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말
지방문단의 한 주축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녀온 글밭이 1985년 8집 복간 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는 매년 1회를 간행하여 왔다.
일 년에 동인지 한 권을 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나 언제부터인가 일 년에 두 권을 내자는 생각을 우리는 해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도를 해보지는 못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 연간 2회를 발간하자고 결정하고 원고를 모았다. 안타깝게도 몇 분이 원고를 내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으나 이렇게 책을 내게 되었다. 특히 기쁜 일은 초창기 글밭 동인으로 7집까지 작품을 내고 40여 년을 쉰 조용식 동인이 다시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글밭 동인들이 얼마나 저력 있고 동인지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지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늘 걷던 길을 가기는 쉽다. 그 길에 익숙해 있으니까. 그래서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처음엔 뭔가 염려스럽고 주저하게 되고 여러 가지 걱정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용감하게 시작부터 해 본다. 처음에야 서툴고 낯설지 모르나 이 길도 가다가 보면 곧 익숙한 길이 될 것이다. 출발할 때부터 잘 달리는 마차는 없다. 그러나 일단 힘이 생기면 가속도도 붙어서 관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부터는 곧 정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참에 과감하게 하나의 결정을 하자. 매년 5월 1일 임병호 동인의 기일을 전후하여 전반기 출판기념회를 하자고 말이다. 그리고 후반기는 12월에 다시 한 번 책을 내자. 그렇게 되면 글밭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을 것이다.
차 례
우리들의 말 3
강수완
매화 1 10
매화 2 11
매화 3–텅 12
매화 4–도산서원 13
강희동
호박 16
붓꽃 17
사과 18
꽃 지고 바람 불어 19
합창 20
그리운 원촌리 22
봄날 23
봄날 2 24
그대 있어 나 여기 보노라 25
꽃 진다고 새 울지 26
김미현
봄 28
존재 29
가시고기를 만난 날 30
늙은 사과나무 31
길을 묻다 32
금당실 마을 33
봄이 오는가 보다 34
김여선
주산지 36
눈 37
가을 저녁 무렵 38
버스를 기다리며 39
거미줄 40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 41
플라스틱 재떨이 42
김윤한
얼음 우는 강에서 44
어머니의 꽃밭 45
벌초 46
오래된 돌담 47
Y 48
조팝꽃 마시며 49
엉겅퀴 50
김지섭
가는 길 52
길 가면서 54
그냥 56
이위발
걷는 다는 것은 58
숨어들다 59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60
바람에 의해 아름다워지는 너 61
땅을 딛고 있는 발끝에서 62
임관혁
애창꽃 64
사랑아 65
비 오는 날 66
뻐꾹새 67
빗물 국수 68
사월 강 69
사랑가 70
동백꽃 피면 71
밤 길 72
밤안개 내리는 밤 73
조용식
매화 Ⅰ 76
매화 Ⅱ 78
해바라기 80
봄 꽃 82
윤회 84
무제 85
천승현
빨간 봄 88
날마다 달마다 89
순정 90
나는 91
산에 핀 꽃 92
봄눈 93
산길 94
그저, 내 맘은 95
청소를 하며 96
글밭 略史 98
강 수 완
매화 1
매화 2
매화 3–텅
매화 4–도산서원
시인의 말
올 봄 매화는 다시 총총 폈고 매화를 좋아하던 한 사람은 온 곳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이 먹먹하여 매화 몇 그루를 다른 집으로 옮겨 보내기도 하고 더러 남은 꽃그늘 아래서 울기도 하였다. 그 소식을 들으며 사람도 매화도 한 때를 깊이 남겨 놓고 싶어 시고 떫고 달짝지근한 매실을 상처마다 등불로 매달고 있는 중이다.
매화 1
저 꽃 아무래도 한 백 년 녹차 잔 푸르게 받아 마시고
환생한 목숨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맨 가지에
저토록 푸른 혈관을 만들어 보름 밤 목화 솜 요 위에
마악 누운 황진이 속적삼 같기야 하겠나
젖내 풍기는 저 고상하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유혹 앞에서
눈 질끈 감고 차나 몇 잔 고요히 마실 수밖에
심장에 두근두근 푸른 수액 거푸 올릴 수밖에.
매화 2
당신을 생각하는 내 봄날이 저러하였으면 좋겠다
속에 든 말 옥처럼 깎고 깎아서
동그랗고 조그만 귀걸이 하나 만들어
매화 봉오리처럼 귓불에 달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행여 내 생각을 해 주면
두 뺨이 발그레 혼자 꽃 피어
뽀얗게 통통 자지러졌으면 좋겠다
봄,
천지간에 그리운 매화 터지는
또 봄.
매화 3–텅
돌아서 우는 당신을 본 적이 있다
보슬비 내리는 봄 날 밥을 굶고 산처럼 앉아
앞 산 너울에 흐르는 안개로
온 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는 당신을
가만히 훔쳐 본 적이 있던가
한 순간 뒤태가 들썩였던가 소주처럼 출렁,
잠깐씩 흔들렸던가. 그저 돌아 앉아
홍어처럼 삭혀야했던 독이라도 안고 있었던가.
분분 떨어져 누울 향그럽고 서러운 꽃받침을 등에 업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숨죽여 우는 당신
맨 처음 피어나는 건
뭇것들이 한참 찬란할 때
가뭇없이 텅,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돌아가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사는 일이다.
