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말
33집, 그 만만찮은 연륜과 반성
‘글밭’ 동인지 33집을 낸다. 1969년도에 창간했으니까 햇수로는 40년이 넘었다. 한두 권씩 내고 그만 두는 무수한 동인지에 비하면 참으로 우직할 정도 로 꾸준한 활동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문학지 ‘문학사상’은 2001년 12월 ‘문단진출의 길-등단제도 비교분석’이라는 특집에서 당시 국내 동인지 중 20년 이상 활동한 시 동인지로 ≪죽 순≫(대구, 1945), ≪시와 시론≫(서울,1955), ≪동국시집≫(서울 1960), ≪흑조≫(목포, 1966), ≪글밭≫(경북, 1969), ≪표현시≫(강릉, 1970) 등이 관록을 자랑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더라도 ‘글밭’은 우리나라 동인지 가운데서 다섯 번째 장수 하는 동인지로 꼽히고 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동인지의 역사성에 비해 질적으로 얼마만큼 성 장했으며 우리나라 문단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냉철히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물론 활동 공간의 지역적 한계, 문학 저변 보편화의 부작용인 질적 수준의 저하, 시대상황이 문학의 절실함을 약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제약 요소가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되돌아보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 보다는 이를 핑계 삼아 ‘글밭’ 속간이라는 물리적인 문제에만 안주해 왔지 않느냐 하는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글밭’ 동인지 33집. 그 숫자가 주는 무게가 올해에는 다른 해 보다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만큼 ‘글밭’이 연륜에 못지않게 그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것은 노력 이전에 어쩌면 당연한 의무라 할 것이다.
33집을 발간하면서 우리 글밭 동인들은 지나간 역사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걸맞은 어떤 역할을 다할 것인가를 다함께 깊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10년 뒤에는 ‘글밭’은 관록도 오래 되었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우리나라 문학사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수식어를 쓸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33집 발간을 계기로 동인들의 더 큰 분발을 기대한다.
차 례
우리들의 말 3
임관혁
상사화 10
찔레꽃 11
고향에 가면 12
참꽃 13
와촌 아지매 14
고향의 봄 15
우는 강 16
뻐꾹새 18
당신은 아십니까 19
단풍 20
김성재
마지막 인사 22
타인의 공간 24
대각선 정점 26
럭키에게 28
aninoma 30
빈 집 32
전대진
겨울나기 34
위로 36
날다 37
춤 38
청량산 울다 39
심각하게 40
김진택
어떤 시 42
추운 날의 일기 44
소곤거리는 말 46
말리동 48
Manuel Alvarez Bravo 49
BLUE NUIT 50
그녀 51
능소화 52
깜보데야 53
천승현
가을이 걷는다 56
밤바다 57
밤거리 1 58
밤거리 2 59
새가 된 너 1 60
새가 된 너 2 62
안동 국제 탈춤 축제장에서 63
새가 된 너 3 64
김윤한
소주병 속 바다 68
화석 박물관에서 69
느티나무 아래서 70
중고품 시장에서 71
김윤한 72
봄비 73
러브 인 아시아 74
사진 75
저당 잡힌 시계 76
꽃이 진다 78
아까시 꽃 추락 79
참꽃 80
신록 81
소녀의 기도 82
스프링 83
생일 84
암스트롱의 달 85
이형복 感性 백% 88
다음 生에는 89
술 푸는 세상 1 90
술 푸는 세상 2 91
황홀한 허기증 뒤 92
강희동
自警錄 46 96
自警錄 47 97
自警錄 48 98
自警錄 49 99
自警錄 50 100
自警錄 51 101
自警錄 52 102
自警錄 53 103
自警錄 54 104
自警錄 55 105
김진회
딸년이 다녀간 자리 108
무뎌진 식칼 109
겨울의 흔적 110
혀 111
거울 속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산다 112
조각 모음 113
검은 얼굴, 흰 가면 114
명명 116
찻잔 117
병실 609호 사람들 118
김혜원
새벽 그 어디쯤 122
솟대, 하늘을 날다 123
겨우살이 124
3월의 주산지 125
봉정사 돌계단 126
흔들리는 풀꽃 127
돌탑을 쌓으며 128
김여선
뒷산을 오르며 130
그 해 겨울 132
겨울 사과나무 133
6월 장미 134
감꽃 136
시월은 137
권기태
아침 기도 140
탈춤 141
낚시를 드리우고 142
이위발
그곳에 가면 144
말ㆍ말ㆍ말 146
슬픔이 뭔지를 모르는 그대에게 147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148
그대 잘 계시는지 150
글밭 略史 151
임 관 혁
상사화
찔레꽃
고향에 가면
참꽃
와촌 아지매
고향의 봄
우는 강
뻐꾹새
당신은 아십니까
단풍
시인의 말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있다
좀 더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램
그러나 멈추지 않는
바람에 밀리어 밀리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있다
하나는
강 건너 강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둘은 돋는 달처럼
간간이 보이는 곳으로
떠나가고 있다
단풍은 고운 때
잎 지는 소리도 들리는
날이다
되돌아보는 시간
두고 온 날이 그립다.
상사화
만남으로 피는 꽃이었네
그리움으로 피는 꽃이었네
바램으로 피는 꽃이었네
아픔으로 지는 꽃이었네
눈물로 지는 꽃이었네
사랑으로 지는 꽃이었네.
찔레꽃
바라만 보란다
손대지 말고
바라만 보란다
꺾지 말고
바라만 보란다
상처 받지 말고
바라만 보란다
꽃 보듯이
바라만 보란다
꽃 질 때까지
바라만 보란다
빨간 열매 익을 때까지.
고향에 가면
만나리라
그 얼굴을
보리라
그 그림자를
찾으리라
그 때 그 날을
돌아 서리라
눈물에 겨워.
참꽃
피거라
피거라
혼자라도 피거라
피거라
피거라
지지말고 피거라.
와촌 아지매
평화시장
뒷골목
죽을래 살래
농하며 사는
와촌 아지매
갈대여도
억새 같이
울고 싶어도
웃고 산다는
와촌 아지매
호박꽃 같은
웃음 짓는
그 웃음이 참 좋은
개구리 우는 마실의
와촌 아지매.
고향의 봄
참꽃이 필 동 말 동
소쩍새가 울 동 말 동
청보리가 필 동 말 동
올레길이 열릴 동 말 동
봄바람이 불 동 말 동
언강물이 풀릴 동 말 동
봄 하늘이 열릴 동 말 동
봄비가 내릴 동 말 동
그리운 님 올 동 말 동.
우는 강
강이 울고 있다
달빛을 잃어버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갈대숲을 잃어버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새들을 잃어버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노을빛을 잃어버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죽어 가는 강물을 보며
강이 울고 있다
강이 울고 있다
하늘이 아는 슬픔으로
강이 울고 있다.
뻐꾹새
이 강산의
봄날을 위해
밤낮 없이
울어 주던 소리새
내일도
모래도
훗날에도
먼 훗날에도
먼 먼 훗날에도
이 강산의
봄을 위해
울어줄 조선의 소리새.
당신은 아십니까
꽃 피는 날
내가 왜 잠 못 드는지
새 우는 날
내가 왜 밤을 지새우는지
비 오는 날
내가 왜 우는지
까치 우는 날
내가 왜 웃는지
달그림자 밟고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아니라서
당신은 모르실겁니다.
단풍
그대 고운 모습에
반해
홀딱 반해
오늘 하루 어지럼 속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그대 고운 눈빛에
빠져
홀딱 빠져
오늘 하루 그리움 속에서
돋는 달을 보았다.
김 성 재
마지막 인사
타인의 공간
대각선 정점
럭키에게
aninoma
빈 집
시인의 말
2009년에는 시를 못 쓰는 사람이나 쓴다는 아버지의 시를, 아니 아버지를 글밭에 묻었습니다. 조금 더 퇴화한 2010년에는 사회에 대한 미성숙한 청년의 외침을, 시라고 우겨 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퇴화한 올해의 저는 추상적인 감정덩어리를 시인 척 슬쩍 밀어봅니다. 너무 많이 아팠던 스물여덟의 8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중에는 그 아팠던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 시기에 가장 솔직한 감정을 시로 옮겨봤습니다. 부족함에 채찍질은 하되, 한 번쯤은 함께 공감해 주셨으면 하 는 바람입니다.
너무 아름다웠기에 신의 질투를 받았던, 너무 편안했기에 식상해져 버렸던, 너무 뜨거웠기에 아팠던 우리. 아직 다 주지 못했던, 아직 다 말하지 못했던, 아직 다 불태우지 못했던 내 사랑을 그에게 모두 쏟아주고 싶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그를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
“나를 위한 시는 왜 안 써줘?”
새치름하게 묻던 너에게
내가 그저 웃을 뿐이었던 것은
너는 이미 ‘나’였기 때문이다
미친 자아분열에 탐닉해 있던
스물 이후에
나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은
그저 두려움,
‘나’는 묘사할 수 없는 그림이다
수사할 수 없는 언어다
표현할 수 없는 물체다
죽어 부푼 금붕어의 배다
다 씹고 비어버린 껌통이다
말라비틀어진 화초의 마지막 숨줄기다
이미 식어버린
‘나’의 사랑에 경배를 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나의 사랑을 위해 축배를 든다
내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낄 순 없다
나도 몰랐던 ‘나’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상냥하게
마치 타인에게 하는 인사처럼.
