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 41집 2016년 하반기

저 언덕 넘어 2024. 6. 3. 10:26

  우리들의 말

  누구나 마음에 밭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 무엇을 심고 가꾸고 거두어 가는지는 스스로가 알고 있다. 그 밭 하나를 일구느라 세상에 왔다가 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글밭 동인들은 시를 택하였다. 사는 동안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다가 시처럼 홀연 가고 싶다. 아름답고 외롭고 귀한 세상에 시처럼 살다가 시처럼 간다니 생각할수록 시의 밭이 든든한 곡식이다.

  생각이 비슷하거나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동네가 한창이다. 무언가에 기대어 깃들고 싶은 맘들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도자기를 굽거나 책이 좋거나 커피를 공부하거나 고전을 배우거나 자수를 놓거나 철학을 익히거나 풍수나 주역을 공부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집 짓는 일이 좋거나 가구를 만들거나 농사를 짓거나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약초를 캐거나 한의를 연구하거나 옷을 짓거나 빵을 만들거나 꽃을 심거나 먹을거리에 관심이 있거나 작은 학교를 꾸려가거나 - 마음 가는대로 편안하게 모여 사는 일이 잔잔히 번지고 있다.


  한 가지에 몰두하여 산다는 일은 바다거나 산이거나 큰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글밭의 사람들은 그 바다의 고기이거나 그 산의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니,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시와 함께 노닐다가 바람처럼 문득 세상 너머로 떠나면 될 일이다. 시 한 두 편이야 남기든 말든.

  봄에 동인지 한 권을 내고 가을에 또 한 권을 내기로 했더니 시에 바짝 붙어사는 일이 한결 좋아졌다. 창간 반세기를 바라보는 글밭이 이제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드럽고 단단한 터로 모여 살기에 꼭 맞는 밭이 되었다.




차례

우리들의 말  3

강 수 완
마음에 걸리다 10
스티로폼 밭 11
황태포 12
담쟁이 步法 13
알 14
나무가 사람에게 15

강 희 동
맛과 향 18
절망연습 19
봄소식 20
눈의 무게 21
동면(冬眠) 22
편린 23
흐린 강을 건너며 24
일월(日月)호수 25

권 기 태
묵주기도 28
생명의 길에 29
반변천 둔치에서 30

김 미 현
눈 길 32
오래된 편지 33
집으로 가는 길 34
모래성 35
거꾸로 서기 36

김 여 선
손수레 38
보리밥 39
유월 벚나무 40
오래된 책 41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고추잠자리 42
로드킬 43
물집이 잡히다 44

김 윤 한
눈물 맛 46
냉이꽃 47
무지개 세탁소 48
놋대야 50
금지곡 시절 51
일요일은 쉽니다 52
감성촉진액 53
얼어붙은 강에 서서 54
오래된 시집 55
이팝꽃 56
마주 보는 거울 57
통일벼 시대 58
나는 59

김 지 섭
어디서였던가 62
이제 나는 63

김 진 택
文化鉛筆B芯 66
아직 무슨 할 말이 67
그 시간 · 1 68
그 시간 · 2 69
長江 片紙 70
南 九州 쇠고기 식당에서 72

김 진 회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1 74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2 75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3 76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4 77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5 78
겨울새 79

임 관 혁
풀밭에서 82
오월의 광주 84
그림자 85
귀향 86
바람 앞에 87
그대 빈 가슴에 88
매미 89
살아가면서 90 
통영 바다  91 
가을  92
비 오는 날  93 
엄마꽃(2)  94
봄날 96

임 두 고
붉은 여름  98
언덕  100
스마트폰 102
조시(弔詩)  104
놀이터 106 
입 가벼운 보석 108
시간 또는 여행에 대하여 110

조 용 식
그 릇 112
여 름 밤  114

천 승 현
빈 자리  118
먼 길  119

특집­이 계절의 시인 / 이위발 121

글밭 略史  151








강 수 완

마음에 걸리다ㆍ스티로폼 밭
황태포ㆍ담쟁이 步法
알ㆍ나무가 사람에게

|시인의 말
말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요즘 내가 부쩍
말이 많아졌다. 쓸 말은 적고 할 말은 더듬거리니 말에게
미안하다. 더구나 시인의 말이라니……
시절까지도 그저 유구무언이다.




마음에 걸리다

토마토 껍질이 질겨서
먹던 그릇 앞에 뱉었다
씹히다 만 껍질이 화사 같아서
숟가락으로 떠내려다가 멈칫!

배암 껍데기의 문제가 아니라
뱉어놓은 걸 뜨러 간 숟가락으로
남은 걸 더 떠 먹어야 한다는 꺼림칙함

똑 같은 내 입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마음이 혼자 철조망을 두르니
말 못하는 토마토 앞에서
떠들며 살았던 사람 마음 하나가 부끄럽구나




스티로폼 밭

서쪽 바다의 새우를 담아 온 스티로폼 박스에
흙을 넣고 쑥갓 씨앗을 뿌렸다
등이 휜 새우로 앉아 밭고랑을 맬 일은 없었지만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고 자주 허리를 숙였더니
어여쁜 밤색 고깔을 쓰고 연두 싹이 총총 올라왔다
좁은 밭을 탓하지 않고 자라는 것들이
서로의 발가락에 이불을 덮어 주던
네 남매의 시골집 좁은 방이 생각나서 짠해졌다
보약 봉지를 헹군 물로 가끔 뿌리를 돋우고
발자국 소리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였더니
쑥갓 텃밭 한 평이 쑥쑥 생겨났다
쓸모 없다고 내다버린 문전옥답이 내 삶에 몇 평이었나
흠칫 돌아보게 하는 스티로폼 쑥갓 밭




황태포

마른입에 황태포를 뜯다가 선잠이 든 저녁
위장까지 닿지 못했는지 속이 아파 눈을 떴다
체끼에 트림을 하다가 문득 든 생각
방망이에 온 몸을 맡겨 고집이라고는 없어진
바닷고기 무른 몸 하나 풀어 놓지 못하는
민물 같은 내 속이 이리 좁다니
갈 길이 아직 멀었다




담쟁이 步法

다리를 꼬고 오래 앉으니
허리가 휘어져 아프다
몸이 비뚤어지는 걸 보니
마음 하나 바로 써야겠구나
담장을 곧게 다니는 담쟁이 척추가
눈에 확 들어와
회초리가 되는 저녁






알이라는 거
알맹이라는 거
단단하고 쓸모 있다는 거
손바닥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짝 펴서 거리낌 없이 내 보인다는 거
가을은
이순을 지나는 사람의 귓속 같아서
알이 든 껍질조차 향기로워 지는 때
천 만 개쯤 품었다가 내어 놓는 알들로
세상이 한참 둥글어 지는 때




나무가 사람에게

나무한테 묻지 않는다
나무도 우리한테 묻지 않는다
나무도 나무끼리 묻지 않는다
지상의 나무는 나무가 하는 일이 있으므로

사람은 서로 잘 묻고 산다
하는 일에 따라 어울리고
하는 생각에 따라 편을 가른다
나무는 각자 서 있어도 숲이 되고
사람은 함께 서 있어도 각자 외롭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따로 외로운 일이 더 많으므로








강 희 동

맛과 향ㆍ절망연습ㆍ봄소식
눈의 무게ㆍ동면(冬眠)ㆍ편린
흐린 강을 건너며ㆍ일월(日月)호수

|시인의 말
돈도 밥도 안 되는 시
시도 밥도 돈도 안 되는 세상살이
빌붙어 먹고 사는 것도 비겁할 때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뜻대로 안 되는 즈음
고마 술이나 퍼마시자.




맛과 향

유월 복숭아
칠월 수박
팔월 먹포도
모두 제 색깔 향으로
해를 먹고 바람을 품고
제 맛으로 먹히는데
세상살이 어중간한
허리 즈음
쓸만할 때
쫓겨난 들개신세
맛도 향도 개소리도
못 내는 어정쩡한 못둑 가
헛바람만 불어오고
그 바람 맞는
나도.




절망연습

절망은 기쁨을 이웃하지 않는다
홀로 길을 가며 외로움을 벗 삼아
절룩거리는 행보
절망은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목 꺾인 장미의 비명
눈속임으로 웃는 유월의 밤꽃 같은
유혹을 외면해도 된다
이미 절망 속엔 익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들뜬 희망 보다 때론 무릎 꺾인
절망이 편온할 때가 있다
마음 아픈 힘든 기대나 희망을 버려두고
혼절한 정신을 일깨워 다시 살아 오르는 의식
너무 늦었다고 절망으로 검은 이불을 덮고
평온의 잠 속에 드는 방치
포기함으로 더욱 평온해지는 절망의 세계에
출석부를 만들고 하지 못한다는 목표로
절망 연습에 불을 붙여 연기로 눕자
쿨럭거리며 남기지 말고 연기 마시고
누워서 다시 일어나지 말자.




봄소식

그대에게는 소식 한 조각 없고
눈이 되지 못한 늦겨울 비
정처 없이 흩날린다
항상 그렇듯이 갈 때는 소리 없이
올 때는 온몸으로 달려드는
계절의 프로포즈
입춘도 한참 지난 겨울 끝
기다리는 남도의 꽃소식은 멀었느냐
눈꽃 말고 녹지 않는
붉은 동백꽃 사연 말이다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오래 전 흘러 간 빨간 우체부
자전거 벨소리 기다린다.




눈의 무게

허공에서 눈발이 뛰어 내리며
사랑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한다
눈은 이윽고 바람에 휘둘리다 지붕 위에 앉고
지친 나는 얼룩진 가슴을 빨아낸다
한번 쯤 반성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언 땅을 벌벌 기며 건너가지만
따스함을 모르는 발바닥은 굳은살을 내밀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뒤퉁거린다
그렇다 눈은 그저 눈일 뿐이다
뛰어내리든 헐헐 날리든 나와 무관한 것이다
오직 오늘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눈이 내려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등짐지고 가는 내 사랑도 이와 같아 벗어나면
아무렇지도 않는 일상 속에 묻히고 나는
홀가분한 등허리의 눈의 무게를 내리고
종종걸음을 제촉한다 눈이 내리든
내 등이 얇아지든 무관함을 지고
함 사세요 함 사세요,
무사함을 팔고 있다.




