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 43집 2017년도 하반기

저 언덕 넘어 2024. 9. 7. 20:54

  우리들의 말

  아폴로 11호가 마침내 달에 착륙했다. 때마침 서울에서는 MBC TV가 개국하여 인간이 달에 거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한국에서 개봉되어 영화 팬들의 관람이 줄을 이었다. 천주교 대구교구 관할이었던 경북북부지역이 마침내 안동교구로 분리 되었다. 모두 1969년도의 일이었다.
  참으로 까마득히 오래 전인 1969년, 안동에서는 20대의 젊은 시인들이 모여 ‘청포문학동인회’를 창립하고 동인지를 낸다. 나중에 제호가 동인회 이름이 되었지만 그 해에 창간한 동인지가 바로 ‘글밭’이다.
  당시에 활자로 인쇄된 동인지를 지방에서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쇄소라고 해 봐야 명함 정도를 찍는 곳이 고작이었다. 활자가 부족해서 안동에 있는 여러 곳의 인쇄소를 다니며 부족한 활자를 빌려서 인쇄를 했다. 그 바람에 동인지 인쇄를 하는데 무려 한 달 반이 걸렸다고 후기에 적혀있다.
  ‘지금은 비트작 비트작 앙가발이 걸음입니다. 몇 발자국 걷다가 그만 엎어져 홰울음도 내놓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차는 쾅쾅 대지를 울리는 우렁찬 발자국 소리를 나는 지금 듣고 있습니다.’ 창간호 첫 머리에 밝힌 글이다.
  그 글에서 밝힌 대로 ‘몇 발자국 걷다가 그만 엎어’질 수도 있겠다는 염려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도시 안동에서 한 번 책을 내는데도 숱한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48년째, 강산이 무려 다섯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다. 초기의 ‘글밭’ 멤버 중에는 유명을 달리 한 분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고집스럽게 ‘글밭’ 43집을 삭풍이 부는 이 계절에 세상에 내놓는다.
  여태껏 ‘글밭’이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겨울이라는 계절과 맞닿아 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모진 바람과 눈보라와 싸워야 했다. 소도시에서 지속적으로 시를 쓰는 동인을 확보 하는 것도 어려웠고 재정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자포자기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동문학’ 창간을 위해 발전적 휴간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몇 해를
거른 적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복간 이후에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매년 두 차례씩 어김없이 ‘글밭’을 발간해 왔다. 4년이나 지났으니 그것도 이제 거의 정착이 된 셈이다. 매년 힘들게 동인지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날들이 까마득하게 그립다.
  처음 동인지를 낼 때 ‘몇 발자국 걷다가 그만 엎어’질 수도 있겠다는 염려처럼 지금도 ‘글밭’이 얼마나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동인지가 우리나라 시문학 발전에 얼마나 기여해 왔는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반세기 동안 꾸준히 동인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해 왔다는 사실은, 불과 몇 차례 발간하고 중단하는 여타의 동인지들에 비하면 적어도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한국 동인지사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을 수 있을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인지를 발간하는 과정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지만 동인지 창간 반세기를 앞둔 이 시점에서 발간되는 동인지의 무게는 종전과는 다르다. 한 번의 동인지가 아니라 장구한 글밭 역사의 새로운 한 걸음을 열어가고 있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어려운 여건 때문에 동인지 발간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여태까지 공들여 쌓아온 ‘글밭’ 동인지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살아 있는 한 꾸준히 ‘글밭’을 부지런히 가꾸어 나갈 것 이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평범한 진리를 믿고 창간한 글밭 정신 그대로 묵묵히 황소처럼 우리의 갈 길을 걸어갈 것이다. 1969년 창간 당시의 말이 오늘을 이르는 예언이 되었듯이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하여.




우리들의 말 …… 3

강 수 완
밥부재 …… 12

강 희 동
자경록 67 …… 16
영안실에서 …… 17
놀이터 …… 18
먹고 사는 일 …… 19
득음 …… 20
물레방아 …… 21
그곳에 들고 싶다 …… 22
흔적이 되려하네 …… 24
오두막에 깃들어 …… 25
산림별곡 6 …… 26

권 기 태
산책길에서 …… 28
귀순이 …… 29
아침 밥상 …… 30
이땅에 함께 살아요 …… 31
유년 일기 …… 32

김 윤 한
휘파람 …… 36
숨바꼭질 …… 38
까치 아파트 …… 39
연고를 바르다 …… 40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 41
정미소가 있던 풍경 …… 42
비누 향기 …… 43
장마 …… 44
눈 감으면 …… 45
그렁그렁 …… 46

김 지 섭
금시초문今時初聞 …… 48
그 눈물 …… 50

김 진 택
11월 …… 52
카페 르네 지라르에서 …… 53
사랑하는 이에게 …… 54
무제 …… 55
산속에서 …… 56
10월의 시 …… 57
천기누설 …… 58

김 진 회
엄마사탕 …… 60
꽃무늬 속옷 …… 61
무덤 속 풍경 …… 62

이 위 발
검정 고무신 …… 66
축산 할배와 워낭 …… 67
시간놀이 …… 68
슬픔의 길 …… 69

임 관 혁
들풀 …… 72
눈물 …… 73
토종닭 …… 74
못 잊어 …… 75
반딧불 초롱 …… 76
눈꽃 …… 77
주산지에서 …… 78
편지 …… 79

임 두 고
분실 신고 …… 82
이별 연습 …… 83
칸나 …… 84
우리 집 …… 85
통영 유감 …… 88

임 애 월
나무에 관한 명상 …… 92
빗속에서 …… 93

전 대 진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은 어느 날 …… 96
책장 앞에서  …… 98
이사 …… 100

조 용 식 …… 103
거기 누구신가 …… 104
농담 …… 106
덕하역에서 …… 108
매화 …… 110
나비야 …… 112
안경테를 잃어버렸다 …… 114

특집­이 계절의 시인 / 
김미현 …… 117
김여선 …… 149

글밭 略史 …… 183








강 수 완

밥부재

|시인의 말
43집엔 부끄럽지만 한 편을 낸다.
이 시가 가슴을 후려치는 회초리가 되길 빌어 본다.




밥부재

어매 지금보다 쪼매 눈 밝을 때
한복집 자투리천 얻어다가
요새 내처럼 무다이 잠 안 오는 밤에
재봉틀에 앉아 드르륵 드르륵 까만 밤도 박고
잎이 거진 떨어진 가지에서
꼭지를 놓지 않는 덜 익은 모과도 박고
들창을 흔들고 가는 바람의 발길도 순식간에 박아 넣어
좌우가 알록달록 촌스러운 밥부재를 생각대로 만들었다

딴에는 네 귀 단정히 맞춰 훌륭한 조각보 같기도 하고
참꽃 무더기에 봄 하늘이 흘러 화사찬란할 때도 있고
몬드리안이 울고 갈 새로운 구도와 색감에
눈이 번쩍 뜨일 때도 있다가
아부지와 된통 싸운 밤에는
우중충 삐뚤빼뚤 양옆이 눈물바람으로 기울기도 하였다

오일장에 가면 세련된 색깔이 천지삐까리고
반찬 간이 안 묻게 고운 철사줄 넣어
양산같은 밥부재가 입맛대로인데
이 촌스러운 밥부재를 누가 쓰냐고
부엌 서랍에 개어 넣고 한 세월
이사를 하다가 그 밥부재를 보자 왈칵 뜨거워졌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서리서리 못지않은 어매의 밤들이
색깔대로 피어난 밥부재
이제는 재봉틀도 늙어 시원찮고
돋보기 낀 눈에 박음질도 침침하다 하니
반찬 몇 가지 상에 올려
일부러 덮었다 제꼈다 훌렁거려 보는
어매의 한 시절 꽃밭 밥부재








강 희 동

자경록 67ㆍ영안실에서ㆍ놀이터
먹고 사는 일ㆍ득음ㆍ물레방아
그 곳에 들고 싶다ㆍ흔적이 되려하네
오두막에 깃들어ㆍ산림별곡 6

|시인의 말
  서서히 근력과 근기는 떨어지고 만사를 던지고 도망가
기에도 비겁한 나이
  늙은이도 젊은이도 아닌 이 어지중간한 나이에 사람행
세하기 참말로 버거운 즈음
  살아 볼라고 개헤엄 치며 버둥거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ㅉ-ㅉ 혀 차는 시간들.
  벗어버려도 볼품없어 부끄럽잖은 속내, 그만 적당한 구
실을 붙여 숲 그늘로 들고 싶다.
  영안실 방문이 잦아지고 이유 없이 저 세상으로 가는 꼴
을 자주 본다. 그렇게 시(詩)도 때도 없이 저물어 간다. 잠
이나 좀 자자.




자경록 67
­필살기


개가 짖는다고

악몽에 시달리지 말고

꽃이 핀다고

유혹에 놀지 마라




영안실에서

사람은
어머니의 땅으로 와
아버지의 하늘로 오른다
영과 혼은 무한우주를 떠나
아득한 세계로 이끌리고
육신은 녹아 흙이 되는
순리의 윤회에
오늘도 순서 없는
줄을 대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삶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또 죽는다




놀이터


텅 빈 오후

어중간한 놀이터

시소도 상대 없어 쉬는 즈음

두 줄 허공에 몸 단 그네

그 밑싣개 끝에 앉은 나비

바람 솔솔 흔들어 그네 미끄러지고

나비 폴 폴 허공에 날갯짓

빈 터 고요도 기막힌

삼복근방 하오




먹고 사는 일


야 이 새끼야

그래 세 끼다

삼 시 세 끼

너 때우는 일

그래 이 세끼야

일이다




득음


비염!

백번의 코를 풀어대고

코를

‘패-앵’ 푼다는 것을

알다




물레방아

돌아
버리겠네
물레방아

돌아
버리네


이내 모이는 물
돌아 버려
방아 방아




그곳에 들고 싶다

적막으로 잠든 새벽에
글을 쓰네
그대에게 밤새 안부를 묻네
동이 트려면 새벽이 엷어지고
굴뚝새가 잔소리로 울어야 하네
부시시한 해가 산허리 짚고 올라
아침이 되어야 하네
세상은 이렇듯 수평으로 깨어나지만
숲 속에는 아직 어둠이
잣나무 가지에 걸려있고
너무 일찍 꽃 떨군 생강나무
아래에도 눈물처럼 묻어있네
아파하지 마라 밤새 찬 서리는
내 잠든 사이에도 숲 속으로 내렸다
모두가 평등으로 눕기에 산과 들이 너무 고르지 않다
맑은 햇살 몰고 아침이 온다
서리 맞은 금빛 포구에
설익은 공단을 옆구리에 끼고
늦가을 은빛 서리 앞세워 날이 밝아온다
또 하루가 지나면 내가 지어 올린
집들이 무사하고 따뜻할까
누구도 봐 주지 않는 세상 모퉁이에
탕 탕 소리 나지 않는 못질을 한다
그대여 깨어 있는가
나는 어찌 이 부질없는 세상으로 걸어 나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처럼
나와는 무관할 듯한 시공에
바느질을 하고 있는가
사무치도록 허전한 발걸음
허공에 내딛고 있는가
새벽이 부음하게 엷어져도 닭 울음은 없네
똑딱이던 시계소리도 멈춘 지 오래
이음과 단절의 경계가 없는 시공에서
어디엔가 묻혀있을 또 다른 나에게 편지를 쓴다
미지여, 내 알지 못하는 세계여
나는 아직 몽매한 꿈길에서 찬 서리 맞아
뒤뚱거리며 기우는 뱃머리 부여잡으며
길을 나선다
물 위에 머물던 목선은 숲으로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으로 간다
송백이 울울이 빽빽한 산림에
깊숙이 묻혀 돌아올 길
아득한 니르바나의 꿈을 꾼다




흔적이 되려하네

나 흔적이 되려하네
조잘거리는 그대 이야기배 타고
멈칫 거리는 산 푸른 옷
정답던 풀들의 어울림
바람의 속삭임 흘려두고
스쳐 모르는 척 하려네
날 곤두세우던 얼음 찬 웃음도
내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 듯하네
전철이 시간의 제 레일을 건너 듯
복작거리던 깊고 아득한 강을 건너
네 사랑이여 이미 받은 것조차 빛 바래는 즈음
양지쪽 빨래처럼 널었다가
그대 눈길 거둔 옛집 뒤란
엉겅퀴 그림자로 잠시 머물다가
꽃 핀 시절 탐내지 않는 들꽃이 되려하네
한 시절이 풋잠에서 깨어나는
몽매한 시간의 흔적으로 그만
묻혀 아득히 잊어지려 하네




오두막에 깃들어

이제
때가 된 듯하다
눈 내리고 꽃은 지고
남풍 불어 잡풀 눈을 뜨고
솔향기 절여 마루에 널어
먼 산 불러 앉히고
조곤조곤 개울물 따라 마음을 빨아
볕 좋은 처마 아래 널고
포롱포롱 묏새 날아 깝치는
오두막에 깃들어 머무리
새소리 벗삼아 흰 구름 띄워
세상이야기 들으나 마나한
농아(聾啞)가 되어
바람소리 보이고 꽃피는 모습 들리는
관음에 들어 머무는 둣
흐르는 벽공이 되어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오두막에 깃들어
사는 듯 마는 듯
때가 된 듯하다




산림별곡 6

나 지금 맑고 뜨거운 햇살 뚫고
무주로 간다네
덕유 그 넉넉한 품에
얼굴 묻으러 간다네
구천동에 물소리 들리지 않아도
푸른 바람에 찌든 마음
씻으러 간다네
행여 못다한 일 있어도
그만 잊으려 간다네
아름다움이여
미련이여
세심정에 빨래 말리듯
무주구천에 부서지는 개여울
바위에 날 널어두고
돌아오지 못하여도
그만 괜찮을 듯하네








권 기 태

산책길에서ㆍ귀순이
아침 밥상ㆍ이 땅에 함께 살아요
유년 일기

|시인의 말
  소에 쟁기 메어 논밭갈이하고 곡식 단 지개에 져 집으
로 나르며 산더미 높이의 거름더미 등짐으로 내어 꼬부랑
산길을 걸어 시장으로 정미소로 어디쯤 일까? 지금 휘돌
아 보았지만 그 길 그 산천은 지금 찾을 수가 없다. 오늘
도 유년의 기억 한 자락 잡아들면 어린 날의 기억이 감미
롭게 찾아든다.




