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기발간분

글밭48집 2020년도 상반기

저 언덕 넘어 2025. 4. 27. 17:21

우리들의 말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
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가장 처절한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나
약함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 문장에 포함된 의미는 자연
의 순리에 따르지 않고 역행한 속죄의 마음도 내포되어 있다. 그동
안 인간들이 어깨에 힘주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뼈저리게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스스로 자가 격리 되어 있으면서 어느 작가는 글 한줄
쓰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번 코로나19의 팬데믹 현상은 지구를 완
전히 뒤집어 놓은 초유의 사태였다. 특히 예술가들의 의식적 박탈
감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작가의 역할은 없
다.”고 했다. 너무 무기력하게 무너져버린 작가들의 미래는 보이지 않
고 있다.
  거기에 대한 반박은 이렇게 표현 되었다. “그래도 인간이 살아있
는 한 작가들은 써야 된다.”고 했다. 그것이 작가의 운명이라고 했
다. 먹고 살기 위해,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써야 된다고 했다.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라고 했다. 쓰는 것이 자신을 위해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미래는 분명히 변화될 것이다. 어떤 식으
로 바뀌든 세계는 새롭게 다가오는 불안한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
른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쓰고 책을 낸다. 시인은 인
간의 본성으로 돌아가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시어에 매달리게
된다.
  시가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시가 미래의 나를 인도해주지도 않
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를 쓴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명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차 례


우리들의 말  …… 3

강 수 완 
가죽나물  …… 10
칼에 긋는 말  …… 11
조팝꽃 큰 이모 가셨다 …… 12
골부리  …… 14
먼 옷  …… 16

강 희 동 
긴 잠  …… 18
겨울나기   …… 19
더딘 아픔  …… 20
와불유감臥佛遺憾  …… 21
와불유감臥佛遺憾 2  …… 22
호스피스 병실  …… 23
부활  …… 24
무기력  …… 25
미륵이 되어가는 와불  …… 26
동백꽃  …… 27

권기태 
추락하는 남자 …… 30
2020 봄날에  …… 32
고추 묘판에 물을 주며 …… 33

김균탁
붉은 기억  …… 36
문(door)과 문(moon) 그리고 문이라는 여인 …… 38
오래된 정사  …… 39

김 미 현
길을 걷다  …… 42
등대  …… 43

김 여 선
너에게 가는 길  …… 46
날일 찰수록 콧물이 난다  …… 47
폐가에서  …… 48
3월  …… 49

김 윤 한
선데이서울  …… 52
낙타무늬 넥타이  …… 54
안경알을 닦다  …… 55
월곡양조장  …… 56
설탕 한 스푼  …… 57
까치 생각  …… 58
나방을 위한 변명  …… 59
젖은 돈  …… 60
서울소리사  …… 61
바오밥  …… 62

김 지 섭
대오大悟  …… 64
‘코로나19경經’ 읽기  …… 65

김 진 택
노래  …… 70
일기   …… 71

이 위 발
거울은 장님이다  …… 74
너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 75
있음과 없음이 서로 맞닿을 때 …… 76

임 관 혁 
약산 참꽃  …… 78
달빛길  …… 79
정情 셈하기  …… 80
나무새  …… 81
일생  …… 82
대전사 북소리  …… 83
개구리  …… 84
바보개  …… 85
가을 길  …… 86
가는 길에  …… 87
눈물  …… 88
그리움  …… 89

임두고
코로나 바이러스기 1  …… 92
코로나 바이러스기 2 …… 93
코로나 바이러스기 3  …… 94
코로나 바이러스기 4  …… 96

임 애 월
코로나19  …… 100
봄편지  …… 101
겨울새  …… 102

전 대 진
오늘 아무 이유 없이 베댓이 되고 싶습니다 …… 104
고장난 자동차  …… 106

조 용 식 
연緣 3  …… 108
연緣 4  …… 110
연緣 5  …… 111
연緣 6  …… 113
연緣 7  …… 115
간 봄 그리매  …… 116
세 개의 의자  …… 118
아카시아 꽃  …… 120
과체중過體重  …… 121
봄날은 간다  …… 122

특집­이 계절의 시인 / 김지섭 …… 123

글밭 略史  …… 158







강 수 완

가죽나물ㆍ칼에 긋는 말
조팝꽃 큰 이모 가셨다
골부리ㆍ먼 옷

|시인의 말
  지구상 온 나라가 바이러스로 큰일이 났다.
  세상이 잠시 멈추는 듯 하자 사람들 삶이 한결 단순해
졌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몸이 묶여 생각이 깊어지고 옆을 둘
러보게 되었다.

  시는 늘 저렇게 살아왔으나, 이제서야 시가 제대로 보
이고 시처럼 살기 쉽게 되었다.




가죽나물

여우비 끝에 무지개 걸리 듯
봄 한때 반짝 나오는 붉으죽죽한 가죽나물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는 그 때처럼
아주 잠깐, 가죽나물

두툼한 두릅이 두 물 쯤 필 때
두릅 단 옆에 나란히 놓여 팔리기 시작하는 가죽나물
맛을 아는 사람들이나 기다렸다가 얼른 사서
찌짐을 부치거나
보드라운 잎으로 쌈을 싸 먹거나
고추장 단지에 박아 지를 만들어 놓고
밀이나 보리가 팰 무렵부터 한 종지씩 꺼내
뜨끈한 밥 위에 올려 조금씩 즐기는 가죽나물
호불호가 갈리는 참 희한한 맛과 향
그 때,
처음 마음에 맴돌던 그 이름 같이
오래 마음에 살던 그 이름 같이
때 되면 잠깐 나왔다 얼른 들어가는
가죽나물 몇 단에 한껏 붉어 보는
이 짧은 봄날




칼에 긋는 말

참외를 깎아 먹다가 무심코
껍질 담긴 쟁반과 칼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딸네 집 다니러 온 늙은 아부지
꿈자리 어지럽힌다며
걱정이 깊다 겸연쩍은 마음에
칼로 자르듯 머릿속 비우고 싶어 그랬다니까
마음을 자르는 건 칼이 아니라
마음대로 안 되는 고놈의 마음 아니겠냐며
애꿎은 칼날을 가만히 거두어 쥐고 부엌으로 가신다




조팝꽃 큰 이모 가셨다

  흰 무명 적삼 등에 젖도록 밭고랑에 들어 대식구 밥 해
내던 부엌보다
  오래 붙어살던 밭이며 논이며 구부러진 비탈길 세월 다
두고 총총 가셨다
  외할배 술자리에서 한 약속으로 엉겁결에 혼인했다는 큰
이모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간 원망 대신
  산밭이며 개울가에 겨우 붙은 다락 논마지기에 정신 팔아
  열 넘는 시집 식구 한집에 살며 건사했다는 우리 큰
이모
  해 길어진 저녁때 허기진 몸으로 집에 와
  방아 찧어 가마솥 밥 둘레둘레 상 차려 들여놓고
  갓난아기 젖 물리려 이불 걷었더니 풀 먹인 이불깃처럼
뻐덕해져 있어
  캄캄한 입을 틀어막고 어른들 몰래 뒤란에서 컥컥거리며
울다가
  종일 일하던 밭둑가 조팝꽃 무더기가 따라 와 밤하늘로
오르는 걸 봤다던가
  손윗동서 식구들 밥이며 빨래까지 하느라 죽은 아이 생각
하는 건
 비탈밭에 들어 호미로 고랑을 오가며 주저앉아 일할
때뿐이었다니
 감자를 놓으면서도 울고
 콩을 심으면서도 울고 복장을 치면서도
 농사는 때가 있어 잃은 자식보다 먼저라
 손 따로 눈 따로 조팝꽃 무더기로 핀 들판에 피멍 든 세
월을 살았다더니
 흰 환자복을 입고 조팝꽃 흐드러지게 핀 봄날 꽃 사이로
가셨다




골부리

  맑은 물에 사는 골부리는 맛이 씨와,
  노는 물이 고우면 등이 맨질거려서 도통 단맛을 품질
않지
  약간은 탁한 듯 물속이 얼비치지 않고
  군데군데 굵은 돌이 더러 박혀 있어
  여린 듯 세게 굽이쳐 흐르는 물살에 몸을 대고 살아야
  등짝에 깊은 골이 여러 겹 져 주름진 껍데기 아래로
  이런저런 사는 맛을 들여 굵어지느라 사람 눈에 얼른 띄
지도 않는 뱁이야
  그런 골부리를 줍다 보면
  사람 허리 꼬부라지기 전에 됫박이 금세 차 할매가 주워
도 재미가 오지지
  모래가 훤히 들여다보여 물살이 손등을 간질거리는 바닥
에 사는 골부리는
  배를 대고 기어 다니는 동안 곱게 자란 티가 나 쉽게 잡
히고 맛은 싱거워
  줍는 재미도 덜하고 양재기 담기도 더디기만 해
  적당히 푸른 물속 적당히 거친 물살 적당한 크기의 돌이
  좌우당간 살아가는 관건이란 말이지
  사람이나
  골부리나
  거 참 희한한 일이야
  해거름 녘 골부리 주우러 강으로 나가며 한 수 던지는 노
모 이마에
  골부리 등짝 같은 지난 세월이 시퍼렇게 일렁인다




먼 옷

  올해 팔순 맞은 엄마
  먼 옷 한 벌 마련했노라 전화가 왔다
  하나 남은 혈육 맏언니를 며칠 전 보내고
  이 세상 그야말로 혈혈단신 외로운 처지라며 연신 울더니
  포목점 이리저리 발품 팔아 손수 장만하고 오셨단다
  아들딸 멀쩡하게 있는데 서럽게 왜 혼자 다녀왔냐고
  자식 된 체면만 앞세운 내 물음에
  엄마 대답이 우물처럼 깊다
  야야 암만 늙어도 지금의 내 나이는 사뭇 남의 거 같더니
  한 세상 살아온 일이 한 바탕 꿈인가싶구나
  항우장사도 왔다 가는 길, 때 되면 가야지
  소매 넓은 맑은 활옷을 소원대로 골라 맞추어
  이제 마음이 한결 아늑해지셨노라
  어미 갈 길 두고 너희는 아무 걱정 말 거라며 전화를 끊으
셨다
  손수 장만한 먼 옷 입고 언젠가는 먼 길 떠날 엄마 얼굴
이 눈앞에 다가와
  가뭇없이 흔들리는 봄날
  그 붉던 철쭉이 꽃술을 길게 빼 물며 지고 있었다.







강 희 동

긴 잠ㆍ겨울나기ㆍ더딘 아픔
와불유감臥佛遺憾ㆍ와불유감臥佛遺憾 2
호스피스 병실ㆍ부활ㆍ무기력
미륵이 되어가는 와불ㆍ동백꽃

|시인의 말
  몸을 푼 강물도 뒤척이며 봄밤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잠 못 이루고 풀밭에 누운 와불臥佛의 오랜 잠을 본다. 코
골이 날숨마다 청매화 한 송이씩 꽃눈 뜨고 들숨 마다 건
너 산들이 한 걸음 다가온다. 첩첩 능선을 넘어 흘러온 
시간들이 지치며 아득하다. 그대와 나 무슨 인연으로 이
세상 여울목에 만나 속살 다 보여주고 못다 한 사연 수북
이 남았는데 어찌 서둘러 와불로 누워있나. 퇴행의 끝자
락 잠 속 천진의 얼굴 내려다보면 더불어 살아온 이끼 낀
모퉁이도 보이고, 잔잔히 웃어넘기는 금잔화 꽃향기 묻어
오는데, 그대 와불 되어 정녕 나를 떠나려 함인가.




긴 잠

내 아내는 뇌에 사리가 생겨
오랜 잠 속에 들어 있다

“원규 아빠
여기 좀 봐요”

“큰 애 너무 닦달하지 말고
애 말도 좀 들어 봐요”

금방이라도 돌아서며
그 목소리 들릴 듯한데

그녀는 잠잠히 여린 숨 쉬며
고요한 긴 잠을 오래 이끈다

산수유 다 피어도 눈 뜨지 않고
복사꽃 다 져도 웃지 않는다.




