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 39집 2015년도 하반기

저 언덕 넘어 2024. 4. 10. 10:30

우리들의 말

  동인지 39집을 낸다. 1969년에 창간호가 나왔으니까 올해로 46년째, 『글밭』에 시의 씨앗을 뿌린지 어언 반세기가 가까워오고 있는 셈이다. 나무로 치면 잎도 무성하고 한창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 호를 내면서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자화자찬이 되겠지만 전국의 유수한 동인지들이 단명을 하는 현실에서 이만큼 지속적으로 동인지를 내어 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은 웬만한 끈기와 저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꾸준히 글을 내어 주신 동인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누구나 한 때는 문학을 꿈꿔 왔지만 평생 이렇게 시와 함께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시를 버리고 싶을 때에도 정기적으로 작품 제출 독촉이 오고, 그래서 시를 놓지 못하게 했던 것이 바로 글밭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동인지 내는 일을 누구도 그만 둘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를 단절시키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밭은 이제 하나의 동인지를 넘어 인격체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46년이나 된 나무라면 한창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때이지만 과연 오늘까지 우리 글밭이 연륜에 걸맞게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물론 문단의 흐름과도 관련이 깊다. 동인지하면 최초의 문학동인지는 1908년 소년, 최초의 시 동인지는 1924년 장미촌 정도로 언급되고, 그 이후의 동인지 활동에 대해서는 관심 밖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와중에서도 70~80년대에는반시를 비롯한
몇몇 동인지들이 문단의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동인지의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고 끝나버린 한계가 있다.
  더욱이 이 시대에는 수많은 문학 월·계간지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까 굳이 동인지를 내지 않아도 발표 지면 확보도 쉬워졌고 문학지들도 자신들의 문학지 출신끼리만 작품을 공유하는 소집단화, 어쩌면 동인지 성격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해서 동인지가 주목 받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 가운데서도 올해에는 중앙의 문학지 두 곳에서 글밭 동인지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하고 동인들에게 원고청탁이 쇄도하는 등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학적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내년이면 40집을 내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연륜 보다는 그동안 우리가 어떤 문학적 성과를 이루어 왔는가를 반성하는 엄숙한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최근의  글밭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앞으로의 우리 동인지에 대한 작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한 만큼 내년부터는 연륜 뿐만 아니라 좀 더 치열한 시정신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우리 문단이 본격적으로 주목하는 동인지가 될 수 있도록 각오를 단단히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들의 말  3

김 지 섭
비정규직 12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부쳐 13
내 고향은 14

임 관 혁
엄마 꽃 16
은행잎 17
가을엽서 18
살아가기 19
지는 꽃 20
낙엽의 노래 21
파스 22
양파가 하는 말 23
그 바다 24
바위 25

권 기 태
축제의 그늘 28
가을에 부는 바람 29
검정 고무신 30
강가에서 31
상해보고 32 

김 진 택
내 친구 소뿔이 36
가난한 새벽 37
시시한 시 38
검사와 여선생 39
가을 저녁 40
그 사람 41
술질 42
이별 43
꿕 사장 44

천 승 현
나이 48
배롱나무 꽃 49
숲이 되고 강이 되고 50
시간의 걸음 51
출근길 52
외로움 53
고속버스터미널에서 54
섬 55
섣달그믐 56
시월의 밤 57

임 두 고
궁색함에 대하여 60
나무 62
바둑 64
사별의 기호 66
소설 ‘아우라’ 68
안동 71

이 위 발
꽃의 의미 76
기억의 집 77
상주의 미소 78
보고 싶다 80
송어는 알고 있다 81

강 희 동
서각선생 84
나의 시는 85
벽공(碧空) 86
응보(應報) 87
두릅을 꺾으며 88
탄도항 89
소리에 대한 변명 90
고사리를 꺾으며 91
공황(恐慌) 92
아침이슬 93
경계측량 94
집짓기 95
공구리를 치고 96

김 윤 한
빵나무 98
토란잎은 젖는다 99
객귀 100
나무젓가락 101
간월암 102
일장춘몽 103
나팔꽃 104
폐선장에서 105
양말 벗으며 106
세월은 간다 107
소맥을 위하여 108
선미에서 109

김 여 선
몸살 112
능소화 113
감은사지에서 114
바위와 버팀목 115
그 해 여름 116
길 118
용계 은행나무 119
귀뚜라미 120
국시 꼬랑지 121
씨앗처럼 122

강 수 완
두루종가 뚝향나무 앞에서 124
멜론 125
미국 쑥부쟁이 흰 꽃 126
암산 유원지에서 생각하다 127
왔구나, 산국 128
제주를 읽다 1 129
제주를 읽다 2 130

김 미 현
삶의 경계 132
칡꽃 향기 133
야간 버스 134
칼국수 한 그릇 135
새벽길 136
느티나무 아래 137
고구마꽃 138
마음의 달 139
쑥부쟁이에게 140
호박처럼 141

김 진 회
돌연변이 연작 1 144
돌연변이 연작 2 146
돌연변이 연작 3 149
돌연변이 연작 4 151
돌연변이 연작 5 153
돌연변이 연작 6 155
돌연변이 연작 7 157
돌연변이 연작 8 159
 

전 대 진
욕실의 살인자 162 
루비 163 
붉은 점 164
초 165 
술 먹으러 가자 166 
간접흡연 167

2015년 월간 詩文學 4월호 글밭 동인 특집 169
글밭 略史 190








김 지 섭

비정규직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부쳐
내 고향은

|시인의 말
어룽지는 눈물 너머로 아른거리는 내 어머니
더 큰 고향은 말없이 내려다보는 가뭇없이 높은 저 하늘
아니 그보다 더 큰 고향은 수 억 광년을 날아오는 먼 먼 저 별빛




비정규직

환한 대낮
부신 하늘 한편에 떠있는
파리한 얼굴의 낮달이거나

밝은 햇살이 눈부셔
어둑한 굴속에 웅크렸다가
먹이를 찾아 해매는
밤짐승의 빛나는 눈빛이거나

바람마저 얼어붙은 겨울 밤
마른 풀 위에 떨어지는 달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서릿발 눈물이거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부쳐

임이시여
저 강을 건너지 마오

아무려나 그게 어쩔 바이 없는
당신의 길이지만

나는 이제 그날까지
이 강가를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이 되려니




내 고향은

정든 땅 언덕 위
바람벽도 허물어진
그 기억 속의 집
아니
어룽지는 눈물 너머로
아른거리는 내 어머니
더 큰 고향은
말없이 내려다보는
가뭇없이 높은 저 하늘
아니
그보다 더 큰 고향은
수 억 광년을 날아오는
먼 먼 저 별빛








임 관 혁

엄마 꽃ㆍ은행잎ㆍ가을엽서ㆍ살아가기
지는 꽃ㆍ낙엽의 노래ㆍ파스
양파가 하는 말ㆍ그 바다ㆍ바위

|시인의 말
올 가을도 풍년이다
나도 조금은 수확을 거두었다
서울 지하철역 승강장 게시 시 공모에 귀로가 당선되어
용산 매미에 이어 두 번째 게시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엄마 꽃

갈대처럼
흔들리다가
부는 바람에
흔들리다가
넘어질망정
흐느끼며 울망정
밤 새워 울망정
꺾이지는 않았다
이 악물고

억새처럼
부대끼다가
부는 바람에
부대끼다가
자빠질망정
흐느끼며 울망정
날 새워 울망정
꽃을 피웠다
사랑으로




은행잎

빛 바래지 않는
기다림
가는 날까지

빈 가슴
가슴 채워
사랑으로 두고

갈피에
작은 흔적
남겨 두고 가리라

물레방아
물 따라
돌고 돈다
가는 세월처럼

쉬지 않고
돌고 돈다
오는 세월처럼

빙글 빙글
돌고 돈다
오가는 세월처럼




가을엽서

산머리에
억새꽃
피어나고

힘겨운 나뭇가지
바람결에
짐을 내려 놓는다

은행잎은
기다림에 지쳐
몸져 눕고

단풍잎은
타는 가슴
불씨로 남아 있다




살아가기

사막길 갈 땐
낙타가 되고

정글길 갈 땐
악어가 되고

땅길을 갈 땐
코끼리가 되고

하늘길 갈 땐
참새가 되라




지는 꽃

꽃은 진다
부는 바람에
꽃은 진다
오늘도
내일도
먼 내일도
먼 먼 내일도
꽃은 진다



낙엽의 노래

나는 간다
다 버리고
다 잊고
나는 돌아간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길로
나는 간다

두고 두고 못 잊을
눈빛을 두고 두고
나는 간다
나는 돌아간다




파스

아프단다
어깨가
파스 한 장
붙이고 싶단다
그 힘든 삶의 세월
파스 한 장 붙이면
아픔이 갈까
눈물이 난다
지난 세월
아픔에 파스 한 장
못된 내가
참 후회가 된다




양파가 하는 말

한 겹
두 겹
내 속 껍질
다 벗겨보아라
하이얀
내 마음은
오직 한마음이다
긴 겨울 견디어 온
나의 인내
둥글디 둥근
나의 사랑
티 없는
나의 속마음
보아라
시커먼 가슴이여
나를 닮아라
나처럼 살아라




그 바다

꿈이었네
그 바다

깨어진 꿈이었네
그 바다

아픔이었네
그 바다

설움이었네
그 바다

후회였네
그 바다

눈물이었네
그 바다

피눈물이었네
그 바다




바위

운다
바위도
때로는

운다
바위도
남몰래

운다
바위도
소리내어

운다
바위도
숨 넘어가도록








권 기 태

축제의 그늘
가을에 부는 바람ㆍ검정 고무신
강가에서ㆍ상해보고


|시인의 말
  맑고 아름다운 가을이면 참 좋을 터인데 올해 가을은 비가와 엉성하고 삭막하며 혼란스러운 계절이다.
  한 달 여 가뭄 이후에 내리는 비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을 주고 평안함과 시원한 감을 주고 있으나 갑자기 닥쳐온 한파가 또 체온을 빼앗아 가는 첫 추위로 쓸쓸하기만 하다. 호감이 가는 일이나 즐거움이 없는 일상을 가꾸어 보려는 욕심이 부족한지 늘 잃어버린 것을 찾아 끙끙거리는 강아지 신세이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적으로 일상을 가다듬기가 무척 어려워 잘 하는 것도 잘 되는 것도 없다.
  동인 회원의 원고 독촉에 미흡한 시 몇 줄을 적어 뒤늦게 보내게 되니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리 없다.
  늘 근심 걱정이나 하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나마 몇 줄 적어 위안으로 삼으려 한다.
  살아가는 활동이 늘 즐거워야 하나 그렇지 못해 외롭지만 홀가분하게 자연을 벗삼아서 다정하게 사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한다.
  현실을 사랑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나의 노력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축제의 그늘

동에서 평화가 오고 아침이 열리는 고장
일손 모아 가꾸고 나누던 삶터의 혼이
살림살이 넉넉하고 물상이 풍성하니
모으고 아끼고 사랑하던 마음이 떠나서
먹고 마시고 놀아보는 풍자 한마당
강변 둔치에서 광대들 가면극 놀이 한다

지구촌 몇 곳에서 가면 춤꾼 모여 들고
온 동네 마을마다 풍물소리 요란하나
우리네 가락은 지워지고 엿장수 따라지
어디서 나타난 십년 전 구물 상품들
푼돈을 털어가는 뜨내기 상인의 아우성
나물국에 밥 한술 말아주는 개죽식당들

온 동네가 혼이 빠져 먹고 마시는데
열흘 동안 흥청망청 놀고 노는데
우리는 칠하고 광내는 일에 지쳐 있고
뜨내기 잡상인만 떠들썩한 빈 마당
열흘간의 축제나무에 개살구가 열리어
민심이 떠돌다 가는 시가지 골목도
변절기 강변 장마당도 바람이 싸늘하다




가을에 부는 바람

잎들이 우수수 지는 아스팔트 위에
바람은 곡예를 부리며 지나가고
나는 애달픈 노래 부르며 걸어
군중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 지친
남은 잎들은 타원을 그리며 진다
하늘에서 몰려오는 서릿발 소리
귀뚜라미들 돌 틈에 숨어들고
울타리 넘어 텅 빈 세월의 뜰에
칠십 년 기다린 형제 소식 궁금하다
흩어진 혈육 만나기를 기다리며
가을의 뜰을 쓸고 있는 노인들
북방에서 청둥오리 한 무리 날아
찬바람 소리 일몰을 재촉하고
설레는 기다림도 애통한 마음도
까맣게 타버린 잊어버린 기억들
한 생에 지우지 못하는 아픔 위에
기약 없이 만나자며 손을 들어
언젠가 다가올 긴 시간에 기대어
화해의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새 움이 돋아나는 계절이 오리라
지금은 흩어진 낙엽을 쓸어 가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바람이 차다.




