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46집 2019년도 상반기

저 언덕 넘어 2025. 1. 27. 21:39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강 수 완
자작 대작 수작 …… 12
곤지 …… 13
미역귀 …… 14
밥심 …… 15
아마도 …… 16


강 희 동
노 숙 자 …… 18
비 염 …… 19
탑 …… 20
잠고에 깃들어 …… 21
미천眉川 …… 22
콩나물 …… 23


김 미 현
붉은 달 …… 26
감포 앞바다 …… 27
선인장 꽃 …… 28
무대를 위하여 …… 29
새벽 안개 …… 30


김 여 선
늦가을 거미줄 …… 32
비워지는 것들 …… 33
몸살 …… 34
횡단보도 앞에서 …… 35


김 윤 한
이를 뽑다 …… 38
쓸쓸한 베개 …… 39
명희, 아네모네 …… 40
벙어리장갑 …… 41
촛불 딸기 …… 42
뒤로 걷기 …… 43
연필, 깎으며 …… 44
신호등 앞에서 …… 46
삼삼칠 박수 …… 47
옹이 …… 48
사다리 사용법 …… 49
4B가 있던 풍경 …… 50
손톱 깎으며 …… 52
빈 가방 …… 53
연애편지 …… 54


김 지 섭
수이픈 강 …… 56
가을날에 …… 57


김 진 택
칠월 하순 어느 날 …… 60
행복의 발견 …… 61
슬픔의 발견 …… 62
단장 몇 수 …… 63
南道行 …… 64
 

이 위 발
고백 …… 66
그것이 알고 싶다 …… 67
그 섬은 기억하고 있다 …… 68
겨울밤을 보내며 …… 70
낙타와 고삐 …… 71
기다린다는 것은 …… 72
겨울의 반전 …… 73
기다리며, 싸우며, 잡는 법 …… 74
그리운 시간 …… 75
그녀는 고수高手였다…… 76


임 관 혁
촛불은 불씨 되어 …… 78
내 고향 …… 79
참꽃 …… 80
샘 …… 81
청포도 …… 82
해 질 무렵 …… 83


임 두 고
퇴근길 …… 86
임두고 …… 88
귀로에서 …… 90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91
 

임 애 월
등대  …… 96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 97
들깨처럼  …… 98


전 대 진
붓을 쥐는 일:타이핑 2 …… 100 
충분한 슬픔 …… 102 
물의 색  …… 103 
어리광  …… 104


조 용 식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 108 
무지無智  …… 109 
패랭이꽃 거蘧  …… 110
봄 꽃  …… 111 
현몽現夢  …… 112 
가을 산소   …… 113 
봄 밤  …… 114 
늙은 달  …… 115
가장 선명한 색깔  …… 116
묵음黙吟  …… 117
낮 잠  …… 118 
울 림  …… 119
 

천 승 현
가족  …… 122
늦가을  …… 123
無 心  …… 124 
제주의 동백꽃  …… 125


특집­글밭 50년, 그 발자취를 따라서 …… 127

글밭 略史 …… 157




우리들의 말

  글밭의 글 농사는 내년이 꺾어 백년, 즉 오십년이 되는 해이다.
숟가락 경작이야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누구든 하는 일이지만
글 경작, 그 중에서도 시를 쓰며 사는 삶이야 가히 아름다운 경작
이다.
  나이 쉰이 넘어가면 세상만사 부드러워져서 점점 깊어지고 넓
어지는 것이 순리이듯이 해마다 글밭이 그러할 수 있음은 처음 글
밭을 개간하고 씨 뿌려 가꾸어 준 선배 문인들의 숨은 힘에 기인
함이다.
  그 빛나는 옥토에 뒤따라 씨를 넣고 기다려서 추수하는 일은 가
령 단순한 농법인지도 모른다. 다만 한 해 농사 갈무리를 한 번
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봄에 뿌려 여름에 거둬들이고, 가을에
뿌려 겨울 초입에 또 한 번 거두어들이는 농법으로 바꾸어 지금은
한 해 두 번의 결실을 맺어 나름 알차게 거둬들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굳이 문단을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하는 잣대로 들여다보
자면, 지방지의 한계를 뛰어 넘는 시도일 뿐 아니라 시를 쓴다
는 일이 한 해에 스무 여 편의 경작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시인으
로써 게으른 경작이 아닌가 하여 시작된 일이었는데 몇 해 째 무
난하게 지나가고 있으니 이 또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고장에는 이미 이육사의 고결한 시정신이 있고, 한시를 밥
먹듯이 줄줄 써 왔던 유학자들이 널렸으며, 민족독립을 염원했던
가문과 사람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 되었던 땅이니만큼 올
곧고 향기로운 글 농사를 이어가기에는 적당한 명당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다가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극한 터라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 쓰는 일에 지극한 마음을 쓰
며 살다 가고 싶어 한다.
  오롯이 시를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지만,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 어찌 소홀하여 살 것인가? 시
를 쓰는 손과 입과 눈으로 어찌 다른 일을 함부로 도모할 것인가?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리숙하고 낭만적이고 모질지 못하다.하
지만 그건 세상의 잣대 아니겠는가? 좀 허술하고, 좀 감성적이고, 좀
유약하고, 좀 엉뚱하면 어떤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
이 글밭이면 또 어떤가? 글밭에 글을 내어 가꾸는 일에 몰두하
는 이 생이 마냥 즐거운 노역이면 행복한 삶 아니겠는가?
  다시 가을이다.
  원고를 내어 글밭 동인지 한 권을 세상에 또 내어 놓는다.
  평가는, 시를 읽고 감상하는 선한 사람들의 몫으로 놓고, 동인들
은 다시 시를 쓰려 먼데 하늘을 올려다본다.








