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말
우리 글밭은 약속한 대로 연 2회 출간 계획을 지켜 이렇게 37집을 내게 되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작품을 많이 쓴다는 것은 글을 더 잘 쓰게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을 계속하여야 하겠다.
그런데 젊은 날 그렇게 많던 文靑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나이가 들수록 왜 자꾸 붓을 꺾어버리는 것일까? 피곤한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때문일까? 문학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이유야 여러 가지일 테지만 무엇보다 그런 문인들은 누구보다 훌륭한 작품을 써서 제일의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가장 큰 결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꼭 남을 앞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편의상 제국주의 의식이라고 하자.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이 제국주의 의식은 인간 문화를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 때문에 인간은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고 갖가지 갈등을 일으키고 그래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아주 큰 원인이 된다. 자기가 남보다 잘 났다는 생각, 남은 언제나 나보다 못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어 그것이 그의 맑은 영혼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보다 좋은 작품을 써서 자기가 최고가 되려는 강한 제국주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그들은 의욕을 잃고 좌절하고 패배의식에 휩싸여 시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렇게 대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기를 분리된 독특한 우월적인 존재로 보고 사실은 그렇지 못한 자신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는 데에 안간힘을 쓰다가 안타깝게 자기의 본분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며 동시에 수없이 많은 인간족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만의 몫을 가지고 자기만의 능력과 본분이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채송화는 해바라기에 비해 키가 작고 꽃도 아주 작지만 결코 그 아름다움이 뒤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우주의 모든 것들은 다 각기 존재의미가 다르다. 모든 것은 각기 자기만의 몫을 가지고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가 조화롭게 모여 전체를 이룬다. 그 어느 하나도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이 없이 만물제동萬物齊同인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자. 나의 시는 나의 앞뜰을 쓰는 일이며, 그의 시는 그의 앞뜰을 쓸어가는 일인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세수를 할 때는 자기 낯을 씻지 상대방의 낯을 씻지는 않는다. 이건 마치 자기의 죽음을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시는 자기만이 쓸 수 있다. 마치 귀뚜라미가 매미울음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시를 쓰려고 하지 않고 남의 시를 부러워하고 나의 시를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좌절하거나 남의 흉내를 낸다든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어떻게 남의 위에 올라가 남을 누르려는 제국주의 의식에 사로잡힌다는 말인가?
자기의 시는 이 세상에는 결코 둘도 없는 자기영혼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궁극의 경지를 찾아 뼈를 깎으며 정진하는 수행자의 자세로서 시를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영혼의 앞뜰에 내린 눈을 쓸면서 바깥세계로 향하는 길을 발견해 가는 것이 시업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그리하여 그는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언어를 찾게 되고 자기만의 미학을 갖게 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때로는 남의 영향을 조금은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 동요되거나 다른 이의 아류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가수 나훈아가 되어야지 결코 가수 너훈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자기 얼굴을 성형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자기 얼굴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나다운 시세계를 가질 때 그것이 좋은 시가 되고 남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재주가 모자라서 남의 감동을 못 받으면 또 어떤가? 혼자서 자기의 시를 읊조리면서 차를 한 잔 하거나 한 잔 술을 하면서 자족하면 될 일이 아닌가?
조용히 들어앉아 먼 산이나 가끔 바라보면서 자기를 그윽하게 살펴나가자. 그리고 자기 마음밭에 자기만의 시의 씨앗을 뿌려 정성으로 가꾸고 가꾼 대로 거둘 일이다. 겨울 저녁 어스름이다. 먼데서 땅거미가 어슬렁어슬렁 기어오고 있다. 이제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곧 샛별 하나 반짝이며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의 창에도 다사로운 불빛 가득 밝아올 것이다.
차례
우리들의 말 3
강수완
근심하는 국화 14
금봉암 단풍 15
도산에서 16
늙은 뿌리의 일 18
기대어 놓고 보니 19
멍에 대한 기억 20
수수밭 21
강희동
지하철을 타고 24
물의 길 25
길을 가다 26
입춘 무렵 28
안개길 29
잠복기 30
월식 31
나비 32
약속 33
아내에게 34
권기태
호안길 36
거미의 방 37
빈 사발에 물을 마시다 38
김미현
섬 꽃 42
메밀꽃 43
접시꽃 44
봉숭아 45
능소화 46
돌탑 47
억새꽃 48
산행 49
가을 앞에서 50
김여선
칼국수 52
멀리 있어 아름답다 53
개미지옥 54
개뿔 56
흉터 57
흘러간다 58
단풍 59
컵라면 60
가을 오후 2시 62
차표 한 장 64
김윤한
그리운 도시락 66
달팽이 67
감꽃 68
비행운 69
모래시계 70
파피리 71
시인족 72
세상 모든 슬픔 73
감꽃목걸이 74
복숭아 75
김지섭
늘그막 78
너는 거기 79
은사시나무 80
이위발
바다의 전설 82
애월에서 83
연 84
복사꽃 85
상처, 그 외로움에 대하여 86
임관혁
국화 꽃 피면 88
자리 89
이유 90
길목에 91
낙엽 92
편지 93
마침표 94
길 가는 나에게 95
나는 참 바보였다 96
엄마의 가슴 98
꿈 99
임두고
지방에서 102
삼박골 연가 104
이런 부부 106
이상한 아저씨들 108
행간밀애行間蜜愛 110
안개의 역설 113
선생 114
목련 보법 117
전대진
자책 120
나의 방 122
새벽 고시텔 123
불금 124
꺼지는 법 126
정독법 127
안동 버스 128
바위 129
구애 130
천승현
2014년 4월 16일 134
1992년, 그해 138
업業 139
산 속의 섬 140
우물가 141
그대로 142
시월의 거리 143
외로움 144
하루하루 145
강수완
근심하는 국화ㆍ금봉암 단풍
도산에서ㆍ늙은 뿌리의 일
두 개의 감을 기대어 놓고 보니
멍에 대한 기억ㆍ수수밭
|시인의 말
올해 긴 제목으로 나온 시집 속, 죽비 같은 시인의 말이 있어 옮겨 온다.
“남의 논밭 기웃거려 탐내지 말고
나의 대지에서
내가 뿌린 한 알의 씨앗에도 버거워하며
시와 함께 소요할 것이다.
꽤 오래 되었다.”
자백하건대,
아직도 나는 남의 논밭의 작물이 부럽고 탐스럽고 배 아프고 허기지다.
소질은 없고 갈 길은 멀고 마음은 분주하다.
꽤 오래 되었다.