겨울나기

엄동에 얼지 않으려
사철나무도 서슬 푸른
송백도 입술이 파랗다
보라 저 빈틈 없는 살림살이
여린 들도 얼어 몸 움츠려 떨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허공을
빗질하여 눈은 내린다
내 서러움 딛고 올해도 남해 밭둑가 붉은 동백 피련가
질긴 겨울은 언제 훌훌 안개 털어 오르려나
매끄러운 문지방에 살얼음 끼이고
강둑을 밀어 올리는 등피 터지는 소리
떨며 무겁게 지새운 섧은 밤의 밭둑가에
힘겨운 신음소리 뿌려 두고 또 아침이 온다
한 번쯤 소풍으로 온 병원이 통증의 놀이터가 되고
일상으로 누워버린 그 동네엔
아프지 않는 자 손님으로 서성인다
질긴 시간의 빨랫줄에 아픈 흔적을 빨아 널고
돌아서면 또 기진맥진한 일상이 즐비한
지겨운 시간과 질긴 씨름을 한다




더딘 아픔

할 말이 없다
꽃이 피어도 잎이 벌어져도
막막하게 저물어 오는 봄날
나는 허망한 봄바람 맞으며 지는 꽃에 대하여
마른 눈물을 보탠다
피지 마라 향기 날리지 마라
지는 것이 서러워 별들도 밤에 드러나지 않는다
별이 죽은 세상에 뭘 그리워 하늘 쳐다보랴
허전한 세상 정거장 또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조금 먼저 떠나고 더디 흐르지 못하는 강물의 뒤척임
찬바람도 변방을 떠돌다 데워져 숲으로 들고
숲속에서 온전한 달과 별을 올려다본 하늘
별은 지고 조금 머물다 변방으로 쫓겨나는 바람의 향방
봄의 틈 사이를 뚫고 이제 꽃을 조용히 내려놓으리
운명으로 스치는 유성의 휘파람 속에
오늘밤도 신음하며 마른침을 넘긴다.




와불유감臥佛遺憾

다시 돌아갈 감정도 버릴 욕심도 없이
천진무구한 와불이 되어 강가로 밭둑가로
저 우둔한 산 둔덕까지 오르는 풀빛이 되어
봄밤 훈훈한 바람으로 풀어 떠돌다 꽃 피우고
벌 나비 잉잉거리는 시공을 빚어 걸어 두고
얼굴 속에 무상고요 머금고 잠만 자는가
남루한 옷가지 벗어 걸림 없는 금동와불이 되어
푸른 풀밭 강 언덕 흐르는 물길을 따라
무한 우주 구름 떠가는 벽공이나 올려다보며
평온에 침잠하면 밤이 엷어지는가 아침이 오는가
나는 잠 못 이루고 이 서늘한 세상 언저리에서
누워서도 일어서는 청계와불의 벗은 알몸에
풀빛 오르는 봄기운을 묻혀
기저귀를 갈아 채운다.




와불유감臥佛遺憾 2

너무 서둘러 발 벗고
강을 건너려 한다
저 언덕 너머 아직 안개 걷히지 않았는데
살구꽃은 하마 다 벌어지지 않았는데
푸른 개울 와불 선정에 들어 기침하지 않는데
꽃 피네 꽃이 지네
동백꽃 붉은 울음 던지고
동박새 날아오른다
산은 무거워 아직 그림자 걷지 않았는데
새벽달 홀로 떠 서녘으로 흐르고
고요히 맑은 얼굴에 꽃그림자 일렁인다
깊은 잠 숨소리 가늘어지는 가얏고 울림
팅 줄 끊어진 그네의 허공
너무 서둘러 발 벗고 강을 건너려 한다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봄 길 서둘러 오는데
그대는 말문을 닫고 저만치 앞질러
선정에 들고 있었네.




호스피스 병실

그녀는 가늘고 오랜 잠을 이끌고
나는 깨어 있었네
신음 소리도 지쳐 잠으로 스며들고
고요 숨 막히는 밤의 끝자락
간간히 뽀드득 아래윗니의 엇갈림으로
이 가는 소리 사이사이로
어둠을 빗질하며 봄비가 내린다
어제 핀 복사꽃 하마 꽃모가지 째로 꺾여
어허 저기 빗물 속에 둥둥 떠내려간다
누군가 아프고 또 누군가 아픈 것을 아파한다
몰아쉬던 숨소리 멎고 옆 병상이 비어 나간다
꽃이 시든다 꽃이 떨어진다
누군가 여린 숨결 거두려 들어오고
또 굳어져 실려 떠간다
그녀는 가늘고 오랜 잠을 이끌고
나는 그 숨소리 따라가며 깨어 있었네.




부활

한강물이 뒤척여 흐르는 강남 쪽
삼성서울병원 재활치료실
오늘도 부활을 다지는 엉거주춤 영 불안정한
신체와 영혼들 용쓰고 있다
일어나기 위하여 걷기 위하여
아니 일어서서 걸어 나아가기 위해
베드로의 물 위를 걷는 부활의 경이
‘일어나’를 주문하는 한 마디에
사지가 힘을 얻어 일어서고 걷네
뒤뚱이지만 재활이 되네
그대 엎어져 보았는가
일어나기 영 힘들어 포기해 보았는가
밤 새 몸 뒤척여 흐르는 강남 쪽으로 가보라
재활의 사연들이 제 온 몸을 퍼즐 맞추듯 곤두세우며
부활을 잉태하는 엎드린 자 앉고 앉은 자 일어 나
걸어 나아가는 재활의 대열
그대 힘겨운 세파에 지치면 그 곳으로 가
부활을 꿈꾸라 그리고
걸어서 나아가라.




무기력

봄 뜨락에 민들레가 피었다
바람을 피해 키 낮추고 추위에 질려 노랗게
잠시 빛바래어 하얗게 포자 낙하산으로 날리는
봄 허공을 유영하며 한 시절 살아 사라지는
푸른 시절 점령한 여름이 오기도 전 잊혀지는
민들레의 노래는 허공에 산화되어 씨를 뿌린다
오늘이 가면 또 하루가 악몽처럼 버티고
시원의 동산에 흘러내리는 퇴행의 배설
들어가고 나오는 통과의례의 단상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사람의 고뇌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할수록
피어 날리는 민들레 낙하산
산천 어디엔들 못 가랴만
누워 무디게 표정 없는 청계금동와불
봄이 와도 보이지 않는 암병동의 침울 속
재활을 꿈꾼다 무기력을 털어내어
속절없이 날아오르는 민들레의 산화散花




미륵이 되어가는 와불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와불臥佛 이라 한다
아직 멀었는데 창 밖 풍경들은
저마다 시간을 기다리는데
종착역에 도달하기 멀지 않았다는 닥터
기어이 허망한 겨울이 끝나 가는가
툰드라의 동토는 만년설을 지고 이고
눈 속에서 설경의 나라를 만드는 언 세상
봄이 오면 흘러내리는 얼음산의 눈물
빙하는 물을 타고 흐르며 물이 된다는
만년설의 전설 앞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재활요양 병원에 와불을 저당 잡히고
돌아서는 발길은 무거운 피난길의 걸음
부부란 어디까지인가 머물고 심어 둔
같이 가야하는 길은 어느 곳인가
얇은 가식과 위안의 언저리를 쓱 닦아내고
대신해 줄 수 없는 아픔과 고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정지보다 실없는
투전꾼의 오락 속에 점점 더
미륵이 되어가는 와불에게 못다 한
아쉬움과 미련을 담아 약을 먹인다.




동백꽃

찬바람 매서운 매질 속에
동백 붉은 입술 연다
노랑 속눈썹 꽃가루 눈물 묻히고
남도에 봄이 온다
청계와불淸溪臥佛 선정에서 못 깨어나고
동백동백 꽃 찍어 먹고 동박새
붉은 울음 운다.







권 기 태

추락하는남자
2020 봄날에
고추 묘판에 물을 주며

|시인의 말
  땀에 젖어 바위 위에 쉬다 보면 산새와 고라니 몇 마리
나왔다가 코로나19 환자로 보여서인가 무서워하며 후닥
닥 도망을 친다. 산나물 몇 줌 뜯다가 허리를 펴면 올망
졸망한 산들이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돌아
갈 길이 굽이져 산허리에 걸려 있다.




추락하는 남자

여자의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
태초의 수많은 인연에서
남자의 짝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맞선에서 아담한 시골여자를 만났다
겪어 보니 좁쌀 같은 소녀인 것을
순하고 고분고분한 외모에 착각하여
혼사라는 틀을 뒤집어쓰고
세 자녀 자식농사를 지어 놓아서
티격태격 다투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한 치의 양보도 후퇴도 없는 한랭전선
끝없는 사하라사막 모래알 같은
차가운 싸락눈이 내리는 여자이다
남자는 하인처럼 여자가 부려야 하고
공손하게 순종해야 신사도이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세상이 뒤집혀도
집안의 가장은 당연히 여자이며
여자가 남자를 거느려야 한단다
마실을 가든 노름을 하든 낮잠을 자든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춤을 추든
간섭하지 말고 하란 대로 하란다
청소 등 가사 일과 식사 준비도
알아서 챙기고 알아서 일하는
남자가 여자의 하인이 되었다
여자의 반란으로 아내가 변화하여
전통의 삶들을 흔들어 무너뜨린다
남자는 지금 추락하고 있다




2020 봄날에

수시로 공간에서 만나던 사람들
가로변에 붐비는 인파는
무얼하고 통제된 시간을 보내는지
만나지 못한지 석달이 되었다
햇살이 따사한 봄날이 되었으나
여유로운 시간을 아껴 가며
김밥 한 줄을 싸서 가까운 산으로 간다
새 하얀 입 마스크를 끼고
물통을 차고 등산 지팡이를 들었다
모두들 만남의 관계를 청산하고
들일과 운동을 핑계 삼아 가는 곳
꽃과 나비 변화하는 봄에 기대어
땀에 젖어 바위 위에 쉬다 보면
산새와 고라니 몇 마리 나왔다가
코로나19 환자로 보여서인가
무서워하며 후닥닥 도망을 친다
산나물 몇 줌 뜯다가 허리를 펴면
올망졸망한 산들이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돌아갈 길이 굽이져 산허리에 걸려 있다




고추 묘판에 물을 주며

양지 바른 고추묘 포장에 들어서
어린 묘판 위에 비료 물을 뿌린다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묘들은 환성을 지르며 일어선다
“코로나19” 피해 보상금을
모든 국민에게 주겠다는 환성이다
언제 이런 위민 해택이 있었던가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칭찬이다
선거 전략으로 돈을 뿌린 것이라고
험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내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자진 기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라에서 뭉칫돈으로 빚을 내어
불쌍한 이웃을 살리는 데 써야지
돈이 많아 용처를 찾지 못하는
부자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서
양심에 따라 기부를 하면 된다고 했다
바람은 “코로나19” 보상금 자루를 들고
고추묘 포장을 조용히 들어왔다 나갔다
고추는 보상금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오늘도 고추 묘판에 물을 주었다







김 균 탁

붉은 기억
문(door)과 문(moon) 그리고 문이라는 여인
오래된 정사

|시인의 말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나는 쓰네
하루에도 몇 번씩 외치고 싶지만
외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나는 쓰네
어쩌면 먼저 사랑한다는 말로
내 세상을 온통 흔들어놓을
것들 향해 나는
고백의 시를 쓰네




붉은 기억

누나의 발자국은 붉은색이었다.
차가운 방바닥을 밟고
홀연히 걸어간 발자국은
노을보다 아득한 붉은 기억이었다.

처녀가 죽으면 붉은 버선 신고
먼 길 간다던 외할머니의 말이
길게 늘어진 곡소리처럼
귓가를 걸어 다니던 날,

우리는 노랗게 지려놓은
누나의 오줌자국 위에서
거친 바다를 떠돌다
비로소 몸을 쉬이며
천천히 죽어간 고래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었다.

잦아드는 울음소리처럼
조금씩 색을 잃어가던
어린 고래의 숨소리가
창틈을 비집고 희미하게 내려앉은 날
우리는 붉은 얼굴을 마주보며
식어가는 흔적을 먹었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로부터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복스럽게 먹어야지
까마득해져가는 잔소리를 들으며
누나의 오줌자국같이
끝내는 색이 바랠 저녁을 먹었다.

서글픈 기억처럼 꾹꾹 눌러 담은 술잔이
허공에 부딪힐 때마다
나보다 어린 누나가
외할머니의 오래 묵은 잔소리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걸어올지 모른다는
서글픈 농담을 건네며
한 점씩 한 점씩 끝나지 않을
적막을 먹었다.