타인의 공간
터널 속에서 본 것은
늘 칠흑뿐이었다
길고도 길었던 터널
빠져나오고 싶었던 걸까?
따스한 체온에서 느낀
나를
어둠속에서 밀어 낸다
너는
거짓된 채색이 두렵다
찬란한 빛깔의 허위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를 향해
너는 울웃음을 울웃는다
겁도 없이 타인의 공간을
오간다
따뜻한 체액이 흐른다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지만
내 몸은 점점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물들어간다.
대각선 정점
고슴도치처럼
안을수록 아픈 것이 사랑일까?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또한
홀로 선 둘이서 가야한다
하나가 되려는 욕망은
영원히 갈라선 둘을 만들뿐
사랑한다 잘못됐다 돌아와라
외쳐도 또 외쳐도
사랑은 늘 평행선이 아니기에
뚝뚝
그저 기울어 흘러내린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
이 아픔을 치료해 줄 이는
끝끝내 사랑하는 그밖에는 없다
잊었다 잘 살아라 행복해라
외치지만
기울어진 대각선의 정점에서
오늘도 그를 기다린다.
* 서정윤의 시 「홀로서기」에서 인용(1연 3, 4행).
** 김정일의 저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1996)의 제목 인용.
럭키에게
세상에 난 지 얼마지 않아
어미를 잃어버린 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애빈 숨쉬기도 힘들기에
너에게도 가혹한 운명이나
너에 대한 애비의 애정은
단지
네 이름뿐.
너의 기억에도
너의 무의식에도
어미의 추억은 없으니
그 또한 복이 아니더냐
그저 바람이 가는 데로
세상을 유랑해 보자, 우리
애비와 너의 추억을
가득 가득 담아보자
먼 훗날 네 이름을 묻지 마라,
럭키야
말을 못하는 너에게
난 이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aninoma
한 때 궁금한 적이 있었다
뜻을 묻지 못한 건
아마도 자존심 때문일 게다
인터넷 검색창을 뒤졌다
몇 개의 블로그만 뜰 뿐
별다른 주목 없이 블로그를 훑었다
다시 궁금해졌다
뜻을 묻지 못하는 이유가
3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다시 인터넷 검색창을 뒤졌다
여전히 몇 개의 블로그만 뜰 뿐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나갔다
2007년,
그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4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철 지난 그의 블로그는
주인을 잃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철없는 주인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뜻은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지금
알지 못하듯이.
빈 집
그가 사는 곳
세 시간 지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나의 모든 흔적들은 빠져나간
그에 대한 그리움만 향긋한 곳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곳
지금 나는 있고 그는 없는
그가 사는 나는 살지 않는
그와의 모든 추억들이
곳곳에 배어있을지언정
나의 모든 흔적들은 사라지고
그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만 있고
그가 없는 여기에서
과거를 곱씹고 추억하고 후회하는
여기에 살지 않는 얼간이 하나.
전 대 진
겨울나기
위로
날다
춤
청량산 울다
심각하게
시인의 말
시를 싣고, 또 이렇게 몇 자 적게 되니 벌써 또 한 해가 지나갔다는, 새삼스러운 마음이 든다. ‘쓰는 것’과 ‘사는 것’을 고민한다고 참 쉽게도 썼었구나 생각도 든다.
얼마 전 사놓고도 오랫동안 책꽂이에 방치해 둔 릴케의 편지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젊은 시인일까?’하는 웃기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어보게 되었다. 릴케의 말처럼, ‘글을 쓰는 행위를 빼 놓고 살 수 있을까?’ 하고. ‘어쩌면 집착은 아닐까?’ 하고. 무서운 건 둘 다 잘 모르겠다는 것,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집착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나에게 그렇다면 때려치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시를 써야겠다. 별로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내가 가장 고민 했던 것이 ‘시’라는 것은 분명하므로. 그리고 그 고민은 힘들었지만,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다는 것도 확실하므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나는 그 끝에 열세 획의 시(詩)를 놓아 둘 것이다. 아무리 먼 길을 돌아가도, 아무리 늦게 닿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부끄러운 나의 시를 쓸 것이다.
내년에도 아마 나는 오늘 쓴 이 글을 ‘참 쉽게도 썼구나’ 생각할 것 이다. 하지만 그때 싣는 시는 이번 작품들 보다 1㎜라도 자라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겨울나기
그녀는 아직도
단독주택 자취방에 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립식으로 된 부엌은
숨을 마시고, 빨래를 하던 그녀는 가끔
몸을 떤다 벽을 넘어 들려오는
주인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꽤나 가깝다 그래도 그녀는
혼자다 부엌에 있는 가스레인지와 세탁기처럼
그녀에게도 짝은 있었다 그가
찾아 올 때마다 방 안에는
담배연기가 가득 찼지만, 그만큼
웃음도 커지곤 했다 짧은 동거가 끝이 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좁은 자취방에서 그녀
나목처럼 이불을 두른다 언제나
앉아만 있는 그녀
친구는 궁상맞다고 말하지만
그녀도
웃음을 안다 웃음이 있다
벌써 몇 년째 단독주택
(조립식 부엌이 딸린)
자취방에 사는 그녀
봄이 온다는 소식 들려오지 않아도
문을 두드리는 겨울이 분주해도
그녀 오랫동안 혼자다
그녀 오랫동안 웃으며 혼자다.
위로
12월
그녀는 몸을 떤다
등에 기댄 조립식 건물이
오전 동안 받아둔 햇살에
하얗게 타오른다
위험하고 위험한 율동
몸을 떨 때 마다 웃음이 해맑게
거리를 누빈다 바람이 웃음을 담고
흘러내린다 당신
당신,
뜨거운 건물이 조용히 그녀를
보다듬는다 오랫동안 넣어 두었던 시간이
열기를 타고 번져나간다 웃음이 섞이고 팔 다리가
엉킨다 선 채로
땅 위에서 하나로
하나로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나오고
꽃봉오리가 열린다 피어오른다
겨울 속에서 그녀
어둡도록 빛난다.
날다
그의 눈이 텅
허공을 향해 날아간다 창밖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
버스 안은
조용하다 누군가의
껌 씹는 소리가
짝 짝
침묵 위를 번진다 엔진소리
비상하는 시선이
구름을 지나 새파란
하늘을 어루만진다
어둠이
불빛처럼 재빨리
켜진다 꺼진다 밤
허공을 나는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른다.
춤
습관이 들어버린 MP3가
가을을 어지럽히네 나
뒹구는 낙엽들 사이로
그녀
옷을 여미고 걸어가네
우수수수-
서걱이던 이파리들
제각기 날아오르네 이어폰
이제 막 쓰기 시작한 기억의 습작 위에서
붉고 노랗고 누런
바람의 춤사위가 시작되네
옷깃이 휘청거리고
머리칼
낙엽과 몸을 부대끼네 그녀
10월의
여백 위에 춤추네.
청량산 울다
갈대 천천히 천천히 어깨 춤을
추다 구름 유유히 유유히
바람에 쓸려가다 물결 반짝이다 붉은 잎사귀
떨어지는 잎새
하늘로 날아오르다
태양을 긁고 땅을 긁어
온 산을 불태우다 오솔길 산 능성 뫼 자락
주춤 주춤 움직이다
벌거벗고 청량산
우우- 우우-
울어대다.
심각하게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
가을이 지나간다 떨어진 낙엽들
쓸려나간다 밀물처럼
떠나간다 심각하다 벌써
밤이 내리고
지겨운 별빛이
다시 번쩍인다 겨울이
몰래 또 온다 눈이 내리고 은하수가
하늘을 지나간다 심각한 상황이다
곧 하고
겨울이 떠나간다 봄과 여름이
기어코 찾아온다
심각하게 계속된다 가을 겨울 봄 여름
한 치 틀리지도 않게
가을이 또 단풍을 만든다
심각하다
심각한 상황이다.
김 진 택
어떤 시
추운 날의 일기
소곤거리는 말
말리동
Manuel Alvarez Bravo
BLUE NUIT
그녀
능소화
깜보데야
시인의 말
난 달리기 시작한다. 뒤뜰로 갔다가 현관 끄트머리에 돌아와서 멈춘다. 그런 다음 난 울기 시작한다. 물고기가 흙속에서 뒹굴던 자리가 어디인지 난 느낄 수 있다. 물고기는 이제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닌 채 조각조각 잘려 있고 내 손과 바지에 묻은 피도 더 이상 피가 아니다. 전 엔 이렇지 않았는데. 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 엄마는 너무 멀리 가버려 내가 쫓아갈 수 없을 것이다.
(Then I begin to run. I run toward the back and come to the edge of the porch and stop. Then I begin to cry. I can feel where the fish was in the dust. It is cut up into pieces of not-fish now, not-blood on my hand and overalls. Then it wasn't so. It hadn't happened then. And now she is getting so far ahead I cannot catch her.) WILLIAM FAULKNER As I Lay Dying
위의 글은 소설속의 한 대목이지만 시인이 읽으면 시가 된다. 당장 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인의 가슴에서 오랫동안 숙성이 되면 어느 날 비로소 시가 된다.
꼭 같은 재료에서 밥이 나오기도 술이 나오기도 초가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이러한 줄글에서 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작가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한 소년의 가슴속에 들어가 있다.
미안한 일이지만 삼류시인인 한 사내가 무임승차로 한 소년의 가슴속으로 들어간다.
거긴 이미 작가가 들어있어서 매우 협소한 공간이지만 시가 얻어진다면 그 보다 더한 곳인들 마다 할 수 있으랴…….