동면(冬眠)

세상이 얼어 있었다
나도 얼었다
얼럴럴하다
입이 얼어 말이 되지 않는다
얼다가 터지고 있다
견디다 못해 제 몸을 터뜨리는 것
나오는 물도 멈추고 제 표피를 째고
삐져나오는 뱀새끼
한강물도 단단한 얼음이 되어
밤 새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등피를 밀어 올린다
추운 세상에 놀러 온 눈들도
날리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아
붙었다 얼어 수도관이 터지다
나도 어슬렁 걸음을 멈추고
몸서리치는 바람을 맞는다
몸살 나는 뜨거움 서늘한 바람으로 식히며
나를 견디고 멀리 날아 간 온전한 여인
붉은 입술과 뜨거운 가슴을 그려
따뜻할 수 있을까
쭈그러진 가슴으로 더운 피를 받아 내려고
애쓰고 있는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나
기어이 제 어미 잡아먹고 살아 나오는 살모사
부활을 꿈꾸며 겨울잠을 깨운다.




편린

당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나와 분리된 제 몸이라고 맘대로 해도 됩니까
빈 트렁크처럼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외출 나간 지 오래
어디 쯤 살아있는 소리가 들려올까요.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먼
이미 나를 떠나가는 섬들을 보며
그냥 스쳐 지나치나요.
당신이라면 그 섬을 그냥 놔
내 것이어도 내 것이 아닌
마음속에 있어도 몸이 지나치는
때가 된 것일까 날개를 다는 나비
아이는 병상에 눕고 나는 신열을 삼킨다
추운 겨울바람은 창 밖에 울고
난 방 안에 서성이며 몸살을 받아낸다
이 겨울광장에 아프지 않는 자
춥지 않는 자 어디 있는가
어느 누구도 작은 아픔을 감추고 웃으며
몸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떠나는 섬들을 보며
또 나는 아프다.




흐린 강을 건너며

그 뜨겁던 해는 꺼지고
날은 흐리고 드디어
비가 오시려 한다

지겹던 어둠과 지리한 장마를 걷어내고
햇볕 기다린 어제의 목마름
이제는 고단한 뜨거움 되어 다시 풀들이 시든다

모든 것은 기다림 속에 피어나는
갈증의 꽃

건기가 지나고 드디어 우기에 비가 오려 한다
세상은 생기를 얻고 나는 일을 내려놓는다

날은 오래 흐리고 비가 내린다
목마름 속에 피는 꽃 풀들의 서걱이는 노래를 위해
나는 우기의 강을 건너 볕이 산란하는 건기의 땅으로 간다

기어이 비는 오고야 말고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칠칠날
검은 다리 위에 날개 짓하는 까마귀 떼를 기다리며
메리스, 메리크리스마스
인고의 성탄강을 건넌다.




일월(日月)호수

호수에 보름달 뜨면
때가 된 것이다
새로운 달을 품으려
죽은 피를 내 보낸다
다시 일그러지는 달
달거리다
호수에 달이 뜨면 때가 된 것이다
만나지 못해 떨어진 그 시간이
보름달로 팽팽히 부풀어 터질 듯
그믐이 되어 죽은 시간의 흔적 버리고
또 다시 초생 달이 떠오른다
일월 호수에 수줍은 눈썹달
빠져 배시시 웃는다.








권 기 태
묵주기도
생명의 길에
반변천 둔치에서

|시인의 말
한 올 한 올 이어져 온 짧은 외길
가난한 여정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삶의 길에
고통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묵주기도

한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렸다
우주에 만물이 창조 되었다
영원한 낙원의 소유자로
한 쌍의 인류를 지으셨다 한다
배필인 여인의 속삭임에
인류는 원죄에 빠지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고
당신은 나의 속죄를 위하여
나는 당신의 사랑에 감동하여
부러진 손목과 굳어진 손가락으로
세상의 아픔 모두를 담아
쉰아홉 개의 유리알을 굴리고 있다
영혼의 세계로 가는 길목에서
땀으로 젖은 육신이 가는 길에
홀로 앞서 가는 천상의 여인
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인내와 보속과 희생으로
영혼은 하얀 구름을 타고 있다.




생명의 길에

유혹의 원류에서 발원하여 흘러 왔다
한 점 원죄에서 비참하게 떨어져
가상의 선택에서 현실로 착상되었다
안개와 구름에서 인연으로 결합하여
어둠에서 허공의 빛으로 태어났다
하늘에서 보랏빛 여막을 걷어 내어
이 땅에 가난한 생명의 길을 열었다
군중들은 앞나서 욕망의 길을 달려
척박한 땅위에는 비명소리 가득하다
온정과 비정의 혼란에서 선택되어
섭생과 배설의 과정을 반복하며
날마다 생존의 역사를 세우고 닦아
생존은 지성과 야성으로 강하여졌다
반칙과 오류의 늪에서 살아나려고
하늘과 땅의 섭리에 반항하였다
한 올 한 올 이어져 온 짧은 외길
가난한 여정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삶의 길에
고통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반변천 둔치에서

새길 교량 공사장 위를 휘 돌아 걸으면
은빛 모랫길 진모래 명사십리 떠 있고
봄에는 청어 떼 여름철에는 은어가 놀아
비늘을 번쩍이던 유년의 강변에 서 있다
물소리 소란하던 자갈여울은 사라지고
강 건너 영호루 앞 수양버들 십 리 길
해가 떨어지는 갈대밭에 노을이 내리면
막대기 들고 물고기 한 타래 잡아들고
긴 그림자로 돌아오던 둔치 길에는
지금은 자전거길만 휑하게 늘어져 있다
수중보 고인 물에는 잡초가 자라고
푸른 청투가 강바닥을 덮어 나가고
수백 억을 먹어 버린 수중보 댐 아래는
버려진 화학물질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다
오수가 내려오는 수문에 바람이 불어오면
왜가리 쇠오리 몇 마리 허기에 지쳐서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떠나고 있다








김 미 현

눈 길ㆍ오래된 편지
집으로 가는 길
모래성ㆍ거꾸로 서기

|시인의 말
  계절이 무더위에 견딜 수 없는 날이었다가 하룻밤 사이
에 추워지고 달라져 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도 달
라진다.
  희망으로 가득하다가 한 순간 절망으로 넘치기도 한다.
  다시 하룻밤 사이에 다른 계절이 올 것이다.
  다시 우리의 삶도 달라질 것이다.




눈 길

해가 질 때까지
아무도 가지 않는 눈길을 걸었다.
한참 걸은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걸어온 발자국이 또렷하다.
우리의 삶도 선명해질 거라고 믿으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다시 눈이 내리면
다른 이가 아무도 가지 않는 눈길을 걸을 것이고
또 다른 발자국이 선명할 것이다.




오래된 편지

그리움이 칸칸이 쌓인 돌담길을
쉬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눈이 맑은 별들이
물기가 남은 나뭇잎을 덮고서
편지를 읽고 있다.

이미 과거라는 것을 알지만
서랍 속에 넣지 못한 마음이 서성인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철이 지난 편지를 읽는다.

너에게서 온 이별 편지를
긴 장마가 걷히고
이제야 읽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

아직도 작은 꽃들이
집으로 가는
버스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버스 안에서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서 있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마다
이름 없는 이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어제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기꺼이 손을 흔든다.




모래성

삶이 더 낮아질 곳이 없다는 듯
사람들이 모래성을 쌓는다.
헝클어지고 지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성난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는
모래성을 쌓는다.

동그란 어깨에 내려앉은
무거운 그림자를 들썩이며
쉽게 떠나지 않는 상처 난 기억을
모래성으로 밀어 넣는다.

기억의 흔적들이 모래 사이에 파묻히고
가난한 노래 소리가
한 줌의 위로가 되어
파도와 어둠 속에서 밀려온다.
주인 없는 모래성이 아직 따뜻하다.




거꾸로 서기

어릴 때
집 앞 공터에 큰 구덩이가 파여 있고
거기에 거꾸로 박힌 기억이 난다.
어떤 아이가 구덩이에 들어가면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짧은 다리를 밀어 넣는 순간
몸이 거꾸로 뒤집혔다.
고요함 속에서 이상하게 두렵지 않고
공터 앞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하늘을 걷는 쉬운 방법을 알았지만 잊혀져갔다.
어른이 되어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거꾸로 서기를 해 보아야겠다.
한 번쯤 거꾸로 서기를 해보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던 기억을 해보려고 한다.
거꾸로 보면 희망을 있을 것 같다.








김 여 선

손수레ㆍ보리밥
유월 벚나무ㆍ오래된 책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고추잠자리
로드킬ㆍ물집이 잡히다

|시인의 말
거추장스럽게 하던
어금니가
빠져 나갔다
옹이가 빠진
뻥 뚫린 그 자리에
뜨끈한 핏물이 고인다
이 빠진 자리
시원한데 섭섭하다




손수레

때론
할아버지들의 청춘을 마신
빈 소줏병이 실리는
관절염을 앓은
아버지의 무릎처럼
삐끄덕삐끄덕
굴러가던 손수레
아침이면
팝콘처럼 터져나오는
감꽃들이 실린다

가끔
할머니들의 주름살로 접혀진
폐지들이 실리는
디스크를 앓은
어머니의 허리처럼
삐끄덕삐끄덕
굴러가던 손수레
저녁이면
배꽃으로 피어나는
별들이 실린다




보리밥

마당의 흙들도
벌겋게 더위를 먹었다
검은 그을음이
꼬깃꼬깃 물든 부엌에서
어머니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식은 보리밥 몇 덩이
양푼이에 담는다
거친 호밋날 같은 주걱으로
식은 보리밥을
찬물에 말고 있다
더위가 끝을 보이지 않을 때
후루룩후루룩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식은 보리밥
찬물에
말아 먹고 싶다






유월 벚나무

하얀 벚꽃이 눈부셨던 사월
봄을 시샘하는 편도선은
발갛게 부어올랐고
당신은 수세미즙 한 봉지로
벚꽃이 흩날리며 사라지듯
편도선을 가라앉게 했습니다

푸른 바다가 눈부셨던 오월
애기똥풀 슬픈 전설이 생각나던
죽변의 대나무 숲
오솔길을 걸으면
햇살은 푸른 버찌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꽃 피던 시절이 지나간 유월이면
도로 위로 떨어지는
까만 버찌를 바라봅니다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까만 그리움들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오래된 책

