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 44집 2018년도 상반기

저 언덕 넘어 2024. 9. 7. 21:33

우리들의 말

  4월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다.
이 땅의 농부들은 올 봄에도 제 밭을 갈고 제 나무를 심었다.
  우리네 글밭도 49년 동안 시밭을 일구고 가꾸어 왔다.
  각자가 심은 나무는 이제 시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누가 보아도
밭다운 시밭이 되었다.
  초창기 출판비가 없어 회원들이 사비로 충당하는가 하면, 인쇄
활자를 찾아 안동 시내를 헤매고, 여관에서 밤새워 교정 작업을 하
고, 막걸리 한사발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전국 순회 문학 강연회 안동 개최, 한국 문협
안동지부 설립, 故 신승박 시비 건립을 위한 ‘글밭 시 - 이호신
그림전’, 글밭 동인 시 창작 워크숍 등을 개최하여 문학 불모지였던,
지방에서는 유례없는 문학 붐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다고 자부한다.
  그 중에서도 이육사 이래 현대시를 이은 신승박, 임병호, 백승초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는 아픔도 있었으나 글밭의 우리들은 끈기와
시 사랑 하나로 참고 버티어 왔다.
  지역 문학의 튼튼한 기초 없이는 우리 민족 문학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다며 69년 이후 우리 글밭 동인들은 지역 문학, 지역 문
화 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또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한때는 중앙 시단을 향해 추천제에 의한 등단제, 문단 파벌 비판
등 시단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방의 시인들이 한국
시단을 향해 개혁을 요구한 것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러나 글밭의 우리들은 ‘개혁을 위한 과제 - 한국 시단에 고함’이라
는 근본적 개혁을 감히 주장하였다.
  농사를 지으면 농부이듯이 시를 쓰면 모두 다 시인이라고, 그래서
글밭 시농詩農들은 세상의 시농들은 다 시인이라고 말한다.
  나무마다 꽃마다 각기 모습이 다르고 향기가 다르듯이 우리 글
밭에도 다 다른 모습과 다 다른 향기로 이제 열매가 익어가고 있
다. 조금은 더 익어야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봄과 가을, 시를 추
수하는 기쁨은 가슴 설레게도 한다.
  우리 글밭은 비록 안동의 지방 시단이지만 한국 시단의 뿌리가
아닌가.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나무 없는 꽃이 어디 있으랴.
  자부심을 갖고 글밭을 더욱 우뚝하게 가꾸어 나갈 것이다.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강 수 완
봄꽃 그렁그렁 …… 10
실치 …… 11
핀다, 진다 …… 12

강 희 동
윤회輪迴 …… 16
자살 …… 17
봄날 …… 18
탓 …… 19
꼴 …… 20
바람에 흐르는 풀꽃의 향기 …… 21
봄비 던지는 안양천변에서 …… 22

권 기 태
우포 늪 …… 26
아기산에서 …… 27

김 미 현 
사월 …… 30

김 여 선
선지국밥집 …… 32
도둑게 …… 34
청어과메기 …… 35

김 윤 한
하모니카 …… 38
여인숙의 시간 …… 39
달의 행적 …… 40
임연수 씨에 대한 고찰 …… 42
눈길 …… 44
아파트의 뿌리 …… 45
제일라사 …… 46
구덩이를 파다가 …… 47
흰수염고래의 꿈 …… 48
족발을 뜯다 …… 50

김 지 섭
꽃 시절에 …… 52
가을날 …… 53

김 진 택
Etude …… 56
자화상 …… 57
시를 지어보다 …… 58
시를 지어보다 …… 60

김 진 회
회향 …… 62
내 시가 당신에게 읽혀지길 거부할 때 …… 64

이 위 발
TV를 보면서 …… 66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 67
그녀의 비극 …… 68
그저 그렇게 사는 …… 69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 70

임 관 혁
겨울이 오면 …… 74
봄 …… 75
그 손끝에 …… 76
세월 …… 77
연탄 …… 78
연꽃 …… 79
봄비 내리면 …… 80
열매 …… 81
고모령 …… 82
보리 매미 되어 …… 83
부엉새 우는 밤 …… 84

임 두 고
봄날에 …… 86
등산 …… 87

임 애 월
새의 길 …… 90
봄을 기다리며 …… 91
콩깍지 …… 92

전 대 진
무념무상 …… 94
괴목 …… 96

조 용 식
인因 …… 98
연緣 …… 99
제설 …… 100
징소리 정鉦 …… 102
봄 타다 …… 103
탁설鐸舌 …… 104
김홍도의 풍속도첩(공원) …… 106

천 승 현
영산홍 …… 108
꽃은 …… 109
겨울밤 …… 110
식은 밥 …… 111
인연 1 …… 112
인연 2 …… 113

특집­인터뷰 / 이위발 시인
진정성으로 빚어내는 시, 마음으로 담그는 된장 …… 115

글밭 略史 …… 137








강 수 완

봄꽃 그렁그렁
실치
핀다, 진다

|시인의 말
꽃필 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가
꽃질 때 그렁그렁 혼자 나와보는 거
지는 꽃이 요즘은 사람 같아요




봄꽃 그렁그렁

그거 알아요?
전에는 꽃이 질 때 눈가가 아프더만
요새는 꽃이 필 때 눈가에 찌르르르 찌르레기가 울더만요
없는 집 제사 닥치듯
봄꽃이 층층 필 때면
숫제 눈물통을 고로쇠물줄기처럼 매달고 다녀요
작년에 간 사람들 환장하게
봄꽃이 저리 피다가는
필시 무덤가 잔디도 꽃처럼 들썩일 테지요
연두도 서러운데
노랑주홍분홍빨강자주 이를 어째요
같이 꽃 보러 갈 사람도 마땅찮은 새 봄에
그거 알아요?
꽃필 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가
꽃질 때 그렁그렁 혼자 나와보는 거
지는 꽃이 요즘은 사람 같아요




실치

봄이 오는 충남 당진 장고항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는 이 마을에
지느러미처럼 포구로 들어오는 고깃배 그물망에
한 번도 죄 짓지 않은 듯 투명한 몸 실치 떼가
조팝꽃무더기마냥 팔딱거린다
눈만 겨우 붙어 있는 몸들이 꼬물거리는 고무대야 안
탁발하듯 겹겹이 포개진 흰 손들이 곱다
실치 많이 잡히믄사 우리야 좋지!
실치 철인데 안 잡히면 싫지!
일 년 농사 실치 잡이 풍년에 한껏 신이 나
농을 던지는 늙은 어부들 내장까지 환해지는 봄
실치회 실치무침 실치튀김 실치볶음 실치구이 실치국 실
치전 실치포 실치찜 실치시금치국
여리고 감미로운 저 맛에 이르는 동안
삼 칠 동안 국 떠놓고 빌던 삼신 상 위 허연 실타래 같다
는 실치
나는 한동안 저절로 착하게 살아야 겠구나
흰베도라치 새끼들 숱한 목숨이 올봄 나를 사람으로 살리
겠구나




핀다, 진다

안동댐 강바닥 청소를 하다가 뱃줄에 목이 감겨 죽었다는
남편을 찾아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여인이 있다
작년 일을 아직도 올해인 줄 알아
저녁상에 올릴 간고등어 봉다리를 들고
지나는 길에 가끔 차를 마시러 왔다
바람 사이를 걸어 와 얇은 옷이 흔들리던 날
오래 한 곳에 들어앉아 있었는지 몸 냄새가 보이차 향을 눌렀다
사람들이 자꾸 미쳤다고 하는데 내가 진짜로 미쳐 비니껴?
빤히 바라보는 눈에 낙동강이 흐르고
입술의 피딱지가 묻은 찻잔에 기우뚱 먼 곳의 동백이 폈다
아 없이 둘이 살다 혼차 있으이 집이 억씨 무섭니더
어떤 땐 집 보다 사람들이 더 무서우이더
남편을 얼러 찾아야 같이 살 낀데 어데 가 안죽 연락이 없니더
뜨거운 찻물이 내장을 어루만졌는지 까만 손톱이 얌전해졌다
집에서 기다리다 하도 안 와가 여게 저게 찾아댕기는데 어딜 갔는동
간고등어 한 손을 다 꾸가 맨날 내 혼차 먹도 모하고 내삐리니더
검정 봉다리를 끌어안아 비린내가 밴 손에 찻잔이 거푸 오르내린다
여 와가 이 뜨신 걸 마시고 가이 메칠 마음이 펜니더
밥집에 드가이 쥔이 식겁을 하고 천 원짜리를 쥐 주며 등따리를 떠밀대요
빈 집에서 보름을 찬 물에 언 밥 말아 먹다가 마이 울었니더
암만 있어도 뜨신 밥 한 술 뜨라는 사람이 없니더
새집 같은 머리를 쓸어 올리자 흰 이마가 반달로 드러났다
땅마지기 쪼매 있는 걸 시집 조카가 하도 졸라서 고마 등기를 해 줬뿌랬니더
체념한 얼굴에 옮겨 준 밭이랑이 길게 꾸불거렸다
댕기던 절에 스님이 조상 재 지내 준다캐가 있던 돈 다 가져가뿌고
아무도 믿을 수 없으이 살던 집이나마 대신 지켜 준다꼬
시누이가 명의를 돌려가 갔는데 한 식구이께 그 말은 믿어도 안 될니껴
울다가 웃다가 할 동안 찻물이 끓었다가 식었다가 한다
이 뜨신 국물을 돈도 안 받고 이꾸 멕애 주는 사장님요 내가 진짜 미쳐 비니껴?








강 희 동

윤회輪迴ㆍ자살ㆍ봄날ㆍ탓ㆍ꼴
바람에 흐르는 풀꽃의 향기
봄비 던지는 안양천변에서

|시인의 말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한 바퀴 돌아 제 자리로 올 때는 유독 심하다.
어디 꽃 없는 열매 있으랴.
모두 저 마다 꽃을 감추어 피우고 시들고 또 가지를 내민다.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강가에서 흘러온 흔적을 가늠한다.




윤회輪迴

외삼촌이 돌아갔다
이제 홀로 남은 어매
곧 그 곳으로 갈
신년 평창 올림픽으로
왈왈 짖어대는 동서양 눈썰매개들
경주 사이로 부고장
눈이 내린다
올 것이 온 곳으로 돌아가는
윤회가 떠오른다.




자살*
­2018.1.1.

새해 새벽
스스로 목과 숨을 끊었다
차 안에서 석화탄
연기 피우고
삶의 무게
빚진 세상의 빛
눈부셔 더 밝기 전
목숨 멈추게 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 트는 아침
기-인 인사

* 무술년 일월일일 새벽 제 차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사업 망한
59세 가장, 그는 나와 부동산과 동창○○○이다. 죽었다.




