나가면 집으로 빨리 들어가
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곳엔 내 의식의 젖줄이 있기 때문
이다.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세라믹접시처럼 팔랑거리는
한줄기 바람이
하나의 원으로 울릴 때
빛의 냄새가 그림자에 녹아
미세한 파문으로
머리칼을 당기던 소리
깊숙이 울리는 지층에선
해일의 탄생을 알리며
흔들리는 지붕을 핥는 소리
푸른 하늘의 오른손에 얹혀
한없이 기울고 있는 기둥의
불가사의한 미소
빈 집
부서진 어깨에 치장을 한
그림자가 어둠을 가르고
길을 나서자
발치에 떨어진 벚꽃은
수줍은 계집처럼 달빛에 떨고
빛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밤 혓바닥을 늘어뜨린 채
마지막 밤이 숨을 몰아쉬고
맥 빠진 신음소리 뒤로 하고
생명이 움트면 목마른
사람들이 스러져 밤을 새던
그 집에서
짙은 향내를 발하던
꽃바람에 흠뻑 젖어있는
또 다른 그림자
여우 굴
내 추억은 바위보다 무거워
거북이 껍질이 되었다가
코끼리 발바닥이 되었다가
권태 속에서도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로
땅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벽으로부터의 탈출은
죽음이겠지만
그 벽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수액 가득한 나무뿌리가 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던 그곳
너무 완벽하고
너무 영원한 것이어서
불멸의 크기로 확대되는
끝없는 공허감에
하나의 형상마저도
가둘 수 없던 초라한 집
기억의 집
지나온 기억의 집은
두터운 화장을 한 퇴물 작부의
흘리는 미소보다 허망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본적이고 주소다
김 진 택
헤어지는 연습․어떤 풍경․겨울 기차
어떤 단락․난 이 말이 좋아
롬바르디아 들판․南行
|시인의 말
시인은 시로써 말을 한다면
나의 시는 나를 나타내는 최선의 수단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지리멸렬
비루한
나의 시여
미안코 또
미안하다
헤어지는 연습
키는
작지만 개마고원 커다란 엉덩이를 자랑하는 여자. 창밖,
겨울을 인내하고 있는 알몸의 나무들을 쳐다보고 있네. 손
등의 푸른 정맥은 지도의 강줄기. 여기저기 알전등은 흑백
영화의 잿빛 화면이네 광대뼈에서 귓뒤로 흘러내리는 주근
깨. 암갈색 점들이 남해바다 섬들처럼 흔들리네 무게가 없는
먼지들. 더러는 불빛을 받아 희끗희끗 나리는 진눈까비가
되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수의 목소리는 낙엽의 얼굴처럼 저녁의 가슴으로 스미
는데
나는 저를 두고 서둘러 돌아가야 하리라. 계절이 끝나는
이맘때는 쌓아온 인연도 허물어야 해. 저어기 새로 하얀 불
빛을 다는 가로등처럼 혼자서 오랫동안 서있어야 해
어떤 풍경
넓은 들
저 끝
너무 멀어
구름처럼 보이는 희미한 산
그 너머
평택으로 시집 간
내 끝엣 누이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다.
남행의 열차
지나는 구비마다
봄꽃
피어난다.
겨울 기차
까치는 없고
높은 곳에 지어 논
그들의 보금자리
외롭다.
산자락엔
삐딱한 자세로 서있는
떨기나무들
피부가 검고 초라하다.
겨울은
식물들도 건너기 어려운
계절인가보다
알몸으로 죽은 듯 서있다
누가
쏟아버렸나
퍼질러 누운 저수지
어떤 단락
뭔
일인지
두 남녀
하나는 울고 있고
하나는 돌아서 천정을 쳐다본다.
여자의 손을 잡은
때 묻은 옷
저 계집애
남자에게 자그만 소리로
말을 건다
저
두 사람
헤어지는 것인가
아이는
오늘 밤
누구와 잘 것인가
난 이 말이 좋아
꽃은 왜 피는가?
그냥 피는거지 뭐
넌 왜 날 좋아해?
그냥 좋아해
술은 왜 마셔?
그냥 마시지
저기 저 흰 구름
산기슭을 베고 누워있네.
난 이 말이 좋아. 정말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하고 갈래?
(그와 헤어지고 오는 길은 왜 이렇게 어둡고 먼가. 그와
헤어지고 오는 길은 난 왜 이렇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인
가. 다음에 또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모시 옷 지어입고
왕모래 발 밑에 서걱이는 운동장을 같이 걸어 갈 수 있을
까. 달맞이 꽃을 너맞이 꽃이라며 그의 머리칼에 꽂아 줄
수 있을까)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갈래? 응? 응?
롬바르디아 들판
구름꽃 너무 많이 핀
이 곳의
방랑가객은 너무 배가 고파
‘지나 로로부리지다’
입술
茶色
피어나는 야생 양귀비들
하느님은 저어기 푸른들판 한 뙈기
뜯어서 나보고
가지라고 하네
아아니
빈 손
빈 주머니가
나는 좋아
南行
봄날
완행 타고
졸며
졸며
벚꽃 흐드러진
三浪津 지나
흰구름 언덕 너머
馬山
바닷가
무논에선
개구리들
낮부터
운다
김 미 현
그 사람․흙냄새․돌아오지 않는 강
동 틀 무렵․민들레의 뿌리․여울목
꽃의 기다림․길을 가며
먼 산 보기․간이역에 서성이며
|시인의 말
삶이 구도의 길이라면
시와 함께 걷겠다.
삶이 자연의 과정이라면
시와 함께 받아들이겠다.
시와 함께 하겠다.