어떤 시
눅진한 바람이 바다에서
부두 쪽으로 불어왔습니까
그리고
그 바람이 다시
산동네로 불어갔는지요
바다위엔 불타는 구름 몇 장
욕설을 내뱉으며 떠 있었는지요
그랬나요
종일을 절망에 허덕이는 무일푼의 사나이가
선착장을 떠나
검은 그림자 길게 끌고
우리 집 쪽으로 골목길 휘돌아
허청 허청이며 걸어오고 있었습니까
그 사나이의 오른쪽 손아귀에
내 피곤한 납색 노동의 중얼거림이
쥐어져 있었습니까
그래서
잿빛그림자 낡은 담벼락을 스을슬 지나쳐갔습니까
바다는 비로소 썰물
안주머니서 빠르게 빠져나가는 지전이 되어
슈슛 먼 바다 쪽으로
휩쓸려 나갔습니까
욕탕의 물이 빠르게 쿨럭이며 하수구로 빠져나가듯
그 많은 바닷물들이
저어쪽 먼 기억의 병풍처럼 드리워 있는
대마섬으로 가버린 후
그리고 한참 후
노을이 보라색으로 변모하는 동안
뻘밭의 새끼 게들이
여지저기서
까만 눈 반짝이며
이른 저녁밥을 먹고 있었는지요.
추운 날의 일기
길모퉁이 집
오후가 되면 찾아오는 햇살
그 남자는 갑자기 좀비가 되고 싶었다.
좀비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 어감이 좋았다.
길모퉁이. 차들이 붕붕 지나는 그 곳
꿈결에 더더더덜덜덜 배기음 추억 같은 소리가 들려오 는 곳
곰팡내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일생이 슬픈 한 여자를 추모하려고 한다.
잠 속으로 떨어지는
겨울 빗방울. 점퍼에 스며드는 빗방울. 하얀 수건으로 젖 은 머리칼을
닦는다.
닦는다.
좀비.
그 남자는 좀비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오후 네 시
햇살은
오른쪽거리로 건들거리며 사라지고
갈색 어둠이 오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
유년의 수평선에서 건져 올린
하늘색 퍼어런 이불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덮어본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쓰자.
소곤거리는 말
당신은
낡은 홈스펀 윗도릴 입고
오래 된
물부릴 들고 있어요
당신은
부인까정 있으면서
또
나를 좋아해요
난로위에
보글거리며 익어가는 향긋한 푸른 생선이 있지만
당신은
나만을 바라봐요
어둠이 까맣게 짙어가는 이 시간
간다네요 집으로
여기 말랑한 가슴을 떠나
저어쪽 문밖
눈 내리는 거리에서
쉬이 오지 않는 버스를
어쩌면 오지 않을 막차를 기다리는
머리 희끗한 당신은
나의
애인.
말리동
말리화
붉은 꽃
그늘아래
너는
고개 숙이고
서
있다
말리동
말리동
말리동엔
지금
말리화가 피고
말리동
그곳엔
속옷을
기워 입는
애인이
산다.
Manuel Alvarez Bravo
여름내 덮고 자던
내 광목이불
먼 멕시코 나라의
건조지대
빨랫줄에 걸려
누런색을
바래고 있다.
저어쪽
언덕 아래엔
좀브레로를 쓴
장꾼 몇
술 취해 구름에 흔들린다.
BLUE NUIT
오래전
유년의 골방에
두고 온 초록색 연필 두 자루
자주감자 꽃 색깔
잉크 한 병
녹슨 철필
한 자루
그리고
늦은 오후 서쪽창문을 찾아오는
오렌지 색깔
노을 몇 장.
그녀
팬케익을 담은 쟁반 앞에 두고
졸고 있는 여자
머리엔
추억처럼
수술자국 길게 나있다
해맑은 피부
낡은 운동화
실내는 해 넘어가기 전
어둑하다
빵떡은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씁쓸하다
오래된 필름이 화면을 흐르듯
이 저녁
창가에
그 풍경 겹쳐진다.
능소화
팔월
염천
정원엔 떨어진
너의
입술
푸른
고양이
꽃송이 깔고 누워
이쪽을
돌아보네.
깜보데야
평원
강물은
ㄹ ㄹ ㄹ
몸짓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어린 날의 나는
런닝도 입지 않고
땡볕 속을
뛰었습니다.
부갠빌리아
꽃넝쿨 너머의 하
늘은
온통
흰 구름입니다.
그날
똥래샵 호수는
바람이
불다
말다
하였습니다.
천 승 현
가을이 걷는다
밤바다
밤거리 1
밤거리 2
새가 된 너 1
새가 된 너 2
안동 국제 탈춤 축제장에서
새가 된 너 3
시인의 말
어느 해보다 늦게 찾아든 가을입니다.
늦든 빠르든 이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세월이 토해내는 그리움덩이들이 불어나
가슴을 가득 메워갑니다.
하나둘 찾아와 쌓이는 그리움들을
말 속에 쓸어 담아 덜어내 보려 하지만
재주가 다인 듯 도무지 털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걸어온 길이 생각보다 긴 듯 합니다.
쌓일 나이도 되었다 싶습니다.
가을이 걷는다
비가 내린다.
긴 여름의 끝자락에
짓눌려있던 가을이
간간히 비춰지던 햇살 등을 타고
창틈에 내려앉는다.
책갈피에 끼워졌던 까만 점들은
서글픈 울음소리 남기고 날아간다.
이른 봄날 물올랐던 젊은 나뭇가지는
여름을 건너 가을 속으로 스며들고
길 위에 던져진 말들은 유령처럼 서성인다.
새파란 하늘은 밤송이처럼 입을 벌리고
열기를 잃은 햇살은 골목마다 배회를 한다.
늦장 부리던 가을이
가슴 속 가득한 달 하나 품고
이제서야 걷는다.
갈지자로 걷는다.
밤바다
바다 하나 누웠다.
하얀 말들 내 뱉으며
밤빛 어지러운 작은 동네에
출렁출렁 길게 누웠다.
이 집 저 집 대문을 두드리는 파도가
바람이 무서워 새파란 입술로 제 말만 늘어놓는다.
어둠을 디디고 선 하늘가엔 까치발을 든 별들이
밤의 역사를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쓴다.
마음을 도려내는 기억,
가슴을 짓누르는 가위 같은 기억,
피 묻은 속 옷 같은 기억들이 바다에 떨어진다.
밤새도록 바다는 내 귓전에서 하얀 말들로 출렁인다.
밤거리ㆍ1
밤새 출렁이던 불빛들
어디론가 흘러가는 밤의 열정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곤두박질치던 밤의 틈 사이로
가만한 바람으로 흐르고.
때론 갓 맑은 얼굴들이 가슴을 두드린다.
노랗게 물든 말, 파랗게 질려버린 말,
우울한 회색빛 말들이 숯덩이처럼
검게 타는 언어가 되어 가을처럼 뒹군다.
싸라기별만큼이나 많은 마음들이 빈 술잔에서 넘친다.
밤거리ㆍ2
손톱달 하나 등 뒤에 따라오던 밤
간절한 부엉이의 울음
때 이른 찬바람머리에
내가 흔들린다.
고이 간직한 추억 입에 물고
여우별 눈짓에 유혹당할까
이어폰 볼륨은 내 심장처럼 상승모드
어느덧 정수리 위를 지나는 손톱달 너머로
새벽안개가 독한 가스처럼 피어오른다.
새가 된 너ㆍ1
- 패러글라이딩 경기 중 먼저 간 아우에게 바치는 글
나는 오늘
하늘에서 맺은 정하나 그리워 왔네.
햇살 가득한 하늘이라면 아무데라도 좋았던
동무가 보고 싶어 나지막한 산허리에 와 있네.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급하게 들려오던 이국땅에서의 절규
짐승의 발자국들이 숲을 헤치며 지나는 듯
하늘이 검게 흔들리던 그 때
난 하늘을 향하고,
넌 땅을 향하고……
네가 좋아했던 와인 한 병 가지고 왔네.
무슨 말을 할까……
이놈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해 줄까,
이놈에게 무슨 말을 남겨 놓고 올까
할 말이 많아 소주 한 병 들고 왔네.
이승과 저승의 대화
떨리는 손으로
과일 몇 알, 술 한 잔 올려놓고
그 앞에 엎드려 일어나지 못한다.
미안하다고
내가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통곡을 삼키는 등이 흔들린다.
새가 된 너ㆍ2
- 패러글라이딩 경기 중 먼저 간 아우에게 바치는 글
노란 파라슈트에 무전기 하나
형 지금 몇 킬로야? 그 속도면 우리가 우승할거야
하고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마지막 목소리
RESCUE!! RESCUE!!
RESCUE!! RESCUE!!
눈이 터질 듯,
하늘이 찢어질 듯 불러본 너의 이름
나는 술잔 가득
못 다한 마음 채우고
너는 비어 있는 술잔 속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네.
안동 국제 탈춤 축제장에서
분수대 앞에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은 청춘남녀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불태운다.
민망한 바비큐 덩어리 돌아누워서 타고
손님이 뜸한 부스에는 주인장 가슴이 타고
추억하나 만들기 위해 바쁘게 셔터를 누르는
사진가들의 얼굴도 검게 타고
국제탈춤 경연장은 날마다 더한 열정으로 타고
아! 못 다한 애간장들 가을 속에 타고
내 마음도 미친 듯 탄다.