문(door)과 문(moon) 그리고 문이라는 여인
- 달이라 불리는 여인에 대한 단상

  문을 열면 문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지난 밤 이별의
징조를 훔쳐본 달을 입에 문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문에 낙
서를 하고 있는 앙다문 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턱
을 손에 괸 문의 옆모습이 한낮에 뜬 초승달 같이 흘러갈
때 남자는 문의 문을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철문인 듯 오래
된 미닫이문의 마디인 듯 열고 싶었다 텅 빈 문의 눈을 열
면 생채기 난 낙서들이 왈칵 쏟아져 내릴까 겁도 났지만 문
을 열지 못해 안달난 새끼 곰처럼 문을 열고 쏟아지는 문의
눈을 안고 싶었다 문 속에 오래 갇힌 달빛은 야생을 잃은
곰의 얼굴인 듯 곰의 입에 물린 죽음을 목격한 연어의 지느
러미인 듯 붉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민담을 문에 새기며 남
자는 녹이 슬어 지친 문의 손을 잡고 당신을 열어봐도 될까
요 속삭이고 싶었다 문의 몸 여기저기에 누군가 생채기처럼
남기고 간 낙서를 지난 밤 소중하게 그어둔 상처인 듯 쓰다
듬으며 오래 묵혀 둔 안부를 묻고 싶었다 문의 눈빛이 다급
한 몇 개의 소식으로 남자를 두드릴 때 남자는 문보다 더
멍한 표정으로 낙서 가득한 문을 비추던 달의 흔적을 몇 개
라도 줍고 싶어 문에 몸을 기댄 채 잠들고 싶었다




오래된 정사

하염없이 비가 오는 밤이면
당신을 마구 빨고 싶어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말랑해질 때까지 주무르고 싶어

우울 속에 던져져 딱딱해진 근육이
스르르 녹아내릴 때까지
거친 숨소리로 당신을 흔들고 싶어

그럼 몸속을 뚫고 지나간 깊은 동굴에서
바람 따라 흔들리던 울음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지 몰라

거친 숨결에 구겨진 그 밤은
낯선 쾌감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열매처럼
가슴 위로 뿌려져 내릴지 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누군가 오래 전에 두고 가 딱딱해진
분노나 죄 따위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내
깨끗하게 빨고 싶어







김 미 현

길을 걷다
등대

|시인의 말
항상 생각한다.
깊은 겨울을 지나며
나, 다시 詩를 쓸 수 있을까?
다시 봄!
그때 전하지 못한 말을
더 늦기 전, 이 봄이 가기 전
해보라고 속삭이는
봄 앞에서
다시 詩를 쓴다.




길을 걷다

아주 먼 어느 곳에서는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건너야만 하는 강이 있다
저 멀리 바람이 부는 언덕 너머
쉽게 가라앉지 않는 두려움을
쿨럭이며
긴 밤을 건너는 삶이 있다.
세찬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돌을 등에 지듯
두려움을 향해 가는 이유는
서서히 어둠이 걷혀와
귓불을 스치며 다가오는
푸른 향기 품은
길을 만나리라 믿기 때문이다




등대

꺼지지 않을까 불안함에
눈빛을 확인해 본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어떠한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그 눈빛에 안도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간절함이
미끄러지고 흘러내리는
저마다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산다는 것의 그림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모여드는 밤
제 길을 가도록
밝혀 주는 시선이 따스하다
누군가의 눈빛이 될 수 있다면
삶이 빛나는 순간이다







김 여 선

너에게 가는 길
날이 찰수록 콧물이 난다
폐가에서ㆍ3월

|시인의 말
바닷가 약국 앞에는 하얀
처방전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소금기만 남은 배들이
알전구들을 까뒤집고 있었다
아직도 모래 속에서는
파도가 숨어 있는데




너에게 가는 길

햇살이 낡은 기왓장 위로
힘겹게 내려앉는다
덩굴의 마른 갈비뼈 사이로
검은 이끼들이 발을 뻗는다
깨어진 봉창의 유리는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삐꺽이는 바람이
문을 흔든다
봉해진 편지 봉투처럼
닫혔던 기억들
사진 액자가 걸렸던 자리에
우표 한 장 붙여 본다
발송 되지 않는 편지처럼
너에게 가는 길이 그러했다




날이 찰수록 콧물이 난다

도가니탕 2인분 포장하여
어머니를 찾아간다
하얀 국물 팔팔 끓여
연골을 가위로 토막낸다
아침도 드시지 않으셨는지
금방 한 그릇 비웠다
국물만 한 그릇 더 떠왔다
많다면서 자꾸 국물을 내게 부어주신다
도가니탕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제 갈게요
들리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외투를 걸치고 손인사를 했다
그래 그래
솔잎 스치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린다
잇몸을 드러내며 잘가라 손짓한다
날이 차다
잿빛 하늘로 뒷산이 흐려진다
푸른 솔잎 사이로
희끗희끗 사라지는 어머니
날이 찰수록 콧물은 왜 나는지




폐가에서

어쩌면 주막으로 쓰였을 집 한 채
아직도 직립을 바라는 부엌문 틈 사이로
백열구를 꽂았던 검은 빈 소켓이
겨울 바람에 흔들린다
게으른 먼지가 쌓인
흑백 텔레비전이 지직지직
주파수를 찾지 못하고
박테리아들을 쏟아내고 있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서까래에 적혀 있던
너의 이름을
그으름들이 지우고 있었다




3월

3월이면 현기증이 난다
나뭇가지에 걸린 햇살들이
마당에 투망을 펼치는
3월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가팔라진 호흡으로
새 한 마리 투망에 포획된다
잡을 수 없었던
새의 깃털 사이로
바람은 쉽게 빠져나가고
잊혀진 현기증으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김 윤 한

선데이서울ㆍ낙타 무늬 넥타이
안경알을 닦다ㆍ월곡양조장
설탕 한 스푼ㆍ까치 생각ㆍ나방을 위한 변명
젖은 돈ㆍ서울소리사ㆍ바오밥

|시인의 말
  수많은 봄을 맞고 또 보냈지만 바이러스 전염병이 창궐
하고 있는 올해 봄은 어느 해보다 더 잔인하게 마음을 흔
들며 지나가고 있다.
  문명도 과학도 이 바이러스 앞에서는 아직도 속수무책
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강한 것 같지만 세상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시 또한 위기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임을 느낀다. 하
지만 이런 힘든 세상에 시조차 사라지고 만다면 얼마나
더 삭막해질까 하는 생각으로 또 시 원고를 보낸다.




선데이서울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살빛 가득한 화보를 훔쳐보거나 흑백 탈선 기사를
읽으며 낯이 붉어졌고
  수업시간 몰래 보며 일탈의 떨림을 느끼기도 했다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는 어려웠지만
  기막힌 사연들이나 야릇한 이야기는 늘 다음 페이지가 궁
금했고
  잠자던 말초신경들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검열된 뉴스를 보고 통행금지 사이렌을 들으며 오히려 장
발에 나팔바지 펄럭이며 금지된 자유를 꿈꾸고
  욕망으로 얼룩진 값싼 연애담을 몰래 읽으며
  우울하고 따분한 일상을 달래곤 했다

  은밀한 독서가 잠시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삶이란 통속적인 것
  손끝에 침 묻혀가며 숨어있는 욕구를 달래거나 기발한 사
랑을 꿈꾸기도 했었다

  오늘은 선데이, 서울은 여전히 잘 있는지
  오래된 노래 어쩌다 다시 들으며 기억 속의 책장을 다시
넘기면
  낡은 시간은 증발하고 탈색된 낮달만 웃고 있다




낙타 무늬 넥타이 

  새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정해진 길 없는 너무 넓은 하늘이 좀 무섭기는 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묶는 법을 배웠고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게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
는 생각을 하면서
  꿈은 다만 꿈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헐거워진 넥타이를 다시 조여 매는 동안
  프린트 속 낙타들이 무릎을 세우고 하나씩 일어서서
  고삐를 따라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등에 얹힌 짐이 버겁기도 했고 가시 돋친 선인장에 혓바
닥이 찔릴 때도 있지만
  어차피 감당해야 할 길들여진 운명
  목줄이 풀어지면 오히려 더 불안했다

  횡단보도, 오늘도 넥타이들 찬바람에 펄럭이고
  낙타들도 줄지어 까마득한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다
  기다란 속눈썹이 젖어 있다




안경알을 닦다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처음으로 검은 뿔테 안경을 맞췄다
수수깡 안경을 낄 때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따스했던 풍경들이
선명하고 날카롭게 안구를 타고 들어왔다
세상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고
눈 부릅뜨고 똑똑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투명한 렌즈가 가르쳐줬다
때로는 어쩌다 창이 깨지기도 했고
다리가 부러져 갈아야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새로 맞출 때마다
조금씩 더 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람 불던 날 첫 키스의 몽롱한 순간도
함께 지켜보았을 것이고
좌절과 환희의 순간도 함께 했을
상처 난 그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하다
그것은 투명하게 맑은 통로였고
한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학관에 가 보면
사람 대신 낡은 안경이
다리를 구부린 채 앉아 있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안경알을 닦는다
얼룩진 마음이 잠시 맑아진다




월곡양조장

양조장은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손님이 오면 숙제를 하다 말고
으레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심부름을 갔다
밀가루 술밥 찌는 냄새가 구수했다
술 항아리에서는 거품을 내며
밤새도록 소란스럽게 술이 익었을 것이다
짐실이 자전거에 술통을 가득 달고
술 배달꾼이 페달을 밟으며 떠났다
안동댐이 되면 모두가 물에 잠기고
여름 지나면 뿔뿔이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대낮부터 술도가 매대 앞에 서서
새끼손가락으로 술잔을 저어가며
불안한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상금을 탄 사람들은 색싯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렀다
양조장 붉은 양철지붕 틈새로
술 따르는 소리를 내며 빗물이 떨어졌다
‘고무 다라이’를 받쳐 놓았으므로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술 배달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설탕 한 스푼

  살아간다는 말 속에는 약간의 쓴 맛이 포함되어 있다 커
피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 맛도 적당히 숨겨 두어야 좋다 그
래서 설탕 한 스푼을 넣는다 혀끝으로 전해오는 두 맛의 알
맞은 조화

  사랑이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가기 위한 과정을 지
칭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소나기 내리던 날의 유혹, 첫 키
스는 달콤했다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탕’이라는 이름이 문
득 떠올랐다

  무슨 요리든지 쓰거나 맛이 덜할 때는 아끼지 말고 설탕
한 스푼을 넣어라 화면에서 제법 유명한 셰프가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다 그것은 일상이 감
미롭지 못하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도 아쉬우면 빗
소리를 섞어 술을 마신다 비어 있는 잔만큼 술이 다시 채
워진다

  무언가 허전하거나 외로울 때에는 커피를 마신다 씁쓸한
시간을 잊기 위해 오늘도 설탕 한 스푼, 전신으로 스며드는
달달함에 카페인의 부작용도 잠시 잊는다




까치 생각 

  미루나무 위 까치가 울면 첫눈이 왔다
  어린 우리는 새끼 까치가 되어 어머니가 물어다 주는 먹
이를 받아먹으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명절 가까운 날, 공장으로 돈 벌러 간 누나가 올까 까치
발로 담장 너머를 쳐다보았지만
  그해 가을, 까치는 울지 않았고 나만 몰래 울었다

  직녀, 오작교 어디쯤 오고 있을까
  기다림에 지칠 무렵 부리 끝에 편지를 물고 까치, 빨간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지만
  이내 우체통 위에는 속절없이 낙엽들만 떨어졌다

  돌아보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아침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고 눈부신 꽃들을 기다렸지
만 정작 까치는 쉽게 날아오지 않았고
  잃어버린 깃털들만 기억 속을 날아다녔다

  마지막 까치밥 하나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더 이상 기다릴 그 무엇이 없다는 것
은 얼마나 가난한 일인가
  까치가 앉았던 나뭇가지, 적막한 허공만이 걸려 있다




나방을 위한 변명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애벌레 시절 뜨거운 땅을 밀
쳐가며 부지런히 나뭇잎들 갉아먹고 버텼지요 나비가 되기
위해서

  무지개 뜬 청보리밭 사이를 날아 목련꽃잎 위에 살포시
발 딛고 서서 단 꿀에 취해보고 싶었어요 포도주 마신 듯

  하지만 깨어보니 몸이 너무 무거워 윤슬 반짝이는 강물
건널 수 없었지요 날개 퍼덕일 때마다 풀풀 떨어져 날리는
무채색 비늘 가루들

  주눅 든 유전자가 부끄러워 햇빛 아래 날아다닐 수 없었
지요 낮이면 언제나 음습한 곳에 엎드리고 있어야만 해요
입맛 다시는 천적을 경계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나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밤늦
도록 날아 다녀도 몸에는 꽃가루 대신 푸르게 젖은 달빛만
가득