강수완

자작 대작 수작
곤지ㆍ미역귀
밥심ㆍ아마도

|시인의 말
들마루에 앉아 곤지를 뒤집는 어머니
손도 얼굴도 곤지를 닮았다
둘이 사이좋게 물기를 빼는 동안
가을이 슬그머니 마당을 돌아 나가고 있다




자작 대작 수작

멀리서 온 손님 모시고 헛제사밥 대접해 드리다가
그 맛좋다는 안동 마 막걸리 한 사발까지 곁들인 자리
대낮부터 챙챙 양은 술잔을 부딪쳐 가며
앞 산 단풍까지 불러다 놓고 서로 불콰해지는데
그 중 술이 좀 센 사람이 늦게 채우는 잔을 못 기다리고
자작 거푸 하는 손목이 잽싸졌다
그걸 보자 술은 유유자적 즐기는 거라며
세월아 네월아 씹으며 마시던 옆 사람이
배추전처럼 넙데데하게 한 마디 한다
거 아무리 낮술이지만 대작이 안 되는구만요
입 가 흰 술을 한 손으로 쓱 닦으며 푸하하 웃자
의기양양 목구멍이 더욱 술독이 된 그 양반
아까부터 물 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내 잔을 보고
급기야 수작을 건다
물에 취하면 약도 없다는데
얼굴이 뽈도그레해져 건너편 단풍 보다 이뻐졌네요
어쩌고저쩌고 날은 맑아 하늘은 높고 아득 하더라




곤지

제 몸의 물기를 걷어 내자
비로소 온순해 진 것들이
줄줄이 호명되는 때

토란을 말리고
감을 깎아 말리고
대추를 따서 말리고
무청을 엮어 널고
단맛을 가둔 푸른 무 몇 개 썰어 널어
곤지를 만들었다

하루씩 볕에 수척해 지는 무
부피가 줄고
무게가 줄자
몸에 절로 주름이 졌다

들마루에 앉아 곤지를 뒤집는 어머니
손도 얼굴도 곤지를 닮았다
둘이 사이좋게 물기를 빼는 동안
가을이 슬그머니 마당을 돌아 나가고 있다




미역귀

미끄러운 귀를 바다에 대고 살면
아무 소리 말고 그저 소나기 오는 소리나 들릴까
지는 꽃 사이로 돌아가던 그 사람 잊을 수 있을까
검은 머리를 파도에 문지르며
잊지 마라 잊지 마라 도리질하던 귀
공연히 한자리를 어슬렁거리는 노심초사의 귀
물컹한 귓바퀴에 자꾸만 걸리던 귀
따귀를 후리며 얇은 귀를 나무라던 그 바다에
오늘은 종일 귀를 대고 미끄러지는 귀

귀를 주고 꽃을 얻는 저 목숨




밥심

밥을 거르고 강가를 걷는데
다리가 휘청 풀렸다
젊어 자주 굶던 몸에 부쩍 탈이 잦다

밥 한 두 끼 거른다고 무어 대수인가 싶었던 몸
먹는 것 보다 힘쓸 일이 더 많았던 몸
길 들이면 적응하겠지 여겼던 몸
빈 속에 독한 커피부터 받아먹었던 몸
점심때까지 마른 창자로 기다렸던 몸
낮에 쫄쫄 굶다가 늦은 밤에 허겁지겁 먹어 잘 붓던 몸

거푸 두 끼는커녕
한 끼만 걸러도 쉽게 흔들리는 몸에게 미안해져
요즘은 끼니마다 꼬박꼬박 밥을 찾는다
남은 밥그릇 다 찾아 먹어도
굶어 보낸 밥을 어디 가서 찾을텐가
흘러간 당신처럼 부질없는 밥
이제는 오지게 밥심으로 산다




아마도

술 취한 사람들끼리
쉽게 닿는 섬이 하나 있다

아마도

출렁거리는 바다에 젖어
부르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 섬
서로 그윽하거나 이해하거나
가끔 그 섬에 닿으려
한참씩 술병을 기울이는 저녁이 있다
오래 파도가 축축해 지는

아마도








강 희 동

노 숙 자ㆍ비 염
탑ㆍ잠고에 깃들어
미천眉川ㆍ콩나물

|시인의 말
뛰고 사는 것이 고단하다.
그만 숨고 싶다. 다 내리고 콩나물처럼.
덜 살고 가는 놈도 늘어난다.
남의 일이 아니다. 가파른 길 피해
그냥 흘러내리고 싶다.
집으로 돌아 와 두 다리 쭉 뻗고
할 일 없이 어정거리고 싶다.