근심하는 국화
최선을 다하여 근심이 깊더니
전력을 다하여 국화가 피었다
삶이 외로움 쪽으로 흘러갔기에
꽃은 하는 수 없이 외로워졌고
바람에 기대어 잠깐씩 졸기도 하다가
불에 덴 듯 며칠씩 떠돌기도 하였다
고드름처럼 날카로워졌다가
단풍처럼 얼른 서러워졌다가
골똘히 맺고 싸고 묶어서
상강 날 천천히 촉수를 펴 보는
국화 붉은 손바닥
금봉암 단풍
찬기가 좁은 방안까지 돌아 이불깃을 끌어 당겨 다시
잠을 청할 때
가마솥에 쌀을 안치는 어머니 소리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불을 돕던 잠 많은 열다섯 때처럼
건너편 산들이 아궁이 장작처럼 착착 포개져
타닥타닥 단풍이 타는 봉화 금봉암
밥물이 잦아질 때면 큰 불 몇 개를 꺼내
잔불로만 살살 뜸을 들이던 밥 냄새가 저러했던가
눈썹까지 서리가 내린 큰 스님 말씀은
쉰이 넘어서야 간신히 무딘 귀가 뚫려 맛있게 들리고
법당 뒤 꿀밤이 지상의 끼니 한 그릇으로 내려 와
설핏 몸을 바꾸는 시간
일체가 한결 밝아지는 저녁답
신자가 되어 처음 법당에서 절하듯
단풍이 온다
도산에서
도산에 비 내리는 날은 원촌리 앞산이 태산같이 넓어진다
강이 피워 올리는 안개를 집사처럼 거느리고
유유자적하는 도포자락의 땅에서
성학십도를 궁리하다가 지친 몸을
달밤에 매화 보는 일로 달래는 퇴계선생과
독립 하나만을 생각하며 시를 쓰다가
해방 바로 앞 겨울에 아까운 나이 마흔을 연처럼 놓아버린
뼛속까지 지조 높은 시인 육사선생의 목소리도 들리고
이제는 귀가 어두워져 세상만사가 그만 편안해 진 퇴계 종손 어른도
고무신에 지팡이 짚고 집 앞 늙은 은행나무를 한가로이 거닌다
낙동강 발원지를 지난 물이 자갈돌 깔린 아래로 흘러오다가
아홉 번 꿈속 같은 경치를 만들어 도산구곡이라 하였으니
주자가 취해 살던 무이 구곡과 무엇이 다를 텐가
일찍이 택리지에도
시냇가이되 고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오래 살기 알맞고
장삿배가 들락거리는 큰 강 옆처럼 분주하지 않고
대신 작은 여울이 있어 거룻배를 타고 물자를 실어 나르기에 편하고
논밭이 멀지 않아 농사짓기 수월하고
머지않은 곳에 소백산맥이 턱 버티고 있으니 난리에 몸 피하기 좋고
사대부들이 마음 놓아 공부하며 살기에 맞춤인 곳이라 하였으니
도산에 비 내리는 날은 옛사람과 한적하게 만나
우주와 사람과 만물의 이치를 지극히 궁구해 보리라
늙은 뿌리의 일
늙은 소나무 뿌리가 노숙자처럼 바닥에 누워 사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일은 한 번도 안 해 보고 산 세상이 늘그막에서야 원통하여
한 번 만 땅을 밀고 올라 와 사람 사는 세상 구경이나 실컷 해 보려는 요량이지
발바닥에 등이 치여 반질거려도 흙을 붙잡고 허허 다만 웃기만 할 뿐
내일 엎어져 구들방 장작이 되어도
오래 품어 살아서 마음이 뜨뜻해져 있는 일은 한 번 해보고나 가야지
송화 가루 난분분 사월에 흩어 보는 거
그거, 소나무라면 다 할 줄 아는 일이니
젊어서야 한 뼘 땅이라도 더 차지해 뿌리 단단히 살아남으려는 생각에
옆에 참나무가 있는지 오리나무가 있는지
오동나무가 넓은 잎 드리워 신선놀음을 하는지 모르고 살았으니
뜨거워지는 한 가지 일에 뼈를 다 드러내 놓고 몰입 하는 일
뿌리라면 마땅히 땅 밖으로 나와 맨 몸으로 구불텅 뻗어 볼 일이지
두 개의 감을 기대어 놓고 보니
문학관 뒤뜰, 한창 잘 익어 가는 감을
호기심 많은 관람객이 성급히 따서는
한 입 베어 물고 맛을 봤는지
먹다가 팽개치고 속절없이 가 버린 것을
성한 것 두 개를 들여 와
함민복 시인의 시 엽서 옆에 나란히 올려 두었다가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아 글쎄
늦게서야 장가 든 함 시인 뺨은 말할 것도 없고
쑥스럽게 기대어 살짜기 왼고개 트는
신부의 새찹은 얼굴까지
여한도 없이 둘의 사랑은 붉고 붉어서
인삼 팔아 근근히 먹고 사는 살림에도
가을 강에 노을 번지듯 오래 행복하더라
멍에 대한 기억
달개비 꽃이나 한참씩 들여다보며 앉아
그 사람이야 그저 오래 된 멍이라 부르기로 하자
수수밭
요사이 고민이 깊어 마음에 수수밭 수만평이 들어 왔다
서걱대는 소리와 함께
수수 잎이 먼저 긴 칼이 되어 핏방울을 튀기자
모가지를 내어 놓은 온갖 생각들이 툭툭 떨어져
사방 불타는 적벽대전으로 덮였다
누가 이토록 울음이 배어나게 하는가?
꺽꺽대며 할퀴며 심장에 북소리를 내어 일어서게 하는가?
세상만사가 그만 귀찮아진 사람들이
장렬히 한 번 죽어 보지도 않고 그래서
속속 무당개구리처럼 산으로 들었구나
사방 터진 들판에서 기댈 곳 없이 앓다가
피가 도는 수수밭에서 무릎을 꺾고
짐승처럼 붉게 울고 섰구나
강 희 동
지하철을 타고ㆍ물의 길
길을 가다ㆍ입춘 무렵
안개 길ㆍ잠복기ㆍ월식
나비ㆍ약속ㆍ아내에게
|시인의 말
갈수록 길이 아득해진다.
살아 온 길 서 있는 땅 조차
길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길이 비틀거리기 때문이다.
믿을 것이 못 된다 내 자신도 그대도
애초 믿음이란 믿지 못함으로부터 생긴 말이다.
순리, 물 흐름이 길이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 삶이 흐르다
멈춰 선 곳 역驛이다
역은 제 이름 내 걸고
사람들을 끌어내리기도
내장에 올려 떠나보내기도 한다
역사驛舍를 벗은 후 제 삶터로 흩어지고
벗고 스친 옷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짐짝, 하찮은 사람도
군자君子역에 내린다
폼 나는 명찰 단 어느 봄날
나는 가르침 주고받는 교대역 거쳐
상서로운 풀빛 번지는
서초瑞草역으로 간다
물의 길
산 능선에서
아침이 오는 길을 보았다
해가 떠올라 빛을 내보내는 하늘길
바람이 계곡을 타고 거침없이 오르는 바람길
그 계곡을 조용히 스며들어 조곤조곤 내리는 물길을
산객도 길을 찾아 능선을 탄다
모두가 오르는 길이었다
터질듯 주춤거리는 연분홍 꽃들에게도
봄 마중을 위해 물을 끌어 올리는 나무들도
때 맞혀 보내고 맞아야 할 길이 있다
숨차게 오르는 길섶을 따라
젖어서 스며서 몰래 내리는 물길
아래로 구르며 제 몸조차 놓아 버리고
하심下心으로 흐르는 물의 노래를 보았다
산 아래 집들이 낮게 엎드려
자옥한 안개 속 와와 오르는 야유
사람들은 그 길을 비껴가고 있었다
길을 가다
내
오라하지 않아도
봄은 가듯
네
피라하지 않아도
진달래 혼불 오른다
한 날 한 시
일제히 꽃 불 붙지 않아도
제 때 제 자태로 꽃이 핀다
너 가라하지 않아도
물 계곡 따라
산 아래로 내리듯
나 오라하지 않아도
비스듬히 산 능선 오르며
길을 낸다
꿀밤나무 참꽃이나 우거진 숲
그 속을 걸어가는 산객조차도
길을 가는 것이다
길을 내며 들이며
피고 접고 흔들리며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입춘 무렵
이른 아침 산행 길
약수터 양지 기슭
철 이른 진달래가 분홍 입술을
산도 몸 풀어 푸석한 흙 흘리자
봄 풀 싹이지 마구 밀어 올린다
올 때가 된 것이다
복사꽃들도 몽우리를 터질듯
두근거리는 눈이 휘황한
어디서 본 듯한
그래 봄이다
안개 길
길
산 길
개도 따라 나서는
애완개 길
안개 이는 길
해도 젖어 희미꾸리한 날
안개 이는 날
산길
사는 길이 묻힌다
나무는 나무라는 듯 서서
새소리 흐지부지 흘려도
자옥하게 일어서 나를 묻는
해 안 뜨는 안개 이는 날
자옥자옥 새소리 따라
살아있는 산길 따라 가 본다
길, 길길이 뛰는
길이 누워있다
안개의 길이다
사람의 길이다
잠복기
이제
불량자도 지나갔어
신용
불량자도 아니라네
한 시절 머무른
무거운 채무자
짐을 벗었네
홀가분하네
과분하네
아니 분하네
이제 잠을 자겠네
오래 미안했어
몸에게 혼에게
잠에게
자 – 잠을
월식
이제는 너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
귀뚜라미 우는 만치 저 냇물
흐르다 지치면 달도 지고
너무 늦게 알았다고 서둘러 들꽃이 핀다
달맞이 꽃 노랗게 눈물 흘리는 밤
다시는 달빛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물가에 쪼그려
물위에 편지를 쓴다
빛 그림자 더불어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달맞이 않겠다고
구름 속 도요새 울음 묻으며
달맞이꽃도 진다
나비
나비
춤
추며 나는 나비
봄
빛도
잠깐 졸음 사이
나비
홀
로
청산에 그림처럼
날아
흘러
흘
러
약속
꿈 속
가락지 끼어
연못에 빠진
월식
내 아닌 널 반지 안에
손가락 둘째 마디 동그란
그 마음 안고
살아간다는 언약
그 사람의 살처럼
찰싹 붙어 그대가 되어
그렇게 빛과 삶이
월광교향곡 달빛 춤
그림자 된다
아내에게
나는 그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모르는 척 못 본 척도 하지만
살아가는 길섶에
호박처럼 누렇게
더 늙어 버리기 전에
부탁하는 것 같지만
오늘도 발가락 사이 무좀처럼
끓어대는 살가죽
매일 근질거리는 안부를 물으며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아는 척 잔소리도 해 대며
관계를 확인하며 숨을 내 쉬고
또 살아가고 있다
권 기 태
호안길
거미의 방
빈 사발에 물을 마시다
호안길
열 개의 입이 문을 벌리고 물줄기 토하는
안개 자욱한 안동호 보조댐 수문에 들어
일상에 찌든 먼지 훌훌 털어버리고
속세에 묻은 때 흐르는 강물에 씻어
호수 가운데 속살 들어내고 누운 모래톱
흰 구름 한 무리 수영하는 호수가
가파른 숲속에 누워있는 땅 길
파란 하늘이 보일 듯 말 듯 한 하늘 길에
철 잃은 칡꽃이 파란별처럼 떠있다
다람쥐 청설모 앞질러 달려가고
산수유 도토리가 발 앞에 구르는 길
직립한 솔에는 파란 이끼가 잠들었고
칡 다래 으름 줄기가 휘감아 오르는 등어리
수백의 세월을 먹어 등 굽은 노송들
칠선의 전망대 아래 오르는 잉어 무리
호심에 외다리 하고 먼 산 바라보는 황새
잠수에 지쳐 모래톱에 쉬는 가마우지들