산책길에서

산길 구름에서 문화단지 입구에
‘선비의 고장 안동’ 일주문 들면
시간이 멈춘 온뜨레피움 산책로
고운 옷 입은 단풍은 잔인한 유혹이다
철망 너머로 깔끔한 잔디밭 위에
철부지 아이들이 놀고 있다
허공을 맴돌아 날아가는 낙엽은
팔순 훗날의 나의 화려한 모습일까?
하늘가 지는 햇살에 어둠이 드리우고
긴 그림자로 누워 있는 옛 오솔길에
홀로 각박한 세상을 한탄하면서
산머리 넘어 날아가는 새가 되고 싶다
중원 변방에서 찬서리 내리는 밤
술잔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일천 리 밖에 두고 온 정을 잊지 못하는
소동파의 간절한 달빛으로 다가가
잊지 못하는 날들의 기억을 찾아
만남과 이별을 뒤돌아 보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들을 그려보는 그대
솔숲 가운데 홀로 남은 공허함 위에
반쪽의 낮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귀순이

1970년대 7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와 장짐 지고 읍내 갔다 오는 날
물살 휘감아 돌아가는 강가에서
강을 건너려는 귀순이의 응어리
개 짖는 소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문득 가슴에 묻었던 둘째 아들 생각에
아가야 내캉 살자
아가야 내캉 살자
추슬러 수줍은 귀순이 꼬리를 들었다
금세 정이 들어 어머니를 따라 왔다
허술한 문 칸에 짚자리 깔아주고
국물에 밥 말아 먹였더니
꼬리 살레살레 흔들어 정을 보였다
암컷이어서 귀순이로 부르기로 했다
홀 모에 두 자녀 집안에 셋째가 되어
딸 하나 얻은 듯 귀여움 받고
여동생 맞은 듯이 기쁨이 넘쳤다
시키면 그대로 잘 따라하는 슬기로
울도 담도 허술한 우리 집 마당에
구석구석마다 슬기로운 구슬 한마당
금빛 웃음이 저녁 햇살로 가득했다
삽짝 뒤편에 자리 잡은 파수꾼 되어
들고 나는 사람들을 몰아세우며
귀순이가 우리 집 한식구가 되었다




아침 밥상

어둠이 지워지는 아침이다
아내는 시래기 국을 끓여 놓고
마늘장아찌 콩 조림으로
상차림을 해 놓고 갔다
일터로 삶을 구걸하려고 떠났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놓은 편지
일어나면 잡수시고
서리 오기 전에 텃밭이나 거둬요
예지랑날에 해는 중천이다
신선한 계란을 깨어서
달은 프라이팬에 넣었다
파열음을 내는 계란이 익는 소리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거리며
국그릇에 밥을 말아
훌쩍훌쩍 먹었다
아내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전신이 아프다고 하면서
오늘도 날품팔이 갔다




이 땅에 함께 살아요

이 땅에 우리 함께 살면서
서로 헤어져 오가지 못한지
칠순이 넘어 너무 오래 되었다
하나 되기 위해 피 흘리며 죽은 이와
살아서 고통 속에 살아온 지 얼마인가
우리들 만나고 오고 가는 날이면
먹고 마시고 구르며 춤추며 살아가자
껴안고 입 맞추며 정 주어 피를 나누자
세계에 융숭한 민족의 대접을 받으며
하나 되어 얼싸안고 살자고 외치었지
피눈물 나는 고난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하나 되어 한 몸이면 되리
민족이란 이름으로 의지하며
얼싸안고 빙빙 돌며 노래하리라
서귀에서 온성까지 흐르는 정으로
백두대간 바람으로 휘파람 불며
내려가고 올라가고 왔다 갔다
천년만년 대대로 하나의 나라
동서남쪽 바다에서 고기 잡고
한반도 넓은 땅에 씨앗 뿌리며
밝은 태양으로 어둠을 지우자
겹겹이 동여맨 허리띠 잘라내어
혈맥을 통하여 뜨거운 정으로
한겨레 한뜻으로 함께 살아요




유년 일기

태어나긴 했는데 그날을 알지 못하였다
야생에서 무적으로 지워버린 시간을
취학 통지서 소동으로 호적에 올라
입학하여 공부한 4년의 학교생활은
생존과 가난으로 길을 잃은 날들이었다
공부보다 일을 해야 먹고 산다고 해서
공납금 못 내어 등굣길은 늘 불안했다
뱀, 개구리, 우렁이와 놀기가 즐거웠다
지각과 결석은 전교에서 늘 1등
손바닥 종아리를 맞고 나면 후련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아픔으로 되돌려 기억하며
마음에 남아있는 사랑의 응어리들이다
뵈옵지 못한 아버지는 어딘가 가시고
늘 아파하시고 돈이 없어 하시던
어매는 흙먼지에서 들일만 하실까
새벽밥을 지어 바가지에 퍼 놓으면
목이 막히도록 조밥을 먹게 했을까
가고 싶은 학교생활을 청산하였다
소에 쟁기 메어 논밭갈이 하고
곡식 단 지게에 져 집으로 나르며
산더미 높이의 거름더미 등짐으로 내어
꼬부랑 산길을 걸어 시장으로 정미소로
어디쯤일까 지금 휘 돌아 보았지만
그 길 그 산천은 지금 찾을 수가 없다
오늘도 유년의 기억 한 자락 잡아들면
어린 날의 기억이 감미롭게 찾아든다








김 윤 한

휘파람ㆍ숨바꼭질ㆍ 까치 아파트
연고를 바르다ㆍ‘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정미소가 있던 풍경ㆍ비누 향기
장마ㆍ눈 감으면ㆍ그렁그렁

|시인의 말
  ‘글밭’을 일 년에 두 번씩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 2014년
부터이니까 햇수로 벌써 4년째 접어든다. 덕분에 동인들의
시적 역량이 한층 더 높아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한다.
  동인지 이외에 작품을 발표하는 곳도 있지만 ‘글밭’처럼
언제나 내 집처럼 편하게 깃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런
까닭에 ‘글밭’이 고향이나 어머니와 같은 보통명사로 내
안에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1969년 시작된 ‘글밭’이 매년, 그리고 최근에는 일 년에
두 번씩 어김없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대단한 일이다. 묵
묵히 함께 발걸음을 해 오신 동인들이 존경스럽고 내가 그
일원인 것에도 자부심을 느낀다. 43호 원고를 보내며 문득.




휘파람

내 안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작은 알이 부화하기까지도 그랬지만
깃털이 자라고 존재를 알리는 소리를 내기까지는 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열심히 아버지의 새를 불러오는 동안
나도 내 안의 새와 만나기 위해 현기증이 나도록 바람 부는 법을 배웠다

동그란 입술 사이로 무지갯빛 새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드높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날려 보낸 홀씨가 소녀의 달팽이관을 간질이며
민들레꽃으로 피는 꿈을 꾸기도 했다

지저귀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이가 한참 먹은 뒤였다
살아가면서 점점 아픈 일들은 많아졌고
새들은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시간들을 다시 불러와
부질없이 붉은 노을을 적시곤 했다

휘파람 잘 불던 아버지도 결국 휘파람새가 되어
아득한 하늘 끝으로 날아가 버린 저녁시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들판 가로지르며 한 무리의 삭풍이
곡조 모를 휘파람을 불고 있다




숨바꼭질

나는 술래였다
전봇대에 엎드려 열을 세고 돌아보면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몰려드는 외로움, 적막만이 공터 가득 차 있었다

원하는 것은 모두가 숨어 있었다
손톱깎이나 리모컨, 비밀번호 같은 것들
심지어 통화를 하면서 휴대전화기를 찾는 일도 있었다

숨은 그림 찾기, 마지막 하나는 늘 어려웠다
개미처럼 많은 군중들 속에서
붉은 줄무늬 티셔츠 월리를 찾아내려면 눈이 아팠다

아버지도 평생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잃어버린 자신은 끝끝내 찾지 못한 채
치매, 가물가물한 미로를 따라 그렇게 떠났을 것이다

모든 것들 잘 있는지, 새벽에 깨어 보니
신발들도 옷가지들도 어제 그대로 다 잘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내 모습만 보이지가 않았다, 무섭게도
나는 술래였다




까치 아파트

까치 아파트에는 까치가 살지 않는다
까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물고 아파트 앞을
가끔씩 날아오를 뿐이었다
아파트 옆 건축 공사장 타워 크레인이
자재를 들어 올리는 사이
까치도 높은 나무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푸라기를 깔아
부지런히 둥지를 만들었다
저녁이 오면 둥지마다 하나씩 불이 켜지고
가방을 옆에 낀 가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부지런히 먹이를 찾던 어미 까치도
둥지로 올라가 부리를 맞대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건넨다
이윽고 아파트 불들이 하나씩 꺼지면
까치들도 온기를 나누며 잠을 청한다
보금자리는 가족임을 확인해 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이름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들 다 돌아가 잠든 새벽녘
사람 하나 없이 비어 있는 거리가
오히려 더욱 평화로운 것이다




연고를 바르다

무릎이 예고 없이 긁혔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환부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다
그러나 해진 곳을 낫게 하는 것은
사실은 연고가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이다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딱지로 굳고 아물었을까
외상에는 연고를 바르지만
안으로 난 상처는 연고를 바를 수도 없고
눈물 몇 방울로도 잘 치유되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아무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미 흉터로 굳어버린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망각되지 않고
흐린 날이면 다시 도진다
오늘 생긴 무릎의 생채기도 잘 아물고
나도 모르게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연고나 시간으로도 아물지 않는
상처 하나쯤은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연고 뚜껑을 닫으며, 문득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열대림 정글을 헤치고
흑백 문화영화, 포탄 속을 돌진하던
김 상사가 돌아왔다
소니 녹음기, 마미야 카메라, 티토니 시계,
럭스 비누, 미제 커피까지 가방 가득 담아든 채
훈장 달고 무사히 돌아왔다
대한의 피가 펄떡이며 흐르는
라이 따이한 아이들을 버려둔 채
파월부대는 철수를 했고
살아남은 베트남 사람들은 잊지 않고 해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위령제 제단에
허리 잘린 국화를 바치고 있었다
고엽제에 말랐던 숲은 다시 살아났지만
베트남 아이들은 대를 이어 마르고
한 때 전쟁의 가해자였던
김 상사의 관절도 말라가고 있었다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약한 것이 죄가 되기도 한다는 것
한미 합동 군사훈련 항공모함 위에는
오늘도 눈부신 성조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정미소가 있던 풍경

보리밥으로 아침을 먹은 지
한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뱃속이 허전했다
나른한 허기를 쿵쿵 두드리며
원동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피댓줄 따라 정미기는 부지런히 돌아가고
벼들은 재재거리며 한 무리씩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였다
쌀겨 먼지 덮어쓴 기술자는 이따금씩
도정되는 벼를 손바닥에 받아
상태를 살피기도 했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거친 벼들은 정해진 여정을 거쳐
마침내 빛나는 보석이 되어 쏟아졌다
참 오랫동안 잊고 지냈구나
오늘 아침 식기 안에 핀
눈부신 밥꽃 송이들을 보며
정미소 녹슨 양철지붕 아래
탕탕 돌아가던 그 원동기 소리
문득 다시 듣는다




비누 향기

존재에 대한 호칭이 이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비누는 오히려 제 존재가 사라지며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녹지 않으면 비누가 아닌 것,
거품은 온 몸을 풀어 피우는 꽃이다
그래서 온갖 때를 만나도 향기가 나는 것이다
모두들 자고 있는 꼭두새벽에도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가고
또 누군가는 밤새도록 거리에서 비질을 한다
이름 없는 무수한 낙엽들이
스스로 거름이 되어 꽃을 피워내기에
그 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나마 세상에 향기가 존재하는 것도
그런 보이지 않는 사연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새끼손톱만한 마지막 조각을
변기에 버리며 영원히 작별을 한다
하찮은 보통명사 하나가 사라졌지만
꽃향기는 아직도 피부 속에 남아
여전히 코끝으로 스민다




장마

위화도, 강물이 불어나고 있다
전쟁을 피해 회군을 하더라도
우리끼리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의 행차를
거센 황톳물이 가로막고 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대홍수로 많은 사람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앞 하수구가 넘치고
독립운동가 빈 집 마당에는 이끼가 돋고 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한국전쟁은 장마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폭우 때문에 제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총성이 들리기는 하였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마침내 휴전이 되기는 하였지만
비무장지대 지뢰밭은 물에 잠기고
녹슨 철모 위에도 빗물이 넘치고 있다
장마의 끝은 기상대에서도 잘 모른다고 한다
지겹도록 비는 내리고 있다




눈 감으면

바깥으로 난 창을 열면
가로수길 너머 펼쳐진 들판 너머
개미가 되어 오가는 사람들과
늘 보아왔던 하늘, 떠가는 구름도 보인다

하지만 시야는 산을 넘지 못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문득 내가 그리워진다

창문을 닫으면 방 안에 있는 것들이 더 잘 보일까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련한 첫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달빛 쏟아지는 동화 속 숲길을 거닐기도 한다
쉬지 않고 박동하는 심장도 보이고
혈관 속 흐르는 물소리도 들린다

눈 감으면 비로소
눈 감은 내 모습이 보인다
여태껏 걸어왔던 온갖 길과 걸어가야 할 아득한 길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렁그렁

갓난아기 때는 울음이 곧 언어였다
울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눈물이 먼저인지 울음소리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지만

국민학교 졸업식, 아무도 울지 않았다
좀 모자라서 놀림만 받던 한 여자애가 먼저 소리 내어 울었다
비로소 나머지도 모두 따라 울기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목 놓아 울자
비로소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무지하게 슬픈 영화였다
모든 관객들이 약속한 듯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엔딩 자막과 함께 비로소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오늘도 누군가 울고 있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라가는 과정이다








김 지 섭


금시초문今時初聞
그 눈물


|시인의 말
단 시 두 편을 올린다는 건, 시에 대해서나 글밭에 대
한 예의가 아닌 줄을 안다.
하지만 글(밭)과의 인연이 너무 오래서다.




금시초문今時初聞

친구들과 놀다가
노래방엘 가자는 날이
그녀는 제일 괴로웠다.
음치는커녕 노래도 곧잘 하고
춤도 한춤 춘다는 그녀

거짓 핑계를 대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노라면
복스런 얼굴에서 영글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에는
아니 그녀의 까막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집에 가서도 아무도 몰래
얼굴이 부석부석하도록 울고
몇 날 며칠을 캄캄한 밤하늘처럼 보낸다는

칠십 평생에
이런 얘기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지만
내 등을 후려치는 죽비소리로 들려와
‘나에게는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캄캄한 그늘이 될 수 있다.’는
죽는 날까지 잊지 말아야 할
칼날같이 빛나는 금언金言이 되었다.




