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및 시관계

임병호 추모 문집 (2013년)

저 언덕 넘어 2024. 1. 6. 12:25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차 례|
추모 문집을 펴내며 6

제1부 다시 읽는 대표시

명정酩酊 10
시詩가 있는 마을 11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 12
주물공장 13
못 펴기 14
잔업 15
회식 16
안전사고 18
기적 19
구덕산 사람들과 산 가재 20


제2부 유고시

어느 시인詩人에게 22
사할린 편지片紙 23
잔내비 25
도산陶山 호반湖畔에 서서 27
신新 치가론治家論 29
베르린을 생각한다 30
순애보純愛譜 32
노승老僧 33
등登 희방사喜方寺 34
직지直指 35
연주演奏하는 여인女人 36
수하樹下 가는 길 37
참대밭에서 38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혼에 보내는 시 39
장 나들이 41
옛 집 42
산하山河 43
하늘이 우리에게 아픔을 내림은  45
누가 장애아 너희에게 묻거든 46
새 47
목련木蓮  48 
풍경風景  49
상사화相思花 50
여인女人에게  51
주진舟津에서  52
무제無題  53 
사랑 54
문답問答 55
무적霧笛 56 
곡우穀雨 57
옛 친구와 나누는 얘기  58
막차 유감 60
됴고약  61
타조 62
늦가을 빗속 풍경  63
2000년 12월 64
살아남은 자들의 초상  66
소만小滿 무렵 68
소서小暑에 석류꽃 꿈꾸다 69
첫 가을 입추立秋에 밤길을 걷다  70
입추立秋의 바람 71
백로白露에 고향 산천을 찾아 72
정자가 있는 노을 73
한로寒露에 단풍 따라 걷다 74
시詩를 쓰고 난 상강霜降의 아침 75
중앙로를 걸으며 76
댐을 지나며 77
입동立冬의 밤 78
분청粉靑 물고기의 사랑 79
소설小雪 지나 비 뿌리고 80
겨울나무 81
겨울 밤바람 82
립스틱 83
정축년丁丑年 동지冬至날 84
그대에게 있어 나는 무엇인가 85
추상이 된 사랑 86
우렁각시 87
우리 닮는다는 것은 88
까치 빈 둥지 89
고전의 사랑 90
세월 다 지나고 나면 91
내 마음 속의 새 92
저 종소리 93
무서리 94
견우직녀 95
겨울 강가에서 96
천연天緣 97
개망초꽃 98
밤 기차 99
그대 떠나고 100
언양을 지나며 101
우수雨水의 매화 102
도계道界를 지나며 103
사랑 하나 104
찔레 105
도라지꽃 소묘素描       106
현안 107
주벽酒癖 108
파랑새 109
소요기逍遙記 110
을숙도乙叔島 111
광녀狂女 112
헬리 혜성 113


제3부 시인이 쓴 산문

운상대에 머문 발길 116
군자정에서 떠올리는 왜곡된 역사  120
개나리와 사향가 124
청자 유감 128
병자년 7월의 이야기 132


제4부 임병호 그리고 시詩에 대하여

명정의 일상에서 명징한 시를 마시는 임병호 시인  138
안상학
내가 만났던 시인, 임병호 147
김윤한
삶이 고달플수록 보석 같은 시를 쓰던 시인 151
임혜봉
임병호론­일탈과 초월의 시학 156
임두고
임하 금소마을에 있는 시서원을 찾아서 170
한경희
온 몸으로 시詩를 살다간 시인 180
김윤한




|추모 문집을 펴내며|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3년 5월 1일 노동절, 만물이 다시 깨어 봄을 맞는 시기에 꽃잎 하르르 떨어지듯 임병호 시인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임병호 시인은 말 그대로 시인이었다. 가정도 가지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언제나 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시처럼 순수하게 일생을 살았다. 온 몸으로 시를 살아왔다는 말이 가장 적합한 시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임병호 시인처럼 철저하고도 처절하게 시를 안고 몸부림치던 그런 시인은 아마 전에도 없었고 아마 당분간은 그런 시인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떠나간 뒤 몇 년간은 추모의 밤 행사도 가지고 시인을 기려왔지만 어느 때부턴가 바쁘다는 핑계로 시인을 잠시 잊고 지냈던 것 아닌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문단 일각에서 시인을 재조명하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임병호 시인은 시의 무게에서나 시인으로 살아온 이력에 비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함 또한 살아남은 우리들의 부족한 노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도 들기도 한다.
  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후 10주기를 맞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유고시를 비롯해 관련 글들을 묶어 시인의 시와 삶을 잠시나마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시인의 대표적인 시 10편을, 2부에서는 시인이 생전에 발표 하지 못한 유고시를, 3부에서는 시인이 생전에 발표한 산문,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임병호 시인과 시에 대해 발표한 주변의 글들을 모아 한 권 으로 묶었다.
  물론 전집을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생전 발행된 두 권의 시 집, 시인의 작품이 수록된 글밭 동인지들과 함께 이 문집을 통해 시인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활자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 문집이 생전에 시인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에게는 다시금 시인을 추억하는 계기가 되고 연구자들에게는 미흡하나마 최소한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책이 나오기까지 큰 힘을 함께 모아 주신 글밭 동인들과 함께 이 책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신 주변의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13년 5월 1일
글밭동인 일동




제 1 부  다시 읽는 대표시



명정酩酊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봤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버리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 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시속時速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땅이 
내 사는 곳이었으면 참 좋겠다.




