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답사(중국 동북지방)-1

11.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만나다.

저 언덕 넘어 2007. 11. 14. 04:47
 

11.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만나다.

 

                         (1) 오회분 오호묘


  환도산성을 다 보고 우리는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여산의 낮은 산기슭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고분군을 찾았다.

 

 

  먼저 간 곳은 오회분 오호묘였다. 

5호분 묘는 평지 위에 배열된 5개의 묘가 대형 투구처럼 보여 5회분이라 부르며, 그중 가장 크고 사신도 벽화가 있는 것이 5호분이다.

우리는 이 고분의 입구를 들어간다.

 

                 5호 분묘  입구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갔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을씨년스런 기분이 들었다.

조명이 그 기운을 조금 가시게는 했으나 밝지 않아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조명을 환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무덤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일부러 그런 듯하다.

벽면 곳곳에 시멘트를 바르고 보수한 흔적이 있었으며, 벽과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습기가 들어차 음습한 기운을 더 하였다.

안내원은 손전등으로 그림을 비추어 가면서 자세한 설명을 한다.


   <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모두 3개 있는데 가운데는 주인 남자, 오른쪽은 첩 그리고 왼쪽은 부인의시신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고 크기가 약간 다르다. 묘실 벽화에는 죽은이의 집구조 심지어는 주방까지 그려 넣었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했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등의 4신이나 각종 풍속등 각종 휘황찬란한 문양이 거대한 묘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고분의 축조시기는 고구려 벽화 고분으로서는 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서기 7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이 벽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풍부한 설화성이다 >.

 

                               벽화의 일부


 고구려 하면 강서의 고분벽화가 생각난다.

그러나 이 고분벽화는 많이 퇴색 되어 그림의 내용을 잘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수렵도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냥하는 구고려인들의 날렵한 모습과 역동적인 분위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등의 4신도도 자세히 보면 잘 볼 수 있다.

정말로 귀한 자료인데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광개토왕릉, 광개토왕비


                                  

      벽화를 보고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되어있는 큰 무덤을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이 무덤은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인데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기단 위의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다. 분구 정상부 가까이에 설치된 매장부는 굴식 돌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은 널방 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졌으며, 천장은 지름 4.55m, 두께 0.8m의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1990년 이래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무덤의 최상부 굴식 돌방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매장부


이 무덤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훼손은 심했다.

왜 말끔하게 보수를 하지 않은 걸까?

보기에는 좋지 않지만  아마도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있다. 혹은 그냥 태왕릉이라고도 하는 이 무덤은 집안에서 제일 큰 무덤인데다 일대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군총과 같은 형태인 계단식 돌무지돌방무덤에다 제단 터와 딸린무덤도 보인다. 석축은 무너지고 내부를 채웠던 자갈돌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일반적인 돌무지무덤의 형태로 착각할 수 있으나 동쪽 면을 살펴보면 계단식 석축과 호석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한편 태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은 광개토대왕에게만 사용했던 ‘호태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임을 확인시켜준 유물이다 >.



  태왕릉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비각이 하나 서 있었다. 그 안에는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우뚝 서 있다.

 

 

  < 이 비석은 너비1.35m~2.0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로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비신의 4면에는 漢隸의 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는 5mm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비신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391~412동안 永樂이라는 연호를 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 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비석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으나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글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읽어본들 잘 알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에는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전설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새겼다.

광개토왕은 18세에 등극하여 백제를 치고 신라를 괴롭힌 왜를 징벌하였다. 그리고 동부여도 쳐서 국위를 크게 떨쳤다고 한다.

39세에 붕어할 때까지 22년간 남정북벌하여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온 힘을 다하여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 ~ 영안, 동으로는 혼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러 국력을 크게 떨친 왕이다.


 그의 업적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땅에서 제일 큰 비를 만든 장수왕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우뚝 선 비석을 뒤로 하고 나서는 나의 마음은 이제는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땅, 고구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커 간다.

이런 역사적 사실 앞에서 현재에 있어 과거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것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화두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비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전되었으나 문헌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이 비에 마멸된 글자 때문에 일본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사 왜곡 문제와 서로 아전인수격인 태도로 일관하는 3국학자들이 통합된 연구 결과를 이루지 못하는 점이 더욱 안타깝다.

한국 고대의 역사에서 고구려가 차지하는 위치가 하루 빨리 밝혀지기를 기다려본다..