검정 고무신

국민 학교 입학 때 사주신 고무신
맨발로 다니다가 발에 걸치니
새 신은 발보다 커서 터덜거려도
으슥하고 상쾌한 마음 잠을 설쳤다
벗어들고 개울을 건너서
숲길에는 발에다 고무줄로 묶고
오솔길에는 아끼려 벗고 다니던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옆에 끼고
애지중지하며 학교 가던 길
십오 리를 삼 년 동안 걸어 다녀
발바닥이 닮아서 발가락이 나오고
진흙길에 질컥거리던 신발
오팔 년 초가을 엿장수 오는 날
가윗소리에 아이들 몰려들고
엿으로 바꿔 먹은 구멍난 고무신
정들었던 헌 신짝을 떠나보내니
달콤한 입맛은 잠시 뿐이고
사줄까 하는 걱정과 보낸 그리움
허리 굽은 어머니가 사주신 고무신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간 오늘도
고무신 구멍에 어매 얼굴 아른하다




강가에서

강가에서 수면에 얼굴을 비추면
칠십의 연륜이 주름져 흐르고 있다
물살이 출렁이는대로 일그러져
억울함과 분함이 넘쳐 비참하다
당하기만 하고 당당하게 피지 못한
눈비 속에 바람을 맞으며 걸어온
따스한 사랑이 그리워하던 유년기
허기를 메우느라 꿈을 접은 젊은 날
처자식을 위하여 땀 흘린 장년시절
바른 길에서 검은 유혹에 시달리고
흑백에서 고독한 시간을 인내하여
물 위에 가랑잎을 타고 다니며
파도에 시달려 고단한 모습으로
호수 위를 걸어 살아온 나날들
이제 쇠락한 몸으로 자양분을 찾아
되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자식도 제 갈 길을 떠나고
바람난 여인도 어딘가 사라지고
친한 벗 하나 둘 세상 떠나니
홀로 호수에 주름진 얼굴을 비추며
구름과 바람과 물을 따라 흐른다.




상해보고

팔월 중순 구름이 하늘을 덮은 날
응봉산* 덕풍 계곡 벼랑 길 1100m
개울 건너려다 돌부리 차고 넘어져
손목이 부러지는 돌발사고가 났다
부러진 손목이 좌우로 기울었다
싸릿대를 꺾어 부목을 받치고
땀으로 젖은 수건으로 감쌌다
온몸에 오한과 통증이 스며들었다
손목이 두툼하게 부어올랐다
식은 도시락을 물에 말았으나
하오의 허기에도 먹히지 않았다
초면의 산객이 보자기를 찢어
팔걸이 어깨띠를 만들어 줬다
배낭도 버리고 하산길에 나서니
어느 산객이 배낭을 대신 메었다
밧줄을 타고 벼랑으로 난 하산길
낯설은 어느 젊은이가 부축을 했다
두 시간 걸려 하산하여 내려 와
산동네 트럭을 타고 산을 벗어 났다
다섯 시간 후에 어느 정형외과에서
뼈를 당겨 맞추어 엑스레이를 찍고
통 기브스를 하니 곰배팔이 되었다
순간의 실수는 긴 아픔이었다

* 응봉산:강원도 삼척시와 울진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








김 진 택

내 친구 소뿔이ㆍ가난한 새벽
시시한 시ㆍ검사와 여선생
가을 저녁ㆍ그 사람
술질ㆍ이별ㆍ꿕 사장

|시인의 말
  말을 말같이 하는 사람이 드문 세월이다.
  여기 늘어 논 쓰잘데 없는 말이 말의 쓰레기를 또 한 보따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한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본인이거나 글밭 동지이거나 영주나 부산에 있는 술꾼들인데 
  그들의 참이슬 같은 행적에 누가 되지 않나 걱정이 되지만 사슴 같은 눈길의 그들이기에 밥상위에 장미꽃 보듯 이쁘게 보아 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내게 준 사랑과 우정에 보답하는 나의 어줍잖은 글질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갑자기 전화를 한 유난씨가 밉다.
  내가 뭔 시를 하루에 한 개씩 낳는 외래종 암탉도 아닌데⋯⋯.
  원고 이번 주 안에 보내요 라고 하면 나는 어쩌나⋯⋯.




내 친구 소뿔이

한 때
그는
펑 퍼짐한 궁뎅이의 그 아가씨 그리워
앉은뱅이 책상에 손거울 얹어놓고
그걸 보며
눈이 빨개지도록
울던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아가씨
꿰어 차 득의의 세월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각방 거처하며
서로 째려보는
사이가 되었지만
옛날
한 때는
그랬었다.




가난한 새벽

한 때
그는
(독자들이여 조자룡 헌 칼 쓰듯 앞에 쓴 말 또 썼다고 화내지 말지어다)
겨울
아직은 어두운
오전 여섯 시 부근
잠자리에서 들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기명이 부딪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또 또 또 도 도 파 파 칼질하는 소리
눈꼬리가
시몬 시뇨레처럼 위로 찢어진 젊은 아내는
숯검댕이 밤의 속살을
잘게 잘게 저미고 있었다
늦잠 자는 소뿔이를 깨워서
이밥 고봉으로 올려 상차려 주는
아내를 두고
몸에서
꽁치 비린내가 난다고
싫어하였다




시시한 시*

한삼넝쿨 우거진
활엽수 넝쿨 사이로
요리조리 나니는
굴뚝새 좆같은 동네의
맨 아래뜸에 사는
동장은
이밥 같은 눈이
비처럼 음악처럼* 내릴 때
동민 여러분
눈이 존나게 내립니다.
확성기로 방송했습니다.
다음날 눈이 더 많이 내렸어요
동민 여러분
어제 내린 눈은
조또 아닙니다 라고 방송했어요
그 다음날 눈이 더 더 많이 내렸어요
동민 여러분
우리 동네는 좃됐습니다 라고 방송했어요

* 시시한 시:마흔아홉 나이에 머리에 허연 눈이 내린 소뿔이가 어느 날
기웃한 주탁 앞에 두고 막걸릴 마시며 울릉도 어느 동네에서 있는 실화
라며 무슨 비밀처럼 내게 들려준 얘기.
* 비처럼 음악처럼:대중가수 김현식이 부른 유행가 제목.




검사와 여선생

연극을 보고 나온 바깥은
눈이 많이 쌓였드랬습니다.
소뿔이는
젊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오다가
더러는
손잡고 걷기도 하며
호롱불이
발그라니 켜져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소뿔이는
오늘도 나는으로 시작되는
일기를 씁니다.
연필심에
침을 바르고 또
발랐습니다.
논둑같이 구불구불한
그림 같은 글씨였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감옥으로 가는 여선생님이
너무 불쌍합니다.
눈물 한 방을

흘렸습니다.




가을 저녁

동무들이 모두 집으로 가버린
놀이터는
바람에 쏠리는 낙엽뿐입니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며
한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동무들은 한윤이가 죽었다며
놀이에서 빠지라고 했습니다.
살았다
라는 말을 모르는 그 아이는
놀이에서 퇴출당한 게
억울해서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며
동무들이 떠난 자리에서
혼자 남아
오오래 울고 있습니다.
올해 나이 네 살인 울보는
내 친구 소뿔이의
맏아들입니다.




그 사람

하루
석 잔
막걸리
말고는
즐거운 건
없어

구름 모였다
흩어지고
산벚
피었다
지고
들비둘기
고개 밑에서
구구
울지만

하루
석 잔
막걸리
말고는




술질

사람들은
낮술을
계집질같이
시답잖게 보지만
대가리에 눈이 허옇게 내린
소뿔이여
말해 보게
어디 가서
송이송이 꽃송이 놓고
마실 수는 없지만
실내포장 어둑한 구석
예지가 금강석같이 빛나는 이 순간들
호박빛 불사약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 아닌가?
옛 사람의 말 믿지 말라
초로인생은 아냐
상징과 예감으로 가득찬
너의 말이
나일같이
범람하는 이 자릴 두고
그런 말 하질 말어
암!




이별


사랑하는
김유난 여사
어느 날
소주잔 앞에 두고
우리
만남이
죽기 전 몇 번이나 될까?
뇌까린 적이 있다.

그대 만나면
잔 들고 먼 산을 보니
님이 온들 운운 ,,,,, 윤고산의 흉내를 내며
헛소리를 많이도 했지만
이 밤
별들을 모두다 파촉으로 귀양 보낸
도회의 밤하늘 앞에 두고 걷다 보면
가끔씩 생각나네
그대
뜨거운 가슴과
써느란 푸른 눈길이




꿕 사장

안동 권씨
부산의 꿕 사장은
나를 보고
어이! 김선생
이라고 부른다.
시를 쓰기는 하나
지리멸렬
시시하고
시시콜콜 일상에
코를 박고 있는 나를 두고
어이! 시인 김선생이라고 부른다
지난 사십년
수억을
주점에 바친
키 크고 잘생긴 부산 꿕 사장
나를 풍류객이라 불러준다
날 꾸무리한 저녁답
한 잔 술
앞에 둔
선술집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 두고
이 글을 쓰다
님아 이 희미한 꽃 꺾어다
그대 밥상에
얹어 주오








천 승 현

나이ㆍ배롱나무 꽃
숲이 되고 강이 되고ㆍ시간의 걸음
출근길ㆍ외로움ㆍ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섬ㆍ섣달그믐ㆍ시월의 밤

|시인의 말
6월에 내리는 장맛비처럼
내 인생의 6월은 지났지만
살아왔던 내력들이
노래가 되어 쏟아졌으면 좋겠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차오르는 단비처럼
퍽퍽해진 가슴에 스며들어
내가 아는 나와
내게 낯선 나를
모두 적셔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소리 없이 꽃이 피고
장마 없이 여름이 지나가고
은행잎이 거리를 뒹구는 가을이 지나갑니다
겨울이 오면 눈도 내리겠지요
시간을 밟으며 따라가는 길
초저녁잠이 많아졌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는 일도 많아지겠지요
곧 귀도 부드러워지고
슬슬 버리는 것도 많아져야겠습니다.




배롱나무 꽃

초록이 지천인 한여름
붉은 맘 더욱 붉게 물들이며
누구를 기다리느라 속이 타는지
꽃잎 활짝 펼쳐 보지 못하고
오글쪼글한 채로 가지 높은 곳까지
오르며 오르며 꽃 핀다
환한 햇살 내리 쬐어도
얼굴 한 번 펴 보지 못한 채
마음만 동동동
꽃나무 하나에 속마음처럼
수없이 피워 올린 꽃잎들이
약속이나 한 듯 손에 손을 스치며
순서대로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진다
떨어져 내리던 꽃잎, 얼마나 간절했는지
나무에 닿았던 자리마다
견디질 못하고 껍질이 벗겨져
반들반들하다.




숲이 되고 강이 되고

그 해 그 여름 어슬렁거리던 더위가
산 너머 정수리만 남기고 돌아선다.
낮이면 햇살 사이로 스미던 바람
새벽안개 속으로 이슬처럼 젖어들고
스미고 젖어오는 시간들이
숲이 되고 강이 되어 내게 온다.




시간의 걸음

깊은 산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계절
못다한 말들 쏟아 내듯 가을비가
새벽을 터트립니다.
가슴 가득한 먹먹함을 비우고
비워서 외로움이 지독해지면
내리는 가을 따라 마음을 덧칠합니다.
오색빛 생각을 머리에 얹고
바람 따라 흘러가는 세월 속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니
걸어온 길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출근길

사람들은
밤새 안녕하게 일어나
어제의 피곤을 부스스하게 묻힌 채
먹고 살기 위해 집을 나선다.
강변도로는 쏟아놓은 물처럼
출근길 행렬이 번지고
그 속에
멈춰졌던 화면의 느린 재생처럼
깜빡깜빡 비상등을 켜고
마주 오던 운구 차량이
유유히 지나간다.
세상의 먹고 사는 일을
모두 마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이의
마지막 출근길을
남아있는 자들이 삶의 흔적을
거둬내며 뒤따르고 있다.




외로움

낯선 풀
낯선 바람
낯선 흙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산 속에 홀로 남겨졌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떠나가고 떠나오는 사람들로
수선한 고속버스터미널.
노랗게 물든 11월의 가로수도
잎들을 바람에 태워 보낸다.
갈 길 바쁜 사람도 오가고
갈 곳 없는 바람도 오가는
터미널 옆에서
군밤 파는 늙은 여자는
연탄 위의 밤을 뒤집으며
계절을 건너고,
좌판대도 없이 낙엽 같은 양말을
바닥에 깔아놓은 중년 남자는
등 돌리고 앉아 식은 도시락을
소리 없이 삼킨다.
어둑한 오후,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한
흙먼지는 도로 위의 은행잎을
쓸어가며 목이 메인다.