시詩가 있는 마을

시를 읽는 소녀가 사는 마을은 향기롭다 
언 땅 속 어디쯤에
시의 삶이 자라고 있을까
풀꽃은 상한 잎 위로 새싹에 쌓여 피고 
외진 산길을 따라 골짜기의 바람은 어디로 
시의 향기를 나를까
작고 어여쁜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시를 닮은 소년이 사는 마을은 싱그럽다 
미루나무 끝 가지 위
시의 하늘은 얼마나 맑은가
푸름이 쏟아내려 큰 강물로 거침없이 흐르고 
떡갈나무 솔숲에 이는
시의 함성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높고 커다란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풋풋하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시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자유롭다 
풀은 풀끼리 나무는 나무들끼리 바알갛게 
시의 열매를 살찌운다
이웃들 함께 땀 배인 이랑에서 추수를 감사하고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눈부신
시의 빛깔은 자유로움이다
밝고 깨끗한 것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찬란하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

겨울 강가에 올라 
못쓰도록 그대 안고 싶어 
내가 떠난다
펑펑 오는 눈 맞아가며 
이산 저산 허허벌판으로 
하늘도 땅도 다 내팽개치고 
소리소문 없이 떠났다
떠나버린 자리에도 그리움은 남는가 
그곳에도 사랑은 자라고 있는가 
눈은 먼 산으로부터 쌓이고
가물한 불빛 흐르는 산마을로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
슬픈 사람의 사랑이
그대 불러 안고 싶다한다 기
차는 떠나고
불이불이不二不二로 찍힌 
내 홀로 걷는 발자국뿐인 
저 허허로운 벌판으로 
내일도 개망초 꽃판 같은 
눈이 온다는데
오늘은 슬픈 그대 꿈을 안고 잔다.




주물공장

고철로 삼천리를 떠돌다
높다랗이 산더미로 삭히어 쌓여 있다가 
내화벽돌 속 1300도 고열로 거듭 타올라 
쇠는 쇠끼리 녹아 흘러라
찌꺼기는 걸러내고 선철 그 매끄러움으로 
살아 숨 쉬는 검은 흙을 파헤치고
빼어난 몸으로 다시 태어나라 
철망 밖 개울 저 너머서 밀려나와
다닥다닥 붙은 방 하나씩 삯대 놓고 
쓰러지고 부서져가며 아들 낳고 딸 낳고 
떠돌이들은 떠돌이들끼리 어운다
사람은 쇠를 닮고 쇠는 사람 닮아
오늘 만들어 부시고 내일 땀 흘려 다듬어 가는 
생명은 고통 위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못 펴기

바르게 살라 바르게 살라 
알몸 마루 끝에 내세워져
매를 맞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구월 장마의
건듯건듯 부는 바람 받으며
공기 놓친 공사장 흙투성이 속의 
녹슬고 비뚤어진 시대의
굽은 못을 줍는다 
언제부터인가
금기시 된 것은 구석진 험난한 곳에 
검게 그을은 노동의 실체이다 
힘들고 투박지게 빚은 것일수록 
이렇듯 거칠게 버려져야 한다
마구 뚫려 쏟아지는 폭우의 하늘 
천심도 변하는 것이라 한다
두드리면 바르게 설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굽은 못을 편다
굼뜬 장마 속에 짓이겨진 
무심한 한 개의 못을 편다.




잔업

공단 사람들은 잔업을 먹고 산다
일과가 끝나고 남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 
작은 손을 재빠르게 움직이던
아주머니들도 두엇 남아
담뱃불을 붙이는 한 편에 모여 앉고 
두고 온 아이들을 걱정하며
내어 온 막걸리를 한 잔씩 거들기도 한다 
둘러앉은 새까매진 얼굴들 앞으로
수북한 국수 그릇을 건네고
농지거리하며 저녁을 먹는 시간만은 즐겁다 
일한 만큼 수당으로 쌓여가는
도시락 보자기를 챙기는 아주머니도 돌아가고 
잠깐씩 눈을 붙이는 작업반 동료 곁에서
노란 백열등을 보고 있노라면
피가 얼굴로 몰려 눈에 핏발이 선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며
피우던 담배를 팽개치다가도 
돌아서서 정신없이 쇠줄 막대를 밀고 
맥분 같은 쇳가루를 받아
손가락으로 비벼본다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는 공장 사람들은 
새벽 불빛에 쫓기며 밤낮을 먹고 산다.




회식

거짓으로 사는 사람들이 눈빛으로 사악해져 가듯 
쇳덩이로 사는 사람들은
쇠의 심성으로 강건해져 가는가 
연 삼일 철야에도 시간에 쫓겨 
매직펜으로 마지막 상자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써 넣은 저녁
작업대 위엔 굵게 고기를 썰어 넣어 끓인 
냄비가 오르고 술잔이 오르고
막걸리가 커다란 통 속에 부어져 
우리들 짜부러진 눈을 띄우게 한다 
사장은 한 잔씩 술을 떠 권하고 
돌려가며 노래를 시키고
최 반장은 뒤뚱뒤뚱 춤을 추고
우리는 줄막대를 들고 철판을 두드리고 
깝북깝북 취해가는 몸 가누며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지쳐 쓰러지려는 어디에서
흥겨워 보이려는 힘들이 남았을까 
터트려버리고 싶은 아픔을 묻어갈까 
한 잔 술 속에 몸을 부셔갈까 
회식은 늘 싱거워져 끝이 나고 
탈진한 몸뚱이로 작업대에 걸터앉아 
눈이 마주치면 그래도 웃어 보이는
쇳가루를 먹어
쇳덩이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아.