새가 된 너ㆍ3
- 패러글라이딩 경기 중 먼저 간 아우에게 바치는 글
하늘을 좋아 하던 사람
기계 하나 메고 파라슈트에 바람을 싣고
구름을 지나고 하늘을 건너더니
생의 마지막 강마저 건너 버린 사람
아직 기름이 남아 있고, 프로펠러는 돌아가고,
스타트 깃발에 묻어 있던 바람도 돌아 왔는데,
너는 아직도 하늘을 떠돌고 있네.
이국땅의 어느 도시 위를
GPS에 의지 하고 목적지를 향해
풋바(footbar)*를 미련 없이 밟으며
하늘 속을 날아올라 파라슈트가
이상기류에 휘말려도 우승을 향해 날아가던 너.
사막을 건너는 마음으로
타들어가는 시간들이 아까워 바람을 밀어 내며
잠자고 있던 정글을 깨우며 굉음과 함께
GPS바늘이 손짓하는 대로 날아가던 너.
야! 이놈아
너의 모터에는 기름이 남아 있고
프로펠러가 돌고 있고
출발 신호 깃발에 묻어 있던 바람도 돌아오는데,
한국, 영국, 스페인, 프랑스, 태국, 일본, 벨기에,
모두들 성적에 상관없이 귀환 하는데
노란 글라이더 가슴에 덮고 일어날 줄 모르는 아우야
“나는 하늘을 날고 싶다”라는 말 묘비명에 적어 놓고
젊은 영혼만 그 하늘을 휘돌고 있느냐.
숨죽인 설움들이 푸른 가을 속에 깃발처럼 펄럭인다.
* 풋바(footbar):자동차에 있는 가속 페달과 같은 것.
김 윤 한
소주병 속 바다
화석 박물관에서
느티나무 아래서
중고품 시장에서
김윤한
봄비
러브 인 아시아
사진
저당 잡힌 시계
꽃이 진다
아까시 꽃 추락
참꽃
신록
소녀의 기도
스프링
생일
암스트롱의 달
시인의 말
내가 시를 본격적으로 쓴 게 얼마나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1978년부터이니까 33년이 되는 셈이다. 올해 글밭이 33집이니까 공교롭게도 글밭의 역사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느낌이 새롭다.
새로 시집을 내려고 작품을 추려 보니 지난 번 시집 것과 합해서 200여 편, 결코 적지 않는 숫자이다. 한 해 여섯 편정도 되는 셈이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작품도 많지만 모두가 나름대로는 내 생각의 틀을 거쳐 완성된 고뇌의 산물이라는 생각 하면 하찮은 작품이라도 모두가 남다른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작품을 낸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내 정신의 산물이라는 데 의미를 일단 부여하면서.
소주병 속 바다
병 주둥이를 통해
들여다본 소주병 속에는
전에 자주 못 보던
푸른 바다가 찰랑대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 실내포장 풍경들도
바닷물에 녹아 있었다.
젊은 날의 고뇌와 눈물도
함께 녹아 있었다.
평생 마셨던 수많은 소주들이
파도가 되어 일렁거렸다.
앞으로 넘어야 할 수많은 파도가
바다 너머로 아득하다.
수십 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푸른 바다를 마시고
파도에 휩쓸려 비틀거린다.
바다는 여전히 소주병 속에서
푸르게 찰랑대고.
화석 박물관에서
5억 년 전
오색찬란한 바다 속
삼엽충 한 마리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다.
2억 년 전 굳은 나무화석
붉은 싹을 새로 틔우는 아침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시조새 한가로이 날고 있다.
풀을 뜯던 공룡 한 마리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있다
핸드볼 공 만 하다.
1억 년 밖에 안 된
싱싱한 암모나이트 무리들
바다 속을 기어 다닌다
최근의 일이다.
박물관 마당에는
서기 2000년대
때늦은 겨울비 내린다.
사람들 뒷모습이
비에 젖는다.
느티나무 아래서
오백 년도 더 됐음직한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신발 끈 고쳐 매며
가야할 여정을 생각한다.
수백 년 전에도 그랬으리라
먼 길 가는 가난한 선비
마을 어귀 이 나무그늘에 앉아
헐거워진 갓끈 고쳐 매며
살아온 날들을 생각했으리라.
백년이나 이백년 쯤 뒤
누가 또 이 길 지나며
그늘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림자 길게 동으로 눕는 오후
오백 년 전 느티나무 여전히
굳게 입 다물고 서 있고
파닥이는 이파리들 사이
투명한 햇살 한 점
문득 뾰족한 화살이 되어
발아래에 내리꽂힌다.
중고품 시장에서
한때는
무지무지
사랑했었다.
코드 뽑힌 전열기들
선풍기며 냉장고들
무거운 침묵으로
팔짱끼고 서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떠날 것인가.
기다림의 끝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연속극 속
작별하는 애인들
눈물이
하염없이
비에 젖는 밤.
김윤한
수천 년 전
나는 불이었을까, 물이었을까.
나뭇가지 겨드랑이 간질이는
한 움큼 바람이었을까.
진눈깨비 흩날리던 어느 날 저녁
민들레 홑씨처럼 나는
이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세상에 하고 많은 이름 중에
김윤한
내 뜻과는 상관없이 오십 년도 넘게
그 이름표를 달고 살아왔다.
얼마나 더 살면
내 육신 완전한 한 줌 흙이 될까
그리고 얼마를 더 지나야
가엾은 내 이름도
완전한 바람으로 남을까.
봄비
봄비 내린다.
먼 산에 내리고 들판에 내리고
지붕 위에 내리고 이마 위에 내린다.
1970년대
어릴 적 전파사 담벼락에 기대서서 들었던 노래
봄비
신중현의 기타소리
갈비뼈 사이를 시리도록 후빈다.
봄비
아련한 첫사랑을 불러내고
잊혀진 여인의 이름을 부른다.
드럼 소리가 낙숫물 소리 같다.
봄비가 내린다.
러브 인 아시아
행복을 찾아
스무 살 땐가 우리나라에 시집 온
스물여섯 된 중국 조선족 여자.
시집 온 지 이태 지나 남편 병들어 죽고
땅 하나 집 하나 없이 빈 털털이가 되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
도무지 살아갈 자신이 없어
홀로 도망이라도 가려 했지만
두 아들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며.
어깨 들썩이며 울음 참던 그 여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던
대한민국, 그러나
마침내 자본주의 황량한 들판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그 여자.
케이비에스 ‘러브 인 아시아’ 프로에 나와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하염없이 훔치던 조선족 그 여자.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사진
현재의 내 모습을 찍을 수는 없을까
셔터를 누르는 순간 깜빡 1초가 지나가고
찍혀진 모습을 보는 순간에도 무수한 시간들
빛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다.
현재의 내 모습은 현재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흔적에 불과하다.
현재의 나는 어디에 가서 만날 수 있을까.
손수건만한 햇살 한 점 한가로이
시간의 등뼈를 비추고 있다.
저당 잡힌 시계
스무 살 적 바람 부는 겨울날
삐걱거리는 이층 나무계단을 올라
전당포, 손목시계를 벗어주고
일금 만 원에 젊은 한 때의 시간을
저당 잡힌 때가 있었다.
그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이내 그 시계의 행방을 잊어버렸다.
내가 찾지 않은 그 시계는
다시 어느 사람의 손목에 끼워져
낯선 사람의 시간을 재고 있었을까.
이 세상 모두 잡든 무수한 시간에도 시
계바늘은 쉴 새 없이
세월의 길이를 재고 있었을까.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
낡은 전당포 간판을 지나며
저당 잡힌 젊은 날의 시간
흘러가버린 기억들을 떠올린다.
시계바늘은 쉼 없이 돌고 돌아
어제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곤 하지만
전당포에 잡힌 내 시간은
끝끝내 되찾을 수가 없고
뭉게구름 한 점 한가로이
바람 따라 흐르고 있다.
꽃이 진다
꽃이 피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피워 올리는
벅찬 환희.
꽃이 피는 것은 슬픈 일이다.
‘꽃이 핀다’는 말 속에는
‘꽃이 진다’는
서글픈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꽃은 피는 순간부터 이미
아름다움의 정점을 지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꽃잎 하나씩
집채만 한 허무의 바윗돌이 되어
쿵
쿵
아득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아까시 꽃 추락
온갖 꽃들 다시 피어나는 봄날, 낯선 시골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는데요. 모퉁이를 돌아서자 갑자기 눈부시게 나타나는 아까시 꽃 군락.
가까이 다가서자 아, 코끝을 지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확 스며드는 아까시 꽃 향기. 이렇게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니.
아까시 꽃 궁궐 아래에서 윙윙거리는 꿀벌들과 함께 정신 을 놓고 한참 동안 꽃 무리에 취하고 꽃향내에 취해 있었는데요.
주위에서 이름 모를 새들도 지저귀고요. 구름도 한가로이 흘러가고요. 세상에 이런 낙원이 또 있을까 그 풍경 속에 홀로 있기가 아까웠는데요.
그때 돌연 어디서 나타났는지 미친 돌개바람 한 자락 아까시 꽃 낙원을 사정없이 휩쓸고 지나갔는데요.
그 많던 아까시 꽃 수십만 개가 지상으로 와르르 한꺼번에 추락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향내 나는 꽃들도 결국은 지고 마는 걸까요.