  그렇다고 꿈을 버리는 건 너무 슬프지 않나요 그래서 가
끔씩은 불빛 향해 더 높이 날아오르기도 해요 가로등에 부
딪쳐 수직으로 추락할 지라도




젖은 돈

  어느 낯선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
  젖은 지폐를 방바닥에 널어 말리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굳은살 박인 손들이 새벽부터 펄럭였다 잃어버린 지문을
찾으러 노인 하나가 낡은 관절을 끌고 골목길을 삐걱거리며
지나갔다 어깨 위에 붙여진 파스의 멘톨이 유일한 위안일
때도 있었다

  고시원의 계단은 늘 지쳐 있었다 농부는 부지런히 땅 을
파야 했다 먹고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짜장면을 팔고 붕어
빵을 팔고 폐지를 팔고 더러는 본의 아니게 몸도 팔 수 밖
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밤 지나고 나면 또 온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아프고 가난한 사람에게 눈물 나는 한 장으로 가서
닿을까
  말라도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서울소리사 

  서울소리사는 서울에 있지 않았다
  면 소재지 장터 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래된 기와집 지붕위
에 양철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가게 앞에 주인을 닮은 미루나무가 있었다

  미닫이 유리문 안에는 ‘라듸오’, ‘테레비’, ‘유성기’가 60촉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쌍나발 스피커에서는 ‘동백아가씨’나 ‘안개 낀 장충단 공
원’이 쿵작거렸다
  저녁이면 ‘난닝구’를 입은 동네 사람들이 기다란 나무의자
에 나란히 앉아 흑백 ‘전설의 고향’을 보곤 했다

  팔려 나갔던 소리들이 절룩거리며 다시 가게로 돌아오자
주인은 안경을 고쳐 쓰고 헐거워진 소리를 드라이버로 조이
고 끊어진 소리에 납땜을 했다
  못 고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시간의 부피만큼 구석에는
갖가지 스피커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내장들이 어지
럽게 쌓여 갔다

  어느 날부턴가 낡은 주파수는 더 이상 잘 맞지 않았고 주
인의 보청기도 점점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미루나무도 톱날에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갈 곳 잃은 전파들만 공중을 헤매고 있었다




바오밥

  지평선이 아득히 내려앉는 곳
  하늘로 뿌리 올리며 나무 몇 그루 서 있다
감히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없어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
다고 했다
  어린 왕자는 별이 쪼개질까 두려워 아직도 작은 나무들을
매일 뽑아내고 있을까
  하지만 나무는 수천 년을 그렇게 서 있다
  사바나에는 우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습관처럼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젖가슴이 큰 흑
인 여자의 발이 흙탕물에 젖는다
  수많은 조상들이 새들을 따라 떠나갔지만 나무는 들판을
내려다보며 한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래서 그 아래를 지날 때면 누구나 잠시 작아진다
  치아가 유달리 하얀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 석양이 물들
면 무언가 사무치게 외로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피곤한 허리를 세우고 다시 수천 년을 이렇게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몫의 시간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어디선가 두둥둥 젬베 소리 달빛을 흔든다







김 지 섭

대오大悟
‘코로나19경經’ 읽기

|시인의 말
  현대사에 큰 사건으로 기록될 코로나 대유행은 인간 실
존에 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단순히 그냥 바이러스가
우리들에게 질병의 위협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류는
이후 어떻게 달라져야하는 가를 성찰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대오大悟

될 듯 될 듯하던 일이
자꾸 뒤집어져 마음 상하는 날엔

오르막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지
인생지사 새옹지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뭘 하다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라는 법어라도 만나면
깊은 산골 절간처럼
한동안은 그윽해지지만

그 마음 또다시 뒤집어지는 날은
배추전을 한 번 부쳐봅니다.
어디 여러 번 뒤집지 않고
노릇노릇 맛깔 나는
배추전 구어지던가요

*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이 변화한다.




‘코로나19경經’* 읽기

오랜 시절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우한의 박쥐 천산갑들**의 원혼들이
회심의 반격을 시작해 왔다.
생각보다 쉽게 인간들이
신음하면서 쓰러지자
한층 신이 난 그들이
온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사람들은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거리는 페허처럼 적적해 갔다.

모양도 없고 자취도 없는
이 유령이 불어대는 괴이한 피리소리에 홀리어
사람들은 두려워 대면하기를 꺼리고
여기저기 뿌리도 없는 음모의 안개가 피어나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울부짖는 사이
죽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들은 더욱 더 흥분하여
손오공처럼 수천 수억의 분신으로 화하여
바람보다 빨리 날아서 도시를 넘고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어
지구촌 곳곳을 점령지로 만들어나갔다

거대한 공포가 들불처럼 휩쓸고
음산한 구름이 온 세계의 하늘을 뒤덮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은 동분서주하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도 가족의 임종을 못 보고
안치할 관이 부족하였으며
장송곡은 물론 따르는 이들도 없이
주검들은 외딴섬이나 산골짜기로 실려가
짐승들처럼 무더기로 묻혀 갔다.

이제 우한의 박쥐 천산갑들은
다시는 인간에게 포획당해 학살 당하고
화염에 던져지지 않으리라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육장과 우리에 갇힌
소들과 돼지와 닭들과 오리들과
질병 예방을 빌미로 살처분 생매장 당한
수천 수억 가축들의 떠돌던 원혼들도 일제히
박쥐와 천산갑들을 부러워하면서
머나먼 서쪽나라 우한의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지난날 한가로이 풀밭을 거닐며 풀을 뜯거나
어미가 새끼들을 불러 함께 모이를 쪼고
밭을 갈며 일손을 도우면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왔던 그들은
언제부턴가 큰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가죽과 털들은 벗겨지고 깎이어
옷과 신발과 장신구들로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피 흘리고 찢기고 잘려진 살은 구워지고 삶겨
맛난 요리로 식탁에 올라
사람들의 배는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

이제 우한은 저 가엾은 짐승들 영혼의 성지가 되는가
박쥐와 천산갑들이 그들의 수호신이 될 날은 언제인가
그리하여
‘식탁 위에 평화가 와야 지구에 진정한 평화는 온다’는 말**이
실현될 날은 또 언제일까


* 이 경의 이름은 본원경本願經(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하려
고 세운 서원)의 외전外傳에 해당될 만한 것으로 지은이가 붙인 이름이
다. 코로나로 당하는 지구촌의 참상을 하나의 경전으로 보았다.
**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우한설을 따랐다.
* ① 너의 배가 죽은 동물의 무덤이 되게 하지 말라. ‘예언자 무함마드,
하디스’
② 뱃속에 들어갈 고기, 고기를 먹은 배, 신은 이 둘 모두를 파괴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6 : 13’
** 현대의 영적 지도자 ‘칭하이무상사’







김 진 택

노래
일기

|시인의 말
  당신이 가고 없는 세월은 누렇게 삭아버린 얼굴처럼 갑
갑하고 한 때 푸르렀던 푸른 꿈들은 화장터 굴뚝에서 피
어나는 잿빛 구름처럼 이내 사라졌다




노래

어릴 때
식구들 모여
둥근 밥상 앞에 두고
모여 앉아
저녁을 먹던 때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당신이 가고 없는 세월은
누렇게 삭아버린 얼굴처럼 갑갑하고
한 때 푸르렀던 푸른 꿈들은
화장터 굴뚝에서 피어나는
잿빛 구름처럼
이내 사라졌다

이 밤
두고 온 아들의 겨울 이불을
오래도록 내려 보는
눈길이 있다




일기

버드나무나
갈참나무의
꽃가루를 마셨나 보다
귀와 관자놀이
눈 주위
그리고
음경까지 부어올랐다

열한 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모르게 되는
비트켄스타인을 펼친다
살면 살수록 모르게 되는
이 멍텅구리 세상을
나름 똑똑하다는 오지리의 친구도
별 수 없었나 보다







이 위 발

거울은 장님이다
너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맞닿을 때

|시인의 말
  ‘인생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서양철학,
동양철학, 인문학, 종교학 다 섭렵해도 답을 찾지 못하다
가, 어느날 기차를 타고 가다 아주머니 한 분이 올라오더
니 “삶은 계란이오”라고 외치더란다. 그때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인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찾으려고
하지 말자”란 문장을 되새겨 보고 있는 중이다.




거울은 장님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그림자 있듯, 고니가 물고기에게 먹이
주듯, 사자가 남은 고기를 하이에나에 넘겨주듯, 달이 단맛
을 잃어버리고 묽어지듯, 바라보는 나도 점점 싱거워지듯,
눈이 오고 내리고, 비가 오고 내리고, 폭설은 계속되고, 장
마는 이어지고, 나무는 바람이 하자는 대로 흔들리고, 그만
하면 움직이지 않듯, 눈만 감으면 청개구리로 변하는,

  수많은 잎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어떻게 쓰러지는지 알
면서도 모른 체 하듯, 내가 알고 있는 물도 지척에선 흐를
줄 알고, 꺾어질 줄 알고, 돌아갈 줄 알고, 번지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면서 소 울음의 울림을 주듯, 단순하면서 압도
적인 그 소리에, 망설임이나, 회의나, 반성에도, 책임을 물
을 수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숨어서 보고 있는,




너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너는 여기에 나를 남겨 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둠에도 정조준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가 늘 그랬던 것처럼
움직임을 순간에 포착해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물을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감고 보라고 한다
발정 걸린 똥개의 이빨을 보면 다 안다고 한다
나를 쳐다보지 마라고 한다
눈동자를 보면 속살이 보인다고 한다
얼마나 절절한지 아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흔들리듯 동조한다
음모를 감추고 꽃바람으로 온다고 한다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한 것처럼
믿음 속에서도 이방인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를 자꾸 쳐다보지 말라고 한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밖을 보라고 한다
너를 찾는 나를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라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맞닿을 때


그림자 스며들자 꽃잎 떨어지고

낮달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꽃잎은 고개 흔들어 있음을 알리고

낮달은 꽃을 볼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이에 머문다







임 관 혁

약산 참꽃ㆍ달빛길ㆍ정情 셈하기
나무새ㆍ일생ㆍ대전사 북소리
개구리ㆍ바보개ㆍ가을 길
가는 길에ㆍ눈물ㆍ그리움

|시인의 말
  대구에 살면서 참 보내기 힘든 시간, 코로나19로 청송
에서 3개월 보내면서 원고는 생각도 못했다. 급히 대구로
와 써 놓은 것을 정리해 보낸다. 멀리 있으면 멀어진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봄날이다.




약산 참꽃

참꽃 피고 지는 봄
내 그리움도 피고 지고

참꽃 피고 지는 봄
내 기다림도 피고 지고

참꽃 피고 지는 봄
내 슬픔도 피고 지고

참꽃 피고 지는 봄
내 눈물도 피고 지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약산의 참꽃 피고 지는지
소식조차 알 길 없다
내 헛봄만 오간다.




달빛길

고와라
달과 빛이 하나 되어
가는 달빛길은

좋아라
달과 빛이 하나 되어
가는 달빛길은

아름다워라
달과 빛이 하나 되어
가는 달빛길은

행복하여라
달과 빛이 하나 되어
가는 달빛길은

청보리가 핀다
밀 향기가 핀다
달과 빛이 하나 되어
가는 달빛길은
잡은 손이 따사롭다.




정情 셈하기

미운 정은 빼고
고운 정은 더하고
가는 정은 곱하고
오는 정은 나누기




나무새

어린 나무 없으면
큰 나무 없고

큰 나무 없으면
어린 나무 없지

작은 나무에도
큰 새는 울고

큰 나무 위에서도
작은 새는 운다

큰 새가 작은 울음 울 때
작은 새는 큰 울음 운다.




일생

새싹은
잎새 되어

잎새는
단풍 되어

단풍은
갈잎 되어

갈잎은
낙엽 되어

낙엽은
흙빛 되어

돌아가네
흙으로
돌아가네
영원히




대전사 북소리

내려 놓으란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내려 놓으란다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괴로움도
아픔도
눈물도
욕심도
모두 다 내려 놓으란다

자비 하나 남겨 두고
모두 다 내려 놓으란다.




개구리

운다
울어
후회의 울음
소리 내어 운다
소리 소리 내어 운다

온 들녘
떠나가도록
뉘우침 울음
소리 내어 운다
소리 소리 내어 운다




바보개

윗동네 개 똥에 눈 멀면
아랫동네 개 눈엔 똥만 보이고

윗동네 개 한 번 짖으면
아랫동네 개 열 번을 짖는다

윗동네 개 배 터져 죽으면
아랫동네 개 배 고파 죽고

윗동네 개 달 보고 짖으면
아랫동네 개 주인 보고 짖는다.