오늘도 내 마음은 섬으로 간다.
오랜 꿈을 꾸고 난 뒤
이루었던 섬 하나,
끝내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린 뒤
나는 날마다 마음 속에
남아있는 섬으로 길 나선다.
불던 바람, 피던 꽃,
내리던 비, 쌓이던 눈을
만나러 섬으로 간다.




섣달그믐

해가 다시 돌아오고
몇 번의 밤이 지났을 뿐인데
아침이 오면 눈을 뜨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올해의 끝 날이 위태롭게 서있다
이렇게 떠밀려 가는 동안
주름이 근심처럼 줄을 서고
어둠도 얼어붙는
섣달그믐의 밤은
별빛조차 흔들려 날카롭다.




시월의 밤

달력에 걸려 있던 날들이
우수수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겨우 두어 장에 매달려
바둥거리는 몇몇 날들이
뿌리 뽑힌 풀처럼 흔들리고 있네
어차피 오늘 지나면 내일
내일이 오늘 되면
오늘이었던 어제가
돌고 돌아가는 순리 앞에서
왜 이렇듯 쓸쓸해지는 걸까
간질간질 목구멍에 고인
기침 뱉어내면 주루룩
울음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밤은 깊어만 가고








임 두 고

궁색함에 대하여
나무ㆍ바둑ㆍ사별의 기호
소설 ‘아우라’ㆍ안동

|시인의 말
  봄, 여름내 시심을 뿌리고 부지런히 가꾸지도 않았으니
가을에 수확할 시들이 변변찮은 것은 당연한 일. ‘글밭’의
풍성함을 더하는 데 올해도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또 내년을 기약하는 수밖에. 




궁색함에 대하여

진달래가 지천을 누비는 사월이나
붉은 장미가 말을 걸어오는 오월쯤에는
시를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푸른 바람이 추억을 몰아오는 칠팔월에도
한 줄 시를 쓰지 못하고
어느새 낙과들로 눈물지는 시월이 되어서야
낡은 노트북을 꺼내 놓고
전전긍긍 시를 쓴다.

동인지에 실을 그깟 몇 편의 시 때문에
다 헐어빠진 기관지로
담배를 피우며 쿨룩거리느니
차라리 시를 버리라는
아내의 따가운 눈총 아래
구걸하듯 시를 쓰는 내 궁색함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와 결별하지 못하는
까닭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미련일까, 습성일까, 애정일까?

이십 년 낡은 둥지
이 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채
십오 년째 낡아 가는
내 삼성 센스630 노트북은
아직도 윈도우98 시스템에다
한글97의 백지 화면을 띄워놓고
한없이 눈을 껌뻑이며
격려의 전언을 보낸다.

궁색함이야말로 시가 깃드는 최적의 둥지요
시가 샘솟는 최상의 수맥이리니
시를 쓰라고, 시를 써 보라고
궁색함이 핍박해 오는 만큼
꿈은 부풀 것이고 시도 함께 부푸리라고
시와 결별치 못하는 이유는
애정도, 습성도, 미련도 아닌
궁색함 때문일 뿐이라고.




나무

그대, 한 인간이여
진정 이 세상에서 싱그런 나무 한 그루보다
더 가치로운 존재일 수 있을까?

태초의 인간부터
삶은 나무와 더불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었을 것이며
나무의 형상을 보고
직립의 앞날을 꿈꾸었으리라.

깎고, 꺾고, 따고, 벗기고, 자르고
뻗고, 매달리고, 치솟고, 흔들리고, 쓰러지고
찢어지고, 부러지고, 걸치고, 불타고……
어쩌면 인간의 상상력과 언어의 팔 할이
나무로부터 빚어진 것일 터

언제부턴가 잎과 꽃과 열매, 그리고 목재가 주는
그 아름다운 풍경과 상큼한 향기와 맛과
따뜻하고 아늑한 잠자리는
아득한 추억 속으로 밀려나고
쇳덩이와 시멘트와 플라스틱을 채찍 삼아
나무를 내치고 있는
도시적, 현대적 인간의 삶이여
그대의 뿌리와 꽃과 열매가 송두리째
썩어가고 있는 줄 모르는가

마침내 그대의 가슴속이나 땅 위에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못하는 세상이 온다면
그 세상이 바로 지옥이리라.




바둑

기원에 가면
삶의 뒷골목 어디쯤에선가
굽이굽이 돌아 나온 듯 한 사람들이
흑백사진처럼 바둑판 앞에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바둑판 너머 얼크러진 일상들은
행마*와 맥점을* 찾는,
무아지경 수읽기의 배후로
까마득히 사라져 가고
오로지 미생마*의 생사와 집* 모양에 따라
너와 나의 희로애락이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된다.

일립이전*하고
좌우동형은 중앙이 급소니라.
두터움*에 가까이 가지 말고
큰 곳보다는 급한 곳으로 먼저 가며
위기십결*에 나오는 사소취대*를 명심하라.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아는 만큼 보일 뿐이고
묘수를 찾기보다 순리를 따라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이치는
바둑살이나 인생살이나 매한가지.

비록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
견딜 수 없이 외롭고, 허무하고
심지어 비참하기까지 하다 해도
오묘한 바둑 속 세상과 더불어
또 다른 인생을 껴안으며
결코 외로워하거나 허무해하거나
비참해 하지 않으리라.

* 행마:놓여 있는 바둑돌 주변에 새 바둑돌을 놓는 것.
* 맥점:급소와 같이 중요한 지점.
* 미생마: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돌.
* 집:자신의 돌로 둘러싼 안쪽의 공간을 뜻하는 바둑 용어.
* 일립이전(一立二展):돌이 하나일 때에는 두 칸을 벌려라는 초반 포석
의 요령.
* 두터움:돌의 모양이 튼튼하여 힘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바둑 용어.
* 위기십결(圍碁十訣):당나라 현종 때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 펴
낸 것으로, 바둑을 둘 때 명심하고 준수해야 할 열 가지 요결(要訣)을
뜻함.
* 사소취대(捨小取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가짐.




사별의 기호

사별의 기호는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미처 다 못한 대화의 쉼표 같아서.
서로 닿지 않는 안타까운 목소리.
오랜 사별의 기호였던 상여가 사라지고
이제는 영구차가 새로운 사별의 기호가 되었다.

출근길에 불현듯 뒤따르게 된
영구차 행렬
상여도 상두꾼도 상여소리도 없이
그저 충혈된 비상등을 껌벅이며
이승과 저승, 생자와 망자의 사이를
신속하게 떼어놓으려는 듯
달려가고 있다.

젊은 시절 고향 동네 품앗이로
상두꾼이 되어 상여를 멘 적이 있다.
꽃가마 같은 상여를 멘 상두꾼들이
가다가 버티다가 느릿느릿 개울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 가파른 산을 타고 오를 때
‘황천이 멀다 더니 저 건너 안산이 황천이네’
앞소리꾼의 구성진 앞소리를 받아
‘어-화 넘자 어-허-어-어-어’
상두꾼들이 일제히 뒷소리로 받아넘기며
사별한 생자의 슬픔을 천천히 곱씹고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의 행복을
오래오래 기원하며 동행하던 상여 행렬

기호의 차이는 곧 인식의 차이가
형상화된 것일 뿐
죽음은 이제 일상적이며 당연한 것이고
주검은 신속히 태우거나 매장해버려야 할
쓰레기 더미가 된 것일까?




소설 ‘아우라’
­시로 쓰는 독후감

시보다 더 시적인 소설을 찾으려거든
<아우라>*를 펼쳐 보라.

순간과 영원이 조우하고
삶과 죽음이 은밀하게 교접하며
현실은 환상을 잉태하고
그 환상이 다시 현실로 태어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묘하게 꼬인 이야기.

작가인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배경인 멕시코 <돈셀레스> 거리의 음산한 저택도
<몬테로>와 <아우라>, <요렌테>와 <콘수엘로>라는
인물들의 이름까지도 낯설고 낯선 데

행과 행 사이에 가로놓인
신화적 상징들과
문맥과 문맥을 넘나드는 마술적 상상력이
짧은 여정이지만
헤쳐 나가야 할 난독의 가시넝쿨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죽음이 임박한 호호백발 <콘수엘로> 부인이
푸른 청춘과 뜨거운 사랑을 되찾고자
혼신을 다해 빚어내는
욕망과 환상의 파노라마

<콘수엘로>는 자신의 환영을 빚어
처녀 <아우라>로 회춘하고.
오래 전에 죽은 남편 <요란테>를
총각 <몬테로>로 환생시켜 집으로 불러들인다.
비록 환각으로 빚어진 처녀 총각이지만
현실보다 더 진실하고 생생하게
청춘과 사랑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데
그들의 뜨거운 품속이 오히려
환영들을 태우는 풀무가 되어 버리고
끝내 잿덩어리처럼 홀로 남는 것은
욕망에 지친 늙은 <콘수엘로> 뿐

결국 이 소설은
<너>는 <나>이고 <그>이고 <그녀>라는
인물의 순환 고리를 통해
‘나는 모두이며 모두가 나’라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나와 너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우리 모두 똑같이 돈벼락을 욕망하고
섹시한 베이글녀*를 욕망하는 한
우리 욕망의 깊이와 폭은 어디까지인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있기는 한 것인지
정체성이란 말은 과연 가당하기는 한 것인지
*
* <아우라>: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소설, 민음사, 2014.
* 보르헤스: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 베이글녀:청순하고 앳된 얼굴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자라는 신
조어.
* 소설 <아우라> 해설 참조 자료:<삶과 죽음의 순환구조>, 김태종, 인터
넷 다음블로그.




안동

퇴계 선생이 출사한 이래
도리를 지키거나
학문과 교육의 꿈을 키우기 위해
일흔 아홉 번의 사직원*을 내면서까지
끝내 돌아와 살고 싶어했던 안동.

삼천리 금수강산, 살아보고 싶은 곳이
어디 한 두 곳이겠는가 마는
그 중에 제일이 제비원 전설 깊은
내 고장 안동땅이라네.

그대 혹시나 안동에 오거든
안동찜닭이나 간고등어 안주에다
안동소주 한 잔 들이켜고
봄 풍경이 취기처럼 번져오는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앉거나
도학의 정취가 병풍처럼 둘러친
도산서원 마루턱 어디쯤에 기대앉아
선비처럼 시 한 구절 읊조려 보다가
부용대가 바라보이는
하회마을 골목 어디쯤에서는
탈바가지 하나 구해 눌러 쓰고
신명난 상놈처럼, 양반처럼
더덩실 탈춤이나 한바탕 추고 갈지니.

속살 깊은 안동을 더 보고 싶거든
금계리 학봉 종택 지나
여인네의 속곳 같은 천등산 자락
새 소리가 풍경 소리를 부르는
봉정사 극락전에 들러 보거나
토계리 퇴계 종택 지나
이육사의 고향, 원천리 육사문학관 인근
강철로 무지개를 빚은* 금강심의
시심과 기개가 서린
왕모산 칼선대 벼랑까지 올라가 보라.

출출해지거든 헛제사밥에다
안동식혜를 곁들여 먹고
전탑의 거장 신세동 7층 전탑을 휘돌아 나와
독립 운동가의 산실이자 고성이씨 종택인
아흔아홉 칸 임청각을 거쳐
벽화 마을까지 돌아본 후
시골 교회 종지기를 하면서도
한결같이 동화 같은 세상을 꿈꿨던
조탑리 빌뱅이 언덕 권정생 거처를 찾아가
‘강아지똥’처럼 ‘몽실언니’처럼 안쓰러운
선생의 발자취를 헤아려 봄직도 한데

그 사이 어두워져 달이 뜨거든
월영교 나무다리의 야경을 껴안으며
내 사랑도 ‘원이 엄마의 편지’* 같은 전설이 되어
영원하기를 기원해 보고
치암고택이든 농암종택이든 지례예술촌이든
어느 고택을 찾아가 유유자적 하룻밤
여독을 달래며 아침을 맞이해 보라.
어쩌면 안동 임하 두 댐에서 풀려 나온
지천의 안개가 그려내는 수묵화 속
몽환의 가을 풍경을 밥상처럼,
선물처럼 받아들 것이니

* 퇴계 선생의 사직원에 대한 사실은 ‘퇴계 선생의 일대기’(권오봉 편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2015)를 참조한 것임.
* ‘강철로 무지개를 빚은’ 구절은 이육사의 시 <절정>에 나오는 ‘강철로
된 무지개’ 부분을 변조해 인용한 것임.
*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 과정에서 420년 만에 미이라로 발견된 남편(이
응태, 1556~1586)의 관 속에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
는 정성을 담고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 삼은 미투리와, 사별하는 남
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교차하는 편지(원이 엄마의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음. 이 편지를 통해 전해진 이 부부의 애틋한 사연(전설)을 기
리기 위해 안동시에서 만든 다리가 월영교임.