일상에 지쳐 버리고 가는 열 푹 신선도
호안 둘레 십 리 길에 무지개 걸려 있다
거미의 방
나의 침실에 거미가 찾아와
어둠 한가운데 부지런히
햇볕이 드는 창살과 벽장에
방사형 거미줄을 치고 있다
얽히고 뒤틀려진 생각들을
평평하게 짜집어 가고 있다
똥파리 한두 마리 날아들어
씨줄과 날줄이 뒤틀린 날에는
엉켜진 줄에 매달려 오르내리며
긴 줄을 온종일 풀어 내리고
고요한 방안에 무지개를 그려간다
창문 틈 사이로 날아든 먹이가
발버둥 치며 거미줄을 흔들어도
질기고 끈끈한 인내의 힘으로
벼랑 끝 삶을 줄타기하는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는 거미
금빛 거미줄이 쳐진 나의 뇌리에는
몇 마리의 거미가 살아가고
어둠이 내리면 살며시 줄을 타고
길목 가운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빈 사발에 물을 마시다
1
네 살 때에 장작 진 짐꾼이 부러워
이웃 마을 머슴 뒤를 따라가던 날
장보기 간고등어 한 손 주워 들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조당수 한 그릇 먹고 날품 다녀온
어매가 독감 걸려 몸져눕던 날
여덟 살 무적 아이는 학교에 가려고
삼월삼일부터 사흘간을 울었다
무자생 아이들 모조리 학교에 가고
어매 따라 밭에서 잡초를 뽑으며
갯지렁이 잡으며 세월을 낚으니
하늘에 모래와 자갈로 탑을 쌓았다
여름밤 피 뽑는 모기를 쫓으며
쉬지 않고 달리는 시간을 잡으려고
호롱불 아래 생나무 잿불 지피고
젖은 손에 빈 사발로 물을 마셨다
2
양동이 두 통 걸어지고 십리 길 걸어
아레기 푸러 금곡 소주 도가에 가서
한 시간 줄 서서 받은 두 통의 아레기
춘궁기 할 한 끼는 아레기 한 그릇
아레기 퍼먹고 취하여 비틀거리며
논두렁 건너다 개울에 빠져서
아랫도리 적시고 신발 잃어버린 날
모닥불 피워 옷깃을 말리던 아이가
일곱 두락 농사일에 소 한 마리 먹이는
소학교 사 학년 중퇴하고 농사꾼이 되어
안개 낀 새벽길에 쟁기 지고 소 몰고
아이는 빈 사발로 샘물을 퍼마셨다
3
똥장군 스무 통 무논에 뿌리고
햇순 베어서 작두로 썰어 훝으며
써리기 달아 다락 논에 쇠 뿌리던 날
어매 몰래 보리쌀 한 말 훔쳐 숨겨두고
일꾼 들여 모심기 마치던 노을에
보리쌀 한 말 메고 고향 떠나서
대구 타향살이 눈물 흘리며
일 년을 소식 끊고 어매 속 태우다
장로교회의 종지기로 자고 일하며
입시 학원 학생 모집 광고를 붙이고
교실 청소 하고 무료 강의 들으니
소년은 빈 사말에 잔인한 물을 마셨다
김 미 현
섬 꽃ㆍ메밀꽃ㆍ접시꽃ㆍ봉숭아
능소화ㆍ돌탑ㆍ억새꽃
산행ㆍ가을 앞에서
|시인의 말
올해는 유난히 꽃을 많이 보았다
꽃들이 걸어서 들어와
마음에서 피어난다
작고 낮은 꽃들이 웃는다
섬 꽃
섬에서 피는 꽃들은
바다를 향해 핀다
한 결 같이 바다 쪽을 향해
여리고 긴 목을 빼놓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늘을 가리는 장맛비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다
삶이 어떤 모습일 지라도
마음을 잡고 있는 뿌리가 있다면
바다 끝을 향해서도 두렵지 않음을
섬 꽃이 알려 준다
메밀꽃
올해도 어김없이
메밀꽃 속에 숙이 고모가 피었다
손재주가 좋은 숙이 고모는
손수건에 수를 놓아서
어린 우리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고
상처한 일본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메밀꽃밭 속에서
숙모와 함께 울던 숙이 고모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올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밭에서
메밀꽃 눈물이 반짝인다
접시꽃
여름 한철은
온 식구가 들마루에 둘러 앉아
어머니가 홍두깨로 밀어서 만든
손국수를 자주 먹었다
정신없이 국수를 먹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면
담장 밖에서 다리를 치켜들고
부러운 듯 쳐다보는
접시꽃과 눈이 마주치곤 하였다
접시꽃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여름 내내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접시꽃에게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이고 싶었다
봉숭아
마음을 보여줄 기회가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면
그 기회가 오는 순간까지
말할 수 없이
설레면서도
떨리고 두려울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제 가진 모든 것을 터뜨려서
단 한 번뿐인 기억을 주고
봉숭아는 그렇게 스러져 간다
능소화
제 가진 모든 힘을
담장 위로 밀어 올려
세상을 향해 탈출하는 여인
소리 내어 불러보지 않아도
굳이 잡으려 하지 않는데도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여름의 끝자락까지 타고 오르는
뜨거운 삶의 자국들이
가슴에서 꾹꾹 피어난다
돌탑
바람이 억세게 부는 날
미끄러지고 흘러내리는
세월을 주워다가
나즈막이 돌탑을 쌓는다
저마다 가슴 깊숙이
갈라지고 터진 삶의 자국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이 고요해진다
억새꽃
비에 젖은 강 하구
깊어가는 가을 햇살에
억새들이 운다
바람결이 깊어지자
울음소리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이름 모를 들꽃을 흔든다
몰아치는 바람에
긴 밤을 뒤척이면서도
생명의 몫을 다해
제자리를 지키는 억새는
울어서 꽃이 된다
산행
산허리에 걸려있는
희뿌연 안개를
장대로 걷어내고 산을 오른다
오래된 산
잊지도 버리지도 않고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참을 더 올라가서
계곡 바위 위에 앉아
바람 한 조각 떼어 먹는다
산새들도 갈 길을 정해
짧은 해를 따라 날아가고
나무 한 그루 마음의 갈 길을 정한다
가을 앞에서
가끔은 길 떠난 끝자락에서
너를 만나고 싶다
길에서 만난 무수한 흔적들을 지우고
깊어가는 가을 앞에서
어느새 희끗해진 머리를 빗고
빛깔 고운 옷으로 단장하고
너를 마중하러 가고 싶다
좀 늦어도 조바심 내지 않기로
단단히 다짐을 한다
날 잊었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용기 한 움큼도
가방 속에 채우면서
김 여 선
칼국수ㆍ멀리 있어 아름답다
개미지옥ㆍ개뿔ㆍ흉터
흘러간다ㆍ단풍ㆍ컵라면
가을 오후 2시ㆍ차표 한 장
|시인의 말
숨이 차다
오르막을 오르는
10년 된 승용차가
헉헉거린다
계단을 오르는
내 호흡도
갸르릉거린다
시를 쓰는
호흡이 거칠어진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숨이 차다
칼국수
들길을 걷고 싶다
담뱃잎 말리던
허름한 황초집 처마끝
가을을 다 보내고
삶이 모서리를 들어내는
빈들에 선 사람들과
칼국수를 한 그릇 먹고 싶다
하얗게 풀어지는
저녁연기 속으로
머리 곱게 염색한
은행잎의 떨어짐에 대하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
멀리 있어 아름답다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구멍 뚫린 낙엽의
가늠쇠 구멍으로 가늠하는
가을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잡히지 않는
라디오의 주파수로
치익치익 쇳소리를 내는
가을은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희미하게 떠오르는
잡히지 않는
그리움의 주파수들을
치익치익 토해내는
가을은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개미지옥
선생님 출장가면서 당부하던 말
니들 글씨쓰기 끝나면 조용히 책 읽어라
서그덕서그덕
선생님 슬리퍼 소리 복도를 지나
부르릉 터덕터덕
선생님 자동차 교문을 지나면
살금살금
옆 반 선생님 눈치 채지 않게
화장실 가는 척
놀이터로 빠져나와
미끄럼틀 그늘에 앉아
모래를 동그랗게 파내어
개미지옥 만든다
개미 한 마리 잡아서
개미지옥에 넣는다
언제 왔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옆 반 선생님의 목소리
야들아
니들은 장난이지만
개미들은 목숨 걸고
개미지옥을 나와야 한데이
얼른 개미지옥을 허문다
개미 한 마리 모래 위를 휘청휘청 걸어간다
머지않아 이 분교도 폐교된단다
개뿔
개뿔
개에게도 뿔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대 귓가에
돋아나는 뽀로지처럼
개뿔
다 떠나간 흔적 위로
들리지 않는
그리움처럼
개뿔
흉터
옹이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
바람에 부러지든
톱날에 잘려가든
옹이 없는 나무는 없다
흉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돌에 걸려 넘어지든
낫에 베어지든
흉터 없는 삶은 없다
살아간다는 건
조금씩은 상처를 입으며
흉터를 만드는 거
흘러간다
반쯤 깨물어 먹다 남긴
쟁반 위의 단무지처럼
하늘 모서리에
하얀 반달이 걸려있다
그믐밤 같은 지난 일
안큐베이터 속 칠삭둥이로 웅크리고 있던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어머니
호박잎처럼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텃밭 흙들을 파헤치면
강둑이 허리를 구부리는 까닭을
알 수 있을까?