늦가을 저녁놀이
허물어지는 지붕 위에
부끄러움으로 쌓인다
쥐오줌으로 얼룩진 책상 위에
오래된 책 한 권 얹혀있다
사는 것이
정장 차려 입고
새 책처럼 바쁘게
출근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래된 책처럼
평상복 차림으로
한가롭게 외출하는 것도 아니다
가끔
오래된 책 속에서
빠져 나온 낱말들이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만들고
허기진 저녁이면
별빛들이 헤진 활자로 박힌다
피돌기를 멈춘 가을
낮은 바람에도 은행잎을 다 떨군
벌거벗은 은행나무처럼
오래된 책 속의 활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위태롭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고추잠자리

그도 한 땐
푸른 창공을 날았었지
반납함에 꽂히는 카드처럼
엘리베이터에 갇힌
고추잠자리 한 마리
포물선을 그리다가
각 진 구석으로 떨어진다

그도 한 땐
메꽃에 앉아 지친 날개 쉬었었지
삼베로 수의를 두른
투명한 날개
각 진 구석으로
흐름체로 미끄러지다가
내 손등으로 내려앉는다




로드킬

여름의 마지막
소낙비 내리고
더위의 지층이
한 꺼풀 벗겨질 때
건너지 말아야 했어
그 길은
그러나 건너야 했어
건너편으로
건너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지 모르니까




물집이 잡히다

굳은살이 밴 자리는
물집이 잡힌 흔적이다
새파란 날이 선
낫의 혀 끝에
베어져 나가는
풀잎들의 발목
낫질 몇 번에
검지에 물집이 맺힌다
벌초한 풀잎들의
거친 호흡으로
내 가슴에 무덤처럼
물집 하나 솟아오른다








김 윤 한

눈물 맛ㆍ냉이꽃ㆍ무지개 세탁소
놋대야ㆍ금지곡 시절ㆍ일요일은 쉽니다
감성촉진액ㆍ얼어붙은 강에 서서
오래된 시집ㆍ이팝꽃ㆍ마주 보는 거울
통일벼 시대ㆍ나는

|시인의 말
  시를 40여 년이나 써 왔지만 ‘왜 쓰는가?’ 하는 물음에
는 속 시원히 답변하지 못한다. 그래서 끙끙 생각해 낸
변명 같은 것이.
  모방 본능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다던가? 일리
가 있다. 시는 감정이나 사물 지각의 세계를 모방하기 위
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
기게 하는. 그 본능을 나름대로 ‘시꼴림’이라고 이름 붙여
본다.
  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로써
혁명을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칸트의 유
희본능설을 더 믿는다. 그것을 ‘시놀이’라고 명명한다. 시
인은 창조주이다. 이 세상 많은 것 중에서 말 하나하나를
선택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 참으로 대단한
놀이가 아닌가?
  그래서 시를 쓴다. 올해는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또 시를 쓰자.




눈물 맛

한 방울 눈물 속에는
한 사람의 온갖 사연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의 다른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 동안 흘린 눈물은 얼마나 될까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언제나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다가왔고
뒤돌아보면 길모퉁이 마다
투명한 눈물이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세월이 점차 흘러가면서
흘리는 눈물만큼씩 철이 들었고
눈물을 참는 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앞으로 흘려야 할 눈물은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면 눈물도 줄어들지만
짠 맛은 왜 여전히 변함이 없을까
그것은 단 한 사람
그 영혼의 바다에서 흘러내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방울이기 때문이다




냉이꽃

냉이는 겨울의 끝을 알리는 몸짓
뿌리가 잎보다 길다는 것은
그만큼 추위가 혹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체 봄은 오지 않았다
냉이를 씹으면 왜 겨자 맛이 나는지
아파보지 않으면 모른다

냉이꽃은 꽃이 아니다
궁핍한 시절의 아릿한 그리움이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난 것이다

그래서 냉이꽃 열매 속에는
오래된 기억들이 소복소복
씨앗이 되어 들어있는 것이다




무지개 세탁소

  층간소음 때문에 누군가 또 다투고 있었다
  사소한 일들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번질 수
도 있으므로
  그런 일만 없다면 굳이 이웃들을 알 필요가 없을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현명하게 살아가는 동안
  계절이 지나가고 있는 세탁소에는
  오늘도 낯선 옷들이 조금씩 시간을 두고
  갖가지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더러는 심하게 얼룩이 들기도 하였지만
  살다가 보면 더러는 그럴 수도 있는 것,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는 않았고
  서로의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들 함께 내려놓고
  드라이클리닝 약품 냄새를 함께 견디며 빨래통 안에서 서
로를 얼싸안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바람난 여자를 오히려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시샘하며 소
문을 퍼트리고 다니고 있는 사이
  건조기에서 나온 낯모르는 남녀들은 옷걸이에 걸린 채 밤
새도록 마주 안고 있었지만
  끝끝내 아무 소문도 나지 않았다
  살아온 과정은 다르지만 아픈 과거를 서로 다독여가며
  스팀다리미로 반듯하게 주름을 펴면 이웃끼리 다시 반갑
고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간의 동거가 끝나고 헤어지는 날이면
  다시 만날 시간을 기약하며 아쉬운 눈빛을 주고받곤 하
였다
  고가사다리 차가 이삿짐을 거의 내릴 무렵 갑자기 소나기
가 쏟아졌지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세탁소 낮은 지붕 위에만
  크레용으로 그린 무지개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놋대야

얼마나 간절하게 두드려져
비로소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아침이면 비누 향기 문지르며
물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게도 했고
수많은 빨래들을 온 몸으로 헹궈내기도 했다
달 뜨는 밤, 사춘기가 된 누이들은
붉은 꽃물 배인 천 조각을
남몰래 빨아내기도 했으리라
다른 유기들은 언제나 찬장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아주 가끔씩만 방으로 들어가
갓 태어난 몸을 씻어주기도 했고
굳어버린 망자의 몸을 닦아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외로워
모서리에 부딪칠 때면 핑계 삼아
징소리를 내며 조금 울기도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곁에 있었을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푸르게 녹슬어 있다




금지곡 시절

장발 단속 경찰관을 피해
가까스로 음악다방에 도착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여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으로 쌓아올린 성냥개비 탑 위로
담배 연기가 돌아다녔다
뮤직 박스에 신청곡 쪽지를 넣었지만
금지곡이 되어서 틀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허스키한 디제이가 이야기했다
대마초 가수들이 또 잡혀갔다는 뉴스가
흑백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화면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이
흑백으로만 되어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살폈지만
그 여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밖에는 눈이 오고 있는지
문을 들어서는 낯선 남자의 머리 위
흰 눈송이가 녹고 있었다




일요일은 쉽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언제나
시곗바늘에 발목이 묶인 채 살아왔지요
구르는 바퀴는 스스로 멈추지 못하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며
셔터, 버거운 무게를 잠시 내립니다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인지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일요일은 쉽니다
주어진 의무도 중요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할 자유도 소중합니다
넘치도록 가득한 찻잔은 이미 잔이 아니고
비어있을 때만 온전한 잔이듯
어쩌면 현관에 벗어둔 신발의 시간이
바쁜 일보다 중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노동은 더디고
가만히 있어도 휴식은 빨리 흘러갑니다
어느덧 저녁 뉴스도 끝이 나고
창밖으로 몰려오는 어둠 속으로
새로운 요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어쨌든 일요일은 쉽니다




감성촉진액

오늘도 건조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살수차가 지나가고 나자
사람들도 하나둘씩 불빛 빤한 주점에 모여
마른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서서히 화학반응이 시작되자
가난하고 피곤한 일상들도 스르르 녹아내리고
더러는 발아래에 무지개가 뜨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마시는 양보다 더 많은 눈물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것 말라있는 이 시대,
이처럼 소박한 반란이라도 있기에
아주 가끔씩은 세상이 평등하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죽지 않고
숨어있던 감성 불러내어 어깨동무한 채
건조한 세상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밤도 세상 반쯤은 술에 젖어 있고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도
가슴이 푸르게 젖어 있다




얼어붙은 강에 서서

은백색으로 얼어붙은 강
중학교 일학년 주먹크기만 한 새 한 마리
종종걸음으로 다니고 있다
멀리서 보면 한가로운 겨울 풍경이지만
얼음 쩡쩡 우는 혹한에 맨발로
미처 얼지 못한 숨구멍 속
물벌레를 찾는 서글픈 몸짓이었다
가끔씩 시린 발을 녹이려 조금씩 날기도 하지만
결국은 얼음 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쩌다 홀로 얼어붙은 강으로 나왔을까
삭풍을 막아줄 둥지는 있을까
깃털로 온기 나눌 가족들은 있을까
눈보라 속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아버지도
결국 새가 되어 홀로 떠났듯이
모든 것 얼어붙은 영하의 강에 서서 보면
세상은 결국 누구나 혼자서 가야 하는
고독한 길임을 다시 느낀다
그 사이에도 어김없이 해는 저물고
그제서야 새 한 마리 하늘 높이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사라진다




오래된 시집

세로쓰기 활자들이
초가지붕 끝 고드름이 되어
자꾸만 거꾸로 자라나고 있다
볕이 잘 드는 마당 기다란 빨랫줄에
남루한 시절의 빨래들이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아픔을 억누르며 꽃들이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풀풀 떨어지고 있다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
추락하는 폭포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련한 세월을 배경으로
빗물들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사이
어느덧 한 편의 시가 끝이 나고
오래 잊고 지냈던 그리운 슬픔 하나
마른 눈물 한 방울이 되어
투명한 마침표로 달려 있다




이팝꽃

흉년에 양식 떨어지고
환장할 뻐꾸기 속절없이 울어대는데
시절 잘못 만나
부모 잘못 만나
굶어 병들어 죽은 아이야
이팝나무 밑에 너를 묻고
가슴 속에 너를 묻고
북두칠성님 전에 손 모아 비나니
내년 봄 이팝꽃 흐드러지게 피거든
조밥 말고 보리밥도 말고
윤기 좔좔 흐르는 이밥 고봉으로 담아서
배 두드려 가며
원 없이 실컷 먹거라
허기에 식은땀 빠작빠작 흘려보면 알지니
굶어죽은 귀신들은 다 알지니
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도 없나니
밥보다 더 눈물 나는 꽃은
어디에도 없나니




마주 보는 거울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손짓하면 마지못해 함께 손짓할 뿐이었다
도대체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
하나의 거울 앞에
또 하나의 거울을 마주 세운다
거울은 거울을 비추고
또다시 거울 속의 거울을 비추고
아득한 우주로 가는 터널이
그 속에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은 그 근원은 볼 수 없고
그 허상만 볼 뿐이었다
우리가 거울이 되어 서로를 바라본다고
남들 모르는 숨겨진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을까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깊이를 잴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과 고요
아득한 터널과 마주하게 될 뿐,
거울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통일벼 시대

밥 지을 때가 되면 언제나
바가지로 항아리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흐드러진 이팝나무 꽃을 보면
눈앞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육영수 여사 운구차가
흑백 티브이 속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는 않았지만
통일벼를 심으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면서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4전5기 끝에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누르고
밴텀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그 해 가을에도 타작마당에
통일벼 낱알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푸석한 밥맛을 탓하기도 했지만
세월은 흐르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배고픔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한 시대의 눈물 나던 그 씨앗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쌀밥 먹으며 남북통일을 생각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통일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나는

백 년 전
나는 무엇이었을까

바람벽에서 떨어지는
한 조각 흙이었을까
독사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한 방울 물이었을까

꺼져가는 향불
그 마지막 온기로 남을까
홀씨 하나도 버거운
바람의 흔적으로 남을까

백 년 후
어느 봄날 오후쯤에는








김 지 섭

어디서였던가
이제 나는


|시인의 말
글밭의 품은 참 너르고 아늑하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시 두 편으로 함께 할 수 있다니……
이런 큰 덕 때문에 글밭은 무탈 장수할 수 있는가 보다.