안전사고

손가락이 잘린
주물형사를 섞는 이 군이 실려갔다 
혼합기 원통 곁엔
핏방울이 방울져 마르지 않고 
우리는 흙을 뒤져 손가락을 찾는다
검은 흙 속에서 찾아낸 하얀 손톱의 끝마디 
생체에서 떨어져 나면 이렇게 하얀가 
깨끗이 닦아내어 공단 병원을 찾는다 
병원엔 언제나 낯선 이들의 아픔뿐이지만 
얼굴도 모습도 닮아버린
절망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젊디젊은 사람들
봉합은 되지 않고 손마디는 버려지고 
굵다랗게 붕대를 동여매고 그저 웃을 뿐인 
이 군의 등을 두드린다, 그는
일진이 나빠서라며 하늘을 보며 웃는다 
일과 후에 매점에 둘러 앉아
산재의 보상을 얘기하고 
하얀 손마디를 얘기했다
설움이 고통이 되어 앓는 이 군을 곁에 두고 
한 달에 몇은 죽기도 한다는데
얼마나 다행이냐며
찌푸린 이 군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기적

훗날 전설로 남겨져 얘기하게 되리라 
땀에 절고 피를 흘리고 비에 씻겨가며 
우리의 한 달은 끝이 났다
이름이 불려 하나씩 봉투를 받아들고 
숨 막히고 답답해지는 가슴으로 
빗물을 밟으며 공장길을 돌아온다 
한참을 걸어서야
노동의 피곤이 따뜻이 손 안에 쥐어지고 
나른히 전신으로 퍼져 간다
고깃집에 들러 구운 고기를 먹는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기름에 튀겨 가며 
우리는 소주를 마셨고
내일의 일기 따위나 묻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일당 천오백 원
하루를 쉬고 30일을 일한 임금의 합산이 
어떻게 십이만 원이 되는가를 그 기적을 
열심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노동의 대가에는
땀과 피의 내음이 배어 있다
애처롭고 눈물겨운 사연들이 얼룩져 있다.




구덕산 사람들과 산 가재

구덕산 언덕배기엔
한 뼘만 한 구덕산 사람들이 어울어 살고 
구덕산 개울 돌 틈엔
조그마한 산가재들이 숨어서 산다
한 뼘만 한 사람들이 큰 손 사람에게 쫓겼듯이 
조그마한 가재들은 커다란 공장에 몰려 왔다 
구덕이 좋아 산을 오르는 사람들 눈엔
구덕산 사람도 산가재도 보이지 않는다 
뒷걸음으로 사는 사람들과
뒤로 걷는 가재들은
철망 가에서 돌 틈에서 함께 산을 떠받고 산다 
누가 말했을까
한 발 물러 삶이 한 발 내딛는 삶이라고 
언덕배기 사람들과 개울 가재들은 
그렇게 꿈을 꾸며
구덕산을 등처럼 비비고 산다.





제 2 부   유 고 시


어느 시인詩人에게

당신은 얼마나 슬프고
어릴 적 짙푸른 산정의 소나무를
나 먹은 나의 세월로는 그려낼 수 없느니 
당신은 무슨 빛깔로 저 아침을 그리며 
나는 무엇이라 이 저녁 술을 마시는가
시詩란 먼 하늘의 소리 있어 
내 안의 진실로 울려 남을 
스물에 배워 아직 미욱하나
산은 높아 나무는 베이고 자라고 
산은 낮아 나무가 자라고 베임을 
우리의 병력病歷으로 그저 짐작느니
당신은 빈 들에 선 내 아이들 여린 눈 속에 
베인 그루터길 새기려 말라
돌아가면 모를 심고 보리밭은 매겠다는 
꿈같은 유식의 호사스러움을
이 울울한 저녁
술잔에 타서 마시려 하느니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로
끝없이 푸른 하늘은 높아 천국이라 하고 
이슬 맺는 땅의 훈기 토해 내는
아득한 지옥 있어 또한 좋지 않은가.
<1986년>




사할린 편지片紙

1.
사할린스크의 바다는 잠잠하질 않으오 
오늘도 파도가 높으오
어느 해협을 돌아 내 육신은
씻긴 물로 동해東海에 다다를 게요 
가장 가까운 땅
맑디맑은 동해에서 날 만나고
열두 굽이라 하오, 아흔아홉 골이라 하오만 
내겐 항시 석삼 년일 뿐이오
누가 백발 삼천장三千丈이라 했오 
몸은 궁형弓形이오
모두들 뚜렷이 기억하오, 눈앞에 있는 것 같소 
이렇게 골수骨髓에 맺히나 보오
달은 제 빛이오만 사람만이 다르오 
산도 들도 내도 그렇게만 다르오 
가을이오 초겨울이오
한지寒地는 별빛만큼 차오, 그렇게 매섭소 
옛 마을은 피붙인 얼마나 따뜻한 것이오 
돌아가야겠소
돌아가야겠소.