매화 4–도산서원
요즘 같은 달 밤 선생은 점잖게 뒷짐을 지고
헛기침 험험 매화 속으로 슬쩍 미끄러져 드셨을까나
아득하게 향기를 품은
글을 읽다 말고 문 밖에 누가 온 것 같아
휘영청 보름밤에 창호지 문을 뽀얗게 열고
지그시 눈을 감아
목젖에 감겨 오는 마음 하나 가지에 걸었을까나.
강 희 동
호박ㆍ붓꽃ㆍ사과
꽃 지고 바람 불어ㆍ합창
그리운 원촌리ㆍ봄날ㆍ봄날 2
그대 있어 나 여기 보노라
꽃 진다고 새 울지
시인의 말
가급적이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어 보려고 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명사적인 속성을 변형하지 않고 느낌을 드러내어 보았다.
쉽지는 않았다.
세상일들이 다 그렇듯이 쉬운 언어로 쉽게 자신의 뜻 전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이 있어야 한다.
간결하고 단단한 것이란 오래 수련된 시간과 노력의 결정체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 밖의 내용들도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시는 누구나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시인이 살아가는 흔적인 것이다.
호박
발정 난 호박벌
이 꽃 저 꽃 쑤셔대며
꽃가루 퍼 나른다.
호박꽃도 벌겋게 흥분하여
노랗게 색기 드러낸다.
한참 후 열음 배불리며
잎새 뒤에 숨어
여름 속으로 묻힌다.
붓꽃
내가 잘 알고 더불어 정든 여인은
너무 화려한 오월 장미가 아니라오.
진한 향기 날리는 라일락도 아니라오.
그냥 제 철 자줏빛 자태 함초로운 붓꽃
유월 푸름 머무는 어느 산그늘 바위 옆 풀섶에
꽃대 길게 내밀며 송홧가루 그려내는 붓꽃이라오.
때 마침 발정 난 장끼 꺼억 댈 때마다
산꽃도 다투어 피어나고
산새 조잘대는 개울가에 매무새 다듬어
뭇 들풀 향기 다투는 붓꽃이라오.
봄 건너 여름 입새 어중간하게
꽃 자주 못 피어 미안한
자줏빛 붓꽃이라오.
사과
능금 볼 베어 물고
미안해 본 적 있어
하얀 이-ㅅ빨 가득
붉은 사과 베어 물고
미안한 적 있나
그대에게 한 입 가득
능금 빛 베어 물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해
본 적 있어!
꽃 지고 바람 불어
꽃 피지 마라 하여도
꽃은 진다
단풍구경 하지 않아도 저리
낙엽으로 날려 가을은 간다.
가고 지는 것이 어제
오늘 일 아니지만
찬바람 부는 겨울광장
근심으로 스며든다.
합창
가을 해바라기 담장 위로
불쑥 제 목을 올릴 때
눈부신 부할 동트기 전
그 해바라기 칭칭 감고 올라
정수리에서 나발 부는 나팔꽃 독주
하늘로 오르다 청하늘에 팅글리며
쨍 부서져 내리는 눈부신 햇살
늦가을 들판에서 함성으로
쑥부쟁이 들국화 구절초 작은 들꽃조차
와와 저마다 몸짓으로 일어난 노래
잠 깨는 들판 풀벌레도 끼어들며
쪼매한 소리를 보탠다.
여럿 더불어 어울린 합창은 허공에 머물다
살아가는 힘이 되고 들녘 풍성한 화음으로 영글다
아득히 물결 되어 번져간다
산다는 것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보태어 가을 영근 들판이 되는 것
쪼매한 몸짓 울음 우는 풀벌레 들꽃의 합창 속에
황금빛 햇살 절여 은빛 강물 널어 흐르는 것
가을 해바라기가 불쑥 제 목을 올려
눈부신 부활을 끌어오듯
이 수상한 길목에서 아득함과 그윽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 볼 일이다.
그리운 원촌리
원촌 한 걸음
물러날 때 마다
저 강물 저 산
푸르게 자맥질 하고
먼촌 한 시절
흘러갈 때 마다
저 산 저 강물
꽃 지고 붉게 울어
잊혀지지 않는
물 밑 잠자는 옛 기억 깨워
원촌 돌담 따라 물고기 더불어
개헤엄이나 칠거나.
봄날
어쩌지도 못하고
게으른 햇살 더불어
어정거리며 한숨만 쉰다.
꽃그늘 길게 늘어지고
향기 없는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꽃가루만 흐르는데
미칠 듯 허전한 꽃 지는 오후
꿀벌 앵앵 머무르는 마루에 앉아
하르륵 하르륵 꽃눈 내리는 날
부질없이 앵두꽃잎 세고 있다.
봄날 2
너무 허전하여 바람이 분다.
주체할 수 없는 바람 때문에 허전하다
바람도 허전하여 자꾸 길가의 살구나무를 흔든다.
고요하던 살구나무가 제 몸에 붙은 이야기를
털어내어 길바닥이 하얗다
사람들은 그 하얀 이야기를 밟으며
봄날을 지나간다.
마침 고리 풀린 개도 똥을 싸고 힐끔힐끔 사라진다.
허전한 아침이다 해는 중천으로 오르고
꿈같은 세상이 창 밖에 소란스럽게 피고 있다
비나 내렸으면, 또 꽃잎이 젖어 갔으면
떨어진 꽃잎들이 날아올라 나무 가지로 앉는다.
건너 과수원집 딸아이의 능금 볼 베물어
하늘에 걸어 두고 싶다.