가을 길

꽃길을 걸어도
나는 외롭다

단풍길을 걸어도
나는 외롭다

낙엽길을 걸어도
나는 외롭다

달빛길을 걸어도
나는 외롭다




가는 길에

땀 냄새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흙 냄새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풀 냄새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꽃 냄새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가는 길에
내 가는 길에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눈물

피보다 붉고
꽃보다 아름답고
눈꽃보다 희고
이슬보다 맑아
뜨는 무지개




그리움

단풍 고운 날에
기러기 날아오듯
오는 그리움
가슴에 찰랑
물결이 인다







임 두 고

코로나 바이러스기 1
코로나 바이러스기 2
코로나 바이러스기 3
코로나 바이러스기 4

|시인의 말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염병이 번져 눈 깜작할 사이에 세
상이 달라져 버렸다. 황당하게 변한 세상살이의 느낌을 몇
편 시로 형상화해 보았으나 시답잖을 뿐이다. 시 쓰기의 안
일과 나태 속에서 점차 무뎌지는 내 시의 칼날을 버려야 할
지 벼려야 할지 그저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도래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언컨택트(uncontact)한 삶에 대한
추론과 상상들이 매우 흥미로운데 그런 세상 속에서 시들
은 또 어떤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기 1
- 염병

  염병할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란 문은 다 걸어 잠근 채
  수십만 년 전 크로마뇽인이나 껴안음직한 정적의 실타래
를 풀어
  저리 쉽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미줄을 쳐버리는구나.

  염병할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백만 년 전 인류 조상 때부터 심장에 아로새겨진
  죽음이라는 원초적 전율을 비수처럼 꺼내 들고
  사람들의 일상을 저리 쉽게 난도질해버리는구나.

  염병할 코로나 바이러스는
  다가오는 눈빛이나 손길은 흡혈하듯 다 빨아치워
  안색도 체온도 없는 좀비 같은 사람들을
  터지는 한숨으로, 외로운 섬으로 저리 쉽게 흩뿌려버리는
구나.

  염병할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렁이는 세상 바다에
  배도 비행기도 더 이상 뜨지 않아
  이미 절해고도의 섬이 된 사람들 사이에
  나 또한 화석 인간으로 저리 쉽게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있구나.




코로나 바이러스기 2
- 해빙되지 않는 봄

임청각 지나 안동댐 밑 월영교 인근에도
소팜다리 지나 봉정사 뒤편 천등산에도
목련 산수유 매화 개나리에다
진달래 벚꽃 산도화 조팝꽃으로 이어지며
징검다리 놓이듯
여기 저기 번지는 꽃무더기들은
봄이 왔네, 봄이 왔어
새 봄의 전령이 되고, 호객꾼이 되어
어서 껴안아 보라 도발하고 있지만,
염병으로 퍼지는 코로나 바이스 탓에
마스크 낀 입이며 가슴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인 것을.
언제쯤 소 머거리처럼 갑갑한
이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벅차오르는 입으로,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꽃들에 환호하며
해빙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으랴.    




코로나 바이러스기 3
- 변태

퇴직한데다가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치니
영락없이 집 지키는 개나 고양이 신세.
이웃도 친구도 심지어 아들딸조차도 발길이 끊긴
적막한 아파트 방 안에서
집 밥만 먹어온 지 벌써 두어 달.
외식이니 회식이니
식탁에 둘러 앉아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즐기던 그 일상, 그 사람들이
어느 꿈결이었나 싶은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일한 백신은
아직도 사회적 거리두기 뿐이라니.
보릿고개를 올라가는 여느 사월보다
더 잔인한 이 사월이여!
라디오를 듣다가, 오후에는 외출 마스크를 끼고
앞산 산책로나 몇 바퀴 휘돈 후
집 근처 약국에 들러 공적 마스크를 구입해야 하나?
내가 드나들던 테니스장이며 수영장이며 기원은
여전히 문을 굳게 잠그고 있어
생전 처음 겪는 이 지옥 같은 일상들이
악몽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라니.
이렇게 얼토당토 않는 삶 속에 내팽개쳐진 나날들이
하루 이틀 아니, 한 달 두 달 부풀어가는 사이
나는 시나브로 사람의 탈을 벗고
외계인으로 변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코로나 바이러스기 4
- 몽유도원을 찾아서

황사보다 미세 먼지보다
더 지독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 밖에서는 잠시도 벗지 못하는 마스크
생생한 표정은 다 지워버리고
사람이 곧 바이러스이듯 경계하는 눈초리만 장전한 채
걸어야 하는 도심의 길거리가 싫어.
마스크를 벗은 진얼굴의 함박 표정으로
그 옛날 소꼽놀이 색시하던 그애처럼
어디서나 예쁘게 피는 봄꽃들을 보러
첩첩산골 내 고향 섶재로 간다.
저만치 흐드러지는 도화경이라니!
탐스런 복숭아를 꿈꾸는 발그레 뺨이랄까,
도도한 봄날의 속살이랄까.
한없이 도취하는 도화는 몽상의 불꽃.
몽글몽글 도화 가지 사이로
내가 좋아하는 음색의 가수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이란 노랫가락이 번지는가 싶더니,
브래지어는 액세서리일 뿐이라며
옷차림의 자유를 스스럼없이 내세우다
도화살桃花煞 낀 요부라는 악플 더미에 짓눌려
꽃잎처럼 세상을 등진 가수 겸 배우 셜리의
요염한 과즙상 화장 입술이 어룽거리기도 한다.
이따금 휘파람새 소리 도화경 속에 섞이고
온 몸에 페로몬 향수 같은 도화 향내까지 흥건하니
이곳이 바로 몽유도원夢遊桃源.
게다가 마스크도, 손 소독도, 거리두기도 필요 없고
경제적 재난 걱정도 없어
코로나 바이러스 안전지대이기도 한
이곳이야말로 진경 몽유도원.







임 애 월

코로나19
봄편지
겨울새

|시인의 말
탱자나무 가시는 없지만
스스로 위리안치 된 지 두 달이 넘었다.
코로나19가 무서워도
들녘엔 꽃들 흐드러지고
느릅나무엔 새순이 돋는다.




코로나19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것들이
전 지구를 뒤흔들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자나 여권 없이도 가볍게 국경을 넘고
힘이 센 나라도 쉽게 공략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밀행을 자행하던 집단과
박쥐의 습성을 가진 숙주들에게
쉬이 옮겨 붙는 그들만의 강공법
야금야금 호흡기를 파고들어
허파를 갉아 먹으며 숨통을 조인다
자신들만 선택받겠노라고
턱을 치켜들던 오만한 생각들
속수무책 쓰러진다
죄가 없는 사람들 더욱 움츠러들고
거리는 겸손하게 조용해졌다
선전포고도 없이 은밀하게 시작된
포성 하나 없는 조용한 전쟁이
2020년 봄을 강타하고 있다




봄편지

과수원집 울타리에
연분홍 복사꽃 벙글면
강 건너 멀리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작은 꽃잎 흔드는 부드러운 바람과
봄밤을 깊게 적시는 그리움 모아
남 몰래 꾹꾹 눌러쓴 첫사랑 연서처럼
짧은 계절의 엽서 한 장
침묵의 긴 강물 위에 흘려보내고 싶다
주소도 없고
수신인도 없는
서러운 봄편지 한 장 부치고 싶다
안타까운 저 꽃잎들
하르르 지기 전에




겨울새

한겨울 내내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산맥을 넘어온 바람은
온 동네 골목을 불한당처럼 휘젓고 다녔다
짧은 햇살이 잠깐 머물다 떠난 서쪽 봉우리가
가끔씩 낮은 구름 속에 갇히고
언 강을 건너온 소식은
비수처럼 생살을 파고들었다
맑고 순하던 미소 하나가
순식간에 먼 빛 속으로 사라지고
세상은 가시투성이 곶자왈이 되었다
3천겁의 인연으로 축복처럼 날아왔던 그대
이별의 순간은 너무 짧아 허망했다
발길 닿는 데마다 푹푹 꺼져 내리는
싱크홀 같이 우울한 지상의 겨울
회빛 구름 가득한 하늘가
가시나무에 걸린 겨울새 한 마리가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의 처절한 신음
서역하늘 한끝
점점 멀어져간다







전 대 진

오늘 아무 이유 없이 베댓이 되고 싶습니다
고장난 자동차

|시인의 말
아쉬운 마음으로
이번 봄에도 몇 자, 마음을 적습니다.




오늘 아무 이유 없이 베댓이 되고 싶습니다*

내 세상은 너무나 조용해서
오늘은 아무 이유없이
아무
관계도 없는 당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당신의 좋아요 소리에 맞춰
진동하는 핸드폰을 느끼고 싶어요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부는 것과는 다르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가끔
빗방울 떨어지고
떨어진 빗방울들 쪼르르 쪼르르 모여
배수구 구멍으로 몰려가는 것과 다르게

내가 한 말과
그 말을 듣고 있는 당신을
알고 싶어요

* 내가 자주 들어가는 게시판에 자주 보이는 댓글이다.
남겨진 댓글에 좋아요를 표시하면 해당 글을 남긴 게시자의 핸드폰으로
알림이 간다.
베댓은 베스트 댓글의 약자로 좋아요 수가 많은 댓글을 뜻한다.




고장난 자동차

다가오지 말라는 말
제발 나를 건들지 말라는 말
그 말을 하고 있다

오지마
건들지 마
제발

깜빡 깜빡 깜빡







조 용 식

연緣 3ㆍ연緣 4ㆍ연緣 5ㆍ연緣 6ㆍ연緣 7
간 봄 그리매ㆍ세 개의 의자
아카시아 꽃ㆍ과체중過體重ㆍ봄날은 간다

|시인의 말
역병 때문에
안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거나
밖에서 못질 당하는 계절

연홍빛 봄이 불안하다
신록이 와도 안정되지 못하다
평생 별걸 다 겪더니만
봄이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것도 경험한다

돗자리에 뭉그대고 앉아 있는 시간과
글 쓰는 것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하는 요즈음이다




연緣 3
- 무연無緣

살눈이 살며시 내리는 날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누렇게 변색된 옛날 시집 한 권 샀다

삐거억 소리 나는 첫 장을 넘기자
빛바랜 갱지에
잉크 색깔만 선명한 적바람* 한 장
잠이 덜 깬 채 어정어정 걸어 나왔다

누구였을까
오륙십 년은 족히 되었을 먼 과거의 어느 하루
눈 내리는 저녁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시집을 한 권 보냅니다
한 줄짜리 적바람을 한 사람은

오래 두고 봐도 닳지 않을
혹여 금방 지나가더라도
마음에는 꼭꼭 여미게 하였을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헌책방에 걸어 다니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을

누군가의 편이 되어
오륙십 년 전 어느 날의 마음을
조용히 따라가다가
잉크처럼 파릇해지는 정을
책갈피에 도로 끼워 넣었다

살눈 녹듯
오래 전에 소멸되었을 지도 모를 인연

이 즈음에 연緣을 닫는 것이
후일 또 누군가 이 시집을 열어
새로운 연緣을 만드는 길임이랴

* 적바람 : 간단히 적은 짧은 편지 또는 편지를 쓰는 것. 경북북부지방
사투리




연緣 4
- 모기

처서가 지났는데도
지악스럽게 설쳐대는 모기

날개라도 한 풀 꺾어 놓을 요량으로
잔뜩 겨누고 있는데

어디서
귀뚜라미 소리 들렸다




연緣 5
- 비둘기

공원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다가
발목 아래가 잘려진 비둘기를 발견한 것은
가을이 제법 깊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얼마 전 발목관절이 꽈리처럼 부푼 채
유독 뒤뚱대며 쫓기던 비둘기

무리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안쓰러워
한 움큼 씩 먹이를 따로 던져주곤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먹질 못하고 따돌렸다

얼핏 휴대폰으로 발목을 찍어보니
잘려진 부위는 덧난데 없이 잘 아물었지만
고름집이 생기고 발목이 잘려져 나갈 때까지
꾹 꾸욱 앓으면서 통증을 감당했으리라

전생에서 무엇으로 살았기에
이생에 비둘기로 태어나서
발목이 절단되는 과보果報를 겪는가

혹여 공원 구조물에 일부러 머리를 박칠 생각을 하거나
허허한 빈 둥지에서
별빛만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녀석이 왼발을 디딜 때마다
내 왼쪽 다리에 환상통이 왔다

이 또한 세연世緣인가




연緣 6
- 바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돌면서
쓰고 있던 벙거지 모자를 벗겨갔다