어디서였던가

생시이듯 또렷한
분명 어젯밤 꿈이었다

빈 집에 홀로 남기고 온
복실이

북위 삼십육 도에서 남으로
남으로 다섯 시간을 날아온 길을

복실이 제가
날 찾아온 걸까

아니면 내가 북으로
북으로 꿈속길을 거슬러 올라가

홀로 집을 지키는
복실이를 찾아간 걸까




이제 나는

일흔에서 여든을 가로지르는
깊디깊은 저 푸른 강물을

무사히 건너갈 거룻배는
열 중 둘을 지나 셋을
넘기지 못한다는데

걸어온 길 너무 아득한
이 황혼녘

지상의 불빛 다 꺼지는 날
알 수 없이 다가올 그날까지

오직 저 하늘 별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손 모아 기다리자








김 진 택

文化鉛筆B芯ㆍ아직 무슨 할 말이
그 시간 · 1ㆍ그 시간 · 2
長江 片紙ㆍ南 九州 쇠고기 식당에서

|시인의 말
  우리의 ㄱ은 요즘 들어 신파를 쓰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쓸 때 소재를 비련이란 걸 쓴다.
  나이를 먹으면 입심이 강해진다는 말이 ㄱ의 경우에 비
하면 정말 맞는 말이 아닌가 한다. ㄱ은 했던 말을 다시
한다. 그 결과 시가 뻣뻣해졌고 내용은 지리멸렬해졌다.
어디선가 들었던가 보았던가 한 얘기를 두어 번 해 보았
다. 자기 변명같은 말이지만 창의성 넘치는 싯귀를 쓰지
못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런 얘기 하지 않아도 알 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제 우리의 ㄱ은 천학비재의 산 표본이 되었다.
  이번 시가 제 모습을 모두 갖추면 소주 한 병 품에 넣
고 강원도 한계령을 넘으려 한다.




文化鉛筆B芯

책상 위에 누워
새카만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코에 갖다 대면
먼 길 돌아서 온 애인의 머리칼 냄새같은
연필향나무의
추억이
묻어난다.

창밖은
자작나무 숲을 지나온
피부 흰 바람이
잠깐 숨을 고르고 있다.




아직 무슨 할 말이

깜장색 밤과 눈물 포도주가 가슴을 흐르는데
나 그대에게 드리고픈 말 이미 다 했어
봄꽃 피듯 솟아나는 그리운 목소리와 몸짓도 다 지나갔어
동풍에 쓸려가는 파도와 비구름.
기우는 저녁 해 밑으로 줄 지어 흐르는 기러기 떼도
이젠 보이지 않아
화려했던 삶의 문화사와 전설이 가슴에서 잊혀졌는데
왜 또다시 중심에서 멀어
진이에게
흐린 날 토요일 오후 한시 부근의 그림자의
의미를 왜 물어야 하는가
내려진 막 그 너머를
또 다시
궁금해
하는





그 시간 · 1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잘 때
이 곳 2층에서 신작로를 내려다보며
까페라떼를 마시네
요절한 가객의 노래가 흐르는 사이

거리는 다시 밝아지네
한 잔의 음료가 어두운 골목을 지나 위액과 뒤섞일 때
이등병은 사랑이란 이유로 수신인이 오래 비운 방의 주소로
편지를 쓰네
서쪽으로 난 보이지 않는 길 따라 희멀건 둥근 얼굴은 천천히 걸어가고
그 뒤로 참새 몇 마리
놀던 개들이 따라간 다음
그 도 빈방으로 돌아가 불을 때고
석유램프에 불 밝히려
나무계단 툭툭 밝으며
내려오네




그 시간 · 2

뉴 오따니 37층의 조망
펼쳐진 솔숲
해안 도로
북태평양이
밀려오는 파도가
좋아요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풀잎 이슬이라 하지만
따스한 커피가 놓인
탁자 앞에서
졸고 있는 ㄱ은
분명 도화유수의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늙은 ㄱ이 떠나고 난 바다는
그의 새끼들이 꼬물꼬물
헤엄치고 다닐 것입니다




長江 片紙

동정호수*
항아리를 부시는 여자
그 때가
가을바람이었나요
아니면
갈숲으로 지는 기러기떼였나요

여긴
밤 별들이 솔거해 떠나고
마냥 뿌우연
하늘입니다

화성시 반석로 232 번지는
풀벌레도 떠나고
마지막 남은 갈색 청개구리
도서관 뒤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서
폴짝 한 번 뛰었습니다

겨울이 깊어지면
궁평항에서 밤배 타고
서으로 노를 젓겠습니다.

* 작가 井上靖은 揚子江기슭에서 “손을 붉게 물들이며 甁을 씻는 여인들
이여 나도 역시 그와 같은 곳에서 그와 같이 내 글을 쓰고 싶다”라고 적었다.




南 九州 쇠고기 식당에서

크고 잘 생긴 소를 잡아설라무네
등심을 주먹만큼 잘라내어
철판에 올려
굽네

붉은 체액이 스르르 흘러나와
연기로 바뀌어 지는 시간
밥때마다 부엌을 내려다보며
이밥을 달라고 울었던 ㄱ은
기린표 맥주를 마시네

글밭표 시인들 중 장형은
메리치도 먹지 않는데

크고 잘 생긴 검정소를 잡아설라무네








김 진 회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1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2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3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4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5
겨울새

|시인의 말
  때론 홀로 차를 타고 가거나, 때론 홀로 멍하니 빈 하
늘을 바라볼 때 ‘왜? 시를 쓰는 걸까?’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하지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기도 하다.
  그건 내가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그건 내가 오늘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1

취기에 찬 얼굴이
소주잔같이 걸어 집으로 왔다.
푸욱하고 젖은 날
지랄같이 내리는 비 탓을 하며
물 먹은 수레처럼 울었다.

자식 두고 떠난 마누라가
비같이 원망스럽다가도
프레스가 먹은 손가락이 그리워지면
그년이 지랄같이도 보고 싶었다.

열네 살 딸이 차려놓은 저녁상에는
계란프라이가 올려져 있고
딸아이는 오늘도 터진 노른자처럼 울었나보다.

나는 물 먹은 폐지처럼 잠을 청하고
푸욱하고 젖은 날
날 떠난 손가락처럼 그년이 그립다.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2

아배는 도둑놈입니다.

그날
물기 빠진 실파같은 어매가
방 안에 누워있었고
어린 나는 파뿌리를 씹으며
섧게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날
집을 나간 아배는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어매는 방 안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는 파뿌리를 씹으며
팔지 못한 장물처럼 자랐답니다.

그런데 오늘
어매는 뽑힐 것 같지 않던
뿌리를 끌고
꼭 잠긴 창문을 열어둡니다.

이 밤 열려진 창으로
버릇처럼 그놈이 오려나 봅니다.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3

그의 힘겨운 젓가락질을 볼 때면
나의 걸음도 느려졌다.
아배는 그의 젓가락질이 못마땅한 날이면
술에 취해 어매를 때렸다고 한다.
그럴때면 반찬들 사이로 깊이
들어간 어매가 가여웠단다.

하지만 먼저 떠난 것은 어매였단다.
그는 힘겨운 젓가락질로 어매를 따라
뛰었지만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배의 젓가락에 걸려
술 냄새 진동하는 입 속으로 던져진 채
모질게도 참 모질게도 맞았단다.

그렇게 몇 년 아배가 가고
십 년이 넘도록 어매는 오지 않았단다.
어설픈 걸음은 모질게도 익숙해지고
그의 힘겨운 젓가락질도 살만은 했단다.
가끔 멋들어지게 닦아 놓은 구두를 보며
서럽기도 했지만 그는 오늘도
한 번도 신어본 적 없는
구두를 닦는단다.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4

그는 한 쪽이 푹하고 꺼진 어매의 가슴을
움켜쥐고 울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늙은 어매의 젖꼭지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집을 나간 스물 이후
그는 돈이 없어 떠나간 어매들을 보며
집에 두고 온 그리움 대신
더 많은 배를 타고 더 많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렇게도 이십 년이 흘렀건만
그가 탄 어떤 배에도
그가 만든 어떤 집에도
그의 얼굴이 마치 늙은 어매의 젖꼭지처럼
마를 때에도 이름을 새겨 본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서럽게
마치 어매의 젖무덤인 양
움켜쥐고 울었습니다.




그리움은 어느 곳에나 산다 5

K는 가난했다.
가난했기에 그는 그것들을 훔쳤다.
훔치면서 어떤 종류의 죄책감이
들었는지, 말해준 적 없기에
우리는 그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K를 아는 몇몇의 지인들은
잠깐 동안 K의 소유였던
물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회수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K가 형을 확정 짓는 기간 동안
언론들이 K를 과대 포장하는 동안
그는 손에서 떨림을 놓고 있지 않았다.
그가 한 번도 이야기 한적 없기에
우리는 그 떨림 역시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K의 지인인 나는 평소
K의 모습으로 보아
곧 하느님에게 회수될 딸이
들어 있을 거란 짐작만 할 뿐이다.