그대 있어 나 여기 보노라
눈 들어 삶이 빛나고 환희의 햇살이 요동치는 숲의 합창
오월 그대 가슴에 싱그러운 훈장을 붙여
빛 쏟아지는 숲 속으로 들면 신록의 합창
교향곡 음계를 타고 춤추는 나무들
아편 먹은 듯 졸리는 오후
열광하는 호수의 잔물결을 밀어내고
심청이의 인당수 물 한바가지 퍼 와
긴 머리칼을 씻어 내리면
젖 계곡을 타고 내리는 선율
시간의 잣대는 오후의 그림자를 동쪽으로 길게 늘이고
속절없이 성냥개비 씹으며 하품을 한다.
오월 하늘 뭉게구름 버물어 획 그어 불붙이면
솜덩이 붉어 저녁놀 몰려온다.
적묵의 밤을 수놓는 5월의 향연
타는 저녁놀에 몸 던지면 검은 어둠은 이불 되어 눕고
복잡함도 더불어 잠청하는 은하수별마저 깜박 졸다
오그르르 꽃 눈 으러지는 봄 밤.
꽃 진다고 새 울지
이제 꽃이 지는구나.
새가 쪼아 먹을 씨앗조차 가는구나
허전한 일들 틈 사이로
딱따구리 또르르르 갈참나무를
그 소리에 깬 잡풀들이 무성성 올라
내 보아 오던 봄날이 가는구나.
박태기 산벗 참꽃조차
꽃잎 내려 눈처럼 눕는구나.
그래 꽃 진다고 새 울지 않으리.
김 미 현
봄ㆍ존재ㆍ가시고기를 만난 날
늙은 사과나무ㆍ길을 묻다
금당실 마을ㆍ봄이 오는가 보다
시인의 말
봄이다.
봄이 시가 되고
시가 봄이 되는 계절이다.
모든 것들이 좋아진다.
봄
봄이라서 아픈 게 아니다.
아프니까 봄이 오는 것이다.
사람만 아픈 게 아니다.
돌담 밑 민들레도 아프고
하늘 높이 도요새도 아프다.
산다는 것은 아픈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는 것이다.
존재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잠시 순한 얼굴이 된다.
먼 산에 바람꽃이 일면
아! 비가 또 이어 지려나
너그러운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먼 산을 바라보다가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먼 산은 멀리 바라보는 힘을
주는 존재일지 모른다.
가시고기를 만난 날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난 뒤
수컷은 온 힘을 다해
알을 보호하다가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자
힘이 없어서 죽는 가시고기
가시고기 새끼들은
수컷 가시고기의 살을 뜯어먹고
물살을 가르며 강으로 나아간다.
가시고기를 만난 날
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아버지를 마주하고서.
늙은 사과나무
늙은 사과나무 아래에 서면
참 많이 미안하다.
많은 걸 주고도
아직도 줄 것이 남아있는지
사과 꽃
하얗게 피어나지만
살아온 세월의 흔적만큼
비틀어진 몸을
숨길 수 없다.
늙은 사과나무 아래에 서면
말없이 주려고 하는
어머니가 서 계셔서 아프다.
길을 묻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걷고 싶다.
어떻게 사는지 정해져서
한 번도 울지 않고
씩씩하게 살고 싶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래도
길을 버리지 않고 간다.
산다는 것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금당실 마을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구불구불 돌담길을 따라
푸른 소나무들이
팔을 펼쳐 숲을 만드는 곳
깊은 밤 계곡을 따라
투명한 별들이
곡선을 그려 다리를 잇는 곳
물 위에 떠 있는
흰 연꽃을 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육백 년이 지나서도
그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봄이 오는가 보다
밤늦도록
잠들지 못한 바람
아무도 밟지 않은
어두운 언덕을 넘어오다가
매화가지 끝에 앉아서
붉게 봄으로 달렸다.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마음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다가
지나간 이른 아침
돌담 끝에서 개나리가
자꾸만 노랗게 웃는다.
김 여 선
주산지ㆍ눈ㆍ가을 저녁 무렵
버스를 기다리며ㆍ거미줄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
플라스틱 재떨이
시인의 말
겨울이면
아버지가 마시는 막걸리에는
소죽 냄새가 났다.
구정물에
여름 동안 말린 풀과 볏짚
그리고 등겨 한 바가지 넣어 끓이면
구수한 소죽이 된다.
그 소죽에
막걸리 주전자를 담근 후
따뜻하게 해서 마시던
아버지의 막걸리
동인지에 제출한 작품도
아버지가 마신 막걸리처럼
구수한 소죽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주산지
어둠을 삼켜 버린 3월
주산지의 어스름한 새벽은
커피의 쓴맛으로 다가오고
차가운 물에 발목 담근
왕버들 가지 사이로
그대 떠난 그리움처럼
새벽안개가 지나간다.
낮게 움직이는 안개
무릎 구부려 잡아보려고
메마른 손 허우적거리지만
잡히는 건 발효되지 못한
물속의 낙엽뿐이다.
3월 주산지에는 아직도
지난 가을의 낙엽들이
발효되지 못한 채
새벽안개를 맞고 있다.
눈
눈이 내릴 거면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었음 좋겠어.
고개 들면
네가 떠난 그 길 위로
너의 흔적들 모두
덮을 수 있게
뺨 위로 내리는 눈
눈물인지
눈이 녹은 물인지
알 수 없게.
가을 저녁 무렵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이
하얀 소다로 흩어지는
저녁 무렵
장터 모퉁이에서
국화빵을 구워내던
어머니의 칼국수처럼
허연 머리카락 사이로
국화 향기 대신
소다 냄새가 났다.