노 숙 자

그녀를 만나려고
목 빼며 오래 기다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두고
정류소를 지나치는 버스처럼
뒤도 보지 않고 바삐 가버렸다
누구도 고단함 속에서 오래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는다
날은 저물어 모두 제 보폭으로 우중충한 집으로 사라지고
버스 노선도를 비추는 가로등과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을 그 때야 알았다
그녀도 집도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도 낯설어 버려진
한 때 머물렀던 이야기들이 소설책 속으로 들어가고
내가 아끼던 그 마당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놀고 있다
그렇다 노숙자, 고단함을 잠재우는
길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였다.




비 염

이 시대를 온전히 살아가려면
냄새에 겸허해야 한다
잦은 꽃가루의 향기나 구석진 음지의 먼지에도
못 본채 지나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참지 못하고 간질간질 실룩거리다
이윽고 재채기를 터뜨리면 온통 비토의 파열음
자극에 침잠하고 역이逆耳에 무심한 감각이
이 시대를 온전히 살게 한다
어느 봄날 살구꽃은 만발하게 피었고
그 꽃가루 미세한 향기 참지 못하고
재채기 일갈에 제 속까지 토해내는 트림
이것도 병이라고 약국을 찾았지만 별 도리 없이
고질 호위병으로 오래 주저앉아 코맹맹이가 되어
이제는 오염된 분위기나 구석진 먼지를 골라내며
재채기로 먼저 경계시킨다
따스한 봄날 떠다니는 꽃향기마저도 코를 실룩거리며
경계의 후각을 늦추지 않는
고장 난 코의 센서.






일어선다
돌이든 나무든 벽돌이라도
바라는 정성 구도의 염원
곤두서서 윗전으로 쌓아 올린다
눈비 내려 보라 눈을 보라 눈보라
무너지지 않으려 올라 좌정한 정교한 질서
밑바닥 내려앉으면 와르르 모두가 헛일
거룩한 성자의 암송 귀전으로 흐르고
땅으로 내려 염불하는 축소가 묵묵히
오래 그 자리에 적당한 보폭으로 탑돌이 되어
좌선한 아미타불 불당과 건너다보며
족히 천년을 넘어 아직까지 거기 서 있었으리라
너와 나 이유도 알지 못하고 여기 서서
무엇이 되고자 돌 한 덩이
더 올리며 돌탑이 되고자
닦지도 다듬지도 않은 몽돌이 되어
일어나 넘어지고 굴러 떨어지면서도
탑이 되고자 기고 또 오르고 있다.




잠고에 깃들어

구름 높아 가을이 쪽빛으로 뜬
사촌마실 지나 숨는 길 따르며
명고촌 누에처럼 누워있지
옛 양반 에헴, 기침소리 자자내려
산도 들도 나무조차도 키 낮추는
그 곳에 할 것 다해보고 오를 것 올라보고
높은 것 풍성한 것 다 내리고
홀가분 찾아 든 잠고蠶皐있지
그 곳에 깃들어 누에의 생을 보며 쉼 없이 허물을 벗고
아래로 부터의 영성靈性을 통하여 겸양을 쌓으며 머물리.
한 시절 물길에 흘리고 뜬구름 그 물거울에 비춰
절벽아래 놓아두고 하늘 그림자 새소리
흐지부지 흩으며 산천에 젖어
잠고에 깃들어.
                          - 김 잠고의 귀향에 부쳐




미천眉川

가는 골
구름 높은 고운사高雲寺
실개천 뜯어 누비길 따라
고이다 흐르다 머뭇거리다
눈 먼 산돌아 귀 멍한 암산巖山 우두커니 세우다
능구렁이 또아리 푸는 들녘 휘감아 삼키고
십리 백사장 잠 속 쪽빛 아침 늪으로 품었다가
물먹은 달 빛 젖은 낙암정, 상락대도 내어주고
아련한 계평들 닭 울음 아득하게
비로소 큰 강에 어우르며
흘러 흘러 멀어지는
눈썹강.