겨울새

시작부터 불완전한 비행
젖은 발을 동동 굴려 맺힌 눈물을 겨우 털어낸다.
차마 떠나지 못한 여린 것들이 지난 계절을 그리워하고
날개 짓이 서툰 어린 것들은 중력의 속도로 떨어진다.
유언 같던 포수의 산탄이 젖은 날개 여기저기에 상처를 낸다.

남겨진 죽은 자들에 대한 미련을
발끝에 조금 새겨두고 떠나는 일은
계절이 시킨 일,

잘 있어라, 심장이 얼어버린 나의 씨방새들.








임 관 혁

풀밭에서ㆍ오월의 광주ㆍ그림자
귀향ㆍ바람 앞에ㆍ그대 빈 가슴에ㆍ매미
살아가면서ㆍ통영 바다ㆍ가을
비 오는 날ㆍ엄마꽃(2)ㆍ봄날

|시인의 말
노귀재에 뜨고 지는 그 달빛, 그 별빛
눈 속에 담아 내 가져 갈래
내 가는 날에……




풀밭에서

밤에도 어두운 밤에도
이슬 맺히는
풀도 보았노라

오르는 떠오르는
햇빛살에 이슬 마르는
풀도 보았노라

밟히고 밟혀
상처 입은
풀도 보았노라

짓밟히고 짓밟히며
죽어가는
풀도 보았노라

목마르고 목말라
타 죽어가는
풀도 보았노라

뜯기고 뜯기어도
살아 꽃피는
풀도 보았노라

짤리고 짤리어도
살아남는
풀도 보았노라




오월의 광주

시청 앞
분수대의 물은
멈추었지만
아픔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았다

최후의 아우성
금남로에 누웠어도
그 메아리
오늘도 안개 속에
봄피리 소리로 들려오누나

오월의 광주여
슬퍼말지어라

천만 년 이 땅에
그 이름 길이 남으리니
대대로 이 땅에
그 아우성 이어 지리니




그림자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습니다.

아픈 그림자도
슬픈 그림자도
괴로운 그림자도
허무의 그림자도
웃음의 그림자도
걸어온 길 따라
그림자는 늘 있었습니다.

구름 속에서도
바람 속에서도
햇볕 속에서도
비속에서도
그림자는 늘
앞뒤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귀향

노귀재에
뜨고 지는
그 달빛
그 별빛
눈 속에
담아 담아
내 가져 갈래
내 가는 날에,




바람 앞에
봄바람에
잎은 흔들리고

샘바람에
꽃잎은 떨어지고

비바람에
꽃은 지더라

바람 앞에
부는 바람 앞에

잎은
꽃잎은
꽃은
거저 한 잎
낙엽이더라.




그대 빈 가슴에

개나리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붓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달맞이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해바라기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참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장미꽃을 심을까
그대 빈 가슴에

나는야
피고 지는 꽃이 서러워
보기 서러워

차라리 무화과를 심을래
그대 빈 가슴에




매미

운다
푸른 고추 익으라고
매미가 운다

바람도
땡볕에 타버린
한낮

목이 쉬도록
목이 터지도록

귀가 먹도록
먹보가 되도록

운다
푸른 석류 익으라고
매미가 운다

하늘도
땡볕에 목타는
한낮

푸른 고추가 익어간다
푸른 석류가 익어간다




살아가면서

큰 상처만 상처입니까
작은 상처는 상처가 아닙니까
꽃밭꽃만 꽃인가요
들꽃은 꽃이 아닌가요

꽃밭꽃도 꽃이듯이
들꽃도 꽃이듯이
상처는 상처입니다

더 아프고 덜 아플 뿐
피나고 피나지 않을 뿐
멍든 상처도
상처는 상처입니다

살면서
살아가면서
상처는 주지 말고 살아야지요
살아가야지요




통영 바다

물은 푸른 빛
그대로였네

스무 살 때나
마흔 살 때나
일흔 살때나

통영 바다
그 바다는
그 물빛 그대로였네

내 머리에 서리꽃 피고
아픔의 골이 깊어지고
눈물이 나도

통영 바다
그 바다는 그 물빛
그대로 출렁이며
푸른 빛
그대로였네




가을

가을
갈잎에 흔들리다가

가을은
갈잎에 물들이다가

가을은
갈잎에 휘날리다가

가을은
갈잎에 떨어지다가

가을은
갈잎에 덮히다가

가을은
갈잎에 묻힌다





비 오는 날

보낼래
보낼래
흘러 보낼래

비 오는
비 소리에
빗물 속에

묵은 때
헛거품
남김없이

보낼래
보낼래
흘러 보낼래




엄마꽃(2)

이보다 먼저 본
꽃은 없어라
이 눈에

이보다 먼저 불러본
꽃은 없어라
이 입에

이보다 더 많이 불러본
꽃은 없어라
이 땅에서

이보다 더 그리운
꽃은 없어라
달빛 아래서

이보다 더 고운
꽃은 없어라
별빛 아래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없어라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꽃은 없어라
이 하늘 아래서

이보다 더 사랑의
꽃은 없어라
이 천지에




봄날

소쩍새 울어 울어
봄날은 오고

소쩍새 울어 울어
봄날은 가고

소쩍새 울음 속에
꽃은 피고 지더라








임 두 고

붉은 여름ㆍ언덕
스마트폰ㆍ조시(弔詩)
놀이터ㆍ입 가벼운 보석
시간 또는 여행에 대하여

|시인의 말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아도 찾고 또 찾다 보면 어느
사이, 별이 별을 불러내 별들이 한꺼번에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경험과 마주한 적이 있는지. 이 가을, 도무지 메마
른 시심으로 시를 찾을 수 없어 몇날 며칠 여백 속을 들
여다 보고보고 하다가, 불현듯 시행이 또 다른 시행을 불
러내는 전율의 순간을 맛보게 되었다. 시작(詩作)의 시작
은 절반이 아니라 전부, 아니 흘러넘침이라는 진실을 새
삼 깨달으며 무명 시인으로서의 시작의 자세를 다시 다잡
아 본다.




붉은 여름

보들레르를 읽는 여름 내내
내 동공의 거울 앞을 서성대며
붉디묽은 욕망의 달거리를 하거나
쇄골 같은 꽃대를 훤히 드러낸 채
붉디묽은 입술을 바르고 옷매를 다듬는
칸나여, 장미여, 사루비아, 배롱꽃이여.

그보다 더한 눈빛으로, 살결로
내 온 몸에 농염의 향수를 뿌리며
천만 가지 몽환의 꽃을 피워 올리는
한 여자의 입술이여, 목선이여, 가슴골이여
골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허벅지까지.
아내가 있는 남자의 가슴에
꽃봉오리로, 꽃다발로 부풀어 오르는 여자는
악의 꽃.*

팽나무 열매가 노랗게 익었다가
다시 새까맣게 말라가는 시월이
꿈결인가 싶은데
떠나버린 여자의 종적 같은 바람길만
산지사방에 어수선한 뿐.
일상마저 낯선 길목 어디쯤인지, 나홀로,
덩그렇게 내팽개쳐진 한 그루 시 나무가 되어
작은 바람결에도 후드득 뼈아픈 시가
눈물져 내린다.

내 온 여름을 붉게붉게 물들여 놓고
이제는, 영영 추억의 꽃갈피로 남은 한 여자.
그녀는 진정 내가 사랑한 여자였는지, 꽃이었는지.
아니면, 보들레르의 시였는지.

* 악의 꽃:‘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제목.




언덕

외롭거나 괴로울 때면 담배를 피기도 하는
내 직장 울타리 너머 둔덕진 속에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네.
늘 스스럼없이 나를 품어주는 그 언덕에서
나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도 하고
증오스런 너를 기꺼이 용서하기도 했네.

돌아보니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 아내도 모두 언덕이었네.
말썽 많은 내 잘못을 헛기침으로 나무라시고
특별한 날의 귀가 길에는
쌈지 속 눈깔사탕 몇 알로 나를 어루만지시며
언제나 그 모습 그 자리에서
넉넉하게 침묵하시던 내 아버지.

삼시세끼 보리밥을 간장, 된장으로 비벼 드시고
구멍이 숭숭한 내의를 입으시면서도
어쩌다 집을 찾은 나에게
공부하면서 자취 생활하기도 서러운데
잘 먹고 잘 입어야 한다며
꼬깃꼬깃 속주머니 돈을 깡그리 내어주시고
내 아들보다 잘난 아들이 어디 또 있느냐며
소문을 퍼뜨리듯 아들 자랑으로
온 동네를 주름잡으시던 내 어머니.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내어주시던
마술 같은 내 아버지, 어머니의
그 넉넉하고 신비로운 품의 언덕은 다시없지만,
밤을 새워 기원에서 바둑을 두다가
퀭한 눈으로 기어드는 나를
미쳤다, 미쳤다, 하면서도
밥과 잠을 챙기며 건강까지 염려하는
아내라는 언덕이 내게 또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외롭고 쓸쓸한 밤이 눈보라처럼 밀려온다 해도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스스럼없는 언덕,
내 아내가 펼쳐 놓는 그 아름다운 둔덕길을
오르내릴 수 있다면
세상만사를 다 내려놓으리.




스마트폰

텔레비전 앞에서 거의 바보가 다 된 인간이
모든 것을 훔치거나 빼앗아 삼켜버리는,
아귀 같은 스마트폰 앞에서 완전 바보가 되었다.

길을 가면서까지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에 빠진 인간들은
청력을 도둑맞고 시력을 도둑맞아
들리는 것도 못 듣고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는
길거리의 귀머거리, 청맹과니가 다 되었으며

방안에 틀어박힌 채 손가락만 까닥여
돈 거래를 하고, 쇼핑을 하고, 서류를 떼는 사이
인간들은 이미 자폐 증세, 치매 증세가 심각해
스마트폰 세상 밖 현실적 시공간과의 대면을
오히려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스마트폰 세상 속에 피는 웃음꽃에
무슨 향기가 있으며
스마트폰 세상 속에 출렁이는 눈물바다에
무슨 소금기가 있으랴.
미각과 후각과 촉각은 마비되고

시각과 청각만 비대한 스마트폰이
인간들의 눈귀가 되고, 손발이 되고,
두뇌와 가슴이 되는 사이,
우리들은 그저 보고 들으며
서둘러 말할 줄만 알았지,
정작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깊이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법은
까맣게 망각하고 만 셈.