그 사람
한동안 멀어진 그 사람을 만나러
비 내리는 산길을 오른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온 산을 가득 채운다.
쉽게 가려지지 않는 폭우에
마음의 길이 파묻혀지고
그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 사람에게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숲 속의 바람이거나
바닷가의 모래알이다.
바위틈에서 피는 생명에게서
사람 냄새 그 사람의 냄새가 난다.
흙냄새
봄은
살찐 흙냄새가 난다.
언제나 그 자리인듯 하여도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삶이
얼어붙은 겨울을 뚫고
발 아래 와 있다.
얼마나 오래인지도 모를
얼마나 짧은지도 모를
봄이 왔다.
흙냄새가 봄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흙냄새에 설렌다.
돌아오지 않는 강
당신이 떠난
강가에 가만히 앉아 봅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조약돌 하나씩 건져 올립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들의 기억이
하나씩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람을 막아줄 숲 없는 한 줄기 빛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납니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
푸른 조약돌 강 한가운데로 던져 날립니다.
동 틀 무렵
안개 낀 새벽
맹인 부부 걷는 길
갈 길 정하는 시간은 늦어도
서두르지 않고 길을 잃지 않는다.
빠르지는 않아도 서로의 손 놓지 않아
남아있는 어둠도 두렵지 않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서서히 어둠 걷혀오고
귀는 열리고 바람 소리도 들린다.
이윽고 새벽길이 열린다.
민들레의 뿌리
겨울 걷이가 끝난 텃밭에서
민들레의 뿌리를 캔다.
다 캐지 못한 쓴 뿌리를
붙잡고 비틀어 본다.
뽑으려고 힘을 줄수록
뽑히지 않으려는
뿌리의 몸부림에
애꿎은 몇 개의 잎만
나동그라진다.
자신의 삶을
쉽게 내어주는 생명은 없다.
자신을 해치려는 손길을 향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운다.
가만히 분노를 어루만져 주는 순간
내 안의 단단한 뿌리가
조금씩 끌려나온다.
여울목
긴 그림자 드리우던 여름의 먹구름
사정없이 후려치던 겨울의 파도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눈발이 몰아친 후
앙상한 몸피를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산다는 건 빠르게도 느리게도 아닌
물가에서 그대의 목소리에 귀를 연다는 것
다시 차오르는 여울목에서 사라졌다 돌아오는
물소리 따라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 보는 것
꽃의 기다림
섬에서 피는 꽃들은
바다를 향해 모두 핀다.
한 결 같이 바다 쪽을 향해
여리고 긴 목을 빼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늘을 가리는 장맛비도
잠시 발길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삶이 어떤 모습일 지라도
마음에 내리는 뿌리가 있어 두렵지 않음을
꽃은 피면서 알려준다.
길을 가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걷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해진 대로
한 번도 울지 않고
씩씩하게 살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뒤돌아서 묻고 걸어가는 길
그래도 버리지 않고 제 길 찾아
산다는 것은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앞으로 가는 것이다.
먼 산 보기
당신을 만난 후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욕심 없는 사람처럼
잠시 순한 얼굴이 된다.
먼 산에 꽃바람이 일면
아! 비가 또 이어 지려나
너그러운 사람 되어
고개 끄덕이기도 한다.
먼 산을 바라보다 가야 할
길 보이면 운 좋은 날
멀리 바라보는 산
당신은 먼 산이다.
간이역에 서성이며
살아가다가 간이역에 멈춰서면
비탈진 담장을 따라
소리 없이 피어나는
꽃들도 만난다.
늘 처음인 듯 돌아와
일어서고 잊은 듯 다시 피어나선
이름 부르지도 눈길 건네지도 않는
무심한 간이역, 피어 흔드는 꽃
쓸쓸한 그림자 되어
내려앉는 조용한 오후
자정 무렵에나 온다는 상행선
간이역 창문에 하얀 입김을 불어넣고
서성이며 오지 않을 기차소리를
오래 기다린다.
김 지 섭
그 남자
겨울 명사십리(鳴沙十里)
하관(下棺)․마지막
세월에 기대어
|시인의 말
평생 글밭에 더부살이로 살아온 탓에 이제 그만 두려고
해도 쫓아내지도 않는 신세가 되었다. 내 처지가 참 어렵다.
마름의 득달같은 재촉이 싫어 이번에도 대충 보낸다.
좀 가리고 다듬지 못해 결실이 실하지 못하다. 빚지고 살
기는 언제나 어렵다.
그 남자
여자의 흔적을
찾아가는 그 남자의
거대한 발이
견고한 율법의 성을 넘어
거대한 신전으로 숨어 들어가
성스런 제단을
짓밟아 버린다.
그때
지축이 심하게 흔들리고
저 하늘의 별 하나
슬프게 울고 있다.
겨울 명사십리(鳴沙十里)
봄부터 저 보안등에 달려들던
그 부나비떼들은 다
어딜 갔을까
그 여름 축제의 나날들
사내들에 환호하던 계집들
계집들에 열광하던 사내들
이 한적한 해변의 겨울
다 어디로 갔을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소리 따라
달려드는 파도의 안고잡이에
저 고운 모랫벌
끊임없이 씻기면서
울고 있는데
하관(下棺)
조 작은 관 하나로 내려가기 위해
저 너른 세상 온데를
그렇게 쏘다녔나 보다
흙이 한 순배 뿌려지자
이제 한시름 놓은 듯
어둡게 찌푸린 하늘이
잠시 열리고
부신 햇빛 한 줄기 쏟아져 내리더니
이내 하늘문은
다시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마지막
지금 둘이서 나누고 돌아선 그 인사말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줄 아시나요
절박한 간청 어린 사연에
너무 바빠 그만 간편문장으로 보낸 당신의 그 문자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줄 아시나요
문 쾅 닫고 돌아서는 당신의 화난 모습이
어쩌면 이 세상 마지막이 될 줄 그 누가 아시나요
세월에 기대어
세월 언덕에 기대어
한 칠십 년 그럭저럭 살아왔네요.