소다 냄새가
장터 구석구석으로
낮게 깔아지는
가을의 하루가
마감하는 날이면
삶의 모서리에 서 있는
장터 사람들은
소다 냄새 나는
가을 하늘 구름
가슴에 안고
내일을 준비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막걸리 몇 잔에 허기진 배 추스르고
보리비빔밥 걸쳐 넣은 후
볼록해진 배 끌어안고
버스를 기다린다.
전조등을 켠 빈 택시들만
줄지어 지나가고
기다리는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버스정류장 아래 사람들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이고
오래 기다린 버스 안에는
보리비빔밥처럼 사람들이 뒤섞인다.
몇몇은 된장찌개처럼
몇몇은 비빔고추장처럼
몇몇은 겉절이처럼
그리움들을 다 섞으며
버스는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거미줄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
낮은 바람에도
끊어질 것 같은
늦가을 거미줄은 위태롭다
떨 켜에 떨어져 나간 낙엽처럼
점성 잃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잠자리 날개 하나
낮은 바람에도 위태롭다.
점성 잃은 거미줄일수록
바람은 더 세게 불고
지폐보다 가벼운
잠자리 날개 하나
떨어지는 11월 마지막 날
점성을 잃어버린 그대
추억으로 남기에는 위태롭다.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
안개 낀 아침은
젖은 낙엽 하나
떨구고 지나간다.
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온 보드라운 햇살
얼굴을 어루만진다.
소중했던 순간들이
햇살 사이로 사라진다.
젖은 낙엽 하나 만진다는 거
내 살아가는 의미인 거
한 권의 시집
옆구리 끼고
여행을 떠나듯
그런 겨울을 맞이할 일이다.
플라스틱 재떨이
장터 국밥집
담뱃불에 지져진
플라스틱 재떨이
빈 탁자 모서리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담뱃불에 지져질 때마다
생겨나는 생채기의 옹이들
가을 하늘 닮은
막걸리 한 잔 걸친
장터 국밥집에서 난
플라스틱 재떨이로 남아있다.
사람들의 아픈 허벅지를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무디어지는
빈 탁자 모서리에
자리 잡은 플라스틱 재떨이
카메라 파인더에 잡히지 않는
잘려나간 화면처럼
장터 국밥집
플라스틱 재떨이로 남아있다.
김 윤 한
얼음 우는 강에서ㆍ어머니의 꽃밭
벌초ㆍ오래된 돌담
Yㆍ조팝꽃 마시며ㆍ엉겅퀴
시인의 말
해마다 가을이 되면 습관처럼 글밭 원고를 독촉했는데 올해는 이른 봄부터 독촉이다. 최근 들어 글밭이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는 것 같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글밭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우리가 있었을까할 정도로 동인지의 존재가치가 지대하다. 젊을 적 치기처럼 글을 쓰다가 지금은 대부분 그만 두었지만 내가 여태껏 글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동인지 덕분이다.
우리 손으로 동인지를 어렵게 여태까지 만들어왔지만 어쩌면 지금은 오히려 무정물인 동인지에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하기는 동인지에는 우리들의 정신과 감정들이 응축되어 있는 만큼 생명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어쨌든 글밭은 대한민국 동인지 가운데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기간 전통을 이어 왔다. 그리고 모처럼 전성기를 맞고 있는 글밭이 더욱 활성화되어 문학 수준에서도 대한민국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얼음 우는 강에서
한겨울 사람 흔적 없는 강에 나가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보면
얼음 쩡쩡 갈라지며 우는 소리 들린다
우리는 모두 강물에 허우적거리며
수천 년 쉬지 않고 휩쓸려 왔지만
얼어붙은 강에는 흐르던 역사도
흑백 판화처럼 잠시 입 다물고 서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잠시 내려와
모든 것 내려놓고 서 있는 겨울나무에 기대어
물끄러미 은백으로 굳어있는 얼음을 보면
잠시 정지된 세상의 모습 볼 수 있다
흐르던 시간도 함께 얼어붙었다 갈라 터지며
쩡쩡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얼어붙은 시간의 언저리에 서서
오래 전에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마른 눈물 부스러기도 만날 수 있다.
어머니의 꽃밭
다 자란 자식들이 하나씩 집을 떠나자 어머니는 자식들 대신 시골 마당 모퉁이에 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같은 것들이 오래된 기억들을 비집고 번갈아가며 꽃을 피웠다.
꽃밭에는 꽃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뭄에 꽃이 마르고 잡초가 돋아나고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다. 꽃밭이 이렇게 어우러지기까지는 숱한 바람과 잔기침과 눈물이 있었다.
한 번 떠난 자식들은 가끔씩 꽃밭을 다녀갈 뿐 다시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꽃밭은 낮이면 화려하지만 밤이면 쓸쓸한 달빛들만 가득했다.
꽃밭에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종류별로 씨앗을 털어 편지봉투에 넣어 보관하신다. 다가오는 봄이 되면 오랜 습관처럼 다시 그 씨앗을 뿌리고 반가운 편지처럼 연둣빛 싹을 틔워낼 것이다.
자식들 돌아오지 않듯이 꽃밭에 언제까지나 꽃을 피워낼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의 꽃밭에는 화려한 빛깔의 꽃들뿐 아니라 그 넓이 이상의 휑한 바람들이 흑백으로 함께 자라나고 있다.