이 위 발

꽃의 의미ㆍ기억의 집
상주의 미소ㆍ보고 싶다
송어는 알고 있다

|시인의 말
  요즈음 매미의 일생에 대해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일주일을 울기 위해 십 년 동안 땅 속에서 견디어 내는 매미의 ‘열정적인 울음’을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것에도 천작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길’을 생각하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꽃의 의미

솜처럼
말랑말랑한 꽃씨가
오랜 시간
땅 속에서 뒤척이며
상처도 받지만
물이 스며든 외피에서
손처럼 생긴
파란 싹이
뻗어 나와 꽃이 된다
꽃이
손에서 빠져 나간다.
물이 빠지듯
조그만 꽃 한 송이
꽃은 손바닥을 떠나
어디론가
떠난 길을 아무도 모른다
손이 남긴 따스한
느낌마저도
사라져버린 당신의
빈자리




기억의 집

지나온 기억의 집은
두터운 화장을 한 퇴물 작부의
흘리는 미소보다 허망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본적이고 주소다




상주의 미소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
밤의 속도는 너무 느리다
눈먼 가로등은
두 팔을 벌린 전봇대를
보지 못하고
빗자루 같은 가로수는
달이 사라진
하늘만 쓸고 있는데
가든지 서든지
쉼없이 깜박이는
황색의 신호등은
내 눈을 닮았다
 
상주의 얼굴만큼
문상객들로 넘쳐나는
어둠을 넘긴 영안실
아버지와 동거한 지 일년
안고, 닦고, 치우고,
딱 하루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을 강조하며
그 냄새, 그 향기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고
하늘나리꽃을 닮은 상주는
지금도 아버지 등에 업혀
미소 짓고 있다




보고 싶다

봉천동 복개천 생선구이 집
그곳에 가면
사람 냄새가 진동을 하고
그 냄새에 취하는
화장실 옆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술 광고 포스터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꽁치, 과메기, 청어, 메뉴판
보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서
몰래 한번 봐야지는 그냥 하는 말
정말 보고 싶다면 어때,
소주 한잔 더 할까?
그녀의 가슴은 생선들이 지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몰래 열어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술이 취한 사람과
약이 필요 없는 사람이
마음을 숨기면서
술 한 잔에 가슴을 흥정하는 곳
구이집 주인은 근엄한 상술로
메뉴판으로 다시 막아버린
바다 속에 빠져버린 가슴




송어는 알고 있다

낮달을 삼켜버린 강물 속의 송어와 산천어는 결혼을 하고
일 년 동안 살면서 새끼도 낳고 잘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
지만 떠날 때는 말없이 함께 있고 싶어도 떠나야만 했습니
다.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헤어졌다고 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수컷인 산천어는 하천에 남고, 암
컷이 된 송어는 바다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송어는
하천도 아닌 바다도 아닌 연못에 사는 자신이 싫지만은 않
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낮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느냐, 나는 하나님이 믿는 것을 믿는다. 그럼 하늘은 무엇
을 믿느냐, 하늘은 내가 믿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강 희 동

서각선생ㆍ나의 시는ㆍ벽공(碧空)
응보(應報)ㆍ두릅을 꺾으며
탄도항ㆍ소리에 대한 변명
고사리를 꺾으며ㆍ공황(恐慌)ㆍ아침이슬
경계측량ㆍ집짓기ㆍ공구리를 치고


|시인의 말
  수명은 늘어나고 출생률은 줄어들고 늙은이는 늘어나고 정년은 줄어들었다. 이혼률은 늘어나고 결혼률은 줄어들고 청년실업자는 늘어나고 양극화는 심화되는 현실이다. 무섭고 불안한 세상이다.
  근 십년 접어 두었던 집장사를 다시 시작 했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변화가 있어 좋다. 복잡다양함도 단순함으로부터 시작됨을 알았다. 단순함으로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다. 집을 짓는 것은 단순명료한 것 같지만 갖출 것을 어울리게 짜 맞추어 조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 집 꼴이 된다.
  이 시대를 살아내자면 조화를 외면할 수 없다. 본질을 이해하고 단순함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 길이 보이면 버릴 것은 슬며시 버릴 것이다.





서각선생

쥐뿔도 아는 게 없는 놈이
영주의 쥐뿔선생을 만났다

서각 - 흐르는 글을 마음에 세기며
나무 많은 낭설을 주절 거렸다

쥐뿔도 없는 것이
쥐뿔 개뿔

뿔다구 타령만 하다가
묵밥에 막걸리 두어 병 걸쳤다

그것 참 날씨 한 번 졸음
쏟아질 듯 좋았다.




나의 시는

우리 글은 소리 글자
소리로 뜻을 만드는
나의 시는 머무름에
안주하지 않는다

떠 다 니 며
소리미가 되고
부딪히며 소리글이 된
벽공 푸른 언덕에 낙서
뜬 구름 되어

그대 곁에 웃는 나의 시는
보는 사람의 속눈썹까지
잔잔히 흔들어 주는
사람시가 되어

아 름 다 운
한아름
꽃 이름도 되는
나의 시는.




벽공(碧空)

아 가 씨
아 씨
씨 없는 감응(感應)
없는 감
감이 감히
아저씨
아 재
아무렇게나 불러
밥 먹다 쳐다 보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이(利) 노(no) 무(無) 세상
너무 높이 있다
허공에
손 저음
눈 시린 벽공.




응보(應報)

빡-센 하루가
지난 후
코에 피가 났다
코피였다
즐거움의 댓가
톡톡히 치룬 셈
가을저녁
추석(秋夕)이다
잘 가라
잘 보내라.




두릅을 꺾으며
­갱생 1


두릅 순을 분지르며
새 봄 살아 오르는 네 대궁 정면을
그래야 눈마다 새 순이 돋는다며
초식동물의 봄맛을 위해
더 왕성한 번짐을 변명으로
가시 돋은 두릅 순을 꺾는다
살아남고자 절망도 꺾고 눈마다
새 순을 틔운다
잔인한 사월 눈 부릅뜬
연한 잎 순한 순 두릅의 수난
살아남고자 가시 돋우며
고약한 봄날 버텨 보지만
저항의 가시 피해 뚝 뚝
대궁 째로 꺾인다 입맛을 위해
정작 넌 몸 내어주고 땅으로 기어
새 삶을 위해 키를 낮춘다.




탄도항

여름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붉은 날
탄도에는 포탄처럼 고깃배들 어지러이 정박 중
물길 따라 멀리 나간 갯벌
흔적 없이 말리며 밀물을 기다린다
어촌의 하오 땡볕 젖은 고기나 빨랫줄에 널어 두고
너 나 없이 끼룩이는 갈매기 소리 본다
소금기 묻은 바람 맞으며 선주막집 처마 앞
목단꽃 붉은 댕기 흘릴 듯
벙글어 담담 하다.




소리에 대한 변명

그는 기차소리로 떠나고
나는 매미 울음으로 우네

사랑이여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빨

여름 다 가도록 무성한 그늘에 숨어
쏘알쐬알 울어대는 소리에

송글송글 땀방울도 동그랗게
눈동자 똑바로 뜨고 보네




고사리를 꺾으며

너에게 가려면 우선 무릎부터 꿇어야 한다
너의 눈높이로 조용히 찬찬히 마주하면
금방 땅거죽 헤치고 스물스물 나타난다

혹 내 뻣뻣하게 서서 널 마중하면
넌 흔적 숨기고 다 핀 개고비
눈앞에 흔들거리며 비웃는다

고사리를 얻으려면 우선 허리부터 굽혀야 한다
눈높이 맞추면 어설픈 풀섶 사이로 외로운 대궁 쑤욱
귀여운 손짓 하며 여기저기 마구 떠밀어 올라온다

고사리 같은 널 배웅하려면 설치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길 발자국 찬찬히 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그림자 외로움도 잔잔한 웃음이 되는 너가 보인다

우줄우줄 꽃 손사래 치는 사월 언덕
무수한 연둣빛 풀밭 속에 널 보려면 우선
무릎 꿇고 찬찬히 너와 눈을 맞추어야 한다.




공황(恐慌)

고장난 시계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고장난 시간
정지된 화면.




아침이슬

이른 아침

너에게 편지를 쓴다

아직 젖은 이불

풀잎 맑은 이야기

햇살에게 보낸다.




경계측량

양떼나 말 원숭이가 뛰 놀던 태초
하나의 구분 없는 벌판
관계를 위해 먹고 가두고 셈하며
경계가 뚜렷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물은 흐르고 산과 들
호수의 구분이 그어졌다
너에게 갈 수 없는 금 그어진 경계
새로운 지평을 열 막막한 열대우림
경계를 위해 선을 긋는다 양을 잰다
어디쯤에다 선을 그을까
이웃한 담장과 네모진 땅을 기웃거리며
이문과 욕망의 옷 추스리고 정해진 수치와 좌표
선을 긋는다 분쟁의 도화선 소유의 결정선
건축의 시작 평면과 공간의 경계선
어디쯤 감시와 경계의 구분을 만들까.




집짓기

이제 집이 화장을 서두른다
몸과 뼈대는 형체를 갖추고
마음과 느낌을 알리려 인사를 서두른다
때론 귀밑이나 겨드랑이 즈음
좀 허술한 흔적 있어도
망치질이나 뿜칠로 감추고
천정이나 바닥 벽의 껍질조차
여러번 감싸고 두드림 속에
제 모습 갖추어 간다
정작 허술히 잊어지는 것
여름내 비지땀 흘려 뼈대 세우기 위해
곤죽이 된 골조목수의 흘린 땀의 노고
세상도 이처럼 지나치며 허술히
묻혀지고 드러나는 일
뽀시시한 화장기 얼굴 아래
숨은 미소 있는 것이다
내 삶도 소재가 된 뭇사람의 사랑이
감성이 되어 숨 쉬고 범벅이 되어
시가 되고 그리움이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그대여 웃고 머무는 곤죽이 된
사랑이여 미움이여 안녕!




공구리를 치고

서로 외면하는 모래와
물 자갈이 곤죽이 되도록 뒤섞여
숨쉴 틈 없이 곤두박치며 레미콘이 된
공구리를 쏟아 붓고 폭염에 항거하며
서서히 굳어간다 단단한 골조가 되기 위해
뜨거운 날이여
두 시간이면 시멘트죽이 빠닥한 골조가 된다
제대로 일이 되자면 뜨거움에 몸 비비며
좀 더 기다려야 한다
하나의 새 물건이 되고자 어울리고 뒹굴고 곤두서며
딛고 일어설 평등의 슬라브가 되기 위하여
오뉴월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서서히
서로가 어울려 단단해지는 콘크리트
물과 모래 시멘트의 합창.








김 윤 한

빵나무ㆍ토란잎은 젖는다ㆍ객귀
나무젓가락ㆍ간월암ㆍ 일장춘몽
나팔꽃ㆍ폐선장에서ㆍ양말 벗으며
세월은 간다ㆍ소맥을 위하여ㆍ선미에서

|시인의 말
  골몰
  ‘시는 무엇엔가 골몰하는 과정의 산물이다.’라고 정의를 내려 본다. 옛날에는 즉흥시도 많았다지만 적어도 현대시는 ‘골몰’하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다.
  요즘 나는 ‘골몰’하고 있다. 구름이나 벌레며 꽃이며 밥풀 하나까지도.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며칠 동안 ‘골몰’하다 보면 거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애정을 경험한다.
  전혀 돈도 안 되는 그런 일에 ‘골몰’하는 것은 참 비현실적인 일이다.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시를 쓰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하면 이해를 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좋은 시를 쓰지 못해도 좋다. 시를 떠나 ‘골몰’하는 그 과정이 즐겁고 경이로운 것을. 시에 대한 평가를 생각하는 것은 ‘골몰’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천박한 일이다. 