필요한 것보다 불필요한 것들로 넘쳐나는
스마트폰 속 세상은
이미 정보의 쓰레기 하치장.
굳이 소통할 이유도 없는 먼 사람들을 불러내어
공허한 수다의 시간을 메우느라
정작 면전의 사람에게는
대화는커녕 시선마저 외면해버리는
배려도 사랑도 모르는 인간들이 어디 인간인가.
걸신들린 흡혈의 스마트폰에
뜨겁고 신선한 피를 다 빼앗겨버린
냉혈의 인간기기, 로봇일 뿐.




조시(弔詩)
­장인어른의 영전에 부쳐

임서방 왔는가.
한결 같던 장인어른의 그 목소리 그 눈빛
아직도 내 가슴에 청청한데
앞 마당가 감나무에 내걸린 홍시도
뒷곁 밤나무 밑에 떨어진 알밤들도
그냥 두신 채
마을 어귀 느티나무보다 한참 젊은 나이에
이렇게 황급히 눈빛을 거두고, 목소리를 거두어
우리 곁을 떠나십니까.
칼을 그리고 새를 그려주던 그 종이로
배를 접어 띄우거나 비행기를 접어 날려주던
어린 시절 내 아버지처럼 인자하고 소탈해
늘 격의 없이 대해 주시던 장인어른.
안동소주 한 병 차려 올린 술상만으로도
최고의 대접이라 여기시던 생전의 당신이었건만
술 잘 못하는 사위라
그마저도 자주 못한 게 못내 가슴 아프지만
이제사 돌이켜 어쩌지 못하니,
못난 시인 맏사위, 이렇게 영전에 조시를 써 바치며
기꺼이 내 아내로 허락해 주신
당신의 딸을 내내 사랑하는 것으로
당신에게 다 못한 도리를 마저 하려 합니다.
이제, 이승의 짐을 다 내려놓으신 장인어른.
남천 장미공원의 푸른 숲을 날개 삼아
새로운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
편히 영면하소서.




놀이터

놀이터가 놀고 있어요.
간혹 바람이 그네를 타거나
빗물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릴 뿐
아이들 하나 찾아 주지 않는
놀이터는 늘 혼자 놀고 있어요.

툇마루나 골목길이 비좁도록 몰려다니며
내 온몸이 미어터지도록 시끌벅적거리던
코흘리개 그 많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층층 벌집 같은 도시 아파트의 주인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부터
동무란 말이 사라져 버리듯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내 품에서 종적을 감췄어요.

산아제한이 인구 붕괴의 전진이었다면
독신주의, 저출산은 인구 대지진의 본진.
하루빨리, 흔들리는 청춘이 붕괴되기 전에,
독신의 삶을 청산하고 아이들을 낳아 길러요.
왕따처럼, 백수건달처럼,
빈둥거리는 외로움에, 세월에 지쳐
놀이터인 나는 더욱 낡고 녹슬어만 가는데
주차장이나 건물터로 용도폐기 되기 전에
제발 아이들을 내 품에 다시 돌려줘요.

나라의 미래를 점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놀이터를 살펴보는 것이라는데,
갈수록 외진 곳으로 밀려나면서
아이들 손길 하나 거두지 못한 채
혼자 놀고 있는 내가 바로
인구 절벽, 그 천 길 낭떠러지의 예후가,
이미 와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랍니다.




입 가벼운 보석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더욱 인기를 누렸다는
18세기 프랑스 소설가 드니 디드로는
여인들의 은밀한 부위를 입 가벼운 보석에 빗대어
세상에, 여인들은 입이 두 개라서
결코 정숙할 수 없다는 진실을 폭로하며
신성의 감옥에 갇혀 있던 성담론의 물꼬를
비로소 뜨겁게 텄다고 하고,

뒤이어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즈도
어느 소설에선가,
보석 반지를 입 가벼운 보석, 다시 말해
입이 가벼워지는 보석으로 빗대어
고결한 보석처럼 간직하는 여인들의 몸과 마음도
보석 반지의 물욕에 쉽게 허물어지고 마는,
당대 여인들의 천박함을 꼬집었다고도 하는데.

디드로와 디킨즈의 이 입 가벼운 보석의
중의적 함의가 음란하기에 앞서
참으로 시적이고 철학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20세기 불세출의 철학자 미셀 푸코도
삶의 도처에 기생하는 미시 권력을 읽어내며
뜨겁게 달아오른 현대의 성담론을 빗대어
입 가벼운 보석이라 명명했을 터.

뒤이어 21세기 무명 시인 임두고가 첨언하기를,
입 가벼운 보석이 어디 그 뿐이랴.
사람을 가장 좋은 안주로 삼는
술잔은 또
우리들의 입을 얼마나 가볍게 만드는 보석인가.

곱씹을수록 혼란스럽고 씁쓸하여라.
문학과 예술과 현실 속에 끊임없이 도발하여
흘러넘치는 성들은 다 어찌하고
너희 개인들의 일상에서는 눈감고 입 닥치라는
어처구니없는 이 시대의 성희롱이라는 단죄가.
대저, 이 시대의 성은 신성의 감옥에서
인성의 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인가.*

* 입 가벼운 보석:1748년에 출간된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드니 디
드로>의 생전 발간된 유일의 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입 싼 보석들’(고려
대학교 출판부)로 번역 출판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술탄(망고귈 왕)은 정
치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특별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정령(퀴쿠파)을 불러
내 궁정의 여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한다. 이에 정령은
술탄에게 보석 박힌 은반지를 주며, 이 반지를 끼면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고 반지의 보석 부분을 특정한 여인 쪽으로 향하면 “여인들의 몸
에서 가장 솔직하고 자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
체 부위, 그녀들의 보석을 통해서 털어 놓을 거야”라고 말한다. 이로써 술
탄은 많은 여인에게서 다양한 진실을 얻어 들으며 여자들이 결코 정숙하
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후에 디드로는 이 소설을 쓴 것에 대해 부끄
러워하며 평생을 두고 후회했다고도 함.




시간 또는 여행에 대하여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부재의 시간. 지금이라고 하는 순
간, 이미 조금 전으로 돌변해버리는 현재 또한 스쳐가는 순
간의 불꽃처럼 소진되고 마는, 부재의 시간이기는 마찬가지.
엄연히 실재하는 시간은 이미 소진된 현재의 재 같은 과거
뿐. 산다는 것의 의미가, 인생이라는 것의 가치가 현재나 미
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시간의 토양에서 수확되는 것이라면,
가장 비옥한 삶의 경작지는 추억이며, 가장 비옥한 추억의
경작지는 여행일지니, 여행을 떠나라. 어느 자식의 아버지이
고, 어느 부인의 남편이고, 어느 직장의 직원이고, 어느 아
파트의 주민이고, 어느 동호회의 총무이고……. 닳고 닳아
너덜너덜한 일상의 그 모든 가면들을 다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와 마주서는 여행은 나이아가라 폭포 앞. 아니, 나이야 가
라는 환호가 쏟아지는 폭포 앞이다. 모국어를 버린 온몸에
비늘처럼 번쩍이는 오감의 낚싯줄에, 몽마르뜨 언덕이 등을
드러내고, 마추피츄의 잉카제국이 입을 벌리고, 붉은 광장의
깃발이 펄떡거릴 여행을 떠나라.








조 용 식

그 릇
여 름 밤


|시인의 말
소백산 단풍이 바람에 섞여서 날라 왔다
하늘우체통에 넣은 것이
잘못 배달된 것일까
단풍 든 엽서 한 장으로 온 방안이
가을물 들었다
오매 단풍 들겠네

정한이 깊은 밤
하얀 서리 내리면 이도 시린데…

이즈음 콩가루 묻힌 시레기국이 생각날 때이다




그 릇


빈 그릇
구름 하나
그냥

자세히 보면
아무 것도 없이
맨 바닥만 보여

처음부터 그릇은
비어 있었나


달을 삼키고도
모른 체하는 버릇

두드리면 달 소리가 난다
청랑한 소리
빈 그릇

배부르면 날 수 없는 소리
그릇 속에 무엇이 있나
없나


감출 곳도 없는
가난한 그릇

구름만 먹어도
배부르더니
문득 바람 한 바퀴 돌아나가고
이내
그릇은 터엉 비었다

다시 구름 뜨기를
사흘 밤낮을 무료하게
기다린다

이참에
빈 그릇은 깨버려야 하나




여 름 밤

귀먹은 산새가
기웃거리는 산사

됫박만한 방에
등짝을 붙인다
이런 저런 눈치 볼 것 없이
난닝구까지 활활 벗고
맞바람이 통하도록
창문까지 내민다

형광등을 끄고
달빛을 모두 불러들인다
돌개바람이
텐트만한 빤스 속까지
휘휘 젖고 있다

갈비뼈를 간질이며
빠져나가는 달빛
으히히히

훔쳐갈 것도 뺏어갈 것도 없고
물말은 밥에 풋고추라도
한 끼 때웠으니
이제 바로 죽어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 않아
가장 큰대자로 누워
창틀에 별을 오려 붙인다

낮에 먹은 물밥에
풀방귀 푸르릉 빠지면서
내 곤고한 하루는
퇴침을 모로 세우고
코를 탕탕 곤다

배곯은 목어도
입을 떠억 벌린 채
길게 코골며 잔다








천 승 현

빈 자리
먼 길


|시인의 말
그리운 것은 걸어 두는 마음으로
사무치는 것들은 접는 마음으로
기타 하나 들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기차도 타고 교통이 불편하면
운전을 하기도 하면서
길가에 흩어진 온갖 세상들이
차창 너머로 쏜살같이 지나는 것도 보고
느릿한 시간들도 만나며
그런 자유를 노래한다




빈 자리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바람 몇 번 불어오자
가지 끝에 달려있던 봄이 폈다
비 몇 차례 지나가자
수줍게 웃던 꽃이 졌다
오가는 계절의 기억은
한 십 년쯤 흘렀나 싶었는데
육십갑자 훌쩍 지나갔다

봄이 몇 번인가
더 돌아오고 나면
그 자리에 나는 없겠지




먼 길

먼 길 걸어와
이 깊은 밤 잠 못 들고
어둠속에 육신을 빌어
앉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걷고 또 걸었다
다녀가는 바람 햇살에
시절은 흘러가고
온전한 걸음으로
온전한 길로
걷고 또 걸었다 싶었는데
어둑한 저녁
돌아보니 이끌어온 모든 길은
섶이었다

밤이 움직이는 소리에
홀로 눈을 뜬
나는 누구인가









∥특집∥­이 계절의 시인

글이 도피이자 치유라면 시 또한 치유이자 도피다.
시를 통해 방전되고 싶었고, 허탈해지고 싶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위발 시인
∙1959년 경북 영양 출생.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
∙현재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바라보기

쪼그려 앉아 바라보면
주변 풍경이 달라 보이듯
건널목 앞에 기다리며
멀거니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신호등 쳐다보는 마음이
조급해지진 않았는데
나와 상관없다던
담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아카시아 향기는 숨어 있던
도둑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 향기에 취해 두리번거리는 사이
강을 따라 올라가던 유람선이
꽃상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동네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입간판이 우울해 보이는 것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이지만
작아서 보잘 것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있어도
모른 척 시치미 떼고 느끼는
감정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늘 가까이에 있는
앉은뱅이꽃도 보지 못하는




적요에 눈을 뜨다

  그대 안에서 몸을 열었던 단청 위로 다시 안개가 내립니
다. 일상의 조각들을 그대로 묻어 둔 채, 아득히 멀어져 가
는 풍경의 울림이 꼬리를 물고 새벽하늘과 맞닿을 때, 그대
의 눈에선 하늘로 향하는 산 너울이 꿈틀거립니다. 닿아 있
는 그 자리에서 수평선은 적막으로 굳어가겠지만, 익사한
혼돈은 희뿌연 가루를 둘러 쓴 서리처럼 상처를 덮어준 채,
가시나무에 손발이 베여도 도마뱀처럼 사지를 뒤틀며 절벽
의 탑 위로 올라갑니다. 시간의 바람이 그대를 스쳐지나가
도 시선은 시간의 적요에 눈을 뜹니다.