초속 십오 미터의 강풍에
촌보寸步도 옮길 수 없어
벙거지가 한길 건너편으로
연줄 끊어진 연鳶처럼 날려 가는데도
우두망찰 보고만 있었다

몇 년 전 국제시장에서 얻은 모자

벙거지를 봄가을로 백수머리에 얹어 다니는 동안
내 백발과 붙어 지내면서
가장 살가운 대화를 했을 것이며
불기 없는 머리 꼭대기를 감싸고 앉아서
궂은 일 가당찮은 일도 묵묵히 봐 왔을 터인데

바람이 벗겨간 것이 벙거지 하나뿐이겠는가
모자에 묻은 때까지 모두 가져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끊어진 연이 못내 아쉬워
바람에 날리는 흰 머리가
하늘을 움켜잡고 있었다

한동안 쉽사리 다른 모자를
얹지 못하고 백수로 지냈다




연緣 7
- 돌부처

돌부처가 선정禪定에 들었다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다가 갔다

돌부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바람이 되돌아 와
물이끼 하나 묻어 놓고 갔다

돌부처가 살며시 눈을 떴다




간 봄 그리매*

초등학교 오학년 땐가 육학년 때이었던가
동네 뒷산에서 혼자 개참꽃**을 따는
소녀를 보았지
꽃잎만 하나씩 떼어 버리고 있었지

거미 다리 같이 가는 손가락에 번진
연홍빛 꽃물
버려진 꽃잎들이 소복이 누워있었지

그날 소년은 이우는 달빛 속에 쪼그리고 앉아
산이 우는 소리를 들었지

무당개구리가 하늘을 깨고 나와서
봄이 지나간다고 밤새 울었지

알 수 없지요
그때는 배가 너무 고파서
암수가 다 울었는지

열 두엇 소녀의
풋 감자알만한 가슴에
봄볕이 잠깐 비치다가
한나절이 채 못 되어
개울둑을 소리 없이 넘어가고

소녀는
내리 삼일 신열을 앓다가
반벙어리가 되었지

그해 봄은 그렇게 지나갔지

굴뚝새가
한 세월
훠이 날아갔지

* 향가 모죽지랑가의 첫 구절 <간 봄 그리매[去隱春皆理米]>에서 따옴.
** 안동지방에서는 진달래꽃을 개참꽃이라 한다.




세 개의 의자

우리 집엔 세 개의 의자가 있지

굳이 하나를 더하거나
그렇다고 하나를 뺀 것이 아닌데도
어쩌다보니 각기 다른 의자가 셋이 되었지

어느 것이 더 비싸거나
특별히 더 낡은 것도 없이
그만그만한 것들로
탁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의자 셋이 서로 비스듬히 앉아 있지

놓여 진 것만 보면 삐딱하다고도 말할 순 있지만
자유롭게 앉아있는 것이지
삐딱한 건 아니지
단지 탁자와 직각이 아닐 뿐이지

둘이 아니어서 덜 단조롭고
넷이 아니어서 사타구니가 꽉 끼지 않고
한 곳이 비어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여유로워진 의자들

어느 하나는
다리를 반쯤 접은 뿔테 안경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어느 하나는
잡지 따위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지

탁자 위의 촛불이 흔들거릴 때
의자 다리 그림자도 따라가지만
저희끼리 따로 쑥덕거리거나 부딪치는 일이 없지

어둠 속에서도 넉넉하게 앉아서
서로 발 부딪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삐걱거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지

세 개의 의자는 적당히 마주보며
밀면 조금 다가가고
당기면 슬쩍 밀치는
자유스런 몸짓으로 앉아 있지

의자 하나 정도의 빈자리는
항상 여백으로 생각하고




아카시아 꽃

바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헤집고 오다가
아카시아 가시에 찔려 넘어졌다

언제부터 저리 익었을까
꿍꿍 뭉쳐 놓았던 봄이 터지면서
쌀 튀밥 같은 꽃이
와르르 쏟아졌다

두 손 번쩍 들어 올린 꽃 타래가
덩더꿍 춤사위를 벌이고
하얀 한삼汗衫 부리를 뿌릴 때마다
골짜기 가득한 단 냄새

설장구 가락에 꽃 더미가 휘청거리고
보리밭이 반쯤 취해서 기울어졌다

조금씩 훔쳐 먹는 것이 더 달콤한 꽃
풋콩 비린내

봄이 넘어진 바람을
살살 구슬려서 데리고 갔다

꽃술에 조금조금 소름이 돋았다




과체중過體重

이슬이
풀잎 위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몸이 무거워진 이슬방울이 굴러 떨어져
깨어졌다

해가 떠올랐다




봄날은 간다

아이가 구름을 한 줌 따서
입으로 가져가네

낮은 산과 작은 동굴
들판 산달래와 골짜기 영산홍
솜사탕이 날려가네

아이의 볼우물에서 나온 풍선껌
유치乳齒 하나 매달고
해를 따라 올라가네

먹어봐도 먹어봐도 배는 안 부른* 과자
봄잠 속으로 들어가네

*착한아기 잠 잘 자는 베개머리에
어머니가 사다주신 과자 한 봉지
먹어 봐도 먹어봐도 배는 안 불러
어릴 때 누이들이 고무줄놀이하면서 부르던 노래







∥특집∥­이  계절의  시인

  김지섭 시인
                


                              
마등령

벌써 오래전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대학 시절에 넘었다던 마등령
그날부터 그 마등령이 내 가슴 한 녘에
전설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뒤 두 번이나 대청봉을 올랐지만
마등령은 끝내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아니 그 해 여름 신새벽의 영시암에서
퍼붓던 장대비로 하산한 뒤
마등령은 정말 신선들만 살게 되었다.
아니 지금 힘겨운 오십령을 넘어
절룩거리며 어찌 가까스로 마등령을 넘는다 해도
그건 그냥 꼬박 하룻길에 넘어야 하는
까다로운 설악 등반길의 하나일 뿐
이제 나는 꿈같은 그의 시절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남녘 꽃소식은 봄바람에 실려와
우리집 앞뜰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가는
그것이 소백을 거슬러 백두대간의 등을 타고
설악을 치달아 오르면서
마등령에도 철늦은 봄꽃으로 피어나면
내 한 해는 또 속절없이 저물고 말리라.






푸르고 푸르던 날은 가고
억새꽃 희게 나부끼는 마른 벌판을
강 하나 흐른다.

거슬러 올라올라 봐도
시원을 알 수 없는 그 푸른 깊이로
강물이 흐른다.

정녕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쉽게 굽이칠 수 없어
신음으로 뒤척이는 강

흐름 따라 떠도는 길
이제 그만 멈추고 싶어도
어디로도 잦아들 수 없어

울음마저 멈추고
거대한 강물 숨죽이며 흐른다.




땅 위에 어둠 짙어올수록

우리들 아픔이
앞을 가릴 수 없는
어둠으로 내릴 때
그 어둠 헤치러
밝혀 놓은 등불
그마저 시새는 바람으로 꺼질 때
무릎 꿇고 우러르면 보느니
땅 위에 어둠 짙어 올수록
하늘에 별들 더욱 빛나는 것을






산을 산이라 하던 이
산으로 떠난 뒤
가끔씩 나는
산처럼 생각에 잠겼다.
새상에 누가 그걸 모르나
우스개 소리 같은 늙은이의 말*은
그러나 가끔씩 내 생각의 오솔길을
가파른 산처럼 가로막고는 했다.
그렇게 그의 말이
매서운 바람으로 내 귓전을 때리고 간 뒤
그의 산에도 세월의 눈보라가 몇 번이나 덮이고
나는
산을 산이라 하지 않고
산 아닌 것을 산이라 하며
많은 밤을 지새면서
그의 말이 이제사 어둑새벽처럼 다가왔다.
정말이지 산은 정녕 산인데
산을 산이라 하지 않고
산 아닌 것을 산이라 하면서
우리들은 얼마나 잠 못 이루고
괴로워 하느냐.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법어에서




기적에 대하여

사는 게 나른하게 하품만 날 때
사람들은 이상한 요술방망이나
백마 타고 오는 왕자를 생각한다
기차도 오지 않는데 기적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그들은 기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금
두 발로 하릴없이 대지 위를 거닐거나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든가
이웃과 만나 노닥거리다가 그것도 지쳐
힐긋할긋 눈 흘긴다거나


피곤한 하루를 졸음의 갈피 속으로
슬몃슬몃 구겨 넣고
죽음처럼 깊게 깊게 잠드는 일,
다시 우짖는 새소리에 눈을 떠
벌레처럼 또 하룻일을 떠나는
지겹게 되풀이 되는 이런 일상들이

실은 기차도 다니지 않는 기찻길에서
환청으로 들려오는 기적소리보다도
정녕 기적 같은 순간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대 아는가.




산행

우리가 산을 오르는 것은
우리들 사는 마을이
거대한 산맥의 한 끝 그 기스락
낮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손 담그는 저 앞 냇물을
거슬러 거슬러 오르면
아득 먼 산골짝 바위 밑
쌓인 나뭇잎들과 만나는 탓이다.

산은
슬하에 사람을 거느리고
풀잎 비단으로 어린 짐승들을 잠재우며,
바람과 햇볕으로 푸른 궁성宮城을 쌓고
때로 안개와 달빛을 불러 전설을 수런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휘파람으로 산을 오를 때
산은 눈웃음 짓는 오솔길로 반기지만
가끔씩 천 길 벼랑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드디어 만나리라
뼈를 깎으며 정상에 서면
평지에서만 멀거니 바라던
저 깊고 높은 하늘의 소리와
면벽한 선승으로 앉은 산의 말씀을.




가는 길

아흔 셋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온 집안이 모이셨다.

우리 집안에 봄제사는 없는데....
아 참, 너희 큰어머니가 삼월이었구나
니 아버지를 불러가셨나 보다
팔순 당숙모님이
무슨 점성가처럼 단언하셨다.
한때 동생이 모시기도 했던
제사가 있었지

날까지 받아놓고 그만 돌아가셨다는 그분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전설처럼
들려주셨던

그러면 그 긴 세월 동안
저 하늘 어디선가 그분은
아버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셨단 말인가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엔
주역의 글귀들처럼
알 수 없이 펼쳐지는 궤도를 따라
수천 수억의 별빛들은 제각각
걸음걸음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늘그막

늙어질수록
눈물은 많아지는가

길게 내리는 산그늘 속
처연한 빛깔의
희디흰 산 벚꽃 같은

이제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나 보다

먼 하늘 한편으로는
아직도 붉은 노을
저리 타고 있는데




추억에서

천 만 리
머나먼
너의 하늘엔
그날의 햇살
아직도 눈부신데

오늘 여기
나의 하늘엔
분분한 눈송이
꿈결처럼
흩날리누나




삶은 밤을 먹다가

  이 가을엔 인근 야산 오솔길을 많이도 걸었다.
  곱지 않은 날씨 탓에 들판은 흉년이라는데
  산에는 도토리와 밤이 지천으로 떨어졌다.
  난생 처음으로 밤을 많이도 주웠다.

  익힌 밤알 어디엔가에는 곧잘 이름 모를 애벌레가 삶겨서
고운 씨눈처럼 붙어 있었다.
  아,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저 애벌레와 별로 다르지 않
은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다만 저 벌레는 소인국의 족속
으로 허기를 면하려고 밤알 속에 잠시 깃들일 수 있었고
나는 그 밤알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거인국의
족속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더욱이 나도 한때는 저 애벌레
의 전생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던 알이었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저 애벌레, 한 끼의 가난한 식량을 위해 애쓰시다가 내
한때의 군것질에 희생된 저 벌레의 영혼은 지금쯤 어느
자애로운 천사의 곁으로 돌아갔을까? 거대한 제국의 손으
로 밤알을 쓰레기 통속에 버리면서 나는 생각하고 또 생
각했다.

  오늘 다시 식탁에 앉는다. 무수한 소인국의 신민들이 제
목숨을 바쳐 차려놓은 저 제단 앞에 나는 거인국의 왕자
처럼 기품 있게 앉아 있다. 촛불마저 경건하게 타오르고
있는데… 나는 어떤 기도문을 읊조리며 저 잔을 들어야
하는가?




