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5국

26. 피터 폴 요새와 뱃머리 등대 그리고 피의 사원

저 언덕 넘어 2019. 1. 27. 09:05


1. 뱃머리 등대, 페터 앤 파울 요새 


  밖에 나오니 박물관 안의 답답한 공기와 그 안에서 느낀 인간 탐욕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으로 혼탁해진 내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긴 역사의 모든 사연을 알고 있을 저 네바 강의 푸른 물결 위로 놓여진 다리 위를 지난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산뜻하고 저 건너 뱃머리 등대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바로 피터폴 요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자.




  피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 ](피터폴 요새)

  < 1703년 표트르 1세가 기초를 세웠고 1706~1740년에 도메니코 트레지니(Domenico Trezzini)가 설계하여 35년에 걸쳐 지었다.

  네바강江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섬에 축조한 요새이다.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건설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의 계기가 되는 곳이다.

  1733년에는 요새의 중앙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페트로)와 바울(파울로)을 기념하는 목조교회가 세워졌는데,  여기서 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성당의 후면에는 표트르 대제 이후의 역대 황제와 황후들이 묻혀 있다고 한다 

   건설 당시 요새는 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성채였지만,  이후 예카테리나 여제시대(1780년) 화강암으로 벽과 언덕배기를 덧씌우면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거듭나게 된다. >

 

  그런데 이 요새가 역사상 실전에 참전한 적은 없다고 한다. 대신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됐는데,  유감스럽게도 최초 수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반대한 그의 아들 알렉시스 왕자였다. 역사란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작가 고리끼와 도스토에프스키, 혁명가 트로츠끼와 레닌의 친형도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1920년대 들어 소비에트 정부의 '역사박물관'으로 바뀐 요새는 오늘날 성당과 성벽 내부에 전시실을 두고 있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eub5809&logNo=220090353883에서 일부 인용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이 대성당의 첨탑에 대해서는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저 첨탑을 가리키며, 러시아 대학에서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로 관광 안내도하는 친구는 대성당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대성당을 완공한 직후 첨탑의 십자가가 벼락에 맞아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빨리 수리하려했지만, 누구도 감히 올라가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자, 피터대제는 "첨탑을 수리하고 십자가가를 다시 설치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답니다.

  한 목수가 나서 목숨을 걸고 수리하고 "왕이시여, 저에게 죽을 때까지 꽁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하자, 대제는 어디서든 꽁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허가서를 하사하였답니다. 술꾼은 누구나 그렇듯이 술취해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이 목수도 몇 번이고 허가서를 잃어버리자, 피터대제는 목수의 왼쪽 목에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왕의 인증"을 찍어 주었답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고 흘러 러시아 사람들은 왼쪽 목을 가리키면 "오늘 술 한잔 어때?"라는 의미로 받아드린답니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monrim&logNo=50047031850 



   

  피터 대제는 처음에 스웨덴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의 토끼섬에 페트로파브로스크 요새를 건설하고, 그 뒤에는 이 곳을 실질적인 행정의 중심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높이 123m의 이 피터폴 대성당은 뻬쩨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로마노프 왕족들의 영묘로 사용했고, 특히 볼세비키 혁명으로 처형된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와 가족들도 사후 80년 만에 대성당에 묻혔다고 한다.

   

  이 요새 한켠에 있는 이 바실리 등대는 그 모양이 아주 특이하고 장식으로 조각상도 있다.



  바실리섬 다리입구에 세워진 이 등대는 예전에는 네바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의 항해를 돕는 등대였다고 하며,지금은 국가 기념일에만 불을 켠다고 한다,


 <  높이 32m로, 1805∼1810년에 프랑스 건축가 장 프랑소와 데도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합니다. 로스트랄은 라틴어로 '뱃머리’를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는데, 러시아도 이를 본따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 합니다. 기둥에 부착된 4개의 형상은 러시아의 4대강인 볼가강, 네바강, 안가라강, 예니세이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등대는 2개인데 헤라 여신상이 있는 로스트랄 등대 , 제우스신 상이 있는 로스트랄 등대입니다. 또한 이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산책하기가 좋다.

(위 내용은 http//biog.naver.com/ssh19938에서 인용함)


  이 요새를 처음 만들고 오늘날의 상트가 있게 한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보인다.



 

   피터 폴 요새의 성벽 안 한쪽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힌 곳이다.


