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시동인지 35호 2013년

저 언덕 넘어 2023. 12. 5. 17:23

우리들의 말


  봉숭아 한 포기 지난 봄 앞뜰에 싹을 틔웠다. 어디서 날아온 씨앗이었을까? 귀여운 여린 잎새들이 점점 자라나 줄기가 튼실해지면서 자꾸 가지가 벋어나면서 여름을 맞았다. 장마를 거치는 동안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더니 무더운 날들이 겹칠수록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피어 뙤약볕 아래서 울긋불긋 한창이다. 화려한 꽃시절을 맞은 것이다.
  때로 타들어가는 가뭄에는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다시 의연하게 살아나 세력을 더욱 키워 한여름이 지나도록 무수한 꽃봉오리를 마음껏 피운다. 줄기 밑 부분에는 마침내 꽃 진 자리마다 줄줄이 씨방을 매달더니 나중엔 그 무게에 겨워 몸체가 비스듬히 기울면서도 연신 꽃을 피워 올린다.
  어느 날 번개 천둥소리 요란하게 폭우가 지나가더니 한쪽 뿌리가 허옇게 드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봉오리를 맺고 수척한 꽃을 조금 씩 피우더니 입추 들고 처서가 지나니 점점 씨방들이 줄느런해 가서는 급기야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전신이 땅에까지 기울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력이 약해지더니 그 쇠잔한 몸에 흰가루병마저 허옇게 전신을 덮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이제 꽃피우기를 단념한 듯 쓰러져서는 겨운 숨을 몰아쉬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침저녁 쌀쌀한 가을바람 속에서 씨방 속 씨들은 까맣게 익어가고 있다. 이제 그의 앞에는 된서리를 맞고 스러져갈 죽음의 그림자만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해살이 풀꽃들의 이런 식생의 모습에서 인간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의 고단한 생애가 저 꽃과 무에 다르랴. 거기에는 하나의 생명이 땅위에 살면서 겪는 갖은 수난과 처절한 고뇌가 있다. 또한 거기에는 오직 종족보존을 위한 아낌없는 사랑과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만이 있다.
  봉숭아 한 그루의 생애에는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태어나서 모진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동안의 파란만장한 일대의 서사문이 있고 또 그 서사의 갈피갈피마다에는 무수한 서정시편들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쓰는 시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시인이 왜 그렇게 시를 붙들고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올해도 우리 동인들은 어김없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글밭 출간 준비를 하고 있다. 각자가 애써 쓴 탐스런 시편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었다. 사람은 각기 타고난 운명과 환경이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며 서로 다른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감도 다르고 시작에 대한 태도나 창작방식과 시풍이 달라 각기 다른 시를 빚어낸다. 또 시작을 꾸준히 하는 동인들도 있고, 바쁜 생활에 시달리면서 마음속으로 시어들을 간직만하다가 마감 날짜에 쫓겨 쓴 동인도 있을 게다. 어쨌든 여러 가지 다른 빛깔과 향기를 머금은 작품들을 대하니 그 느꺼움이 크다.
  우리 문단사에는 이미 글밭 동인지를 거쳐 간 우수한 문인들이 많지만, 연륜이 깊어갈수록 우람해지는 나무들처럼 글밭의 오랜 역사와 함께 우리 동인들의 시들도 더욱 성숙해 갈 것이다. 특히 우리 글밭 동인들은 30대부터 40대, 50대, 60대까지 고른 연령층에 걸쳐 있어, 말하자면 할아비 아비 손주 세대가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우리 글밭의 앞날에 매우 긍정적인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상당한 세월 동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글밭동인들의 문학 활동은 지역 문단, 나아가 한국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동인들은 상당한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꾸준한 자세로 시작에 매진하여 풍성하고 오래된 글밭의 숲을 가꾸어야 할 것이다.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강수완
매화차 한 잔 10
모란 11
그 꽃 지난 다음에 12
두물머리의 마른 나무에게 13
다시 새 봄의 꽃 14
햇차 만들다 15
휠체어 탄 사람끼리 부딪혀 누운 장애우께 16
매달린 나무 거북이의 꿈 17
북어 18

강희동
시도 때도 없이 20
연리지 연가 21
어버이날에 22
귀향생각 23
계사년 벽두 청계령에서 24
봄이 오는 길목에 26
꿈속의 길을 혼동하며 27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이 되어 28
별에게 29
흐르지 않는 강물 30

권기태
들국화 옆에서 32
돌퇴미 33
근황(近況) 34

김미현
인도로 가는 길 36
아버지의 마음 37
산수유 꽃 38
구송리 마을 39
구르는 돌 40
어머니의 밥 41
달맞이꽃 42

김성재
안경 44
청령포에서 46
마지막 인사2   48
세상에 없는 이야기 50

김여선
애기똥풀 54
가을 소나기 55
상사화 56
체하다 57
안계장 58
황초집 59

김윤한
안녕하신지 62
나는 돼지고기 63
진달래 64
눈길, 그 여자 65
파도 66
느티나무 아래서 67
숫자와 나 68

김지섭
어떤 풍경 70
추억 71
서울에서 72

김진회
할매꽃 74
비 오는 날 너에게 75
빈 방 76
혀를 삼킨 목에게 77
무하마드 알리 78

이위발
그대 떠난 빈자리에 82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83
개망초 84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85
그곳을 찾아서 86
물레방아 87

임관혁
고령 친구 90
첫사랑 92
가을소묘 93
추석 94
몽돌 95
달동네 96
어느 주모(酒母) 97
참 98
귀뚜라미 우는 밤 99

임두고
투정 102
여자 104
몰운대에서 106
내 마음의 사계 108

전대진
어느 무명작가의 표절史 110
가을 개화 111
그냥 있는 너 112
외로운 습관 113
그 꼴 114
서울 오체투지 115
겨울 지하철 116

천승현
목마름을 등에 지고 118
절 119
연등 120
고운사 121
밤비 122
떠나는 길 돌아오는 길 123
상사화를 보며 124
주산지에서 125
눈이 시리던 날 126

글밭 略史 …… 128








강 수 완


매화차 한 잔
모란
그 꽃 지난 다음에
두물머리의 마른 나무에게 
다시 새 봄의 꽃
햇차 만들다
휠체어 탄 사람끼리 부딪혀 누운 장애우께
매달린 나무 거북이의 꿈
북어

|시인의 말
국화가 망울을 맺느라고 저녁 무렵이면 바람결이 차다. 
그 덥던 날들이 아득하다. 그런 여름이 있었던가 싶다. 
세월은 빠르고 몸은 쇠어지고 마음은 자욱하다.
글은 더욱 황소걸음이고 갈아 놓은 문전옥답도 없다. 
가난이야 견디지만 절창을 못 뽑으니 저 국화가 부럽구나!





매화차 한 잔

봄 섬진강에 매화가 한창이라 기별 왔으나 
때를 놓치고
하필이면 바람 불고 비 내려 오슬오슬 한 날 
길을 나섰다

속절없이 매화는 가고
마음 식은 사람 뒷모습 바라보듯 하는데

마을에 사는 시인이 우려 주는 분청 찻잔 안 
두둥실 달처럼 떠 벙그는
아, 수줍고 환한 저 꽃!
그리운 이름 하나씩 목구멍으로 넘기는 
달고도 쌉싸레한 매화차 한 잔




모란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맺지 못할 사랑을 하다가
골목길 끝내 돌아서서 게워내던
눈물 콧물 섞인 젊은 날 속엣 것 같은 
꽃 좀 보소
저 꽃 좀 보소야 오
월 이었던가
너를 샛노랗게 곁에 두고도
깃발처럼 그저 변방을 펄럭이던 그 때 
애만 태우다가
풀썩 맥없이 주저앉아 마냥 아프던 
사방 푸른 철
저 붉은 모란이
꾸역꾸역 속을 게우고 있네.




그 꽃 지난 다음에

우리가 한세상 얼씨구 어깨 걸었던 것은 지나고 
우리가 한 시절 어울렁 넝쿨이었던 것은 지나고 
우리가 한때 까르르 숨 넘겨 사랑한
서로의 목숨이었던 것은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한 때 하늘이었던 때를 생각하는가 
우리가 한때 꽃이었던 때를 그대 생각하는가 
우리는 나누어져도 한 몸이었다가
우리는 나누어져도 한 곳이었다가

떨어져 그리운 동안 다시 꽃이었다가 
이렇게 그리운 동안 잠시 바람이었다가 
꽃도
바람도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두물머리의 마른 나무에게

저 강물 몸 풀기 전부터 나무는 속절없이 말라 갔을까 
사위 봄빛이 올라 푸른 물이 뚝뚝 듣는데
어쩌자고 쇠줄로 어깨를 묶어 
두물머리 기슭에 성자처럼 섰는가

물길이 만나는 것에 온 마음이 치우쳐
사람들 우르르 오래된 느티 아래로 가는걸 보느라 
빈 배도 잎 하나 깃발처럼 달지 못했다

강물이 데리고 나간 것들이 그리워서 
배도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인지 
저 나무 그걸 보다가
제 팔을 꺾어들고 적막해 진 것인지

물가에 제사장처럼 서서 
오늘은 수수방관
물속에 부조를 새기는 먼 산만 보기로 한다.