2.
가을은 결실기입니다
과일은 그 빛깔이 빛의 빛깔입니다, 그 사랑입니다 
놓여 있는 것은 스스로 중단함이 없다 합니다 
이제 오실 때입니다
사할린스크의 하늘은 겨울 뿐입니까
엊그제 오시던 이 있어 꽃잎 되어 떨어진 일 있습니까 
두고 간 것들 눈 속에 감겨 두십시오
손을 놓은 가슴 바닥 거기 조국 있습니다
꿈결에 부르는 소리 있으면 꿈같이 맞아 주십시오 
심청일 꽃 속에 앉히듯 또 그리 끌릴 겁니다.
겨울 뿐이어도 남쪽에서나 더 먼 바닷가에서나 부르십시오 
바람결에 모다 듣습니다, 꿈길로 나서겠습니다
오실 때입니다
쌓인 먼지 같은 것 훌훌 털어버리고 오실 때입니다.
<1983. 10.>




잔내비

어디 가 잔내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어디 가 잔내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적막산천에 노래하는
잔내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먼 빛 가까운 빛 접어들어 
산은 산
나무는 나무 
바위 바위 돌아
하늘의 구름 흐르는 고개 아홉 쯤 넘어 
그 구름 색동옷 지어
잔내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흙을 밟으면
바람따라 와 풀잎 
비켜나는 소리 곁에
도솔 돌더미 씻기는 소리 곁에 
흘러흘러 매암 도는
저 물에 내리는 새야 구천의 새야 
파람을 내려라
긴 흐름으로 내려라 
잔내비야 잔내비야 
울울창창한 숲에서 나와 
짧은 파람으로 네 입에 물고 
긴 흐름일랑 네 손에 걸어 
재주를 넘자
재주를 넘자 잔내비야 
동에 뜨는 해
서녘의 놀
남에서 부는 바람
아, 들려오지 않는 노래 
금 그어진 산하
색동 색동 색동옷 입고 
색동 색동 파람을 넘어라 
한 고개 넘어라
두 고개 넘어라 
세 고개 넘어라
네 고개 넘어라……. 
산 고개엔 솔바람 소리 
계곡엔 개울물 소리
산빛, 물빛 어우는 그 산하에 가 닿아 
저 하늘 색동으로 내리는
하늘가에 나앉아 
불러라 잔내비야 
대륙의 땅 
아름다운 강산을 
잔내비야 
잔내비야 
잔내비야
어디 가 잔내비 한 마리 불러와야겠다.
<1981년>




도산陶山 호반湖畔에 서서

하늘이 비를 내려 이룬 
물길 칠백 리
앞에 섰느니
흰 돛단배 기다리던, 목 놓아 초인超人을 부르던 
육사陸史는 가고 없고
내 얼굴 비추이던
강물은 흘러 대양大洋을 향해 가는데 
우리들 가슴 피 흘리고
떠날 수 없어 불 밝힌 사람들 가슴을 조이곤 
뉘 돼먹지 않은 이념理念 나부랭일 쓸어와 
내 천진의 유구한 지맥地脈에
이제 다시 오물로 덮고 매밥으로 버려야 쓰는 
눈 흘기며 피 터트리는 동족同族으로야
차마 남을 수 없지 않은가 
온전한 뿌리에선 죄 비켜선 채
역사歷史란 서러운 사람들의 곳집으로만 있고 
살점 붙지 않은 철골鐵骨로 일어서서
네 오늘
고함쳐 찾아야겠다는 진리란 
무엇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어린아이의 울음조차도
이력履歷으로 남겼어야 했던 
유약한 아비 덕분에
겁에 질린 이웃에게 돌을 던지는 윤
리倫理마저 허물도록 버려둔 
못난 형제들로 인해
이 어질고 순박한 땅 위의 역사歷史가 
이렇게도 모질어야 하는가
한 해가 저무는
도산陶山 호반湖畔에 서서 
내가 옹졸하다고
내 형제가 비겁하다고
펄펄펄 눈송이 내리는 하늘에다 
얘기해야 하나
정갈한 씨앗을 묻어두었을 이 땅에다 
얘기해야 하느냐.
<1984. 12. 23.>




신新 치가론治家論

삶은 백대百代 생존生存이거늘
치가治家 제법諸法을 명심銘心함이라 
솟을대문으로 곧바로 들지 말라 
해바라기하듯 흔적 쯤 감출 일이다 
어울려 반쯤 즐거워하라
이윽고 돌아와 홀로 포식함이다 
노여워하라 서슬 푸른 행위야 말로 
남과 나를 구별하는 일이다
제 붙이를 사랑하라
울안에 뒹구는 돌덩이어도 사랑하라 
진실이야 헤진 베옷이야 일찍 벗을 일이다
마알갛게 떠오르는 해를 보라 언제 어둠이 있었더냐 
까마귀의 날갯짓처럼 퍼득이길 버릇하라
빨리 잊으러 주렴이 떨리도록 노래하며 즐기라 
누가 어렵다하는가 빈자의 얼굴을 그려보라 
앓는 소리를 하며 먼 길을 떠나듯 피하라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굽히라 
적당히 교활함이 적당히 삶이라 
남보다 먼저 무엇이든 많이 먹으러
잘 익은 과일은 많은 빛을 받지 않던가
몸과 마음을 나누라 함께 함이야 성현의 말씀 아닌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리하여 이름을 저자에 걸라.
<1983. 10.>