봄날
­김대규 시인 영전에

나비도 꽃도 못 피운 이른 봄날
너무 따스하여 몸 움츠리는 버들개지
안양천 물은 흐르고 사람은 돌아간다
너무 더디 오는 봄소식 날래 가는 겨울 이야기
그렇게 시인다운 시인 하늘로 가고
나비 날고 꽃 못 피운 봄 꽃날
고매한 선비 하나 별 되어
밤하늘에 올라 내려다 보고
봄은 오려나 또 가려나 
눈대중 하는 어지중간
봄날은 또 간다.






아무리 술이 독하고 많아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으리
‘종일 시비 유有라도 불청이면 자연 무無’
탓하지 마라 남의 근심
모든 것은 나의 것
내 탓이다.






꼴 좋다
만드는 것이 꼴
세모나 네모나 모진 것 매 한가지
둥근 원이 되기 위해 깎이고 닳아
구불구불 막힘을 돌아 원만하게 되는 길
물돌이동 돌아가는 낙동강 사행천도
서리 날카로운 시절 내리고
봄볕에 자지러지듯 꽃 웃음 날려
노랗게 냄새 익어가는 세상 꼴 꿈꾸며
매서운 겨울 잔소리도 견뎌낸다.




바람에 흐르는 풀꽃의 향기

어디에 있든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싣고 오는
맑은 풀꽃의 향기

누구의 눈길 머물지 않는 풀에도 꽃이 있다
풀꽃은 화려하지 않아도 제 냄새를 가찹게 우려낸다
바람이 부드럽게 보채고 향기로운 것은
풀꽃이 제 향기를 남 몰래 덜어 주기 때문이다

그대여 외로워 마라

바위틈을 떠나는 개여울도 홀로
노래하며 풀뿌리를 적시고 흐른다
내 위 주머니를 떠나 구곡 대장을 지나는
자양분도 탈 없이 홀로 제 길을 간다

바람에 흐르는 풀꽃은 보이지 않아도
어디서든 제 향기로 적신
푸른 냄새를 실어 보낸다

오늘도 외진 산골 달리는 바람의 노래에는
풀꽃의 향기가 이득이 흐르고 있다.




봄비 던지는 안양천변에서

경칩이 며칠 지난 날
봄비는 하염없이 흩어지고
안양천변에도 봄빛이 푸르무리 살아 오르는
아침나절 갑자기 불어난 흙탕물이
다릿발 아래로 시원하게 쓸어 흐르는데
나는 어찌 여기까지 흘러들어 와
이 천변에 서서 세월의 흐름을 
저만치 보고 있는가
갯버들은 제 머리칼 풀어 늘어뜨려
연둣빛 염색에 열중인데
오래 전 가랑비 던지는 어느 봄날
백운정 송호림 소나무 아래에서
오지 않는 사람 오래 기다린
옛 기억 희미하게 살아 오른다
그는 어디쯤에서 멈춰 있을까 아님 비 맞고 또 흐르고
몇 날 전 지병으로 숨을 멈춰버린
‘대성’ 형도 저 계류에 섞여 뒤 돌아보지 않고
저쪽 세상을 가고 있을까
봄비를 뚫고 천변을 내달리는 자동차 매연가스 속
살아 온 시간들이 흙탕물에 뒤섞여
다릿발 아래로 쉼 없이 흘러가고
허허로운 봄날이여, 기막히게 허전한 빗방울 속에서
내 이생의 다리를 뒤뚱거리며 건너고 있을 때도
너는 시간의 등허리를 타고 도도히 물결치며 흐르는
봄빛 대열에 몇 비맞은 버드나무 놓아두고
강물 위에 춤추며 물방울 튕기는 봄비가 되어
물속에 뒤엉키며 나도 모르는 아득한
세상 속으로 또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권 기 태

우포 늪
아기산에서

|시인의 말
  하는 일 없이 보내면서 시 한 편을 쓴다는 것이 잘 되
지 않는다.
  독촉을 받고서야 근간 등산에서 좋은 감정을 느꼈던 일
을 생각하며 겨우 두 편을 보냈다.
  지난날 저지레로 한 일들이 늙은 나이에 암초처럼 마음
에 걸리고 돌이키려 해도 몸과 마음만 쓰리다.
  한가하게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
럭저럭 좋게 살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요즘이다.




우포 늪

한 점 구름도 떠난 빈 하늘
은빛으로 출렁이는 물결이
하늘 맞닿은 시야에 가득하다.
호수에 네 얼굴을 비추면
파란 하늘이 살며시 내려 앉고
갯버들 연둣빛 잎들이 춤을 춘다
거룻배에 장대 노를 저으며
멀리 그물을 거두는 어부 손에
한 초망 든 비늘이 반짝이고
고요한 수면 위를 뛰어 오르는
어느 물고기의 탈출이 안타깝다
거울같은 호수 저 편
철새들 떠난 수평선으로
새 봄이 한아름 가득하다.




아기산에서

산길은 님이 만드신 꽃밭이다
진달래 이팝 산벚 꽃비가 내린다
솔순이 쑥쑥 솟아 하늘로 가고
활엽수 잎들이 손뼉을 친다
땅에는 한무리 새싹이 웅성거린다
산노루 두 마리 헐떡거리며
산등성을 휘 돌아 오른다
산새가 조잘거리며 짝을 찾아
뽀송한 털을 떨며 몸부림 친다
어디서 산꿩 날개를 치며 울고
봉황사 염불 산속에 젖는데
임하호 파란 호수 위에
한잎 낚싯배 홀로 지나간다








김 미 현

사월

|시인의 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간절하게도
무량수전 앞
등이 굽은 석등이 되었다.




사월

사월의 밭을 갈며
두려움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익숙함을 마주한 손으로
작은 씨앗을 뿌리고
검은 흙을 북돋운다.

따뜻한 부드러움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
차가운 잔인함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지 않을 것

사월의 밭을 갈며
마주 걸어오는
생명의 당당함이 좋아진다.









김 여 선

선지국밥집
도둑게
청어과메기

|시인의 말
13년 5개월 지난 EF 소나타
방지턱을 지날 때면
완충기는 관절염으로 삐꺽이고
오르막을 오를 때면
엔진은 천식으로 쿨럭인다
시가 쓰기 싫을 때가 있다
오래된 자동차처럼
삐걱이는 소리가 난다
요즘이 그렇다




선지국밥집

새벽 시장이 파할 때면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늙은 할멈 혼자 꾸려가는
선지국밥집
겨울이면 파리들이
천장으로 올라가
겨울잠을 청하던
선지국밥집
시장 가장자리에 돛단배로 떠 있다
몇십 년째 닻을 고정한 채
쭈글어진 살갗의 탁자 위로
깍두기 한 접시
선지국밥 한 그릇
새벽 일 끝낸 아버지의 몫이다
새벽이면 습관처럼 삼켜대던
아스피린 냄새가
달팽이관으로 스멀스멀 파고든다
어지럽다
아버지는 어지러울 때마다 아스피린을 먹었다
그 해 겨울
선지국밥집 천장으로 올라갔던 파리는
봄이 되어도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천장에 까만 선지로 익어가던
파리똥만 흩어놓고 사라졌다
지금도 선지국밥집 천정에는 까만 선지들이
별이 되어 박혀있다
아버지의 까만 기억들이
별이 되어 빛난다




도둑게

그리워하다 잊어버리면
처음처럼 투명해진다지
일년 내내 바다만 그리다가
일년에 단 하루
보름달이 떠오른 날
바다로 나간다
알을 품은 도둑게의
둥근 뱃가죽으로 떠오른 달
달빛을 품은 도둑게
바다로 나간다
수평선이 부풀어 오른다
달빛에 익은
하얀 알들을 풀어낸다
달빛의 인력에
알들이 쏟아진다
몸을 다 푼
도둑게
뱃가죽이 창호지처럼 투명하다
달빛에 알들이
모래알처럼 투명하다




청어과메기

흐린 겨울은 서럽다
서러운 날은 바다가 그립다
푸른 바다가 그리워
영덕에 간다
창포마을 청어과메기 덕장에
해풍이 분다
푸른 비린내가
잿빛 고소함으로 물든다
어머니 살갗으로 말려가는
창포마을 청어과메기
하늘도 잿빛으로 흐린 겨울
짚 엮거리에 꾸득꾸득 말라가는
청어과메기
푸른 소주병이 그립다







김 윤 한

하모니카ㆍ여인숙의 시간ㆍ달의 행적
임연수 씨에 대한 고찰ㆍ눈길
아파트의 뿌리ㆍ제일라사ㆍ구덩이를 파다가
흰수염고래의 꿈ㆍ족발을 뜯다

|시인의 말
  ‘한 해에 두 번씩 내는 동인지’, ‘글밭’의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매년 정기적으로, 게다가 정기간행물 등록을
하고 반년간으로 내는 동인지는 아마 그 유례가 없을 것
이다.
  그 덕분에 동인지에 내는 시만 해도 상하반기 각 열 편
씩 일 년에 최대 스무 편이나 된다. 감당하기 수월찮은
일이다. 그렇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익숙해져가는 것 같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열심히 써 내지만 과연 무엇을 위
해 쓰는가, 과연 내 시가 무엇으로 남을까를 생각하면 뚜
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직은 없다.
  하지만 오늘도 쓴다. 무엇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
이 생각을 거듭해서 한 편을 완성해가는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하모니카

  구멍마다 제각기 다른 색깔들이 들어 있어서
  하모니카를 들을 때면
  온갖 생각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섬집 아기’는 잠에서 깼는지, ‘스와니 강물’은 아직도
여전히 반짝거리며 흐르는지
  언제 우리는 어른이 되는지, 그 소녀는 나를 좋아하고 있
는지
  소리를 따라 별들만 깜박거렸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저만치 앞서 달리던 친구는 지금 어
디쯤 달려가고 있을까
  흰 목깃 교복 입은 그 소녀는 어디로 떠났는지
  오래도록 잊었던 하모니카 소리 어디선가 다시 들려왔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은 여전히 눈부시게 피고
있을까
  하모니카 소리는 여전 변함이 없는데
  돌아갈 수 없는 길 너무 멀리 오고 말았구나