다시 새 봄의 꽃

나 당신에게 꽃인 적 있었나요
한껏 오므린 저 꽃망울인 적 있었던가요 
당신은 무심하고 검은 나무 같아서 
우리가 건너 온 세월이
저 봄꽃 같기야 하겠어요 마는
바람이 부는 날 꽃 옆에 서면 자주 궁금해져요 
꽃도 가지를 통과하느라 보얗게 얼굴이 떠서 
속엣 말 다 하고 어찌 사느냐 나무라겠지만
나 당신에게 한번이라도 꽃인 적 있었나요 
타오르는 저 맺힌 말들이 두서없이 풀어내는 
무수한 봄꽃인 적 있었던가요

여전히 당신이 그리운 긴 봄날입니다.




햇차 만들다

햇차 만들러 왔습니다
봄 날씨가 오래 추워 잎이 더디다가 
손님처럼 가랑비 살짝 다녀간 뒤 
비로소 한 걸음에 당도했다는 그대
맑은 날을 택해 저도 한달음에 왔습니다

지난 겨울의 바람과 햇살과 
달빛이 지나온 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당신 
그 나라가 못내 궁금합니다

뜨겁게 달군 쇠솥에 
푸른빛을 내어 주고
마른 창자처럼 흠씬 숨이 죽어서야 
홀연 더 푸르게 환생하는 당신

찻잔에 이르는 그 맘의 어디쯤에서 
뜨거운 바람은 일고
입술을 적시는 그 강물의 어디쯤에서 
지금도 향기로 출렁이고 있는 당신!




휠체어 탄 사람끼리 부딪혀 누운 장애우께

꽃피는 사월에 
비 옵니다
눈이라고도 합니다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사람 사는 일이
저 꽃들의 일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휠체어 탄 사람끼리 부딪쳐 중환자실에 입원한 사람 
사지를 다 펴도 보통 사람 반 만한데
서로 병원비를 물릴 수도 없고 
산재 처리도 안 되어
십시일반 거들고 나서는데 
창밖에 보호자 맘처럼 
굵은 눈 섞인 비 옵니다 
맘은 꽃인데
몸이 불편하다고 어찌 봄이라 알리지 못 할까요 
비는 내리고
벚꽃은 찬란하고
비 아래 제 몸피만한 빗방울 매달고 있는 
저 꽃에게
사람 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날




매달린 나무 거북이의 꿈
- 산청 남사마을 최씨 고가

대문 저 쪽에 봄꽃이 거품처럼 일어 
어데 불난 듯 환한데
문 안에서 자못 밖이 궁금한 나는 
대문을 기어올라
머리 겨우 내밀었다 
빗장 살짝 열어 놓고
주인은 환장할 꽃 보러 갔는가
혼자 남아 등짝에 애가 쩍쩍 타는데 
물도
불도 
꽃도
날 잊은 듯하더라.




북어

  제 몸을 허공에 달아 내장을 내어 놓은 자리에 바람과 햇볕을 들여 집 한 채를 새로 짓는 북어를 보았네. 제 속을 내어 놓아서 한결 가벼워지는 한 목숨을 보았네. 흔쾌히 공중에 몸을 매어 놓고 속까지 선뜻 비워 둔 적 있었더냐. 북어는 묻는데 아랫배까지 잡생각이 들어 찬 사람은 따로 할 말이 없네. 오래 몸 아프시던 큰 아버지 오늘 저 북어처럼 속 다 내놓으시고 이제 긴 잠에 드셨네. 큰 집 한 채 몸 안 에 새로 지으셨네.








강 희 동

시도 때도 없이
연리지 연가
어버이날에 
귀향생각
계사년 벽두 청계령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
꿈속의 길을 혼동하며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이 되어 
별에게
흐르지 않는 강물



시도 때도 없이

시(詩)를 써야 한다 
맑은 시를 써야한다
고(苦) 서두를수록 흙탕물 탕(蕩)탕(盪)* 
내 빨래터에 풀빛 젖은
윗도리 두드릴수록 탕탕(蕩蕩) 
허공 때리는 헛소리 빨아
널어 물 흘릴수록 갇히는 못 뚝 가에서 
나는 맑은 시를 쓰고자 서성인다
나나 시나 물이나 또
내 윗도리나 저 허공조차도 탕(湯)탕(盪) 
소리 가두며 헛일 하는 것
슬쩍 미소나 흘리는 바람조차 
시(詩)도 때(時)도 없는 것 
알기나 할까!

* 탕(蕩):흩어지다, 탕(盪):씻을 탕.




연리지 연가

너에게 가고 싶어 
상처난 손 벌려 오랜 날 
그대 눈빛에 이르면 
뜨거운 볕 받으려
잔가지도 피하며 부채살로 펼치던 
숲 속 사람끼리 또 나무끼리
내 발 절룩이며 땅 속 은밀히 
성한 너에게 다가가면 이제야
우리 다치고 성한 뿌리끼리 서로 보듬어 
하나가 되어 마주보고 수액을 퍼 올리면 
참나무 넘실대며 가지마다 무성히 잎들이 돋고 
상처 난 손발 서로에게 엉기어 속삭이며
눈물 꽃 피어 열매 붉게 익어 가나니 
연리지 연리근 서로 맞잡고 하나로 
건듯 부는 바람에 나뭇잎도 흔들며
숲은 서로에게 입 맞춰 뜨거운 합창을 한다.




어버이날에

부모를 돌아 볼 틈도 없이 허둥거리다 
오래 전 이미 부모가 되어 버린
참 빠르고도 허망한 어버이날에

나도 누구의 아비가 되어 빨랫줄 같은 세상에 널려 
햇볕 받으며 비 젖으며 또 부는 세상 바람 맞으며 
밀고 당기며 젖은 시간 말려가고 있는가

내 잠시 도시 광장에 사람 구경하며 어정거렸는데 
어버이는 검불처럼 가벼운 몸으로 뒤 텃밭이랑을 
만면에 주름살로 갈아 놓으셨네

매년 오고 가는 그날이지만 유독 
저녁나절 하얗게 꽃잎 흩는 수수꽃다리
힘없이 향기는 더 짙게 하늘가로 흐르는데.




귀향생각

저무는 저 하늘 
저녁이라 하네
배고파 집으로 돌아 가 
하얀 쌀밥이나 퍼 먹자
앵두 꽃잎 눈처럼 날리는 날 
허기진 냇물이 이밥처럼 부서지는
강가에 찔레꽃도 참 많이 흐드러졌지 
조약돌처럼 야무지게 살아 보자고 
작은 손 담그고 부서지는 햇살에 
앵두 맑은 입술 이밥천에 널어두고
서울로 밥 찾아 올라온 핏줄 선 젊은 사내 
다 쭈그러들어 허전한 날
못다 피운 차운 꽃다발 가슴에 쓸어 넣고 
동백 붉은 핏물 강물에 베이도록
때 묻은 세월 남루도 치대어 빨아내고 
멈짓멈짓 흐르다 머무는 여울목 즈음 
그만 노랫가락으로 멈추어 저녁노을 
눈시울 붉게 맞추어 바라보다
시간이 하얗게 부서지는 저녁 
더불어 이밥이나 먹으러 가자.