콩나물

콩이 나물이 되기 위해서는
적묵寂默으로 수도해야 한다
해를 보지 않고 덮은 굴속에서 물만 먹고
노랗게 질리며 제 키를 호리빼빼하게 키우며
묵언정진 해야 한다
세상이란 난전에서 제 역할로 제 모습 만들어 팔리고
사라지기란 콩이 나물이 되는 것 보다
훨씬 더 고단하다
콩나물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 우걱우걱 씹히며
음식으로 사라지는 행위를 위해
나는 오늘도 볕들지 않는 도시의 골방에서 콩나물이 되고자
몸피 줄이고 발 곤두세워 키 늘이고자
물과 술을 퍼부어 주고 있다.








김 미 현

붉은 달ㆍ감포 앞바다
선인장 꽃ㆍ무대를 위하여
새벽 안개

|시인의 말
눈을 뜨고 살아야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늘의 등불이 알려준다.




붉은 달

그 섬에는
붉은 달이 뜬다.
산마루 능선을 따라

찢기듯 몸부림쳐도
나아지지 않는 그리움이
온 몸을 휘감아 돈다.

비탈에 기대어 앉아
하늘보다 높은 계곡길
여정이 너무도 아득하다.

살아서 지울 수 없는
발아래 붉은 달그림자를
꿀꺽 삼키며 일어선다.




감포 앞바다

산짐승의 울음을 담은
물소리가 뭍으로 올라온다.
모래를 스치는 바람소리
가슴까지 일렁이는 수풀 소리
어느새 물소리는
어둠 속에서 폭우로 변하고
어둠을 묻힌 새벽잠은 이미
감포 앞바다
그 너머로 사라졌다.
더 아픈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선인장 꽃

간밤에
언제 다시 필지 모르는
선인장이 꽃을 피웠다.

촘촘한 가시 사이로
절대로 웃을 것 같지 않던
마음이 활짝 웃었다.

웃을 수 있는 건
따뜻한 가슴이 있는 것
안을 수 있는 것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




무대를 위하여

야간 버스에 오르면
마지막 무대에 선 기분이다.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온 듯
그렇게 앉아 있지만
검은 동굴을 지나온 냄새를
지울 수는 없다.
여기저기를 뒤지며 들여다보다
가득 찬 곳에서 빈 공간을 찾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지친 어깨들을 싣고
야간 버스는 막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차창에 기대어 잠든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노곤한 삶이 차창에 퍼진다.




새벽 안개

비가 내린 간밤
골짜기를 돌아다닌 안개가
마을로 들어와
말없이
서리꽃으로 내려앉았다.

파르르 떠는 한 줌의 몸
와르르 쏟아지는 눈물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나보다.

삶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플 수 있다는 것도.

저 멀리
새벽을 머금은 안개가
다시 골짜기를 오른다.








김 여 선

늦가을 거미줄
비워지는 것들
몸살ㆍ횡단보도 앞에서

|시인의 말

뒤돌아보기

산을 오른다
정상은 위에 있고
오르는 건 힘들다
산을 오를 때마다
정상에 오르지는 못해도
한 번쯤 뒤돌아보기
지나온 길들 위로
희미한 기억들 스멀스멀 떠오를 테니까




늦가을 거미줄

늦가을 거미들이
마지막 거미줄을 치고 있다
조금 게을러도 괜찮을 것 같은
이 가을에
거미들은 쉬지 않고
거미줄을 친다
거미줄에 걸린 고추잠자리
붉은 울음소리가
하늘로 울려퍼진다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고
아무도 울음소리 듣지 못한다
더러는 마른 풀잎들이
바람에 날려 걸리기도 한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것 같은
마른 풀잎들의 울음소리
더러는 떨어지는 낙엽들의
그네가 되기도 한다
바람이 밀어주면
위태로운 거미줄
거미줄에 걸린 늦가을이
끈기를 잃어간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늦가을 거미줄




비워지는 것들

채워지는 것보다
비워지는 것들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별들이 비워지는 새벽이면
어머닌 텃밭에 나간다
채워지는 잡초들을
비워내기 위해서
고추밭
참깨밭
콩밭
골 사이로 채워지는 잡초들은
어머니의 웬수다
- 이놈들은 왜 이리 정신없이 자라노
호미질에 긁혀 발목 잘린 잡초들
시퍼렇게 멍이든 몸통으로
땅바닥에 드러눕는다
햇살이 따가울수록 더 강해지는
잡초들의 푸른 생명력
- 놔 두소 마, 이따가 제초제 다 칠 낍니더
아들의 따가운 말도
쓰러질 것 같은 여름 햇살도
어머니의 잡초 비위내기는
멈추지 않았다