베르린을 생각한다

연일 위성으로 통신으로 우리에게 찍혀오지 않아도 
그러리라 알고 있었다
맨발로 걷는 가시밭이 험난하다 해도 
길은 나기 마련 아닌가
무시로 걸어가고 걸어오는 무수한 발길에 
무쇠장벽인들 견뎌났겠는가
차량 행렬 속으로 몰려 나에게로 가야겠다는 
핏발 선 시선들이 화면 가득한
동유럽의 길목
온 몸을 내어던져 오른 철조망 위에 
무등 탄 아이들 또렷한 눈동자 속에
결코 무거울 수 없는 세상 하나씩 울러 메고 
환호하는 이들의 의연한 모습 가운데
어디에 이데올로기의 낡은 우울이 그
늘로 남겨져 있던가
동북아의 한탄과 설레임 많은 나라에서 
쉬 풀숲에 묻혀버릴
인적 끊긴 산길을 헤쳐가며 길을 묻는다 
길을 두고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잠 못 이뤄 뒤척이던
미움 많던 날들의 고통만을 싸안고 
부단히 걸어가라 한다
육천만 모두가 묵묵히 그렇게
자신에게로 걸어가라 한다
베르린을 생각한다 통곡의 벽을 짚고 선 
시대의 아픔을 생각한다
한 시대의 죄악을 생각한다 
하늘이 원하는 것은
용기 있는 민족인가 힘 있는 국가인가.




순애보純愛譜

저 나무들 잎 다 비어내어 
더 낮은 곳으로 날려 보내고 
낙엽은 그늘진 골을 찾아
제 몸 풀썩이며 덮어주고 있었다 
하늘은 한 편을 덜어내어
희디흰 눈을 빈 가지로부터 내리고 
산도 들도 줄기 꺾인 풀들마저 
하얗게 하얗게 보듬고 있었다 
세월도 사랑도
저 눈밭에서는 말이 없었다.




노승老僧

붉은 잎 산문에 들어 
푸름을 하늘에 펴다 
골기와 이끼 언저리로 
잔잔히 풍경 울리고 
수미산 묻는 이 있어 
뜰을 쓸어 보이다 
떨어져 쌓이는 것은 
미망의 바람이다
도솔 높이로 일으켜 
무심 깊이에 이르는 
처음으로 끝도 모두가 
소용돌이 속이다. 
안과 밖을 이어
만자卍字 창호지에 그리다 
나뭇결에 도드라져 
문고리로 선명한 지문 
삶과 살 삭혀진 자리
그 둘레를 지우다.
잊고 없음이 마음에 있으면 
구름 띄운 새암 같을까 
섬돌에 가즈런히
검은 고무신 말려 두고 
햇살이 노승이라 하여 
그림자로 모시다.




등登 희방사喜方寺

언젠가 희방 계곡 오르는 나를 두고 
구름이 멈짓멈짓 뒤따라와 에우더니 
이보게 길 멀었는가 목 축이고 가란다. 
산 속에 흘러들면 술이 먼저 우우하고 
계곡에 몸 묻으면 저희 물이 와와하는 
명산도 예 같지 않아 못 올 데라 그런다. 
소백산 가람 두고 구름 마주 앉았더니 
누란의 알이 깨어 잔 속에서 울더니만
눈 뿌려 되 오는 길에 불이불이不二不二라 한다.




직지直指

누가 와 찾는구나 무어라 묻는구나
이 산에 꽃물 들면 저 물 속에 지는가요 
기운 달 흘러만 가는 물 들으라 그런 걸.




연주演奏하는 여인女人

담쟁이 덩굴이 보이는 찻집에서 태우는 
자연紫煙 낮은 언덕
미모사 피어 있는 풍경화 속의 
바람은 어떤 내음일까
나직이 손끝으로 게워내는 웃음, 플롯 
다기茶器 푸른 빛깔의 흐름
아를르의 여인.




수하樹下 가는 길

이제도
잠시 멎은 정류장 연변에선 
시린 하늘에 꽂혀 있는 
우물 속 같은
그런 눈빛과 만나네 
바람편에 묻어 온 얘기들을
떠나온 이들은 잔잔히 웃음으로 건네고 
취기醉氣에 잠이 든 촌로村老의 어깨 위로 
겨울 유충幼蟲이 바람을 시늉하네
폐가廢家 두엇 기울인 밭머리로 
산꿩이 날아오르고
첨탑尖塔이 나직한 교회당 토담벽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내 아이 적 그림자와 함께 뛰어 노는 
어린 것들에게
그 시절 노래를 불러주네 
이 겨울
서늘한 가슴으로 찾은 
수하樹下 가는 길에
흙비 내려 근시近視의 눈 속에 뿌리고 
옛 친구네 빈 텃밭에
바람만 불게 두네.