계사년 벽두 청계령에서

신년벽두 청계산 매봉 산정
눈 덮어 쓴 산봉우리들이 능선을 타고 올라 
매봉에 머리 조아리며 하례 인사를
홀랑 벗은 굴참이나 박달나무 나목 중간중간 섞인 청솔 
그 푸르른 머리 위에 얹힌 적설 무게로
나무도 신년하례를 한다
휘-이 돌아보면 아직 미몽에서 못 깬
양재나 과천 평촌에 낮게 엎드린 집들이 겸손히 다정하고 
굴뚝연기 하나 오르지 않는 시대에
청계사 마저 눈 속에 적묵으로 참선 중인데 
간혹 동박새 포롱포롱 정적을 가르고
눈 속에 젖어 묻힌다
산객들 눈 밟고 산정으로 길을 내어 올라
무엇인가 버리고 또 채워가는 듯 눈길 속으로 묻힌다 
고요가 무엇인지 가르키려는지
솔바람이 잔가지를 건너 와 눈들을 흩어 보다가
제 자리로 돌아가고 이 산 저 봉우리에서 야-호 소리치며 
어둠을 쫒는 소리에 후두둑 눈덩이가 놀라 떨어진다 
청계사로 푸르게 젖어 내려 가 보리라
계곡을 따라 토끼길 여미며 하심으로 구르면
청계는 보이지 않고 모두가 새벽 백설로 이불 덮어 쓰고
고요 속에서 또 다른 고요을 불러 홀로 제 길을 만든다 
그렇다 길은 발자국을 내며 가는 흔적이 길이다
청계든 벽계든 흐르고 또 흐르면 길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세계로 나가기 위하여 그렇게
사람 사는 길을 내어 보며 가보는 것이다
계사년은 뱀이 길을 구비 구비 내어 가듯이 그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

봄이 오는 듯 
마는 듯하는 
입춘도 훨씬 지난 
빈 새벽에

문득 객지에 머무는 아들 생각이 

그렇지
팔순도 훌쩍 넘긴 내 아배도 
기인 잠 쫓아 보낸 벽두에
아직 시들지 않는 작약 꽃처럼 날

봄날이여

봄이 가는 듯 
마는 듯하는
팔순아배 베갯머리에 아삼삼 
꽃잎 내리는 목단꽃처럼.




꿈속의 길을 혼동하며

나는 혼자 이야기 하며 취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다
장주의 구만리장천이나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가 아닐지라도
하늘이나 가물 열매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를 떠나는 흙들이 모두 사막의 모래가 되고 
더 길고 험악한 협곡을 지나는 물길이 될지라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명주실 따라 
실크로드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밤새 풀잎에 내려앉은 이슬방울을 털어 마신다 
낙타를 한 마리 사리라 기어이 떠나는 꿈길
그 길을 따라 모래알들이 동그랗게 별들을 품고 
기다리는 사막을 가로지르며 신기루조차 멀리 간 
바람 한 점 없는 땡볕 길을 걸어가 보리라
숨 막히는 대지에 숨 쉬기 위하여 땀 흘리는 
낙타의 바늘 길을 명주실 길 따라 가 보리라 
사막을 건너는 바람에게도 살아 견디는 
사람의 안부를 묻혀 보내어 보노라.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이 되어

그래 맞아
때로는 하나님도 자신을 믿지 못하여 
사람의 기도를 귀 담아 듣는다
첩첩산중이나 바다 깊은 물 아래나 높은 나무 위에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에 나를 홀로 남겨 두고 
비가 되어 물이 되어 갈바람이 되어
세상 한 바퀴 휘돌아 때 묻은 안개가 되어
산중이나 외진 물가나 나무 위에도 촉촉히 내려 앉아 
보이지 않는 노래를 불러내어 안개 속에 묻어 두고 
해가 뜨면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이 되어 신기루가 되어 
하늘로 오르는 허허로운 노래가 되고 싶다
미지의 세계여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이 되어 
저녁노을처럼 눈시울 붉어지다가 속절없이 
어둠처럼 물처럼 젖어서 흘러 아득히 멀어지는 
아무것도 아닌 흔적 없는 흔적이 되고 싶다.




별에게

너에게 보낸다 
칠흑으로 흐르는 밤 강
사금파리 반딱이는 이야기

너에게 또 보낸다
하늘강에 밤새도록 흐느끼는 
은하수 희뿌연 눈물자국

지상으로 돌아와
밤 강가에 앉아 안개방울 속에 
못 다한 푸른 별 이야기

울다가 멈춰 밤 세워 주어 담아
뒤척이며 흐르는 물길에 실어 
보낸다 너에게.




흐르지 않는 강물

잊으려 하네
혈서 피 흘려 쓰지 않아도 
혀 깨물지 않고 그냥
흰 국화 한 송이 향불 연기 
음악으로 흐른다 해도 잊으려 하네 
한번쯤 그리웠노라고
제비 봄 날 한나절
지지배배 날아올라 스왈로우 
스발늠아 춤 주며 욕해도
시냇물 소리 함께 흘려보내려 하네
 깨끗하게 날리는 배꽃 하얀 웃음 
부질없이 질퍽이는 삶 언저리 이야기 
이제 꽃잎으로 흩으려 하네 
아름다웠노라 봄 봉당 끝에
자르르 끓는 봄볕조차도 
이제 멀리 보내려 하네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려 하네.








권 기 태

들국화 옆에서
돌퇴미 
근황(近況)




들국화 옆에서

믿음이 사라진 일상의 변방으로 떠나 
상념에 빠져 먼 길을 방황하는 새벽 즈음 
오늘은 허기진 빈속이 쓰리다.

마귀에 홀려버린 긴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밝아온다 
햇살이 얼굴이 비춰오면 다시 만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늘 보는 이웃에게 잘 하라는 뜻으로 
어느 지인이 들려준 지나들은 이야기가 
깨달음으로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날

산길 후미진 기슭에 홀로 앉아 
하늘을 담아내는 푸른 당당함으로 
찬바람 한 아름 부드럽게 포옹하는 
서리 맞고 태연히 웃음 짓는 들국화

그 넉넉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늘 억척스럽게 참아가며 꿈꾸는 세상 
당신의 여유 있고 다소곳한 삶을 모아서 
허둥대는 내 자화상을 지우고 싶다.




돌퇴미

도촌리 산촌에서 모여들어 샛강으로 흐르는 
수 만 두락 들판 세로 질러 천변을 따라
풀 섶에 덮인 길을 십여 리 가다보면 
청석바위 휘둘러 병풍을 치고
물머리 모여와 바위에 부딪히는
수십 리 유역에서 물길이 모여 드는 곳 
오동나무 가지 어우러진 바위 언덕에 
구름이 떠도는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청석바위 낙숫물 소리 들으며
가만히 누워서도 수천 석 거둬들이는 
모여들어 쌓이기만 하는 명당자리
오늘도 햇살이 부챗살 모양으로 모여드는 
오대조 할아버지 산소.




근황(近況)

동이 트면 일어나 가는 산비탈 언덕 밭 
평화사 염불소리 어둠을 깨운다
풀 섶에 모기 떼 날아들어 소란한 길 
외진 길 한 마장 걸어 채전에 이르면
푸성귀에 고추, 가지, 오이, 호박 포기들이 
일렬로 줄 지어 싱글싱글 거린다
한들한들 조롱조롱 술렁술렁
파란 잎 열매들이 어우러져 연주를 한다 
요 며칠간 고라니 몇 마리 채전에 나와 
한 여름 내 가지런히 태평스런 채전에 
새순을 뜯어 먹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손바닥보다 여남의 배 큰 한 뙤기 밭에는 
소록소록 자라던 채소들이 동이 났다 
오늘은 배를 채우고 늦잠에 빠진 고라니 
발소리에 놀라 들깨 이랑을 뛰어 넘는다
안개 옅어지고 수숫잎 사이로 들어온 바람은 
땀에 젖은 온 몸을 휘감아 나간다.








김 미 현

인도로 가는 길
아버지의 마음 
산수유 꽃
구송리 마을
구르는 돌
어머니의 밥
달맞이꽃


|시인의 말
우리는 매일 길을 걷는다.
길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고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지만 
길을 걷는다.
길은 좁아지기도 하고
길을 잃으면 어쩌나 조바심내기도 한다.
길은 아득해 정말 길이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아직 앞으로 더 가볼 생각이다.




인도로 가는 길

바람이 분다. 
어느 순간
내 몸에서 나는 
도시 냄새와 섞인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분다.

매일 지나다니는 
사거리 건물 모퉁이 
흙빛 좌판 너머로
웅크려 앉아 나물을 팔던 노파가 
어느 때 부턴가 보이지 않는다.

생을 밝히는
노파의 굽은 등에서 
깃털마냥 새어나오던
긴 한숨의 기억들을 마주하며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바람이 분다.
한 줌 삶을 태워
영혼을 씻어 줄 수 있는 곳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도로 가는 길을 묻는다.




아버지의 마음

어릴 적
아버지의 자전거 뒷안장에서 
만나는 세상은
아버지의 숨결을 따라 
일렁이는 하늘이었다.

솟아오른 구빗길을 넘어
해 저무는 들녘을 지나갈 때에도 
어둠은 보이지 않고
위로만 위로만 날아오르고 싶었다.

아버지의 포근한 뒷잔등에서 
울려오는 말
마음의 길을 여는 
사람이 되어라.