이제는
콘크리트로 깁스한 강둑
허리를 곧게 펴고 흘러가는 강물
허리를 구부릴 수 없는 강물 속에
큰빗이끼벌레들이 먼저 둥지를 틀었다
아
그래도 강물은 흘러간다
단풍
가을이면
활활 타오르는 얼굴들
잔잔한 호수에 물구나무서서
떨어지지 않으려
기도하는 단풍잎들
가을이면
호수가 먼저 취한다
헛헛
웃음이 나온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취하기는 왜 니가 취하나?
가을 호수야
어제보다 더 붉게 취하기 위해
단풍잎 사이로
가을바람이 분다
컵라면
하루의 시작이
컵라면처럼 쉽게
요리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인의 맛
중량 110g
(485kcal)
간식이거나 야식이라지만
고물상 김씨는 오늘도
컨테이너 박스에서
컵라면으로 이른 아침을 준비한다
살라카만 먹어야제
어젯밤 숙취 너머로
희미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찍 일어난 까치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컨테이너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보다 더 싱그럽다
뜨거운 물에 담겨진 면발이
목욕탕에 담근 손가락으로 불어터지면
허기진 위 속으로
목욕재계한 면발들이 넘어가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살아가는 것이
컵라면처럼 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 오후 2시
가을 하늘
푸른 병 속의
소주들이 넘실거린다
갈 곳 없는 바람만
빈 테니스장
철조망 사이로 들락거리고
모두들 단풍구경에 바쁘다
가끔 쳐다 본 하늘엔
아직도 어제 마신
파란 소주의 숙취로
머리가 푸르도록 어지럽다
바람도 걸리지 않는 철조망에
어깨를 기댄 애기똥풀
씨앗도 맺지 못할
노란 똥꽃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사랑도 가끔은
철 늦은 애기똥풀
노란 똥꽃처럼
열매를 맺지 않아도 좋으리
가을 오후 2시의
맑은 햇살은
들판으로만 비추고
애기똥풀 노란 똥꽃 피운
철조망 구석으로는
비추지 않아도 좋으리
푸른 병 속의 소주들이
아직도 넘실거린다
차표 한 장
파장 무렵
막걸리 한 잔에
얼굴이 불콰해진 할아버지
시골버스에 오른다
주머니를 다 훑어도
노란 은행잎 같은
차표는 나오지 않고
중국집 부엌의 환풍기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환장한다 환장해
막걸리 추임새를 내뱉는다
시골버스 정류소
은행나무에서는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노란 차표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는데
김 윤 한
그리운 도시락ㆍ달팽이ㆍ감꽃
비행운ㆍ모래시계ㆍ파피리
시인족ㆍ세상 모든 슬픔
감꽃목걸이ㆍ복숭아
|시인의 말
스님들이 승가에 들어온 햇수를 ‘법랍’이라고 하는데, 시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시를 본격적으로 쓴 햇수를 ‘시랍’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그럴싸한 이야기라 수긍을 하면서 내 ‘시랍’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니 얼추 잡아도 30년은 족히 된다.
10년이면 도가 튼다는데 그 긴 기간 동안 시를 써 왔는데도 이 정도라니. 원고를 보내면서 자책감이 든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는가 보다.
그리운 도시락
어머니, 무쇠 솥 드드륵 열고는
부엌 가득 피는 김 손으로 흩으며
남매 수만큼 밥을 푸고 반찬을 담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시절
교실 밖에는 칼바람이 창틀 흔들며 지나가고
장작난로 위 도시락이 차곡차곡 익고 있었다
4교시 반가운 마침종이 울리면
눈물 나도록 맛있게 도시락을 먹었다
그렇게 매일 먹었던 수천 번의 식사
내 키의 3할은 도시락이 키웠을 것이다
어쩌다 집에 혼자 있는 날 멸치볶음 보며
계란말이, 무말랭이 김치, 콩자반 같은
그리운 반찬 함께 떠올리며 밥을 먹는다
배고플세라 꼭꼭 눌러 밥을 담던 어머니
마른 무처럼 쪼글쪼글해진 손등과
모서리 하얗게 닳은 양은 도시락
직사각형으로 압축된
아련한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달팽이
누구에게나 어차피 가야 하는
정해진 길이 있다
다만 급하게 달려가는 자와
천천히 가는 자가 있을 뿐이다
달팽이는 천천히 그 길을 간다
배고프면 풀잎도 먹고 이슬도 마시고
졸리면 어디서든 웅크리고 잠을 청하고
촉수 뻗어 천천히 주위도 살피면서
가끔씩은 흘러가는 구름도 보면서
욕심 없이 묵묵히 갈 뿐이다
성급히 달려가는 자는 주위를 보지 못한다
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갈 뿐이다
달팽이는 빠르게 달리지는 못하지만
무작정 달리는 자들의 부질없는 뒷모습과
풀잎의 뒷면까지도 모두 보면서
바람소리도 듣고 꽃향내도 맡으며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가고 있다
감꽃
아버지, 우리들 위해
손바닥 나무껍질 되도록 괭이질 했지만
나른한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어린 우리들은 풀숲 이슬 걷어내고
감꽃 주워 먹으며 허전함을 달랬고
봉제공장 돈 벌러 떠난 누나 생각하며
무명실 꿰어 목걸이도 만들었다
입 안 가득 남아있던 떨떠름한 그 맛
해마다 감꽃은 지고 또 지고
어느덧 아버지도 감꽃 닮은 별이 되었다
산책길 문득, 지는 감꽃 다시 본다
떨어진 꽃받침 안에는, 아
어느새 새끼손톱만한 어린 열매가
참새 새끼처럼 재잘재잘 자라고 있구나
꽃은 비록 지지만 어린 생명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추락하는 별이 된 것이다
그렇게 또 가을이면 감이 익고
봄 되면 대를 이어 열매를 키우려고
감꽃들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비행운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 본다
그동안 급하게 땅만 보고 살아왔구나
하늘 가운데 비행기 지나간 자리
일생처럼 흰 구름 길게 그려져 있다
하늘 위에 쓰인 한 사내의 연보
이제는 철새들도 하나씩 떠날 채비를 하고
걸어온 길 아득하게 찬바람 분다
와르르 세상 꽃잎은 다 떨어지고
이제부턴 또 어딜 향해 떠나야 하는지
차표처럼 발아래 뒹구는 단풍잎 하나
여태껏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지
아련하게 남아 있는 궤적들마저
마침내 흔적 없이 지워질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 없어도
하늘은 미치도록 또 푸를 것이다
모래시계
알몸의 갓난아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구나
오늘 다시 발가벗고 사우나탕에 들어앉아
흘러간 세월을 생각한다
사막처럼 아득했던 시간들이
어느새 시나브로 줄어들어
분화구처럼 움푹 패어 있고
언젠가는 남은 모래도 끝이 나
마침내 투명한 하늘만 남을 것이다
바스러진 세월의 입자들
흐르는 시간의 좁은 통로를 지나
천 길 골짜기
아득한 무덤 되어 쌓이고 있다
파피리
보리밭 지나 감자밭 지나
파밭 지나며 파피리 꺾어 불며
지겹고 나른한 봄날 지나왔지
꽁보리밥 먹고 마당에 내려서자
먼 산 어질어질 아지랑이 날아오르고
아이들 목청껏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그렇게 봄날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도 지나갔다
지난겨울은 무척 추웠지
휴일 오후 무심코 창문을 열자
또 한 해 봄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아련한 파피리 소리 들려왔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아이들 합창소리도 다시 들려왔다
시인족
지구상에 있는 여러 부족들은
대개가 한곳에 모여 살지만
그들은 신의 나라에 도전한 죄로
세상 끝에 뿔뿔이 내팽개쳐졌다
그렇지만 언제나 철이 들지 않는 그들은
모국어 끝내 버리지 못하고
깊은 밤이면 우주 끝을 향해
습관처럼 푸른 언어를 쏘아 올린다
흩어져 살지만 우리는 같은 부족
은유의 적혈구가 서로를 사무치게 부르는