그 눈물
­평화의 소녀상에

그 눈물 아롱아롱
은하수로 흐르고 흘러

아득 높은 거기
눈부신 얼굴이 되신

소녀여
그대,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네 곁을 지나시는
이 땅 모든 가슴 가슴에

시리디 시린
한 줄기 빛이 되리니.








김 진 택

11월ㆍ카페 르네 지라르에서
사랑하는 이에게ㆍ무제
산속에서ㆍ10월의 시
천기누설

|시인의 말
  우야든동 오늘은 시를 써서 안동으로 보낼 요량으로 가
방에 원고지와 만년필을 넣고 두꺼운 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
갔다. 다방에서 원고를 쓸 작정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갔
다. 먼저 온 손님들이 노트북을 보거나 자판으로 문서를 만
들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느티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었는데 잎의
색깔이 나무마다 다 다르다.
  한 마리 벌이 실내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나가는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잡아서 바깥에 보내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죽어 누운 것과 살아 누운 것이 다르지 않다면 길 잃은
벌이 이 실내에서 죽은들 별로 억울한 것은 없다.
  머릿속은 골방이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물건들이 여
기저기 널려있다. 그 중 몇 개를 찾아 후후 불어 먼지 날
리고 목면 수건으로 좀 닦아주면 골동품 몇 개가 손에 쥐
어진다. 그렇다 나의 시도 무의식의 깊은 곳에 있는 사건들
을 찾아내어 내가 볼 수 있는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운이 좋은 날인가? 몇 편의 글을 얻을 수 있었다.
  커피를 덮고 있는 휘핑크림이 풀이의 안색을 닮았다.




11월

바람은
혼자 놀기 심심했다
나뭇잎 흔들어 떨어뜨려
길모퉁이 담장 밑에 쌓아두고
저도 노곤해 낙엽을 베고 잠이 들다

버들잎 저리 많이 달려 있어도
사람들
입동 지나면 겨울이라며
두꺼운 옷 걸쳐 입고 건널목을 빠르게 지나간다

꿈도 계절을 건너는지
서걱이는 갈밭 너머로
기러기
끼룩끼룩
울며
잠긴다




카페 르네 지라르에서

넓다란 실내
한 마리 벌
비행하다
탁자 위에 앉아 쉰다
그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것인가
출구는 없다

살아 누운 것과

죽어 누운 것이 다르지 않다면
저기 날으는 벌의 무덤이
꽃 넝쿨 아래이건
어둑한 소파의 그늘이건
무슨 상관이랴




사랑하는 이에게

풍찬노숙의 세월을 건너오느라
얼굴색이 누리끼리 변한 당신

다리가 후들거려
초록이 끝나고 빨강이 피었는데도
길 복판에서 건너편 기슭을 낯선 듯 바라보는 당신

저승길 노잣돈 필요하다고 오늘도
일만삼천오백원
통장에 넣은 당신

나에게 공짜 떡을 달라는 당신

사랑해라는 말을 저 먼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지폐처럼
마구 날리면서

쓴 소주 한 잔 내지 않는
나의 사랑하는 당신




무제

놋쇠 밥숟가락

섬돌 위
짚신

다리가 짧아
기우뚱한 시 몇 편

어항엔
며칠 굶어
안색이 창백한 구피 몇 마리

주인은 속초에서
여비 떨어져 울산바위 베고 누워
귓바퀴 간질이는 파도에 넋이 빠지다




산속에서

구월이면
공기도 여물어져서
상수리 숲 건너갈 때
물 끓는 소리 낸다

구름은 산 위에서
강원도 옥수수나무같이
천공을 향해
쭉쭉쭉
뻗어 오른다

고단한 몸은
물소리 베고 누워
꿈속에서
삼황오제를 만나려고 하네




10월의 시

바람이 없는데도
나뭇잎 흔들리고
열매

떨어진다

부황 든 얼굴을 한
한줌 햇살은
어깨에 매달려
같이 가자 따라오고
어디서 느티 잎
마르는 소리 들려온다




천기누설

낙엽의 등급
1등급 감나무 잎. 층층나무 잎. 담쟁이 잎.
2등급 목련 잎. 솔잎. 댓닢.
3등급 은사시나무 잎

인간의 등급
모든 인간 공히 3등급

내 친구 권가는
공중에 떠 있는 천사같이 놀고 있다
어느 날 하루는
나의 시를 둬줄 읽더니
이 시
졸라 쓸쓸하군
씨 부리며 부실한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김 진 회

엄마사탕
꽃무늬 속옷
무덤 속 풍경

|시인의 말
제 시는 주로 아버지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세상이었고,
아버지는 나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다 보니
자연적으로 어머니에 대해 소홀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나 저에게 숙제였습니다.
이번 호에는 제 밀린 숙제를 좀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너무 슬펐던 어느 날,
술에 가득 취해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해보려 합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사탕
­성악설

엄마의 정수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은
키가 훌쩍 자랐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사탕처럼 쪽쪽
천천히 녹였기 때문입니다




꽃무늬 속옷

축 늘어진 어매의 가슴을 본다.
마치 가을을 기다리는 이삭처럼
어매의 젖꼭지가 여문다.

어매도 한때는 젊은 애인처럼
중력을 거슬러 살았을 것이다.
아래로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견디던
탱탱한 가슴이었을 것이다.

“어매, 어매도 이제 늙었소. 젖이 축 늘어진 것을 보니.”
나는 어매의 늘어진 가슴에 농담을 건넨다.
이제는 어떤 값비싼 속옷으로도 찾을 수 없는
젊음에게 농담을 던진다.
방을 닦고 있던 어매는 축 늘어진 가슴을 여밀 사이도 없이
“네가 젖을 너무 늦게 떼서 그래.”
핀잔을 주고 마저 방을 닦는다.

그래, 나는
어매의 가슴에 매달려 생을 살았을 것이다.
젖가슴이 늘어지는 것도 모른 채
꽃무늬가 민무늬가 될 때까지
어매의 젖을 탐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젊은 애인의 가슴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무덤 속 풍경

엄마의 무덤에는 엄마가 없습니다
우울증을 오래 앓은 뒤
쏟아낸 신열 같은 것이
발아래 덕지덕지 붙어 몸을 타고 흐릅니다

살갗이 벗겨지도록
몸을 긁고 또 긁습니다
핏망울이 산수유 열매처럼
몸 여기저기 피었다 집니다

엄마의 입에 이 열매를 넣으면
밤 세워 올랐던 신열이
내려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합니다

엄마의 무덤에는 엄마가 없지만
엄마의 우울증에는 내가 삽니다
나는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도
낫지 않는 우울증의 원인입니다

정확한 변명은
무직과 무능력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 마른 눈물샘으로
내가 맺히고는 합니다

그런 날이면 몸속에는
엄마가 없는 엄마의 무덤으로 들어가
태초의 자세로 잠들고 싶은
불치병이 피었다 집니다








이 위 발

검정 고무신
축산 할배와 워낭
시간놀이ㆍ슬픔의 길

|시인의 말
  취미라는 것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즐
겨하는 것을 말한다. 근래에 새로운 취미를 붙였다. 넷플
릭스에 가입해 시간 나는 대로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는
시각적이긴 하지만 종합예술이다. 영화를 보다가 이미지
가 영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려보게 된다. 노려보는 순간이 뭉클하다. 이 뭉클함을
즐기기 위해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시를 쓰게 만들기도
한다. 즐기거나 입꼬리가 올라가거나 하면서……




검정 고무신

찌든 수건으로 몸빼 바지 털어내던 노을 저녁
고무신 바닥에 와불처럼 누워
흙을 누비듯 상념으로 다가와
꼼꼼히 매듭진 겨드랑이에 박혀있던 숭고한 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허상이
빛바랜 저고리에 뭉쳐지던 환상
불어터진 보리마냥 갈라짐이 뚜렷한 불안과
그물 같은 궤적으로 보리밭을 질러오던 바람소리
갈봄 없이 다가올 주름 패인 겨울에
하얀 세월이 이랑에 뿌린 증거처럼
산맥의 줄기를 보듬고 있던 빈 손
들쭉 향에 날려 불상처럼 웃고 있던
틀어진 입에 대한 절절한 애정 그대로
비를 멈추고 빛으로 칸살이 하듯
느슨한 덤이 비껴서 가슴으로 파고들던
어머니 검정 고무신




축산 할배와 워낭

올 봄 고추밭을 갈아야 할 축산 할배가 소천했네,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워낭에겐 청천벽력이네, 밭에 씨
뿌려주고 수확해서 여물 먹여줄 할배가 죽었으니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네, 축산 할배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워낭은, 먹을 것 챙기기 위해 개미도 이리 저
리 다니고, 제비도 덩달아 낮게 더 낮게 날고 있는데, 채찍
에 길들여진 워낭은 할배 곁에서 떠날 줄 모르네, 그대로
두면 워낭도 따라 죽을 것만 같네, 잡초는 일어서는 맛이라
도 있지만, 몇 번이나 회초리로 때렸지만 워낭은 일어설 줄
을 모르네, 소불알이 축 늘어져 떨어질 것 같은데도 안 떨
어지네. 밤새 눈이 장독대 위에 쌓이듯이 그리움도 쌓여 가
고, 사는 게 다 그런 것인데, 워낭에겐 축산 할배가 자신의
일꾼이었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네.




시간놀이

후평할매가 콩을 줍고 있다
서리 앉은 밭고랑에
칼구리 같은 허리를 하고 앉아
얼굴처럼 말라비틀어진 콩을
한 알 한 알 주워 담고 있다.

한 알은 다단계에 빠져 침을 튀기던 첫째 년을 위해
한 알은 퇴직금으로 주식하다 길바닥에 나안게 생겼다는
둘째 놈을 위해
한 알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홀애비로 환갑을 맞이하는
큰 놈을 위해

시간을 지키듯이
시간을 보듬듯이
시간을 삭이듯이
시간을 죽이듯이

할매는
멀리서 바라보면 시간놀이 하듯 콩을 줍고 있다




슬픔의 길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루살이는, 황혼이 물드는 서쪽
으로, 어둠에 갇혀 있는 치명적인 함정의 구멍을 돌고 돌
아, 노을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깔따구처럼, 보이진 않지
만, 이른 봄 출몰하여 연못으로 낙하하는, 그 먼 길
어딘가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떠나는,








임 관 혁

들풀ㆍ못 잊어
반딧불 초롱ㆍ눈꽃
주산지에서ㆍ편지

|시인의 말
  이 땅의 들녘을 푸르게 한 건 잡초가 아닌 들풀인 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들풀

기억하리라
이 땅의 들녘을
푸르게 한 건
잡초가 아닌
들풀인 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눈물

배고픈 날엔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아픈 날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그리운 날엔
치마 깃으로
눈물을 닦고,

서러운 날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이별의 날엔
돌아서서
눈물만 흘렸다.




토종닭

통일의 제전에 바쳐질
내 몸뚱아리라면
차라리 나는
내 울대를 세워
내 핏대를 세워
오는 새벽 앞에
길게 목 놓아
울지는 않으리라.




못 잊어

아니 잊어
못 잊어

못 잊어
아니 잊어

정말
아니 잊어
못 잊어

정말
못 잊어
아니 잊어.




반딧불 초롱

가실 때도
말없이 가신 님

오실 때도
말없이 돌아오세요.

달빛 사뿐히 밟으며
밤안개 내리는
떠난 길로 돌아오세요.

반딧불 초롱 들고
가만 가만 가만히
혼자 마중 갈게요.




눈꽃

눈 오는 날
마른 가지 휘잡고,
우는 바람 속에,
하나 둘
꽃잎 되어
피어나는 인동꽃

눈꽃이 핀다.




주산지에서

머문 듯
가는 구름 한 조각
왕버들 가지에
걸리듯 비껴가고,

낮달 뜬
쪽빛물 위로
물보라가 인다.

때 묻은 손 하나
담그기도 부끄러워
물빛만
물빛만 바라보다
돌아선다.




편지
­팽목항에 띄운 편지

당신의 기다림마저
사랑할래요.

당신의 그리움마저
사랑할래요.

당신의 아픔마저
사랑할래요.

당신의 흐느낌마저
사랑할래요.

당신의 눈물마저
사랑할래요.

당신의 이별마저
사랑할래요.








임 두 고

분실 신고ㆍ이별 연습
칸나ㆍ우리 집
통영 유감

|시인의 말
게으름을 피우다가 가을에야 글밭을 돌아보는 나는 늘
구차한 무명 시인. 여느 해처럼 몇 가닥의 이삭 같은 내
시를 주워들고 이웃 글밭이나 기웃기웃 눈동냥 귀동냥해
볼 수밖에.




분실 신고

어쩌다 잃어버렸을까

끊다가 끊다가 차마 끊어내지 못한
담배 때문에 망가진 기관지를 위하여
골몰하는 시간의 수렁을 우회하다가 하다가
시를 잃어버렸나.

돈도 권세도 명예도 감감한 빈 가슴을 채우려
내 아내가 하양년 까망년이라며 질투하는
바둑돌에 갇혀 방황하다가 하다가
시를 잃어버렸나.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상한 심장을 껴안고
몇 번이나 갈아치운 돋보기 안경을 찾아
침침한 눈으로 여기저기 더듬거리다가 거리다가
시를 잃어버렸나.




이별 연습

낯익은 몇몇 이들에게나 읽히다가
다시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그런 시들을 쓰다가
쓰다가 내 청춘, 내 사랑, 내 인생이
낙엽처럼 세월의 바람결에 쓸려가 휑한
초로의 길목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내비치는
처녀 총각의 살결보다도
달빛을 거머쥔 마른 나뭇가지보다도 못한
내 시의 아름다움이라니!
어느새 눈멀고 귀멀어
더 이상 꿈이 꽃피지 않는
내 시의 행간에 주저앉아
나는 내 시들에게 이별을 고하려 하네.
한 때는 사랑했던 시들아
쓰레기로도 꿈을 빚던 눈물겨운 시들아
잘 가라고
더 이상 너를 불러내지 못하는
치매의 아득한 시 행간이 펼쳐지기 전에
훌훌 내 곁을 떠나가라고.




칸나

그 옛날 바람난 그 가시내.
내 가슴을 두드려
까닭모를 사랑을 다그치며
내 앞에 쪼그려 마주 앉는데
아득하여라. 차마 외면할 수도
외면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 가시내 푸른 잎사귀 같은
스커트 자락 속에
핀 붉은 꽃.
관음, 아니 관세음보살!
늦푸른 잎들을 헤치며
칸나 꽃이 피어 올랐네.
가장 선연한 색깔로 빚어내는
추억의 꽃이랄까?
이미 칭칭 내 나이테가 흉물스런
추억의 첩첩 봉분 속에서도
다시 피는 꽃.