소싯적부터 골골 잔병치레로 젊은 날을 지새던 고종형님,
이제 팔십을 거뜬히 넘어셨으니 복 없다 못하겠지요. 육이오
참전용사로 병 얻어 이적지 홀몸으로 입원생활 하지만 현충원
예약이 된 저 분, 그래도 병원 앞뜰 저 환한 벚꽃처럼 참
행복한 분이지요. 사고무친으로 오직 저승에서 올 기별만
기다리다가 어느 시린 골방에서 고독사 하신 그 노인도, 어
쩌면 복 있다 해야겠지요. 병들어 몇 년째 호스에 매달려 바
스라지며 하루하루 실낱같은 명줄 이어가는 그분도 복 없단
말 못하겠지요. 만년에 병들어 자식새끼들 떠나 요양원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지내다가, 어쩌다 정신 들면 자식 생각에 눈물
짓는 저 노인도 복 있다 해야 겠지요.
맹골수도 그 험한 파도에 기울어
물속으로 사뭇 잠기지도 못하고
다시 영원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저 세월호에 기대서면
호스피스 암병동에서
동화책 대신 어려운 경전을 읽어가듯
하루하루 하늘 길 계단을 올라가는
저 어린 환자도 어쩌면 다행이다
해야겠지요?
강 수 완
꽃분홍이 좋아졌다․나무의 얼굴
도다리쑥국․돈․등신불
매창 무덤가에서․소래포구를 지나며
수양매․섬진강 재첩국수․出世
|시인의 말
휘황찬란한 3월의 꽃들이 가고,
펄럭거리는 5월의 잎들이 왔다.
내게도
3월의 낱말이 가고,
5월의 문장이 오길.
꽃분홍이 좋아졌다
그 촌스럽다는 분홍, 그 중에서도
진한 꽃분홍이 와락 좋아졌다
나흘을 밭 고랑에서 호미처럼 일만 하다가
오일장에 가느라 겨우 하루 허겁지겁 바른
삐뚤빼뚤한 그녀의 입술선 같은
복사꽃 살구꽃 앵두꽃을 은근히 지나
참꽃 철쭉 박태기꽃에 이르기까지의
천지간을 발라당 뒤집어 놓을 듯한
그 유치찬란한 빛깔이 덥석 좋아졌다니
나는 이미 늙어가는 중이다
나무의 얼굴
나무는 얼굴이 잎이나 가지에 있는 줄 알았더니
몸 안에 있었구나
푸른 핏줄을 타고 희게 흐르는 수액을 따라
둥글게 자라는 제 몸 안에
그 동안 얼굴을 묻고 살았던 것이었구나
슬프거나 노엽거나 기쁘거나 근심스레 지나온
내력들이 표정으로 나타나
나무가 제 몸을 터-억 땅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얼굴을 알게 되는 것이었구나
사람처럼,
처음부터 얼굴이 몸 안에 있었던 것이었구나
도다리쑥국
마음이 고삐 풀려 먼저 내빼는 2월 끝 무렵이나
3월 초 어느 날 쯤
그러니까 봄꽃이 필락말락 간지럽다가
병아리 혓바닥 같은 햇쑥이 양지쪽에 쑥 올라올 그때 쯤
남녘의 작은 바닷가 마을 한갓진 곳으로 달려가
도다리 쑥국 한 그릇 시원하게 먹고 싶다
해풍 맞아 단단해진 단맛이 코끝에 착착 달라붙어
사느라 지친 내장을 뜸뜨듯 지나는 동안
그 동네 잘 만든 막걸리 한 병 받아
봄 쑥 쌉쌀달큰한 맛과 대작하다가
도다리 배처럼 납작해 진 슬픔을 지니고
의기양양 집으로 오고 싶다
도다리쑥국 한 그릇 먹어야 비로소 봄이 오므로
돈
사골 국 뒷맛이 달다
누군가의 뼈를 한참 우려 낸 맛이 달다는 걸 알고 나니
돈 벌 때
흰 뼈의 울음이 들리는지 살펴 볼 일이다
등신불
앉은 채로 등신불이 된
언 배추밭을 지나며
문득 삼배 절 올리고 싶네
겹겹이 들어 찬 속을 어느 순간 내려놓고
해탈한 듯 하얗게 말라버린 몸
물기가 빠져 나간 안동포 수의 한 벌이
천천히 주시는 말씀들
삼동을 지나 바람이 가네
매창 무덤가에서
살아 누운 것과 죽어 누운 것이 무어 다르냐고
친구 무덤가에서 은근히 누웠다가 온 안동의 노시인이 있기에
살아 먼 곳의 님 그리며 거문고를 뜯다가
죽어 한양 쪽으로 기울어 누운
부안의 그 여인 무덤가에 그린 듯이 한참 앉아 보았네
일찍 핀 매화 서너 송이 찬바람에 흔들리니
해는 기울어
서쪽 바다로 붉게 드는 치마저고리 자락
소래포구를 지나며
정월 대보름 뒷날
물메기 물컹거리는 바다를 따라 소래포구에 닿았네
간재미 도다리 대하 바지락 갑오징어
생긴 모습 제각각인 어물전에 어족처럼 섞여 들어
비늘처럼 잠깐 미끄러져 보았네
이리저리 곰삭은 속을 이곳에 두고
한 세상 바람으로 살면
갈치 속 젓갈 같은 세상살이
그제야 제 맛이 들어
들락날락 배 띄워 보내는
마음의 포구 하나 열릴까
수양매
님 그리다 숨 넘어 간 부안의 색시
매창의 허리가 저러하였을까
보성의 한 고개를 깔딱 넘어가는
서편제 진진한 목청가락이 저러하였을까
수양매 가지 낭창낭창 늘어져
발목을 잡고 영 놓아 주지 않는 땅
봄비처럼 아래로 사뿐 뛰어 내리며 피는
수양매 꽃그늘 아래
전라도 사투리가 능청스레 안겨 와
며칠째 늘어져 떠도는 붉은 땅
칠 벗겨진 지붕의 허리 굽은 주인이 우려 주는
맑은 녹차향기 같은 저 꽃
섬진강 재첩국수
재첩 고명 한 줌을 머리에 얹고
다진 부추가 물돌이로 흰 국수사리를 껴안은
히말라야 설산 같은 섬진강 재첩 국수 한 그릇을
선채로 후르륵 마셔 본 적 있는지요?