참대밭에서

자네, 이른 아침 댓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 보았나
꼿꼿이 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온 밤을 끙끙 앓다
이른 새벽으로 툭툭 비로소 몸을 여는 
참대나무 제 몸 일렁이는 삶이 있네 
건듯 바람이라도 일면
청음淸陰에 마음 한 올 내려놓고 
무하無瑕 무심無心에 들거나 
먹구름 몰려오면
청산靑山 끝머리에 나아가
뇌성벽력 폭우 속 법열法悅에도 쌓이네 
천지간에 두루 막힘없는 행보로
죽엽 한 척 한 척 이어 밟아 가면 
묵향도 율려律呂에 실려 고즈넉하네 
세속 밖으로 난 길이 있어
고인古人도 나도 풍월風月에 함초롬 젖고 
어느 시절 불면의 밤 지새우는.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혼에 보내는 시

  ‘예수께서 저희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물으매, 가이사의 것 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경외로이 여기더라 <마가복음 12:15~18>

우리에게 이 땅에서 다시는 부르지 못할 이름이 있으니 
꿈 많던 우리들의 소중한 딸들
신효순과 심미선이라
무례와 역설 속에 참혹히 숨져 간 
너희들은 혼백으로도
이 땅에서의 비극에 분노하라
나라와 국민과 여리디 여린 너희들까지 
국토 분단의 제단에 제물화하는
이 땅의 모리배들을 경멸하라 
나라의 정기와 어린 너희들마저
SOFA 불평등의 굴레 속에 내팽겨 책임질려 않는 
이 땅의 위정자들을 저주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 
이 땅에 분별의 눈을 뜨게 하라
그 비겁함의 죄값을 다하게 하라 
2002년 6월 13일
우리는 우리들의 살점 하나씩을 떼어 통곡으로 이 땅에 묻었느니
오늘 우리가 무엇으로 살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맑은 너희의 영혼에 보내는 우리들의 눈물과 아픔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길 굽어 살피라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용서하라. 고이 잠드시라.




장 나들이

엎어놓은 나무 함지에 
하얗게 벗긴 도라지 몇 뿌리 
냉이 보듬어 올려놓고
문드러진 가락지 낀 손 고대 두질 못하고 
김 치과 벽 밑 세멘 바닥에 앉아 있으면 
동여 맨 머리수건 밑으로 한세월 부질없다 
흰 머리 아득한 옛날이더니
왼 장을 돌아
늘어선 어물전 앞에 한참을 서성여
자반고등어 몇 손 멸치 대가리 큰 놈 봉지에 담고 
돌아 나오며 부스러기 과자 싸안는
고향 이웃 할머니 도회로 간 아들 내외 
손끝에 달아 두고 간 어린 손주 
천륜엔가 끌려 황급히 차에 오르고.




옛 집

비 듣는 날은 풀잎 속삭임 
바람 이는 날은 송홧가루 쌓여 
산허리 대숲 아아아아래 
에워싸고 허름히 앉아 있다 
겨울 소나무 차운 그림자
상수리나무 가지 걸려 기웃거리다
댓잎 사이로 수수수수숲
나지막한 옛 집 두드린다.



산하山河

어디 산이 없으랴만 
어디 강이 없으랴만
뉘라서 저 강을 오가는 새들 청산을 날으지 못하게 하랴 
세상 어느 곳의 목숨들이
해마다 먼저 산을 찾아 봄을 두고 
진달래 붉은 꽃 천지를 이루던가
풀 곁에 나무 곁에 너울대는 하늘 곁에 
여름이 산이 물이 빛을 흙으로 상감한 
속 비워 가득한 빛 청자로 앉혀 놓고
그 빛 둘레로 내린 새떼 앞강에 메꽃 띄워 
갈산에 비춰 붉고 강굽이로 해를 품다
한 줌씩 노을로 건넨 
발묵의 화폭이다가
섧은 자리 있어 산야에 눈이 내리고 
삼동에 긴 삼동에 홀로 맞는 바람 일면 
그 아픔 명꽃으로 안아라
백의白衣 백의白衣 희어만 온 겨레야 
산은 강을 몰고 강은 산을 에워 
주검이 산을 쌓고 핏물이 강을 이룬
상잔相殘의 민족아 무지無知의 민족아 통곡痛哭의 민족아 
상현上弦은 보듬고 하현下弦은 업었는가
애비는 산이라 쫓고 애민 강이라 새겨 
묵시의 그믐 걷힐 무렵
흰 꽃송이로 피어나라
나뉨의 흐름 모아 물빛 저리 짙은가 
청산靑山을 불러라
동편도 서편도 자맥질하라
경인년庚寅年* 침묵의 강심江心 깊이깊이 드리워라 
산은 또 뉘 잎을 사루는가
붉어라 처처에 잦아진 목숨의 끝 
사랑은 재를 남겨 씻기우다
오늘 동천冬天이 소복素服 입는가
이 산하山河 유월六月에 뿌린 눈물로 지은 
소복素服 입는가
어디 산이 없으랴만 
어디 강이 없으랴만
뉘 있어 저 흐름을 끌고 산하山河 봄을 들러리하랴.

* 경인년: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의 해.




하늘이 우리에게 아픔을 내림은

우리에겐
하늘이 내려주는 아픔들이 있다 
한 가닥씩의 아픔들이 있다 
감아도 감아도 그 끝을 모를 
이른 아침
석류 끝 가지 위의 새들 지저귐이나
후진 골목길에서나 나와 너와의 얘기에서나 
휜 어깨로 돌아오는 길
무심코 올려다보는 밤하늘 별들과의 만남에서 
우리 아스라이 아픔을 나눈다
아픔이 별빛 날카로움으로 베혀 오면 
어릴 적 눈 빛깔의 맑은
가운데 손가락만한 천진의 실패로 감아라 
눈물이 나
풀어버리고 싶은 때 오면
따뜻이 내 안의 아픔으로 풀어라 
하늘이 우리에게
헤어날 수 없을지도 모를 아픔을 내림은 
스스로 감지 않은 자들의 어리석음
땅 위의 무지 때문이다.