우리 집

그리움이란
겹겹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펼치고 또 펼쳐 내는 것.
꿈이 그리움의 꽃이라면
추억은 그리움의 뿌리.
그리움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고목의 나이에도
내 그리움의 뿌리만은 성성해
오늘은 어린 시절 우리 집을 펼치고 또 펼쳐본다.

이엉을* 덮은 흙돌담이 사방을 둘렀는데
외짝의 사립문을 들어서면
왼편은 보릿짚삐까리 오른편은 잿간.
보릿짚삐까리 곁에는 두엄더미가 있고*
두엄더미 너머 외양간 그 옆으로 디딜방앗간과
뒤주가 있고 닭장이 있던 우리 집.
잿간 옆에는 울아부지가 가끔 져 나르던*
오줌장군이 지키는 측간이 있고**
측간을 지나면 김칫독을 묻던 자리.
그 옆은 봉숭아며 채송아를 좋아하던
작은 누이의 꽃밭이 있던 우리 집.
감나무와 고욤나무에 양끝을 달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과
그 빨랫줄 한복판을 떠받치는 바지랑대가
빨래를 지키는 날보다
참새나 잠자리 떼를 지키는 날이 더 많았던 우리 집.
초가지붕 밑 뜨락을 내어
부엌과 안방과 사랑방이 정겹게 어깨동무하고 있던 우리 집.
부엌문 옆에는 커다란 물두멍이*
안방 앞에는 자그마한 댓돌이
사랑방 옆에는 소죽가마솥이 있던 우리 집.
뒷문을 열면 늘 바람이 살고 있던 뒤란
굴뚝 연기에 그을린 흙벽에는
종다래끼며 소쿠리며 망태기며*
낡은 도리깨까지 편히 쉬고 있던 우리 집.*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에
숙제를 하던 몽땅 연필을 넣어둔 채

* 이엉:지붕이나 담을 덮기 위해 짚으로 엮은 것.
* 보릿짚삐까리:보릿짚을 쌓아놓은 더미.
* 잿간:아궁이에서 퍼낸 재를 보관하는 곳.
* 오줌장군:오줌을 모아두었다가 들판으로 나르던 그릇.
* 측간:화장실.
* 물두멍:우물물을 길러와 보관하던 독.
* 종다래끼:짚이나 싸리 등으로 엮은 주둥이가 좁고 밑이 넓은 바구니.
* 도리깨: 보리나 콩 등 알곡을 털기 위한 농기구.




호롱불을 끄면

달빛이, 별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들던 사랑방.
울아부지 곁에 누워
내 앞날과 당신의 지난날 얘기를 주고받으며
두런두런 호기심을 풀어내다 잠이 들던 우리 집.

언제든 추억의 두레박을 내리기만 하면
그리움이 넘출거리는 우리 집은
퍼내도 퍼내도 다시 고이는
내 그리움의 우물이자
내 그리움의 본적지.




통영 유감

동피랑 서피랑을 넘나드는 달을 동태 삼아
수많은 꿈을 굴리며 밤바다를 넘나들던
갯비린내 나는 가시내가
어느 결에 내 딸처럼 미역내 풋풋한 처녀가 되었을 테고
그런 처녀의 사랑을 얻으려
내 아들처럼 훤칠한 백석 시인이
천릿길을 멀다 않고 들락거리게 했다던 통영.

이중섭 화가가
헤어진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며
그림 속을 헤매다 미쳐
고흐처럼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치기 이삼년 전 즈음
한동안 해안 풍광에 깃들어 지내며
‘복사꽃 핀 마을’, ‘푸른 언덕’ 등의
풍경화를 그렸다던 통영.

흰수염 깎은 자국이 그득한 여윈 턱을
몹시도 흔들면서 시론을 강의하던 김춘수 시인도
어쩌면 눈앞의 바다 표정을 읽고 읽다가
시인이 되었을 통영.

그보다 앞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외롭고 의로운 가슴으로 먹을 갈며
부르튼 밤마다 난중일기를 써 내려가며
한산대첩을 이끌어냈다는 통영이 아니던가?

추석 연휴가 열흘
직장 때문에, 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
혼자 살던 아들과 딸이 모처럼 식구가 되어
큰집 차례 상 앞에 함께 모였다가
모래알처럼 뿔뿔이 다시 흩어지기 아쉬워
어디 풍광 좋은 맛집에 들렀다가
하룻밤쯤 더 정겨운 식구로 지내보자며 찾아든
통영은 정작 미어터지는 차량 행렬 속에서
아우성치고.

동피랑 중앙시장 주변을 몇 바퀴나 돌며 주차 틈을 엿보다가
교통 지시 위반 딱지를 떼이며
나라를 말아먹은 위정자들보다도
달포가 넘도록 줄창 노래만 틀어제끼는 방송국보다도
범칙금 육만원에 더 분개하는 내가
어느 날 고궁을 나서는 김수영 시인보다
더 옹졸하다 생각하다가도
감히 경찰의 지시를 위반할 수 있느냐고
괘씸죄까지 들씌우며 딱지를 떼던
이 나라 막무가내 공권력의 끝자락을 되씹으며
다시 분개한다.
찾아온 손님을 반기며 안내하기는커녕
눈을 부라리고 뺨을 치며 단속하기 바쁘다니

통영 어느 맛집의 음식도 모래알을 씹는 듯
통영 앞 바다의 어느 표정도 서슬 푸를 뿐
내 가슴 속에서 통영 냄새 물씬거리며
출렁이던 백석도, 김춘수도, 이중섭도, 이순신도
어느새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임 애 월

나무에 관한 명상
빗속에서

|시인의 말
태양빛 열매들 모두 내어주고
빈 몸으로 서서 묵상에 든
감나무 숲의 아침
무거운 짐 부려놓아
헐거워진 어깨들이
조금은 쓸쓸한 계절이다.




나무에 관한 명상

하루 종일 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검은 어둠 속에 발을 담그고도
높은 하늘을 받쳐 든 고목은
평온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조용히 흔들리고
비가 내리면 그저 조용히 제 몸을 적실 뿐
그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내 안에 심어둔 나무 한 그루
아무렇게나 뻗어나간 가지에 매달린
수선스러운 기억의 잎사귀들
하늘을 읽지 못한 잎맥들이 수척하게 야위어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어둠을 밀어낸 뿌리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허공을 방랑하던 잔뿌리 시들어가고
잎사귀들 바람에 떨어진다
환한 것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라고
마당의 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알려주던 날
어린뿌리를 길러준 그 어둠 속으로
시든 잎사귀 거두며
다시 돌아가 눕는다




빗속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점점 드세지는 빗발들
양철지붕의 가슴팍을 온통 두드려대며
몸속 깊은 곳, 모세혈관 그 너머 
미세한 세포의 끝까지 습기로 들어찬다
흐르지 않는 건 이미 존재의 형태가 아니라고
저들끼리 합심하여 깊은 골을 만들며 
겨울과 봄 사이를 흐르는 비
빗물처럼 흐르고 싶은 날들이 있다
형체 없는 것으로 뼈와 살들 다 녹아내려
바위에 부딪쳐도 상처 받을 일 하나 없이
물길이 이끄는 대로 흐르다가
어느 나지막한 동네의 작은 개울이 되거나
해빙의 기지개를 켜는 마른 논배미의 발등을 적시며
그곳으로 스며들어 생의 한끝을 마무리하여도 좋겠다 
오늘처럼 예고 없이 비가 내리는 날은
꿈속을 유영하던 날개들마저 대책 없이 젖어내리고
지구 중력의 밀도는 자꾸만 높아져
스스로 주눅이 드는 것들,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지상의 길들이 빗속에서 하나씩 지워지고
먼 산을 넘어온 낯선 어둠이 사위四圍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전 대 진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은 어느 날
책장 앞에서
이사

|시인의 말
지어둔 글이 적어서 더 추운 11월입니다.

시인 지망생의 코스프레를 멈추고 나니
이제야 겨우 새 글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삶과 시인이 아닌 삶이 똑같은지 아닌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냥 사는 것이 답이라는 어렴풋한 대답을 떠올려봅니다.

시인의 삶이 아니라,
시를 떠올리게 해준 모든 것에게 감사를 전해 봅니다.
(여기서 ‘시’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단어이
길 또 빌어봅니다.)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은 어느 날

가끔 공원
벤치에 있다가 보면 만나게 돼

단풍나무 씨앗처럼 팔랑거리는
나비, 입술을 붙이고 가만히 몸을 울리는
매미, 자기가 뱉어낸 줄 하나에 매달린 채
바람을 타고 있는 거미

나무는 은근하게
숨을 내쉬고
나는 그의 숨을 또 들이쉬어

벤치는 가끔 뒤척이는
내 무게에 또 뒤척거리고
개미들은 한 번씩 우왕좌왕하지
내가 떨어트린 손가락을
무심코 오르다가
옷 속에 길을 잃기도
어깨까지 올라왔다가
놀란 내게 붙잡히기도

어떨 땐 또 깜짝 놀라
윙 거리는 벌이
샴푸 냄새에 취했나
머리 주변을 돌면
나는 굳어
벤치를 흉내내다 겨우 한숨

그럼 그 한숨을 또
잎들이 들어마셨다 내뱉어 주네

공원에 가끔 있다가 보면 알게 돼
내가 뱉은 숨결이
저 나무의 잎맥이 된다는 걸
매미가 빨고 있는
수액이 된다는 걸 개미 똥꾸녕의 노란
똥이 된다는 걸




책장 앞에서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들을 읽어본다

몰락의 에티카1)
고뇌의 원근법2) 같은
제목부터 무거워서
내 고개도 함께 무거워지는 제목들과

건축가가 사는 집3)
일곱 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4) 같은
그 속에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다시 마음이 폭신해지는
제목과 제목들

세로로 쓰여진 아주 오래된 서신처럼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한 줄씩 읽다가 보면
부끄럽게도 읽은 책보다는
그냥 꽂아둔 책들이 많아
괜스레 쌓여있는 먼지들을 닦아도 본다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듣다가도
한 번씩 눈길을 주는
그래서 제목만 읽는 짓을
오늘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읽고 있지 않은 것도 같고
너무 빠른 속독을 하는 것도 같다

꿈꿀 권리5)
이별의 능력6) 처럼
나는 실없이 또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읽어본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7)

1)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2)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고뇌의 원근법(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3) 나카무라 요시후미(정영희 옮김)의 주택 순례기 <건축가가 사는 집>
4) 칼 푀르스터 지음, 고정희 편역 <일곱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
5)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꿈꿀 권리>
6) 김행숙 시집 <이별의 능력>
7) 이승훈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사

형이 살던 원룸에 말도 없이 들어가
한 5년을 빈대처럼 붙어살다가
또 말도 없이
형의 집을 나왔다

연고가 없다는
제법 고풍스러운 말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집도 학교도 아는 사람도
그리고 가진 돈도
아무것도 없어서
거지 같다는 비유가 더 어울리던 때
형이 있어 좋았다 형의 집이 있어 좋았다

막 회사에서 막내티를 벗은 큰형의 집에
막내로 태어난 내가 들어가
또 막내로 살았다

요즘엔 일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 데
오년 동안 나는 모은 돈 없이
빚을 낼 증명서 몇 쪼가리만 겨우 겨우 얻었다

이사를 하는 날
생각보다 많은 옷가지와
생각보다 많은 책과
생각보다 많은 먼지에 놀랐지만
새 집에 들어가고 나니
가진 것보다는 없는 것이 또 더 많았다

엄마는 막내 집에는 가봤냐고 형에게 물었고
형은 막내도 다 컸다고 답했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아직 막내고
명절날 오랜만에 본 가족들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큰형은 아직도 서울에 살고
나는 직장을 따라 판교 근처로 이사했고
작은 형은 근무지를 따라
가끔 집을 옮긴다

그리고 아직도
경상북도 청량산 너머의 오래된 집을
나는 우리집이라고 부른다








조 용 식

거기 누구신가ㆍ농담
덕하역에서ㆍ매화
나비야ㆍ안경테를 잃어버렸다

|시인의 말
고료를 받고 쓰는 원고라면 이렇게 졸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까짓 원고료 안 받으면 되지
부모님이 주는 등록금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간혹 학교를 빼먹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성적을 속이기도 했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내가 좋아서 쓰는 글이고
학령을 놓친 시기에 내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학교이니
정해진 날짜에 원고를 제출하고
시험 날짜에는 복도에 앉아 팥고물 떡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한 문제라도 더 외우는 것
세금 안 낸 것처럼 원고 독촉한다는 강희동 시인의 말에
빚쟁이처럼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도 이런 졸림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즐거운 것은
내가 시작詩作을 즐기고 있음일까




거기 누구신가

거기 누구신가

낡은 문설주
헐렁한 돌쩌귀
대문도 없는 집에
빈 바람만 걸려서 삐걱거린다

거기 누구신가

화투점괘에 매조가 떨어지면
손님이라더니
오늘 누가 오셨는가
갈 곳 없는 바람이 또 오셨는가
바깥은
오늘도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다

어느 날인가 감나무 잎 하나
방문 틈으로 슬쩍 얼굴을 디밀고는
그해 가을은 아무 일이 없었다

거기 누구신가

매미소리가 강변의 미루나무를 끌고 들어오더니
흰 벽에 자동차가 거꾸로 내려왔다
헐렁한 문틈으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초나흗날 실반지 같은 달이 기웃거렸다
눈뜨면 아직 이승이다




농담

1
다니던 회사의 근로자가 명을 달리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라면을 끓이다가
그 라면 채 먹어보지도 못하고 심장이 멈췄다

젊은 아들을 잃은 노모의 통곡이
가을 들판을 길게 끌고 갔다
하관하는 광경을 본 망자의 동생은 흰자위가 눈을 덮었다
야! 이 새끼야 너도 들어가라 형을 죽였으니까
너도 들어가라
내 팔을 잡고 광중壙中으로 밀어 넣는 것을 노모가 말렸다
홧김에 하는 소리니까 이해하세요

이튿날 회사엔 명패 하나 떨어졌다

2
간암 말기로 보훈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동갑짜리 친구
눈은 동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배는 복수腹水가 차서 돌아눕는 것도 숨이 찼다
같이 갈래?
길동무해 줄까?
여보! 무슨 흉측한 소릴 해요 죄송해요
농담인 걸요 농담

이튿날 하늘엔 별이 하나 늘었다




덕하역에서

가다가 내린 역
혼자다
타는 사람도 없이
기차는 말없이 가버렸다

누군가 앉았다가
방금 떠났을 것 같은 빈 배
내가 앉았던 좌석에는 누가 앉아 가고 있을까

낡은 기와집 위의 와송瓦松에 앉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잠자리 한 마리
고추잠자리
부끄럼타는 듯 슬며시 자리를 떴다