꽃은 무엇이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떨어진 꽃들은 바람에 쓸리고 물에 젖고. 이제 한낱 쓰레기일 뿐 더 이상 꽃이 아니었습니다.
참꽃
우리 마을에서는 진달래를 참꽃이라 불렀다.
학질 걸린 듯 졸음 쏟아지는 봄날이면
불 번지듯 온 산이 온통 붉은 참꽃밭이 되었다.
배고픈 아이들 참꽃 한 움큼씩 따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참꽃 너무 따 먹어서 입술이 파르스름했다.
돌무덤 위에 핀 참꽃들은 왠지 창백했다.
이 세상에 잠시만 살다 간 아이들 무덤이라고 했다.
하늘에는 희멀건 구름이 미루나무 꼭대기에
오도 가도 못하고 맥없이 걸려 있었다.
먼 산에서는 허기진 뻐꾸기 무시로 울어댔고.
신록
신이 색칠했을까 온 들판에는
눈부신 신록들 기지개로 소란스럽다.
잊혀진 추억 일제히 되살아나는 봄
그러나 새로 돋는 잎들은
돌아간 해, 떨어져 내린 꽃잎들의
가슴 쓰린 이별을 알지 못한다.
되살아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 다시 살아나도 끝끝내 다시 못 올
서글픈 이름들이 끝끝내
무겁게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푸르게 잎 돋아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픈 일이다.
소녀의 기도
내가 국민학교 4학년쯤이었을까 서울에 살다가 면소재지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던 나보다 한 살 어린 한 소녀.
시골 아이들과 다르게 얼굴 유난히 뽀얗던, 멜빵 달린 체크무늬 치마, 몇 개 주근깨조차 세련되어 보였던.
라디오에서나 들을 법한 서울말을 자연스럽게 쓰던, 그 아이 집 앞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지. 맨드라미 어깨 위로 나팔꽃이 타고 오르던.
게다가 그 여자 아인 피아노를 잘 쳤지. 학교에도 풍금 밖에 없던 시절, 면내에 딱 한 대 뿐인 그 집 피아노.
일부러 그 집 앞 지나가다 보면 그 여자 아이가 치던 피아노 소리. 나중에 알고 보니 음악 제목이 ‘소녀의 기도’
그 아인 어떻게 변했을까 사십 여 년 지난 오늘 피아노 학원 앞 지나다 그 선율 다시 듣는다. 기억 속 아련한 ‘소녀의 기도.’
스프링
아무리 커다란 힘을 가졌어도
침묵하는 것은 비겁함 그 자체일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사소한 압박에도 소스라쳐 반응하지만
힘 앞에서 잠시 움츠리고 있을지라도
다시 점프하기 위해 조용히 반란을 꿈꾸고
누르는 만큼 힘차게 용솟음치는 눈부신 도발.
어쩔 수 없이 바람에 이끌려 다니더라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조용히 옷깃을 여미는 겸손함.
고정되어 있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지금은 침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 많은 사람들,
우렁찬 함성 한 마디씩
언제나 가슴 속에 품고 산다.
역사는 고정되어 있는 힘이 아니라
요동치는 탄성에 의해 흘러왔다.
생일
문학청년 시절, 전국을 떠돌다
여비가 떨어져 발길 머문 곳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발 닿은 곳 허름한 나무 바닥 2층 다방
건너편 연탄난로 앞에는 늙은 창녀가
다리 꼬고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침 굶은 채 멍하니 쳐다보는 텔레비전에서는
3.1절 기념식, 최규하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이 낯선 다방에 앉아
점심도 거른 채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있는지.
돈 한 푼 없고 갈 곳도 없고
어디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어쩌다 이렇게
구름처럼 낯선 곳을 떠돌고 있는지.
화장실에 가다 우연히 마주친 달력
음력을 맞춰보니 그날이 바로 내 생일.
창틀 흔들며 바람이 지나고
때늦은 진눈깨비 사선을 긋고 있었다.
암스트롱의 달
국민학교 4학년 때
방학이 끝나려면 한 달도 더 남았고
내가 하는 일이라곤 종일 뛰어노는 일과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이었다.
아침 라디오 뉴스에선
오늘 미국 우주인이 마침내
달에 첫 발을 내딛는다고 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길
하늘에서는 손톱만한 초승달이
소 몰고 오는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닐 암스트롱은 무사히 달에 내렸는지
떡방아 찧는 토끼와는 만났는지
유심히 달을 쳐다보았지만
암스트롱도 토끼도 보이지 않고
계수나무 그림자만
어른어른 거렸다.
이 형 복
感性 백%
다음 生에는
술 푸는 세상 1
술 푸는 세상 2
황홀한 허기증 뒤
시인의 말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간다. 써놓은 글들이 거의 생기가 없고 마치 장례식 전날이나 만큼 암울하다. 올해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허전하다.
남자도 여자와 같이 갱년기 증세가 나타난다는데 내가 그 경우인가? 꽃이 지고 흘러가는 냇물을 보면서 감상에 빠지고, 자그마한 일에도 예민해진다. 술을 마시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아 소주 몇 잔에 취기를 느껴 사람을 만나기도 두렵다.
이 시기가 지나면 나아지려니 스스로를 위안하고 내년에는 용과 같이 하늘을 승천하는 좀 더 활기찬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밭동인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感性 백%
한동안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도
시간이 되면 진다
꽃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열매를 잉태하기 위함이리라
언제부터인가 메모리 속에 저장 되어 있던
지난날 일 들이 하나 둘씩 재생되고 있다
아마 살아 온 날 보다 살날이 적어 진 탓이리라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 인데도
아주 작은 일에 웃고 울고 어린아이 같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을 시간적 경제적 이유로 못했지만
그것이 요즘은 다른 이유로 바꾸어 버렸다
지난주에 ‘도가니’영화를 보다가 울더니
오늘 아침에도 슬픈 연속극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느꼈다
감성이 살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일까
이런 때 좋은 글들이 많이 나와야하는데
톨스토이도 70이 넘어서야 대작을 남겼다고 하는데
내 감성 100%의 날은 언제나 오려는지.
다음 生에는
내 다음 生에는
바람이 되련다
높은 하늘 위 구름과 친구 되어
넓은 세상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끼고 배우며
지난날 알지 못했던 세상 이치를 깨닫고 싶다
그 다음 生에 다시 태어난다면
물이 되련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내 몸을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한 몸이 되어 그렇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친구로……
때론 연인으로
혹시 또 다음 生이 있다면
다시 나의 원래 모습으로 태어나
지난 두 번의 생을 거울삼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고 싶다.
술 푸는 세상 1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려니 생각했는데
가끔씩 머릿속 한귀탱이에 맴도는
지난날 아픈 기억
그 만큼 많이 깊었던 것일까
차라리 암 덩어리라서
수술로 일부분을 도려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린지 오래지만
대뇌 중추신경은 가끔씩 그때 일들을
영화 스크린처럼 머릿속에 영사 시킨다
잊어야 하거늘
잊혀지지 못하고
참 더러운 놈이다
정말 비열한 놈이다
에이라
세상 뭐 있나
술이나 왕창 퍼 마시자.
술 푸는 세상 2
한평생 같이 지낼 것 같던
짝꿍 친구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그날 화장터에서
친구의 몸에 뿜어대는 불길을 보던 순간
참았던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렸다
그날 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남은 한 친구
얼마 전부터 몸이 안 좋다고
담배를 끊더니 이젠 술도 못 먹고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다
칭구야 칭구야
제발 칭구야
나만큼만 살아다오
또 술 푸게 하지 말고…….
황홀한 허기증 뒤
고목보다 너그런 너의 심성
통화 중엔 늘 잔소리뿐이지만
가장 두려운 건
나 없이도 행복할 시간들
기댈 수 없는 따뜻한 널 잃는 게 두려워
반짝이는 네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듯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것이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한다
네 영혼 나 없어도 건강하겠지만
치약 거품처럼 환한 웃음을 보이는
꿈꾸지 못할 미래여
불치의 내일이여
가난한 아침이여
절망에 갇혀있는 차가운 몸은
어둠으로
어둠으로
깊이 침몰해간다.
강 희 동
自警錄 46
自警錄 47
自警錄 48
自警錄 49
自警錄 50
自警錄 51
自警錄 52
自警錄 53
自警錄 54
自警錄 55
시인의 말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글도 막 깔리고 싶지도 않았다
보통사람으로 무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때 즈음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이 보였다 어렴풋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 그 틈 새
먹이를 위해 하늘 가장자리로 비껴 나는 새
이제는 자연스럽게 어울림에 익숙할 때다
억지로 칼날 세우고 거친 길을 가기엔
채울 그릇이 너무 크다
그만 내 몸에 알 맞는
옷과 그릇을 준비할 때다.
自警錄 46
- 하산(下山)
소백산 내리막길 쫓아가다
턱하니 걸림 다리 내미는
산벚나무 있네
나도 세상살이 뒷골목
턱하니 짝 다리 걸치고
눈총 받고 살아온 적 있다.
自警錄 47
- 먹이
새
날아가고 없다
둥지 만들기 위해
하늘 본다
날고 있는 것
새
틈새.
自警錄 48
- 벗기
똥개를 본 적 있다
똥마려워 낑낑대는
놓아 버리면 그만인 걸
제 이름 같이
순간에 반짝이는 미련
빨랫줄에 오래 턱걸이로 매달려
빛 못 보고 후줄근한 나의
옷, 개털 옷이다
이제 싸 버리고 슬그머니
옷이나 벗어야겠다.