누가 장애아 너희에게 묻거든

너희는 모르는 일이라 해라
한 잎 꽃이파린 소중한 향기를 엮어내느니 
너희는 그저 웃기만 하라
잎도 없이 벙그는 꽃송이로
조그맣게 홀로 가쟁이에 머물 뿐이라 해라 
꽃 지는 자리는 푸릇한 만남이니
삶과 죽음, 처음 곳으로 배웅할 따름이라 해라 
너희가 가까이 가 볼 수 없어도
빗소리에 흠뻑 젖는 이파리가 만지어진다 해라 
아침이 그 저녁이 가만히 나뭇잎을 쓸안 듯 
그것은 싱그러운 느낌이라 해라
갈퀴 닿지 않는 자리에 놓임에 마음 내비춰도 
빛깔 하나 상하지 않음이라 해라
땅 속 깊이 뿌리내려 열매 맺듯이 
오롯이 우리는 주어졌음이라 해라 
무얼까 무얼까 바람으로 와 닿거든
네게로 떨어져 온 잎을 펴들고 나아가는 길이라 해라 
네 무게로 손짓하거든 아무 시늉 말라
나무 곁의 나무로 서서 있으라 
누가 너희에게 묻거든
떨어져 있거나 묻혀 있거나
날려가는 모든 자리에도 눈이 내린다 해라.






바위가 되라
강이 보이는 언덕 
빗돌 위에 서 있으니
사람들은 모른다 모른다 죄 돌아선 하늘 이 편 
긴 밤을 날아온 쭉지를 거둔 수고로움에
제 그림자의 화석을 만들게 했으니 
모든 것은 가을에 남겨지길 버릇하지만 
나무에 앉은 새가 쫓는 것은
애증이 아니라 허구를 터트리는 자국이라 
늦은 볕이 잔가지에 가리이고
쇠잔한 흙 부스러기로 작은 물 흐름에 쓸림은 
온전한 것이야 이끼처럼 여림 아닌가
울음의 흔적을 딛고 차올라 
제 눈금 위에
또 무엇이라 쫒다.
<1983. 8>




목련木蓮

헤어짐도 
네게사
애잔한 남빛이야 
어젠
표표히 나비로 남아 
몸져 앓는
상사랄까 
죽음 일다 
죽음 일다
교살 당한 이국의 편지 
세사世事 그쯤에야 
배웅하는 이 있던
버린 아침에 터트리는 

헛한 
웃음이야.




풍경風景

홀로 너를 두고 꿈에서 깨어
어쩔까 어쩔까 찾아 나선 저물녘 강둑에서 
문득 올려다 본 곧게 내린 길
하늘에 그믐 하늘에 날으던 새가 
선술집 유리창에 흐린 불빛 되어 
끼룩끼룩거린다
낮은 울음이
등 굽은 손수레와 만나 작은 기침되어 흩어지고 
일상이 땀에 전 수입이다
빈 터엔 막일꾼들의 쉰 목소리 
외등을 쫓아 파닥이는 나방
베적삼 풀내에 몰리는 하루살이 떼 
들녘의 벼는 얼마나 익었을까
다들 돌아와 불 켰을까 무어라 정담 나눌까 
북두는 하늘 어디쯤 걸렸을까.
<1983. 8.>




상사화相思花*


새였다가
남도南道 화산花山에 
훨훨훨 날으는
삼생三生의 새였다가 
구름이었다가
가을 한낮에 떨구어 남은
두륜頭輪에 목을 맨 구름이었다가 
네 돌아가는 영산榮山은 
포구浦口 바람에 묻어 온 
빗소리이다가 율미에 아린 
시어머니의 가슴
속 속의 꿈이었다가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꽃이
어서 빠알간 꽃 
이름이었다가.
<1975. 10.>

* 엽화불상견葉花不相見,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서.




여인女人에게

그대 머리의 노란 리본을 꿈꾸는 날이면 
어린 누이의 손끝에 접히운
학鶴을 날리네
물빛 하늘을 헤매다 파묻히어도 
한 번 울음 울지 않는 학처럼 
그대 마르지 않는
눈 속에 그렁한 세월은 
하늘을 닮다
하늘을 닮다
그늘로만 젖어온 이파리의 빛깔로 남았는가 
아득히
한 점 외로움을 에우듯
그대 어느 가을날을 지켜보고 있는가.
<1976. 9.>




주진舟津에서

봄이 갈 때쯤엔
가는 봄만큼 한 사랑을 하라 
빈 나루 주막酒幕에서 만난
물때가 낀 작부酌婦의 웃음처럼 부질없는 것이어도 
네 휩쓸리듯 밀려와
강산江山에 몸 부비며 섰지 않은가 
봄이 갈 때쯤엔
가는 봄만큼 한 사랑을 하라 
흐린 눈으로 감기어 오는
주진 여인女人의 옷자락 같이 바래지는 것이어도 
이름이 흐름에 드리워
세월로 지워져 온 빛깔 아닌가 
봄이 갈 때쯤엔
가는 봄만큼 한 사랑을 하라 
저문 호반湖畔에 풀어놓은
젖은 노랫가락처럼 가슴 애는 것이어도 
사랑하라
만남을 어찌 흐름에 맡길 건가.
<1977. 4.>




무제無題

내 스물 적
팔공八公 그 아마亞痲빛에 잠길랴면 
아포牙浦 강변에 무리져 핀
찔레 보러 나섰다 
내 서른엔
지귀志鬼 되어 보낸 사람 있어 
지례 천변에 홀로 핀
박꽃 보러 나섰다 했다 
내 이제 수초 스칠리우는
흰 돛배 고이 밀리는 호반湖畔에 앉으면 
건네인 잔에 닿은 꽃잎
창랑滄浪에 띄우고 
내 마흔 붙박힐 땅엔 
또 무어라 밤새우며 
어느 산천山川에 핀 
꽃 보러 나가랴.
<1983. 5.>




사랑*

바위가 있고
그 곁에 내가 앉고
하늘이 상수리나무 낙엽으로 내려와 
돌 틈 젖은 그늘을 덮어가다.