그래서 어쩌다 함께 만나면
반가워서, 너무 아쉽고 반가워서
얼싸안고 술 마시며 그렇게
서글픈 상봉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슬픔
눈물 한 방울 지구 위로 떨어진다
슬픔들 땅거미처럼 지상으로 스며든다
콘트라베이스 낮은 음 꺼억 꺼억 우는 밤
항공기는 별처럼 많은 세상의 슬픔들을 싣고
쉼 없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동네
오래된 고무나무 옆 오두막집 문틈으로
오래된 흐느낌 불빛타고 새어나온다
모든 사람들 다 자는 이 깊은 밤
슬픈 사람들만 깨어서 흐느낀다
화산지대 용천수처럼 슬픔 울컥울컥 치민다
여태껏 흘린 이 세상 모든 눈물들
가만가만 소문처럼 모여서 도랑으로 흘러들어
강을 이루고 무채색 거대한 바다가 된다
지구도 함께 슬퍼져 잠시 몸을 떤다
오늘도 잠든 사람들 평소처럼 꿈꾸며 잘 자고
슬픈 사람들만 더욱 슬퍼진다
감꽃목걸이
자고 나면 뒤란 감나무 아래
감꽃들 꿈처럼 와르르 떨어져 있었다
늘 2할 정도는 허기가 들어 있던
어린 우리들은 열심히 감꽃을 주웠다
씹으면 혀끝으로 몰려오는 텁터름 달큼함
소녀들 감꽃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고
잠시 행복도 했었지 아름다운 꿈꾸며
그러나 수줍던 소녀들도 공장으로 떠나고
명주실에 꿰어진 추억들도 다 사라졌다
해마다 감꽃 여전히 피고 졌지만
한동안은 다만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덧 세월은 바람이 되어 지나가고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감꽃 다시 본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아련한 하모니카 소리도 다시 들렸다
감꽃들도 소녀들도 하나씩 하늘로 올라가
그립고 아쉬운 별이 되어 빛났다
복숭아
꿈에서만 사무치게
짝사랑하던 처녀애
솜털 보송한 수줍음이다
눈빛만 마주쳐도 부끄러워
살포시 붉어지는 낯빛이다
깃털 바람 한 점에도 설레어
터질 듯 봉긋한 젖가슴이다
과육 한 입 베어 물면
전신으로 다시 번져오는
풋내 나던 그 사랑
김 지 섭
늘그막
너는 거기
은사시나무
77
늘그막
늙어질수록
눈물은 많아지는가
길게 내리는 산그늘 속
처연한 빛깔의
희디흰 산 벚꽃 같은
이제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나 보다
먼 하늘 한편으로는
아직도 붉은 노을
저리 타고 있는데
너는 거기
저 달은 저 달대로
은핫물 건너다니면서
이울었다가는 차고
나는 나대로
세월강 저어 다니면서
피었다가는 지고
거기 너는 저만큼서
나는 여기 이만큼서
마냥 홀로
반짝이며 지새누나
은사시나무
너는
바람이 조금만 칭얼거려도
네 잎 요령搖玲을 흔든다
아니
바람 그녀의 숨결소리만 들어도
네 잎은 벌써 알아차린다
그녀의 속마음까지
한데를 떠도는
저 노숙老宿의 바람 한 점도
저 혼자 외로워서
헤매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은사시나무
너는 안다
이 위 발
바다의 전설
애월에서
연ㆍ복사꽃
상처, 그 외로움에 대하여
|시인의 말
중독이 된 것 같다. 매일 막걸리 한 병은 마신다. 시골에 살면서부터다. 노을이 질 무렵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어느새 한 손엔 잔이 들려 있다. 막걸리 한 잔은 나의 낙樂이고 행幸이다. 잔속에 담긴 노을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노을이 시고, 막걸리 한 잔이 시고, 마시고 있는 가슴이 시가 아닌가……. 나는 오늘도 시를 마시고 싶다.
바다의 전설
놀도 스러져가는 바다는 자욱한 어둠에 잠겨
갈매기는 바람에 쫓기듯 가쁜 날갯짓으로 날고
파도는 선창 발치에 악어 이빨처럼 몰려왔다 밀려가고
저 혼자 물결을 세웠다 엎으며 뒤척인다
산허리로 빠지는 인적 끊긴 자드락길엔 억새가 울고
바다에서 시작된 바람이 일렁거리자 서산에 걸린 햇살마저 붉어
순결한 사랑이 소멸되면 맑은 햇살아래
바다는 앓는 짐승이 되고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쪼작걸음으로 대숲에서 나와 바다의 어둠을 보지 못한 채
집어등의 불빛만 쏘아 본다
애월에서
길을 걷는 다는 것은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애월담 등나무 사이로
몰락하는 붉은 해가
더 슬퍼지는 것은
술잔에 떨어지던 달의
전설 때문이라고
석양에서 온 풍문이
낮달처럼 가슴으로 파고들면
당신을 위해 술을 적시고
있는 그대는
이백의 그림자인가
연
이마 색깔에 따라 먹꼭지나 홍꼭지라 불러보고
반달 모양의 표지가 붙어 치마 양 귀퉁이에
갈개발이 달려 나부끼던 파란 겨울 하늘 바라보며
대추나무 위로 날리던 가오리나 나비처럼
구멍 없는 네모난 방패는 약간의 실수에도
곤두박질하며 땅에 꼬라박는데 구멍이 뚫린 것은
어설퍼보여도 뜨기는 하는데
날면서 왼쪽이 기울면 오른쪽 갈개발을
오른쪽이 기울면 왼쪽 갈개발로
이마에 있는 살은 조일수도 풀 수도 있지만
아무리 못났어도 중심을 잡아주면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는 인생의 묘기를 부리는데
계산이 맞지 않아도 조정하여 움직일 수 있는
네모난 가슴 한복판에 둥그런 구멍 하나쯤
뚫을 줄 알았던 너의 향수를 하늘로 보낸다
복사꽃
복사꽃이 풍기는 요요작작한 기운 때문에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음탕한 무녀들에 둘러싸인 것 같은
이승과 저승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네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세상은 수백 만 마리 벌들이 잉잉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아기 울음소리로 들렸네
그 소리에 바닥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정신의 사정射精을 하고 말았네
상처, 그 외로움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기도 하는
슬픔의 까닭이 결핍이듯이
결핍이 없는 나의 시선은
균형을 잃고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대는 표면과 이면의
양날을 품은 채
눈꺼풀이 커튼 열리 듯
달덩이 하나 쑤욱 올라와
보란 듯이 바람맞은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하는데
임 관 혁
국화 꽃 피면ㆍ자리ㆍ이유
길목에ㆍ낙엽ㆍ편지ㆍ마침표
길 가는 나에게ㆍ나는 참 바보였다
엄마의 가슴ㆍ꿈
국화 꽃 피면
나도 떠나리
너도 떠나리
단풍 잎 지듯
마지막 잎새로
그리운 사람
눈속에 담고
사랑 하는 사람
마음에 담고
너도 떠나리
나도 떠나리
자리
아버님이
머물던 자리는
아픔뿐이고
어머님이
머물던 자리는
눈물뿐이고
내가
머물던 자리는
불효뿐이다
이유
바람이 있기에
흔들림이 있다
갈대처럼
그리움이 있기에
눈물이 있다
이슬처럼
하루가 있기에
밤낮이 있다
뜨는 달처럼
사랑이 있기에
피는 꽃이 있다
장미꽃처럼
만남이 있기에
이별이 있다
지는 잎처럼
길목에
못 잊을 땐
하얀 리본
기다릴 땐
노란 리본
사랑 할 땐
빨간 리본
이별 할 땐
까만 리본
오가는 길목에
걸어 둘게
낙엽
지난날도
이제는 잊었다
아픔도
이제는 다 잊었다
슬픔도
이제는 다 흘러 보냈다
눈물도
이제는 다 말랐다
서산에 걸린
노을빛 따라
마즈막 떠날 일
돌아갈 일만 남았다
편지
피거라
피눈물 나날 딛고
익거라
고난의 계절 딛고
여물거라
인동의 세월 딛고
피고
익고
여물어라
내 고향
청보리야
마침표
없다
눈물도
없다
아픔도
없다
외로움도
없다
사랑도
숨 쉬는 날까지
눈 감는 날까지
길 가는 나에게
세월은 나에게
추억을 남겨 놓고
바람은 나에게
계절을 새겨 놓고
구름은 나에게
허무함을 남겨 두고
비는 나에게
슬픔을 가르쳐 주고
단풍은 나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참 바보였다
비 온 뒤
무지개가 뜨는 걸
몰랐구나
어두운 밤에
별이 뜨는 걸
몰랐구나
잠든 밤에
박꽃이 피는 걸
몰랐구나
겨울날에도
흰 눈이 나리는 걸
몰랐구나
봄날에도
샘 바람이 부는 걸
몰랐구나
꽃 피는 날에도
지는 꽃이 있는 걸
몰랐구나
나는 바보였구나
나는 참 바보였구나
엄마의 가슴
무덤이다
엄마의 가슴은
아픔도 묻고
슬픔도 묻고
눈물도 묻었다
외로움도 묻고
고통도 묻고
이름도 묻었다
엄마의 가슴은
잠든 무덤이었다
꿈
꿈은 있어야 한다
타조가
날개는 있어도
날지 못 하더라도
날아보려는 꿈이 있듯이