첫 매화를 찾아 종일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다가
눈에도 매화가 들어 서리서리 필 때쯤
버들이 허리 꺾어 봄물에 노니는
섬진강 옆 국수집에 연애하듯 들어
먼 산에 봄이 오는 빛깔의 재첩국수 한 그릇에
맘 놓고 코 박아 본 적 있는지요?
그런 적 없다면 그대는 아직
섬 같은 재첩국수 그 맛을 모르고 사는
푸른 섬 밖의 한 사람이겠지요?
出世
오래 봄 공부하던 살구나무가 꽃을 피웠다. 스스로에게
대견하다 쓰다듬듯 우둘투둘한 밑둥치 쪽으로 가지 하나가
벋더니 꽃술 빼곡하니 일렬로 바람에 간들거렸다. 어사화를
쓰고 세상 밖으로 나갈 일이니 어화, 출세로구나!
조 용 식
보훈병원에서
상 추 꽃
초 승 달
|시인의 말
인생 칠십이면 종심(從心)이라 하여 마음가는대로 하
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째 나이가 들
수록 말과 행동이 어려워진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돌보느라 두 달째 회사를 못
나가고 있는 조카에게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옳은 말일까
맞는 말일까
그것 참!
시간만 하나씩 빼먹고 있다
보훈병원에서
1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머니
색바랜 환자복이 헐겁다
소매를 몇 번 걷었는지 알 수 없다
링거병에서 떨어지는
수액을
한 방울씩 세고 있다
방울져 떨어지는 수액이
깨어질까 조마조마하다
봄꽃이 수액을 타고 흘러간다
먼 길을 돌아
강어귀에서 바닷물을 만난다
꽃잎도 하나도 힘에 겹다
욕심인들 무거워
마음에 걸어둘 수가 있나
2
손차양을 하고
바라보는 건너 산
봄 햇살이 튀어 오른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봄볕을 모아
한 입씩 떠먹을 때마다
하나 남은 앞니가 반짝인다
봄꽃은 빨리 진다는데
봄이 지나가는 길로
그대로 따라가고 싶다
따라가면 따뜻할 것 같다
차암
꽃도 많다
후일에 다시 보고 싶은
상 추 꽃
날씨가 몹시 더운 날은
아지랑이가 보이거나
가끔은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헛것처럼 보이는
노란 꽃더미
꽃대 하나에 목숨을 걸고
와르르 매달려 산다
예전에 무슨 꽃이 피었던 자리일까
혹은 거기에서 나서 거기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꽃
누가 버렸을까
쏟아지는 햇볕을
그대로 맞고 서있다
말벗이라도 있어야겠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알은 체를 해야
체면이 설 것 같은
꽃
내가 돌아설 때 쯤
말을 걸 것 같다
텃밭이라야 제자리일 것 같은
꽃
가끔은
치매에서 되돌아오게 한다
초여름 땡볕이
꽃잎에 매달려
여름 감기를 앓고 있다
구름 속으로 우르릉
비행기 지나갔다
초 승 달
1
초사흘이나 초나흗날의
우물 속
금가락지 하나 빠져있다
들여다 볼 때마다 조금씩 닳아
이제 반만 남았다
2
여인이
다리를 외로 꼬고 앉아 있다
연필로 선을 그리다가
둔부의 선만 남기고 멈추었다
나머지는 가렸다
가린 것 보다
더 많이 보여주는
3
서릿발이 솟았다
얼음이 터지면서 비명이 났다
칼끝이 살코기에 박힌다
살치살의 마블링이 선명하다
4
낫을 벼린다
바닷물이 일렁이면서 날을 세운다
옛날 옛날부터
낫은 벗은 채 서있다
임 관 혁
봄이 오면․나의 삶
주저앉은 꽃에게․겨울밤
뻐꾹새․꽃반지․통일벼
탈춤․뿌뜨리․화진포․못 잊어
봄이 오면
돋아라
풀싹이여
봄비 속에
자라라
풀잎이여
봄안개 속에
피어라
풀꽃이여
봄바람 속에
익어라
풀씨여
봄날 속에
나의 삶
때로는 아픔으로
내 어깨 넓이만큼으로
사는거다
때로는 괴로움으로
내 눈높이만큼으로
사는거다
때로는 슬픔으로
내 발폭만큼으로
사는거다
때로는 눈물로
내 가슴 깊이만큼으로
사는거다
때로는 사랑으로
내 지고 가는 힘만큼으로
사는거다
때로는 헤어짐으로
내게 주어진 만큼
사는거다
주저앉은 꽃에게
밟히고 밟힌
상처 딛고
마음에 상처 딛고
일어나라
일어서라
바람에
봄바람에
눈물 말리며
일어나라
일어서라
가뭄에
봄가뭄에
눈물 뿌리며
일어나라
일어서라
힘 있거든
죽을 힘
그 힘 있거든
일어나라
일어서라
겨울밤
어둠이 싫어
어두운 밤이 싫어
얼마나 많은
촛불이 죽어갔는가
부엉이 우는 밤
별들이 죽어버린 밤
또 얼마나 많은
촛불을 더 밝혀야 하는가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리고
아직도 새벽은 오지 않는다
잠 못 드는 자여
깨어 있는 자여
새벽이 올 때까지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촛불을 밝혀라
새벽은 온다
새벽은 반드시 온다
영원한 어둠은 없다
뻐꾹새
우네
피라고
꽃 피라고
우네
오라고
봄이 오라고
우네
진다고
꽃이 진다고
우네
간다고
봄이 간다고
우네