自警錄 49
- 무자기(毋自欺)
늦가을 오후 쏟아지는
맨드라미 붉은 볕
칠면조 화관으로 지조 없이 서성대는
무지개 일곱 빛 설레임이 웃는다
갈바람 길 떠나기 전
뿌리 못 내린 억새나 갈대 같은
서걱거림 갈피잡지 못하고
무자기(毋自欺)* 무자기(毋自欺)
나무란다.
* 사서 중 대학에 나오는 낱말로 ‘스스로를 속이자 말라’는 뜻.
自警錄 50
- 갱년기
유월
꽃 지는 얼굴
보지나 말지
사루비아 저녁노을
담장에 번지는 장미넝쿨
놀러 온 산 뻐꾹새 울음 깜빡 졸다
눈 뜨면 시드는 꽃다발
보지나 말지 짙은 어둠살
다시 밝히는 꽃 등불.
自警錄 51
- 산골
산 넘어 가는
저 그믐달
슬며시
산두고 그냥 가네
예천, 상리 끝 상밑골
도시복 효자각 묵정밭
쥔 없는 망초꽃만 후후후 웃고
뻐꾹뻐꾹 헛뻐꾹새
빈집 어정이 들여 다 보고
밤 달 따라 하늘 길 간다.
自警錄 52
- 닭싸움
맨 땅도 달아 후끈 오른 삼복 하오
입술 바싹 마른 마당가
닭싸움 하는 앞뒷집 장닭
맨드라미 붉은 벼슬 곤두세우고
무엇에 화났는지 죽기 살기로
발톱갈퀴 앙칼지게 푸드덕 날아오르기도
어제 저녁 나도
무슨 한이 슬며시 고였는지
섭섭한 세상 요동치는지
새벽 건너오는 길목에서
시래기처럼 너부러져
세상 맞잡고 닭싸움 했구나.
自警錄 53
- 서 있는 사람들
온 몸에 무거운 열매 달고 풍성히 잎을 키우는
서 있는 나무가 고단하다고 여기지 말자
고목이든 유목이든 한 번 비스듬히 누워 버리면
잘 달린 과실도 넘실대던 푸른 잎들도 부질없는 것
건강한 것은 꼿꼿이 발 곤두세우고
오래서서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自警錄 54
- 담배연기처럼
내 불 지펴 몸 태우는 것은
아득한 연기 피워 올리기 위함이다
그대 폐부 깊숙이 들어 묻혀
잠시 불씨로 머물러 보다가
답답함이 선잠 청하면
휴- 우 한숨으로 쫒아 나와
잿빛 연기되어 허공에
흩어 사라지기 위함이다.
自警錄 55
- 부전자전
아버지같이 살기 싫었다
세상사 풍족함도 돋보이거나 존경스럽지도
곤군함과 까다로움 질기게 더불어
선비 체면 두어 번 헛기침에 등짐 진 걸음걸이
어린 날 아둔하고 어두운 눈에 들어앉은 아버지
어느 봄날 살구나무 밑 등짐지고 가는 날 보고
“아버님과 꼭 닮았다”는 아내의 애증 섞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다 본 거울 속 아버지와 나
섬뜩하게 익숙하게 닮아 똑같이 가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나와 같이 그렇게 할배를 빼어내어
내 아들도 알게 모르게 익숙하게 닮아져서 그 길을
이제는 맑은 눈 속의 아버지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김 진 회
딸년이 다녀간 자리
무뎌진 식칼
겨울의 흔적
혀
거울 속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산다
조각 모음
검은 얼굴, 흰 가면
명명
찻잔
병실 609호 사람들
시인의 말
아배의 생각
내가 처음 울던 날, / 아배는 병원을 뛰어다니며 / 아배의 기쁨에 관해 역설하기 바빴다. / 그때부터 나는 아배의 / 자랑이었다. // 실큰 두드려 맞고 들어온 날은 / 인내심이 강했고 / 실큰 두드려 패고 온 날은 / 건강한 아배의 자랑이었다. // 글을 쓴다고 집을 나서던 날, / 아배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 아들의 업적을 역설했고 / 10년간의 글쓰기가 실패하고 / 깡마른 몸으로 들어오던 날, / 아배는 어린 시절부터 가진 / 다른 가능성에 대해 역설하기 바빴다. // 내가 술에 취해 울던 날, / 실패한 것 같은 / 실패할 것 같은 / 삶에 대해 역설하던 날, / 그날도 나는 아배의 자랑이었다.
딸년이 다녀간 자리
그녀의 몸은 이제
도마처럼 딱딱해졌고
굳어가는 몸 위로
딸년은 식칼처럼
다녀간다.
딸년이 다녀간 자리마다
새로이 생기는 상처를
가벼이 씻어내고
뭐, 예쁘다고
뭐, 잘했다고
그년의 저녁을 차린다.
무뎌진 식칼
주방에는 손 때 묻은 어매가
도마 위에 앉아 있다.
무뎌진 저녁시간
숫돌이 갉아 먹은 살점만큼
저녁은 왜소하다.
반찬들 사이로
잘 들어가지 않은 흔적이
담겨져 나온 식탁
어매는 저녁보다 왜소하다.
겨울의 흔적
올해는 유난히도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은 몸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 봄 여기저기로 쌓여있다.
겨우내 아파트 전세 값이 경매로 넘어갔다.
문 앞에는 내지 못한 세금고지서가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떤 날은 구십이 다 된 할매의 봄에서
또 어떤 날은 작년 한 해 우울증을 심하게 겪은 어매의
봄에서 눈은 녹아 눈물이 되었다.
겨울의 흔적
봄은 잊지 못할 가족처럼
내 몸 여기저기로 스며들어 눈물이 된다.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기형도, 「겨울ㆍ눈(雪)ㆍ나무ㆍ숲」 중에서.
혀
상처를 핥아주던 혀가 말을 배웠다.
혀는 상처의 종류부터 처방까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혀는 상처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명령적인 말로
(정확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투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주문을 했다.
상처로 새살이 돋을 때까지
(정확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투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상처가 모두 아물었을 때에도 혀는 버릇처럼
(정확히 따를 수밖에는 없다는 투로)
상처를 위로하였고
상처로 새살이 돋은
어느 지루한 저녁
나는 혀를 잘라버렸다.
거울 속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산다
우리의 뜨거운 날들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너무 늦은 초대장 같은
만찬들처럼 기억될 날들,
당신의 방에 산다는 이국적인 여인을
꼭 데려오세요.
어울리지 않는 풍경들을 차려놓고
우리의 지나한 날을 버려두기로 했지만,
사랑은 아무 말도 못하는 무생물들이니까요.
당신의 이국적인 친구가 당신에게 던진
이국적인 말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가 거울로 숨어버린 건
우리의 잘못이에요.
나였지만 내 것이 아닌
나의 나날들.
조각 모음
슬픈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첫사랑의 얼굴,
다음 사랑의 몸,
다음 사랑의 다리,
마지막 사랑의 심장,
나는 나를 떠난 그녀들에게서 슬픔을 떼어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만들어 놓고
심혈을 기울인 잔인함을 감상 중이다.
마침 그때 아직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심장이 꿈틀거렸고,
나는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흠칫 놀랐지만,
곧 오른편에 달릴 심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뛰지 않는 심장에게 침묵을 강요하던 일과
슬픔에 대해 못 다한 말을 나는 문신으로 새겼다.
검은 얼굴, 흰 가면
나의 방엔
아직도 출근하지 못한 당신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 죽나요?
어젯밤엔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우리를 지우듯 밤 세워 술을 마셨어요.
친구들은 애도보단
부러움이 섞인 술을 마셨죠.
그게 분명한 건
우리의 마지막 잔에 붙여진 이름이
‘슬퍼하지마’보단 ‘축하해’에 가까웠으니까요.
도대체 당신은 언제 죽나요?
아무리 씻어도 씻어도
금세 검어지는 우리 얼굴들,
당신은 언제 죽나요?
죽일 수 없는 당신은
아직도 내 방에 잠들어 있고,
나는 새로 장만한 흰 가면을 쓰고,
출근을 준비합니다.
명명
비명을 지르다.
소리에 놀란 없는 그녀가
급히 달려오다.
새겨진 상처로 스며든 빗물에서
나의 아이가 태어나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한참동안 고민했다.
아이의 이름은 없어요.
그녀의 차가운 음성에
나는 다시 비명을 지르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다.
죄 없이 떠나간 그녀와
아이가 내 귀에 산다.
찻잔
꿈은 아무리 꾸어도 깨지 않았다.
빌려 온 찻잔 같은 나
내 안에 담긴 온기가 사라지면 나도
날 데려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지.
잠시 머물렀던 흔적은 향으로 남아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테야.
병실 609호 사람들
그는 깡마른 몸으로
소금기 없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수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옆에는 힘겨운 숨을
뜨겁게 토해내며 살아온 젊은 날 같은
오래된 가습기가 건조함을 달래고 있었다.
한 때는 다부진 근육으로
어린 아들을 않아주던 때도,
거친 손으로
큰 딸의 손을 잡아주던 때도 있었다.
한 때 최고의 선장이었던
젊은 날도 잘 말린 멸치처럼 세
상으로 스며들었다
진한 육수를 우려낸 멸치처럼
그도 잊혀져갔다.
그날도 그의 머리맡에는
공들여 짜낸 육수 같은 눈물이
그의 혈액으로 스며들었고,
우리는 그가 공들여 짜낸
바다의 향기를 맡으며
늦은 저녁을 먹었다.