그때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아버지가 보여준 하늘을 향해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걷는다.




산수유 꽃

산등성 바위 뒤 
산수유 꽃이 피는 건 
봄이 가기 전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걸음에 훌쩍 개울을 건너고 
낮은 돌담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댓돌 위에 신발
가지런히 벗어두고 
기다리는 그대와 
마주하고 싶어서이다.

산등성 어룽대는 발소리 따라 
꽃이 열리는 건
한없는 그대 등에 업혀 
지는 해를 등불 삼아
마을로 내려가고픈 마음이었다.




구송리 마을

좁고 휘어진
구송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 
오래된 사람처럼
등 굽은 소나무들을 보며 
산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길 가운데 모난 돌에 
때로는 넘어지고 
길가 이름 모를 꽃에
한참을 울 수도 있다는 걸 
오랜 시간 후에 알았다.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낮고 여울진
구송리 마을로 들어서자 
조팝나무 가지마다 
휘어질 듯
꽃송이들이 하얗게 피어난다.




구르는 돌

성난 들소처럼 날뛰던 
여름의 먹구름도 
사정없이 후려치던
그 겨울의 파도도 나였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눈발이 몰아친 후 
앙상한 몸피를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빠르게도 느리게도 
흘러가는 물가에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연다는 것.

사라졌다 돌아오는 
옅은 물소리를 따라 
구르는 돌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어머니의 밥

아직도 고향에는 
솔가지 불로 밥을 짓는 
어머니가 있다.

가마솥 한 가득
밥이 익고 국이 끓으면 
어머니의 사랑을 그릇에 담는다.

마당 한 켠이 좁도록 
모두 몸을 낮추어
한 그릇 한 그릇 비운다.

살아갈 힘이 어디서 오는 지 
어머니의 밥으로
삶의 무게만큼 채운다.




달맞이꽃

미워하지 않을 것.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 
다짐하고 돌아서면
해가 지고
다시 바람이 분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달이 떠오르면 
기다리던 마음은 
홀로 피어
다시 사랑하고 싶다.








김 성 재

안경
청령포에서 
마지막 인사2 
세상에 없는 이야기


|시인의 말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고 생각했다. 어디쯤 왔나 둘러보니, 아직 지하다. 모든 출발점은 1층이라고 생각한데 함정 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1층으로 향하는 길을 알 수 없단 거다. 설상가상으로 멀쩡하던 신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풀릴 것만 같다. 어떡하지? 이럴 땐 쉬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주저앉을 순 없다. 개뿔 뭐라도 해보고 주저앉아야 할 것 아닌가?
  초심을 되새기자던 나의 습관성 다짐에 콧방귀를 낀다. 아직 시작도 안 한 나에게 무슨 초심이 있단 말인가? 한 30년이 지난 후에 부끄럽지 않을 초심을 만들어야겠다.




안경

안경을 맞춘 날
세상이 이렇게 밝은 곳이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너의 좋지 않은 피부를 
더 잘 보게 되었다
피부 하난 타고났다고 자부하던 
나의
삶에 찌든 자화상이
거울을 통해 선명히 비춰졌다

며칠 간 계속되는 어지럼증은 
내 몸이 되기 위해서 
적응하는 기간이라 생각했다 
나흘 째 되던 날
심하게 앓았다
안경이 사람을 아프게도 하는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안경을 벗을 순 없었다

선명하던 세상이 자꾸 뿌옇게 느껴져 
깨끗한 안경닦이 천으로 박박 닦았다

아무리아무리아무리 
닦아도닦아도닦아도 
너는
보이지 않았다.




청령포에서

뱃길로 3분여 만에
관광지 청령포에 다다랐다 
아름다운 물돌이동 
관음송의 자태가 요염한 곳

삼면이 강이요,
나머지 면은 절벽이 절경이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옮기면 
입에선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어린 소년 홍위는 
50인의 무사들과 
시종들을 줄줄이 데리고
유유자적 삶을 즐겼으리라

매일 아침이면
소나무가 90도로 굽어져 
매섭게 안부문안 올리고 
검고 깊은 강물이 
섬뜩하게 시원한 지상낙원 
그 얼마나 행복했을까

열일곱 고아가
그토록 행복했던 이유는 뭘까? 
누가누가 잘했던 걸까?

청령포를 빠져나오자 
삼면이 바다요, 
나머지 면은 야생인
더 큰 청령포가 나왔다 
즐거운 관광을 마친 나는 
모두가 행복한 곳에서
더 행복해지는 꿈을 꾼다.




마지막 인사2

오랫동안 열심히 썼습니다 
그리곤 쉽게 지웠습니다
시는 쉽게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글도 
사랑도
또 무언가도
쉬운 것은 없었습니다

시가 쉽게 씌어질 수는 없듯이 
애초에 사랑도
쉽게 씌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괴발개발 시얼룩을 
쉽게 지울 수는 있어도
얼기설기 붙어있는 사랑자국을 
쉽게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10연 인용.




세상에 없는 이야기

어느 시골 꽃집 
손바닥만한 화분에 
애기꽃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늘 그 앞을 지났답니다

애기꽃은 할아버지를 향해 
방긋방긋 웃었어요 
할아버지가 나는 늙었다며 
애기꽃을 외면하였지요

하지만 애기꽃은
매일매일 할아버지를 향해 
방긋방긋 웃었어요 
할아버지도 결국은
허허허 웃고야 말았지요

할아버지는 애기꽃을 소중히 품고 
집으로 가져갔어요
볕도 쬐이고 물도 주었어요
항상 애기꽃은 방긋방긋 웃었어요

애기꽃은 무럭무럭 자라났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점차 늙어갔지요 
애기꽃은 바깥세상을 궁금해 했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커튼을 꽁꽁 닫았어요

애기꽃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었어요 
하지만 어쩐지 기운이 없었어요 
애기꽃은 어른이 될 수 없었거든요 
할아버지는 결국
애기꽃을 화분에서 꺼내어 
길가에 심어주었지요

바깥세상은 날마다날마다 소란스러웠어요 
흙탕물이 튀고 매연이 달라붙었지요 
애기꽃은 낯설고 무서웠지만
신기하고 재밌는 일들도 많아요 
그렇게 애기꽃은 어른이 되어가요

할아버지는 애기꽃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해요
자꾸자꾸 창문너머를 보아요 
자꾸만자꾸만 울어요
비만 오면 할아버지 몰래몰래 
눈물을 흘리던
그 옛날 애기꽃처럼요

오늘도 할아버지는 
엉엉 울고있어요 
쉿!
애기꽃한테는 비밀이예요.








김 여 선

애기똥풀
가을 소나기
상사화
체하다 
안계장
황초집


|시인의 말
개구리는 혼자 울지 않았다.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글밭이 있어 올해도 
시 몇 편이라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을 소나기 내리는 토요일 오후
아무도 오지 않는 테니스장 조립식 라커룸에 앉아 
글밭에 낼 졸시를 정리하면서
한무제의 추풍사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歡樂極兮哀情多 -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많아진다 
즐거움이 많았으니 슬픔이 다가오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겠지.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애기똥풀

길섶이나 미루나무 아래 
무더기로 피어있던 노란똥꽃
비 맞으며 가슴 아프게 피었다가 
비 그치면 말없이 고개 숙이는 
노란똥꽃
산다는 게 가끔은 
고개 숙이면
남의 말을 들어 주듯 
조그마한 바람에도
고개 끄덕일 수 있는 거
오늘도 길섶이나 미루나무 아래 
노란똥꽃 찾아
집을 나선다.




가을 소나기

가을 소나기 쏟아지던 날엔 
여름의 뜨거운 햇살도
구름 속으로 열기를 감추지 
날카로운 칼날처럼 번쩍이던 번개 
머지않아 천둥소리 들린다는 거겠지 
처마 밑 여름햇살 닮은 맨드라미
더 붉게 피어오르고 있었지 
가을 소나기 쏟아지던 날에 
아무도 오지 않는
테니스장 라커룸에 혼자 앉아 
조립식 지붕 위를 때리는 빗소리에 
여름날의 뜨거웠던 만남도 
쏴아쏴아 씻겨 내려가겠지
또 한 번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인다.
가을 소나기 쏟아지던 날 
처마 밑 맨드라미
붉은 눈물
뚝뚝 흘리고 있었지.