몸살

그해 겨울은 너무 길었다
모든 잎을 떨군 겨울나무처럼
아무 말 없이
사택에 혼자 누워 있었다
살점 떨군 가지 사이로



격음화된 겨울 바람은
더 빠르게 빠져나가고
아무도 문병 오지 않았다
홀연히 찾아온 몸살은
삵쾡이 눈빛의
날카로운 화살로
살갗을 파고든다



한밤중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심장을 파고 들 듯




횡단보도 앞에서

오후 세 시
나른한 노란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뀐다
나른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횡단보도로 의미없는 사람들
지나가고
의미없는 눈길로
바라본다
스쳐 지나간 저 멀리
옛사랑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내릴 수 없다
달려갈 수 없다
잡을 수 없다
……
오후 세 시의
나른함을 떨쳐버리고
다시 자동차의 엑셀레이터를
밟아야 한다
자동차 후면경에 편집된
지난날의 그리움들이
멀리 사라지고 있다








김 윤 한

이를 뽑다ㆍ쓸쓸한 베개ㆍ명희, 아네모네
벙어리장갑ㆍ촛불 딸기ㆍ뒤로 걷기
연필, 깎으며ㆍ신호등 앞에서ㆍ삼삼칠 박수
옹이ㆍ사다리 사용법ㆍ4B가 있던 풍경
손톱 깎으며ㆍ빈 가방ㆍ연애편지

|시인의 말
  직장을 그만 둔 뒤부터는 매일 시를 생각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편씩 쓴다. 시를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만
은 아니지만 시의 소재를 선택해서 매일 거기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거의 습관처럼 시를 쓰
다가 보니 좋든 나쁘든 내게는 늘 시가 많다. ‘시 부자’다.
그렇게 매일 쓰는데도 왜 좋은 시는 못 쓰냐고? 그렇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재주가 거기밖에 안 되니까. 하지
만 좋다. 생각하고 쓰는 행위 자체가 좋고, 비록 지금은
좋은 작품을 써내지는 못 하지만 오늘 쓰는 것이 나중에
죽기 전에 기똥차게 좋은 시 한 편을 써내기 위한 훈련과
정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쓴다.





이를 뽑다

젖니를 뺄 때 잠시 울기는 했지만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명주실 끝에 묶였던 이를 까치가 물고 갔기 때문이었다

잊고 지냈던 이 하나가 많이 흔들렸다
지구도 함께 흔들거렸다
썩어 있는 세월의 뿌리가 엑스레이에 흑백으로 찍혀 있었다

무언가 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탱하기 위해서는
마른 오징어는 턱관절을 아프게 했고
기다림이 지겨울 때는 단물이 빠지도록 껌을 씹으며 시간을 재곤 했다

이윽고 치과용 집게가 좌우로 몸을 흔들며
나무 한 그루를 뽑아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시간 하나가 분리되어 낯선 금속판 위로 떨어졌다

물고 있던 가재를 뱉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빈자리를 확인했다
살면서 뺄셈에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진통제를 다 먹고 난 뒤에도 아마
한동안은 조금 더 아플 것이다




쓸쓸한 베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어린 시절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외로움이라든지 쓸쓸함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 때문에
남몰래 뒤척이며 홑청을 적시기도 했다
세상일이란 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불안한 것들은 얼룩진 꿈들이 되어
편한 잠을 훼방 놓곤 했고
팍팍한 노동에서 돌아와
쓰러질 듯 의식을 눕히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잠들고 깨어나는 순간의 연속,
성긴 잠의 밑바닥을 고이고 있던 그들도
해진 몸을 하고 하나씩 떠났듯이
나도 그들처럼 언젠가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이 든 채로
모든 것 남겨두고 떠나갈 것이다
어쩌다 잠 깬 이 새벽
보일러는 여전히 잘 끓고 있고
바깥에서는 빈 들판을 가로지르며
바람이 팬플루트를 불고 있다




명희, 아네모네

  한국전쟁 끝나고 삼 년 뒤에 났다고 했으니까 나보다 세 살
이 많은 셈이다
  무남독녀였다, 아버지는 죽고 없었다
  친구들이 중학교 교복을 맞추러 다닐 무렵 서울로 갔다, 봉제
공장에서 시다를 한다고 했다

  명희가 왔다, 추석을 앞두고
  갈색 파마머리에 미니스커트, 붉은 색 뾰족구두가 인상적이
었다
  수근거렸다, 다방에서 일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술집에 나간다
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깊은 눈동자가 슬퍼보였다,
  어쩌다 문득 아네모네를 떠올렸다, 그 꽃을 본 적 없어 어떻
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지만
  아네모네 하고 읊조리면 물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홀어머니가 죽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났다, 아마도 이승에서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살아 있다면 혹시라도 내가 보고 있는 저 보름달, 어디선가
무심코 올려다보지는 않을까
  문득 아네모네, 그 꽃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아네모네를 모른다