꿈은 있어야 한다
꿈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무화과
열매 속에 꽃피우는 꿈이 있듯이
꿈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꿈은 꿈으로
끝나더라도
꿈꾸며 살아야 한다
꿈은 버려서도 잃어서도
아니 되는 삶의 무지개다
임 두 고
지방에서ㆍ삼박골 연가
이런 부부ㆍ이상한 아저씨들
행간밀애行間蜜愛ㆍ안개의 역설
선생ㆍ목련 모법
|시인의 말
기관지가 심하게 나빠지면서 담배와 시와 바둑이라는 내 기호의 삼각 편대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다. 긴급조치 1호는 금연. 시와 바둑에도 연좌되는 족쇄이기도 하다. 원고 마감일이 임박해서야 긴급조치 1호에 대한 얼마간의 유예 신청이 허락되었고, 부랴부랴 밤늦도록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새벽 별빛처럼 주르르 흘러내린 시 몇 편을 껴안게 되었는데,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별빛은 고사하고 잠꼬대 같은 헛소리뿐이어서 그저 먹먹하기만 하다. 그래도 유예 기간이 다 되었으니 탈고를
하고 다시 비상계엄의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지방에서
지방 발령을
사망 선고라 여기는 서울
지방은 서럽다
지역이고 싶은 지방은
차례상 뒷켠에 붙은 지방처럼 서럽다
서울로, 서울로
서울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젊은이들의 맹렬한 서울 행렬은
지방이 쏟아내는 눈물의 행렬임을
서울은 아는가
흘러넘치는
서울의 골목골목 아우성들은 모른다
아이들 발자국 하나 없어
바람소리만 수런대는 시골의 골목골목들은
이미 유령들의 골목인 걸
내 이웃과 내 친구와 내 누이를 다 삼키고
어느새 내 아들까지 집어 삼켜버린
블랙홀 같은 서울이여
아귀처럼 배부름도 반성도 모른 채
지방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부푸는 서울의 자유여, 자본이여
너희는 벌써 오래 전부터
블랙홀 위로 치솟는 바벨탑이었거니
어디 일제시대만 식민지였겠는가
대한민국이 아닌 서울민국의
서러운 식민지 강원, 경상, 전라, 제주여
지방이 아닌 지역의 기치를 높이 세우며
외로움을 베어내 죽창을 깎고
서러움을 퍼 담아 봉분을 빚으며
스크럼을 짜 저항하고 투쟁하자
서울민국의 식민지, 지방에서
당당히 대한민국의 한 지역이 되는 그날까지
이 귀퉁이에 찌그러지고
저 모퉁이에 버려지는 지방이여
대한민국을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 부르지 말자
삼박골 연가
마을 어귀 동수나무를 지나고
앞 거렁 뚝다리를 지나고
철길 밑 큰골 공굴을 지나
땅찔레며 댕댕 칡이 얼크러진 넝쿨 속
목 붉은 뱀이 똬리를 틀고
땡삐들이 윙윙거리는
여름 한 철, 소를 치며 누비던
내 고향 삼박골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있고, 쪼대 굴이 있고
엉겅퀴와 참싸리와 칡꽃과 부엉이 둥지와 여우굴과
날다람쥐와 뻐꾸기 울음과 산울림이 함부로 나뒹구는 골짜기
지치와 너삼과 산초와 더덕 내음이 뭉클거리던
내 고향 삼박골
누구는 돌을 쌓고, 누구는 흙을 파고
누구는 땔나무를 주워
감자무지를 해 놓고
땅거미가 산그늘을 지울 때까지
가재를 잡고, 산딸기를 따고, 산비둘기 알을 훔치고
풀 따기며 공기놀이를 하던
내 고향 삼박골
눈을 감을수록
초롱초롱 불 밝히는
골골 봉봉 얼기설기 숲길 속에
코흘리개, 까까머리, 여드름투성이
옛 시절의 내가 깨알처럼, 별빛처럼
그렇게 박혀 있는
삼박, 삼박, 삼박골에 가고 싶다
* 거렁:냇가, 뚝다리:돌다리, 공굴:터널, 땡삐:땡벌, 쪼대:고령토(점토), 지치, 너삼 : 약초류의 풀이름들, 감자무지 : 감자묻이, 돌탑을 달궈 감자를 넣고 흙을 덮어 익혀 먹던 놀이.
이런 부부
머릿속은 주부지만
가슴속은 늘 시인이고 싶은 아내와
머릿속은 가장인데
가슴속은 늘 시인이고 싶은 남편이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좋아하는
어제 아침상 위의 콩가루 깻잎 찜에도
남편이 좋아하는
오늘 저녁상 위의 간고등어 토막에도
고명처럼, 양념처럼 시가 묻어 있었을 겁니다
가을비가 나뭇잎들을 쓸어내리는 밤
형광 불빛 아래 색 촛불을 겹으로 켜놓고
시를 읽는 아내에게
남편은 시를 쓰듯 연애편지를 씁니다
안동역 대합실에서부터
대구행 비둘기호 완행열차 불빛 아래까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스물한 살 싱그러운 그때 그 당신은
아직도 시들지 않는 내 인생의 꽃병입니다
청바지를 입은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후리지아 꽃이다가
붉은 치마를 입은 당신은
한 아름 껴안고 싶은 장미 다발
어쩌다 뽀송뽀송한 빨래를 널 수 있는
남향집을 소망하는 당신은
철없이 뒹굴고 싶은 메밀 꽃밭입니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내 운명이 마련해 둔 다시없는 선물 같은 것
세월이 흐르고 흘러
더 낡고 늙어가도 당신과 함께라면
그 세월이 서가에 늘어나는 시집의 부피라 생각하며
당신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를
새로 받아든 선물인 듯 시집인 듯
갈피갈피 설레는 가슴으로 펼치고
또 펼쳐 볼 겁니다
이상한 아저씨들
내 아파트 아래층에는 동연배의 아저씨가 산다
기분이 언짢을 때는 형씨라고 부르기도 했던 아저씨
입주한 지 이십 년, 이 아파트보다 훨씬 더 빨리 낡아
이제는 할아버지가 다 된 아래층 아저씨
한 때는 사흘이 멀다하는 술주정이요
술주정의 한 레퍼토리이듯
내 아이들 발소리가 시끄럽다며
고래고래 불평하거나 현관문을 발로 차던
인상 한번 고약하게 험상궂은 막벌이꾼 노가다 아저씨
어쩌다 술 깬 맨 정신으로 마주치면
엉거주춤 뒤통수만 긁적거리며
겁 많은 두 아이의 바보 같은 홀아비일 뿐이던
재수 옴 붙은 원수 같은 이웃이다가도
가끔은 불쌍한 이웃이기도 하던 아저씨
이십 년 무심한 세월이 흐르는데
아직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니, 한 때는 알고 싶지도 않던 아래층 아저씨
이제 자식들마저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홀로 남아 술주정도 온 데 간 데 없이
쥐죽은 듯 고요한 아래층
아이들이 떠나간 빈 둥지 같기는 위층도 마찬가지
내려갈 때나, 올라올 때나
아래층을 그냥 지나치고 마는 승강기 때문에
아저씨의 안부가 조금은 궁금해지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현관문을 두드려 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파트 아래 위층은 이웃이 되기 힘들 듯
위층이나 아래층이나,
아파트에는 층층층 이웃을 철거하며
공고한 외로움의 벙커를 구축해대는
이상한 아저씨들만 살고 있을 뿐
행간밀애行間蜜愛
- 각주를 위한 시 1
지난 삼월 새로 부임한 학교의
배후는 산 언덕배기
케케묵은 고요가 교정을 감싸고
때로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는
수몰지에 떠도는 한숨소리인 듯
전교생 스물 남짓의
폐교가 예정된 이곳 도서실을 교실 삼아
아이들을 애써 불러들여 보았지만
낡은 책들로 빼곡한 서가는 결국 내 독차지
그래저래 책 표지들과 눈을 맞추어 나가다가
간혹 속살까지 훔쳐내고 싶은
그런 여인 같은 책들과 마주칠 때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뜬금없이 책 사랑의 열병에 들떠
머리 스타일까지 바꾸어 보고
서가 한 켠 빈 꿀 병을 꽃병 삼아
매화며, 장미며, 들국이며, 찔레 열매를
철철이 갈아 꽂았다
처음에는 서가의 눈높이 책들과 마주하다가
차츰 가슴 높이로, 배꼽 높이로, 무릎 높이로 내려오더니
이제는 서가의 맨 아래 층 책들 앞에 퍼질러 앉아
사랑에 빠져 있다
열애熱愛랄까, 밀애蜜愛랄까
테레사와 네드라를 만나고
클로에바와 에르노와 마리아*를 껴안는
낯선 책 속 행간들이 때론 오롯한 오솔길이자
달달한 커피숍이었고
때론 뜨거운 침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행간에서의 내 열애도, 밀애도
상고대가 피는 이 겨울, 서가의 맨 밑바닥
어느 책 앞에선가
이별을 맞으리라 예감한다
* 테레사 :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에 나오는 여인.