빵나무

열대지방 어느 곳에 빵나무라는 것이 있다네
나무 한 그루면 어른 한 사람이
50년 동안이나 먹고 살 수 있다 하네
내게도 그런 나무 하나 있으면 좋겠네
햇살이 이마까지 비치도록 실컷 자다 일어나
배고프면 열매 하나 따서 구워먹고
어슬렁거리며 산책도 하다가 구름도 올려다보다가
또 배고프면 열매 하나 따서 구워 먹고
어두우면 자면 되니까 전기도 필요 없고
갈무리할 필요 없으니 냉장고도 필요 없고
볼 사람 없으니 옷도 훌훌 벗고 살아도 되겠네
아니지, 혹시나 푸른날개 팔색조 한 마리
눈 동그랗게 뜨고 내려다볼 수도 있으니까
빵나무 잎사귀 몇 개 엮어 몸에 두르는 게 좋겠네
굳이 다 가릴 건 없고
아랫도리 부끄러운 딱 한 부분만 가리면
그걸로 충분하겠네




토란잎은 젖는다

토란잎은 젖지 않는다
가장 낮은 땅에 발붙이고 있지만
젖은 대지를 탓하지 않고
높은 하늘 그리며 살아가기에
떨어지는 비에 젖지 않고
가슴으로 빗물 품다 넘치면 몸 비우고
또 다른 빗방울로
천상의 보석을 빚어내곤 하는 것이다
토란잎은 젖지 않는다
비바람에도 울지 않고 젖지 않고
토란토란 서로를 다독이며
하늘 쪽으로 넓은 안테나를 펴고
애틋한 마음을 쏘아 올린다
그러나 토란잎은 젖는다
안타까운 사연 꼭꼭 숨긴 채
하늘만 바라보며 일생을 살지만
적막한 밤 동화 속 보름달 뜨면
알지 못할 그리움 주체할 수 없어
쏟아지는 은백색 달빛에
흠뻑 젖기도 하는 것이다




객귀

봄방학 끝날 무렵이었지 아마
더운 날 하품 나고 춥고 떨리는 거 보니까
아마도 몸에 귀신이 붙은 게 틀림이 없어
어머니,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 앉아
찬물 한 바가지 떠 놓고 객귀를 쫓아냈다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 하나씩 호명하며
오던 길로 물러가라 썩 물러가라 빌었다
머리칼에 붙은 귀신 부엌칼로 뜯어내고
거꾸로 세운 칼날 따라 내 입속에 찬물을 부었다
꼴딱꼴딱 목구멍 넘어가던 물, 그 서느런 기억
그렇게 내 몸에 붙었던 귀신도 사라지고
어린 날도 무사히 지나갔지만
어쩌다 오늘 문득 몸살인지 감기인지
춥고 떨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다
문득 내 몸에 붙었다 떠난 그 귀신 생각
내 몸 떠나 어디로 갔는지 미련 없이 떠났는지
원통함도 서러움도 다 잊고 평안히 잘 있는지




나무젓가락

우리는 애초부터
하나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살을 깎는 아픔을 겪으며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언젠가는
운명처럼 갈라서야만 하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따로 떨어질 지라도
서로의 키를 맞추고
타는 고기를 뒤집으며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온전한 이름이 주어지는 법
비록 짧은 노동을 마치고
이대로 영원히 사라질 지라도
하나가 아닌
우리 둘만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불꽃같은 순간이지만
그래도 행복했었다




간월암

피안은 어디에 있는가
바다 건너 꿈처럼 떠 있는 암자
볼 푸른 사미니 스님 몇
짙은 안개 한 꺼풀씩 걷어내며
신기한 듯 줄배 끌며 바다 건넌다
주지 스님은 출타를 하고
갈매기만 끼룩끼룩 섬을 맴돈다
담장 너머 먼 수평선 졸고 있고
잔바람에도 외롭게 몸을 떠는 나무들
이윽고 바닷물도 모두 빠지고
사람들 자갈 모래 밟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시간
피안은 어디에 있는가
암자 위에 걸려 있는
미치도록 아름다운 낙조




일장춘몽

중년 부인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어젯밤에 남편 말고
잘 생긴 총각이랑
진하게 안고 잤어
좋았겠네
무지 행복했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
지갑이 없어진 거야
놀라서 화들짝 꿈 깼어
그러게 세상에 공짜는 없는가봐
하기야 세상일도
지나고 나면 모두가 꿈
좋아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전혀 없지만
나른한 봄날 오후
찜질방에는
자는 사람이 반
자는 척하는 사람이 반




나팔꽃

사무치게 보고 싶지만
차마 눈앞에 서지 못하고
첩첩 쌓인 간절함만 넝쿨로 타고 올라
그리운 모습 간절하게 바라보다가
애타도록 숨겨뒀던 봉오리 활짝 열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용기 내어 마음껏 외치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햇빛 부끄러워
떨리는 가슴 누르며
속으로만 가만가만 속삭이고는
치맛자락 감아쥐고 떠나는 여인처럼
꽃잎자락 말아 쥐고
홀홀히 사라지는 안타까움




폐선장에서

머나먼 여정이었다
걸어온 길이 수평선 너머 아득하다
모두 다 잘 있거라
상어, 고등어, 멸치 떼들
옆구리를 치던 검은 파도여
이제 우렁찬 항해는 끝났다
다시는 이 바다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페인트칠 벗겨진 뱃머리
빛바래 갈라진 폐타이어
말라붙은 고기비늘, 해초들
붉게 녹슨 쇠사슬
수십 년 고단했던 낡은 엔진
이제 모두 뿔뿔이 흩어져 바람이 되리라
모든 것 해체를 기다리는 시간
하늘에는 흰 구름 풍경으로 걸려 있고
갈매기 떼 끼룩끼룩 부질없이
흘러간 시간을 불러내고 있다




양말 벗으며

얼마나 먼 길 걸어왔는지
지나온 이력이 발바닥에 쓰여 있다
어릴 적 나뭇잎 크듯 자라던 발도
어느 순간부터 더 자라지 않고
내 일상도 이상도 신발 속에 갇혀서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옆도 볼 새 없이 급하게 달려온 여로
동행했던 수많은 양말들
그 안부가 문득 궁금하다
백열전구에 헤진 양말 씌워 깁던
가난한 어머니의 골무
흘러간 한 시대의 저녁도 아련하다.
앞으로 얼마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할까
하루 일과가 끝나고
피곤한 일상에서 돌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머나먼 길 다시 떠나야 하리라
신발도 벗고 마지막 양말도 벗고
마침내 육신마저도 벗고




세월은 간다

무겁게 침묵했던 얼음들도
가녀린 한 촉 새싹의 입김에 녹아내린다
멈췄던 시간 다시 흐르고
풀들 하나씩 일어나 들판 푸르게 채색한다.
겨울 깊이 숨어 있던 꽃망울도 새로 눈을 뜨고
온 세상 꽃소식으로 소란스럽다
지난해처럼 하늘 그대로이고
감격스런 봄날 다시 돌아오지만
아지랑이 속에는 떠나간 이름들 아른거린다
온 세상 눈부신 꽃들 찬란함은
다시 못 올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젯밤 바람에 꽃들 화르르 떨어지고
오늘은 천둥 번개에 소낙비 내린다
봄날은 간다
세월은 간다




소맥을 위하여

압록물과 한강물이
서로를 내려놓고
서해 짠 바닷물로 다시 태어나듯
소주와 맥주가 은밀하게 섞이어
짜릿한 묘약으로 다시 태어나다
오늘밤은 우리도
체면도 내려놓고
아픔도 내려놓고
불꽃으로 활활 함께 타올라
나도 내려놓고
너도 내려놓고
잔 높이 쨍그랑 부딪치며
세상 모든 사람들의
찬란한 행복을
위하여




선미에서

얼마나 달려왔는지
떠나온 도시가 아련하다
갑판 위에 서서 바라보니
지나온 길 물보라 되어 부서지고
굽이굽이 살아온 굴곡들
세월 속으로 아득하게 사라진다
일렁이며 살아온 숱한 사연들
비늘처럼 햇빛에 파닥거린다
아팠던 상처들 가슴 후비며
눈시울에 고이는 바닷물
얼마를 더 가야 항해는 끝이 나는지
가도 가도 외로운 길
그렇게 달려가고 있다
바람에 펄럭거리며
파도에 출렁거리며








김 여 선

몸살ㆍ능소화ㆍ감은사지에서
바위와 버팀목ㆍ그 해 여름
길ㆍ용계 은행나무ㆍ귀뚜라미
국시 꼬랑지ㆍ씨앗처럼

|시인의 말
가을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
잊고 있던 시집의 먼지를 털고
잊혀졌던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는
가을은 추억을 안고 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구름이 백조의 깃털이거나
아님 물고기의 비늘이거나
아님 양떼들의 평화로움으로
하늘을 떠다니는 가을은 눈부심이다
가을은 그대를 위해 온다
떨어지는 밤 한 톨 도토리 한 톨도 눈부심은
그 속에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면 호흡이 가빠진다




몸살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
몸살을 앓는다
꽃샘추위를 맞은 벚꽃 봉오리처럼
살갗이 으슬으슬하다
하루 종일 덜덜 떨다가
퇴근길에 읍내 의원을 찾았다
엉덩이에 주사 한 방
꺾이지 않는 관절을 가진
갈대 잎사귀에 얹혀있던 상고대의
날카로움으로 파고든다
꽃샘추위를
겪은 후에야
벚꽃이 핀다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
살갗을 파고드는 몸살을 앓는다




능소화

돌담 밑에
툭툭 떨어지면서도
독기를 품으리라
독기 품은 능소화 꽃잎은
쉽게 시들지 않으리라
무더기로 떨어지리라
떨어질 때를 알고
떨어지는 꽃잎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담장 아래 떨어진
독기 품은
능소화 꽃잎처럼
분홍빛 그리움은
쉽게 시들지 않으리라




감은사지에서

유월이면 상상화 마른 잎들이
흘림체로 누워버린다
장마가 지나간 뒤
마른 잎들이 쓸려간 그 자리에
투호처럼 하나 둘
하늘을 향해 던져지는
상상화 꽃대궁
끝을 보여주지 않는 오솔길처럼
대웅전이 사라진
감은사지 3층 석탑이
상상화 꽃대궁으로 솟아오른다




바위와 버팀목

난 바위라 부른다
넌 버팀목이라 한다
선술집 앞에
세워 놓은 돌
사람들의 발길질을
침 뱉음을
부끄럼 없이 받아들이는
난 바위라 부른다
넌 그저 버틴다고 한다.




그 해 여름

그 해 여름의 막바지에
서른 살 아들을
잡일 하는 곳으로 보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좀 보라는 욕심으로
여름 내내
낮에는 땀 흘리면 잠만 자고
밤이면 친구들과 밤새도록 청춘을 헤매는
아들의 삶이 서글퍼서
방을 구하고
장을 보고
이튿날 새벽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안동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눈앞이 흐려진다
눈곱을 떼면 맑아지겠지
헛기침이 나서
안평 쉼터에 차를 세웠다
담배연기처럼 사라질 시간들
구름이 아름다운 건
구름 뒤에 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일까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또 운전한다
10년 넘은 자동차 소리가
잡히지 않는 주파수로 씨익씨익거린다






다니지 않는 곳에도
바람의 길은 만들어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샛길은 숨어 있다
앞으로 직진하는 길보다
옆으로 휘어지는 길이 더 좋다
어린 시절 등교하던 신작로에
가로수로 서 있던 미루나무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 불고
여름이면 그늘에 앉아 공기놀이 하던
미루나무는 산기슭으로 밀려나 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보이는 길이 있다
내가 만들어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지름길로 빨리 가기도 하고
오솔길로 더디게 가기도 하지만
늦가을 해거름이면
오솔길로 더디게 가고 싶다




용계 은행나무

용계 은행나무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그리워
용계 은행나무 찾아간다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
바람의 근육질이 나무를 흔들 때마다
노란 은행잎들은 후두둑 떨어지고
찢겨진 바람의 힘줄 사이로
창백한 낮달이 떠 있다
바람이 불수록 빳빳하게 일어서는
살점 빠진 용계 은행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찌르고
상처 난 하늘에선
새 한 마리 날아간다
가을 어둠은 금세 찾아오고
다리 위에 서서
사진을 찍던 사람은 없었다
새 한 마리
용계 은행나무에 앉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뚜라미

습기찬 가을
저녁이면 귀뚜라미 운다
수놈은 운다
귀뚜라미는 성대가 없다
성대가 없으면 앞날개로
아침에 안개로
피어오르던 습기들이
저녁이면
이슬로 맺힌다
습기찬 가을
저녁이면 귀뚜라미 운다




국시 꼬랑지

서툴지만 만들고 싶은 것
반죽한 밀가루
홍두깨로 밀어
싹둑싹둑 잘라내면
처음이거나 마지막 남은
국시 꼬랑지
길이와 두께가 맞지 않아
끓는 물속에 담기지 못하고
짚불의 아궁이 속으로
덤벙 뛰어든다
올챙이처럼 볼록하게 배불리고
돌절구처럼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몸을 비튼다
입술에 검은 재 묻어도
구수한 국시꼬랑지
서툴지만 만들어 보고 싶다




씨앗처럼

땅버들 씨앗은 가벼워요
어디든 날아갈 수 있죠
바람이 불면 어쩌겠어요
가벼워진 순서대로 바람을 타야죠
바람이 멈추는 곳
씨앗이 중력에 끌려가는 곳
그 곳에 터럭 하나 붙여야 겠죠
바위든 콘크리트든
아님 가지 벌린 나무가지든
그 곳에서 뿌리를 내려야겠죠
금방이라도 좋고
일 년 이 년 삼 년도 좋아요
알맞은 습기와 온도만 맞으면
뿌리를 내려요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어야겠죠








강 수 완

두루종가 뚝향나무 앞에서
멜론ㆍ미국 쑥부쟁이 흰 꽃
암산 유원지에서 생각하다ㆍ왔구나, 산국
제주를 읽다 1ㆍ제주를 읽다 2

|시인의 말
나이 들어가는 세월은 빠르고 시를 잘 쓰는 일은 더디다.
더디나마 나아질 기미가 있으면 다행이련만
얼굴은 두껍고 글 속은 얇기만 하다.
염치불구하고 또 한 해를 보낸다.