김 혜 원
새벽 그 어디쯤
솟대, 하늘을 날다
겨우살이
3월의 주산지
봉정사 돌계단
흔들리는 풀꽃
돌탑을 쌓으며
시인의 말
바쁘다는 핑계로 시 쓰기를 잠시 미루었다.
생활이 시지만 그걸 알지 못했다.
일상 곳곳에 시의 향기가 배어 나와 내 코끝에 맴돌았다.
어디를 가든 시가 따라 다녔다.
즐겁게 시를 쓴다는 건 참 어렵다.
나는 알지 못했다. 고통은 즐거움이라는 것을.
새벽 그 어디쯤
잠시 누웠던 어제의 어깨들이 일어나는 시간
지친 어제를 눕히고 다시 잠들고 싶은 시간
그러나, 어제는 집으로 돌아가고
오늘이 집을 나서는 시간
새벽 그 어디쯤
강물은 열심히 안개를 만든다
매일 새벽이면 찾아오는 그 사람
닳아빠진 구두 굽을 끌고 다리 위에 섰다
가지런히 벗은 신발은 강물을 향하고
저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걸까
닳아빠진 구두 굽은 그 사람의 인생
걸어온 길을 남겨두고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 사람
새벽 그 어디쯤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려 애태우는 시간
저 멀리서 붉은 돌이 떠오르면
잠시 놓아둔 인생을 집어 들고 발을 넣는다.
솟대, 하늘을 날다
긴 장대 위에 앉아 발돋움 하는 새
그 옛날 소도*에 앉아 날개 펴던 새
아직 날지 못하네
정월 보름날 마당에 모여 풍년을 기원하던 기억을 싣고
장대 끝에 몸을 낮추고
날아오르려 안간힘을 쓴다
움켜진 발밑에는 삶이 스쳐 지난다
어쩌면 우리도 솟대처럼
끝없는 발돋움을 하고 있으리라.
* 소도:삼한 시대 신을 모시던 장소.
겨우살이*
남의 몸에 둥지를 틀고
겨울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좋다
배부른 자는 알지 못하는
생존의 고통을
시퍼런 겨울의 한가운데
흔들리는 가지 위에서
나를 죽여 네가 살 수 있다면
너로 인해 실한 열매를 맺을 순 없어도
조금 덜 가지고 잘 살 수 있단다
노란 열매 한 입 물고 웃고 있을 배고픈 새들에게
기꺼이 내어주고도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겨우살이
절망 속에 자리 잡은 희망의 한 덩어리를 찾아
공중에 발을 내리는 겨우살이.
* 겨우살이:참나무나 동백나무에 붙어사는 반 기생 식물. 나무의 껍질을 뚫고 뿌리를 내리지만 늘 푸른 잎을 달고 광합성을 하여 성장한다. 겨울철에 붉거나 노란 열매를 맺는다.
3월의 주산지
겨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3월의 주산지
얼음 덮인 물 속 왕버들나무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비에 젖고 바람에 깎여
굳은 살 속에 골을 만드는 정직한 삶이여
썩어가는 몸체에 새 잎이 돋고
수천의 잎을 떨구고도
주산지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얼음을 툭툭 깨고 걸어 나올 것만 같은
3월의 주산지
고요한 주산지에
시린 발가락 꼼지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봉정사 돌계단
높아 보이는 봉정사 돌계단
돌아가는 길은 더 멀어
봉정사 오르던 흰 나비도
쉬어 가는 돌계단
저마다의 소원을 간직한 채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돌계단
무거운 마음을 조금씩 덜어 가며
오르는 돌계단
높아 보이는 봉정사 돌계단
돌아가는 길은 더 멀어.
흔들리는 풀꽃
세상이 시끄러워 오른 비로봉
봉우리 사이 연결된 줄 하나를 잡고
연화봉으로 간다
촘촘히 놓여진 계단을 밟고
빼꼼히 세상 구경 나온
아직 여물지 않는 잎들과
조심스레 눈 맞춘다
흔들리는 풀꽃
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가
바람이 지날 때면 납작 엎드려 대지를 안고
선뜻 제 몸을 열어 길을 내어주는 풀꽃처럼
흙 속에 발을 담그고 싶다
봉우리 사이
끊어지지 않을 줄 하나가 바람에 흔들린다.
돌탑을 쌓으며
돌탑을 쌓아본다
끊임없이 밀려 나가는 강가에
땅 속에 박혀 있는 뿌리를 털어 내고
돌멩이에 담긴 무게로
차근차근 서로를 떠받칠 때쯤
강에는 빗줄기가 비친다
빗줄기가 패연히 쏟아지지는 않지만
저 위태로운 돌탑에게는 방울방울이 무거우리라
손에 들린 우산을 접고
너와 함께 이 무게를 느껴본다
중심을 잡는다는 건
길 없는 곳에 등불을 켜는 일
비와 바람이 시험할 텐데
오늘은 무사히 견뎠을까
삶을 사는 것과 닮아 있는 돌탑 쌓기를 다음에도 해 보련다.
김 여 선
뒷산을 오르며
그 해 겨울
겨울 사과나무
6월 장미
감꽃
시월은
시인의 말
시월에 피는 장미
장미는 여름에만 피는 꽃인 줄 알았다.
가을에 새로이 피어나는 장미꽃은
크기는 작지만 색깔은 더 붉었다.
올해는 유난히
시월에 장미꽃이 많이 피었다.
머지않아 낙엽처럼 떨어질 장미꽃의
빨간 정열이 그리워지는 시월이다.
올해도 부끄러운 시 몇 편으로 시월을 보내고 있다.
뒷산을 오르며
추석이나 설이면 찾아가는 뒷산
지리산이니 설악산이니
누구 하나 이름 붙여 주지 않는 그곳
마을의 뒤에 있기에 그냥 뒷산이라 부른다.
올해 추석에도 뒷산을 오른다.
보름달처럼 둥근
한 사람이 그리워지는 뒷산을 오른다.
입구부터 아이 두서너 누울 만한 너럭바위와
어른 키만한 선바위가 어깨동무하여
오가는 사람 맞이하고 있다.
빨갛게 물드는 단풍나무도
편지를 넣을 수 있는
빨간 우체통처럼 그립고
거친 소나무 껍질도 평
생 밭일로 말라 터진
어머니 손바닥처럼 정겹다.
뒷산을 오르면 나는
누가 심지도 않은
신작로에서 밀려 난
한 그루 미루나무가 된다.
가깝지만 자꾸만 낯설어지는 뒷산
주왕산이나 청량산은
일 년에 서너 번은 가는데
뒷산은 꼭 무슨 명절에만 오르니…….
솔잎 사이로 햇살 한 가닥 빠져나온다.
뒷산 아랫도리는
지난겨울 산불로
푸른 정맥을 잃어버린 소나무들이
생선가시로 날을 세우며 가을 하늘을 찌른다.
새들도 가끔 쉬어 갈 뿐
이제 그곳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어느새 햇살은 미루나무 머리끝에 걸려 있다.
새들도 하나 둘 둥지로 돌아가고
난 한 그루 미루나무가 되어
보름달처럼 그리운 한 사람
미루나무 가지에 걸고 싶다.
올해도 보름달은 떠오를까?
한 사람이 그리워지는 추석
뒷산을 오른다.
그 해 겨울
그 해 겨울은 좀체 끝을 보이지 않았다.
구제역을 앓은 소들과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 소들이
푸른 비닐 천막의 공동묘지 속에 삭혀지고,
하얀 페인트가 칠해졌던 牛舍가 회색빛 하늘로 퇴색된
그 해 겨울은 내 사랑도 구제역을 앓고 있었다.
오후 낮은 햇살이 차갑게 내려앉는
푸른 비닐 천막 위로 하얀 눈이 내리고
눈 덮인 공동묘지 속에서 소들은 젓갈로 삭혀지고 있을까?
차가운 겨울바람에 박제된 소나무 고목처럼
그렇게 삭혀져서 물이 되거나 흙으로 돌아갈 것을
겨울이 길다는 건 봄이 가까워졌다는 거겠지.
말라빠진 황태처럼 퀭한 고샅으로 바람소리 더욱 차다.
짧은 오후 햇살은 금세 산을 넘어가고
푸른 솔잎이 까만 구제역으로 펄럭이고 있다.
기억은 삭혀야 추억이 되듯이
내 사랑도 구제역 앓은 소들처럼
푸른 공동묘지에 묻히면 추억으로 삭혀질까?
빈 축사를 지키고 있는 개 한 마리 컹컹 짓을 때
난 삭혀진 추억 하나 건지고 있었다.
겨울 사과나무
숙취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 안동 땅 지리실 약수터에서
그 많던 가지들 자식들에게 다 잘라주고
전정 당한 겨울 사과나무로 서 있던 노인
어제 이발한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때 늦은 아침 햇살 파고든다.
내 차 앞에 서성거렸지만
난 노인의 희미한 눈빛을 외면한 채
등이 가려운 사람처럼
작은 수첩을 긁적거렸다.
노인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전정한 사과나무처럼
내 사랑도 미움도
전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침 해는 어느 새
노인의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난 슬그머니 약수 한 모금으로
어제 밤 숙취를 잊으려 애썼다.
6월 장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햇살 따가운 한낮
구멍가게 담을 타고 피어있는 장미
눈이 부시도록 빨갛다.
