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기행문-1

8. 오, 나의 어머니

저 언덕 넘어 2006. 11. 8. 02:51
 

  음력 정월 초이레, 2월 4일은 나의 생일이다. 나는 이제까지 생일을 뭐 그리 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역국이나 끓여 부모님께 드리는 정도다. 그런데 타국에서 생일을 맞으니 미역국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전날 저녁자리에서 피 선생한테 그냥 하는  말로 내일 아침은 미역국을 먹을 수 없겠다는 말을 하였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와 이상한 새소리에 잠을 깼다. 창문을 여니 아득한 지평선(보이지는 않았지만) 너머에서 떠오르는 빨간 점 하나가 야자수림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침해다. 아니 오늘 아침이구나. 생일 아침을 이국에서 맞는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나도 이제 육십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고 한편 마음이 무거웠다. 이 여행 중에 나는 내 인생이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 여생을 좀 더 알뜰하게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물론 미역국이 있을 리 없는 한식과 양식이 섞인 음식이었다.

 

  오전에는 앙코르 와트를 오후에는 앙코르 톰을 구경하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오늘이 캄보디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니까 평양 랭면집에 가자고 한다. 한 사람이 이만 원씩을 더 내어서 가기로 하였다. 아직 가보지 못한 북한 사람들을 여기서 본다니 호기심이 앞섰다. 피로하여 푹 쉬는 것이 더 좋을 듯하였으나 그것 또한 귀한 체험이 될 걸로 생각하고 따라 나섰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구내에 있는 매점을 살핀다. 북한 작가들의 풍경화도 있고 도자기도 있고 술병들도 보였다. 도자기가 괜찮은 것이 있어 눈여겨보는데 피 선생이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하면서 묻기에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피 선생은 두 개를 샀다. 나는 하나 살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벌써 음식 준비가 다 되었다기에 가 보니 우리 부부를 한 자리에 앉혔다. 조금 있다가 케이크가 왔다. 아하 이것 괜히 엊저녁에 내가 피 선생에게 그냥 한 소리가 이렇게도 발전했구나 싶어 면구스러웠다. 이렇게 일행한테 부담을 주다니... 그리고 생신을 축하한다면서 북한 아까씨가 팡파레를 울렸다. 생일 노래를 하고 촛불을 끄고... 아니 놀러온 회식 자리가 난데없는 나의 생일잔치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까 그 피 선생이 사던 바로 그 자기를 쌍으로 사서 선물로 주지 않는가! 좋은 안주에 생일 술을 권하였으나 채식한다면서 그 좋은 안주는 물론 술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평소에 술자리를 즐기던 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이 즐거운 자리를 즐기지 못하니 그들이 권하는 정성에 얼마나 송구스러웠는지 모른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 속에서 이단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옆자리에 있던 다른 광광객 몇 사람들도 우리 좌석을 향해 부라보를 외쳤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 나만 즐거울 것이지만 다른 일행들도 조금은 들떠 있었다. 내 오늘 여행지에서 육순을 맞았지만 이렇게 오늘 같이 큰 생일잔치를 해 본 일이 없다. 정말 일행들한테 너무 미안하였다. 그들의 마음쓰임이 너무 고마웠다. 남의 좋은 일을 같이 기뻐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생일은 다르다. 누구에게나 생일은 있으니까 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북한 아가씨들의 간드러진 노랫가락과 건전하고 아름다운 율동-실제로 사회주의 문화는 참 건전한 면이 많다-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새삼 고마운 우리 일행들의 마음을 두고두고 오래 새기리라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자다가 한순간 깨어서 밖을 내다보는데 난데없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가만 들어보니 분명 그놈의 소리가 틀림없다. 낮의 열기는 다 사라지고 시원한 밤이니 우리로 치면  늦여름이나 가을 아닌가? 한겨울에 이방에서 듣는 난데없는 가을 귀뚜라미 소리.…. 참으로 묘한 감상에 잠을 이을 수가 없다.

 

  한 평생을 아픈 가슴으로 살아오시다가 이제는 병석에 누워계시는 어머니. 세상에서 모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한 생애를 살아오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제 어머니는 내 생일마저 잊어버리실 모양이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이국땅에서 생일을 맞다니 세상에 이런 불효가 있나? 어쩌면 이제 내가 끓여드리는 미역국을 다시는 못 잡수실지도 모르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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