  하모니카 속에는
  온갖 그리운 것들만 가득 들어있다




여인숙의 시간

복도 따라 방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여인숙, 흑표지로 된 숙박계에 이름을 적으며
떠도는 영혼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한다
방문 사이로 늙은 안주인이 들여보낸 쟁반
그 위에 놓인 주전자와 컵 그리고 낡은 수건 하나
내 몫으로 주어진 여유를 감사해 하며
낯선 여행, 꿈속에서 길 잃을까
신문지 깔고 방으로 신발을 들인다
이 좁은 방,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을까
낡은 ‘카시미롱’ 이불에 붙어있는
긴 머리카락과 정체 모를 터럭들 뜯어내며
어젯밤 거쳐 간 사람들의 체취를 떠올린다
밤이 깊어지자 방음 안 된 옆방에서는
얼굴 모를 여인이 연신 신음소리를 내고
젊은 밤은 더 아프게 지나갔다
얼마나 잤을까, 액자만한 창틀에 여명이 들자
수건 하나씩 목에 걸치고
공동세면장, 지나간 밤의 흔적들을 씻어내고
어제처럼 다시 제각각 길을 찾아 떠난다
여인숙, 잠시 머무는 곳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것은 떠나기 위한 것
한 세기의 끝자락에서 잠시 머물렀다 떠나온
그 시간과 공간들이 아련하다




달의 행적

  누구나 달 하나씩은 갖고 있다
  태어나던 날, 뚫린 창호지 사이로 들어와 가만히 나를 비
추던 그 하현달
  어릴 적 새벽, 자다 깨어 거름더미에 오줌 갈기고 쾌감에
부르르 몸 떨 때면
  그 위에 은빛으로 부서지는 달빛
  홀로 밤길을 걷는 것은 무서웠다
  그럴 때면 외로운 달, 천천히 내 보폭에 맞춰 따라오고
있었다
  발걸음 멈추고 올려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발걸음 멈추고 느티나무 가지 사
이에 숨어 시치미를 떼곤 했다
  젊은 날, 우울의 강은 넓고 깊었다
  그럴 때면 가만히 나를 쓰다듬던 손길, 가슴 속에 달 하나
키우며 그렇게 시절을 보냈다
  너무 멀리 왔구나, 낯선 나라
  어김없이 그곳까지 따라와 친근한 표정으로 내 그림자를
만들어주곤 하던 나만의 달
  오늘은 그믐, 비록 달은 뜨지 않았지만
  달거리가 그친 것은 자궁 속에 또 하나의 달을 잉태했기
때문
  어느덧 다시 자라나는 초승달 하나, 아무리 해도 달의 중
력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달의 자식이었다




임연수 씨에 대한 고찰

  생선을 굽는다, 임연수
  껍데기로 쌈 싸 먹다 천석꾼도 망했다고 하는

  어류학 기술서 난호어목지,
  옛날에 임연수라는 사람이 이 물고기를 잘 낚아서 그 이
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 때는 뼈대 있는 집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점에서 분
리되는 반듯한 뼈를 보면,
  그러나 대개의 옛날 사람들처럼
  덧바른 흙이 우둘투둘한 벽과 잿빛 초가지붕 아래
  기침 잦은 노부모와 볼이 야윈 아내와 참새 같은 아이들
몇이 그에게 딸려 있었을 것이다

  쌀독 바닥 긁히는 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이 찬바람 부는 바닷가로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물고기를 잘 잡게 되었을 것이다
  더러는 팔기도 하고 그 돈으로 쌀을 구해다가 잡은 물고
기를 반찬으로 먹기도 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그저 끼니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을 그의 이
름이
  세월 흘러도 여전히 퍼덕거리며 살아있음은
  이 세상을 묵묵히 지탱해온 것은 다름 아닌 모든 이름 없
는 사람들임을
  그를 통해 대신 말해주는 것

  잘 익은 생선 한 조각을 씹으며,
  오늘도 찬바람 맞으며 식솔들 위해 묵묵히 땀 흘리는
  수많은 임연수 씨를 생각한다




눈길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아버지가 뒷짐 지고 걸어갔던
그 눈길 홀로 걸어갑니다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리운 발자국들이
줄지어 찍혀 있습니다
잠시 동행했던 수많은 발걸음들도
아득히 눈발 속에 묻히고
떠나가 버린 여인의 흩날리는 머리칼도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곤 합니다
한 때는 어지럽게 발자국을 찍으며
길을 잃고 방황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눈길에 푹푹 발이 빠집니다
얼마를 더 걸어가야 길은 끝이 날까요
마지막 발자국을 마침표로 찍고
아득히 먼 길 홀로 떠나가는 날
누가 가만가만 손 흔들어 줄까요
발자국 남길 때마다 눈은 끝없이 내려
발자취를 지우고 또 지우고
시간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자꾸만
눈발이 되어 비껴갑니다




아파트의 뿌리

모든 나무에는 뿌리가 있지만
아파트 공사장, 땅 속으로 박히는 파일은
기둥에 불과할 뿐, 뿌리가 아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한동안은 어색했지만
잠결에도 화장실을 익숙하게 찾을 무렵부터
비로소 조금씩 실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편함에 꽂힌 관리비나 의료보험료 고지서를 보며
생활비 걱정을 하는 동안
뿌리들도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는 동안 아파트 앞 나무가 자라는 만큼
놀이터의 아이들도 쑥쑥 자라고
사람들의 뿌리도 조금씩 더 뻗어나갔다
찜통에서 곰국이 끓고 있는 동안
베란다 화분에서 눈부신 꽃이 필 때도 있었지만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는 법
아픈 상처에 연고를 바르기도 하고
남모를 슬픔에 베갯머리를 적시기도 했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듯이
모든 아파트에도 그 높이만큼 세월만큼
쓰리고 아픈 뿌리가 있다




제일라사

양복점은 기차역 맞은편에 있었다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수양버들이 서 있었다
유리문 안에 한가한 양복들이 걸려 있었고
키가 큰 주인은 손님이 오면
줄자를 풀어 살아온 이력을 재곤 했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위해서
조심조심 가위질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수많은 날을 그렇게 보내곤 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손님은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양복을 입고
약혼사진을 찍고 아름다운 드라마를 꿈꾸곤 했다
그러나 주인의 허리가 굽어질 무렵부터
사람의 몸에 옷을 맞추는 대신
기성의 틀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지 못하면
낙오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옷을 입은 신사들도
휠체어를 타고 낡은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창틀에도 먼지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녹슨 세월이 간판 위로 흘러내렸다
소방도로 때문에 수양버드나무가 베어질 무렵
키가 커서 오히려 쓸쓸한 주인도
요양원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후의 소식을 아는 이는 없었다




구덩이를 파다가

구덩이를 판다
흙이 쌓이는 만큼 더해지는 깊이
이렇게 파내려 가면 무엇이 나올까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나라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
바닷가 작은 도시 푼타델에스테
따뜻한 빵 한 봉지를 사들고
피곤한 가장이 귀가를 서두르는 사이
오가는 차량 경적 소리에 맞춰
플라타너스 열매가 툭툭 떨어진다
저녁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팜파스 초원 위로 널리 퍼지면
이내 어둠이 서서히 마을을 점령한다
밤은 사랑이 피어나는 시간
반도네온 반주에 맞춰
탱고 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
이윽고 하늘에는 별이 돋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 시간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와
반듯하게 묘목을 세우고
구덩이를 덮는다
들리던 음악소리도
땅 속에 함께 묻힌다




흰수염고래의 꿈

  어쩌다 바다로 왔을까
  하지만 출렁이는 파도는 일상이었고 정작 알고 싶은 것은
기억의 바깥, 구름으로 떠돌고 있었다

  백악기, 공룡들처럼 사라지지 않고 살아야겠다며 낯선 바
다로 향했을 것이다, 아마
  뜨거운 피로 빙하 조각 녹이며 헤엄을 익혔을 것이다

  길은 많았다, 대양을 이어주는 아득한 해류
  하지만 그것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히
려 거대한 배들이 앞을 가로막곤 했다

  생각이 많은 만큼 절망도 많았다
거대한 몸집만큼 오히려 더 고픈 배, 크릴새우 떼들만 현
기증으로 아른거리곤 했다
  그 때마다 젖먹이들 더욱 칭얼거렸다

  참았던 숨 내쉬는 해녀처럼 허파 가득 참았던 호흡 분수
로 뿜어내곤 했지만 그들처럼 돌아가 쉴 땅은 존재하지 않
았다
  다만 정처 없이 해류에 흔들리며 갈 뿐

  커져가는 만큼 바라는 것은 작아졌고 가끔씩 해를 바라보
기는 하였지만 낯설었다
  그럴 때면 낮은 주파수로 외로움을 읊조릴 뿐, 세월 지날
수록 더욱 침침해지는 시야

  하지만 눈꺼풀 닫히면 주검, 섬 되어 떠돌다가 어쩌다
  지질시대에 떠났던 그리운 대륙, 다시 돌아가 낯선 해안
가에 닿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낯설어진 곤충이며 동물들 무심하게 몰려올 것이다




족발을 뜯다

가지런히 담긴 살점들 아래
흔들리며 걸어왔던 발자국의 역사가
뼈다귀로 놓여 있고
식당 입구, 사람들이 벗어둔 신발 위에는
흘러간 시간들 쌓여 있다
그 동안 얼마나 먼 거리를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 왔을까
더러는 물집이 생기기도 하고
살아가는 무게만큼 굳은살이 돋기도 했을 것이다
발이 커가는 만큼 꿈도 자라났지만
언젠가부터 더 이상 발이 크지 않으면서
엎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했을 것이다
어째서 살아‘간다’고 했을까
그래, 산다는 것은 ‘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쉬지 않고
흔들거리며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약해지면 절대로 안 돼
송곳니를 세우고 족발을 뜯는다
숨어있던 야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다시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나가는 시간
콜라겐의 미용 효과를 이야기하며
또다시 신발을 신는다








김 지 섭

꽃 시절에
가을날

|시인의 말
겨우 시 두 편을 보낸다. 시작은 즐거운 일이지만 더
급한 일이 있다. 내가 떠나온 그 나라, 그 본향으로 머지
않아 돌아가야 할 그 날에 대한 준비 때문이다. 시와 거
리를 둔 세월이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오랜 친구인 시
여 미안하다. 글밭아 너에게도.




꽃 시절에

제철 맞은 나무들이란
온 나무들
하나 없이 죄다 피웠네

혼신을 다해
봉오리만 맺다가
죽어간 것들도
저기에는 있는데

살아 생전
한 번도 꽃 피우지 못한
그대

지금쯤 어느 행성行星의
다사로운 한 녘에서
몇 송이 봉오리라도
맺고는 있는가.




가을날

푸르른 날은 가고
이 가을날

푸르디 푸르던 날은
정말 다 가버리고

지금
여기

이 늦은 가을날
저녁 어스름.