■ 해설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예지(叡智)의 별빛 김지섭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김지섭 시인은 오래도록 자신의 삶을 규율해왔던 기억들
과 한편으로는 친화하고 한편으로는 길항하면서 가장 근원
적인 삶의 표지標識들을 상상적으로 구축해간다. 그는 이러
한 남다른 경험과 기억의 심도深度를 통해, 사물의 시간 속
에서 존재론적 근원을 발견하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품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발견과 성찰의 연쇄 과정은 끊임없이 김지섭의 시를 관철해
가는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는데, 그 힘은 사라져가는 것들
이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한시적 아우라가 아니라, 삶이 지
속되는 한 끊임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존재 조건
으로 승화하곤 한다. 결국 김지섭의 시는 기억의 원리에 의
해 충실하게 펼쳐지면서, 자신만의 동일성을 확보해가는 역
동적 파동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이번에 새로이 펴내는 두
번째 시집은 이러한 역동적 파동을 한껏 품으면서, 그 안에
시인의 기억이 주조鑄造해내는 내면의 활력을 아름답게 내장
한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서정시에 구현되는 ‘기억’이란, 물리적이
고 객관적인 시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리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현재적 경험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사후적으
로 불러내는 원리이다. 시간의 흔적에 대한 섬세하고도 심
미적인 기억이 바로 서정시의 제일의적 수원水源이 되고, 그
래서 우리는 서정시를 통해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형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 정반대로 아이러
니나 해체의 미학이 나타나는 때가 적지 않지만, 서정시가
기억을 통해 존재론적 동일성을 탐색하려는 속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서정시의 원리는 유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물의 존재
형식을 통해 혹은 사물이 사라진 후의 잔상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데, 김지섭의 두 번째 시집은 이러한 서정시
의 속성을 여실하게 충족해가는 세계라 할 것이다. 이제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자.

2.
  우리가 그동안 경험한 시에서의 ‘자연’ 형상은 원형성, 직
접성 같은 속성을 거느리면서 모든 시인들의 경험 속에 광
범위하게 녹아 있는 것으로 다가온 바 있다. 물론 그 형상
화 양상을 보면 사랑의 추구, 관념의 대입, 자연 자체의 묘
사 등 여러 층위의 작법이 있었겠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연에서 시의 중요한 소재나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통
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를 노래하지 않은 것을 찾아보
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자연 형상은 우리 시에서 퍽 오
래고도 깊은 전통을 이루어온 것이다. 김지섭 시인 역시 자
연 형상 속에서 삶의 근원적 결핍들을 성찰하려는 기획을
활력 있게 보여준다. 그가 가장 활달하게 구성하는 것은 바
로 ‘산’을 향한, ‘산’에 대한 깊은 서정이다. 다음 시편을 먼
저 읽어보자.


벌써 오래 전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대학 시절에 넘었다던 마등령
그날부터 그 마등령이 내 가슴 한 녘에
전설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뒤 두 번이나 대청봉을 올랐지만
마등령은 끝내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아니 그 해 여름 신새벽의 영시암에서
퍼붓던 장대비로 하산한 뒤
마등령은 정말 신선들만 살게 되었다.
아니 지금 힘겨운 오십령을 넘어
절룩거리며 어찌 가까스로 마등령을 넘는다 해도
그건 그냥 꼬박 하룻길에 넘어야 하는
까다로운 설악 등반길의 하나일 뿐
이제 나는 꿈같은 그의 시절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남녘 꽃소식은 봄바람에 실려와
우리집 앞뜰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가는
그것이 소백을 거슬러 백두대간의 등을 타고
설악을 치달아 오르면서
마등령에도 철늦은 봄꽃으로 피어나면
내 한 해는 또 속절없이 저물고 말리라.
― 「마등령」 전문

  ‘마등령馬等嶺’은 북쪽의 미시령, 남쪽의 한계령과 함께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고개로서, 말의 등처럼 생겼다 하
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인은 오래 전 누군가 대학
시절에 ‘마등령’을 넘었다 말한 것을 들은 날로부터 “그
마등령이 내 가슴 한 녘에/전설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그 후로 두 번이나 대청봉을 오를 때도
마등령에 가보지 못했고, 어느 해 여름에는 폭우로 인해
“정말 신선들만 살게” 된 마등령을 근처까지 가고서도 만
나지 못했다. 물론 시인은 지금 마등령을 넘는다 해도 그
것으로 “꿈같은 그의 시절로 결코/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얼마 후 봄날이 찾아와 그 봄
소식이 백두대간의 등을 타고 마등령에 이르러 철늦은 봄
꽃으로 피어나면 “한 해는 또 속절없이 저물고 말리라.”는
처연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기억’과 ‘현실’, ‘지난날’과 ‘지
금’, ‘돌아갈 수 없음’과 ‘올라갈 수 있음’의 확연한 대비
속에서 언제나 시인 자신을 존재하게 하기도 하고 또 까마
득한 부재로 몰아가기도 하는 이중 기능을 ‘마등령’이 수
행하는 셈이다. 이때 ‘마등령’은 “꿈결이듯/어른거리다 사
라지는/그 먼 날 첫 이름의 추억처럼”「첫눈」) 시인의 마음
속에 아득하고 아프고 아름답게 항구적으로 남아 있을 것
이다. 다음은 어떠한가.

우리가 산을 오르는 것은
우리들 사는 마을이
거대한 산맥의 한 끝 그 기스락
낮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손 담그는 저 앞 냇물을
거슬러 거슬러 오르면
아득 먼 산골짝 바위 밑
쌓인 나뭇잎들과 만나는 탓이다.
산은
슬하에 사람을 거느리고
풀잎 비단으로 어린 짐승들을 잠재우며,
바람과 햇볕으로 푸른 궁성宮城을 쌓고
때로 안개와 달빛을 불러 전설을 수런거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휘파람으로 산을 오를 때
산은 눈웃음 짓는 오솔길로 반기지만
가끔씩 천 길 벼랑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드디어 만나리라
뼈를 깎으며 정상에 서면
평지에서만 멀거니 바라던
저 깊고 높은 하늘의 소리와
면벽한 선승으로 앉은 산의 말씀을.
― 「산행」 전문

  시인은 산을 오르는 까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
리 사는 마을이 산맥의 한 끝 기슭 가장자리 언덕 위에 있
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먼 산골짝 바위 밑에 쌓인 나뭇잎들
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은 슬하에 사람을 거
느리고, 풀잎 비단으로 어린 짐승들을 잠재우기도 하며, 바
람과 햇볕의 궁성을 쌓기도 하고, 안개와 달빛으로 전설을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과 사람이 ‘산’이라는 배
경에서 한 몸으로 존재함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
만 이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산’도 때로는 “천 길 벼랑으
로 돌아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우리가 뼈
를 깎는 고통으로 산정에 서면 “저 깊고 높은 하늘의 소리
와/면벽한 선승으로 앉은 산의 말씀”을 동시에 듣게 될 것
이라고 말함으로써, ‘산’이 결국 궁극의 소리를 내장한 신성
의 거소居所임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그 소리는 “장자莊子인
듯/법화경法華經인 듯”(「귀뚜리」) 들려오기도 하고, “빛으로
내리는/저 깊은 하늘의 소리”(「새」)로 현현하기도 할 것이
다. 시인은 시원의 목소리를 ‘산행’ 시간 속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시원始原’이란, 공간적 유토피아나 시간적 유년
기를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관感
官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것을 품은 궁극적 가
치이기도 하고, 훼손되지 않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지경地境
을 은유한 형상이기도 하다. 김지섭 시인은 삶의 숨겨진 비
의秘義를 ‘산’에서 찾음으로써, 자신이 경험하게 된 근원적인
정신적 고양의 한순간을 ‘산을 통해 토로해간다. 그것은 존
재를 새롭게 갱신하는 활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인을 아
름답고 오롯한 존재로 만들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산’의 형
상이야말로 그의 시세계가 자연 사물의 경험을 통해 근원적
감각과 사유를 밀도 있게 결속해가는 결실임을 보여주는 핵
심 사례일 것이다.

2.
  우리가 잘 알듯이, 서정시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형식으로 씌어진다. 그것이 설사 미래에 대한 낙관
적 전망을 형상화한 것이거나 시간의 개념 자체를 초월한
일종의 종교적 감각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시간
자체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서정시는 시간에 대한 남다른 경험과 그것을 선명한
기억으로 재구성해가는 양식적 특성을 배타적으로 지닌다.
김지섭의 이번 시집은 이러한 서정시가 수행하는 시간 탐구
의 직능을 일관되게 형상화함으로써 세상의 오롯하고도 엄
연한 이법理法을 매우 선연한 시간 감각으로 노래해간다. 다
음 두 편의 단형 서정을 함께 읽어보자.

늙어질수록
눈물은 많아지는가

길게 내리는 산그늘 속
처연한 빛깔의
희디흰 산벚꽃 같은

이제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나 보다
먼 하늘 한편으로는
아직도 붉은 노을
저리 타고 있는데
― 「늘그막」 전문


천 만 리
머나먼
너의 하늘엔
그날의 햇살
아직도 눈부신데

오늘 여기
나의 하늘엔
분분한 눈송이
꿈결처럼
흩날리누나
― 「추억에서」 전문

  ‘늘그막’과 ‘추억’이라는 시간의 관념을 제목으로 삼은 이
시편들은, 한결같이 인생론적 정점과 황혼의 느낌을 동시에
주는 한순간을 선명한 컷으로 담아낸다. 앞 시편에서 노래
하는 ‘늘그막’은 역설적으로 “이제 조금씩/사람이 되어”가
게끔 해주는 차분한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길게 내리는
산그늘 속/처연한 빛깔의/희디흰 산벚꽃”을 환기하는 그
시간은, 그렇게 ‘그늘/흰색’의 대조 속에서 처연한 빛깔로
서의 노경老境을 이루어간다. 이때 ‘늘그막=노경’이란, 인생
의 퇴행(regression)을 맞이하는 순간이 아니라 “먼 하늘
한편으로는/아직도 붉은 노을/저리 타고 있는” 인생의 정
점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뒤 시편에서도 김지
섭 시인은 “머나먼/너의 하늘”과 “오늘 여기/나의 하늘”을
대조하면서, 그 옛날의 “햇살/아직도 눈부신” 빛으로 남아
있고 지금 흩날리는 “분분한 눈송이”도 꿈결처럼 다가온다
고 말함으로써, ‘지나간 시간’과 ‘지금 여기의 시간’을 한순
간 빛나는 감각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때의 ‘햇살/눈송이’
는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이어주는 충만한 현재형의 소도
구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늘그막’이라는 시간
과 ‘추억’이라는 운동은, 삶이라는 것이 “정녕 기적 같은
순간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기적에 대하여」)을 아름답게
알려준다.
  이처럼 김지섭 시학의 저류底流에는 삶에 대한 서정적 온
기와 함께 시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형상들은 인생론적 가치의 중요성을 선
명하게 전해주면서, 삶이 끊임없이 그리움을 가지면서 서성
이게 되는 어떤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한 깊은 성찰의 세계
야말로, 김지섭의 이번 시집이 우리에게 넌지시 전해주는
가장 강렬하고도 속 깊은 메시지이다. 지금처럼 건조한 시
대에, 깊이보다는 빠르기만 열망하는 시대에, 그의 시는 깊
은 서정을 통한 존재론적 그리움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본
래적인 것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들려주는 것이
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아름답고 애잔한 목소리를 통해 그
깊은 시간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푸르고 푸르던 날은 가고
억새꽃 희게 나부끼는 마른 벌판을
강 하나 흐른다.

거슬러 올라올라 봐도
시원을 알 수 없는 그 푸른 깊이로
강물이 흐른다.

정녕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쉽게 굽이칠 수 없어
신음으로 뒤척이는 강

흐름 따라 떠도는 길
이제 그만 멈추고 싶어도
어디로도 잦아들 수 없어

울음마저 멈추고
거대한 강물 숨죽이며 흐른다.
― 「강」 전문

  원래 시에서 ‘강江’은 지속적이고 완만한 흐름으로 바다
에 가 닿는 속성으로 인해 ‘역사’ 혹은 ‘삶’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 이 작품에서도 ‘강’은 “거슬
러 올라올라 봐도/시원을 알 수 없는 그 푸른 깊이로” 흘
러가는 신성한 역사를 은유한다. 푸르던 날은 지나가고 마
른 벌판을 흘러가는 ‘강’의 형상은, 그렇게 “가고 싶은 길
이 있어도/쉽게 굽이칠 수 없어/신음으로 뒤척이는” 모습
으로 우리를 감싸고 안고 흘러간다. 그 흐름을 따라 시인은
“이제 그만 멈추고 싶어도/어디로도 잦아들 수” 없는 한계
와 함께, “울음마저 멈추고” 숨죽이며 흘러가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삶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강’
은 ‘역사’ 혹은 ‘삶’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비유하면서, “노
을 하늘 고개 너머/등짐 지고 가는 길”(「도리포 가는 길」)
처럼 끝없이 흘러감으로써, 우리의 삶이 이토록 때로는 가
열하고 때로는 숨죽이며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현상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서정시에서의 ‘시간’이란, 시인 자신이 겪어온 경
험이나 사건에 대한 기억에 의해 새롭게 구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한 기억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일들과, 옅은
기억으로 인해 잊혀진 일들을 삶의 흐름 속에 나란히 가지
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몸 속에 새겨진 수많은 시간들은
의식의 심층을 형성하면서 끊임없이 우리 삶의 준거가 되
어주기도 한다. 김지섭 시인은 오랫동안 삶에 새겨진 부재
와 결핍의 기억을 수습하면서, 거기서 숯처럼 결정結晶된
상상력을 집중적으로 발화해간다. 그러한 일관성과 집중성
이 견고한 형상으로 전이될 개연성을 확보해주고 있는 것
이다.