인생

오늘을
괄호 안에 넣어보고
풀어보고, 지워보고
내일을 위해 찝쩍거려 보지만
낮달 말뚝에
박혀 있는 소 한 마리
소의 목엔 올가미가 걸려있고
그림자는 올가미 끈이
베푸는 괄호까지만
돌고
돌고 도는데




상주의 미소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
밤의 속도는 너무 느리다
눈먼 가로등은
두 팔을 벌린 전봇대를
보지 못하고
빗자루 같은 가로수는
달이 사라진
하늘만 쓸고 있는데
가든지 서든지
쉼 없이 깜박이는
황색의 신호등은
내 눈을 닮았다
 
상주의 얼굴만큼
문상객들로 넘쳐나는
어둠을 넘긴 영안실
아버지와 동거한 지 일년
안고, 닦고, 치우고,
딱 하루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을 강조하며
그 냄새, 그 향기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고
하늘나리꽃을 닮은 상주는
지금도 아버지 등에 업혀
미소 짓고 있다




그림자놀이

당신은 그림자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와
내 가슴에 깊숙하게 드리워 놓고
내보다는 당신 그림자가 더 황홀하다고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보려고 하지만

연꽃보다는 연꽃의 그림자가
대나무보다는 대 그림자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림자는 숲 뒤편에 있고
향나무가 디디고 선 뜰아래에 있고
강물에 있고 내 마음속에 있고
그림자 속에 달이 있는데…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겨 봐도 옷 젖는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 푸른 산을 걸어 봐도 다리가 아픈 것은 아니지만

상처에 상처를 내면 상처가 아니듯이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물처럼 잡히지 않고
때론 부드러워
미끄러지는 바다가 있다
가슴을 열면
팽팽한 가야금 현이 되어
돌처럼 무겁던 귀가
어느새
동백꽃으로 열리고
내가 만났던
파도를 닮은 사람들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떠돌이 개
갈매기를 삼킬 듯이
솟아오르던 붉은 등대
청어처럼 누워 있던
등푸른 방파제
적당한 바람과 넉넉한 햇살로
소설 속 첫 문장처럼
잘 버무려진
그곳에 가면
아직도 남아있는
마지막 여분의 미소




복사꽃

복사꽃이 풍기는 요요작작한 기운 때문에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음탕한 무녀들에 둘러싸인 것 같은
이승과 저승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네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세상은 수백 만 마리 벌들이 잉잉거
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아기 울음소리로 들렸네
그 소리에 바닥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정신의 射精을 하고 말았네




애월에서

길을 걷는 다는 것은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애월담 등나무 사이로
몰락하는 붉은 해가
더 슬퍼지는 것은
술잔에 떨어지던 달의
전설 때문이라고
석양에서 온 풍문이
낮달처럼 가슴으로 파고들면
당신을 위해 눈물을 적시고
있는 그대는
이백의 그림자인가




그대 떠난 빈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 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어주는 언어전도사

박형준(시인ㆍ동국대학교 교수)


1.
  이위발의 두 번째 시집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그의 첫 번째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엠블라, 2014)을 틈나는 대로 천천히 읽었다.

  나는 시인들에 대한 글을 쓸 때 그들이 쓴 산문을 즐겨 읽는 편이다. 시가 말하지 않은 것을 산문은 말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은 시에 자기 내면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는다. 서정시는 대상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인 것 같지만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언제나 시인의 감정은 시인의 편에서가 아니라 대상의 편에 의해 통제된다. 우리는 그 대상을 사물이나 사람 또는 자연이라고 말해도 좋다. 사물이나 사람 그리고 자연 역시도 그저 평온한 아름다움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부딪치는 가운데 존재한다. 그것들은 기계처럼 인간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종당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방팔방으로 툭 터져 있는 외경감으로 관광객의 찬탄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 사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은 관광객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와 부딪히면서 거기서 파열하는 생의 드라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시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는 사람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나 시인은 시에 자기 말을 다 담지 못한다. 이런 예를 잘 보여주는 시로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를 들 수 있다. 이 시는 두보가 오십 줄에 접어들어 간신히 초당 하나를 장만했는데, 그만 이 초당이 가을바람에 부서지고 말아 시인 자신이 밤새도록 내리는 비에 온몸이 생쥐처럼 젖고 있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날이 훤하게 샐 무렵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시가 마무리된다. 비록 자신의 초가집이 부서지고 말아 당장 얼어 죽더라도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고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덮어줄 우뚝한 그런 집을 어디서 얻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천하를 떠돌다가 간신히 오십 줄에 마련한 초당이 무너졌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마는, 그런 초당이 바람에 무너지고 비에 온몸이 젖는 순간에도 나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하는 것이 서정시에서의 시인의 감정인 것이다. 서정시는 그러므로 자기 위안과 감정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대상에 자기감정을 조금 얹을 뿐이며, 그를 통해 자기가 아닌 대상 곧 나 아닌 것의 존재성을 부각시킨다. 이위발의 산문집에서 볼 수 있는 정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중 산문집에서 책의 순서대로 몇 대목 뽑아본다.

  ① 꽃을 바라볼 때 자세를 낮추고 보면 꽃술, 꽃잎, 색깔, 모양, 냄새, 움직임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면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몸을 낮추고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27~28쪽)
  ② 상상력이란 ‘세상과 사물을 맺어주는 비밀스러운 끈’일 수도 있고, 새로운 발견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인문학자인 질베르 뒤랑이 ‘상상력이 이성보다 힘이 세다’라는 명언을 남겼을 정도로 삶에 있어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상상력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139쪽)
  ③ 고향은 과거와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의 시간과 줄긋기를 통해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끈은 이음만이 아니라 끊어짐일 수도 있기에 더욱 애절합니다.(「시는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이다」, 177쪽)
  ④ 시인의 길은 타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시어로 치유해 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때론 친구가 되고, 누이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모가 되어 시어로 사랑을 나누어주는 언어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 234쪽)

  산문집에 나오는 위의 문장들에서 우리는 이위발의 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①에서는 몸을 낮추면 사물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 ②에서는 그렇게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것, ③에서는 고향의 발견 역시 내 자신의 기억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과의 무수한 줄긋기를 통해 이음과 끊어짐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
욱 애절하다는 것 ④에서는 위의 과정을 통해 시인의 길이란 타인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 타인과 함께 아픔을 앓아야 한다는 것. 이를 통해 시인은 시어로 사랑을 나누어주는 언어전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등 말이다.

  이와 같이 산문집을 보면 시인이 왜 이번 시집에서 치열한 실험정신 대신 고향이나 치유적 상상력 등에 눈길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의 말에 잘 드러난다.
“존재적 욕구로부터 멀어져 해체해 놓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대상에 대한 동일성이 회복되기만 바란다./ 나의 정체성과 그 증거를 위해/ 말들이 성성한 이 시대에/ 하나의 또 다른 의미의/ 나무이길…” 이러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첫 시집과 이번의 두 번째 시집의 차이점을 엿보게 된다.

  이위발의 첫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생각하는 백성, 2001)은 고향을 떠난 자의 비극적인 도시 체험을 산문형식으로 드러낸 시집이다. 도시에서는 고향의 언어가 상실된다. 그렇다면 고향에서의 언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노래의 언어이다.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과 사물의 정서와 시인의 정서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으며 행복한 일치를 이룬다. 때문에 자연의 리듬과 시인의 리듬은 상호 간에 불협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도시의 언어는 자연의 배제를 통해 발생한다. 따라서 언어는 그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존재성을 잃고 맥락에 의해서만 간신히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성은 도시의 언어 사용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위발의 첫 시집은 고향을 떠난 자가 고향이 지니는 가치와 그 존재성을 극단적인 산문성의 언어에 의지해서 탐문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러면서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시의 연극성은 자신의 시가 결코 ‘고향이라는 질서’를 벗어날 수 없지만, 지금 자신의 삶의 토대가 도시라는 공간에 있으므로 ‘고향이라는 거울 바깥의 공간’인 언어로 세계와 치열하게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도시체험 기록을 모노드라마라는 일인극 형식의 실험으로 드러난다. 이때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시의 산문성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거를 무화시키는 도시의 ‘시뮬레이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산문성을 통해서만 간신히 고향과의 연결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자의 비애의 형식인 것이다. 이것이 “직업도 재산도 없는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이 가엾은 시인”(「마지막 휴머니스트」)이 택한 연극성의 실체이다. 즉, 도시에서 끊임없이 “떠남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면서도 고향을 향한 “시의 가슴이 가슴으로 남아 있는 한”(「그대는」) 자신의 시가 “시어의 공간”, 즉 고향이라는 노래의 언어에서 벗어나 도시라는 산문성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근거이다. 도시에서의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노드라마이기에 오로지 자신이 자신에게 연기를 해야만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며 자기라는 존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 의해 조롱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으로 알 수 있다. 그가 첫 시집 자서(自序)에서 왜 할아버지에게 이 시집을 바치는지를. 아침이 되면 의관을 갖추고 정좌를 하고 사서오경을 읽으며 사랑방에서 제자들을 기다리던, 그래서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마지막 선비의 길을 걷다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에게 말이다. 그의 첫 시집은 말하자면 고향을 떠난 자가 탈향에 의해 세계와 부닥치게 되는 온갖 역정을 산문성의 언어로 드러내면서, 그 파열의 언어 곧 모노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안간힘을 다해 고향과 연결되고자 하는 자의 정직하고 눈물겨운 한판의 가엾은 꿈이며 연극인 것이다.