김 진 택

Etudeㆍ자화상
시를 지어보다
시를 지어보다

|시인의 말
  오래된 우물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누가 이혼을 했다고 한다.
  잿빛의 택시가 서 있었다. 아마도 저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나는 모양이다.
  우는 아이도 우는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어린 나는 수
군대는 어른들의 얘기를 겨우 알아듣는다.
  누군가 그만 살고 멀리 간다는 것이다.
  읍내에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은 신작로를 버리
고 샛길로 온다. 소나무 그림자를 밟고 온다.
  여름밤인지 가을밤인지 모르겠다.
  사십년 전의 얘기다. 이런 경험이 아직은 시가 되지 못
하고 있다
  해질녘,
  청도의 산골에서
  뻐꾸기와
  소쩍새의 이중창을 듣다. 뻐꾸기는 울다가 그치기가 뭐
해서 울고 소쩍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미지의 생성 보다는
  서사적 진술이 더 맘에 든다.




Etude

라흐마니노프
악보 위로 찬바람
싸락눈
내리다

저어기 숲
교회종은 울고
첸트
바람이 잘 때
들려 온다

피부가 말간
소녀, 팬 케익을 한 입
베어 문다

페이퍼 백
베고 누운 ㄱ은
오른쪽 엄지발가락
까딱까딱한다




자화상

떡갈나무
새닢은
순결하다

모래와

바람에 소모된
머리카락

Gray

예감으로 가득 찬

풀 무덤




시를 지어보다

거긴
전봇대가 하나 서있고
왠일인지 전깃줄은 없다.
까마귀가 꼭대기에 앉아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마을을 조망한다

근처엔
버려진 우물이 있고
봄풀이 돋아나

놀던 아이 가고 없어
마냥 조용한 공터

무너진 돌담의 발치엔
동전이 소복이 쌓여있어
그러나 이 얘긴 사실이 아니야
꿈속의 일인 걸

그 곳은
명수 아버지 저 혼자 살려고
택시 타고 먼데로
떠난 자리

돌아온 이의 등에 내리는
한로 상강 지나
입동
빗줄기




시를 지어보다

아저씬 왜 이혼을 안 해요?

그해 여름은 끝나가고 있었다.
사나이는 여인을 숨겨놓고
가끔씩 만나고 있다.
그들의 좁은 마당엔 맨드라미
나팔꽃이 피고 있었다.
사나인 소설가란다.

아저씬 왜 이혼을 안 해요?
그러면 아내가 불쌍하잖아

아직은 사랑이 남았나 보다

아직은 미련이 남아있나 보다








김 진 회

회향
내 시가 당신에게 읽혀지길 거부할 때

|시인의 말
시답지 않은 날이 많아
시가 안 읽힌다.
삶이 시답지 않아
시가 안 써진다.
죽은 시인의 말처럼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어서
시답지 않은 말만 입에 맴돈다.
아, 시방




회향

집을 나서는 버스 안
창밖을 지나가는
이름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나무들을 보며
나는 또 외로워진다

외로운 생각은 달리고 또 달려
어느 사이 좁은 골목에서
담벼락이며 지붕이며 옥상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로 나를 데려다놓는다

나는 그곳에서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도
아련한 어린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려 본다

유년의 좁은 골목에는
이른 아침 가난한 엄마들이
각자의 일터로 떠나고

그녀의 자식들은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며, 말타기며, 제기차기며, 오방치기며
땅따먹기를 골목 끝 집 지붕에 걸린 해가
기다리다 지쳐가는 줄도 모른 채
골목 어스름에 비친 엄마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도 모른 채 놀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찾아온 외로움이
어쩌면 아득해져 가는 유년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어디에선가 나처럼
그 시절이 그리워 외로워진
이름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내 시가 당신에게 읽혀지길 거부할 때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그린 기린 그림이 아니어서
이른 저녁부터 술을 마신다.

서쪽 하늘 아래에 붉은 구름
오래 전에 그려본 붉은 구름 그림
내가 그린 구름 그림은 새털구름 그림이 아니어서
이른 저녁부터 술을 마신다.

술잔 앞에는 멀건 홍합탕
홍합탕 안에는 입을 벌린
홍합 홍합 홍합 홍합 홍합 홍합들

홍합이 나를 삼키는 상상을 하며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그린 기린 그림이 아니어서
내가 그린 구름 그림은 새털구름 그림이 아니어서
술을 마신다.








이 위 발

TV를 보면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비극ㆍ그저 그렇게 사는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인의 말
  터졌다. 얻어맞기도 하고, 쥐어 박히기도 하고, 연타로
터지기도 한다 샌드백처럼, 이럴 때도 있구나, 구애하지도
않는다. 사정하지도 않는다. 제발이란 단어도 안 쓴다. 그
냥 터졌다. 지금은 여유를 부리고 있다. 이런 순간이 올
것이란 예상은 전혀 못했다. 시가 터져 너무 즐겁다.




TV를 보면서

  썰어놓은 낙지 다리가 제각각 놀고 있고, 뒤끝이 오르가
슴 후처럼 개운했고, 볼트 같은 시선이 내 눈을 파고들어,
이내 플러그가 쑥 빠지듯이 사라졌다. 포복하듯 시간은 축
늘어진 뒤, 뒷간 쥐한테 똥구멍을 물렸을 때 억울한 기억이
새득새득 튀어 나오고, 주위를 짬짬이 둘러본 뒤, 말라버린
가슬가슬한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있다. 익숙해서 조금씩 부
패하는 정다움이 서먹함을 띤 채 제자리에 박혀 있고, 서편
엔 키대로 포개진 산이 녹으면서 빠지고 있고, 그 사이로
삭아버린 검불이 낙숫물 고랑으로 흘러내려 검붉게 빛나고
있을 때, 만화 주인공들이 지구를 잘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
고 있다.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긴 적이 없는 얼굴, 상대에게 의
존하면 반드시 불행을 부른다는 직감을 믿는다. 우주가 이
끈다는 자신감, 슬픈 꿈처럼 비가 내리고, 양파 같은 너의
맨발이 감자처럼 노란 발가락 사이를 열고, 반디의 무수한
불빛들이 이교도 무리처럼 은밀하게 명멸하고, 미확인된 비
밀을 봐버린 것만 같이, 뒤집힌 배처럼 흰 속을 드러내는
잎사귀들, 여름의 비릿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고, 한낮의
연약한 그늘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요람속의 아기거나,
거름 내 나는 보잘것없는 풀꽃들이거나, 그 현기증은 서늘
하고 어두운데, 햇볕은 공중에서 설탕이 녹아내리는 것 같
아 가슴이 아팠다. 상추로 싼 밥을 밀어 넣을 때 막막한 표
정처럼, 함부로 뭉친 머리카락이 푹 젖고, 문이 없는 뫼비우
스의 띠 같은 울타리, 달빛 아래 마주한 하얀 빨래에서 느
끼는 전율, 밖을 나서기 전 내 몫이라고 손에 쥐어 주는 한
움큼의 한숨, 그걸 한나절 시간 위에다 데굴데굴 굴리면서
기다렸다. 그 얼굴은 어둠을 빨아들여 언덕을 굴러다니는
눈뭉치로 부풀어, 달팽이가 되어 껍질 안으로 자꾸만 돌아
가려고 하는 그 얼굴,




그녀의 비극

  그녀의 도취는 허무다. 허무 속에 꿈을 꾼다는 모순된 의
식을 가지고 있다. 허무는 거대한 도시가 안겨준 것이다. 그
녀는 그 유전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허무는 배신과 자기
부정이다. 그녀는 사랑받는 습관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녀는 부패시킨 비
료에 의해 자라는 야채와 같았다. 그녀는 발가벗은 몸을 씻
으면서 즐거운 듯이 세상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그녀의 몸
위로 솔개처럼 그림자를 남기고 간 사내가 있었다. 설사약
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내는 통과해 버렸다. 허무와 손잡고
청어가 되어 회색의 바다 속을 유영하고 싶었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었다. 눈 한쪽만 잘못 감아
도 비극이 된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저 그렇게 사는

  멋모르고 흘러가다 몸이 닿는 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홍
합이나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팔자로 태어나 바쁘게 움직
일 수밖에 없는 멸치나 밀물 따라 들어왔다 빠져 나가지 못
하고 정치망에 든 꼴뚜기나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단절된
집을 소유한 달팽이나 섹스가 끝난 뒤 할 일 찾지 못하는
페니스나 그저 그렇게 사는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의 진실은 불편했지만 거짓말은 나를 흥분 시켰다.
  우리 사랑이 강 앞에 있다고 하는데 너는 뒤에 있다고
했다.
  없다고도 했다. 가슴 속에 있었다고 하다가, 뒤에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화면조정시간, 똑같은 화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앞뒤 구
분이 없는 것처럼
  아이들이 집 그림을 그리면 지붕부터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생각 없이 빨아대던 사탕처럼 나는 이리저리 빨리던 사탕
이었다.
  너는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숨길 게 많았다.
  그래서 너의 위로는 진정한 애정이 아니었다.
  음습한 곳의 곰팡이처럼 건조하게 살았으면 생기지도 않
았을 것을
  물 스며들 듯 살을 섞었으니 너의 품도 따뜻할 수 있었
겠지
  우리가 맺은 관계의 넓이가 누릴 수 있는 낭만만큼의 크
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는 세상에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세상을 너에게
맞추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지
  우직한 어리석음은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 되었겠지만
너의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었고, 너의 불편함 또
한 흐르는 강물이었다.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잠들지 못하는 물이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살려는 것의 명제라는 것을, 나는 너의 중간
쯤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 지점은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 풍요에 나는 너를 가두어 버렸다. 바로 뒤에서.








임 관 혁

겨울이 오면ㆍ봄
그 손끝에ㆍ세월ㆍ연탄ㆍ연꽃
봄비 내리면ㆍ열매ㆍ고모령
보리 매미 되어ㆍ부엉새 우는 밤

|시인의 말
70km의 주행을 넘어
80km를 향해 달린다.
왜 그리 세월이 잘 가는지
모르겠다.
꽃이 피는가 싶더니
꽃은 지고 있다.
벌써 4월의 끝자락
보고 싶은 얼굴이
눈앞에 아롱거린다.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달려온 오늘 앞에서
조금은 눈물 흘릴 시간도 가져본다.




겨울이 오면

부엉이 우는
겨울이 오면
무서워 돌아서 간
그 사람 생각난다.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오는 눈을 기다리다 간
그 사람이 그립다.

동백꽃 피는
겨울이 오면
발자국 남기고 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얼음 아니 녹는 봄은 없고
물소리 아니 들리는 봄은 없더라.

새싹 아니 돋는 봄은 없고
잎 아니 피는 봄은 없더라.

뻐꾹새 아니 우는 봄은 없고
제비 아니 오는 봄은 없더라.

꽃 아니 피는 봄은 없고
꽃 아니 지는 봄은 없더라.

봄비 아니 오는 봄은 없고
꽃샘 아니 부는 봄은 없더라.

봄 아니 오는 해가 없고
봄 아니 기다리는 사람 없더라.




그 손 끝에

엄마
그 손끝에
입맛이 있다.