벌초
수염 유난히 많았던 아버지
산소에도 유달리 풀이 많다
예초기 시동 걸고 면도를 한다.
봉분 위로 흩어지는 아버지의 수염.
내 얼굴에도 수염이 참 많구나.
면도기 스위치 올리고
벌초하듯 수염을 자른다.
면도하고 거울 보니
내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이 시간에도 산소 풀들 자라고
깎아도 깎아도 다시 돋는 수염.
오래된 돌담
누가 쌓은 돌담일까
흘러간 세월 마른 이끼 되어 남아 있다
모난 돌 둥근 돌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작은 돌이 큰 돌의 공간을 메우고는
마침내 한 몸이 되어 일어서는
놀랍고도 섬세한 조화
돌 하나하나 모두 하잘 것 없지만
한데 어울려 어깨동무 한 채
비로소 친근한 이름 하나로 태어났다
돌담 위 호박넝쿨 마르듯 사람들도 가고
백 년 뒤 또 어느 후손이 돌담 지나며
옛적 돌담 쌓던 이름 모를 선조
그 부르튼 손바닥을 떠올릴까
돌담 위를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Y
까마득한 어린 시절
한 눈 감은 채 참새 노려보며
고무줄을 당겼던 새총
지게 가득 나뭇짐 지고가다
잠시 삶의 무게를 고이던
아버지의 지겟작대기 끝 같은
미지수 x와 함께 오랫동안 우리들 괴롭히던
방정식 속 그 글자
그러나 더 크게 보면
세상 모든 것 흘러가는 이치와도 같아
나무들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뿌리 쪽으로 햇살 모으고
골짜기는 시냇물 두 팔로 껴안아
강을 만들고 강은 다시 물줄기를 모아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되고
마침내 커다란 세상이 되는.
조팝꽃 마시며
조팝나무 꽃그늘에 앉아
한잔 또 한잔
잘 익은 막걸리를 마신다.
벌들은 꽃에 앉아 꿀을 마시고
나는 꽃잎 한 움큼 술잔에 띄워
잘 익은 봄날을 마신다.
뱃속 가득히 피어나는 꽃들
마침내 내가 술이 되고
한 무리 조팝꽃이 되었다
날 저물자 우주 가득히
조팝꽃처럼 아름다운
별들 총총히 피어났다.
엉겅퀴
지은 죄 얼마나 많기에
삶이 이처럼 처절한 것이냐
몸 가득 돋아난 가시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형벌
만물들 다시 돋아 소란한 봄날에도
날 때부터 채워진 족쇄를 끌며
그렇게 비척이며 가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위험한 존재
얼마나 걸어가야 이 죄가 끝이 날까
직립해 있음은 슬픔 그 자체
들판 모퉁이 부끄럽게 서서
정수리 위로 피워 올리는 꽃은
차라리 한 움큼 붉은 한이다
차라리 한 움큼 붉은 한이다.
김 지 섭
가는 길
길 가면서
그냥
가는 길
아흔 셋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온 집안이 모이셨다.
우리 집안에 봄제사는 없는데……
아참 너희 큰어머니가 삼월이었구나.
니 아버지를 불러가셨나 보다
팔순 당숙모님이
무슨 점성가처럼 단언하셨다
한때 동생이 모시기도 했던
제사가 있었지
날까지 받아놓고 그만 돌아가셨다던 그분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전설처럼
들려주셨던
그러면 그 긴 세월 동안
저 하늘 어디선가 그분은
아버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셨단 말인가.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엔
주역의 글귀들처럼
모호한 상징으로 펼쳐지는 궤도를 따라
수천 수억의 별빛들은 제각각
걸음걸음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 가면서
길을 가고 있네. 얼마나 나는 걸어왔을까? 떠나온 곳은 너무 아득 멀어 처음을 알 수 없고, 돌아보니 이제껏 걸어온 저 길 구불구불 정말 눈물겹네. 한 곳에 이르니 흰 눈밭이 보이네. 문득 그리로 가고 싶네. 아무도 걷지 않아 더욱 마음 끌리네. 그 눈길 걷고 있으니 바람도 한결 싱그럽고 하늘에는 새털구름도 내 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네. 이 눈길 끝나면 잎 돋는 들판 지나 꽃들 흐드러지게 피는 언덕도 만나겠지.
휘파람 날리고 가다가 생각하니 이제껏 가보지 못한 그 길을 아득한 그 어느 날 꼭 한 번쯤 걸어갔음직한 생각이 들기도 하네. 기억에도 없는 그날도 자욱눈은 풀풀 날리고 나는 좋아라 걸었겠지. 눈은 줄곧 켜켜이 내려쌓여 내 발자국도 덮어버리고 그러다가 세월이 눈마저 씻어 내렸겠지……. 한참을 가다가 이런 생각도 드네. 계속 이 길을 따라가야 할는지? 그래
도 그냥 그길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네.
어느 날은 길 가다가 이런 생각도 하네. 이 눈길 밟아가다가 또 다르게 이어지는 나의 길을 걷다가 보면 갈림길 나오고, 나는 또 다른 길을 찾아 그 길 또 걸어가다가 보면 나의 길은
그 언제 어디선가에서 이 행성 위의 마지막 길로 끝나겠지……. 그러면 내 앞엔 알 수 없는 어둠이 내리고……
그리고 정말 헤아릴 수도 없는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어느 먼별에서 다시 이 행성을 찾아와 또 언젠가 그날 좋아서 걷던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그런 생각의 고삐를 잡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가는 이 길 그대로 걸어가야 할까 말까 고개 갸웃거리면서 자꾸만 묻고 또 물어 본다네.