비가 오기 싫어서
잔뜩 웅크린 자세로
엉덩이를 자꾸 뒤로 빼고 있다

부전행 열차가 10분 연착한다는 방송이
꿈결 속에 나직 나직이 들린다

십분 연착하거나 오지 않거나
역사 앞 작은 화단에
늦여름이 떼를 지어 앉아있다

허리가 반쯤은 녹은
간이역이 수채화속에서 졸고 있다

나는 지금




매화

수삼 년 소식이 없어 고사목이 된 줄 알았던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시영아파트 절개지 밑에
지나가는 비바람에 크듯 숨어서 사는 노매老梅

가시덤불 속에서 잔가지는 모두 스러지고
굽은 옹이에 새로 돋은
굴젓가락 같은 가지 두세 개
매화꽃은 그 끝에 걸렸다

음력 초하루의 실낱같은 달빛
그 서러운 달빛에
백매는 입술이 파랗게 얼었다

경대 앞에서 참빗으로 머리를 빗는
고매화古梅花
돌아보면 꿈에 본 듯
하얀 머리에 눈썹길만 선연하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과
씨를 뿌리고 밭을 매는 것과
새소리와 풀벌레소리를
모두 들으면서 살아온 늙은 매화나무

달빛이 이울면 매화도 이울 것인데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고 가는 것
그냥 가는 것

다시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욕慾이면
고매 아직도 그대의 꽃이 피는 것 또한 욕慾이 아닌가




나비야

1
호랑나비 한 마리
우체국 출입문에 갇혔습니다

아까 앉았던 사철란에 앉으려다가
유리벽에 부딪쳤습니다
분꽃을 보고 가다가 또 부딪쳤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어왔을까요
보이는 것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막혔습니다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아픔이 있은 뒤에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압니다

꽃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꽃은 그냥 꽃일 뿐입니다
나비 스스로 사철란과 분꽃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비는 바닥에 내려 앉았습니다
더듬이도 고개를 꺾었습니다

2
제과점 문 안으로 낙엽 몇 잎이
바람에 날아 들었습니다

묵상을 하고 앉아있던 낙엽이
제과점 문이 열리면서
밖으로 빨려 나갔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잘 날려갑니다

어디가 제자리인가
비집고 들지 않아도
바람 따라 앉은 곳 낙엽이 수북이 쌓인
편안한 곳입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쓸어도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곳입니다




안경테를 잃어버렸다

안경테가 빠졌다
안경알이 떨어지고
제자리에 있을 것 같은 안경테를 찾느라
역주행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뒤로 자빠졌다
바지가 자꾸 흘러 내렸다

43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다
안개비가 내리고
빈 유리창에 빗물이 걸어 내려 왔다
43층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크레인을 타고 내려 왔다
엔터키를 누르고
119에 구조요청을 했다

모래밭에 빠진 자동차 열쇠
열쇠고리만 보인다
새끼줄에 걸린 깡통이 바람에 흔들리며
참새 떼를 쫓고 있다
콩밭에 허수아비가 그냥 웃고 서있다

브라인드를 올리고 안개비를 닦았다
귀 뒤에 홀로 걸린 안경테를 찾았다
안경테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알 없는 안경테만 끼고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안경테에 맞는 안경알을 찾았을 때
나는 비로소 성인이 될 것이다





∥특집∥­이 계절의 시인

삶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달라진다.
희망으로 넘치다가 한 순간 절망으로 가득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낮아야 보이고 더 비워야 채워진다는 걸 건져 올리며 다시
길을 나선다.
어느새 우리의 삶도 달라질 것을 믿는다.
더 따뜻하고 더 빛나는 삶을 꿈꾼다.

- 김미현 시인




송광사 연꽃

남도까지 쫓아온 장마는
빗방울을 하나 둘 떨구는데
성난 들소처럼 날뛰던
마음의 고삐를 잠시
대웅전 대들보에 매어 두고
모래 바람으로 얼룩진 몸
법당 앞 연꽃무리 속에 던진다.

산다는 것은
낮아져야 맑아지고
구부려져야 가벼워진다는 것을.

고요한 연꽃 사이로
뿌연 안개 낀 삶을
오랫동안 씻어내고 일어선다.

두려워 하지마라
두려움이 네 삶을 아프게 한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보지만
처마 끝의 풍경소리만
멀리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일렁인다.




돌아오지 않는 강

당신이 떠난
강가에 가만히 앉아 봅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조약돌 하나씩 건져 올립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들의 기억이
하나씩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람을 막아줄 숲 없는 한 줄기 빛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납니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
푸른 조약돌 강 한가운데로 던져 날립니다.




동 틀 무렵

안개 낀 새벽
맹인 부부 걷는 길

갈 길 정하는 시간은 늦어도
서두르지 않고 길을 잃지 않는다.

빠르지는 않아도 서로의 손 놓지 않아
남아있는 어둠도 두렵지 않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서서히 어둠 걷혀오고
귀는 열리고 바람 소리도 들린다.

이윽고 새벽길이 열린다.




늙은 사과나무

늙은 사과나무 아래에 서면
참 많이 미안하다.
많은 걸 주고도
아직도 줄 것이 남아있는지
사과 꽃
하얗게 피어나지만
살아온 세월의 흔적만큼
비틀어진 몸을
숨길 수 없다.
늙은 사과나무 아래에 서면
말없이 주려고 하는
어머니가 서 계셔서 아프다.




나들이

예순 여섯
지금,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유일한 나들이는
읍내 장날.

창호지 문살로 햇살이 들기 전
달그락 소리에 눈뜨면
흙빛보다 까만 얼굴 거울에 비추고
거품을 품으며 마구 달리던 기차가
두렵던 얼굴에
딸네 집 얹혀사는 죄스러움
매달린 얼굴에
징용 간 무진이 외삼촌 생각에
고름 찍던 얼굴에
하얀 가리마 내리고 머리 쪽 찌신다.

예순 여섯
지금,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유일한 나들이는
읍내 장날.

동구 밖으로 해가 넘어가기 전
버스 나동그라지는 소리에 문 열면
흙빛보다 까만 보퉁이 머리에 이고
신고 싶던 고무신 내려놓고 온
아련한 얼굴에
신산한 삶 잠시 장터에
두고 왔을 얼굴에
삼신께 무진이 삼촌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을 얼굴에
엷은 웃음 띠고 옷깃 여미신다.

이제
예순 여섯
지금,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유일한 나들이는
징용 가서 영영 소식 없는
무진이 외삼촌 만나러 가는 먼 길.




시장

시장 어귀에서는
싱싱한 살 내음이 난다.

한 광주리의
배추를 이고 가는
여인의 등에서도
시퍼런 무쇠 칼
아래서 퍼덕이는
고등어에서도
싱싱한 살 내음이 난다.

길 건너
보리밥집에서
땀에 젖은 손으로
한 그릇의
보리밥을 비빈다.

산다는 것은
아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뒤섞으며
푸르른 몸짓이 된다.




꽃의 기다림

섬에서 피는 꽃들은
바다를 향해 모두 핀다.

한결 같이 바다 쪽을 향해
여리고 긴 목을 빼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늘을 가리는 장맛비도
잠시 발길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삶이 어떤 모습일 지라도
마음에 내리는 뿌리가 있어
바다가 두렵지 않음을
꽃은 피면서 알려준다.




빈 집

몇 해 동안
아버지 쓰러진
고향 빈 집 마당 앞
감나무가 지키고 서 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꽃 피워낸
감나무는
빈 집이 되어서도
집안으로 들어가는
방문객에게
감꽃 웃음으로 인사 한다.

유난히
꽃 욕심이 많은
날 위해
감꽃 엮어 주시던
아버지 대신
여섯 살 아이의
감꽃을 엮으며
하얗게 물들어
가는 즈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가 일러주시던 말씀
아이에게 대신
일러주고 돌아서는
고향 빈 집




대나무꽃

깊고 시리게 바람을 맞아도
울지 않던 대나무
운다.

울음소리는
크고 무섭게 들리기도 하고
품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지친 서러움
아프다.

팔십 년에 한 번 꽃 피운
대나무가 운다.




가시고기를 만난 날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난 뒤
수컷은 온 힘을 다해
알을 보호하다가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자
힘이 없어서 죽는 가시고기
가시고기 새끼들은
수컷 가시고기의 살을 뜯어먹고
물살을 가르며 강으로 나아간다.
가시고기를 만난 날
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아버지를 마주했다.




■ 해설

돌아오지 않는 강가에서 아련하게
­김미현의 시집 『돌아오지 않는 강』에 붙여

강희동(시인)

  김미현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의 해설을 쓴다.
  나와 김미현 시인과의 관계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다지 깊다거나 특별히 돈독하지는 않다. 그를 알게 된 것
도 같이 활동하는 ‘글밭동인’을 통해서이다. 김시인의 얼굴
을 알기 전 먼저 그의 시를 통하여 소통하게 되었다. 그의
시 속에는 톡톡 튀는 발상과 은유가 녹아 있었다. 그래서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나에게 시집 발간을
의뢰해 왔고, 해설 또한 그의 작품에 익숙해 있다는 것으로
떠밀려 쓰게 된 것이다.
  사실 시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노동이고 고통 또한 수반
한다. 그럼에도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그 고통 속에서도
창작의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톤M.리치오는’는 그의 저서 시창작 입문에서 “시인
이 된다는 것은 언어에 주의를 쏟으며 그것을 재료로 삼아
작업하는데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이렇듯 김미현 시인도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성을 시를 통
하여 풀어내며 즐겁게 시를 쓰고 있는 듯하다.

  그럼 지금부터 그의 시집『돌아오지 않은 강』을 타고 슬
슬 유람을 떠나보기로 하자.
  금 번 상재한 그의 시 63편을 여러 번 읽으면서 유독
사랑과 이별, 연민에 대한 시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삶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특히 꽃 이름을 제목
으로 하여 쓴 시가 무려 14편이나 된다. 등장하는 그 꽃들
도 화려하고 고급스런 꽃들 보다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 계
절마다 피고 지는 순박하고 수수한 꽃들이 대부분이다. 마
치 그의 품성과 모습을 보는듯하다. 그다음으로는 가족에
대한 시가 많다. 본 시집 제 4편 「참꽃 필 무렵」에 실린
시편들이 그것이다. 이르자면 「골목 안의 푸른 기와집」, 「참
꽃 필 무렵」, 「메밀꽃」, 「박꽃」 등은 아리고 아픈 김미현
시인의 가족사를 시로 나타낸 것 같다. 이 시편들을 통하
여 김 시인이 살아 온 환경과 삶의 언저리를 유추하여 되
살펴 볼 수 있다.
  그럼 주제별로 분류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꽃의 은유

  시에 있어 다른 장르가 가지지 못한 최대의 매력은 은유
이다. 은유란 실재로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쓴다면 여러 말
로 설명 표현 하여야 할 것을 개연성 있는 특정 사물을 등
장시킴으로써 간단히 깊숙하게 구현해내는 표현 방식이다.
좋은 시의 성패는 얼마나 철저하고 고급스럽게 은유하느냐
에 좌우 되는 것이다. 김미현 시인의 시편들을 보면 이런
은유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꽃에 은유하여
쓴 시가 여러 편 보인다.

비에 젖은 밤
깊어가는 가을 햇살에
억새들이 운다
바람결이 깊어지자
울음소리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이름 모를 들꽃을 흔든다
몰아치는 바람에
긴 밤을 뒤척이면서도
생명의 몫을 다해
제자리를 지키는 억새는
울어서 꽃이 된다
­「억새꽃」 전문

  억새는 여름의 푸른빛을 놓아주고 늦가을, 빛바랜 갈색
잎 서걱이며 바람을 맞고 있다. 하얀 씨앗을 낙하산처럼 날
려 새 생명을 퍼트린다. 억새는 제 자리에 서 있지만 그 씨
앗은 날려 새로운 꽃을 준비하는 생명과 희망의 씨앗이다.
억새는 단순한 풀이 아니고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꽃인 것
이다. 즉 억새는 ‘김미현 시인’ 그 자신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김미현 시인의 시에는 서럽고 가냘픈 것
같지만 바람에 휘어질지라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
과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햇살에 /억새들이 운다’고 했다. 아마도
시인은 바람에 억새가 서걱이는 소리를 울음으로 들었을 것
이다. 이울음은 서리 맞아 푸른색을 버린 뭇 다른 풀들의
사연을 대변하는 울음이리라. ‘울음소리는 /강을 따라 내려
가며 /이름 모를 들꽃을 흔든다’ 억새의 울음소리의 청각
적 이미지를 꽃을 흔드는 시각적 이미지로 바꾸었다. 마치
들꽃이 피어 흔들리는 풍경을 보는 듯하다. 시의 매력은 이
러한 청각과 시각이 어울리는 하모니에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묘미는 끝 행에서 ‘제 자리를 지키는 억새는 /울어
서 꽃이 된다’라는 반전과 결론에 있다. 그렇게 억새는 제
몸을 꽃처럼 피워 하늘거리는 하얀 씨앗을 하늘가로 날리며
제 생명을 퍼트리는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다. 피어서가
아니라 ‘울어서 꽃이 된’다니……. 참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시 「억새꽃」을 전체적 맥락에서 읽어 보면 억척스럽게
살아내고 삶을 이어가는 서민들의 삶을 부러지지 않는 억새
에 은유하여 아름답게 꽃피우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고 하
겠다.

  김미현의 시는 비교적 쉽다. 몇 번씩 읽어도 잘 해독이
되지 않는 요즘 시단의 개성강한 난해한 시와는 달리 그냥
읽어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래서 따
로 구절구절 설명하는 것이 도리어 군두더기가 될 수도 있
다는 생각이 든다.