3.
  그런가 하면 김지섭의 시는, 시인 스스로 가지게 되는 원
형적 자의식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 자의식 밑바닥에는
시인이 오랫동안 겪어온 원체험이 소중하게 담겨 있는데,
이렇게 무의식에 숨겨 있는 원체험은 그 자체로 시인이 취
하는 말과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김지섭 시인은
자신의 원체험을 변형하고 거기에 새로운 파생적 의미들을
일일이 부가하면서 자신만의 경험적 동일성을 점진적으로
획득해간다. 이때 원체험을 변형하는 데 시인의 기억 작용
이 활발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
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원체험의 변형 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origin)을 아름답게 노래해간다. 아득하고 심
원하고 융융한 형상들이다.

정든 땅 언덕 위
바람벽도 허물어진
그 기억 속의 집

아니
어룽지는 눈물 너머로
아른거리는 내 어머니

더 큰 고향은
말없이 내려다보는
가뭇없이 높은 저 하늘

아니
그보다 더 큰 고향은
수억 광년을 날아오는
먼 먼 저 별빛
― 「내 고향은」 전문

  시인에게 ‘내 고향’이란 “정든 땅 언덕 위/바람벽도 허물
어진/그 기억 속의 집”이다. 여기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집
은 다 허물어져 “어룽지는 눈물 너머로/아른거리는 내 어머
니”를 적극 환기해준다. 그리고 시인에게 더 큰 고향은 눈
물을 넘어 “말없이 내려다보는/가뭇없이 높은 저 하늘”과도
같이 남아 있는 것이고, 끝내는 “수억 광년을 날아오는/먼
먼 저 별빛”처럼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일 터이다.
여기서 ‘집/어머니’ 같은 지상의 아름다움과 ‘하늘/별빛’ 같
은 천상의 아름다움은 모두 고향의 동심원을 이루면서 김지
섭 시인의 원체험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 ‘고향’은 그야말
로 “천년 만에 한 번 피어나는 꽃을/기다리는”(「이상주의
자」) 마음으로 다가오는 곳이자 “내 마음 속 가파른 절벽”
(「내 마음 속 절벽에는」)처럼 우뚝 서 있는 존재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지섭 시인의 시선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향하면서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을 힘있게 되부르고
있다. 이때 “기억 속의 집”이란 주체 회복의 순간을 가능하
게 해주는 장소이자,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조절 기능
을 견지하여 순간적 감각을 회복하게 해주는 상징적 지점이
기도 할 것이다. 김지섭의 시는 고향에 대한 남다른 탐색을
통해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그러한
기억 속에 각인된 근원적 가치를 현재의 삶에서 회복하려는
열망을 노래하고 있다 할 것이다.

옹알거리며 젖 빨던
자잘한 깨알 다 털리고
채 덜 익은 낟알 떨리려
말라빠진 삭신을 또 흠씬 두들겨 맞는
저 깻단 위를 지나

탐스런 이삭 댕강댕강 목 잘려
혼절한 채 흐르는 피 말리며 선
저 수숫단 너머

타는 가뭄에도 굵히고 굵혀
가을볕에 익혀 온 열매들
이제는 지천으로 떨어진 땅위로
마지막 잎새마저 떨구고 선
저 키 큰 상수리나무 빈 가지 위으로

어머니 당신의 가을 하늘은
저리 까맣게 높아가고
시리듯 깊어 갑니다.
― 「어머니의 가을 하늘」 전문

  이번에 시인은 ‘고향’과 등가를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나아간다. 물론 ‘어머니’는 시인의 존재론적 기원
이 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몸 속에 깊이 깃들인
유년 시절을 육체화한 은유적 형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머니’께는 “옹알거리며 젖 빨던” 어린 시인의 기억이
함께 겹쳐진다. 마침내 시인의 기억은 “수숫단/상수리나
무” 위로 깊어만 가는 “어머니 당신의 가을 하늘”을 불러
오는데, 그렇게 까마득하게 높아가고 시려가는 ‘가을 하늘’
은 노동의 고단함과 가난한 살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넉넉
한 기원으로 계시는 ‘어머니’ 자신의 모습으로 화하게 된
다. 시인은 언젠가 “떠나온 곳은 너무 멀어 처음을 알 수
없고, 돌아보니 이제껏 걸어온 저 길 구불구불 정말 눈물
겹네.”(「길 가면서」)라고 노래하였는데, 바로 그 ‘길’이 어
머니의 삶과 고스란히 겹치는 순간을 우리는 여기서 목도
하게 된다.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지펴
야 하는”(「겨울 동백」) 존재자로서의 시인 자신이 오롯하게
빛나는 것도 이러한 존재론적 기원이 아득하게 시인을 감
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고향’과 ‘어머니’는 누
구에게나 가장 깊은 기억의 뿌리이자, 지난 시간을 직접적
으로 거슬러오를 수 있는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실재일 것
이다. 이때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기억은, 단순하게 과거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을 원초적 경험의 형식으
로 바꾸어 그것을 현재의 삶과 연루시키는 적극적 행위라
할 것이다.

4.
  요컨대 김지섭의 이번 시집은 사람과 사물을 향한 따스
한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간직해온 시인의 성정性情이
한결 잘 나타난 미학적 성과이다. 또한 시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외곽과 주변을 향한 열망이 어떤 것인지를, 그
리고 그 열망이 진솔한 언어적 의장意匠으로 감싸여 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로 기억될
만하다. 말하자면 김지섭 시인이 취한 언어와 대상이, 주
변성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훨씬 단단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길을 걸을 때 사람의 말소리가 훨씬 크고 분명하게 들리는
이치와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시를 통해 느
끼는 고요함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기 때문이
기도 하지만, 그가 택하는 배경이나 사물이 세상의 소음에
서 비켜선 채 일종의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침묵의 소리는 “태어나는 생명이 내지르는/소리
없는 저 바다의 붉은 함성”(「아침 바다」)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문득 눈을 뜨는 밤이 있었다.
그때 온몸은
서서히 긴 털로 덮이고
이윽고 어둠 속
아득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 들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달린다. 눈은 푸른 불을 켜고
굳게 선 이성의 목책들이 부서지고
바람이 되어 달린다,
아무리 헤매어도 소리의 정체는
어디에도 없다.
맹렬한 추격의 끝에서
야성의 발톱을 치켜세우고
환청으로 흔들리는 어둠을 물어뜯는
마지막 표호. 그리고 쓰러짐.
다시 눈을 뜨면
전신의 털들이 조금씩 짧아져 가고
비릿한 냄새의 비바람 창을 두드리는
그런 밤이 있었다.
― 「그런 밤」 전문

  시인이 몸으로 현상하는 ‘그런 밤’은 매우 구체적이고 감
각적인 경험을 담고 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잠이 깨
고,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려 몸을 일으켜 달
리는 환각이 ‘그런 밤’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푸른 불”의
감성을 담은 눈으로 “굳게 선 이성의 목책들”을 부수고 바
람이 되어 달린 기억도 ‘그런 밤’에 들어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멀리 들려오던 소리는 아무리 헤매도 알 수 없는 어
떤 것이다. “환청으로 흔들리는 어둠을 물어뜯는/마지막 표
호”와 “쓰러짐”을 통해서만 간신히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때 밤의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와 시인으로 하여
금 잠을 깨고 몸을 일으키고 달리고 헤매고 쓰러지게끔 한
그 ‘소리’는, 마치 “언제 환한 꽃 한 번 흐드러지게 피어 보
인 적/있었던”(「주물공장 뒤편 산기슭에 계셨던 벚나무들」)
기억처럼, “마른 풀 위에 떨어지는 달빛에/보석처럼 빛나는
/서릿발 눈물”(「비정규직」)처럼, 시인에게 호환할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해준다. 그 기억을 언어의 형식을 바꾼 것이 이
를테면 김지섭의 ‘시’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시’가 개체적인 감정의 숙주나 발화 양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김지섭 시인은 서정시
가 오히려 적극적인 삶의 의지가 숨 쉬는 언어의 집이요,
그것을 통해 세상을 열어가려는 열망의 기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내면이든 대상이든 아니면 언어 자체이
든 그는 그것을 삶의 의지와 견고하게 결합함으로써 우리에
게 존재의 깊이를 한껏 경험케 해준다. 이렇게 김지섭의 시
는 삶에 대한 견결한 관조와 표현으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
들에게 공감을 준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추구해가는 ‘시’
를 사유하고 표현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 아픔이
앞을 가릴 수 없는
어둠으로 내릴 때
그 어둠 헤치러
밝혀 놓은 등불
그마저 시새는 바람으로 꺼질 때
무릎 꿇고 우러르면 보느니
땅 위에 어둠 짙어올수록
하늘에 별들 더욱 빛나는 것을
― 「땅 위에 어둠 짙어올수록」 전문

잠 못 드는 밤은
시를 씁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예지叡智의 별빛 돋아오듯

어둠을 밝히는
시는 한 줄기 빛입니다

반짝이는 별빛은
저 하늘의 계시啓示로 빛나고

시는
땅 위의 가장 빛나는 말씀입니다. 
― 「詩」 전문

  김지섭의 ‘시’는 “우리들 아픔이/앞을 가릴 수 없는/어둠
으로 내릴 때” 비로소 씌어진다. “그 어둠 헤치러/밝혀 놓
은 등불”처럼 그는 “땅 위에 어둠 짙어올수록/하늘에 별들
더욱 빛나는 것을” 노래해간다. 어둠의 깊은 곳에서 멀리
아득한 소리가 들려 그것을 찾아 헤매던 시인은, 이제 그
어둠이 짙어올수록 점점 분명해지는 자신의 ‘시’를 감득해가
는 것이다. 아예 ‘詩’라는 제목을 내건 뒤의 작품에서는, 잠
못 드는 밤에 쓰는 ‘시’를 통해, “캄캄한 밤하늘을/예지叡智
의 별빛 돋아오듯//어둠을 밝히는/시”를 “한 줄기 빛”으로
노래한다. 별빛이 “저 하늘의 계시啓示로 빛나”듯이 “시는/땅
위의 가장 빛나는 말씀”으로 시인 곁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김지섭은 “얼굴을 알 수 없는/한 무리의 시정詩情”
(「겨울 낮 한때」)을 채집하고 노래함으로써, “피가 마르는
아픔을 견디며/절명시를 쓰는/시인처럼”(「상사화」) 자신의
생애를 담금질하고 있다. 우리는 시가 상상력을 통해 일상
에 편재한 불모성을 치유하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전해
주는 양식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시는 생성의 활력
만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의 필연성까지 삶의 이치임을
말하는 양식이다. 김지섭의 ‘詩’는 세상의 표면에서 역동적
으로 펼쳐지는 속도의 활력 대신, 그 심층에서 저물어가는
존재자들의 처연한 아름다움도 경험하게 해준다. 그가 고전
적인 심미성을 추구하는 까닭도 이러한 성정과 지향에서 말
미암은 바 클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김지섭의 두 번째
시집은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예지의 별빛처럼 아름다운
섬광의 도록圖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기억에 대한 반듯한 태도이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순간적 존재 전환을 꿈꾸는 모험을 담는 방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심미적 시공간에서 이루어지
는 이러한 경험은, 베르그송(H. Bergson)이 말한 ‘지속의
내면적 느낌’을 순연하게 담아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시
적 시간’을 새롭게 구성해가게끔 해준다. 이때 김지섭 시인
은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을 회억回憶하기도 하고, 시를 향한
짙은 존재의 자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
상을 향한 깊은 기억과 ‘시’를 향한 치열한 자의식을 보여준
그의 두 번째 시집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다음에
그가 보여줄 통찰과 서정의 진경進境을, 마음 깊이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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