상사화

상사화 피어나는 화단 앞에
혼자 쪼그려 앉아 본 사람은 안다 
왜 잎을 버리고
호롱불 심지처럼 꽃대궁 하나 
쑤욱 밀어올리는 지를
가슴 떨리는 기다림에 
혼자 지쳐 본 사람은 안다 
왜 가슴에
하얀 안개꽃 같은 그리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지를 
봄날 양지바른 화단에
제일 먼저 싹을 틔운 
연둣빛 사랑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호롱불 같은 바알간 그리움 하나 
쑤욱 피어올리고 있다.




체하다

어제 먹은 돼지고기 한 절음 
밤새 소화되지 못하고 
송곳이 되어 위벽을 찌른다
 뼈마디가 쑤신다
폴란드 평원을 지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길 
누에처럼 하얀 버스 안에서 
번데기처럼 온몸을 웅크린다 
버스가 덜컹일 때마다
목이며 무릎이며 손목이며 
뼈와 뼈가 이어지는 곳마다 
현기증을 일으킨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시장 
각을 진 위 벽에는
물병이며 의족이며 신발이며 시계들이 
70년이 지나도록 소화되지 못하고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안계장

색 바랜 페인트 우시장 국밥집 
수명을 다해가는
사레 걸린 형광등 불빛이 위태롭다 
파리똥들이 식탁 모서리마다 
마침표를 찍고
천정으로 올라가 수많은 별을 그렸다
  아버지가 돌아온 건 이튿날 새벽이었다. 거푸집으로 머리에 얹혀있는 이슬 맞은 중절모는 느슨해지고 입에서는 술막찌 냄새가 났다. 1년 내내 키운 소를 팔려갔던 아버지. 아버지 손에는 소 판 돈이며 내년에 농사지을 송아지 한 마리 들려있지 않았다. 노름판이었는지. 색시집이었는지. 아버지의 입은 굳게 닫힌 철문처럼 견고했다.
  그런 아버진 수십 년 전에 파리똥 같은 까만 점 하나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지금도 우시장 국밥집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가끔 사레를 친다.




황초집

상강 지난 바람은
하얀 날이 선 기침을 토해낸다 
담배 건조기에 밀려나
약한 바람에도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 닮은 황초집
담쟁이 덩굴들이 투망을 던져 
저녁놀을 낚고 있었다 
칼국수처럼 길다란 연기를 
토해내던 황초집 굴뚝처럼 
허물어져 내리던 어머니의 허리 
이제 담배 농사는 그만 지으세요
야야 그래도 살아 있을라카만 움직여야제 
비듬처럼 더덕더덕 떨어지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성 잃은 거미줄에 매달린 
가을 해살처럼 위태롭다
버려진 낡은 가구로 서 있는 황초집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
팽팽한 긴장을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김 윤 한

안녕하신지
나는 돼지고기
진달래
눈길, 그 여자
파도 
느티나무 아래서
숫자와 나


|시인의 말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서늘하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정신없이 지냈는데 가을로 접어드니까 문득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눈썹 아래 어렴풋하다. 
  여태껏 나와 함께 했던 시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시를 더 써야 할지. 하늘에는 한가한 구름 한 점. 
  오랜 습관처럼 동인지에 시를 낸다. 창문 스치며 때 이른 낙엽 하나 파르르 떨어져 내린다.




안녕하신지

950 헥토파스칼 중형 태풍 북상 
거센 바람 주기적으로
다급히 대문 두드리고 있는데.

집채 만한 파도들 달려오는데
제주도 바다 속 소라나 문어들은 무사한지 
상어들 갈치들도 다 잘 있는지

바람은 이렇듯 거세게 울부짖는데
해남 어느 산골짝 멧돼지 가족 피신은 했는지 
꿩이며 놀란 토끼들 무엇을 하고 있는지

태풍 지나간 민다나오 섬
작은 시골학교 마당에는 물이 다 빠졌는지 
피신했던 주민들 저녁밥은 제대로 드셨는지

바람 저렇게 미쳐 울부짖는데 
안녕하신지
모두들 다 안녕하신지




나는 돼지고기

사화집 약력 난에
‘안동출생’ 대신 ‘안동산’이라고 썼더니 
제주산도 아니고 미국산도 아니고
당신이 무슨 돼지고기냐며 사람들 웃는다 
돼지국밥집 낡은 유리창에는
돼지국밥, 내장국밥, 모둠순대 그리고 
‘삶은 돼지고기’라고 씌어져 있다 
그래, 내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
돼지머리, 진열장 위에서 실없이 웃고 있다




진달래

불이다
아무도 모르게
금세 온 산으로 확확 번져 나가는 
분홍빛 불이다

불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안으로 활활 번져 들어오는 
쓰라린 불이다

불이다
봄날 무사히 건너고 싶지만 
또다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미친 불이다




눈길, 그 여자

눈 맞아야지, 우산도 안 쓰고 낭만적으로
걸어서 출근길 횡단보도 앞, 아뿔싸 사정없이 쏟아지는 눈 
어깨 털며 펄쩍펄쩍 뛰며 내리는 눈 털어보지만 역부족 
눈 덮어쓰고 속수무책, 막막하게 서 있었지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중년의 여자 
말없이 내게 우산 씌워주며 함께 걷다가 
마침내 아득한 눈발 속으로 사라져간
기나긴 생애 가운데 단 십여 분, 나와 동행했던 
어디에 살고 있을까 얼굴도 모르는
내 어깨에 바람처럼 스쳤던 서느런 외투자락 
어쩌다 눈길 걸을 때면 문득 생각나는 그 여자




파도

바닷가에 홀로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픈 일이다 
파도
천 길 바다 속 까마득히 갈앉았던 
오래된 상처들 그리움들
한 겹씩 차례로 말아 올린다. 
헤진 속살 더욱 쓰리게 문지르며 
쏴쏴 소리 지르며 어깨동무하고 
나를 향해 달려와서는
멍들어 아픈 바위들 또 때린다 
아린 기억들 하나씩
산산조각 물보라로 부서져 내린다 
아득한 수평선으로 날아가는 
갈매기 더욱 적막하다
바닷가에 홀로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픈 일이다




느티나무 아래서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서서 
우리들 알량한 키보다 몇 배 높이 
맑은 물 길어 올려 가지를 키운다
나도 제법 나이 먹었다고 점잖은 척 하지만 
나무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서서 
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그렇게
달려오는 찬바람 온 몸으로 막아내고
찌는 여름이면 더욱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오만한 우리들에게
말없이 자리를 권한다




숫자와 나

군번 23040763,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학번, 계좌번호, 카드번호 
살아온 길 뒤돌아보니
나는 보이지 않고
대신 온갖 숫자들만 조합되어 있다 
숫자들은 내 과거이고 현재이고 
철길처럼 따라가야 할 예정된 미래다 
구름 잠시 쳐다보려 해도
휴대전화 번호로 용케도 나를 찾아내 
팽팽한 세상으로 내몬다
탈출해야지 비밀번호를 누르면 
오히려 숫자 속으로 빠져 든다 
세월 흘러 나 또한 사라지고 나면 
육신 대신 숫자들만 삭은 종이처럼 
표정 없이 남게 될 것








김 지 섭

어떤 풍경
추억 
서울에서


|시인의 말
  원고모집을 알리면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겨우 얻어낸 적은 시편을 글밭에 실어준다는 건 지나친 호사다. 독자들에게 동인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난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어떤 풍경

초닷새쯤이었을까
여린 듯 날렵한 초승달 하나 
수줍게 내려다보고

나도 망연히 바라기만 하던 
그 아스라한 시절

부끄런 듯 속살 차오르던 
반달 위으로

깊은 먹구름 뒤덮여
그 젊은 날을 삼키더니

생애의 늘그막
넌 다시 수심어린 
그믐달로 돋아나도

난 차마 고개 들어 
우러르지도 못 하는 밤

저 먼 하늘가 
새벽별 하나만

홀로
하얗게 지새고 있네.




추억

저만큼 걸린
서녘 하늘 수평선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늙은 어부 하나

그 젊은 어느 날 한 때
수면 위를 퍼덕거리며 뛰어오르다가 
그만 힘차게 달아나던
은빛 대어大魚 한 마리

의자에 걸앉은 쇠잔한 몸을 
다시 벌떡 일으켜 세우는 
거대한 금빛 기억 한 마리 
세찬 파도를 가르며
먼 바다로 사라진다

순간 온 바다는
찬란한 노을빛으로 붉어가고

아득 수평선 끝으로 
내리는 어둑발.