미워하지 않을 것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
다짐하고 돌아서면
해가 지고
바람이 분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언덕 너머로
어둠을 밝히며
달이 떠오르면
기다리던 마음은
다시 꽃으로 핀다
­「달맞이꽃」 전문

  유독 김미현의 시 제목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연꽃, 달맞이꽃, 참꽃, 산벚꽃, 접시꽃, 메밀꽃, 박
꽃, 능소화, 대나무꽃, 민들레, 봉숭아, 산수유꽃, 고구마꽃,
심지어는 풀의 일종인 억새에도 ‘꽃’자를 붙여 억새꽃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김미현 시인은 사물을 아름답게 승화시키
는 신비하고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즉 발견의
미학이 뛰어나 보인다.
  위 「달맞이꽃」의 시는 그리움의 시이다. 달맞이꽃은 낮에
시들어 있다가 달이 뜨면 달빛에 수수하고 담백하게 제 모
습을 드러내는 꽃이다. 시의 내용과 같이 미워하지 않고 괴
롭히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수수하게
기다리면 꽃이 되는 것이다. 달맞이꽃은 큰 욕심 없이 살아
가는 시인 자신이며, 시인의 인생철학인 것이다.
꽃에 대한 시 한편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남도까지 쫓아온 장마는
빗방울을 하나 둘 떨구는데
성난 들소처럼 날뛰던
마음의 고삐를 잠시
대웅전 대들보에 매어 두고
모래 바람으로 얼룩진 몸
법당 앞 연꽃무리 속에 던진다
산다는 것은
낮아져야 맑아지고
구부려져야 가벼워진다는 것을
고요한 연꽃 사이로
뿌연 안개 낀 삶을
오랫동안 씻어내고 일어선다
두려워 하지마라
두려움이 네 삶을 아프게 한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보지만
처마 끝의 풍경소리만
멀리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일렁인다
­「송광사 연꽃」 전문

  송광사 연꽃은 말해준다. ‘산다는 것은 낮아져야 맑아지
고, 구부려져야 가벼워진다는 것’이라고.
시각과 청각의 시적 장치들이 잘 어울린 시이다. 가만히
시를 읊조리고 있어도 송광사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빗방울과 바람에 씻긴 대웅전과 단청에 그려진 연꽃, 그리
고 연못에 피어 올린 연화. 그 오랜 시간 묵언정진으로 있
다가 비 오는 날 깨어난 연꽃.
  ‘성난 들소처럼 날뛰던 /마음’이 송광사에 와서 ‘안개 낀
삶을/오랫동안 씻어내고 일어서’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모
래바람으로 얼룩진 몸’도 풍경소리처럼 정말 가벼워질 것
같다.
  그 뿌리는 더럽고 질퍽한 진흙 속에 두었지만 맑은 꽃으
로 피어나는 연꽃처럼, 범부에게 깨달음을 던져주고 바람에
맞장구치며 편백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잘된 시편들은 시청각의 울림이 수채화처럼 신선하
다.
  앞으로 이런 유형의 시작詩作을 기대해 볼만하다.

  2. 이별 그리고 그리움

  한국인은 애한과 원망이 많아 대중가요의 절반이상이 이
별과 눈물, 사랑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한다.
김미현 시인의 시에도 감수성 있는 사랑시가 많다. 특히
이별, 그리움, 기다림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여성이면서
감성이 풍부한 면이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태생이 섬세
하고 착하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 중 한편을 소개한
다. 아마도 오래 전 처녀시절 잊지 못할 연민으로 남았거나
마음으로 상상한 연인에 대해 쓴 작품일 수도 있으리라.

산등성 바위 뒤에서
산수유 꽃이 피는 건
봄이 가기 전
만나야 할 사람 때문이다
한걸음에 훌쩍 개울을 건너고
낮은 돌담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댓돌 위에 신발
가지런히 벗어두고
기다리는 그대와
마주하고 싶어서이다
산등성 일렁이는 발소리 따라
꽃이 열리는 건
한없는 그대 등에 업혀
지는 해를 등불 삼아
222마을로 내려가고픈 마음이다
­「산수유꽃」 전문

  산수유꽃은 산 속에서 홀로 꽃 피우고 누가 봐 주지 않아
도 때가 되면 진다. 산수유꽃도 외로워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와 동네 나무들과 어울리고 싶다. 도란도란 이야기 새
어 나오는 뉘 집 정원에 가만히 서서, 젖은 밤 창을 타고
새어 나오는 불빛 더불어 환하게 노란 꽃을 달고 싶을 게
다. 그리운 사람이 기다리는 그 집에 가 보고 싶어 이른 봄
노란 꽃등을 달고 봄을 알리는 것이다.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청춘의 붉은 꽃을 피우고 화사하게 화장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떠난
강가에 가만히 앉아 봅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조약돌 하나씩 건져 올립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 온 그들의 기억이
하나씩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람을 막아 줄 숲 없는 한 줄기 빛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납니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
푸른 조약돌 강 한가운데로 던져 날립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 전문

  어쩌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 속에 추억이 없다면 희망 또한 없을 지도 모
른다. 이 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
억 속에 아스라한 추억을 되살리며 강변을 서성거린다.
  이 시는 한 연인에 대한 옛 기억을 아쉬워하며 되돌아보
는 관조와 체념의 의식이 깃들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통속
적인 남녀 간의 이별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실패에 대한 관조와 삶에 대한 기대를
은유한 시이다.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젖어 있다가 깨끗하게 체념하고 또 다시 자신의
길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서 ‘당신’은 단순한
2인칭의 연인이 아니고 자신이 갈구하던 ‘이상’이나 ‘목표’
일 것이다. 건저 올린 푸른 조약돌마저 흘러 보내고 강가
에 앉아 되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에 무엇이 남았을까. ‘조
약돌’? 그것마저도 강 가운데 깊숙이 던져버리고 상실의
감정을 추슬러 툭툭 털고 새로운 삶 속으로 나아가는 힘
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생활 속에서 체념할 것은 버리고 미
래지향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
겠다.

  3. 세상 속에서

  김미현 시인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본인의 직업이 교사여서 그런지 비교적 반듯
하면서도 정의롭고,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민중 지향적인
정신세계가 보인다.

성난 들소처럼 날뛰던
여름의 먹구름도
사정없이 후려치던
그 겨울의 파도도 나였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눈발이 몰아친 후
앙상한 몸피를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빠르게도 느리게도
흘러가는 물가에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연다는 것

사라졌다 돌아오는
옅은 물소리를 따라
구르는 돌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구르는 돌」 전문

  이 시는 김미현 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독백이다.
1연은 다듬어지지 않고 미성숙한 거친 자기 자신을 나타
낸다. 아마도 배움의 시기였던 청소년기인 것 같다. 2연은
청소년기가 지나서 사회에 진출한 시기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인자신이 생각한 관념과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
을 돌아보고 존재를 확인하며 삶의 고비를 접한다. 그리고
3연에서는 세상의 현실을 깨달게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세상의 이치와 도리에 대하여 자성의 목소
리를 가진다. 4연에서는 겸손을 알고 순리를 쫓아 살아가
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며 세상 속으로 젖어 살아가는 모습
이다. 이렇듯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구르는 돌이 되
어 모난 곳을 다듬고 사회적 동물로 적응하면서 제 길로
가는 것이다.

추운 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바람개비
잠든 것 같아 다가가서
살며시 기대어 본다
생각지 못한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바람개비는
성난 바람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제 길을 가도록 잠들지 않고 있다.
바람이 떠난 뒤에도
바람이 가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오래도록 거두지 않는다
상처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
서서히
어둠은 옅어가고 바람은 낮아진다
­「바람개비」 전문

  바람을 맞아야 제 몸을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
상처 많은 사람이 더 상처 많은 사람을 보듬고 안아주는
세상. 이러한 세상을 김미현 시인은 꿈꾸고 있는 것이다. 희
생과 봉사가 살아있는 세상. 그런 사랑을 돌아가는 바람개
비에서 찾아내는 시인의 가슴. 이것이 진정한 인간애이다.
이러한 사랑이 각박한 세상을 부드럽게 하고 또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 세찬 바람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미현 시인의 시 속에는 인
간미와 따뜻한 사랑이 있어 아름답다.

  다음의 작품 「대나무꽃」은 아들을 잃고 내면의 슬픔을 간
직한 채 사는 어머니를 대나무에 은유하였다. 대나무처럼
단단하지만 감춰진 그 서러움을 팔십년 만에 피는 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안으로 감추어 울고 있는 슬프고 애절한
시이다.

깊고 시리게 바람을 맞아도
울지 않던 대나무
운다
울음소리는
크고 무섭게 들리기도 하고
품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지친 서러움
아프다
팔십년에 한 번 꽃 피운
대나무가 운다
­「대나무꽃」 전문

  대나무도 꽃을 피우는가? 꽃이 핀다. 참 보기 드문 일
이다. 대나무의 이미지는 곧고 푸른 청렴과 지조이다. 그
런 단단한 대나무가 운다는 것은 사건이다. 그럴만한 사
연이 있는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파행적이다. 대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한번 꽃을 피우고는 그
일대 대나무는 모두 고사한다고 한다, ‘개화병開花病이다.
모든 것을 다 던져 꽃피우고 죽어서 영원한 삶을 얻는 것
이다.
  무슨 사연으로 떠났는지 모르지만, 돌아오지 못한 곳으로
간 아들을 기다리는 늙은 부모의 한이 보인다. 아마도 다시
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못내
그리워하는 어미의 울음일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팔십년
에 한번 꽃 피운/대나무’에서 어미의 한을 참고 참다가 죽
음의 문턱에서 꼭 한번 터뜨리는 대나무꽃으로 형상화 시키
고 있다. 대나무의 꽃 피움은 곧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다. 그토록 깊은 서러움과 한을 대나무꽃에 은유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김미현의
시에 이런 부분이 녹아 있어 경이롭다.

4. 작고 낮은 곳의 사랑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높고 큰 것을 지향하는
것 보다 작고 낮은 곳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
다. 그 작고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랑이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럼 김미현 시인의
사회에 대한 의식세계와 작은 사랑을 그리는 시편들을 살
펴보자.

봄비가 내리는 아침
교문 앞 생강나무
베어져 쓰러진 자리에
새 현수막이 걸려있다.
‘꿈을 심고 가꾸는 학교’
생강나무 꽃들이
비에 젖어 흩날리고
잘린 가지들은 담벼락 아래
켜켜이 신음하는데
출근길에 눈 맞추던 생강나무
차가운 현수막이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제대로 가는 길인지
궁금해지는 아침
교문 앞을 서성인다
­「교문 앞에서」 전문

  김미현 시인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이다. 아마도 학교
출근길에 밑 둥이 잘려 나간 생강나무와 그 위에 걸려 진
현수막을 보고 쓴 시인 것 같다. 현수막 글자 ‘꿈을 심고 가
꾸는 학교’ … 아이러니컬하다. ‘생명을 자르고 죽이는 행위
를 한 학교’ 그 속에서 무슨 참 교육이 될까. 가르치는 교사
로서의 선뜻한 자성이 일어난다. 이 작은 사건 하나로도 현
재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실천하는 교육이
아닌 현수막처럼 걸어 게시하는 교육을 꼬집는 것이다. 무
엇이 중요하고 가치로운 것인가. 나는 제 되로 제 길을 가
고는 있는 것인가? 시인은 교사로서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자성하고 있다.
  사회 비판적인 시 한편을 더 살펴보자.
  시는 제목이 중요하다. 제목으로부터 암시를 가지고 반전
과 은유를 잡아낼 수 있다. 김미현 시인의 시들은 대부분
제목을 잘 정한 것 같다. 특히 「푸른 갈대」가 그렇다.
  아래 시는 재개발지구의 풍광을 나타낸 것이다.

아스팔트 벗어난 길은
개발지구
화려한 표지 앞에서 끝났다
외진 구석
급히 쫓겨난
푸른 옷가지 몇 벌
주인 잃고 나뒹구는데
쉽게 가라앉지 않는
잔기침으로
나는 쿨럭인다
아스팔트 길 위에서
마주친 그 푸른 갈대
바람이 부는
길 안쪽으로
성난 몸을 기웃거린다
나와 마주친
서늘한 눈길
애써 먹은 것을
다 토해 낸
나는 부끄럽다
­「푸른 갈대」 전문

  갈대는 연약하다. 바람 불면 온 몸을 휘청거리며 바람을
맞는다. 그러나 쉽게 꺾기지 않는 생명력을 지녔다. 그리고
푸르게 제 색을 잃지 않는 지조를 가졌다. 여성과 민초들을
비유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식물이다. 위의 작품은 아마도 재
개발지구에서 쫓겨난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쓴 시일 것이
다. 시인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또한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보다 더
낮은 저소득층의 사람들을 걱정한다. 본인이 향유하고 있는
것들을 미안해한다. 과연 시인은 자신의 직분에서 참교육을
하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부끄러
워한다. 즉 양심을 가진 이 시대의 시를 쓰는 사람인가를
생각케 한다. ‘나와 마주친/ 서늘한 눈길’을 통하여 반성의
자책을 가지며 또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시인이다. 어둡고
낮은 곳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가졌
다. 그래서 그의 시는 따뜻하다.

  이 시집에는 짧으면서도 단단하게 함축된 시들도 있다.
  이런 시는 쓰기 쉽지 않을뿐더러 입맛을 깔끔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는 것이다
-「봄」 전문

  그렇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 기독교
나 불교에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인류를 종교적으로 이끌
고 있다. 사랑과 기다림이 있어 ‘봄이 오는 것이다’. 푸른
희망이 있고 열매 맺을 꽃을 피우게 하는 봄이 오는 것이
다. 사랑으로 인하여 살아 갈 희망과 긴 겨울을 참고 기다
리는 힘을 얻는 것이다.
「봄」은 짧은 3행 속에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품
성과 사상, 기대되는 희망찬 미래를 모두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김미현 시인의 첫 시집 돌아오지 않는 강의
시세계를 11편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의 시 속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연민이 있다. 서정이 있는
맑은 희망을 세상에 던져 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따
뜻하다.
  시는 ‘시다워야’ 한다. 서정과 시 의식을 동반하여야 한다.
김미현 시인의 시편들이 나름대로의 ‘시 의식’을 가지고 제목
소리를 낼 수 있어 무척 희망적이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첫 시집을 시작으로 제2집에서는 보다 더 발전하여,
변별력 있고 완성도 높은 아름다운 제 목소리 내기를 기대
해 본다.