벙어리장갑

세수하고 나서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얼어붙곤 하였다
어머니는 모두 잠든 밤 호롱불을 밝히고
고달픈 삶을 한 올씩 엮어나갔다
그것은 애잔한 수행이었을까
졸음 때문에 가끔씩 대바늘에 찔리기도 했었다
가장인 아버지는 외로웠지만
우리는 한 이불 안에 발을 함께 넣은 채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었으므로
굳이 손가락 수만큼 나누어
따로 뜨개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갑이 다 만들어지면 한 달음에 밖으로 나가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거나
하늘 높이 연을 띄워 올리며
다가올 먼 훗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두 짝을 한데 묶어 두어서
서로가 잃어버릴 일은 없었지만
손이 점점 커질수록 꿈도 하나씩 잃어버리고
아련한 시절도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날에는
손금 어디쯤에선가 털실의 촉감이
가끔씩 되살아나기는 하였다




촛불 딸기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저녁
  연료비 때문에 비닐하우스에 난방을 못하는 가난한 농부
내외
  어린 딸기들 추위에 얼어 죽을까봐
  난방 대신 밭고랑마다 촛불 하나씩 밝혀가고 있었다

  들판 모두 잠든 시간, 그 비닐하우스에서만
  촛불들이 발갛게 어둠을 사르며 철없는 딸기들의 추위를
녹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딸기들, 탐스럽고 붉은 보석으로
  소복소복 태어날 것이었다

  그날 저녁, 가난한 산동네에도 집집마다 발갛게 불이 들
어오고
  하나씩 모두 간절한 촛불이 되어
  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가만가만 비추고 있었다
  별들도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늘 밤 비록 어둡고 춥지만
  딸기밭에 아침이 오듯이 내일이면 햇살은 가장 높은 산동
네를 먼저 비추고
  사람들도 하나씩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어
  다시 힘차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뒤로 걷기

여태껏 앞만 보고 걸어왔지만
산책길, 처음으로 뒤로 걷기를 한다
낯선 근육들이 하나씩 불려나와 움직이는 사이
시간도 함께 뒷걸음질을 시작한다
고향, 포플러 잎들은 반짝이며 소리치고
어릴 적 돌던 팽이는 여전이 돌고 있다
눈보라 치던 밤 크리스마스, 왜 홀로 남았는지
왜 눈송이는 자꾸 내 눈 속으로 떨어지는지
뒤로 걷는 길은 시야가 보이지 않아서
가끔씩 휘청거릴 때도 있는 것처럼
젊은 날, 도저히 풀리지 않는 고뇌에 싸여
웅크리고 앉은 뒷모습과 만나기도 하고
이제는 아련하게 굳은살이 되고 말았지만
아무리 닦아도 마르지 않던 눈물이나
무겁게 가슴 짓누르던 아픔 같은 것들도
여전히 모두 그대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너무 멀리 왔구나 이제 돌아갈 시간,
다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비척이며 걸어가야 할 끝을 알 수 없는 길이
안개 속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되어
끊길 듯 끊길 듯 펼쳐져 있다




연필, 깎으며

  손에 잡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가운뎃손가락 위에 얹은 다음 엄지와 검지로 살며시 쥐어
야 한다고,
  어쨌든 그 무렵부터 받아쓰기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지나다녔을까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길이 아득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때로는 실수도 많았다
  그 때마다 생각의 반대편 끝에 붙은 지우개가 말없이 쓱
쓱 부끄러운 흔적을 지워주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손으로 쓰는 행위로 알고 있었지만
  ‘심’이란 이름, 그 야문 광물질의 아낌없는 헌신을 보며
비로소
  마음이 쓰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특히 밤새 고민하며 연애편지를 쓸 때면 더 그랬다
  미술시간, 가벼운 터치로 그렸던 스케치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채색이 되었을까
  그것보다는, 뾰족하게 끝을 깎고 모질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울 수 없도록 더 또렷하게 필기되어 있었다
  오늘 문득 왼쪽 엄지 끝으로 칼등 조심조심 밀며
  잊고 지냈던 육각형, 그 표피를 깎아낸다
  향나무 은은한 향기도 함께 흩어지지만
  깎아낼수록 길이가 짧아진다는 그 평범한 사실은 그동안
알지 못했다
  어느새 반 토막도 안 남은 길이, 이제야 비로소
  그 이치를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신호등 앞에서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생각했다
  마음껏 달려가고 싶었지만 엎어져 무릎 까지고
  결국은 빨간 머큐로크롬 액을 바르고서야
  때로는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 서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숱한 세월 동안 이 길 지나왔지만
  지나올 때마다 계절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차창을 타고
들어왔고
  오늘은 오늘만 가야 하는 또 다른 낯선 길
  정지신호 앞, 와이퍼가 지난 기억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
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의지대로였을까
  알 수 없는 힘에 휩쓸려 흘러오게 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지금은 뜻과는 상관없이 정지된 시간,
  흔들리며 흔들리며 홀로 걸어온 길들이 외롭다
  이윽고 의도하지 않아도 또 다시 신호는 바뀌고
  사람들, 일제히 가속 페달을 밟고
  푸른 강물이 되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순간, 멈추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일
  어디로 왜 가야하는지는 모르지만
  가야만 할 수밖에 없는 아득한 종착지를 향해
  물결에 휩쓸린 채 어쩔 수 없이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삼삼칠 박수