쉬도록
목이 쉬도록
우네
가도록
산천이 떠나가도록
우네
가도록
이 한몸 다가도록
우네
뻐꾹새는
우네
꽃반지
좋아라
묻어둔
황금반지보다도
좋아라
숨겨둔
은반지보다도
좋아라
던져버릴
백금반지보다도
좋아라
끼고 있을
꽃반지가
좋아라
통일벼
왜 심어야 하나
죽어간 이를 위하여
왜 심어야 하나
살아가기 위하여
왜 심어야 하나
하나 되기 위하여
왜 심어야 하나
내일을 위하여
탈춤
어둠 앞에
헛기침은
탈춤의 웃음이란다
헛다리 한번 짚고
곰방대 빨고 나면
웃음도 허허
헛기침을 닮아간다
비뚤어진 입
못 다물면
웃음도 허허
옷고름에 밟히고
갓꼭대기야
삐뚤어져도
양반은 허허
헛기침을 해대고
짚신이야 벗겨져도
상놈은 허허
헛기침을 해댄다
뿌뜨리
별나라 간 오빠
달나라 간 언니
앞서 보낸 아버지
날 낳으시고 지은 이름
뿌뜨리 뿌뜨리
용케도 살아난
내 이름 뿌뜨리
나는
나는 죽어
꽃으로 피면
애달픈 그 이름
뿌뜨리꽃 이름으로
오가는 세월도
붙잡고 살란다
화진포
그 강물
좋더라
밀려오는 물결
밀리어가는 물결
하얀
그 하이얀
물꽃으로 피는
화진포
그 강물이
좋더라
못 잊어
내 어이
아니 잊어
못 잊고
내 어이
못 잊어
아니 잊고
내 어이
두고 두고
아니 잊고
내 어이
못 잊어
아니 잊고
내 어이
잊었다
못 잊었다
얘기 하리
김 여 선
가을은․겨울나무
늦가을 주산지․밀려나기
만휴정․영천 가는 길
소나기․봄날의 설계도․이팝꽃
|시인의 말
사람의 이름을
자주 잊어버린다
얼굴은 어슴프레하게 떠오르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4월
프랑스 작은 시골이 생각나는
‘프로방스’란 이름의 찻집에서
식은 커피를 마셨던
얼굴은 어슴프레하게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밖에는 벚꽃들이 꽃비로 내리고 있는데
가을은
가을은 그리움을 안고 온다
잊고 있던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는
가을은 그리움을 안고 온다
하늘을 본다
구름은
백조의 깃털이거나
물고기의 비늘이거나
양떼들의 평화로움으로
하늘을 떠다니는
가을 구름은
그리움을 안고 온다
가을은 그대를 위해 온다
잊고 있던 시집의 먼지를 터는
가을은 그대를 위해 온다
산길을 걷는다
주산지로 떨어지는
밤 한 톨
낙엽 한 잎
도토리 한 알
물속에 잠기는
가을 물그림자는
그대를 위해 온다
겨울나무
누군가 가슴에 품는다는 게
두려울 땐
그리움을 다 덜어낸
겨울나무로 서 있고 싶다
살점을 다 발라낸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은 쉽게 빠져 나간다
쉽게 만나 헤어지는 사람들처럼
쉽게 빠져 나간 바람은
짐승의 쇠울음을 운다
골수를 다 빼낸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은 더 세게 불고
늦가을 주산지
가을을 다 보내고
삶이 모서리를 드러내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왕버들 마른 가지 사이로
지난 봄 싹 틔운
연둣빛 사랑의 그림자가
지난 여름 잎 키운
초록빛 사랑의 흔적들이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주산지 차가운 물 속에
그리움으로 쌓인다는 걸
가을을 다 보내고
낙엽들이 칼국수로 풀어지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그리움을 수장(水葬) 시킨
오후 햇살은
산능선을 쉽게 넘어가고
아무 일 없는
산골짝의 바람은
잔물결을 일으킬 때
우표로 쌓이는 낙엽들만
늦가을 주산지에서
그리움들을 전송하고 있다는 걸
밀려나기
보름달이 뜬 성탄전야
식구들은 모두 모임에 가고
거실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신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레드 와인을 마셔야 하는데
보름달은 어느 새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서 있는
십자가 꼭대기에
종 하나로 매달렸다
긴 두루마리 휴지로 풀어지는
달빛 닮은 막걸리는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고
또 한 잔의 막걸리에
성탄절은 다가오고
보름달은 서쪽으로 넘어가고
만휴정*
만휴정 오르는 길
갈대의 시린 발가락 사이로
개울 물소리 토르르토르르
나뭇가지 사이로 나르는
작은 새소리 푸르르푸르르
마지막 담배 연기 속
겨울 햇살이 후르르후르르
사람들이 사라진 만휴정
흘려 가지 못하고 얼어 버린
각을 진 얼음처럼
사랑도 떠나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굳어 버리는 거
겨울 만휴정에는
떠나지 못한 그리움들이
폭포수 아래 얼음으로 얼었다
* 만휴정: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아담한 정자.