엄마
그 손끝에
눈물 자욱이 있다.

엄마
그 손끝에
토닥거림이 있다.

엄마
그 손끝에
삶의 꾸덕지가 있다.




세월

오고
가네
그대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손짓 없어도

또 오고
또 가네
그대는

피는 꽃처럼
지는 꽃처럼
소리 없어도




연탄

검디 검은 얼굴로
막장에서 태어나

죽은 듯이 살다가
숨 못 쉬고 살다가

사랑의 불씨 되어
뜨거운 사랑 피워

세상의 차디찬 가슴
다 데워 주고

하루살이
흙길만 걷다 간
가난의 벗 하나.




연꽃

헤집고
더러운
진흙 속을 헤집고

마디마디
매듭진 아픔
진흙 속에 묻어 두고

동화사 부처님
눈빛으로
마주하는 웃음이여!




봄비 내리면

언 마음 녹고 녹아
빗물 되어 흐를 때

좋아라 거저
옷은 흠뻑 다 젖어도

마음에 끼인 때
다 씻길 때까지

흙내음 풀내음
들녘길로

가고파라
봄 나그네 되어




열매

꽃은 지는 게 아니다
열매로 태어나는 게다
흐르는 세월 따라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커가는 거다
푸르게 푸르게 커가는 거다

열매는 늙어가는 게 아니다
익어 가는 게다
흐르는 세월 따라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익어가는 게다
고웁게 붉게 익어가는 거다



고모령

부엉새 울던 고개
가랑잎 지던 고개
어머님 손을 놓고
돌아선 고개
당신은 아시나요
이별의 고모령을

산까치 울던 고개
청보리 피던 고개
어머님을 부르면서
돌아온 고개
당신은 아시나요
눈물의 고모령을




보리 매미 되어

내 고향 보리밭에
청보리 피고 익으면
나는야
보리 매미
보리 매미 되어
천지가 떠나가도록
울고 울고 또 울리라




부엉새 우는 밤

무서워
무서워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가슴은
아파 아파
피멍 들어도
소리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긴긴
겨울 내내
부엉이 우는 밤은
밤마다
밤마다
붉게 붉게
동백꽃이 피었다.








임 두 고

봄날에
등산

|시인의 말
연두색 새 잎사귀들, 바람결에 봄이라고 봄이라고 속살
거리건만 세파에 찌든 내 가슴 속은 여전히 겨울이라네.
저 연두색 봄빛이 저물기 전에 다시 설레는 시심을 껴안
아 보고 싶은데…




봄날에

햇볕 때문일까, 바람 때문일까
꽃잎들이 뚝뚝 뜯겨 나간다.
너를 잊지 못하는 무게로
햇살 속에 깊이깊이 가라앉아
배를 꿈꾼다.
절반은 추억이고 절반은 몽상인
낡은 가슴을 펼쳐 놓고
눈물의 못을 박는다.
언덕배기에 얼룩진 산도화 한 그루
부풀대로 부풀어 허공 속으로 휘어지는데
세월을 견디지 못한 꿈들도
저처럼 휘어져
햇살을 가르는 배로 뜨는 것일까.
무지개로 뜨는 것일까.
끝내 꽃향기를 모르는 내 눈 앞으로
세월의 빙판이 번들거리고
봄이 미끄러져 간다.




등산

바람이다.
소금기 하나 없는 산바람, 신바람이다.

정상은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드는
팽팽한 그녀의 앞가슴
눈을 감을수록
사방은 황홀하게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들의 수화.

문득 칡넝쿨이 몰고 오는 벼랑 아래로
폭포다.
뿌리 깊이 묻혀 있던
원시의 야성을 깡그리 일깨우는

나는 더 이상
두 발로 걷는 인간일 수 없다.
돌이거나 나무이거나 산짐승이거나
숨이 벅찰 무렵부터
나는 이미 산의 일부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리라.








임 애 월

새의 길
봄을 기다리며
콩깍지

|시인의 말
새봄이다.
겨울을 인내한 시간들
지독한 미세먼지 속에서도
연초록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다.
짙푸른 절정의 찰나를 위하여...




새의 길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을
가볍게 차고 오르는 저 새들
날갯짓이 가뿐하다
지상의 어둠을 밀어내고 중력을 넘어서면
생각의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깃털의 무게
저렇게 날기 위해서 새들은
뼛속마저 말갛게 비운다
가슴엔 텅 빈 공기주머니 하나
미세한 노폐물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극강의 가벼움으로 얻어낸 저 자유
지상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땅 위를 기어 다니고
오늘도 습관처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바윗덩어리
안개 속의 미로처럼 어슴푸레한 이른 봄날 새벽
원시의 숲길을 지나던 방전된 생각 하나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허공 속
새들의 길을 좇고 있다




봄을 기다리며
­2018년 2월에

허리 시리던 빙점의 시간이
짧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지금 지구가 태양의 어느 편을 지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겠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것들은
어두운 음지의 시간을 기꺼이 참아낸다
건조한 사막길 같은 계절의 끄트머리
남쪽의 어느 야산에서는 벌써
쌓인 눈을 걷어낸 키 작은 복수초가
노란 꽃 두어 송이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낙타처럼 묵묵한 걸음으로 나서는 또 다른 계절
사막에 돋아난 가시풀을 뜯으며 흘린 입 안의 피
그 피를 마시며 거친 사막의 시간을 견뎌내는
낙타의 눈물을 읽은 적이 있다
제가 흘린 피를 받아먹는 한 생生이
온통 피울음이었어도 피워낸 꽃은 가시풀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모래폭풍 감돌던 몇 개의 사막을 건너와
새로운 시대로의 이동을 준비하는 지금
높은 산맥의 북쪽 편 그늘에도
오늘은 병아리 깃털 같은 훈풍이 분다




콩깍지

내 생애 처음으로 지어본 검은콩 농사
여름 내 제초제 대신 구슬땀으로 풀을 뽑아주었더니
화학비료 한 알 안 먹고도
제법 알곡 모양을 갖추어 영글었다
고라니가 뜯어먹고 남긴 허술한 것들
소설小雪 무렵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검은 것은 모든 빛들의 집합체라는데
희고 붉고 노랗고 푸른
이 지상의 모든 빛들을 가둔, 저 윤기 도는 알알이
자루에 가득 담고 돌아서는 순간
한기寒氣 도는 밭고랑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콩깍지들의 구겨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충실한 알곡을 꿈꾸며
제 새끼 감싸 안던 모성의 거룩함은 어디로 가고
자륵자륵 싸락눈 흩뿌리는 초겨울
아득해지는 동천冬天의 북서풍 아래 내던져진 
서럽고 초라한 그들의 몸짓에 자꾸만 머쓱해지는 뒷덜미
그림자 점점 깊어지는 겨울산맥을 등지고 돌아오는데
눈썹 끝에 매달린 어떤 데자뷰 하나
아주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고 있다








전 대 진

무념무상
괴목

|시인의 말
겨우 두 편을 다듬어 실어 봅니다.
잊지 않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념무상

새로 산 그릇의
바닥에 붙은 스티커를
손톱으로 떼어내고 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물에 젖어서
수세미에 긁혀서
천천히 또 어느새 사라질 게 분명한데
그 며칠을 못 참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 밑을
긁고 있다

손톱이 스티커에 멈췄다가
벗겨내지 못하고 탁 탁 자꾸 빗겨나가자
더 조심스럽게 손톱을 세워 스티커를
그릇 위로 일으켜 본다
일어난 스티커가 돌돌돌돌
말리다가 마침내
그릇에서 완전히 떼어져 나왔을 때,
그 기분이 또 아무렇지 않게 좋아서
배고픔도 잊고 다음 그릇의 바닥에
손톱을 대고 있다

그 그릇에 무얼 담을지
누구와 그 음식을 먹을지는
한참 먼 미래라서,
아니 그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박박박 그릇을 긁어대고 있다




괴목

아버지는 괴목을 좋아하셨다
나무를 하다가
뿌리째 뽑힌 나무를 보시고
덜덜덜 경운기를 타고 오는 내내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나무 모양이
용의 머리 같지 않냐고
한참을 맞장구도 없이 말씀하시곤 했다
겨우겨우 무겁기만 한 뿌리를 가지고 오면
물에 불려 껍질을 함께 벗기곤 했다
옹이와
톡톡톡 튀어나온 흉터들
촘촘히 물결치는 나무결이
아버지의 입술을 움직이곤 했다

흉년이 몇 번 밭을 휩쓸고 갔을 때도
아버지는 괴목을 좋아하셨다
나무를 한다는 핑계로
괴목을 찾는 것 같아서 아버지 옆에서 나는 가끔 웃었고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도 웃었다
괴목 같이
이마와 눈가와 입가에
옹이와 흉터와 나뭇결이 빛나고 있었다








조 용 식

인因ㆍ연緣ㆍ제설
징소리 정鉦
봄 타다ㆍ탁설鐸舌
김홍도의 풍속도첩(공원)

|시인의 말
  북어 한 쾌, 조기 한 두름, 참외 한 동, 김 한 축, 책
한 질, 고등어 한 손, 꽃 한 속, 나무 한 짐, 장작 한 강
다리, 명주 한 필, 약 한 첩, 그릇 한 죽, 소주 한 두루
미, 고사리 한 숨……

  간혹 공원에서 시소를 타게 되면 올라갈 때 보았니
(see) 내려갈 때 보았다(saw)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놀이를 즐긴다. 사소한 일상을 오래 보게 되고 그래서
조금씩 더 작아진다.





인因

산책길에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왔다

무심코 밟고 넘어질 뻔했던
돌멩이, 아무렇게나 생긴

주머니에 넣어오는 동안
돌이 따뜻해졌다




연緣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지
오십년 만에
지하철안에서 서고 앉은 채

가만히 내려 보고 올려 보고
칠천 이백 찰나刹那 간*
서로 눈 말만 했지

그녀 역시 그때의 붉었던 가슴만은
아직
가지고 있었겠지

다음 역에서
내게 자리를 비워주고
눈 말로 웃으면서 내렸지

그녀가 남기고 간 자리가 참 따뜻했지

꿈이었던 것처럼

* 찰나刹那 : 불교에서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는 시간개념으로 1찰
나는 1/75초이다. 1랍박臘縛은 60달찰나, 1달찰나는 120찰나이니 1랍박
은 7200찰나 즉, 96초이다. 현재의 1찰나를 기준으로 앞의 찰나를 과거,
뒤의 찰나를 미래라고 한다. 1랍박(96초)은 지하철의 한 역간 실제 주
행시간(역간 평균소요시간 2분에서 정차시간을 빼면 1분 40 ~45초)과
비슷하다.