두루종가 뚝향나무 앞에서

오래된 나무 앞에 서면
산 조상께 절 올리듯 손 모아질 때가 있다
진성이씨 대종가 경류정 앞마당에
핏줄 푸른 뚝향나무가 대감처럼 위엄있다
소월의 진달래로 유명한 평안도 약산에서 옮겨 와
내리 육백 년을 살았으니 용트림이 맞을 양이라
가끔은 막걸리 말술이나 대접 받는지
윤기 도는 밑동 곁으로
퇴계선생 친필 현판이 그윽하게 굽어보고
미음 자 반듯한 안채가 햇살 아래 한가롭다
불천위 제사 때 근방 먼 곳 이 댁 어르신들
유건에 도포차림 학처럼 드실 적에
종가 지킨 은공이라,
너른 팔에 음덕 돌아 사방이 환하다.




멜론

흰 레이스 직조를 몸에 두르고
인도 여인처럼 고즈넉한 열매가 있다
둥근 몸 안으로
세상의 햇살들 다 들였다 지나갔는지
성근 천 안에
우물 깊이로 찰랑이는 촘촘한 저 단 맛!




미국 쑥부쟁이 흰 꽃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부두 피난배에 꾸역꾸역 몰려들던
사람들처럼,
얼어붙은 뱃머리 뽀얗게 매달린 손가락 위로 흩날리던 눈
발 같은,
제 식솔 배 불리 밥 떠먹이려 등이 휘도록 지게 져 나르
던 흰 바지저고리 아배어매 같은,
그 밥술 달게 받아 먹으려 입 짝짝 다시는 제비새끼 노란
입속 같이 슬픈,
시월 들판에 뭉게뭉게 족보를 늘려가는 목숨.




암산 유원지에서 생각하다

물막이 공사야 하건 말건 앞산 단풍은 오고
단풍이 오거나 말거나 붕어는 굵게 낚였다
남후면 광음리 암산 유원지
일제 때 암벽 뚫어 신작로 내 놓은 안동 들머리 길
키다리 아저씨가 목발 짚은 듯 서 있는 이 붉바위 멋들어
진 길이
가을 햇살에 씨알 여문 물고기나 잡으러 오가는 굽은 길
이 되었지만
한 시절엔 오리배 띄워 연애하던 사람들로 끓고
앉은뱅이 썰매 가르며 스케이트 날 반짝, 폼 나던 때도
있었지
새로 낸 곧은길로 바쁜 사람들 서둘러 옮겨가고
사과밭 옆에 모텔까지 들인 후
고산서원 고래등 지붕이 돌아앉아 어험 헛기침 중인
암산은 이제 노인이 되어 주저앉았지만
물싸리꽃이 제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종일 물속으로 굽어
있는 봄날이거나
더운 시내를 피해 물가에 둥지를 트는 새들 발목을 보러
오거나
언 강물에 엉덩이 붙이고 오래 생각에 잠긴 배들 뒤통수
나 덩달아 들여다보러 오는
안동 사람들 결코 잊고 살지 못하는
무릉 지나 큰 광음리 길 암산 유원지에
올해도 물속까지 단풍이 들어 월척이 곱다




왔구나, 산국

간신히 잊혀져 간 사람이
불현듯 그리워질 때 산국이 또 왔다
뜨겁게 차를 한 잔 우려서
잔 올리듯 가만히 그 곁에 선다
가까울수록 독이 되는 거리가 이 뿐이랴
꽃향에 묻혀 녹차향이 한걸음 물러선다
어긋난 인연들이 새삼 고마워지는
노랗게 절하러 왔구나, 산국




제주를 읽다 1

태풍 안고 하루 절반 넘어 꼬박 쏘다니다가 막차로 집에 왔다
한경 지나 한림 곽지 애월 거쳐 오는 동안 우산은 뒤집히고
조천 함덕 김녕을 지나며 파도가 일구어 놓는 거친 바다를 보다가
한 마을에 한날한시 제사가 같이 든다는 바닷가 내력을 이해했다
구좌 종달리 헌 책방을 다녀오는 정류장에선
가림막까지 들이찬 빗물에 배꼽이 다 젖었다
성산 표선 남원 서귀포에 이르자 그만 날이 깜깜해져
눈에 띄게 사람이 줄어든 거리에 비와 바람을 나르는 소리만 날뛰는
태풍이 도착한 밤
길에 돌아다니는 건 외지인 나 혼자 뿐인 듯
기사와 달랑 둘이서 물을 가르며 기우뚱 버스가 달리는 동안
안덕 대정 추사의 수선화 피었다가 진 동네 촘촘한 어둠을
물방개처럼 건너 건너서 집으로 왔다
이 동네 사람 아닌가 봐요 기사 말에
신호등이 흔들리다가 맥없이 처박히는 네거리를 지나서 온 집
마당에 심은 호박잎이 반갑게 펄럭여도
혼자 떠나 온 여행이 이제야 더럭 무서워진 제주 돌집




제주를 읽다 2

몸집이 작아 병원 가는 일이 잦은 앞집 할망도
고추잠자리 색 슬레이트 낮은 지붕 아래로 들어 기침이 없고
개미도 참새도 제 집으로 돌아가 잠잠하고
선 자리가 평생 제 집인 늙은 동백나무가 도리없다는 듯 밤새 몸을 흔들고
이중창문을 넘어 온 빗물이 방바닥에 흥건히 엎드린 돌집 안방에서 나도 고요하다
납작 엎드린 채송화가 꽃잎을 접고
날 더러 더 엎드려 가만히 있으라 한다
가만있자, 제주에 이르러 날 더러 살라는 건가 더 죽으라는 건가








김 미 현

삶의 경계ㆍ칡꽃 향기ㆍ야간 버스
칼국수 한 그릇ㆍ새벽길
느티나무 아래ㆍ고구마꽃
마음의 달ㆍ쑥부쟁이에게ㆍ호박처럼

|시인의 말
가을은 미안해지는 계절이다.
가을은 고마워지는 계절이다.
내가 상처를 준 많은 사람에게 미안하고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준 많은 사람에게 고맙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미안한 마음도, 고마운 마음도
삶을 통찰해 볼 시간도 잘 갖지 못했을 것이다.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미안하고 고맙다.




삶의 경계

어두운 돌담길을 걸었다.
돌담에 손바닥을 댄 채 걸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걸음을 주눅 들게 한다.
사람들의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길의 경계를 넘는다.
돌담이 심장에 와서 박힌다.
나를 벗어 던질 수 있다는
어리석음이 돌담길에 쓰러진다.
그렇게 그렇게
돌담길 따라 한 바퀴 돌고서야 알았다.
미안해도 미안해하지 않았고
고마워도 고마워하지 못했던
삶의 경계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를.




칡꽃 향기

거친 산길을 지나
산사로 가는 길
지나가는 산벼랑에
보라색 꽃 칡꽃
무게가 버거운 듯
고개를 숙여서 피었다.
내가 받은 상처가 아파서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를
모른 척한 부끄러움이
달달한 칡꽃 향기 속에
조용히 매달려 있다.




야간 버스

야간 버스에 오르면
마지막 무대에 선 기분이다.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온 듯
그렇게 앉아 있지만
검은 동굴을 지나온 냄새를
지울 수는 없다.
여기저기를 뒤지며 들여다보다
가득 찬 곳에서 빈 공간을 찾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지친 어깨들을 싣고
야간 버스는 막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차창에 기대어 잠든다.




칼국수 한 그릇

나에게도 눈부시게 즐겁고
행복한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춧가루 붉은 국물에
누르스름한 국수를
코끝에 머무는 바람 한 조각과
함께 후루룩 넘긴다.
슬프고 마음 아픈 일이 있는 날도
눈부시게 즐겁고 행복한 날들로 기억하며
삶의 건더기를 간간이 씹으며
무딘 칼국수 한 그릇이
더없이 따뜻해지는 날.




새벽길

안개가 낀 새벽
맹인 부부가 걷는 길
갈 길을 정하는 시간은 늦어도
서두르지 않아서
정해 놓은 길을 잃지 않는다.
빠르진 않아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아서
남아있는 어둠이 두렵지 않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서서히 어둠이 걷혀오고
귀가 열리고 바람 소리도 들린다.
새벽길이 열린다.




느티나무 아래

느티나무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보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풀씨 하나가
느티나무 발등을 간질여서
웃음으로 잎이 펄럭이는 소리
한 낮에 지친 빛 한 줄기가
느티나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가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는 순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보이지 않게
주위를 가득 채운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보인다.
가슴에 스며든다.




고구마꽃

생전 처음 보는 꽃이 피었다.
꽃잎이 엷어서
바람 속에 숨어서 핀다.
시리게 흰 얼굴 연보라 입술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사랑했었나 보다.
하루가 힘겹게 왔다가 갔다.




마음의 달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고통이 없다는데
달은 여전히 흔들리고
몸은 마음을 앞지른다.
실제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달의 무게는 덜어지지 않는다.
욕심을 버리지 못한 마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
쉬엄쉬엄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쑥부쟁이에게

익숙해서 서툰 마음
천천히 가슴에 새긴다.
가을 강에 발을 담구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무수한 빗줄기가
이상하게 쓸쓸하다.
방향을 잃지 않아야겠다.
천천히 걸어야겠다.
천천히 조금 미안해진다.
그대에게




호박처럼

호박처럼 살 수 있다면
그러면 삶은 더 단순하고
쉬워질 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왔던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넝쿨 매듭을 잘 묶어둔다.
보잘 것 없는 처마 밑에서도
불빛을 따라 걸으며
호박잎이 기댈 수 있게
온기를 살며시 내어준다.
호박처럼 살 수 있다면
그러면 삶은 더 단단하고
넉넉해질지도 모르겠다.








김 진 회

돌연변이 연작 1ㆍ돌연변이 연작 2
돌연변이 연작 3ㆍ돌연변이 연작 4
돌연변이 연작 5ㆍ돌연변이 연작 6
돌연변이 연작 7ㆍ돌연변이 연작 8

|시인의 말
시를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시를 쓰지 않는 이유는 많다.
나는 시를 써서 돈을 벌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시를 써서 쌀을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시를 써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술 한 잔 사준 적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쓰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시를 쓰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는 있다.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시를 또 다시 술에 취해 시를 써 본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어쩌면
나는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돌연변이인가 보다.
그래도 술에 취해 지껄인 내 시는
니미 씨바.
졸작이다.




돌연변이 연작 1
- 내 몸에는 꽃이 자라고 나는 꽃잎으로 책장을 넘긴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편다
부서진 언어들이
하나, 둘 그리고 셋
또 넷......
제 자리를 찾아 출근을 하고
나는 책을 읽는다.
어느 사이 출근할 곳도 잃어버린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또, 또......
규정에서 벗어난
속칭 돌연변이들이 갈 곳을 잃고 책을 읽는다.
책 속에는 직장이 없고
시 속에는 월급이 없다.
집에는 늙은 아배와 어매가 있고
방에는 몸에서 꽃이 자란다는 아들이 있다.
아들은 꽃잎으로 책장을 넘기며 시를 읽고
어매와 아배는 묵묵히 책장을 넘기는 아들을
오늘도 말없이 바라보고 말 것이다.
아들의 몸에서 꽃이 자라는 것은
어매의 혹은 아배의 혹은 아들의
잘못이 아닐지도 몰라
어매도 아배도 그리고 아들도
먹먹한 가슴을 문지른다.
가슴을 문지르는 자리마다 꽃잎이 피었다진다.
몸에서 꽃이 자라는 돌연변이 아들의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나는 꽃잎에 묻은 이슬로 시집을 넘긴다.