“교태란 무엇인가? 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게끔 해 주지만, 그 가능성이 확실 한 것으로 나타나게끔 하지는 않는 태도이다. 다시 말하면 교태란 섹스의 약속이다. 보장 없는 약속이다.”, “사랑은 섹스 행위의 욕구에서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이 욕구는 무수한 여자에게 해당된다.), 공동의 수면 욕구에서 표명된다.(이 욕구는 오직 한 여자에게만 해당된다.)”
* 네드라 : 소설 ‘가벼운 나날들’(제임스 셜터)에 나오는 여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장해 둔다. 남들이 실패하면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고, 남들이 바보 같으면 우리는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부여잡고 나아간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하나의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 클로에바 :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 보통)에 나오는 여인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사랑과 정치의 시작이 똑같이 장밋빛이라면, 그 마지막도 똑같이 핏빛이다.”
* 에르노 : 자전적 소설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에 나오는 여인.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 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추억에는 언제나 경련을 일으키는 세부 사항이 있다.(에르노와 이브자네의 대담집, ‘칼 같은 글쓰기’ 중)”
* 마리아:소설 ‘11분’(파울로 코엘료)에 나오는 여인.
“나는 두 여자이다. 한 여자는 기쁨, 정열, 삶이 그녀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모험들을 맛보길 갈망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부한 일상, 가족적인 삶, 계획하고 완수할 수 있는 자잘한 행위들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 온 우주가 그 사랑을 위해 공모하는 것 같다.”
안개의 역설
단풍 빛으로 익어가는 가을 아침의
부릅뜬 눈, 안개다.
안개의 비밀은 안개등에 있다
안개는 상대를 보려는 눈빛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눈빛일 뿐
그러므로, 안개는 양심이 도주하고 없는
이 시대 안개호 정치의 침몰하는 뱃머리다
풍요의 늪에 주저앉아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백발 치매, 이 시대 자본주의의 얼굴이다
오리무중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 시대 청춘들의 무너져 내리는 가슴이다
안개는 인내의 극점을 가늠하며 덫을 놓고
슬금슬금 꼬리를 빼는 이 시대 문화의 뒷덜미다
지천으로 도발하는 섹스가 출산을 보장하지 않는
불임의 시대, 저출산의 아득한 수렁이다
단풍 빛으로 깊어가는 가을 아침의
부릅뜬 눈, 안개는
가릴수록 부릅뜨는
이 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몰골이다
선생
개떼 같은 또래들과 경쟁하며
제대를 하고 대학을 나와 선생이 되고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이
어느새 생生의 어깨 너머로
노을이 질펀하다
소 팔고 논 팔아 대학까지 나와서
또나 개나 다한다는
고작 선생질이나 하고 있느냐는
동네 어른들의 지청구가 따가워도
그래도 국가공무원인데, 노후에는 연금도 타는데
직장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박봉의 서글픔을 달래 보지만
술값은 늘 더치페이(Dutch pay).
남의 지갑 사정도 모르고
사람들은 또 그런 선생들이 쩨쩨하다니
쪼잔하다니―
십여 년 넘게 그렇게 살았는데
불현듯 IMF 사태가 터지고
조무래기 선생이라고 나를 비웃던
사장이며 지점장이며 과장이던 또래들이
우루루 실직하면서 질투를 한다
선생인 너도 공무원이니 철밥통 아니냐고.
횡령도, 탈세도 한 적 없고,
뇌물을 받거나 직무유기를 한 적도 없이
다리가 아프도록, 목이 찢어지도록
천둥벌거숭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쥐꼬리 월급을 쥐는데, 철밥통이라니.
억울하고 억울해도
가진 것 없고 세상 물정 모르니
가족들을 위해, 시대의 천덕꾸러기 철밥통일지라도
더 꽁꽁 을러멜 수밖에
이제 퇴직을 목전에 둔 내게
여생을 건너갈 유일한 징검다리는
연금뿐이거늘
삼십여 년 내 젊음을 헐어
놓고 다져온 그 징검다리가 장물臟物이라니.
혈세血稅 도둑으로 내몰리며 마감되려는
날벼락 같은 선생의 한 생애가
그저 기막힐 뿐
어쩌랴, 이 땅에는 늘 위정자들이 우글거려도
국민國民은 없고 궁민窮民만 남는
흉흉한 역사뿐이었거늘
목련 보법
가을에는 낙엽이 그러하듯
봄에는 낙화들이
붙박인 나무들의 황홀한 보행의 꿈이
빚어내는 보법이다.