제설

­눈 먼 노인이 아이에게 말했다 이 세상 빛을 모두 합하면
흰색이 된단다­

서설瑞雪이라더니
되가 수북하게 내리네

돌감나무 위 어디쯤에
붉푸른 잎 몇인가 남아 있는데
눈꽃이 마구잡이로 내려앉네

아 눈꽃이야
눈꽃이지만
떨어진 것은 떨어진 눈일 뿐
눈꽃은 아니네

괜한 마음 빗세울 데 없어
쌓이는 눈을 쓸어내지만
얼어붙기 전에 쓸어내지만

쓸어도
쓸어도 등 뒤로
자꾸만 쌓이는 눈
흰 눈
이 아련한

­아이가 노인의 손바닥에 눈 한 송이를 얹어 주었다 이게
흰색인데요­




징소리 정鉦

눈 먼 여인이
산책길 옆에서
살며시 방뇨하다

살얼음 위에 비친 보름달을 보고
놀란 강아지가
갑자기 짖어대다

언 입술로
엄지손가락을 깨물다

보름달에 실금이 갔다




봄 타다

날이 풀리면서
주인집 할머니의 걸음이
수다스러워졌다

사흘이 멀다 하고
달래며 방풍나물
콩가루 푼 쑥국을 가져왔다

우리 딸내미는 아저씨 귀찮다고
자꾸 가지 말라는데

슬며시 내미는 국그릇에
잠깐
봄볕이 지나갔다




탁설鐸舌*

동네 암자에서
작은 풍경風磬을 하나 얻었기로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앉은뱅이책상 모서리에 달았는데

봄잠에 취해
잠깐 졸다가
화다닥 헛발질을 했는데
정정靜靜 동동動動

꿈에 본 것이 아까워
홧김에 풍경을 탁 건드렸는데
정정동동靜靜動動 정동동靜動動

꽃비에 젖은 봄꿈을 벗어
풍경위에 널어놓고
가는 귀 먹은 노인네처럼
못들은 척하고 있는데
정정동동靜靜動動 정정동靜靜動

웬 죽비소린가
화들짝 놀라서 정좌靜坐하고 있는데
동동動動

이명耳鳴조차
한 줄로 빨려 들어가고
침만 주르르 흘리고 앉았는데
정靜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르겠더라

* 탁설鐸舌 : 풍경의 종벽을 쳐서 소리를 내게 하는 물고기 모양의 추.




김홍도*의 풍속도첩(공원)

머리 뽀글뽀글한 아지매들이 모여앉아
기초연금얘기를 하고 있다

뇌성마비 아이 둘
셈 하면서 공원바퀴를 도는데
바람이 괜히 따라 나섰다가
다리쉼을 하고 있다

콩새가
벌레 한 마리를 물어다 놓고
주인을 찾고 있다

공원 저쪽에서
바둑알이 따악 튀어왔다

* 김홍도金弘道 : 조선시대의 화가.








천 승 현

영산홍ㆍ꽃은
겨울밤ㆍ식은 밥
인연 1ㆍ인연 2

|시인의 말
무슨 말인가 하려던 말을 못 하고
푸실푸실 허공에서 헤매이다
땅으로 내리는 순간 눈물 되어 남았다




영산홍

따뜻한 햇살 아래
뾰족한 손끝을 내밀어
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해 보다가
쌀쌀맞던 봄바람이
어느 순간 온화해질 때
그 틈으로 살살살
얼굴을 내밀며
활짝 피어났다가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마는 꽃




꽃은

꽃이 아름다운 건
비단 저 홀로
고고하기 때문만은 아니리
꽃에 닿았던 바람
꽃에 머물렀던 나비와 벌
꽃을 지나갔던 구름
꽃에 눈길 담았던 순간의 세상
꽃이 아름다운 건
저 홀로 피어난 듯해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눈물에 닿았기 때문이리.




겨울밤

기억은
고여있지 않고 흐른다.
붕어빵 가격은 오르고 올라
이제 천 원 한 장으로는
두 마리밖에 낚을 수 없지만
한 봉지 가득 채우던 시절
붕어빵에 얹어 놓은 따뜻한
그리움이 흘러와
춥고 시린 겨울밤을
위로해 준다.




식은 밥

빈 집에 며칠째 방치된
밥솥의 묵은 밥처럼
사는 게 참 시들하다.




인연 1

앞서가는 그대와
뒤따라가는 나 사이에
해와 달이 뜬다면
가까이 다가서면 눈물이 되고
돌아서 멀어지면 사무치는
그리움이 된다면
살기 위해 잊어야 하고
잊지 못해 묻어야 한다면
묻었던 자리가 곪고
곪았던 자리가 터져
다시 아문다면
아문 자리에 가시가 돋아도
그대와 나 까치발을 들고
서로에게 다가갈 때,
우리 사이에 별이 뜬다면.




인연 2

너와 나는
날줄과 씨줄로 만나
생이라는 베틀 위에서
한올 한올 엮이며
씨가 먹히지 않아도
자리를 박차지 않고
묵묵히 가로세로
제 길을 놓치지 않고
씨줄을 살피고
날줄을 살피며
헝클어지지 않도록
경천위지經天緯地*는 몰라도
한평생이라는 보자기를
견고하게 짜낸다

* 경천위지經天緯地 : 온 천하를 짜임새 있게 잘 계획하여 다스리다.








∥특집∥­인터뷰

진정성으로 빚어내는 시, 마음으로 담그는 된장


­시월이 끝나갈 무렵 산빛 고운 중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이위발 시인을 만나러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이육사 생가에 주
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배경으로 키가 큰 시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
왔다.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들었다­

인터뷰 : 임애월 시인

   

임애월 : 이위발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이위발 : 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임애월 : 이육사문학관이 지금 새롭게 단장을 하였네요.
여기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계신데... 지금 계절이 늦가을
이라서 이육사 선생님 생가터에는 청포도 대신 감이 참 탐
스럽게 많이도 달려있네요.

이위발 : 네, 현재 이육사문학관은 2004년 개관을 하여 십년
만에 리모델링 및 신축공사를 하였습니다. 3대문화권 사업으
로 총 공사비가 229억 원 가량 소요되었습니다. 기존 문학관
을 증축하여 전시 공간을 넓히고, 200석 규모의 다목적홀이
들어섭니다. 그리고 세미나실과 강의실이 들어서고, 영상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80명가량의 단체 숙박을 할 수 있는 20개
의 객실이 만들어져 있는 생활관이 들어 서 있습니다. 단체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사 선생의 생가가 가 복
원 되었습니다. 시내에 있는 육사 생가는 주인이 세를 주기도
해서 완전히 변형이 되었고. 이건할 때부터 제대로 하지 않아
생가로서 역할을 할 수 없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이
번에 지은 생가 육우당六友堂은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 지어졌
습니다. 또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도록 육사 선생의 시상지
윷판대와 육사 선생 묘소까지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엔 이곳 원천에서 이육사청포도가 상표를
달고 처음으로 와인이 선을 보였습니다. 그동안 문학관에서 청
포도 재배에 공을 들여 봤지만 계속 실패를 했는데, 농업기술
센터에서 기술 지원을 받아 도산면 농가에서 재배를 하여 수
확을 한 겁니다. 이육사청포도 작목반도 생겼습니다. 현재까진
수확량이 많지 않아 서울이나 전국에선 아직 맛을 보지 못하
지만 점차 수확량을 넓혀 나갈 겁니다. 머지않아 이육사청포도
와인도 시판할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문학관
들어오는 입구에 와이너리 공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육사 선생이 살아계실 때 청포도가 있었다는 사람과 집
뒤편이나 담장 옆에 심어져 있던 익지 않은 머루일 것이라
는 주장도 있습니다. 칠월은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시기라
서 제 생각에도 그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임 선생이 보는 감은 이곳의 토종감입니다. 저쪽
안으로 들어가면 백운지와 내살미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
에도 토종감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임애월 : 아, 여기 토종감이어서 그런지 더 정감이 갑니다.
이육사청포도 와인이 생산된다니 그 향도 궁금해집니다.
훌륭한 시인 한 분이 이렇게 농업생산성에도 직접 영향
을 주는군요.

이위발 : 그렇습니다. 그게 문학예술의 위대한 힘이겠지요...
농암 종택 쪽으로 이동해서 말씀 나누실까요?

임애월 : 안동의 가을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청량산
자락을 돌아드는 낙동강 줄기와 농암 종택에서 바라보는
산 능선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이런 비경이 안동에 있
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현보 선생이 지은 ‘농암
가’가 있다던데 한 수 들려주시고요, 안동의 자연에 대해서
자랑도 좀 간단하게 해 주세요.

이위발 : 농암 이현보 선생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거쳐 어지러운 정치를 논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
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이후 중종반정으로 다
시 등용되어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
고 고향 예안禮安으로 돌아와 산수와 더불어 독서와 시작으
로 여생을 보낸 분입니다. 농암가 중에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린다.//농암에 올라 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
지는 구나//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라고 노래했습
니다. 농암가 중에 대표적인 시조입니다.

임애월 :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은, 이육사 시인,
서원들, 또 하회마을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선비와 지사
의 고향이라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되는데 사실이 그렇다고
요? 안동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들은 기
가 죽어 산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이위발 :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난 곳이 이곳 안동이고, 독립
운동을 하시다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은 분이 300여 분이 되
고, 공적이 밝혀진 분만 700여 분이 넘습니다. 한일합방이 되
자 전국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 칠십여 분 되는데 안동
에서만 이만도 선생을 포함해 열 분이나 됩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이어 안동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운
동을 하지 않은 집안은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
중을 여기에서 꼭 밝히고 싶진 않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임애월 : 네, 알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
요...(웃음)
선생님께서는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셨는데요.
등단배경이라든지 그 당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위발 : 제가 등단한 해가 1993년입니다. 그 당시 90년대
초까진 동인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여서 작품 토론을 치열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인 중에 누가 등단할거라는 소문이 나
면 밤잠을 설치기도 하던 때입니다. 제일 기억나는 것은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던 이승훈 시인
이 알고 있던 제 이름은 이현진이었습니다. 족보에 올라가 있
는 이름입니다. 제 본명이 이위발인데 학교 다닐 때 많은 놀
림을 받다보니 사회에 나와선 본명이 아닌 족보 이름을 쓰던
때입니다. 당선 소식을 받고 현대시학 사무실로 갔더니 주간
을 맡고 계시던 정진규 시인께서 필명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
었습니다. 투고할 때 이현진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름
으로 나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던 중 사실 제
본명은 이위발이라고 했더니 그 이름이 시인 같다고 하시더니
곧바로 바꾸셨습니다. 사실 지금도 저를 모르는 분들은 제 본
명이 필명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이위
발이라는 본명을 다시 찾아서 너무 좋습니다.