그냥
어쩌겠나.
그 바람 기어코
서(西)으로 불어간다는데
어쩌겠나. 뭘
찬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소소리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이리도 눈앞이
캄캄한 날엔
그냥 하늘이나 한 번 우러러봐
거기 유유히 흐르는 구름
흐르는 대로
우두커니 뒷짐 지고 바라만 보다가.
이 위 발
걷는 다는 것은ㆍ숨어들다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바람에 의해 아름다워지는 너
땅을 딛고 있는 발끝에서
시인의 말
거울을 보고 웃으면 거울도 웃는다는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세상이 다르게 다가오고, 모든 사물 또한 변화무쌍하게 다가옵니다. 요즈음 들어 사고의 깊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기도 합니다. 그 웃음 뒤에 오는 여운을 원 없이 즐기고 있습니다.
걷는 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생각으로 다가올 때
내 눈은 게을러도 좋아 책임 지우지 않아도 좋아
수평이 되어 있을 때나 수직이 되어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의자에서 보내는 삶이 원숭이지 인간은 아니지
앉은 자세로 생각할 때 생각은 엉덩이가 하고
본성은 수용적이며 평화적이지
다리를 뻗을 때처럼.
숨어들다
전등이 밤을 몰아 낸 줄 알았더니
밤은 사람의 가슴으로 숨어 들어가
지우기 어려운 어둠이 되었다는 생각
세상의 어둠은 빛 앞에서 소멸이 아니라
보다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다는 생각
편지가 한권의 책이 되어 내 앞에 엎드려 있다.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겨 봐도 옷 젖는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 푸른 산을 걸어 봐도 다리가 아픈 것은 아니지만
상처에 상처를 내면 상처가 아니듯이.
바람에 의해 아름다워지는 너
너의 입술이 열리는 동안
귓바퀴 사이로 바람이 꼬물꼬물 들어와
신발 코처럼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키 너머로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들이
배꼽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듯
쭉정이는 밖으로 알찬 것들은 안으로 들어와
너의 말, 너의 몸짓, 너의 눈빛, 너의 음성이
합궁하듯 긴장감이 팽팽할 때
시계 소리는 상쾌해지고
먹이를 통째로 삼킨 뱀이 여유 부리며
시간을 들여 되새김질하듯
바람을 일으켰다 잠재우는 너는
파란하늘에 싹이 트는 꽃씨에
꽃망울 터지듯 눈물겨워지는.
땅을 딛고 있는 발끝에서
해변의 모래톱에 찍힌 흔적들 위에 앉아 있던 물새와 몸
을 숨긴 조개들, 모래판 같이 부드러운 그 위를 손가락처럼
딱딱하고 뾰족한 것으로 긁어야 하는 것이 글이라면, 영토
를 표시하기 위해 호랑이가 나무 등걸을 발톱으로 자국을
내듯이, 우리가 만들어낸 최초의 붓이 손톱이었다면, 그것이
뼈나 나뭇가지가 되고, 오래 간직하기 위해 돌 위에 새겼듯
이, 펜에 힘을 주고 쓰면 종이는 찢어지게 되고, 쓰는 것이
아닌 긁는 것으로 흔적을 보여 줄 수가 없듯이, 찢어지는
법이 없는 섬세하고 오묘한 정신의 리듬까지, 부드러움을
잡은 손이 움직이려면 어깨에 힘을 주어야 하고, 어깨에 힘
을 주려면 가슴에 힘을 주어야 하고, 가슴에 힘을 주려면
허리에 힘이 있어야 되고, 허리힘을 받으려면 떠받치고 있
는 발끝이 땅을 딛고 있어야 하듯이, 긁는 것도, 새기는 것
도, 찍는 것도 아닌, 쓰는 것이 붓이라면.
임 관 혁
애창꽃ㆍ사랑아ㆍ비 오는 날
뻐꾹새ㆍ빗물 국수ㆍ사월 강
사랑가ㆍ동백꽃 피면ㆍ밤 길
밤안개 내리는 밤
시인의 말
올 3월 말 현대 시인협회에서
신대방역 지하철 외선 9-4에
글밭에 발표된 시 용산매미가
게시되어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왔다나.
시를 쓴답시고 가장의 존재조차
잊고 산 내게
살다보니 그래도 조금은
미안함을 달래 줄 수 있는
날도 있나 보다.
애창꽃*
피다 진 애기 꽃
지고 핀 어미 꽃
볼 붉은 애기 꽃
가슴 아린 어미꽃
눈물 꽃
서름 꽃
피어 있는 어미 꽃
피다 진 꽃
지다 핀 꽃
돌 무덤가에 피어 있는 애기 꽃.
* 애창꽃: 애기 무덤가에 피는 진달래꽃.
사랑아
내게도 주렴
별빛 같은 그 눈빛
내게도 주렴
호박꽃 같은 그 웃음
내게도 주렴
눈꽃 같은 그 손짓
내게도 주렴
국화꽃 같은 그 향기
내게도 주렴
동백꽃 같은 그 마음.
비 오는 날
나도 울고 싶다
그리움아
나도 울고 싶다
서러움아
나도 울고 싶다
아픔아
나도 울고 싶다
사랑아
하늘이 우는 날
땅이 젖는 날
괜시리 괜시리
나도 울고 싶다.