∥특집∥­이 계절의 시인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구멍 뚫린 낙엽의 가늠
쇠 구멍으로 가늠하는 가을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잡히지 않는 주
파수로 치익치익 쇠소리를 내는 가을은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 김여선 시인




용계 은행나무

용계 은행나무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그리워
용계 은행나무 찾아간다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
바람의 근육질이 나무를 흔들 때마다
노란 은행잎들은 후두둑 떨어지고
찢겨진 바람의 힘줄 사이로
창백한 낮달이 떠 있다
바람이 불수록 빳빳하게 일어서는
살점 빠진 용계 은행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찌르고
상처 난 하늘에선
새 한 마리 날아간다
가을 어둠은 금세 찾아오고
다리 위에 서서
사진을 찍던 사람은 없었다
새 한 마리
용계 은행나무에 앉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폐차장

기름때는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세탁기로 검은 내음만 대강 씻기우고
녹색의 철망에 손가락 접힌
목장갑이 말려지고 있었다

가슴 속 동그랗게 말리는
자동차 미터기의 숫자판 너머로
잎 떨군 입동의 포도밭이 보인다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늙은 포도나무
각이 선 콘크리트 기둥에
십자가로 팔 벌려 깁스 당하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른 포도나무 잎들이
목장갑으로 손을 흔들 때
폐차장 안으로 입동의 바람이 분다

362746.2키로미터 16년 5개월 붉은 색 액센트

우린 너무 오랜 세월 같이 달려왔어
도축장 황소의 마지막 쇳울음으로
엔진은 천식의 쿨룩 거림으로 잦아들고
기중기에 매달린 폐차된 자동차가
마른 포도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늦가을 주산지

가을을 다 보내고
삶이 모서리를 드러내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왕버들 마른 가지 사이로
지난 봄 싹 틔운
연둣빛 사랑의 그림자가
지난 여름 잎 키운
초록빛 사랑의 흔적들이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주산지 차가운 물 속에
그리움으로 쌓인다는 걸

가을을 다 보내고
낙엽들이 칼국수로 풀어지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그리움을 수장水葬 시킨
오후 햇살은
산능선을 쉽게 넘어가고
아무 일 없는
산골짝의 바람은
잔물결을 일으킬 때
우표로 쌓이는 낙엽들만
늦가을 주산지에서
그리움들을 전송하고 있다는 걸




그 해 여름

그 해 여름의 막바지에
서른 살 아들을
잡일 하는 곳으로 보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좀 보라는 욕심으로
여름 내내
낮에는 땀 흘리면 잠만 자고
밤이면 친구들과 밤새도록 청춘을 헤매는
아들의 삶이 서글퍼서
방을 구하고
장을 보고
이튿 날 새벽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안동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눈 앞이 흐려진다
눈꼽을 떼면 맑아지겠지
헛기침이 나서
안평 쉼터에 차를 세웠다
담배연기처럼 사라질 시간들
구름이 아름다운 건
구름 뒤에 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일까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또 운전한다
10년 넘은 자동차 소리가
잡히지 않는 주파수로 씨익씨익거린다




멀리 있어 아름답다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구멍 뚫린 낙엽의
가늠쇠 구멍으로 가늠하는
가을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잡히지 않는
라디오의 주파수로
치익치익 쇠소리를 내는
가을은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리움을 토해내는
가을은
멀리 있어 아름답다
숨어 있어 그립다




안계장

  색바랜 페인트 우시장 국밥집
  수명을 다해가는
  사레 걸린 형광등 불빛이 위태롭다
  파리똥들이 식탁 모서리마다
  마침표를 찍고
  천정으로 올라가 수많은 별을 그렸다
  아버지가 돌아온 건 이튿날 새벽이었다. 거푸집으로 머리
에 얹혀있는 이슬 맞은 중절모는 느슨해지고 입에서는 술막
찌 냄새가 났다. 1년 내내 키운 소를 팔러갔던 아버지. 아
버지 손에는 소 판 돈이며 내년에 농사 지을 송아지 한 마
리 들려있지 않았다. 노름판이였는지. 색시집이였는지. 아버
지의 입은 굳게 닫힌 철문처럼 견고했다.
  그런 아버진 수십 년 전에 파리똥 같은 까만 점 하나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지금도 우시장 국밥집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가끔 사레를
친다




폐교

달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산 밑으론
시루떡 같은 어둠이 켜켜이 쌓이고,
머리 깎은 아이처럼
생장점을 전정 당한
운동장 울타리의 측백나무 너머로
목 잘린 수수의 메마른 잎들이
사그락사그락 맨살을 부비고 있다.
운동장 생선 가시로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은 하늘에 올라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꼭지가 잠겨 버린 수돗가에
잡초로 자란 무서리 맞은 메리골드의
축 쳐진 어깨 너머로
어둠에 침식당하는 숙직실이 보인다.
인두화처럼 노랗게 번져가던 별들이
수신되지 않는 텔레비전 안테나 위로
뚝뚝 떨어진다.
흑백사진 피사체로 잡혀진
페교를 바라보면
마른 기침으로 쿨럭이는 바람은
옥수수 튀밥으로 흩어지는 은행잎들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떨어진 별들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가을 건널목

굳은살이 밴 아버지의 손마디처럼
무뚝뚝한 차단기 위로
해거름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정지

차단기가 허리를 굽히면
털털털
마른 기침을 해대는 낡은
아버지의 경운기가 건널목 앞에 서고
짐칸엔 객지로 떠나는 막내의 보따리에
배추 고갱이 같은 햇살이 쌓인다
시멘트 실은 화물열차가
독 오른 한 마리 파충류로
검은 독을 뿜어내고 남쪽으로 모습을 감추면
스스스
목 잘린 수수밭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막내의 가슴을 파고든다

출발

차단기가 일어서고
가을의 마지막 햇살에
가을강은 하혈하고
털털털
경운기 한 대 건널목을 건넌다




탑리에서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태백산맥 허리쯤에서 내려온
석탄 실은 기차가 한 마리
파충류로 탑리역을 휘감는다
도로 확장 공사로
앞발 잘린 금성산*이
장맛비로 희미해진다
골짝으로 기어간 기와집 굴뚝 위엔
밀가루 같은 저녁 연기가
칼국수로 풀어진다
산맥이 끝나는 벌판 위에
묻혀진 공룡의 역사처럼
논둑들은 희미한 손금을 그었다
현실은 일정한 크기의 지폐처럼
차창으로 복사되고
간이역 탑리에서
짧은 여름밤 같은
기차는 지나갔다

*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산.




차표 한 장

파장 무렵
막걸리 한 잔에
얼굴이 불콰해진 할아버지
시골버스에 오른다
주머니를 다 훑어도
노란 은행잎 같은
차표는 나오지 않고
중국집 부엌의 환풍기처럼
시뻘개진 얼굴로
환장한다 환장해
막걸리 추임새를 내뱉는다
시골버스 정류소
은행나무에서는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노란 차표들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 해설

낮은 목소리가 주는 깊은 울림

김윤한(시인)


  김여선 시인의 시편들을 읽는다. 해설을 부탁해왔을 때
과연 내가 쓰는 것이 타당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유명한 시
인과 평론가들이 많은데 구태여 내가 맡아서 시인의 작품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시인’이라는 것은 ‘시’와 ‘인’이 합쳐서
된 것으로서 시를 논할 때면 그 시인의 인간적인 면도 염
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설 쓰는 것을 수락하게 되
었다.
  하기는 어떤 측면에서는 요즘 나오는 시집들을 보면 오로
지 유명하다는 이유에서만 일면식도 없는 평론가나 대학의
교수들에게 해설을 부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
니 해설이 독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현학적인 수사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시보다 해설이 더 어렵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 쉬운 시를
쓰는 것도 좋겠지만 시인은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어서 어
려운 시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해설이 시보다 어려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평론은 당연히 평론가가
쓰되, 시 해설은 전문 평론가가 쓰지 않는 것이 시의 대중
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평론가가 쓰더라도 적
어도 시와 평론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써야 ‘강단비평’이
아닌, 말 그대로 독자 위주의 진정한 ‘해설’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김여선 시인과 나는 1969년에 창립되어 우리나라에서 시
동인지로서는 가장 오래 발행된 것 중 하나로 알려진 시 동
인지 글밭의 같은 멤버로 이십여 년 이상을 함께 해 왔
다. 따라서 적어도 그의 인간성을 기반으로 시를 해설한다
는 측면에서는 내가 맡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위안이 되기
도 하였다.
  김 시인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현재까지 줄곧 초등학교
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벌써 나이 오십을 훌쩍 넘
긴 나이. 처음으로 함께 글밭 동인회에서 만난 것이
1996년, 우리가 서른의 혈기 왕성한 나이를 자랑하던 때
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와 나는 우리 동인회의 대표적인 주당
에 속한다. 동인회 모임 때면 으레 서로 마주 앉아서 만취
할 때까지 술을 마시곤 한다. 주종도 같은 소주이고 술 마
실 때는 일체 식사를 안 하고 안주도 최소한으로 하는 ‘잔
당일점주의’ 즉, 소주 한 잔에 안주 한 점을 집어 먹는 식으
로 술 습관도 비슷하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주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김 시인은 그저 대꾸를 해 주다가 가끔
씩 이야기를 거들곤 한다.
  나는 여태껏 시를 써 오면서 여러 가지 실험도 하고 변신
도 했지만 김여선 시인의 시는 언제나 잔잔하고 낮은 목소
리의 톤을 유지하고 있다. 술 마시는 행태와 시도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처음 우리가 만날 때보다 나이도 스무 살 이상 더 먹었지
만 그의 시는 언제나 처음 쓰는 것과 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시인은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잔잔
하게 낮은 목소리로 풍경을 묘사하듯이 파스텔로 그림을 그
려 나가듯이 시를 쓴다. 읽다가 보면 저절로 그 잔잔하고
쓸쓸한 분위기에 젖어들곤 한다. 김 시인의 시는 그런 매력
을 갖고 있다.
  김여선 시인의 시는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굳이 분석을 요하지
않을 정도로 시인이 던져주는 언어의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시인의 시를 네 부분으로 나누
어 살펴본다.


  1. 잔잔함과 쓸쓸함

  시는 누가 뭐래도 서정이 그 본령이다. 물론 다양한 실험
을 할 수도 있고 문학 운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 마
지막으로 다시 돌아와 기대어야 할 곳은 ‘서정성’이다. 그런
면에서 김여선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시가 마지막으로 지
향해야 할 지점, 즉 서정성과 함께 하는 일이다.

용계 은행나무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그리워
용계 은행나무 찾아간다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
바람의 근육질이 나무를 흔들 때마다
노란 은행잎들은 후두둑 떨어지고
찢겨진 바람의 힘줄 사이로
창백한 낮달이 떠 있다
바람이 불수록 빳빳하게 일어서는
살점 빠진 용계 은행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찌르고
상처 난 하늘에선
새 한 마리 날아간다
가을 어둠은 금세 찾아오고
다리 위에 서서
사진을 찍던 사람은 없었다
새 한 마리
용계 은행나무에 앉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용계 은행나무」 전문

  안동에는 수령이 700년이나 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
다. 안동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지에서도 그 웅장하고 고풍
스런 위용을 보기 위해 많이 찾는다. 시인도 아마 그곳에
아련한 추억 하나쯤 있는가보다. 길가에 심어져 있는 ‘가로
수 은행나무들이 / 노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화려한 수사가 아니지만 단박에 그 정겨운 풍경들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바람이 분다. 그것을 ‘바람의 근육질이 나무를 흔’든다고
생각한다. ‘찢겨진 바람의 힘줄 사이로 / 창백한 낮달이
떠 있다’ ‘찢겨진’과 ‘낮달’은 이미 시적 화자의 쓸쓸한 심
리를 나타내준다 그리고 마침내 ‘상처 난 하늘에선 / 새
한 마리 날아간다’라는 표현을 통해 어떤 이별 같은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을 어둠은 금세 찾아오고 / 다리 위에 서서 /
사진을 찍던 사람은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용계 은행나무
주변의 쓸쓸한 풍경들이 ‘사진을 찍던’ 그 존재의 아련한 부
재와 쓸쓸함을 표현해내고 있다.

기름때는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세탁기로 검은 내음만 대강 씻기우고
녹색의 철망에 손가락 접힌
목장갑이 말려지고 있었다
가슴 속 동그랗게 말리는
자동차 숫자판 너머로
잎 떨군 입동의 포도밭이 보인다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늙은 포도나무
각이 선 콘크리트 기둥에
십자가로 팔 벌려 깁스 당하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른 포도나무 잎들이
목장갑으로 손을 흔들 때
폐차장 안으로 입동의 바람이 분다
362746.2킬로미터, 16년 5개월, 붉은 색 엑센트
우린 너무 오랜 세월 같이 달려왔어
도축장 황소의 마지막 쇠 울음으로
엔진은 천식의 쿨룩거림으로 잦아들고
기중기에 매달린 폐차된 자동차가
마른 포도 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폐차장」 전문

  폐차장 풍경이다. 1연에서는 ‘검은 내음만 대강 씻기우고
/ 녹색의 철망에 손가락 접힌 / 목장갑’은 이미 폐차장의
분위기를 충분히 암시해 주고 있다. 수묵으로 그린 한 폭의
쓸쓸한 그림 같은 풍경이다.
  2연에서는 ‘자동차 미터기 숫자판 너머로 / 잎 떨군 입동
의 포도밭이 보인다’. 입동의 포도밭은 모든 것이 말라버리
고 스산하다. 3연의 포도나무는 ‘콘트리트 기둥에 / 십자가
로 팔 벌려 깁스’를 당한 상태다. 수명을 다한 자동차의 낡
고 쓸쓸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마침내 오래 된 자동차는 ‘도축장 황소의 마지막 쇠 울음
으로 / 엔진은 천식의 쿨룩거림으로 잦아들고 / 기중기에
매달린 폐차된 자동차가 / 마른 포도 잎으로 흔들리고 있’
다. 마지막 모습을 ‘도축장 황소’에 수명 다한 엔진을 ‘천식
의 쿨룩거림’으로 표현한다.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살아 있
는 비유이다. ‘기중기에 매달린 폐차된 자동차’와 ‘마른 포
도 잎’을 오버랩 시켜 보여줌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높여주
고 있다.
  그 밖에도 「저녁에」에서는 ‘어둠의 상처들이 / 커피 빛
깔로 멍드는 저녁이면 / 웃음 잃은 마네킹으로 서서 / 밤
하늘 바라본다 / 바람이 불고 / 벚꽃은 떨어지고 / 봄이
오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커피 빛깔로 멍드는’ ‘웃음 잃은
마네킹’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가고 있는 봄을 묘사하기도
한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 잡히지 않는 / 라디오 주파수로 /
치익치익 쇳소리를 내는 / 가을은’ ‘멀리 있어 아름답다 /
숨어 있어 그립다’라고 ‘잡히지 않는 주파수’와 ‘멀리’ ‘숨
어’ 있는 아름다운 가을을 표현해 낸다. 새로운 표현과 만나
면 제대로 시 읽는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다.(「멀리 있어
아름답다」)
  ‘얼음 위로 내리는 눈은 빨리 쌓인다’ ‘가슴 위로 내린 눈
은 빨리 쌓였다’라는 대칭적인 표현 사이에 ‘머리 위로 내린
눈보다 / 손등 위로 내리는 눈보다 / 발등 위로 내리는 눈
보다 / 가슴 위로 내리는 눈은 / 더 빨리 쌓이고 오래 차가
웠다’라는 부분은 눈이 이미 바깥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쌓
임으로써 시린 감정을 선명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얼음 위
로 내리는 눈」)