  청군이 꼭 이겨야만 했을까
  이마에 두른 머리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짓 따라 힘차게 박수를 쳤다
  400미터 계주도 기마전도 어느 편이 이겼는지는 금세 잊
혀졌다

  아시안 컵 축구대회, 북한 응원단들 모여 있었다
  지나치는 순간 낯익은 박자 소리가 들려왔다
  삼삼칠 박수, 수십 년 잊고 지냈던 코끝 찡한 우리 모습
들 거기에 있었다

  함경북도 온성 시골마을 민둥산 아래 또는 평안남도 남포
바닷가 작은 인민학교
  2인3각 경기나 기마전을 하며 해마다 운동회가 열렸고
  해마다 우리처럼 응원을 했을 것이다
  승패는 잊히고 그 박자만 남았을 것이다

  어쩌다 청군, 백군으로 갈리고 말았을까
  목청 터지도록 이겨라 소리치며 손바닥 아프도록 응원을
했을까
  삼삼칠, 몸속 어딘가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그 박자가
  일본 군국시대의 산물이라고
  저녁 뉴스가 아픈 역사를 이야기했다




옹이

원목 탁자 표면 위에
한 그루의 생애가 물결치며 새겨져 있다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문득 눈이 가는 옹이 하나
한때 네가 머물렀던 자리
가지 끝에 돋아나는 연둣빛 잎들 보며
사랑을 꿈꾸기도 했었다
함께 수액을 길어 올리며
눈부신 꽃을 피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꽃잎 지는 날, 그 바람 따라
말없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애틋한 사랑일수록
남아 있는 상처는 더 깊어지는 법
네가 떠난 자리, 시간은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고
그리운 눈물은 굳고 또 굳어서
이승에서는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아픈 화석이 되고 말았구나




사다리 사용법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눈썹 위로 솟아 있는 아득한 계단, 갈증은 심하고 정상은
아득했다
  출렁다리, 현기증이 났지만 멈출 수 없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 꼭 붙잡고 하늘만 보고 가야했으
므로 당연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얼마를 정신없이 올랐을까
  오르는 만큼 시간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며 올랐지만 밤하늘 별과 달은 여전
히 그대로였다
  어릴 적 나무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해 울었던 기억,
  ‘오르다’라는 말 속에는 반드시 ‘내려오다’는 몸짓이 숨어
있다는 걸, 뒷걸음질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왜 아무도 일러
주지 않았을까
  허공에서 말라버린 나팔꽃의 의미를 왜 몰랐을까
  늦었지만 생각 한 칸씩 접으며 내려오는 길
  평화는 원래 낮은 곳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부드러운 흙
이 주는 이 편안함,
  평소 못 보던 민들레나 채송화 같은 키 낮은 꽃들
  비로소 다시 느끼는 그 향기




4B가 있던 풍경

미술실은 2층에 있었다
거칠게 스케치한 문을 드르륵 열면
미소 잃은 아그리파가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선생님은 붉은 메니큐어를 반짝이며
소묘의 기법에 대해 낯선 서울말로 이야기를 했다
연필 비스듬히 잡고 사각사각
접시 위 사과와 장미꽃을 그리며
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았다
잘 몰랐던 반사광과 그림자가
모양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같은 사물도 그리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며
연필, 심 자가 왜 마음심일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전혀 닮지 않은 자화상을 그리며
언제 커서 어른이 될까를 생각했지만
솜씨는 서툴렀고 스케치 북은 너무 넓었다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조금은 쓸쓸한 일이기도 했다
오래된 기억들은 왜 흑백으로 바뀌는 것일까
사라지는 꿈만큼 부질없는 추억은 쌓여만 가는데
생각이 사라져버린 토르소
그 석고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까
온 세상 짙게 칠해진 밤에 홀로 깨어
새끼손가락에 반질거리며 묻어있던 흑연 가루
아련한 냄새를 다시 떠올린다




손톱 깎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다
  생각의 길이만큼 손톱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은 손톱깎이를 통해서였다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싹이 되어 돋아나고 금속 날에 잘
려 바람이 되곤 했을까
  펼치고 접었던 신문지, 흘러간 소식들이 허공에 펄럭거
린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봉숭아 꽃물, 철없던 사랑의 흔적
  톡톡 잘라 내며 비로소 가을바람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것
이다
  결국 하나씩 버리면서 철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
이다
  살아간다는 것도 무언가 끊임없이 갈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감춰진 욕망이 시나브로 자라나 주기적으로 잘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려나간 만큼 기억들은 자꾸 쌓였지만 파편으로 튕겨나
간 분실된 추억들 어디에 있을까
  절단된 시간의 경계를 줄칼로 문지르며 일상 하나를 접
는다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듯이 케라틴의 뿌리도 성장을 멈추
고 더 이상 잘라낼 무언가가 없을 때 어떻게 할까 누가 울
어줄까
  아득한 밤하늘에 손톱달 하나 떠 있다