임애월 : 제가 듣기에도 ‘이현진’보다는 ‘이위발’이라는 이
름이 분위기도 있어 보이고 더 멋집니다.
그 후 8년이 지나고 2001년에 첫 시집을 상재하셨으니
다소 늦은 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위발 :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망설여집니다. 사실 시상식 날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당일 시상식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상패와 꽃다발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이 강남 서초
동에 있었습니다. 차 막히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빨리 가
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택시를 탄 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고 있었습
니다. 많은 시인들이 참석한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술잔만 기울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2차, 3
차까지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는데 거기서 다시 한 번 사단이
났습니다. 정진규 주간이 술에 취해서 먼저 가신 이승훈 시인
에게 지나가는 말로 욕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순간
정 주간께 “왜 욕을 하시느냐”고 넌지시 운을 떼자, 버럭 화
를 내시면서 술상을 엎었습니다. 그 장소가 당시에 유명했던
인사동의 ‘시인학교’라는 카페였습니다. 정주간이 화를 참지
못하고 저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참으라고 하
면서 제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 시인이 두
명 있습니다. 송찬호 시인과 대구 영남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윤희수 시인이었습니다. 송찬호 시인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
가 되었고, 윤희수 시인도 친한 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
실 정주간과 이승훈 시인은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막역
한 사이였고, 나이도 이승훈 시인보다 연상이었기 때문에 욕
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사부인 이승훈 시인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그런 사건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진규 시인에게 연락을 드리자
현대시학 사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무실로 찾아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시인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직도 가슴에 꽂혀서 맴돌고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본인의 정당성만 믿고 전체의 흐름을 읽지 못한 행동
에 대해 자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이 3년이란 시간
이었습니다. 등단지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첫 시
집이 늦어진 이유도 여기에 연유된 겁니다.


임애월 : 아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당시에는 무척 심각
하셨을 텐데...... 지나간 문단 야사들은 듣는 이들에게는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웃음).

이승하 시인은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작품해설에서 ‘이
위발 시인의 시는 극적구성을 갖는 것이 형식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 시집 전체가 한편의 드라마’라고 평하셨는
데, 「무성시대」,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마지막 휴머니
스트」, 「오늘의 요리」 등 시나리오의 요소들을 장치한 작품
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위발 : 네, 첫 시집을 낼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시를 쓰고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
고 좀 더 극적인 요소를 넣어 시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나 다 쓰는 그런 시 형식이 아닌 저만의 독특
한 시적 형식을 추구해 보겠다는 치기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에 서서히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신인들도 등장하고, 이미 그런 모더니즘의 시적 세계의 반석
에 올라 있던 황지우 시인, 박남철 시인들에게도 보란 듯이
저의 시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임애월 : 새로운 시세계를 개척하고 싶은 개척자적인 시정
신이었군요.
작품 한편 한편이 짧은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은데 지금
읽어도 시집읽기에는 좀 낯설거든요. 첫 시집을 이렇게 파
격적으로 상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위발 :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어 보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지요. 이 시집이 출간되
면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기대와 관심은 시집이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느 대학
교 학생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석사 논문에 제 시집을 새로
운 형식의 모더니즘이란 테마로 논문을 발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곤 끝이었습니다.

임애월 :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당대를 지나서 뒤늦게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 쓰기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실 때 극적인 형식을
취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이위발 : 도시에 살면서 늘 생각 끝에 매달려 있던 것이 슬
픔이란 단어였습니다. 도시에 산다는 게 평화롭지 못했습니
다. 그래서 그런지 제 시 속엔 도시의 슬픔이 배어있었습니
다. 그 슬픔의 연속성에 극적인 이야기로 한편의 비극을 담
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애월 :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양식 중의 하나인
‘극시’에서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고 하였는데 이 선생님께서도, 파토스
적인 카타르시스가 독자들에게 필요하다고 느끼셨나 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스스로 연출하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선생님은 스스
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연출하면서 살고 계시는지요? 그러
려면 엄청난 감정의 절제가 필요하겠지요.....

이위발 : 사실 그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삶을 객관화시킨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태생적으로 사람에 따
라 이미 주관이 개입되어 태어나잖아요. 사람들은 사회적 동
물이기 때문에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것은 바꿀 수가 없겠지요. 본성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팔자소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 삶의 균형을 위해선 자신의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객
관화시켜 균형을 맞춰 살아가느냐 그것이 중요하겠지요.

임애월 : 이 시집은, ‘눈알이 공중에 떠다니’는 등 난해하고
비정한 도시의 우울한 그림자들이 서로 엉켜 비명을 지르
고 그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환청을
일으키게 하는데요, 작품마다 지독한 패러독스와 감각적인
시어들이 살아 꿈틀거리며 다가와 폐부를 찔러대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도 함께 통증을 느끼거든요. 「도시의 아침」이나
연작시 「시뮬레이션」 등이 특히 그러네요, 이런 ‘시뮬레이
션’을 연출하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위발 : 어느 날 친구들과 단골 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화
장실에 갔습니다. 늘 벽면 액자에 걸려 있던 뭉크의 그림 ‘절
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두 눈이 누군가에
의해 파여져 있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하자면 술에 취한 사람이 벽면의 액자를 깨트리고 난 후 유
리가 없는 상태로 걸어 두려고 액자를 들고 보니 아무래도
그 그림이 이상하게 다가왔겠지요. 그래서 눈에다가 장난을
친 게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훼손된 ‘절규’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눈이 공중에 떠다니
듯 저를 한동안 가상현실을 떠다니게 만들었지요. 「도시의
아침」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주차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거
나 이웃사촌과 얼굴을 붉히는 일이 태반으로 일어나고, 집이
란 공간이 곧 창살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밖으로 탈출하듯 나
와 보지만 밖도 일반 다를 게 없습니다. 눈을 뜨고 싶지 않
은 도깨비 같은 도시의 아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임애월 : ‘구멍 뚫린 달’이나 ‘심장 속에서 거미가 알을 까’
는 등 초현실주의적이고 환상적인 표현들로 이야기되는 작
품 속의 도시는 도깨비 같기도 하네요.
  이 시집의 낯선 형식을 가진 작품들 중 한편을 소개해 볼게요.



프롤로그
  평등의 원칙을 내세우듯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법정 안,
재판장을 향해 피고석이 가운데 놓여 있고, 우측엔 변호사, 좌측
엔 검사가 앉아 있다. 피고석 앞에 서 있는 시인, 불안한 듯 애
써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재판장 : 사건번호 4441번 손해배상 청구 소송건에 대한 이
사건 소송측의 검사! 심문하십시오.

검 사 : 피고는 1999년 20세기 마지막 봄날, 밤 11시, 천안역
5킬로미터를 벗어난 지점 건널목에서 달리는 서울행 급행열차
를 철로 위에 서서 정지시킨 적이 있지요?(...)그렇다면, 당신이
열차를 탈선시켜 소중한 생명을 살해한 후 사회불안을 조성하
여 계획된 사건이지요?(...)재판장님! 여기 앉아 있는 피고는 세
계화로 가는 이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라
도 살인미수죄와 국가전복죄를 추가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울러 법을 믿고 따르는 대다수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재판장 : 변호인 변론하십시오.

변호사 : 재판장님! 열차는 사람들을 태우고 목적지에 안전하
게 도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려야
될 승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일방적으
로 통과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묵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
고 역에 정차해 있는 완행열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급행열차의 오만불손한 일방적인 통과 절차는 어떤
이유에 서라도 정지를 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의 마지막 양심이라는 것을 여기 피고석에 앉아 있는 시인의
행동으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직업도 재산도 없는 이 시대
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이 가엾은 시인에게 무거운 죄의 굴레
를 씌운다는 것은 우리들 양심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재판장
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이 있길 바랍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인은 리얼리스트도 아니면서 현실을 망
각한 채, 변론을 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인 피고를 감싸고
있는 것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에게 묻겠
습니다. 피고는 급행열차를 전복시켜 타인의 소중한 생명을 살해
하려는 의도가 있었죠?(...)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열등의식에서 헤
어나지 못해 도미노적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까?(...)

시 인 : (대답이 없다)

변호사 : 지금 검사는 유도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
판장님! 승객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고, 다행히 열차도 파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적인 피해와 시간적인 손해를 보았다는 이
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가혹한 처분이라 생각되는
바, 피고에게 다시 한 번 재생의 길을 걷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곧 현명한 판단이라 사료됩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사는 지금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지만,
승객들의 정신적인 충격과 시간적인 낭비는 그 어느 것과 견주
어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으며, 공무집행방해죄와 살인미수죄를
적용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차
원에서라도 엄벌로 다스려야 된다고 봅니다.

재판장 : 피고, 시인.

시 인 : (고개를 든다)

재판장 : 마지막 진술하시오.

시 인 :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아우성이 오천 년 전부터
나돌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들어놓은 제도의 그물에 갇혀 허우
적대는 이 슬픈 현실 앞에, 저의 돌출된 행동이 후세들에게나
마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길 바랄 뿐입
니다. 끝으로 완행열차 승객들에게 놀라게 해드린 점 머리 숙
여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시인의 길 꿈꾸며 살아가는 여러분들
에게도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방청객 :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뜨악한 눈빛을 건넨다)

재판장 :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피고, 시인은 전혀 반성의 빛이 없이 평등을 사수하는 법정에
서 오만불손하게 법관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이 시대를 평범
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인 불안감을
조성한 바, 원고가 청구한 손해배상 십억 원을 지불 할 것을
선고하며, 이것을 이행치 않을 시 감옥에서 하루 이만 원씩
5,000일을 노동으로 대처한다.

시 인 : (고개를 떨군다)

재판장 : 그럼, 이것으로 본 법정을 폐정을 선언합니다. (딱,
딱, 딱)

검 사 : (의기양양하게 좌측 문으로 퇴장한다)

변호사 : (시인에게로 걸어간다) 시인, 최선을 다했지만 안됐네!

시 인 : 이 세상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나요,
그게 한계인 걸요...



에필로그 
  시인이 걸어가는 길,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찬 이슬 내리
는 ­ 안동 교도소 ­ 무슨 죄 지었길래 ­ 갇히게 되었나요­안동
시 교도소 ­ 찬 마룻바닥에­일심을 기다리다 사라져 갔나 ­ 편
견은 안 오나요 ­ 영원히 안 오려나.
­「마지막 휴머니스트」 전문

  1999년 세기 말의 봄, 천안역을 그냥 지나치려는 ‘급행열차’
를 정지시킨 시인의 행동이 재판에 회부되었군요. 실제 비슷한
사건이 있었나요? 아니면 이 시대의 시인들이 앞만 보고 내달
리는 ‘급행열차’ 같은 현실을 잠시 정차시키고 곱게 단풍드는
산하를, 들녘을 둘러보게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이위발 : 이 시는 의도적으로 짧은 극으로 써 본 것인데요.
20세기 말 시대가 급변하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삐삐’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급행
열차처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앞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는 시인 같은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시입니다. 이 세상에 분명하게 말하고 살 수 있는 것이 하
나도 없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다가왔던
그때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머니시트, 리얼리스트가 설 땅
이 점차 사라져 가는 그런 세기말을 풍자한 극시입니다.