  2. 김여선의 계절
  
  김여선의 시에서는 계절과 관련한 시들이 유독 눈에 많
이 띈다. 서정성 짙은 시 색깔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계절
중에서도 가을에 대한 시가 가장 많고 봄, 여름, 그리고 겨
울에 관한 시는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이 역시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분위기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가을을 다 보내고
삶이 모서리를 드러내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왕버들 마른 가지 사이로
지난 봄 싹 틔운
지난여름 잎 키운
초록빛 사랑의 흔적들이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주산지 차가운 물 속에
그리움으로 쌓인다는 걸
가을을 다 보내고
낙엽들이 칼국수로 풀어지는
늦가을 주산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그리움을 수장시킨
오후 햇살은
산능선을 쉽게 넘어가고
아무 일 없는
산골짝의 바람은
잔물결을 일으킬 때
우표로 쌓이는 낙엽들만
늦가을 주산지에서
그리움을 전송하고 있다는 걸

­「늦가을 주산지」 전문

  늦가을을 ‘삶이 모서리를 드러’낸다고 표현한다. ‘주산지’
연못에는 비록 지금은 가을이지만 ‘지난여름 잎 키운 / 초
록빛 사랑의 흔적들’이 ‘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 주산지
차가운 물속에 / 그리움으로 쌓인다’. 늦가을 주산지에서
세월 지난 사랑의 흔적을 발견한다.
  ‘가을을 다 보내고 / 낙엽들이 칼국수로 풀어지는 / 늦가
을 주산지에 / 가 본 사람은 안다’에서는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들을 솥으로 떨어지는 ‘칼국수’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
현은 이 시집의 다른 시에서도 더러 드러나는데 어린 시절
칼국수와 관련한 아련한 추억이 바탕이 된 것 같다.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들은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습득된 습관이나 기억들이 함께 어울려 나온다는 생
각으로 이해를 한다.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 3연이다. ‘낙엽’이 ‘우표’로 쌓인다
고 묘사한다. ‘우표’는 소식을 전하는 표식과도 같은 것이
다. 그런데 시인은 ‘주산지’에서 떨어져 쌓이는 ‘우표’를 통
해 아련한 ‘그리움을 전송하고 있다’.
  주산지는 경북 청송 주왕산 뒷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
이다. 이 시 때문에 아름다운 주산지를 더욱 운치 있게 해
주는 듯하다. 시인의 표현은 여느 다른 서정시에 비해 색다
른 면이 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특징 있는 비유
를 통해 시적 상상력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해 여름의 막바지에
서른 살 아들을
잡일 하는 곳으로 보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좀 보라는 욕심으로
(중략)
밤이면 친구들과 밤새도록 청춘을 헤매는
아들의 삶이 서글퍼서
방을 구하고
장을 보고
이튿날 새벽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안동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눈앞이 흐려진다
(중략)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또 운전한다
10년 넘은 자동차 소리가
잡히지 않는 주파수로 씨익씨익거린다

­「그 해 여름」 중에서

  청년실업 문제가 시대의 화두로 대두된 지 오래다. 화자
는 ‘서른 살 아들을 / 잡일 하는 곳으로 보냈다’ ‘낮에는 일
하고 / 밤에는 책 좀 보라는 욕심으로’. 하지만 보내는 아
버지의 마음은 쓸쓸하고 짠하다.
  ‘방을 구하고 / 장을 보고 / 이튿날 새벽 / 라면 하나 끓
여먹고 / 안동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 눈앞이 흐려진
다’. 취업이 아닌, 삶의 치열한 모습을 체험하고 좀 더 열심
히 취업준비를 소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라
면’은 어떤 면에서는 삶이나 팍팍한 생계의 이미지와 연결
되어 있다.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일은 아버지의 심정을 그대로 나
타내고 있는 표현이다. 참으로 고달픈 삶이다. ‘10년 넘은
자동차 소리’조차도 서글프다. 자식의 취업이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것처럼 라디오 ‘주파수’ 조차 잘 잡히지 않고 ‘씨익
씨익거린다’. 이 시대 아버지의 애잔한 심상을 차분한 목소
리로 읊조리고 있다.
  「그 해 겨울」에서는 ‘구제역을 앓은 소들과 아무런 이유
도 모르는 소들이 / 푸른 비닐 천막의 공동묘지 속에 삭혀
지고’ ‘내 사랑도 구제역 앓은 소들처럼 / 푸른 공동묘지에
묻히면 추억으로 삭혀질까’라고 되묻고 있다. 황량한 겨울,
소들이 구제역으로 죽어나가는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가을은 그대를 위해 온다 / 갖고 있던 시집의 먼지를 터
는 /가을은 그대를 위해서 온다’ ‘밤 한 톨 / 낙엽 한 잎 /
도토리 한 알 / 물속에 잠기는 / 가을 물그림자는 / 그대
를 위해서 온다’. ‘시집’의 먼지를 털며 여러 가지 가을 풍
경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을은 그대를 위해 온다’고 가을
정경을 그려낸다.(「가을, 그리움, 그대 생각」)
  「유월 벚나무」는 ‘하얀 벚꽃이 눈부셨던 사월 / 봄을 시
샘하는 편도선은 / 빨갛게 부풀어 올랐고’라며 아픈 봄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침내 ‘까만 버찌를 바라봅니다 / 자동
차 바퀴에 짓눌린 / 까만 그리움들이 / 가슴을 파고듭니다’
라며 유월의 정경과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가을의 한가롭고 적막함을 표현한 「일상」에서는 ‘가을 오
후 2시의 / 맑은 햇살은 들판으로만 비추고’라는 부분과 함
께 햇살이 비치지 않는 곳을 대비시켜 소외된 풍경들을 일
깨운다. ‘철조망 구석으로는 / 비추지 않아도 좋으리 / 푸
른 병 속의 소주들이 /아직도 넘실거린다’. 가을 햇살의 경
계가 보이는 듯하다


  3. 상실, 그리고 그리움

사택의 사월은 고요하다
거리엔 벚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는데
벚꽃놀이 나온 사람들은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사택의 사월은 고요하다
막걸리 한 잔 붓는다
벚꽃 잎들이 종이컵 속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텅 빈 위 속으로
하얀 그리움들이
생각났다가 사라지는데
사택의 사월은 고요하다

­「사택」 전문

  사월, 벚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무렵이다. 사람들은 벚꽃놀
이를 나왔다가 헤어지고 소란스럽지만 오히려 시적 화자는
외롭다. 아마도 시골 학교 사택에 홀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좋겠지만 오히려 ‘벚
꽃놀이 나온 사람들’의 분위기와 자신의 분위기를 대비시키면
서 외로움 또는 상실감을 더 짙게 묘사하고 있다.
  하필이면 ‘종이컵’에다 ‘막걸리 한 잔 붓는다’ 때마침 ‘벚
꽃잎들이 종이컵 속으로 / 후두둑 떨어진다’ ‘하얀 그리움
들이 / 생각났다가 사라지는데’, 그리고 말한다. ‘사택의 사
월은 고요하다’라고. 홀로 사택에 남아 막걸리를 마시는 화
자의 분위기가 눈에 보는 듯 다가온다.
  ‘그 많던 살점 / 자식들에게 다 던져주고 / 겨울 강으로
가신 어머니’(「강」)나 ‘가을 하늘 닮은 / 막걸리 한 잔 걸친
/ 장터 국밥집에서 난 / 플라스틱 재떨이로 남아있다’(「플
라스틱 재떨이」) ‘프로방스란 이름의 찻집에서 / 식은 커피
를 마셨던 / 얼굴은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데 / 이름이 기
억나지 않는다 / 밖에는 벚꽃들이 꽃비로 내리고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에서는 상실된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화
자의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씩 잃어
버리며 산다. 시인은 그런 점에서 상실 또는 그로 인한 그
리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달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새 산 밑으론
시루떡 같은 어둠이 켜켜이 쌓이고
머리 깎은 아이처럼
생장점을 전정당한
운동장 울타리의 측백나무 너머로
목 잘린 수수의 메마른 잎들이
사그락사그락 맨살을 부비고 있다
운동장 생선 가시로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은 하늘에 올라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꼭지가 잠겨버린 수돗가에
잡초로 자란 무서리 맞은 메리골드의
축 처진 어깨 너머로
어둠에 침식당하는 숙직실이 보인다
인두화처럼 노랗게 번져가던 별들이
수신되지 않은 안테나 위로
뚝뚝 떨어진다
흑백사진 피사체로 잡혀진
폐교를 바라보면
마름 기침으로 쿨럭이던 바람은
옥수수 튀밥으로 흩어지는 은행잎들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떨어진 별들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폐교」 전문

  시골 ‘폐교’의 모습이다. 상실된 시간들을 한 폭의 그림처
럼 묘사하고 있다. 학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폐교’에 ‘달
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시루떡 같은 어둠이 쌓이고’,
‘생장점을 전정당한’, ‘목 잘린 수수의 메마른 잎들’, ‘꼭지
가 잠겨버린 수돗가’, ‘무서리 맞은 메리골드’, ‘수신되지 않
는 텔레비전 안테나’, ‘마른기침으로 쿨럭이는 바람’과 같은
표현들은 굳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묘사
한 풍경들을 읽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폐교’의 풍경을
이처럼 쓸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
고 시인은 말한다. ‘떨어진 별들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라
고. 즉, 사람 하나하나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소외된 별들은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엄연한
현실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슬픈 일이다.


  4. 길 위에서

  시를 간추리다가 보니까 계절에 관한 시와 함께 ‘길’을
소재로 한 것들이 유독 많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길을
가는 것과 비유할 수 있듯이 시인은 ‘길’을 통해 사람이 살
아가는 모습을 잔잔하게 지켜보는 투로 묘사한다.

굳은살이 밴 아버지의 손마디처럼
무뚝뚝한 차단기 위로
해거름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중략)
시멘트 실은 화물열차가
독 오른 한 마리 파충류로
검은 독을 품어내고 남쪽으로 모습을 감추면
스스스
목 잘린 수수밭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막내의 가슴을 파고든다
(중략)
차단기가 일어서고
가을의 마지막 햇살에
가을 강은 하혈하고
털털
경운기 한 대 건널목을 건넌다

­「가을 건널목」 일부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태백산맥 허리쯤에서 내려온
석탄 실은 기차가 한 마리
파충류로 탑리역을 휘감는다
도로 확장 공사로
앞발 잘린 금성산이
장맛비로 희미해진다
골짝으로 기어간 기와집 굴뚝 위엔
밀가루 같은 저녁연기가
칼국수로 풀어진다
산맥이 끝나는 벌판 위에
묻혀진 공룡의 역사처럼
논둑들은 희미한 손금을 그었다
현실은 일정한 크기의 지폐처럼
차창으로 복사되고
간이역 탑리에서
짧은 여름밤 같은
기차는 지나갔다

­「탑리에서」 전문

  「가을 건널목」은 평생 일만 하다 늙어가는 아버지가 건널
목을 지나는 모습을 묘사한 시이다. 화자는 ‘차단기’를 ‘무
뚝뚝한 아버지의 손마디’로 비유했다. 그 위로 ‘해거름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성스럽기 까지 한 풍경이다.
  아버지가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사이에 ‘시멘트 실은 화물
열차가 / 독 오른 한 마리 파충류로 / 검은 독을 뿜어내고
남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장면은 오히려 아버지의 모습과
대비가 되어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하필이면 ‘목
잘린 수수’가 있는 밭이 있어 더욱 애잔하다.
  마침내 ‘차단기가 일어서고 / 가을의 마지막 햇살에 / 가
을강은 하혈’을 한다고 묘사한다. 햇살을 받은 강의 모습을
그림의 한 장면처럼 표현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경운기’는
다시 건널목을 건넌다. 아버지의 쓸슬한 여정을 담담한 어
조로 그려냈다.
  「탑리에서」는 시골 기차역의 정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대
개의 시골 역이 그렇듯이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은 볼 수 없
고 한가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역은 길이 지나는 지점에 있
다. 그래서 인생 여로의 한 지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시에서도 ‘도로 확장 공사로 / 앞발 잘린 금성산’,
‘골짝으로 기어간 기와집 굴뚝’, ‘밀가루 같은 저녁연기’,
‘묻혀진 공룡의 역사처럼 / 논둑들은 희미한 손금을 그렸
다’와 같은 오랜 기억 속의 희미한 정경들을 차례로 묘사
해 낸다.
  그리고 ‘현실은 일정한 크기의 지폐처럼 / 차창으로 복사
되고 / 간이역 탑리에서 / 짧은 여름밤 같은 / 기차는 지
나갔다’라고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일상들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제1연 ‘비는 쉬지 않고 내렸
다’라는 문장을 앞부분에 설정하여 나머지 부분 전체가 비
에 젖은 풍경으로 보이도록 설정한 점이다. 시인의 의도대
로 이 시가 비에 젖어 쓸쓸한 시골 간이역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이 밖에도 「영천 가는 길」에서는 ‘한 번쯤은 직행버스를
타고 / 가슴에 쌓여 있는 응어리들 /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
서 / 덜어내는 것도 괜찮은 일’로, ‘어쩌면 당신은 / 간이역
에 서지 않는 / 급행열차처럼 / 그렇게 / 휙 / 지나갔는지
도 모릅니다’(「간이역」)처럼 간이역에서 옛사람의 추억을 떠
올려보기도 한다. 「차표 한 장」, 차표는 인생이 가고 있는
여정의 한 구간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잃
어버린 차표를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 노란 차표들이 / 후
두둑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라고 비유한다. 할아버지가 잃
어버린 차표는 어쩌면 상실되어버린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
기도 하겠다.
  또한 시인은 「손수레」를 통해 힘겹게 폐지를 주우며 길
을 가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시화하고 있고, 「
길」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길의 모습을 제시하
며 ‘늦가을 해거름이면 / 오솔길로 더디게 가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죽변 버스 정류소」, 「도
축장 가는 길」과 같은 작품들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을 인생의 여로라고 할 수 있는 ‘길’을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김여선의 시는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특징을
지녔고 쉽게 읽힌다. 첼로 소리와 파스텔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 모두
가 세심하게 설정한 비유들로 짜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놓은 상황 속으로 함께 들어가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시에 깊이 동화되어 있는 것을 비로소 느
끼게 될 것이다.
  김 시인의 시가 낮고 잔잔한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가
랑비에 옷이 젖듯이 시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오
히려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의 깊이는 웅변적인 다른 시들 보
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시인은 지나친 겸손 때
문에 다소 늦게 시집을 내게 되었지만 오히려 오래 익은 술
처럼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믿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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