영천 가는 길
겨울 오후 햇살은
유리창 틈으로 스며들어
비스켓 소리로 바스러진다
직행버스의 덜컹거림으로
흩어지는 햇살
금방이라도 산 아래로
숨어들 것 같아 불안하다
속살 다 보이는
활엽수들의 거친 피부
메마른 건조증을 앓고 있는
허벅지 사이로
슬쩍 스며드는
겨울 오후 햇살
영천 가는 길
실크로드처럼 구부러진 길
의성 지나 금성
어두워지기 전에는 도착할까
버스정류장 마다
일수꾼처럼 찾아가는 직행버스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덜컹거리는 버스의 뒷좌석이 불안하다
심호흡 고르면 잠시 쉬었다가
또 출발
한 번쯤은 직행버스를 타고
가슴에 쌓여있는 응어리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덜어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소나기
소나기가 내릴 때는 잠깐이더니만
물이 바다까지 흘러가는데는 한참이더이다
당신과 만남은 잠깐이더니만
그리움이 가슴속까지 흘러가는데는 한참이더이다
봄날의 설계도
창밖엔 벚꽃이 눈부신데
내 봄날의 설계도엔 벚꽃이 없네
양지바른 밭둑의
냉이 한 소쿠리
바람 부는 빈 들판의
씀바귀 한 웅쿰
푸른 겨울을 견뎌낸
쪽파 한 단
내 봄날의 설계도엔 벚꽃이 없네
텅 빈 테니스장
빈 벽에 공을 치면
친 속도만큼 되돌아오는
내 봄날의 설계도엔
흙 내음의 냉이와
씁쓸한 씀바귀와
아린 쪽파의 향기가
그려져 있네
이팝꽃
가마솥처럼 휘어진 길에
이팝꽃이 피었다
쌀밥 가득 채워진
그 길을 달린다
입하에 피는 꽃 이팝꽃
쌀밥 닮은 꽃
아기의 배는 고파도
엄마의 하얀 젖이 나오지 않던
입하 무렵 피는 꽃
아팝꽃들이 길가에
하얀 쌀밥으로 채우고 있었다
김 진 회
돌연변이 연작 9․돌연변이 연작 10
돌연변이 연작 11․돌연변이 연작 12
돌연변이 연작 13
|시인의 말
행복한 날보다 우울한 날이 더 많은 건,
기쁜 날보다 슬픈 날이 더 많은 건,
아직도 사랑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날들 중
나는 오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연변이 연작 9
- 이미 죽은 나는 아직도 네가 그리워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시간은 흐르는 법을 알면서
거스르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간이 동반한 죽음
이미 죽었으면서도 시를 쓴다.
네가 나오는 시를 쓴다.
시 속에 우리는 행복은 하고
시 속에 우리는 사랑은 하고
수없이 하고 또 하지만
네가 나오는 시 속에
나는 자꾸만 죽는다.
이미 죽은 나는
아직도 네가 그리워 시를 쓴다.
돌연변이 연작 10
나는 너무 빨리 핀 적목련이었다. 겨울에 핀 붉은 꽃
들이 겨울바람에 떨며 떨어진다.
봄꽃이고 싶었어요.
봄을 가장 먼저 알아보듯
나는 단지,
당신을 알아보는 붉은 날들이고 싶었어요.
너무 일찍 핀 꽃잎들은
먼저 떨어진다는 사실은 잊은 체
나는 단지,
당신이 반가워 먼저 핀 꽃잎일 뿐이었어요.
돌연변이 연작 11
시가 되지 못한 날, 내 시체와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
며 울고 싶은 날이 있다.
시가 되지 못한 날들이
내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날이면
나는 죽은 내 시체를 보고 싶다.
시체와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며
지독했던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시 쓰는 아들이 부끄러운 아버지와
집안 가득 서린 우울의 내력에 대해
밤마다 읊조리던 어머니와
발을 찾지 못해 아직도 떠나지 못한
내 지난 사랑에 대해
몸 여기저기 새겨 넣으며
울고 싶은 날이 있다.
잔을 가득 채운 언어들이
출렁이는 날
깊게 잠 든 내 시체에
시가 되지 못한 언어들을 새기며
떠나지 못한 언어들을 위해
울어 주고 싶은 날이 있다.
돌연변이 연작 12
죽은 내가 당신에게 오늘도 편지를 쓰는 건, 아직 사
랑하지 못한 날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 속에서 이미 나는 죽고 없고, 시간 속에 당신은 언제나처럼 밝은 표정으로 웃습니다. 내가 당신의 미소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던가요. 없었다면 지금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 당신의 미소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만들 어 놓은 사랑의 죽음에 당신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잡히지 않는 시간을 쫓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당신이 없는 하루는 너무 길어 나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오늘도 지고 맙니다. 초침을 박아 놓은 심장에서는 아 직도 붉은 피가 흐릅니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아도 심장이 움 직이지 않아도 시간은 당신을 데리고 멀어져만 갑니다.
죽은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사랑한 시간이 이별한 시간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 연작 13
그때서야 이별을 하겠어요.
이별은 목련이 지고서야 하겠어요.
버선 대신 목련꽃잎 신고 간 사람은
봄에 다시 돌아온다 했죠.
이별은 봄이 되어서야 하겠어요.
꽃잎 밟고 떠나간 사람은
비 닿은 발자국 따라 돌아온다 했죠.