  이러한 첫 시집을 출간하고 난 뒤 약 15년 만에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을 내게 되었다. 그 사이 그는 다시 고향 안동으로 귀향을 하고 산문성의 언어 대신 다시 노래의 언어로 돌아왔다. 그 사이 그의 삶의 이력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그의 산문집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산문집 여기저기에 나타난 것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오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성장기를 보낸다. 성년이 되어 15년 동안 여기저기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마지막 직장인 출판사가 1997년 IMF로 인해 폐업되면서 생활의 밑바닥까지 간다. 그 이후 가정사의 아픔이 겹치면서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첫 시집 자서에서 할아버지를 언급했듯이 전형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안동과 할아버지의 품에서 문학의 꿈을 싹 틔웠다고 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향은 도시에서의 삶에서건 귀향하고 난 뒤의 삶에서건 그의 중요한 시적 탐구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다소 멀리 돌아온 감이 있지만, 위와 같이 그의 산문집이나 첫 시집을 참조하면서 그의 시적 세계와 삶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째 시집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2.
  시인은 두 번째 시집에서 ‘시인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제 ‘해체’보다는 ‘회복’을 지향한다. 타인의 안으로 들어가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언어전도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즉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대상에 대한 동일성”이 이 시집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큰 틀에서 연시(戀詩)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그대’, ‘상처’, ‘쓸쓸함’, ‘별리’ 등 연인과의 사랑을 암시하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사랑시’라고 해서 꼭 개인적 감성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엘뤼아르가 쓴 시 「자유」는 시와 진실(1942)이라는 시집 속에 들어 있는 시인데, 이 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점령하에 있던 시기에 쓰여진 시이다. 엘뤼아르를 일약 세계적인 저항시인으로 유명하게 만든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데, 이 시 마지막 연의 한 마디 말 ‘자유여’를 부르기 위해 4행이 1연으로 된 20연의 장시이다. 그러면서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이라는 반복구가 되풀이된다.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과 갈망이 전체 시를 뜨겁게 지배하고 있는 이 시는, 원래 맨 처음 원고에서는 ‘자유여’라는 부르짖음 대신에 엘뤼아르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이름인 ‘뉘쉬’로 쓰여 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비행기가 독일 점령군 하의 파리 상공에서 삐라로 뿌리기도 했다는 이 정치시가 사실은 연애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보듯 연시가 정치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위발의 두 번째 시집에서 연시 형태를 띈 사회참여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시집의 첫 시를 여는 「그대 떠난 빈자리에」와 마지막 시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에서 우리는 연시의 형태로 사랑과 사회적 아픔을 열고 닫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①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그대 떠난 빈자리에」 전문

  ②
그는
가슴 속 담겨있던 술병을 꺼내
뚜껑을 열면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데,
그 안에서 고통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바다는 핏빛이고,
밤안개는 번지고, 내리고, 흐르고, 피어나고, 우는데
붉은 나무 가지에 목숨처럼 매달린
리본이 아이의 눈망울처럼 바람으로 다가오는데
그는
오늘도 건조대에 널린 빨래처럼
몸을 방파제에 걸친 채
상처받은 개구리처럼
또다시 똬리를 튼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전문
  
  이 시집에서 지배적인 모티프 중의 하나는 ‘바다’이다. 시인은 바다를 공간으로 하여 이별과 그와 맞닿아 있는 상처를 애도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대 떠난 빈자리에」는 바다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비련 가득한 어조에 의해 떠나간 님을 향한 추모헌시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바람과 물의 이미지가 비극적인 느낌을 준다. 더불어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다든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진다든지 하는 표현에서 이러한 비극의 정조가 고조된다. 그대의 떠나감이라는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 앞에서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겠으며,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에서 시인의 태도가 드러난다. 반면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에서는 직접적으로 세월호 사태로 인한 아픔이 드러난다. 전자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시인 자신의 직접 화법으로 드러난다면 후자의 시에서는 아이를 잃은 한 ‘사내’의 아픔이 간접화법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시를 통해 타인에 대한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으로서의 상처 감싸기가 따뜻한 애도를 통해 드러남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시 형태로 타인의 상처를 위무하는 언어전도사로서의 시인의 모습 안에,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본질을 물으며 동시에 사회에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연시 형태의 중간 중간에 자연과 고향에 대한 시인의 정서가 사랑의 언어로 아로새겨진 것이 이 시집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
밤의 속도는 너무 느리다
눈먼 가로등은
두 팔을 벌린 전봇대를
보지 못하고
빗자루 같은 가로수는
달이 사라진
하늘만 쓸고 있는데
가든지 서든지
쉼없이 깜박이는
황색의 신호등은
내 눈을 닮았다

상주의 얼굴만큼
문상객들로 넘쳐나는
어둠을 넘긴 영안실
아버지와 동거한 지 일년
안고, 닦고, 치우고,
딱 하루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을 강조하며
그 냄새, 그 향기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고
하늘나리꽃을 닮은 상주는
지금도 아버지 등에 업혀
미소 짓고 있다
­「상주의 미소」 전문

  시인의 산문집에 따르면, 시인의 아버지는 2007년 음력 1월에 돌아가셨다. 시인에게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깊게 배인 삽화가 하나 있다. 산문집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인이 초등학교 오학년 때 고향 마을에 불어 닥친 교육열로 시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울로 떠밀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큰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한 집에 같이 살던 한 살 터울인 조카에 대한 큰어머니의 내리사랑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상처를 입고 중학교 일 학년 때 큰집을 나가 독서실에서 혼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출한 지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시고 결국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인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아버지는 손수 깐 삶은 계란 두 개를 시인에게 말없이 내밀었고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 계란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은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시인은 아버지께 내게 하실 말이 있으면 하라고 묻는다. 그때 아버지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고 이빨도 닦으시고는 “잘 사니 됐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다. 「아버지의 침묵이 너무 그립습니다.」라는 산문에 나오는 삽화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의 아버지는 시인이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식을 닦달하는 설익은 꾸지람이 아니라 자신의 반듯한 행동으로 침묵을 통해 자식 사랑을 보여주신 시인의 아버지. 우리는 위 시에서 그런 아버지를 여읜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 옴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입의 달콤한 거짓된 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데워진 등으로 온다. 아버지와 함께 어느 집 문상을 다녀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저녁, 시인은 아버지 등에 업혀 있다. 그것을 시인은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적는다. 문상이라는 죽음의 이미지보다 이 시의 첫 구절부터 밝음이 연상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등을 통해 따뜻한 교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등의 침묵으로 한다는 것을 이 시는 1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반면 2연에서는 이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직접적인 육친의 죽음으로 시적 무대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가 1연에서 타인의 죽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듯이 2연에서 문상을 온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2연에 따르면 시인은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그 냄새, 그 향기”에 의해 “지금도 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꿈을 꿀 수 있었기에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위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이위발의 두 번째 시집의 특징은 시인의 추억에 의해 재구성된 이별의 모티프가 중심이며, 그것이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이 중첩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대의 소박한 저녁 밥상에도/ 축복받은 달빛 한쪽,/ 모서리마저 이울지 않게/ 옆에서 지켜봐 주게”(「그대 잘 계시는지」), 또는 “사람의 손길이 잠시라도 뜨면/ 언제 들어갔는지 자신의 터를/ 제 마당으로 삼아버리는” 저녁 밥상이나 개망초 등에게서 “의미 없음에도 존재하는 엄연함”(「개망초」)을 발견한다. 세 편의 ‘상처’ 연작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별과 상실이 자아내는 그 쓸쓸함과 그 외로움,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 시인은 애도의 형식으로 상처를 깊게 삭여 부드럽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떠나간 님의 자리마다 꽃을 뿌리듯이 애타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을 향한, 타인의 내부로 숨어들어가는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는 슬픔의 언어로 나와 타자가 함께 서로를 위해 울어주는 연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세계는 자신이 상처받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제 몸을 타인에게 던지며 부서지는 ‘비(雨)’와 같이, 이윽고 나무와 사람에게 스며 이편과 저편의 경계를 지우고 모든 만물이 “빗물로 만나는” 그런 “살 터진 우산처럼 불안한 사이/ ”(「비와 나무 사이」)의 풍경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시에서 보듯 시인은 오랫동안 방황하던 서울살이를 끝내고 고향에 내려왔다고 해서 결코 자연이나 사람에게 쉽게 귀의하지 못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가 이러한 시인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지나온 기억의 집은/ 두터운화장을 한 퇴물 작부의/ 흘리는 미소보다 허망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본적이고 주소다.”(「기억의 집」)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랴.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래되고 사라져가는 것들이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이 시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본적이고 주소”인 고향은 현재의 시간과 행복하게 만나는 추억의 끈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불화로 끊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낮게 자세를 낮추고 바라보면 그 불안한 동거 속에서 내 안의 새로운 것들을 깨어나게 하는 새로운 발견들이 넘쳐난다. 시인은 그러한 고향과 상처를 입은 존재들에게 이 시집에서 사랑과 애도의 노래를 건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는 이러한 타인과 고향을 향한 시인의 노래가 결코 끊어질 수 없음을 하나의 문장, 하나의 입말로 슬프면서도 유장한 아름다움으로 전해준다. 또한 이 시는 이 시집의 성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시인의 작시법 같아 유념해서 읽게 된다는 것을 부연해둔다.

쪼그려 앉아 바라보면
주변 풍경이 달라 보이듯
건널목 앞에 기다리며
멀거니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신호등 쳐다보는 마음이
조급해지진 않았는데
나와 상관없다던
담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아카시아 향기는 숨어 있던
도둑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 향기에 취해 두리번거리는 사이
강을 따라 올라가던 유람선이
꽃상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동네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입간판이 우울해 보이는 것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이지만
작아서 보잘 것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있어도
모른 척 시치미 떼고 느끼는
감정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늘 가까이에 있는
앉은뱅이꽃도 보지 못하는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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