  <피터폴 요새를 건설한 피터대제는 자신의 개혁에 반기를 들고 유럽으로 망명했던 아들을 이 곳으로 불러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 직전에 그를 살해하였다고, 볼세비키 혁명 과정에서도 많은 혁명가들이 이 곳에서 처형되었고, 볼가강으로 향한 문을 지나면 죄수는 처형당하고 시체는 네바강에 버려 이 문을  돌아올 수 없는 문이라 부른다고 한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monrim&logNo=50047031850 에서 인용한 글



  http://blog.naver.com/mumuyaji/220380201956



  이 요새가 얼마나 튼튼한 성인가를 짐작하게 해 주는 두꺼운 벽면의 그림은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dlswl123&logNo=221143056871에서 인용

 

  피터 폴 한쪽에는 대포를 배치하여 그 옛날의 이 요새의 분위기를 살려 놓은 곳이 있었다.

 

 


  이 요새에서 네바강을 건너 반대편에 보이는 것은 아까 보았던 그 에르미타쥬 박물관이다.


 


2. 피의 사원을 찾아


  유럽 대륙의 기후는 대체로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후에 우리가 피의 사원을 찾아갈 때는 비가 곧 쏟아부을 것 같고 바람도 세게 불었던 것 같다.

 

 피의 사원은 작은 배들이 떠있는 좁은 운하가 보이기도 하고 도회의 건물들이 밀집한 어느 곳이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상트 페테르 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Konyushennaya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흐린 하늘 아래 위용을 자랑하는 이 건물은 길이가 81m 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유럽풍의 바로크형식과 신고전주의양식과 비잔틴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양식을 간직한 매우 아름다운 성당이다.


 

  가만히 보면 9개의 지붕이 있다고 하는데 각기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양파모양의 꾸빌라라는 둥근 지붕 위에는 러시아 정교의 십자가가 있다. 지금 가장 높은 지붕이 수리중인 모양으로 비계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외관을 모자이크로 장식을 해놓았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내용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너무나 번다하다 할 만큼 꾸며 놓았는지 여백을 많이 쓰고 단순 소박 간결하게 표현하는 동양인의 예술 감각에 익숙한 내가 볼 때는 너무 사치스럽고 혼란할 정도로 치장을 해 놓았다.



  사람들이 많다. 내리고 출발하는 버스들. 길을 건너는 사람들,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차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사진 찍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로  온통 복잡한 시장통 같다. 


   입구를 들어서니 안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지갑을 단단히 간수하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 머리 위로 사진기를 위로 치켜들었고 조명도 어두운 데다가 불빛이 반사되어 사진이 형편없이 나올 것을 염려하면서 사진 찍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식된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천정이고 벽이고 어디 한군데도 빠지지 않고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미술품이다. 일견 보아 모두 성화(이콘)들이다. 하기야 성당안에 들어 있는 저 그림은 모두가 성화가 아니겠는가?  모자이크란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붙여서 만든 그림이다.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까? 참으로 대역사의 산물이다.




  이 그림들 모두 성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 내용을 알고 본다면 참 재미가 있겠다. 그리고 그 미술 기법을 알고 본다면 참으로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게다, 내용을 잘 모르는 나는 찬탄의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그냥 입을 벌리고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의 물결에 밀려다니다가 문밖을 나오리 만큼 복잡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원안의 벽과 천정에 한곳도 빠짐없이 성화가 가득한 것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러시아 정교의 특징은 성상화에 있다. 신학적인 의미없이 단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던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동방정교(그리스정교) 및 러시아 정교의 성상화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동방정교(그리스정교) 및 러시아정교는 사제의 설교가 없다. 러시아인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글을 읽을 줄 몰랐고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교회의 많은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그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만을 상상하거나 유추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상화는 농민들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백과사전에서 인용


   모든 사물 현상의 배경 뒤에는 꼭  그것이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에 이유없는 무덤은 없다. 우스개 소리처럼 공짜 점심도 없다.







  위키 백과에서 이 사원의 자료를 찾는다.


  피의 구원 사원 또는 피흘리신 구세주 교회 (러시아어: Храм Спаса на Крови, 영어: 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부활, 구세주의 부활을 의미하는 피가 있는 교회를 뜻한다.

 

   .이 교회는 알렉산더 2세 암살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워져서 일명‘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1881년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킨다. 부상을 당한 뒤 이 곳의 창고에서 피를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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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원은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사원의 건설은 24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1907년 8월 6일 변모축일에 문을 열었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1907년 첫개관 이후로 90년 후) 공개되었으며,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