강 희 동
고려장(高麗葬)․십구공탄
입춘가관(立春可觀)․흔적
이천십육 년 설날․새날 눈길을 걸으며
아프지 말아요․회귀․둥지․건강검진
|시인의 말
어매 아배는 이제 영 기력이 없다.
나도 엇비슷한 속도로 따라 가고 있다.
아배 어매가 치루어야 할 통과의례를 기다리는 듯
내 삶도 나이테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바쁨 안에서도 무상함을 맛본다.
꽃이 지고 씨방이 부풀어 열매가 익듯
서라지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그래왔듯이 또 그렇게 흐르는
순리에 깃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고려장(高麗葬)
또 안동 갔다 왔다
시들어 가는 부모를 요양원에 넣을
궁리를 하며 모두 모였다
가기 싫어하는 영 내키지 않는
힘 다 빠진 부모를 구슬려 요양원을 견학 시키고
할배 제삿날 여럿 모여 결정하자고 하고
돌아오는 서울 길에 비가 내렸다
보슬보슬 창을 두드리는 봄비
어매는 쪼그라들고
부슬비 속에 갓 피우는 벚꽃은
젖어 저절로 고개 수그린다
아배의 말씀에는 기력이 없다
‘그럼 하자는 대로 하지 뭐’
팔십 중반을 훌쩍 넘은 빛바랜 늙은이들
옹기종기 모여 양지쪽 볕을 쪼이고
요양 보호사의 밝게 헤헤거리는 요양보호 아래
몇은 아예 퍼질러 앉아 힘없는 눈길 보내는 봄날
현대판 고려장
내키지 않는 귀로 착찹함 속으로
옛집 마당에
봄비가 적신다.
십구공탄
내 뜨거움 모두
그대에게 줄 수 있어
가볍다.
내 무거움 세상에게
모두 태울 수 있어
뜨거웠다.
그리고 버려져
진솔한 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입춘가관(立春可觀)
편안한 동쪽의 나라 안동(安東)에서
시들시들 저물어 가는 어매를 보면서
나도 시든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봄볕에 말라가는 땅거죽
또 봄꽃이 피면 뭐하노
어매는 저리 말라 시들어 가는데
내려갈 때 입 다문 매화 산수유
올라올 때 꽃잎 벌어져 난리다
그야말로 춘광이 어지러이 방사를 즐기는 봄
온 밭둑에 엉키던 칡만 한 자루 캐어 왔다
利 no 無 세상
남는 거 없는 세상에 질퍽거리며
꽃 피는 눈치나 보는 나는
도대체 뭘.
흔적
늦은 너에게 편지를 쓴다
아직까지 젖어있는 나를 보낸다
추운 겨울밤에도 얼지 않는
따스함을 보낸다
언젠가는 녹아 물이 되어 흐르는
머무르던 사간의 흔적을 보낸다
다 보내고 이윽고 남아도는
눈물자국 같은 흔적 따스했던 눈빛
그것을 사랑하리라
겨울이 앙탈을 떨지만 봄은 항상 멀지 않았음을
달력의 숫자가 알려 준다
봄은 어디쯤 어정거리고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는가.
이천십육 년 설날
그래 설이다
덜 익어 낯설은
설익은 설이다
마법처럼 날이 새고
엄숙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의식과 절차 속에
보여주기 위한 가식을 섞어 차례를 올리며
산 자와 죽은 혼의 상견례를 치룬다
죽은 조상 혼백 더불어 병풍치고 돌아앉아
살기 위하여 죽은 조상의 음식을 먹으며 복을 나눈다
이미 황천길 오래 전 지나간 영혼을 불러
흔적 없는 숟갈질 곁눈으로 보고 그래왔듯이
그래야만 하는 부질없는 차례를 올린다
차라리 검불보다 더 가벼운 어매를 한 번 더 안아 주랴
이제는 숨 쉬는 애착도 슬며시 놓아버리고 가끔씩
희미한 기억을 드러내는 쇠잔한 어매의 기력 앞에서
훅 불면 꺼질 숨소리 들으며 걱정스런 설날
그래 오방색 섞던 설이다.
새날 눈길을 걸으며
색동 치마저고리
음양유양음(陰陽有陽陰)
양음무음양(陽陰無陰陽)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다복
다복
눈 밟는 소리
복 짓는 연기
복 퍼주는 소리
올해도 제 자신 속이고
들키면 큰일 날 일들을 숨기고
발걸음 낮추어 걸어가는
눈길
다복다복
뽀드득 보드득.
아프지 말아요
어매에게
아프지 말아요
내가 술에 취해 몽한 사이 당신은
마늘밭 고랑 쑥대처럼 살아올라
부디 아프지 마세요
살짝 스치고 지나는 봄바람에도
칼집 넣은 아픔을 간직한 외로움이
봄풀 되어 멍이 들어 풀빛 오르네요
이제는 잊혀진다 해도 서럽지 않아요
오랫동안 머무른 이야기와 사랑이
고여 마음 깊이 샘이 되고 눈물이 되어요
이제 떠나도 제발 아프지 말아요
탯줄을 끊고 떨어져 마주하는 순간부터
떠남을 준비하는 슬픈 별의 이야기
이별을 따려고 평생 밤 동안 바람은 서럽게 울었고
마침 별똥별이 되어 사라진다는
별들의 슬픈 이야기를 이제야 알듯 하네요
흐린 날 뜨지 않는 별처럼 그냥 그렇게
어둠 속에서 빛나지 않아 차라리 보이지 않는
솜은 별이 되세요 그리고 갈 때 가더라도
부디 아프지 마세요.