돌연변이 연작 2
-가난에게 영원을 구걸하던 시절, 시집에서도 눈물이 나던
 시절은 나 같은 돌연변이들일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가난에게
영원을 구걸하던 시절은
돌연변이들이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가난해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돌연변이들이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가난에게
영원을 구걸하던 사랑이 떠나고
남자는 시집을 찢어버렸다.
시집에서도 왈칵 눈물이 흘렀다.
그 후 남자는 시를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난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남자는 지독한
가난에게
영원을 맹세한다고 썼던
시를 찢어버렸다.
찢어진 종이에서
오래전에 흘렀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날은 우연히 떠난 여자를 만난 날이었다.

여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를 쏙 빼닮은 아이와
찻집에 앉아 웃고 있었다.
남자는 곁눈질로 그 여자를 훔쳐봤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웃어 주고 싶었으나
초라한 옷이 부끄러운 남자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여자를 훔쳐봤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1인분의 밥을 했고
김치와 새우젓이 놓인
초라한 저녁을 준비했다.
그리고
가난에게
영원을 구걸한다는 구절을 다시 썼다.

글자들 위로 눈물이 흘렀고
눈물이 흐른 자리마다
여자의 발자국이 찍혔다.
아마 여자도 떠나가던 날
발자국 위로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미워할 줄 알았던
여자를 이해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아직도
가난에게
영원을 구걸하는 돌연변이가 산다.




돌연변이 연작 3
-나는 하늘을 날았고, 이내 떨어졌다.

내 몸에서 드디어 날개가 생겼다. 아직 볼품없는 날개였
지만 어깨 15㎝ 아래, 척추에서 6㎝씩 떨어진 양쪽 뼈 밑
에 조그만 날개가 생겼다. 내 날개를 본 사람들은 무섭다
며 하나둘 내 주위를 떠났다. 하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이
내 내 날개가 돈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
으니까.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
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날개가 계속 자라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인간이 아닌 새에
불과했다. 모두들 내 날개에만 관심이 있었고, 내 깃털은
하나에 몇 백을 호가하는 상품이 되었다. 결국 사람들 기
억에 남은 건 내가 아닌 내 날개였다. 사람들은 내가 새처
럼 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내 날개는 내 삶의 무게를
견딜 만큼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 것은 나
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하늘을 나는 기적을 보여주길 바랐으니까. 왜냐면 내
가 나는 순간 그들은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고 믿었으니
까. 어쩌면 내 아버지도 내 날개가 돈이 될지 모른다고 생
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번만 날아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결국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날 것이고 이내 추락하겠지. 그리고 추락하는 내 등에
는 조그만 날개가 파닥이겠지. 나는 잠깐 두려움에 떨기도
했지만, 이내 하늘을 날았고, 이내 떨어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살기 위해 퍼덕이는 내 날개만 남았다. 나는 날개
난 돌연변이다.
하늘을 나는 것은 내 꿈이었다. 결국 내 등에 날개가 생
겼다. 하지만 날개의 크기에 비해 내 삶의 무게가 더 무겁
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도 나는 날아야만 한다. 잠깐이라
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위해서 나는 날아야한다. 이내 떨
어진다 하여도 나는 난다. 니미 씨바.




돌연변이 연작 4
-아직도 당신과의 사랑을 꿈꾼다면 나는 아마 돌연변이겠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이 시를 읽고 있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당신의 옆모습을 보며 당신의 뺨에 살며시 손을 얹
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지요.
  창밖으로 벌써 어둠이 몰려오네요. 저도 당신처럼 밤을
좋아합니다. 밤은 마음껏 외로울 수 있으니까요. 사무치는
그리움이 밤과 함께 찾아온 외로움을 만나 함께 술잔을 기
울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당신이 더 보고 싶어질까 두려워
이른 저녁부터 취해 잠이 듭니다. 이런 날 비라도 온다면
아마 눈물이 조금 흐르겠지요.
  하지만 마음껏 울 수도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지요.
  저는 지금 이 시를 읽고 있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밤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밤을 걷고 싶습니다.
걷고 있는 내 뒤로 당신이 걸어와 살며시 손을 잡아 준다면
저는 와락 당신을 안아버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 뒤로
살며시 다가와 안아준다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당
신의 입술에 긴 입맞춤을 할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당신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밤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르
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일찍 취해 잠이
들려합니다.
  아직도 제가 당신과의 사랑을 꿈꾼다면, 나는 아마도 몹
쓸 돌연변이일겁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의 밤이 되고 싶어요. 내 손은 어둠이
되어 당신의 가슴을 애무하고 싶어요. 내 혀는 당신의 슬픈
기억이 되어 당신의 몸이 만들어 놓은 곡선들을 따라 흘러
가고 싶어요. 오늘밤은 당신의 달뜬 얼굴을 보고 싶어요. 아
마 당신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거친 숨을 뱉으며
내 허리를 감싸고 잠이 들겠지요. 그럼 난 당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한다 속삭일 거
예요.
  오늘밤은 당신에게 꼭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요.

  P.S. 하지만 아직도 당신과의 사랑을 꿈꾼다면 나는 아마
돌연변이겠지요.




돌연변이 연작 5
­내 심장 속에는 아직도 사랑하는 네가 살아. 그건 아주 더러운 기분이지.

내 심장 속에는 아직도 네가 살아.
그건 아주 황홀하면서도
더러운 기분이지.

내 심장 속에는 여전히 네가 자라.
그건 아주 지겹도록
멋진 기분이야.

마치 비오는 날 홀로 술을 마시며
습작된 시를 읽는 기분이지.

창 밖에는 비가 오고
빗소리가 내 몸을 기어 다니고
자음과 모음들이
파편화되어 너의 이름을 만들고
나는 네가 그리워 술을 마시는
아주 더러운 기분이지.

사랑은 결국에는 떠나고
남은 사람은 결국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

모두들 그렇게 산다고 말하는 것,
그건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야.
때로는 떠난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어.
그 일이 조금 더 합리적이며,
공평한 생각이지.

내 심장 속에는 아직도 사랑하는
네가 살아.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은
너도 나처럼 아팠으면 하는 날은
너를 꺼내고는 하지.




돌연변이 연작 6
­나는 알아, 너는 지금 누운 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제(弟)야,
너는 지금 누워 말이 없구나.
나는 지금
우리가 나눈 수많은 말들이
누워 있는 너의 몸으로 새겨지는 걸 느끼고 있어.

제(弟)야,
너는 불러도 대답이 없구나.
나는 지금
우리가 마신 술들이
너의 발에 뿌려지는 걸 느끼고 있어.
너는 우리가 좋아했던 술집
그 옆에 놓인 화분처럼 자라지.

제(弟)야,
세상은 시 쓰는 우리를 동정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
겠지.
제(弟)야,
오늘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났지.
제(弟)야,
그들은 아직 숨 쉬고 있는 너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돌아 왔더구나.

제(弟)야
나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그들의 얼굴에 뿌려 주고 싶었지만
내 품에 담고 너에게 왔지.
그리고 너의 발에 뿌렸지.
네가 이름 모를 꽃처럼 자라는 것을
꽃잎이 하나하나 시가 되어 간다는 것을

제(弟)야,
나는 알아,
너는 지금 누운 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누워 있는 네 몸 위로
우리가 쓴 시들이 새겨지고 있다는 것을




돌연변이 연작 7
­가난한 우리는 가난한 안주를 놓고 가난한 소주를 마
신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도 가난하다.


가난한 내가
더 가난한 너와 시를 쓴다.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
우린 이미 돌연변이였다.

가난한 내가
더 가난한 너와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며
시를 쓴다.
그런 이유로 이미 너와
나는 돌연변이다.

가난한 내 시는
더 가난한 너의 시를 읽고
더 가난한 너의 시는
가난한 나의 시를 마신다.

우리는 가난했다.
시를 써서 가난한 건지
가난하니까 시를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밤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하다는 사실에
오늘도 시를 놓고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아마 내일은
더 가난한 시를 쓸지도 모른다.




돌연변이 연작 8
­나도 때론 당신이 필요한 날이 있다.

엄마에게도 때론 엄마가 필요한 날이 있듯
당신에게도 내가 보고 싶은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도 때론 울고 싶은 날이 있듯
당신에게도 내가 필요한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전 대 진

욕실의 살인자ㆍ루비
붉은 점ㆍ초
술 먹으러 가자ㆍ간접흡연

|시인의 말
올해도 잊지 않고 독촉해주신 동인분들께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 해에 이틀은 저도 시인인 것 같아서요.
내년에는 며칠은 더 시인이길 바라봅니다.




욕실의 살인자

노란 조명을 받으며
손톱보다도 작은
나방이 날고 있었다 샤워를 하던 그는
천정으로 등 뒤로 도망치는
나방을 쫓고 쫓아
샤워기로 나방을 떨어트렸다 세면대 위에서 바동바동
물결을 거스르려 나방이가 날개와 발을 움직였다
결국 배기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는데
왠지 그가
물을 잠궜다
나방은 물 묻은 날개를 털더니
곧 날아올랐다 천정위로 갔다가 등 뒤로도 갔다가
욕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수증기에 흐려진 거울 속에서
그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루비

어떤 날,
어제와 혹은, 1년 전의 그 어떤 하루
또 혹은 오늘 같은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날 뭐가 우습지도
뭐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날

너무 낯익어서
특별한 하나를 찾기도 어려운 화장실,
그곳에 있었다

관리인이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리 젖어있지도, 얼룩이 있지도 않은 하얀
타올 위에 있었다




붉은 점

빨갛고,
주황색 점이 박힌
다리가 많은
무당벌레

화장실에서 혼자
빛나고 있었다


초가 탄다
직선 같은 곡선으로
흔들리지도 않고

그때
한숨이었을까 어떤
움직임이나 말소리였을까
그를 둘러싸고 있던 적막이
휘청거리고 휘청거리는 적막의 움직임을 따라
직선 같은 곡선에 곡선이 더해진다
방안을 수놓은 벌건 노을이
너울너울거린다

초가 탄다
그리고 타는 촛불을
그는 가만히 보고 있다




술 먹으러 가자

오늘은 왠지 정말
술이 땡겨
평소 술을 즐겨 하지 않지만
팀장이 권해도 입만 대고 말지만
오늘은 진짜 술이 땡겨
창밖은 이미 어둡고
다시 옷을 입는 것도 귀찮지만

언젠가, 어제 같은 그날
다른 게 있다면
조금 춥고
눈이 오던 날,
한바탕 니가 욕을 해대고
그 욕에 참을 수 없이 유쾌했던 날

그날이 땡겨
오늘은 왠지
그날 그 눈발이 땡겨




간접흡연

나는 담배를 싫어하지만
가끔 옆에 있다 보면 깨닫게 돼

우리가, 사실은
입김을 공유하는 사이였다니

키스보다 좀 더
은밀한 것 같아
나는 담배연기가 너무 싫지만
네 입김을 공유하고 있는 게
흡 하고, 빨아들이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좋아
네 한숨을
간접흡연 한다는 게





∥특집∥
­2015년 월간 詩文學 4월호 글밭 동인 특집

동인지 시대를 꿈꾸며
­ 글밭동인회 ­


  올해 계간 자유문학 봄호와 월간 시문학 4월호에 각각 글밭동인회 특집이 실렸다.
  올 상반기에 발행된 글밭 38집에 자유문학에 실렸던 내용을 재록한데 이어 이번 하반기호에는 시문학에 실렸던 내용을 특집으로 재수록한다.



2015년 월간 詩文學 4월호 글밭 동인 특집


동인지 시대를 꿈꾸며
글밭동인회


  동인회의 탄생
  1969년 4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시를 쓰는 20대 청년 신승박, 김성영, 변호섭, 이홍범, 임병호, 조병국, 임명삼이 한 자리에 모여 문학 동인회를 결성했다. 출범 당시는 지금처럼 ‘글밭’ 동인회가 아닌 ‘청포문학동인회’였고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등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서울이 아닌 지방의 소도시에서 문학 동인지를 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안동은 문향의 고장으로서 조선조 퇴계나 농암, 그리고 근대에는 이육사 같은 문학의 토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동인회 결성 후 3개월 만에 드디어 ‘글밭’ 창간호를 발간한다. 당시만 해도 문학작품을 프린트 판이 아닌 활자로 찍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책이라고는 만들어본 적이 없는 소도시 인쇄소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도시에 있는 인쇄소에서는 고작해야 청첩장 수준의 인쇄물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프린트물이 아닌 활자로 문학작품을 찍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활자가 부족해서 시내에 있는 인쇄소를 뒤져가며 활자를 빌려와서 간신히 창간호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글밭’ 창간호는 안동에서 활자로 문학작품을 찍어내는 시초가 되었다.
  ‘글밭’은 창간호 머리말에서 “‘글밭’이라 함은 쉽게 글을 경작하는 밭”이라고 규정하고 “‘글밭’을 통해 우리말의 보다 예술적인 순화와 미처 찾지 못한 우리말다운 언어를 캐어보고자”한다고 하였다.