서울에서

도심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켜켜이 솟아나는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협곡에 갇혀

사람들 인심도 
딱정벌레처럼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고








김 진 회

할매꽃
비 오는 날 너에게 
빈 방
혀를 삼킨 목에게
무하마드 알리
그대에게


|시인의 말
  시를 잃어버리는 건 나를 잃어버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가 없는 지금도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해 산 몇 년 간 난 나를 참 많이 미워하고, 실망하고, 아파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런 일들에 지쳐가고 나는 어느덧 시를 미련 없이 보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해 죽어가던 지난 몇 년 동안 시를 위로하던 그 무엇도 만나고 싶지 않은 오늘, 나는 또 몇 편의 장편을 긁적여 보련다. 그러다 시가 또 어느새 나를 미워하고, 사랑할 걸 알기에…….




할매꽃

나는
할매의 손짓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매는 소녀처럼 웃으며
꽃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징용 간 아배 
나비처럼 날아오라고
마당 구석에 몰래 그렸던 꽃일까?

나는 한 마리 나비처럼 할매의 손짓을 
느끼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매를 따라 노란 나비가 
날아든 곳에는 예쁜 꽃 속으로 
향기가 피어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어매는 기겁을 하며 
할매를 말렸지만
나는 그날 할매의 방에
샛노란 똥꽃이 피는 걸 보았다.




비 오는 날 너에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우린 길을 걷고 있었지

너의 어깨 위로 얼룩진 빗방울을 보며 
예쁜 꽃이 피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넌 작고 예쁜 꽃이 되었지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너는 오롯이 하나인 것처럼 빗방울에 흔들렸고 
사람들은 너의 아름다운 몸짓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꽃잎과 꽃잎 사이로 난 너의 균열을 보며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벌어지는 상처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으니까

내가 너의 상처를 보았을 때 
우린 길을 걷고 있었고
너는 아름다웠고
비는 참 지랄 맞게도 내렸지.




빈 방

그리움이 한 순배 돌자 
병이 제일 먼저 울었습니다
다음으로 잔과 내가 울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누군가 보았다면 
참 청승맞다 이야기하겠지만
셋 중 나는 가장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리움이 다시 한 순배 돌고 
나는 새우를 껍질째 씹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마리의 새우를 그리워했습니다

외로움이 그리움을 만나 
밀어를 나누던 밤이면
나는 새우처럼 쪼그려 누워 
둘의 대화를 엿듣고
그런 날이면 빈 방에는 
빈 병과 빈 잔과
소금 위에 잠들다 사라진 새우와 
새우를 껍질째 씹던 내가 가득했습니다.




혀를 삼킨 목에게

  얼마 전부터 혀를 삼킨 목에게 노래를 시키는 일조차 그만 두도록 했지.
  그러니까 그날 우린 소리라는 몸 없는 이상한 감정을 잃어버린 거야.
  무심코 날아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던 돌에게 화를 내지도 않을 만큼 무뎌진 거지.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도 모를 만큼 무뎌진 건 아무래도 좋아. 뭐, 감정이 싸구려가 된 요즘 시대에는 흔한 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 몸 어디에도 혀라는 녀석이 자라지 않고 있는 거야.
  그때부터 부르고 싶은 이름이 생긴 거지. 
  이름,
  혀를 삼키고 실직해버린 목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싸구려 감정이 생기면서부터 부르고 싶은 걸 핥아주는 버릇이 생겼지.




무하마드 알리*

나는 동생을 무하마드 알리라고 부른다. 
권투를 배운 것도
착실한 믿음도 없는
동생을 무하마드라고 부른다.

무하마드는 이국적인 어머니를 가졌지. 
코가 높고, 눈이 크고,
마치 새엄마 같은 매력을 가진 여자였지. 
그의 어머니도 그를 무하마드라고 불렀던가.

분명한 건 녀석에게도 
한국식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고, 한 번도 불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야.

녀석은 검은 피부를 가졌고, 
서툰 한국말을 가졌고, 
이국적인 어머니를 가졌고, 
부서진 母國語를 가졌지.

녀석은 친구가 없고, 
젊은 아버지가 없고, 
돌아가야할 고향이 없고, 
불려질 이름이 없었지.

* 미국의 전 흑인 권투 챔피언.








이 위 발

그대 떠난 빈자리에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개망초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그곳을 찾아서
물레방아


|시인의 말
  습관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다. 작년부터 시작된 버릇이다. 불편할 것 같지만 너무 편안하다. 책을 잡으면 두 시간 정도는 훌쩍 지나간다. 집 사람의 잔소리도 이젠 사라졌다. 화장실이 두 군데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도 화장실에서 책을 보고 나왔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이 문장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대 떠난 빈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 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열차를 타고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나는 
기억에서 사라진 상처 앞에서
 겸허하게 고개 숙이듯
그대의 끌림에 짙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을 빨아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이 되기도 하는 
잡힐 것 같은 잡혀지지 않는
슬픔의 까닭이 결핍이라면 결핍이 없는 
나의 시선은 균형을 잃고
기울어지기 시작했었다 한
쪽 귀만으로 듣고
한쪽 눈만으로 보기 싫어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대는 
표면과 이면의 양날을 품고 
무너지는 쪽으로 몸을 던져 
눈꺼풀이 커튼 열리듯이 
달덩이 하나 쑤욱 올라와
보란 듯이 바람맞은 나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었다.




개망초

구절초도 아닌 것이 
쑥부쟁이도 아닌 것이
아버지 상여가 밟고 간 밭두렁에도 
지천으로 피어나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배다른 누이처럼 구박받던
멀쩡하던 것도 몹쓸 것이 되고 
모두가 헛되고 헛되듯이
하잘 것 없이 뭉개져 버리는 
개소리, 개꿈, 개떡, 개죽음 같이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운 구석 하나 없는데
달밤에 하얀 꽃밭 위를 지나가듯 
사람의 손길이 잠시라도 뜨면 
언제 들어갔는지 자신의 터를
제 마당으로 삼아 버리는
의미 없음에도 존재하는 엄연함에 
나에게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기억해 주길 은밀하게 
미소짓는 그대는.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빛이 있고 없는 그 사이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그대는 언덕 아니면 강물인 것을 
점점이 박힌 그 길 위로 
석류꽃은 떨어져 화전이 되고 
불두화는 이슬에 젖고
옥잠화는 눈에서 깨어난 듯 맑은데 
아름다움마저 슬픔과 맞닿아 있어 
슬픔의 까닭이 결핍이라면
결핍이 없는 아름다움도 
그대의 시간 속으로 
숨어
버리면.




그곳을 찾아서

  그곳에 시간이 스며들면 영원히 미끄러지듯 슬픔이 여름 하늘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먹구름처럼 어슬어슬한 푸른 새벽 이명이 되어 그대의 눈빛 속으로 새파랗게 날선 불빛으로 파고들 때 내 발은 꿈에 붙들려 물처럼 잡히지 않는데도

  나를 봐! 내가 잡히지?  
  허우적대는
  그리움.




물레방아

오늘을
괄호 안에 넣어보고 
풀어보고, 지워보고
내일을 위해 찝쩍거려 보지만 
낮달 말뚝에
박혀 있는 소 한 마리
소의 목엔 올가미가 걸려있고 
그림자는 올가미 끈이
베푸는 괄호까지만 
돌고
돌고 도는.








임 관 혁

고령 친구
첫사랑 
가을소묘
추석
몽돌
달동네
어느 주모(酒母)

귀뚜라미 우는 밤




고령 친구

어버이날
늘 웃던 눈가에 
눈물을 보였다 
어릴 적
고령장 장돌뱅이 되어 맴돌다 
귀신 잡는 해병이 되어 살아온 
고령 친구
사우디 불비 아래 청춘을 
불사르고 돌아와
돌아선 사랑 앞에 
돌아선 핏줄 앞에 
술로 세월 보낸 
병술생 내 친구 
오늘도 술잔 기울이며 
유정천리 무정천리 
노래 속에 우는 
동갑내기
고령의 내 친구
오늘은
정말 울고 싶은 
어버이 날이구나
웃어도 우는 
가슴으로 우는 
내 친구 효야
소리 내어 큰 소리 내어
천둥 비 같은 눈물 흘려 보게 나.




첫사랑

처음 핀 꽃 
봄날에 
참꽃으로 핀 꽃 
남 몰래 핀 꽃 
가슴 설렌 꽃
두고두고 그리운 꽃 
세월가도 지지않는 꽃 
영원히 살아있는 꽃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




가을소묘

간절한 그리움은 
가을비 되어 내린다 
들국화 향기 실어 오는 
바람과 함께
낙엽은
그리운 이의 엽서가 되어 
내 뜰에 떨어진다.




추석

은하수 강 건너 가신 
할배도 할매도 
오늘은
감 익는 옛 마을 
옛 집으로 돌아와 
아들 딸 절 받으며
손자 손녀 재롱 보고 
가실 게다
하루 종일 머무시다 
뜨는 달 보름달 보다 
환한 웃음 지으시며 
돌아가실 게다.