빈 가방 

  새로 산 가방 냄새가 좋았다
  지퍼를 여는 순간 아득한 수평선 위로 갈매기들이 떼 지
어 날아가곤 했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또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칫솔을 챙기고 속옷을 챙기고 온갖 것들 다 채워 넣다가
보면 닫을 수 없도록 커진 부피

  가벼워지는 법을 알기는 해도 욕망은 제어하기 힘들었다
  플랫폼에 서서 구름을 보고 있는 사이에도 부질없는 수염
은 자꾸만 자라났다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발을 씻는다
  누구에게나 평생 동안 걸어가야 할 거리와 감당해야 할
무게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짐을 꺼내고 난 가방 속에는 여태껏 걸어온 아득한 길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떠나고 돌아올 때마다 수없이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했지
만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빈 가방 속에는 잃어버린 꿈들만 가득 들어차 있다




연애편지

비가 하염없이 오는 날이면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몸살이 났다
첫 줄부터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괜히 가슴만 두근거렸다
코스모스 꽃들도 밤하늘 은하수도
오직 하나의 이유로 존재했었다
쓰고 또 찢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불면의 시간을 보냈던가
지금쯤 읽고 있을까, 어떤 생각 할까
손꼽아 헤아리다 혼자 얼굴 붉어지곤 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에
더 간절함으로 남아있는 것인가
낙엽에 불붙이고 사연들 모두 태워 보냈지만
끝끝내 타지 않는 그 무엇
내게도 스무 살 시절이 있었던가
볼 푸르던 그 처녀애도
시간의 터널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간 지금
오래 잊었던 기억 가만히 일깨우며
시골 우체국 낡은 우체통 위로
난분분, 꽃비 흩날리고 있다








김 지 섭

수이픈 강
가을날에

|시인의 말
  시를 놓아도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고향처럼, 친구처
럼, 지난날처럼 시상이 떠오를 때가 있지. 두 편을 써서
게으른 숙제를 마치자.




수이픈 강

오늘도
그 강가에 서면

수이픈 수이픈 소리를 내며
강물은 넘실넘실 내려

돌아오길 바라면 바랄수록
강물은 갈수록 큰 소리로

수이픈 수이픈 되내이며
갈대 갈대들 휘저으며




가을날에

저 숲 여름날엔 마냥 푸르기만 하여서
한 겨레붙이들 모인 집성촌 같더니
이 가을날 온갖 빛깔로 물들어
각성바지 마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네

여기 많이 모인 축제의 군중들도
어우렁더우렁 정다운 이웃인 듯도 하지만
돌아갈 때는 산산이 흩어져
니 집 내 집 골목길로만 잦아들 듯

우리도 마지막 날엔
모두 다른 빛깔의 단풍잎 기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려 내려 쌓이는
고요한 황혼의 마을에 다다르리라

이윽고 캄캄한 그 밤하늘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의 나라가 펼쳐지고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 다른 빛깔로
오직 제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려니








김 진 택

칠월 하순 어느 날
행복의 발견ㆍ슬픔의 발견
단장 몇 수ㆍ南道行

|시인의 말
내장산에 가야한다.
거긴 단풍이 아름답다.
내장산은 정읍에서 가깝다.
정읍에 가기 전에 논산을 먼저 가려한다.
정읍은 이름이 이뻐서 가려는 거고
논산은 들이 넓어서 가려고 한다.
 
충청도와
전라도는
하늘이 넓어서 좋다.




칠월 하순 어느 날

푸른 목초지
얌생이들은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땅 위의
윌렴 포크너는
워시를 시켜
서트펜을 죽인다.
 
피 묻은 낫은
건초더미에 꽂혀서
잠들어 있고
 

까빼라떼 앞에 두고
짐노페디
졸고 있다.




행복의 발견

지나간 날들은
당신과 흰 구름
사탕과
커피만 있으면
나의 세상이었다.

목면 홑이불 덮고
금강송 평상에 누운
나는
멀뚱멀뚱
재 넘어서 불어오는
잠을 기다리고 있다.




슬픔의 발견

한 쪽 누깔을 어디에 버렸는지
백태 낀 한 쪽 눈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푸른색 접시위에 엎드린 멸치여
쇠고기 먹지 말자는 가장의 권유에
여기 전신의 체액이 다 뽑혀
누워있는 겉절이 배추는
불쌍하지 않냐는 안주인의 타박에 대해
넌 무슨 토를 달아야 하는가
입 속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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