오늘은 뒤안길을 밝히는 목련나무 밑으로 가
목련나무의 보법으로
목련 꽃잎들과 동행해 본다
자욱이 떨어진 이 목련 꽃잎들은
어쩌면 순백의 지난겨울이 지나간
눈발자국이거나
봄의 둔덕을 넘어오는 은밀한
바람의 발자국이거나
아니면, 내 마음 속으로
순백의 그대 눈빛이, 숨결이, 다가오는
사랑의 발자국일지도
전 대 진
자책ㆍ나의 방
새벽 고시텔ㆍ불금
꺼지는 법ㆍ정독법
안동 버스ㆍ바위ㆍ구애
|시인의 말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 선배님들이 웃으실 지도 모르겠지만, 한 해가 다시 지나는 동안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오는 한 해에는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자책
저녁이 되고
나는 빌딩 옆에 누운
긴 그늘 밑에 앉는다
가로등이 없고
불빛에 빛나는
행인의 눈동자가 없고
나를 바라볼 당신이 없는 곳
거리의 방바닥이 차가워진다
어제도 입안에 돋아난
말의 돌기들을
혀로 요리조리 맛보다가 뜯어버렸죠
그렇게 또 시간을 하염없이 불태우다가
발자국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잠이 들었죠
아침이 오고
일어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일어나
똑같은 맛의 치약을 먹고
똑같은 향의 비누를 눈에 넣었죠
어디를 봐도 도대체가 쓸데가 없는
내 궁뎅이를 땅바닥이 먹고 있다
흔하게 입술을 맞추던 별이 없고
흔하게 손을 어루만지던 풀잎이 없는 곳
나는 또 똑 같은 웃음으로 하루를 살았죠
나의 방
제법 차가워진 화장실
어두운 공기 위로
한숨이 담배연기처럼 퍼진다
몸을 부르르르 떨며
진저리를 친다 창문이 있지만
창 밖에도 키가 큰 건물이
쪼르르르르
소변을 보고도 괜히 앉아 엉덩이를 지분거려본다
뜨끈하게 데워진 좌변기가
사무실 의자보다 뜨끈한 이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
마알갛던 변기 물이
노랗다
물을 내린다
새벽 고시텔
새벽 두시 신림동 고시텔
물을 받으러 나왔다 마주친 사람은
눈을 냉수 꼭지에 데고 있었다
204호 문틈에서는 음악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아-
음정을 잃고 내지르는
누군가의 고성방가
복도에 조명이 드문드문 켜지고
발자국 소리는 잔뜩 굳어있다
철컥하는
문 잠그는 소리가
고요했다
불금
지나가는 나무
건물 사이로 부표처럼 둥 둥
떠다니는 불빛들
그래도
창밖을 향한 그의 눈동자에는
빛이 없다
퇴근길 꽉 찬 자유로를
밀려가듯 기어가는 통근버스와
말없이 앉아있는 직장동료, 아니
타인들 속에서
어제와도 그들과도
다를 것 없는
그 표정으로 앉아 있다
부르릉거리는 엔진 소리와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꺼내진 음악소리가
귀를 울리지만
어쩌면 곧 하고 친구들을 만나
떠들지도 모르지만
금요일
꽉 막힌 도로에서 버스는
조용하다
꺼지는 법
잎들이 꺼지고 바위가 꺼지고
산맥이 꺼져
비로소
어두워진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온 몸을 움직여 가을을 불태우던
저 숲
햇살이 몸에 닿을 때 마다
깜짝이야 빛나던
저 여울
꺼지고 꺼져
새까매진 허공에
상점 전구 몇 개만
켜져 있다
꺼지지 못해 켜져 있다
정독법
그는 속독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언제나 정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정독은
단
한번 이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었고 그
세세한 행간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손가락이 베이곤 했다 한 사람의 속지는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로웠으므로
피가 나지 않는데도 더욱 쓰라렸다 그가
그녀에게서 읽은 새까만 여백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속독
법을 익혀야 했는지도 모른다 재빠르게
행간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속독은
그러므로 쾌활하다 그는,
이제 다시는 책을 펼치지도 않지만
세상에 널려있는 검은 책들은 분명
누군가의 정독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단지 느린 속독 같은 것을
안동 버스
조용하다 오후 시내버스 59번
좌석에 너덧 명이 앉아
지나가는 가로수를 헤아리고 있다
가끔씩 토해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까지
이미 고요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누구에게도
말은 흘러나오지 않고
그들이 내보인 어깨만 덜커덩 덜커덩
흘러가고 있다
설렁 설렁
버스도 이제는 노인이라는 걸까
느긋느긋하고
대충대충이다
버스가 걷는다
바위
언제였을까
비가 내리면
그 물방울에 씻겨지는 자신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금이 가고
가끔은 살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만
단지 가만히
앉아있다
흐르는 바람의 결 마다
자기의 몸을 허락하고 있다 가끔은
살을 파고드는 풀꽃을 키우기도 하면서
비를 받아 하루살이 유충들을
입양하기도 하면서
시간에게 너그럽게
져주고 있다
저 남자
어느새 그녀가 되어버린 저 남자
구애
시를 쓸거야 하수구 냄새가
폴 폴 번져도
그 속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위해
비가 온다는 건
바퀴가
슬퍼서야 저것 좀 봐
녀석들이 물길을 타고
헤엄을 치고 있어 종착점은
분명 눈동자일거야 눈동자
동글동글 굴러가는
수레바퀴 같은 지구 말야 포올
폴 폴
어쩜
지구는 시궁창이야 하수구
썩는 냄새가 하얗게 번졌어
녀석들이 조근조근조근
몸을 부비고 있어 울음을 쏟고 있어
우는
니 눈에
지워지지 않는
시를 쓸거야
폴 포올
번져가야만 하는 씨를 쓸거야
천 승 현
2014년 4월 16일
1992년, 그해ㆍ업業
산 속의 섬ㆍ우물가ㆍ그대로
시월의 거리ㆍ외로움ㆍ하루하루
|시인의 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변함없이 뜨고 지는 해를 따라
맴맴맴 사계를 돌고 돌며
늘 같은 자리인 듯
다른 자리에서
노래를 합니다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도 넘겼습니다
할 말이 많아져도
삼켜야할 말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들리는 소리가 많아져도
때로는 귀를 닫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부르지 않아도
그렇게 하루하루가
다가와서 멀어져갑니다
2014년 4월 16일
1
진도의
바다 위로
내리는 비는
눈물입니다
여물지 못한 것들
피지 못한 것들
여문 것에 대하여
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파도 너무 아프고
서러워도 너무 서러워
울기조차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살아있는 내내
잊지 않기로 한
봄입니다
2
해마다 봄은
노오란 설레임으로 찾아왔지만
어김없이 봄과 함께
희망의 색으로 돌아왔지만
올해 봄은
하늘 노래지도록
참혹한 색으로 왔다
살아 돌아오라
대한민국 모두가
노란 리본 가슴에 달고
빌고 빌었지만 단 한명도
돌아오지 않던 봄
3
추위를 이겨내고
새순으로 발돋움하던 꽃들
때 이른 더위에
붉게 달아올라
화들짝 몽정을 하듯
그늘 밑에 숨어 파르르 수줍어하던
2014년의 봄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꽃들이
채 살아 보기 전에
채 피어 보기 전에
검은 바다 깊은 곳에서
꿈을 잃어버리고
놀란 얼굴로 하늘에 숨었다
다음 생에서는
제 열매가 무엇인지
산다는 게 무엇인지
누려볼 수 있을까
환하게 피어나야할 꽃들이
무더기로 져 내린 자리에
뜨거운 비가 내린다
산에도 내리고 들에도 내리고
억장에도 내린다
온 천지가 무너져 내린다
1992년, 그해
그해에는 거리마다
포장마차들이 흔하게 있었다
따끈한 냄비우동, 닭똥집, 한치회,
처음 먹어보던 그 맛들은 아직도
입에서 맴돌고
25도에서 뜨겁던 소주와
그때 그 자리를 떠돌던 미세한
공기의 촉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십여 년이 흐른 지금의 소주는
뜨뜻미지근한 18도
골목이라는 단어도 무색하게
포장마차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곳에
거대한 마차들이 생겨났지만
추억은 작은 곳에 머물고
쉽게 거처를 옮기지 않는다
업業
나는
전생의 무슨 죄목을 달고
이 세상에 왔을까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길
나는
어떤 흉악무도한 죄를
지었기에
이승에서의 날들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헤매고 있는 것일까
살아 다 못 갚은 죄
다시 돌아 다음 생에
태어날까 목숨 접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가을날
햇살은 왜 이리도 고운지
산 속의 섬
산등성이를 수평선 삼아
불어오는 바람이 파도인 듯
나뭇가지들이 출렁이며
저무는 산 속
늦은 저녁밥상 위로
올라온 굴비 두 마리
해발 500미터에서
나란히 누워
두고 온 바다 생각으로
눈을 감지 못한다
식사가 끝난 후
뼈로만 남은 흔적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도
한참이나 비릿한 바다냄새로
서성이다가 사라진다
깊어지는 산 속의 어둠이
바다를 닮았다
우물가
우물가에 가면
낮은 패랭이꽃 같은 그녀가 있다
언제나 웃음 잃지 않고
속으로는 울더라도
겉으로는 웃고 있는
패랭이꽃 같은 그녀가 있다
멀리서 보면 밋밋하지만
잠깐 보면 흔하지만
다가가서 보고
오래도록 보면
예쁜 꽃 패랭이꽃
버드나무
앵두나무는
없어도
우물가에 가면
우리 꽃 같은 그녀가 있다
늘 있다
그대로
잡히지 않는 찰나를 잡아
액자에 가둬놓고
시간을 늘여놓는다
걷던 걸음 그대로
세수하고 얼굴 닦던 그대로
노래하며 입 벌린 그대로
액자에 들어앉은 사람들이
액자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사람은 사람대로
꽃은 꽃대로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멈춰있는 사진 속
이미 달아난 시간의 흔적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월의 거리
시월의
거리에서
시드는 것이
햇살뿐일까
바람에 흔들리던
은행잎은 맥없이
떨어져 내리고
사람들 어깨위로는
추위가 올라타며
무게를 싣고 있다
외로움
무심히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렸는데
퍽하고
난데없이
울음이 터지더라
하루하루
낮엔 해가 뜨고
밤엔 달과 별이 뜨는
지당한 날들 사이로
거북이처럼 미련한 걸음
옮기다보면
순식간에
앞에서 달려와서
귀를 스치고 멀어져가는
낮과 밤
내 것이 아닌 듯
낯설게 쌓인 날들이
수북이 나이를 만들며
등을 떠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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