몽돌

파도가 굴리고 
굴리어 온 
염주 알 하나 
깎이고 닦이어 
모 하나 없다 
티 하나 없다
세파에 밀리고 밀린 
나는 아직도 모난 돌 
얼마나 더 깎이고
더 굴리어야 몽돌이 될까.




달동네

아파트 큰 키에 
더 작아진 마을 
옥상 빨랫줄엔
빛바랜 옷가지 가득하다 
닫혀 진 대문마다 
바람은 잠들지 못 하고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지르고 있다 
밤 열 시
불 켜지지 않는 집집이 
달빛에 젖고 있다.




어느 주모(酒母)

네 삶을 판다 
웃음으로
참가자미 무침회 같은 
세상사에
한 점 젓가락질을 하며 
쓴 눈물 같은
오늘
소주가 달도록 
울며 마신다.






참꽃이 좋다 
향기가 없어도

참눈물이 좋다 
서러워도

참사랑이 좋다 
괴로워도

참마음이 좋다 
외로워도.




귀뚜라미 우는 밤

갈대꽃이 핀다 
강가에

단풍이 든다 
잎새 마다

기러기가 날아간다 
먼 하늘가로

들국화가 핀다 
찬 서리 속에.








임 두 고

투정
여자 
몰운대에서
내 마음의 사계


|시인의 말
  시의 질을 걱정하던 때가 과연 있기는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느새 내 시의 양이 문제가 되고 보니, 시력(詩歷) 삼십 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시의 품에 들지 못한 모든 사물들이 내 빚으로 남고 만다. 무슨 빚부터 어떻게 갚아나 가야 할지, 시의 첫 행은 고사하고 시제부터가 막막할 따름 이다. 아, 시의 길이여, 늘 전전긍긍 안타까운 여정이여.




투정

잘 참아 왔는데,
오늘 나는 끝내 외식 상을 뒤엎고 말았다네. 
화기애애한 가족 외식 상 앞에서
고기 일인 분에, 밥 일인 분에 
핏대를 세우며 짜게 구는 아내가 
늘 얄궂다 싶었는데,
오늘 해물짬뽕이 먹고 싶은 나는 
주차 때문에 늦게 들어가고 
삼선짬뽕이 먹고 싶은 딸은
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채 
그냥 짬뽕 셋이 주문되었다네.
언쟁 끝에 나는 상스럽게 자리를 박차고, 
주문은 취소되고, 우습게도,
집에 돌아온 나는 밥상머리에 얌전히 앉아 
외식 투정인지, 투쟁인지를 회개하듯
소리 죽여 라면 가닥을 들이키고 있다네.

아내여, 밥상 머리에서 다소곳이 
밥 투정 반찬 투정 한 번 없이
차린 대로 주섬주섬 잘도 먹는 내가 
자기 요리 솜씨 덕분이라고
때로는 신랑 잘 만난 덕이라고 
호호호 상쾌, 유쾌해 하지만 
밥상머리 투정은 절대 안하려는 
내 진짜 속내를 말하면
결코 물리지 못하는 밥상,
게걸스런 추억의 밥상이 내 밥상 위에 
늘 함께 차려지기 때문이라네.

내 밥상 위에는
걸핏하면 상을 뒤엎는 아비보다
행주 치마폭으로 훔치던 어미의 눈물 편이 되어 
하루 빨리 아비보다 힘센 어른이 되고 싶던 
횟배 곯은 어린 시절부터
두부찌개를 최고의 진수성찬으로 여기며 
김칫국물이 흐르는 보자기며 쌀자루를 들고 
시외버스 속 여학생 앞에 서 있기가 
창피스러운, 자취 생활의 학창 시절까지가 
소태 맛의 양은냄비가 되고 간장 종지가 되어 
늘 함께 차려지기 때문이라네.




여자

여자는 늘 남자들의 산 너머 남촌이거나 
긴 여정 끝에 와락 껴안게 되는
낯선 풍경.
여자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가 온통 
황홀한 길이고 숲이고 바위 틈새랄까. 
그래서, 여자를 지나치는 남자들의 시선은 
언제나 숨가쁘다.

여자는 늘 다락 위에 감쪽같이 쟁여진 
꿀단지거나
남자들의 가슴팍에 솟구치는 
단 샘물이랄까.
퍼내면 퍼낼수록 차 오르는 
달콤, 상큼한 그 맛의 깊이가 
뿌리 깊은 남자들로 하여금
조갈증으로 더더욱 껄떡대게 하였을 터.

여자는 늘 남자들의 출발지이자 종착지. 
마르지 않는 강이 여자라면
남자들은 푸른 바다를 등지고 회귀하는 
연어랄까.

강으로 돌진하는 연어의 푸른 바다는 
이미 전생일 뿐.
돈이든 권력이든 죽음이든 못 뛰어넘을 방죽이랴.

여자는 늘 닿을 듯 닿을 듯 
따먹고 싶은
골목어귀 가지 끝에 열린 봉긋한 자두이다가 
불현듯 곁도 주지 않는
탱자 가시울타리 너머 수줍은 능금이다가.




몰운대에서

쓸쓸한 바다에 안기고 싶거나 
외로운 바다에 기대고 싶거든 
몰운대로 가보라
가만히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쓸쓸함이 겹겹 물결로 밀려오고 
어느새 아랫도리까지
흥건히 외로움으로 젖게 되는 몰운대 
몰운대를 모른대도
임병호 시인이 노래한 사상공단 지나, 을숙도 부근 
에덴공원 지나, 다대포 해수욕장 끝자락에 
시집처럼 꽂혀 있거나
푸른 시상처럼 펼쳐져 있는 바닷가가 
몰운대다.

딸들은 많았지만 끝내
아들 하나 없이 팔순을 바라보는 맏이와 
이십 년 넘게 터울 지는 막내가 늘 그렇듯이 
말없이 차례상 앞에 나란히 엎드린다.
한 때는 두 며느리를 다그치며 
차례상을 올리시던 당신이었건만
언제부턴가 지방 속에서 차례상을 받고 계시거니
선산에서 먼 이곳까지
혼백은 제대로 찾아오시기는 했는지. 
어머니는 늘
가슴 한 켠에 글썽이는 내 별자리다.

차례를 끝내면 다대포 활어센터 싱싱한 회도 회지만 
해 기우는 저물녘
불콰하게 드러누워 취객처럼 웅얼거리는 
몰운대 앞 바다 품이 제격이다. 
몰운대에서 저문 지난 세월들도
이제는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저 썰물 같은 것. 
내가 사는 안동 낙동강 발원지 강물은
이곳 몰운대 앞 바다까지 흘러와
고달픈 강물의 여정을 무사히 끝내기는 끝내는 것일까. 
형님은 또 어쩌다
이곳까지 떠내려와 따개비처럼 정착하게 된 걸까. 
겹겹 파도의 주름 속에는 여전히 허기진
세월의 모래 후폭풍이 일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그 사이 나는 쓸쓸하니 외롭게 수평선에 발목을 담그는 
몰운대의 구름이 되고, 노을이 된다.




내 마음의 사계

  머리 위에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펼쳐든 시집 속 시 행조차 가물거리는 내 육신의 인생길은 휑뎅그렁 겨울이 깊어가고 있건만. 보이지 않기에 망정이지, 민망스럽게도 마음은 아직도 소년인지, 청년인지. 뾰죽뾰죽 새싹 같은 가슴이다가, 쿠쾅쾅 천둥 같은 가슴이다가, 주렁주렁 열매 같은 가슴이다가, 펄럭펄럭 눈바람 같은 가슴이다가…… 내 마음 속에는 반죽된 내 일생이 형형색색의 사계절로 공존하며 수많은 나를 새롭게 빚어내고 있는데, 늙지 않는 마음은 죄가 없을 터. 누가 무슨 죄목으로 이를 단죄하랴.








전 대 진

어느 무명작가의 표절史
가을 개화 
그냥 있는 너
외로운 습관
그 꼴
서울 오체투지
겨울 지하철


|시인의 말
  핑계가 더 늘었다, 번잡하지도 않은 삶을 게으르게 늘어뜨리며 열두 달을 보내고 나니 다시 자업자득으로, 후회만 남았다.
  차라리, 열심히 후회해야겠다. 다음 가을에도 나는 많이 후회하겠지만 한 치만 더 컸으면 싶다. 마음이든, 시든, 그 무엇이든.