임애월 : 아, 그렇군요. 천안역이라는 현존하는 지명 때문에
혹시나 하고 여쭤봤습니다. 우문입니다. 이 시 「마지막 휴머니
스트」에 등장하는 ‘시인’의 정확한 죄명은 무엇인가요?(웃음)

이위발 : 검찰이 주장하는 죄목은 공무집행방해죄와 살인미
수죄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시인의 죄
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 놓았습니다.

임애월 : 마지막 부분 ‘편견은 안 오나요’에서 ‘편견’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감이 안 잡힙니다.

이위발 : 교도소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를 일부만 차용 한
건데 ‘일심’은 면회고, ‘편견便見’은 소식편자와 볼견자로 뜻
은 ‘편지’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한자 조합이
기 때문에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임애월 : ‘편견’이 한자어로 ‘편지’라고요? 오늘 처음 알았
습니다.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신 후 레버를 힘껏 밀어보세요.
  만일 투입구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레버를 가볍게 툭툭 치신
후 넣어주세요.
  제품이 없을 시에는 레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기계를 180도 기울이면 동전이 반환됩니다.

(본 제품은 실용신안 및 의장등록을 필한 제품으로써 유사품의
제조, 매매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전문

  위의 시는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데요....기계화되어
버린 비정한 도시의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한다고 저는 읽
었습니다만, 작가의 창작의도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위발 : 이 시는 90년대 다방엔 거의 다 있을 정도로 인기
를 누렸던 재떨이입니다. 커피를 마신다기보다는 재미를 가
장한 운세를 점치는 제품이었습니다. 동전 한 닢으로 자신의
운명을 보던 시선과 현실을 상징한 기계적인 것에 대한 조롱
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입니다. 어떤 면에선 인생이 꿈을
꾸며 살기도 하지만 그 꿈이 허망하다는 것을 180도 돌린다
고 해서 바꾸어 질수는 없습니다. 어떤 날엔 운세를 보는 행
운마저 삼켜버린 동전이 나오지 않아 기계를 바닥에 치기도
해보지만 감감무소식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혼자 행
하는 무언극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아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걸 해본 적이 있거
든요. 부제가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설명이 좀 필요한
작품입니다(웃음).

  시인님은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무성시대」에서
‘스산하게 웃고 있는’ 그 ‘환상여행을 떠나’는 소년인가요?

이위발 : 유년시절엔 「무성시대」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미래
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면
소재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임시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상
영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앞날에 대한 꿈꾸기보다는 영화
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공간에 대해 두려움이 더 앞섰던 것
같아요. 무술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멋있다는 생각보다는
내면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줄거리보다는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을 더 느꼈습니다. 무협영화엔 죽는 사
람이 많이 나오잖아요. 칼과 혈흔이 난무하는 그 이미지가
어린 시선엔 스산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애월 : 세상을 보는 눈이 일찍 뜨였었군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귀향하신 지 십일 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어요. 운
영하시던 출판사 문을 닫으셨다고요?

이위발 : 훈민정음이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100여 종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지
만 얻은 게 더 많습니다. 당시에 도곡동 아파트 2채를 말
아 먹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과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 물질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
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터득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생각하기 나름이군요.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아
파트 2채로 사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고향이긴
하지만 정착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귀향 후의 삶이
이전의 삶에 비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이위발 : 많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고생 많이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
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절망하거나 이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습니다. 서울에서와 달리 긍정적인 사고로 변해 간다는
것에 저 자신도 놀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미래의
제 인생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일이 저한테 우연처럼 다가왔습니다.

임애월 : 고향의 너그러운 품 안이어서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제2시집을 준비 중이시라던데......첫 시집 상재 이후 거
의 15년만이죠? 물론 양보다는 어떤 시를 썼느냐가 더 중
요합니다만..... 숙성기간이 좀 긴 편입니다.

이위발 : 제가 좀 게으른 편입니다. 다작 스타일이 아닙니
다. 현실적으로 시를 쓸 수 없는 시기가 있긴 했지만... 사
실 등단 이전부터 시인이 되면 시집 세권에 시선집 한권
정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 꿈이 이루질 것 같습니다.

임애월 : 첫 시집이 주는 이미지가 제게는 워낙 강렬해서
두 번째 시집은 어떤 분위기일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이위발 : 첫 시집이 주목을 받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저는
기대를 많이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안
동으로 내려와서 쓴 시들은 첫 시집과 정반대의 시들로 이
루어져 있습니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뀐 겁니다.
사물에 대한 시선이 따듯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시집
이 도시의 슬픔을 얘기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자연 속에
녹아든 이미지와 말 걸기의 시도일수도 있습니다. 관심 있
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임애월 : 감사합니다.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을 작년에 펴내셨어요. 항아리들
이 저리 많은 걸 보니 된장을 직접 담그시는 게 맞네요. 우리
의 전통방식으로 담그신다고요? 그 과정을 좀 설명해 주세요.

이위발 : 간단하게 설명하면 전통된장은 12월경에 대두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정월달 말날이나 닭날을 잡아 된장
을 담급니다. 메주를 햇볕에 잘 말려 장독을 소독한 후 물
로 깨끗이 씻은 후 3~4년 정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장을 담그고 난 뒤 간장을 따로 떠내 장 가르기를
한 후 메주를 으깨어 놓으면 맛있는 된장이 됩니다.
  저희 집 산매골달분네 된장은 주변 환경이 된장 담그기
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된장과 소나무의 솔향
은 궁합이 제일 잘 맞습니다. 항아리가 숨을 쉬기 때문에
솔향이 항아리를 통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된장의 깊
은 맛을 내게 해줍니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된장 담그는
장소로는 적격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 주변엔 닭이나 개,
소를 키우는 집이 없습니다. 된장은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
에 아주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애월 : 네, 정성으로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그시는군요.
당연히 사모님과 함께 담그시는 거죠? 주문도 가능한가요?
살짝 힌트 주세요(웃음).

이위발 : 사실 된장을 담그게 된 계기는 제 처갓집이 안동
대학교가 있는 송천이란 곳인데 장모님 장맛이 그 동네에
선 제일이었습니다. 된장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집
사람과 노후 대비해서 장모님 계실 때 된장을 전수받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아름아름 알게 된 분들이 주문을 하면 택배로 보
내줍니다. 지금은 조금씩 매년 담그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 네...당장 된장맛을 보고 싶네요(웃음).

산문집을 읽어보면 ‘거미’나 ‘동박새’, ‘제비’, ‘개구리’, ‘말
똥굴레’, ‘감’, ‘안개’ 등, 힘이 없고 소박하고 불편한(?) 자연
과 굉장히 친하시던데.... 물론 그래서 이런 시골로 거처를 정
하셨겠지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진실로 자연친화적일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곳 산매골 생활도 자랑해 주세요.

이위발 : 제일 기분이 좋을 때는 아침에 대문을 열었을 때
다가오는 상쾌한 공기입니다.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기
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시내에 살다가 시골로 들어온 지 5년이 지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신비스럽습니
다. 그동안 살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름 없는 풀과 나무들과 중얼거리듯 이야길
나눌 정도로 친해진 겁니다. 개구리 우는 소리가 웃는 소리
로 들릴 정도가 되면 자연에 동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
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서 밝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저는 이 선생님의 그 기분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도 시골로 들어가서 생활한 지 이제 10년이 넘었거든요.
  선생님 첫인상이 조선시대 선비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안동분이어서 그런가 했는데,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정말
꼿꼿하고 준엄하게 유교정신을 받드는 선비셨다고요?

이위발 : 제 할배가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습니다. 제가
본관이 재령인데 신사임당에 버금갈 정도로 알려진 정부인
장씨, 장계향 할매의 일곱 형제분 중 다섯째 정우제 할배
의 9대 주손입니니다. 이문열 소설가의 ‘선택’의 주인공으
로 등장했던 분이 장계향 할매입니다. 어릴 때 할배한테
천자문을 배우면서 딴짓하다가 장죽 담뱃대로 머리를 맞으
면서 자랐습니다. 할배한테 사서오경을 배운 사람이 책거
리를 한다고 지게에 떡짐을 지고와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애월 : 어떻게 보면 우리는 예와 현대, 그 가운데 걸쳐서
끼인 시대를 살아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우를 범하는 시인이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산문집 속의 그 진정성 있
는 말씀에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이위발 : 시인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그 속엔 자신만의
성찰이 있어야 되고, 시로서 말을 걸면 그 말로 인해 책임
이 따르게 됩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진규 시인이 저에
게 비수처럼 이야기한 그 한마디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인
간부터 되라’는 말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임애월 :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시인이라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어야겠지요.
  ‘시는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이라는 구절 속에 선
생님의 시론과 문학적 관점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특
히 ‘고향’에 대한 애착이 크시네요.

이위발 : 고향은 과거와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의 시간과
줄긋기를 통해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끈은 이음만이
아니라 끊어짐일 수도 있기에 더욱 애절합니다. 지금 이 순
간에도 저의 무의식은 갈등과 긴장을 빚고 있습니다. 떠남
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는 한 저는 시어의 고향을 벗
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애월 : 이 가을에 안동에 와서 인심이란 걸 가득 느끼고,
안고 갑니다.
  안동의 아름다운 산하와 안동 시인님들의 따뜻한 마음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끝으로 신작시 한편 소개해 주세요.

이위발 : 네, 「그대 떠난 빈자리에」라는 시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임애월 :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시가 참 좋습니다. 특히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배경으로
들어서 그런지 더 감미롭습니다.
  함께 자리해 주신 김윤한 시인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상주 쪽에 오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제가 맛있는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이위발 :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임병호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신 강
희동 시인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면 꼭 올라
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비와 지사의 고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에서 만난
이위발 시인은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인 ‘할배’의 손자다운 풍모를
지키며 진정성으로 시를 쓰고, 된장을 담그며 ‘시어의 고향’을 지
키고 있다.
  집에 가서 쌈 싸 먹으면 맛있을 거라며 텃밭에서 직접 키운 어
린배추를 뽑아주는 시인의 뒷모습에서, 아직 남아있는 이 시대의
따뜻한 인간애를 넘치도록 읽었다.
  안동을 떠나올 때, 그가 부르는 노래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가 출렁이는 물빛 맑은 가을 낙동강 줄기가 한동안
내 뒤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안동의 그 따스하고 푸근한 사람냄새를 오래오래 기
억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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