뻐꾹새
울음 울 곳은
오직
내게는 이 땅뿐이다
한 목소리로
오는 봄을 위하여
울어 댈 땅은
조각난 이 땅뿐이다.
빗물 국수
내 나이 스무 살쯤
하지 무렵
보리 벤 논으로
늦모 시집보내던 날
비는 장대 같이 내리고
우장은 한 짐
내 몸을 누르고
허기진 배 꼬르륵 소리 날 쯤
엄마가 옹가지에 이고 온
새참 국수
떠 주는 그릇에 빗물 고여
퍼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국수
내생에 가장 배부른 국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국수.
사월 강
달이 뜬다.
내 그리움이
달이 되어 뜬다.
가슴에 묻은
날들은
물안개로 피어나고
빈 가슴에 채워진
서러움은
갈대숲에 숨어 울고
울음은 말없이
젖은 물위로
여울져 출렁인다.
사랑가
사랑 하거든
아프도록
가슴 아프도록
사랑 하라
사랑 하거든
눈물 나도록
피 눈물 나도록
사랑 하라
사랑 하거든
죽도록
가슴 터져 죽도록
사랑 하라
사랑 하거든
후회 없도록
죽어도 후회 없도록
사랑 하라.
동백꽃 피면
동박새 울어
동백꽃 피면
첫 사랑
그리움으로
내 마음
볼그레 물이 든다.
밤 길
어둡다
그래
그 옛날
아버지의
술 취한
진실 한마디에
쥐구멍을 찾던
그 어둠처럼
어둠이 내린다.
천둥 비처럼
어둠이 내린다.
밤안개 내리는 밤
어둠도 묻혀 버리리라
밤안개 내리는 밤엔
별빛도 잠들어 버리리라
밤안개 내리는 밤엔
울음도 잠들어 버리리라
밤안개 내리는 밤엔.
조 용 식
매화 Ⅰㆍ매화 Ⅱ
해바라기ㆍ봄 꽃
윤회ㆍ무제
매화 Ⅰ
은어 한 마리
바다에서 올라와
충렬사 앞마당에 누웠다
독감 걸린 몸을 쿨럭일 때마다
은빛 비늘 사이로
몽돌만한 파도가 하나씩 밀려 나온다
더러는 깨어지거나
비늘 틈에 걸려 넘어지면서
봄빛을 하나씩 켜면서 나온다.
봄은 보는 것이다
비늘 사이로 돋아 나오는 봄빛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비늘을 반쯤만 열고
봄볕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은어는 지느러미로 얼굴을 닦는다.
4분음표가 음계를 밟고 내려온다.
8분음표가 출렁 거린다
은어가 연주하는 G선상의 아리아
파스텔 톤의 색칠을 한다.
매화는 몸짓으로 말을 한다.
저희들끼리 소리 없이 와글댄다.
은빛의 몸짓이 떠서 수영을 한다.
꽃들의 신체언어에 숨이 막힌다.
하얀
하얀 은빛
겨울 내내 등 돌리고 살던
산수유가 노란 입술을 내밀었다
안으면 따스할 것 같은
매화.
매화 Ⅱ
매화나무는 과거로 걸어 들어간다
오래 전에 벗어 놓았던 눈을 덮어 쓰고
긴 과거로 들어간다.
길목 어디엔가 묻어 있을 흔적을 반추하면서
매화나무는 과거에 머물고 싶다
오랫동안 화석으로 남고 싶다
빙하기의 이야기가 하나 씩 풀려 나온다
호주머니 속의 털장갑도 제 발로 걸어 나온다
눈은 떨어지는 데로 꽃이 되었다
꽃은 아무 소리 없이 핀다.
적막한 강가의 정물로 피어있다
과거가 그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진달래꽃에 반사되어 붉어진 얼굴
순백이 부끄러워 방문을 닫는다.
창살문에 비치는
쪽진 머리의 여인
이야기는 그렇게 꽃이 되었다
어깨 위의 눈을 털어내면
비로소 배시시 웃음을 데워내는 꽃
매화는
숨기고 싶은 여인이다
눈으로 덮어서 숨기고 싶다
가슴 한 켠
나도 알 수 없는 곳에 깊이 넣어두고 싶다
내가 보는 순간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꽃
매화는
숨겨진 여인이다.
해바라기
마누라도 집에 없는 날
가만히
사립문을 나서기도 전에
봄볕이
저 만큼에서 깨금발로 뛰어 온다
정수리로 뛰어 든다
햇볕을 붙잡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해가 코밑에 걸려 있다
봄볕을 체에 걸러서 마신다.
입은 것 모두 벗어 던지고
구름 위에 눕는다.
햇살이 온 몸을 해체한다.
한 근이나 한 근반도 나올 것 없는 육신이
바스락 댄다
진작 마누라 몫이라도 남겨 둘걸 그랬지
소름이 돋아 일어서던 햇살이
풀기가 빠진 채
내 옆에 나란히 눕는다.
건너 산 멧비둘기 우는 소리
오늘 같은 날
외상술이라도 마시고 뫼 펄에 누으면
봄볕이 궁금한 이(虱)가
몇 마리쯤 스물 스물 기어 나오겠다.
정말이지 꼭 그렇게 하고 싶다.
봄 꽃
어쩌자고
꽃이 먼저 피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었다
한나절 반이면 떨어질 꽃이
어쩌자고 성급히 피었다
우표딱지만한 햇빛만 믿고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을 따고 나왔다
세상일 속 터지는 게 어디 한 둘이던가
그냥 답답한 속이 불어 터졌다
가슴을 내밀고
가슴을 내밀고
하회마을의 줄불이 터진다.