어느 무명작가의 표절史

한 때
모든 것을 표절하고 싶었다 나무를 스치는 
녹색의 바람과 바람이
계절을 따라 색을 바꾸는 기이한 생태를 
종이 위에 적어두고 싶었다 흐린 날 
대문을 기어오르다
어느새 개어 버린 하늘 때문에
기어온 흔적과 바삭거리는 껍질만 남기고 사라진 
달팽이를 적고 싶었다 하얗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얇은
제 몸에서 꺼낸 실을 조심조심 나무사이에 걸어 
먹이를 기다리던 거미와
그 거미줄에 걸린
어린 나뭇잎이 눈에 맴돌아
밤을 지새우며 표절시도를 하곤 했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게 한 번도
표절시비에 걸려본 적 없다는 게 
더 없이 슬프곤 했다

표절할 마음도 잃어 불쾌히 한가로운 요즘 
산다고 바동대는 몸만 자꾸 번잡하다.




가을 개화

저녁이다 문득 
가을이다 번쩍이는
네온 사이를 지나치며 바람은 
시원하다 회색보다
한참은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사나운 단풍 속에서 그녀
또각이는 구두를 연주 중이다 그는 
딱딱거리는 신발로 독무 중이다 
알록달록
가을이 한창으로 
개화 중이다.




그냥 있는 너

  창밖에는 아직도 바람이 불고 있다 멈춤을 모르는 바람 잎사귀를 떨어트린 나무들이 부는 바람에 맞춰 춤춘다 춘다 휘 휘 하고 낙엽이 지나가고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너
  너는 가만히 있다 그저 가만히 있다 창밖에서 바람을 불 고 있다 낙엽을 날리고 있다 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

  바람이 너 때문에 불고 있다 나무가 너 때문에 춤추고 있다 너 때문에 낙엽이 날아오르고 날아올라 구름을 만들고 있다 가만히 있는 너 때문에 눈이 내린다 겨울이 내린다 너 때문에……

  창문 밖에 니가 있다 
  겨울을 뿌리는 니가 있다.




외로운 습관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고민에 빠졌는지 그녀 
꼭 닫은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다

혼자다
빽빽하게 붙어 앉은 사람들은 
조금 무거운 공기일 뿐
어둠만 가득하던 어제의 방처럼 
또 또 또 또

서고 앉고 기대 옷깃을 부딪치지만 
그녀는 단지
조금 귀찮은 공기일 뿐 
그녀도 그도 지하철도 
습관처럼 또 또 
혼자다.




그 꼴

자동차가 지나간다 버스가 지나간다, 지하철역으로 
제 각각의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간다 줄줄이다 
교통카드를 대며
같은 목소리로 삑삑 거린다 기다리던 전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
쏟아져 나오고 쏟아져 들어간다 난리라도 난 것 같은 하 루를
몇 번이고 복사한다, 옷도 구두도 머리색도 
다르기만 한데도 하루하루
하는 짓은 모두 다 그 모양이다 
그 모양 그 꼴이다.




서울 오체투지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붙이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손을 벌리고 있다
절실한 머리꼭지로 절실한 등허리로 
외치고 있다 한 푼
줍쇼 한 푼만 
줍쇼, 지하철 입구 
계단 한 복판에서
으리으리한 강남 땅 한 복판에서 
한 푼만 달라고 엎드려 있다.




겨울 지하철

한 사람이 또
기침을 하고 옆 사람은 
눈썹을 찌푸린다 무성의하게 
아이를 쓰다듬는
어깨가 처진 아줌마는
천정에서 쏟아지는 히터가 뜨거워 
옆 사람과 옷깃이 부딪힐 때 마다 
눈살을 찌푸린다

후끈하게 데워진 겨울 지하철에 
웃음이 흉년이다.








천 승 현

목마름을 등에 지고

연등 
고운사
밤비
떠나는 길 돌아오는 길 
상사화를 보며
주산지에서
눈이 시리던 날


|시인의 말
올해는 유독,
유독하며 혹독한 눈을 견뎌내어 산속에서
봄을 맞이했고 지치기만 하던 뜨거운 여름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짧아서 아쉽기만 한 가을 속으로 발을 디밀었습니다. 
돌아오는 계절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음은
살아있음에 고마워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살아있어 이룬 게 없기에
세월 앞에서 미안함이 큰 까닭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는
작은 흔적들을 부끄럽게 놓아봅니다.




목마름을 등에 지고

내 마음 구름처럼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선다.

들판을 지나고 
강을 지나고
길게 늘어선 전봇대의 
목마름을 지나

그리움을 안고 
불어가는 바람처럼 
사람 하나쯤 그리워져

길 끝에는 누군가가 
있어 줄 것만 같은 
외로움을 데리고 
불고 또 불어간다.






사람들의
소망이 던져져서 
쌓인 탑을 지나
절 마당에 홀로 선다. 
높은 산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서있으니 
조금씩 떨려오는 몸. 
도망치듯 법당으로 들어가 
설움을 재우려 수그리고 
엎드리며 절을 한다.
낮아져야 살아갈 수 있는 
외로운 生이다.




연등

1
가슴에 타는 불 곱게 밝혀 
하늘에 걸어두고 돌아서면 
산 밑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득하니 멀기만 하고 
스치고 가는 바람조차 
적적하구나.

2
화창한 볕 아래 내다 걸린 빨래처럼 
화사한 봄 햇살 아래 내다 걸린 소망들이 
건듯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소리 없이 빌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운사

일주문 앞에 섰다.
아주 오래 전 새벽을 알리는
법고 소리를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기나긴 세월 지나고 다시 찾아온 
고운사.
여전히 바람이 분다. 
낙엽들은 발밑에서 
굴러다니는 햇살과 부딪치고

그날처럼 고요했다.

그 세월동안 들끓은 것은 
내 마음 뿐이었다는 듯이.




밤비

깊은 밤
소리 없이 내리는 비. 
땅으로 스며드는 기척을 
언제나 몸이 먼저 알고 
삐걱이던 잠에서 빠져나와 
밖을 내다보면
붉은 단풍조차 잠들어 있는 
어둠 속으로
조용하게 번져가는 비. 
사는 일이 힘에 겨워 
더러 깨어 있는 사람들의 
젖은 가슴으로는 
눈물로도 내리는 비.




떠나는 길 돌아오는 길

떠나가는 길에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마음을 이고 지고 가서 
내려놓고 오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무주구천동 어디쯤
울고 다니는 마음 하나.




상사화를 보며

한 줄기에
아닌 듯이 인연으로 맺어져 
막막한 그리움으로

내가 피기도 전에 
네가
네가 지고난 뒤에서야 
내가

인연인 듯이 아닌 우리 
단 한 번 만날 일 없어도

네가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면 
네가
한 뿌리에 목숨을 얹어

해 뜨고
달 지는 대로 
그저 살아갑니다.




주산지에서

산과 산 틈새에서 
슬픈 듯이 고여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받아주던
저수지의 깊은 속내들과
그 가득한 물을 이기고 서서 
허리를 내준 채 말없이 잠겨있던 
왕 버들의 긴 사연들이
알아듣는 이 없는 
주산지 푸른 물 위를 
조심스럽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저수지 되는 날
세상일 지친 마음 풀어 넣으면 
그 사연들 속내들을 모두 다 
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돌아서는 발걸음에 또 하나의 
내 편을 얻었다는 안도감이 
길게 따라 붙었습니다.




눈이 시리던 날

바람만 잔뜩 맞고
내내 하늘만 올려다 보다 
눈이 시리던 날,
사무치는 그리움은 아니어도 
애달픈 설움 하나 허리에 차고 
자리에 누웠다.
긴 밤이 지나가도록
방문 열리는 소리 들리지 않은
 그런 밤 뒤척이며
지난 날 생각했다.

술 한 잔에 헛발 디디며 
주머니에 손 넣고 배회하다 
가을 햇살도, 가을바람도,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걷고 싶었던 때 
10년 전이었을까
20년 전이었을까
그보다 더 오래 전이었을까
성난 파도와 같은 청춘에 매달려 
울부짖던 젊음은 어디로 갔나. 
성냄도, 바람도,
술 잔 비우듯 다 비워져버린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내일은
가을 하늘 두드리며 함께 걷자 물어봐야지 
아무 답 없어도
헝클어진 마음 주머니에 넣고 
시려도,
눈 부릅뜨고 걸어야지.

'글밭 기발간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밭 36집 2014년도 상반기  (0) 2024.02.03
시동인지 34호 2012년도  (1) 2023.12.12
시동인지33집 2011년  (5) 2023.11.24
시동인지 32 집 2010년도  (2) 2023.11.16
시동인지31집 2009년도  (0) 20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