                               

                           (3)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를 떠나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니 토구자산(일명 용산)의 기슭을 오른다.

야산이다. 

풀밭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 한 마리가 보인다.

거기 내리니 몇 그루 비술나무가 그 푸른 머리채를 늘어뜨린 사이로 큰 돌무덤이 보인다.

집안시를 멀리 내려다본다.

여기가 바로 장군총이다.

 

 

< 고구려는 졸본(환인)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운 뒤 (BC 37), 유리왕 22년 (AD 3)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 (AD 427)까지 이 집안을 40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장군총은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방단은 4단이지만 제2방단에서 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미터,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미터,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미터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미터, 길이는 4.5미터)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방단의 서남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미터, 높이 또한 약 5.5미터이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이다. 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인용 ; 김기웅, '고분', 빛깔 있는 책들, 대원사, 1995) >


  외관을 보아도 화강암을 잘 깎아 만들어 상당히 세련되게 보이며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높이도 높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호분석이 없어 적석이 밀려난 모습


   집안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묘다. 장수왕은 부왕 광개토대왕의 사업을 계승하여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주고 위로는 북위의 괴롭힘을 당하던 북연을 도와주어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다. 이때 고구려의 영토는 최대로 확대되어 반도 안에서 한강을 넘어 지금의 충남지역과 죽령까지 뻗치고 다시 강원도의 일부분까지 차지하였다. 북쪽으로는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서울을 남쪽 평양으로 옮겨 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때이다. 장수왕이 죽은 뒤 고구려왕들은 장수왕의 묘를 크게 지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뒤 고구려는 상당한 기간 평화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강성했던 시기의 고구려 영토

 

 

 


 

 

 이 장수왕릉 오른쪽 뒤에는 또 작은 무덤의 형상(위 사진 참조)이 있었는데 왕릉과 모습이 상당히 닮아 있었다.


                               (4) 국내성 터


  집안시내 곳곳에 국내성터의 흔적이 보인다.

도시의 외곽에는 상당히 잘 보존되었다.

이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어 고구려의 역사의 터전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삼국사기에 "유리왕 22년(서기3년) 겨울 10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제2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압록강가에 있는 통구분지(通溝盆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장백산맥의 한 갈래인 노령산맥의 줄기가 동북-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므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첩첩이 솟아 있고 그 사이에 험악한 골짜기들이 수없이 많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북에서 오는 적을 막는 기다란 성곽같이 생겼다. 자세히 살펴보면 성 동쪽 6㎞ 지점에는 용산(龍山), 북쪽 1㎞ 지점에는 우산(禹山), 그리고 서쪽으로 1.5㎞를 가면 칠성산(七星山)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앞쪽에는 압록강이 흘러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

 

 

왜 고구려는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보자.


< 졸본촌에 도읍한 지 40년, 그 사이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그 세력이 강해져 있었지만 고구려 주변에 웅거하면서 고구려가 강대해지는 것을 꺼려하는 한나라 현도군·낙랑군을 비롯해 부여와 선비 등 강대국 세력과 부족들의 침입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가 마침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강력한 주변세력들의 침략이 미치기 어려운 내지로 피할 뿐 만 아니라 자원이 풍부하여 생업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찾음으로써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서 라고도 볼 수 있다. 국내성 지역은 관동 3보(關東三寶)로 불리는 인삼·돈피·녹용의 산지이며 야채·과일·약초가 풍부하다. 또 높은 산들은 자연스럽게 북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막아줌으로써 아늑하고 양지바른 기후조건을 마련해주었으며 땅까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바로 이러한 군사·경제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성 지역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장장 425년간이나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군사의 중심지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

 

 




< 국내성의 형태는 장방형이고 석성이며 전체 둘레가 2,688미터에 성벽의 원래 높이가 7~8m, 폭이 7m가량이다. 통구하를 낀 서문터는 어긋문식 옹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일제시대만 해도 우뚝 솟아 있던 각루(角樓)는 토성으로 불릴 만큼 많이 파괴되었다. 국내성은 1947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로, 문화대혁명으로 이후에는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중국정부는 향후 10년간 국내성 내의 아파트를 계획적으로 이주시키고 고구려 관련 박물관이나 문물관 등을 성 내부에 지어 대규모 고구려 유적공원으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 결과 궁궐터나 건물터, 해자터, 배수로, 옛 도로, 성문터, 치 등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고 나면 우리는 이제 집안의 고구려가 온전히 중국의 고구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