  그간의 발자취
  ‘글밭’이라는 제호의 동인지를 발간하고 난 후 2호부터는 아예 동인회 이름도 제호와 같이 ‘글밭동인회’로 바꾸고 거의 매년 한 권씩 동인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1972년까지 7집을 발간하면서 이오덕, 박시교, 이제호 등이 참여하면서 ‘글밭’은 한층 더 풍성해졌다.
  그런데 1970년대 초가 되면서 각 지방마다 한국문인협회 지부를 결성하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역에 문학을 하는 사람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협 지부를 창립하기 위해서는 글밭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야 했고 이 때문에 동인지는 잠시 휴간을 하게 되고 마침내 1972년에 문협 지부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그 때부터 모든 동인들은 지부 기관지인 ‘안동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5년, 글밭 창립 멤버인 김성영, 임병호 등과 안동문학에서 시를 발표하던 김지섭, 김윤한, 권기태 등이 합류해 ‘글밭’ 동인지 제8집을 속간했다. 초창기와 달리 속간호부터는 시 동인지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 이후 매년 동인지를 발간하는 것을 비롯해 지역 문학의 저변 확대와 수준 향상을 위하여 문학제전, 시 창작 워크숍, 시와 그림전, 시와 사진의 만남전 등 문학행사를 거의 매년 해 왔고 특히 동인활동을 하다 일찍 타계한 신승박 시인의 시비를 안동 영호루 경내에 건립하기도 하였다.
  ‘글밭’은 원칙적으로 중앙문단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동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그동안 여러 동인들이 문예지 등을 통해 동인 활동과는 별개로 활발한 문단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매년 동인지를 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여건상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1985년 글밭 동인지 속간 이후로는 현재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동인지를 발간해 왔다.

  동인지로서의 글밭 
  문학 동인회의 본래 가치는 구성원들의 ‘공통적 이슈와 실험정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글밭동인회가 이러한 시 동인회의 전통적 가치에 충실했었던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역에서 동인회 활동을 하다 보니 시인들의 수도 한정이 되어 있는 까닭에 운동으로서의 동인회 활동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70~80년대 많은 문학인들이 시의 효용성을 앞세운 문학 활동을 중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매도하는 시절에도 우리는 그에 휩쓸리지 않고 ‘글밭’이 추구하는 고유한 가치는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비록 여느 동인회처럼 깃발을 앞세운 시운동은 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글밭’을 통해 우리말의 보다 예술적인 순화와 미처 찾지 못한 우리말다운 언어를 캐어보고자”했던 창간 정신에 충실해 예술적 관점에서 순수하게 시를 대해왔던 것은 일관된 가치였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향의 설정은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몫이기도 하다.

  50년을 향하여
  지방이라는 공간적 한계성, 그리고 문단의 무관심 등으로 동인회의 활동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글밭동인회는 1969년 출범 이래 2019년이면 창간 50년을 맞게 된다. 불과 동인지 몇 권을 내고 사라지는 대다수의 동인회에 비하면 어쨌든 우직하게도 오랫동안 버텨 온 셈이다.
  물론 예전에는 발표지면이 부족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각 지역마다 동인회가 있었고 누구 하면 어느 동인 할 정도로 동인회 활동이 주목 받고 활발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우리들의 동인회 활동이 웅덩이 속에서 부는 작은 바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시대는 언제나 바뀌듯이 동인지들이 주목받는 때가 다시 찾아올 것을 믿는다. 유명 문학지에서도 동인 활동에 대해 지면을 고정적으로 할애해 주는 것은 좋은 징조의 하나이다.
  글밭동인회에서는 1969년 창간 이후 현재까지 서른일곱 권의 동인지를 냈다. 초기 동인회의 멤버들이 일흔의 나이를 넘기고 벌써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있지만 우리는 꾸준히 대를 이어 ‘글밭’을 가꾸어 왔듯이 황소처럼 우직하게 ‘글밭’을 일구어 나갈 것이다. 아직은 어렵고 힘들지만, 반드시 다가올 화려한 동인지 시대를 꿈꾸며 현재 14명의 동인들이 글밭을 일구고 있다.




『글밭』 동인들의 시


눈물

김지섭


아는가
눈물이사 그것이

기나긴 슬픔의 가지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든

기쁨의 잔 가쟁이 끝에
송이송이 맺히어 오든

어쩌면 모두가
희디흰 참회의 빛깔인 것을

그대
정녕 아는가




손이 차워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강희동


건네는
손이 차워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겨울비 던지는 강가
마른나무 가지 똑똑 분질러
따닥따닥 제 몸을 뒤틀며 엉그는
꽃불에 손을 쬔다
따스한 손의 온기는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악수를 청한다
손이 차워지면 하얗게 내리는
눈발도 허전한 눈물이 된다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위하며
날은 개이고 또 태양은 따가운
볕을 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다, 혹은 파도

임두고


어느새 풍화된 내 머리카락들
세월은 희끗희끗 수평선을 넘고 있다
쑥쑥 발목이 빠지는 일상처럼
해변 모래벌은 왠지 낯설지 않건만
바다가, 거대한 바람 빗자루에
수 억 년을 쓸리고 쓸리면서도
끝내 풍화되지 않는 바다가
늘 낯설다
저, 넘쳐나는 푸른 피
벗기면 벗길수록 등푸른 생선비늘처럼
다시 돋는 저 파도
쓸리고 벗겨지는 것은
오히려 바다가 보고 있는
내 몸의 외설과 나태와 음흉과 오욕과.....
발아래 물거품으로 녹아내리는 파도조차
모래알로 흩어지는 내 영육일 뿐
이제 돌아서면 시멘트바닥 위에 다시
내 무릎을 꺾고 허리를 굽혀야 하거늘
희푸른 파도 몇 겹을 둘둘 말아
어깨 위에, 가슴 속에 꾸려 본다
이후 며칠이나마 한 겹은 이부자리로
또 몇 겹은 벽걸이 달력으로
펼쳐볼 수 있으려나




귀향

임관혁


실같은 인연을
끝내 탯줄 끊듯 끊어 버리고

눈물 한 겹 고이 접어
고깔 접듯 접어 두고

허이 허이
가는 길 혼자 가는 길

괴나리 봇짐 하나도
힘겨워 벗어두고

빈 손 빈 맘으로
동행 없이 가는 길

태어난 죄 값으로
살아온 죄 값으로
삼베옷 한 벌에
부끄럼 가리 우고
허이 허이
가는 길 혼자 가는 길




구슬비

김윤한


어르신 초등반 한글교실
할머니들 오순도순 모여 있는 교실 창밖에
때늦은 가을비 내리고
1교시 받아쓰기 시간 지나
손녀 뻘 여자 선생님의 음악시간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병아리들처럼 착하게 따라 부르는
동요 ‘구슬비’ 노랫소리
가만가만 교실 빠져나와
창틀 거미줄에 음표로 대롱거리고
박자에 맞춰 구슬구슬
때늦은 가을비 종일 내리고




그리움이 있는 귀로

권기태


어둠이 밀려오는 거리에 서면
습관처럼 찾아드는 외로움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돌아와
불꺼진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다.

길들여진 일상의 굴레에 매여
어둠의 골목을 돌아드는 귀로
걸음걸음마다 고적한 낙엽이
상실된 신뢰의 표정처럼 쌓인다.

상처받아 변형된 유전자를
우리들 세포 안에 심어가는 것은
다가올 불행한 운명의 예고인가?

위선과 허영, 가식과 거짓으로
갈등과 분노의 조장일랑 그만두자
사무치는 아픔의 인내보단
너그러운 용서와 헌신으로
강렬한 믿음의 싹을 티워 나가자

진솔한 웃음과 황홀한 노을이
푸른 저녁연기 속에 묻히는 때
어두움 걷어내는 밝은 등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김이 오르는 정겨운 밥상과
손 모아 기도할 좁은 자리와
하루를 엮어가는 소근거림이 그립고

한 올 한 올 우리들 삶의 희망이
씨줄과 날줄로 곱게 짜여가는
그런 정겨운 하루의 마감이 그립다.

자정을 향하는
찢어진 망상으로 방황하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린다.




물레방아

이위발


오늘을
괄호 안에 넣어보고
풀어보고, 지워보고
내일을 위해 찝쩍거려 보지만
낮달 말뚝에
박혀 있는 소 한 마리
소의 목엔 올가미가 걸려있고
그림자는 올가미 끈이
베푸는 괄호까지만
돌고
돌고 도는.




비 오는 날 너에게

김진회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우린 길을 걷고 있었지

너의 어깨 위로 얼룩진 빗방울을 보며
예쁜 꽃이 피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넌 작고 예쁜 꽃이 되었지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너는 오롯이 하나인 것처럼 빗방울에 흔들렸고
사람들은 너의 아름다운 몸짓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꽃잎과 꽃잎 사이로 난 너의 균열을 보며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벌어지는 상처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으니까

내가 너의 상처를 보았을 때
우린 길을 걷고 있었고
너는 아름다웠고
비는 참 지랄 맞게도 내렸지.




어머니의 밥

김미현


아직도 고향에는
솔가지 불로 밥을 짓는
어머니가 있다.

가마솥 한 가득
밥이 익고 국이 끓으면
어머니의 사랑을 그릇에 담는다.

마당 한 켠이 좁도록
모두 몸을 낮추어
한 그릇 한 그릇 비운다.

살아갈 힘이 어디서 오는 지
어머니의 밥으로
삶의 무게만큼 채운다.




그 꽃 지난 다음에

강수완

우리가 한세상 얼씨구 어깨 걸었던 것은 지나고
우리가 한 시절 어울렁 넝쿨이었던 것은 지나고
우리가 한때 까르르 숨 넘겨 사랑한
서로의 목숨이었던 것은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한 때 하늘이었던 때를 생각 하는가
우리가 한때 꽃이었던 때를 그대 생각 하는가
우리는 나누어져도 한 몸이었다가
우리는 나누어져도 한 곳이었다가

떨어져 그리운 동안 다시 꽃이었다가
이렇게 그리운 동안 잠시 바람이었다가
꽃도
바람도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애기똥풀

김여선


길섶이나 미루나무 아래
무더기로 피어있던
노란똥꽃
비 맞으며 가슴 아프게 피었다가
비 그치면 말없이 고개 숙이는
노란똥꽃
산다는 게 가끔은
고개 숙이면
남의 말을 들어 주듯
조그마한 바람에도
고개 끄덕일 수 있는 거
오늘도 길섶이나 미루나무 아래
노란똥꽃 찾아
집을 나선다.




눈밭의 아이들

조용식


밤 새
나이가 변해버린 빈 터에
아이들의 폭소가 마구 내리고 있다.
북경원인들의 설화가 골목마다
넘치고
검은 기둥 곁에도
웃음은
아주 하얗게 묻어
큰 아이들은
갑자기 기침놀이다.

테이블과 의자 위의
먼지를 먹은 환자는
눈사람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고
삼남지방에선
누이동생의 엽서가
날아오고 있다.

목탄이 타는 난로 곁에서
젖은 손을 말리고
동그란 웃음을 줍는 순간
우린 아직
하나의 동정이다.




작은 춤

전대진


흔든다 강아지풀
머리를 어깨를 몸 전체를
밤바람에 탈춤 추듯
흔들어댄다

춤춘다 강아지풀
카시오페이아
초승달을 이고
지구의 밤하늘 뒤흔든다.




연등

천승현


1
가슴에 타는 불 곱게 밝혀
하늘에 걸어두고 돌아서면
산 밑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득하니 멀기만 하고
스치고 가는 바람조차
적적하구나.

2
화창한 볕 아래 내다 걸린 빨래처럼
화사한 봄 햇살 아래 내다 걸린 소망들이
건듯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소리 없이 빌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빈 집

김성재


그가 사는 곳
세 시간 지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나의 모든 흔적들은 빠져나간

그에 대한 그리움만 향긋한 곳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곳
지금 나는 있고 그는 없는
그가 사는 나는 살지 않는

그와의 모든 추억들이
곳곳에 배어있을지언정
나의 모든 흔적들은 사라지고
그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만 있고
그가 없는 여기에서
과거를 곱씹고 추억하고 후회하는
여기에 살지 않는 얼간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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