회귀
올라 왔다
또 한 번
나이테 그리는 의식을 치루고
밥집도 문을 닫은 설 이튿날
텅 빈 도시 꽉 찬 욕망
또 날은 새고 있다 귀경
속지 않기 위하여 나를 속이고 있다
마당을 지나 집 삽짝 앞 마지막 배웅을 하듯
따라나선 어매 아배는 어서 가라고
먼 손사래로 오래 서 있고
나는 몇 번이나 아주 오래 보지 못할 것 같이 뒤돌아보며
오래 전 부터 휘어 굽은 고샅을 돌아 나왔다
제 태어난 자리 지키는 연어의 회귀
돌아갈 묫자리까지 정해 두고
어정쩡 드문드문 위치도 흘리시는
귀도 눈도 어둑한 아배와의 대화
묘한 느낌으로 쫒기듯 올라오는 고속도로
정, 다정도 병이다 병도 다정하다
그래도 친하지 말아야 할 병
그런 날이었다 이번 설은.
둥지
새는 살기 위해 둥지를 틀고
바람은 둥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무를 흔든다
새의 둥지와 나무와 바람의 조화
살기 위해 집을 짓는 새는 본능이다
팔기 위하여 집을 짓는 나는 장사이다
둥지, 보금자리에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위한 본능의 발버둥
나무에 둥지를 트는 새는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천적으로 부터 벗어나려 나뭇가지에
무허가 집을 짓고 창공을 나르는 새의 비상
뻔뻔스러운 자유 새의 무단침입
인간은 구속되기 위하여 관계를 맺고 결속을 다진다
자유를 버리기 위해 너를 만나고 둥지를 튼다
장사를 위하여 집을 짓는다.
건강검진
빈 뜰
새는 그림자 없이 날아
창공을 비워내고
나는 허전한 하늘 쳐다 본다
또 공일
날아서 어디로 가나 철새
바람이 새를 따르고 새는 바람 사이로 나른다
차운 하늘 가운데에도 쉬어 갈 곳 있는가
땅 위에 지친 영혼이 하늘가로 모여
겨울하늘이 저리 차고 눈 시리다
부질없는 일에 불붙이고 따스함을 기다리는
쓰레기 소각장 근방
나는 연기 풀풀 날리며 오래 동안 걸치고 온
남루한 옷을 벗어 태운다
쇠기러기는 브이자로 하늘 비워내고
지상에서 오르는 연기 따라 내 남루함도 따라 나선다
그대여 기대하지 마라 나는 오늘 건강검진 받으며
홀라당 벗은 신체의 속까지 들여다 보았다
멀쩡한 육체와 정신에 금이 간 도시의 사내
건강을 검진하였다
권 기 태
바람
안막골 식당
바람
1
바람은 눈꽃이 핀 혹한의 골짜기를 달려와서
하늘에 한맺힌 사연을 뿌리고 사라졌다
바람은 은사시 소나무 둥치를 부러뜨리고
파도에 떠 있는 사내의 심장을 휩쓸고 갔다
바람은 상여를 메고 앞소리를 지르며 숲속을 떠돌다
얼어붙은 개울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사라졌다
바람은 불면의 밤을 몰아 와서 하늘을 가르고
심장을 창으로 찌르며 피를 마시는 악마가 되었다
2
바람은 실버들 가지 끝에 잎눈을 틔우고 지나다가
벚나무 가지에 맴돌며 연분홍 꽃을 피웠다
바람은 복숭아밭에서 진홍색을 진하게 칠하며
산맥을 타고 들판으로 파란 옷을 입히고 있다
바람은 우리들 가슴에 환희의 깃발을 날리다가
오늘은 아픔을 더하는 온몸에 비가 내리게 한다
바람은 정수리를 타고 내리는 땀이 되고 눈물이 되어
지는 꽃잎에 애정을 지우며 분노의 태양이 뜨게 했다
3
바람은 여인의 옷깃에서 고운 색으로 물들어 오고
봄은 아내의 치맛자락을 타고 돌아오고 있다
바람은 꽃향기 한 아름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속살이 풍만한 여인의 옷 속을 비집고 들었다
바람은 사랑과 배신의 열정으로 모였다가 흩어져
숲속의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샘물이 되었다
바람은 희미한 촛불을 끄며 하얀 연기로 사라지고
격렬한 파도로 밀려왔다가 고요한 호수로 사라졌다.
안막골 식당
자주 가던 술집 안막골 식당
메뉴는 막소주 막걸리 각종 안주다
맞춤 정식 국수 비빔밥도 있다
동동주처럼 구수한 안씨 아줌마는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양념을 갖춰 내놓는 각종 안주 맛은
찾아오는 사내들을 사로잡아
평일보다 비오는 날이면
공치는 막노동판 너나들이들이
하루를 때우려고 모여들어 성업이다
몇 순배 술잔이 돌면
시내에서 근간에 일어난 뉴스 거리가
하나 둘 등장하여 토론장이다
시끌시끌한 잡담 속에 진담 반 농담 반
더러는 땅뙈기 흥정도 하고
홀애비 생과부 중매도 이루어진다
거나하게 취하면 육자배기 노래도 나오고
안 씨는 외상값 수금에 열을 올려
없으면 외상이고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낸다
동전 고리 한두 병은 덤으로 주기도 한다
'글밭 기발간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밭 42집 2017년도 상반기 (3) | 2024.07.13 |
---|---|
글밭 41집 2016년 하반기 (4) | 2024.06.03 |
글밭 39집 2015년도 하반기 (4) | 2024.04.10 |
글밭 38집 2015년도 상반기 (2) | 2024.03.20 |
글밭 37집 2014년도 하반기 (0) | 2024.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