그대의 고운 마음을 닮은
장미 한 송이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한다는
그대 생각하며
난 장미 한 송이 꺾을 수 없었네.
빨간 장미를 보면
눈이 부셔 눈물이 날려고 하네.
태양처럼 뜨거운 가슴을 가진
그댈 위해
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네.
6월의 장미가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네.
너무 빨간 장미를 보면 눈물이 날려고 하는 줄 처음 알았네.
눈이 부셔 장미 향기 맡을 수 없는
6월 한낮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랑하는 이여 오늘처럼 장미가 아름다운 날
당신이 보고 싶어 가슴 아플 때
나는 참기로 했네.
장미꽃이 너무 눈이 부셔
눈물이 맺힐 때 가슴에 빨간 멍 하나 생기네.
6월 장미가 아름다운 건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네.
* 기형도의 시 「빈집」 첫 구절 인용.
감꽃
널 잊으려고 태풍에 수양버들 가지처럼
미친 듯 고개 흔든 것도
사실은 넌 잊지 않기 위한 몸짓이었어.
하얀 별들이 쌀 튀밥처럼 흩어지던
그 흔한 밤들도
내 머리엔 그리움으로 내려앉았어.
사랑하다 미워한 것도
미워하다 사랑한 것도
하루에 몇 번씩 네게로 다가간 것도
수 만 갈래의 침묵뿐이었어.
까만 하늘이 침묵하듯
난 그냥 조그마한 쌀 튀밥 같은 별이 되어
감꽃 같은 널 지켜보고 있었어.
모든 사람이 하늘의 별을 따고 싶다지만
난 그냥 하늘에 붙박이로 앉아 있고 싶었어.
그 해 오월 노란 감꽃 같은
눈물 한 방울 떨어질 때
난 가을날 발간 홍시 하나
가슴에 담고 싶었어.
시월은
시월은
방향 잃은 낙엽들이 떨어진다
조그마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날아가는
머지않아 떨어져야 하는
낙엽
오늘도 나는
깡소주 한 잔 입 속으로 넣으며
시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본다.
정미소 앞을 지나면
가을 낮은 햇살에
비듬처럼 반짝이는 먼지 사이로
가을의 껍질 벗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번 쯤은 벗겨질 줄 알아야
한 번 쯤은 부끄러움을 보일 줄 알아야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라며
시월은
국화빵 이스트냄새처럼
코끝으로 밀려오고
퇴색한 선거의 벽보처럼 허물어지는
무서리 맞은 코스모스의
허리로 굽어보아야 한다.
권 기 태
아침 기도
탈춤
낚시를 드리우고
시인의 말
요즘 시는 쓴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작업으로 느껴진다. 글쓰기를 게을리 한 결과가 큰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고의 빈곤 고뇌하는 삶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황금빛 들녘이 펼쳐진 오후이다. 계절만 가을이 다가온 것이 아니라 내 살아온 길도 가을쯤 온 것 같다. 마음만 조급하고 실천하려면 잘되지 않는다. 그래도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몇 해 동안 글쓰기를 등한시 하여 작품을 내지 않으려 했으나 동인들 독촉에 급히 쓴 부족한 글을 올리게 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반세기를 함께 한 여러 동인들과 저를 알고 있는 지인께 죄송하다.
아침 기도
긴 어둠 속에서 악몽의 아픔을 사려 담아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불면의 시간을
참나무 숲에 부는 바람이 지워 내고 있다
지치고 허리 굽은 정원의 빛깔 고운 낙엽이
긴 여름 악몽의 비늘을 떨어내는 아침이다.
몽롱한 걸음으로 안개 낀 강둑에 서서
긴 숨을 들이켜 찬 이슬 몇 사발 마시고
더위에 찌든 마음을 여울에 헹구니
산야는 다홍빛 소식으로 가득하고
제비들 하늘에 무심히 떼 지어 나는구나
창가에 홀로 햇살에 눈부신 나의 님
변질된 내 정수리 타고 내려오시어
번민과 아픔으로 발광하는 혼령 위에
환희의 작은 촛불이 되어 타 오른다
언제나 미약하여 쓰일 데가 없는데도
당신의 빛이 맺히는 곳으로 인도하시어
오늘 행 할 일상들을 간추려 주시며
당신의 도구가 되도록 다듬어 주실 것을
감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봅니다
오늘 남루한 나의 일상을 봉헌하오니
부족하지만 거두어 쓰이게 하소서.
탈춤
낙엽이 지면 가면을 쓰고 탈춤축제를 연다
육순의 중반인 나이에도 탈춤을 추고 있다
허구와 가식을 벗으면 나는 신명이 난다
탈을 쓰고 거울 앞에 서면 팔푼이가 된다
속마음 열면 숨겨둔 참말이 쏘다 지고
속마음 들킬까 긴 세월 다문 입이 질펀하다
호감을 사려고 미소를 짓던 파렴치한 모습이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아첨을 떨던 내숭이
허황한 나의 모습이 탈속으로 추락 한다
큰소리로 수다를 떨고 거드름을 피운다
자아는 구름 위의 먼 허공으로 떠나고
탈속에서 세속을 풍미하며 허세를 부리면
탈을 쓰고 일어버린 세상을 찾아가다 보면
탈속에서 따뜻한 눈물이 쏟아지고
쓰라린 과오가 오물처럼 밀려간다
무겁고 음습한 일상을 벗고 상처 남루한
내 지난 모습을 뒤 돌아보면
또 하나의 내 모습이 창백하게 내 옆에 있다
푼수에 맞지 않는 광대의 탈을 쓰고…….
낚시를 드리우고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술잔을 들면
강물에 않아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난다
고은 미소로 인사를 하고 손짓을 하면
말없이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든다
돌을 던지면 성난 얼굴로 일그러지고
바람이 불면 너울너울 춤을 춘다
때로는 버들 숲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강마을에 닭 우는 소리 고요히 들리면
젊은 날의 추억을 함께 길어 올린다
취기가 얼큰한 석양쯤에는 물 위를 걸어서
내 곁에 와 물풀 사이에서 노닐다
구름 위에 노를 저어 고기를 몰아온다
한 마리의 물고기가 미끼를 물어 당기면
잔잔한 수면은 아픔으로 출렁이고
물고기는 어릴 적 나의 모습으로 버둥거린다
그는 낚싯대 곁에서 나를 부르며
하염없이 흐르는 물결에 긴 그림자로 않아
가슴을 열어 푸른 광야에 젖을 물리며
붉은 치마 드리운 지평선 너머에 서 있다.
이 위 발
그곳에 가면
말‧말‧말
슬픔이 뭔지를 모르는 그대에게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대 잘 계시는지
시인의 말
글밭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를 뿌린다. 처음, 떨림과 흥분이 온몸을 파고들지만 두려움과 불안도 함께 파고든다. 부끄럽다! 마음은 이미 글밭으로 들어와 시의 향기에 빠져 유유자적하지만, 그동안 온전한 시 한편 움트게 하기 위해 삼십삼 년을 지켜온 글밭 식구들에게 볼품없는 가슴만은 보이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물처럼 잡히지 않고
때론 부드러워
미끄러지는 바다가 있다
가슴을 열면
팽팽한 가야금 현이 되어
돌처럼 무겁던 귀가
어느새
동백꽃으로 열리고
내가 만났던
많이 사랑한
조금 사랑한
파도를 닮은 사람들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떠돌이 개
갈매기를 삼킬 듯이
솟아오르던 붉은 등대
청어처럼 누워 있던
등 푸른 방파제
적당한 바람과 넉넉한 햇살로
소설 속 첫 문장처럼
잘 버무려진
그곳에 가면
아직도 마지막 여분의
미소가 남아 있다.
말ㆍ말ㆍ말
사월의 서릿발에
울음을 멈춘 두견새는
먼 곳의 애먼 소쩍새에게
우는 흉내만 내고 있네.
슬픔이 뭔지를 모르는 그대에게
너에게 화가 난 것은
내 슬픔을 얘기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
그것이 아니라고 얘기 했지만 슬픔은 꽈리처럼 터지려고 만 했지
너에게 화가 난 것은
그 슬픔에 손을 내밀어 닦아 주고
아침저녁 내 눈물로 가꾸고
미소와 간사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지만
슬픔은 밤낮으로 자라고 자라
마침내 열매가 맺혔지
내 슬픔은 너를 보고
그 슬픔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렸지
내 슬픔이 너의 나무에 걸쳐있는 줄도 모르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대는
말했습니다
눈송이는
녹을 수밖에 없고
풍선은
터질 수밖에 없고
가슴으로 불지 않는
바람은
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얼굴에 묻은
상처를 떼어주면서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듯이
볼 수 없으면
먼지도
먼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흘러가는 물처럼
사랑이
달빛을 덮기도 했습니다
푸른 청어처럼
사랑이
눕기도 했습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 들을 위해
그대는.
그대 잘 계시는지
햇살이 뿌린 온기를
노을이 가슴으로 안으며
서녘으로 스며들 때
누이 젖꼭지 같은 작은 풀꽃에
그대의 흔적이 숨어 있는,
솔직한 계절 앞에서
여전히 땀만 흘려보내고 있네.
버릴 것 하나 없는 뭇 볕이
마당 위에 뿌려질 때
흙이 부풀어 오르듯
그대의 소박한 저녁 밥상에도
축복 받은 달빛 한쪽,
모서리마저 이울지 않게
옆에서 지켜봐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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