잎이 오기 전에
꽃이 먼저 진다
바람이 오기도 전에
꽃이 먼저 진다
꽃은 떨어지면서 불을 켠다.
가슴에 불을 켠 채로
그대로 사위어 진다
밤이 더 환한 줄불놀이
세모녀의 자살 뉴스에 먹먹한 가슴이
한 칸씩 떨어져 나간다.
봄꽃이 있던 자리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비어있다
봄꽃은
잠시 꿈에 본 듯하다
강의 저 끝, 거기에서 또 저 끝
따라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윤회
요사채 툇마루
동자스님
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다
스님이 후비는 콧구멍 속은 몇 천리일까
콧물방울 속에 부처님이 거꾸로 서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대웅전에서 나오는
노스님의 독송이
동자스님의 발 앞에 떨어진다.
삶은 계란의 매끄러운 머리를
한 입 베어 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석종이 우는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깬 동자스님
절 마당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누렁이는
아직도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무제
창호지문에
날벌레 한 마리
그림자가 두드린다.
달빛이 와서 두드린다.
풍금소리가 난다
문을 밀면
왈칵 비껴 들어오는 달빛
내사 고마
입 딱 벌리고 자빠졌다
감나무 잎 사이로
반쯤 익은 달이
내 입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천 승 현
빨간 봄ㆍ날마다 달마다ㆍ순정
나는ㆍ산에 핀 꽃ㆍ봄눈
산길ㆍ그저, 내 맘은ㆍ청소를 하며
史ㆍ가을
시인의 말
한 호흡에 돌아오는 계절입니다.
한 달의 첫날을 헐어 놓으면 어느새 말일에 서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납니다. 생각들은 점점 어지러이 흩어져 정리를 해야지 하다보면 한 주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훌쩍 흘러가 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점점 늘어나는 나이와 점점 늘어나는 글 빚입니다. 올해도 어쭙잖은 삶의 흔적을 슬그머니 내밀어 봅니다.
빨간 봄
밤새 손님이 다녀갔습니다.
이 상큼한 봄밤 목련꽃 입에 문 채
봄비가 다녀갔습니다.
나풀거리는 옷자락 휘감고
봄봄봄 다녀갔습니다.
그저 봄은……
빨간 우체통처럼 왔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달마다
날마다 별이 뜨고
날마다 해가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계절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그리운 사람은
그림자도 없이 가슴에 섬처럼 남아있고
외로운 사람은
넋도 없이 말을 잃고 별들만 헤아린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유성처럼 사라지게 될 때
나도 바람이 되고 싶다
강물이 되고 싶다.
순정
벚꽃 잎
하늘하늘 날리는
봄은 왔는데.
지나간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꽃샘바람은
신이 났는데.
남모르게
눈물 한 방울은
굴러 떨어지는데.
나는
힘들 때 외로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기 보다는
좋은 풍경 앞에서
맛난 음식 앞에서
그리고 좋은 사람 앞에서
더욱 더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산에 핀 꽃
눈, 비, 바람……
그리고
세간을 돌고 있는
슬픈 소식들을
발아래 두고,
홀로
꽃이 피었다.
이름 알 수 없는
향기를 온 몸으로
피워 올리며
봄을
부르고 있다.
봄눈
툭,
꽃망울이 터지자
기다렸던 듯
몇몇 이들은
세월을 거두어
돌아가고
피고 지고
지고 피는
이승의 봄날엔
슬픔보다 더
하얀 눈이
소리죽여 내린다.
산길
햇살을 등에 업고
그림자 하나 앞 세워
퍽퍽한 산길을 올라간다.
바람소리 새소리
떨어지는 나뭇잎.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마음이 낮아지는
까닭은 모른 채
산으로 향해 있는 길을 걷는다.
걸을수록 두고 온 길은
왜 언제나 가슴에 걸려서
높은 산처럼
버티고 있는 것일까.
그저, 내 맘은
마음이 문제라,
내 맘으로 생각하고 내 맘으로 판단하고
내 맘으로 곡해하고 내 맘으로 상처받는 거
다들 그런 거 아닌가.
나를 벗어날 수 있다면
마음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미 선인의 경지에 들어선 거 아닌가.
세상의 사람들,
나 아니면 너인 두 갈래 사람들
사람 사는 일 생각할수록 어렵고
마음 비울수록 잡념이 들이차니
한 평생 고뇌하고 생각하고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업장소멸의 한 가지려니 하며
그저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청소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거운 밀대를 들고 한 바탕
어지러운 마음만큼이나
어지러운 바닥을 박박 닦아낸 뒤
물 한 번 내린 변기에
밀대를 밀어 넣고 세제를 풀어
있는 힘을 다해 헹구어낸다.
휩쓸려 나가는 구정물
맘속에 쌓여있는 찌꺼기들도
저렇게 한꺼번에 시원하게
쓸려 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람에게서 한 번 두 번
억울한 일을 겪고 나면 그 기억은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들어앉아
아무리 물을 내려도
씻겨 내려가지지를 않는 듯
삶의 길 어느 순간순간
불쑥 치솟는 적개심은
변기에 걸려 내려가지 못하는
불순물처럼 따로 빙그르르 도는 듯
말간 하늘 아래 말간 마음으로
널려있는 밀대처럼
겉모습은 하찮고 보잘 것 없으나
제 자리에서 제 할일을 충실히 하고
햇볕아래 누구보다 떳떳하게
널려 있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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