* 신승박의 ‘플라토닉 러브’ 차운.




문답問答

왜 그리 술을 마시는가 
산이라든지
강이라든지
풀잎이라든지 꽃잎이라든지 
구름이든
천둥이든
저 억수 같은 비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믐 그 깜깜한 밤이든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1983. 10.>




무적霧笛

다들 잠들어버리고 나면
고향 뒷산 소쩍새 울음으로 울고 있을까 
다들 잠들어버리고 나면
달빛 내려 또렷한 눈썹 목이 가느다란 
긴 머리 바람 쓸어안고 섰을까
다들 잠들어버리고 나면
텃밭 너머 숨찬 손짓으로 오늘도 
감나무 잔가지 창가에 들여다 비추일까 
다들 잠들어버리고 나면
선무당 징소리에 혼이 다 빼앗기고
대 막대 파르르 떨며 불어 꺼진 듯 앉았을까 
다들 잠들어버리고 나면
지금도 옥이 누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까.
<1990년>




곡우穀雨

어느 해 봄에는
길 위에 내리는 비가 있어
몇 남은 벚꽃을 떨어트리다가 
봄을 깊숙이 갈앉혀버렸지
우리가 저마다 오는 것들에 대한 얘기들로 
조금씩 들뜬 곡우의 하오
저무는 길목 술상머리에서 돌아오는 
눈빛은 감겨 있었지
스러지는 것들 위로 태어나는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겨울 우뢰의 먼 기척으로 베풀어져 
생멸의 자리에 와 닿는
여린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지 
몇 남은 꽃잎을 흐트려
표표히 먼 기억들을 깨운 
어느 해 봄에는 비가 내려 
내 지난 이력을 쓰기로 했지.
<1987. 5.>




옛 친구와 나누는 얘기


우리들이
풀 대궁일 꺾어 수 없이 많은 
물레방아를 만들어 찧어 
허기를 달래던 해 늦은 봄엔 
조그맣고 노란 얼굴들이
커다란 보리알로 헛것처럼 보이고
뒷 못엔 하나씩 달이 떨어져 죽곤 했지 
어른들은 서로의 이름만을 베고 누워 
솔잎이나 헤고 더위는
솔밭 머리로만 몰렸지만 
우리들은 한 두레박
먼 저승 같은 우물물을 길러 갈증을 풀면
이 빠진 사발무지로 앞내 피라미를 잡아내고 
가재를 발갛게 구워 먹었지
바람이 아주 근사하게 불면 
출렁이는 벼이삭에
옴삭 달라붙은 메뚜기 잡아 꿰어 
돌아오는 들길이 좋았고
시제 끝나길 기다리면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은 
우리들 헤픈 웃음만큼
가을은 언제나 풍년이었지 
나직하고 동그랗게
초가지붕 같은 눈이 내리는 밤엔
화롯불을 재이고 청포묵을 나누고 
마을을 돌며 오늘밤 기제사를 알리고 
그 때는 그랬었지
지루하고 고달픈 하루라곤 
아예 없었었지.
<1987. 4.>




막차 유감

내일 하루는 피곤하지 말라 
빽빽이 손들고 몸 세우고선 
토요일 막차에 오른 사람들 
실내등 하나 남겨두고
칠흑 침묵으로 빠져드는 
권태로 길든 이목 언저리로 
미끄러지는 낮은 유행가
세상 어느 산 밑에 불 밝히고 
홀로 기다리고 있을 사람 두고 
술 익는 시간을 쫓아만 가던 
중년의 초조
누구일까
아직도 옛 글이나 뒤척이다 
가는 계절에 못내 아파
지등 아래 뜰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곧은 가로수 사이로
야광 표지판은 노랗게 
굽어가라 굽어가라고만 한다.
<1987. 5.>




됴고약

내 아직 화농의 의미를 모른다 
쉽게 잊으며 살아온 세월만큼 
금세 건망의 행보만으로 분주하고
신념이랄 게 없는 물러터진 삶의 소신으로 
자죽자죽 물보라로 저며 오는 회한
비 끝 저 산안개로 피어오르라 두고
억센 몸뚱이로 부딪히던 젊은 날들 잠들게 두고 
암울한 시절의 기억도 거진 잊고
가을 들길을 홀로 걷느니
묵시黙視의 계절 앞에 고개 세우고 선
피멍 든 수수이삭처럼 저렇게 흔들려야만 하는 
지난 밤 술로 엉망이 된 내 의식의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으로 씻겨 줄
그 무엇이 있는가
뼛골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근종 위로 
검은 눈동자처럼 조그맣게 녹여
먼 기억 속의 됴고약을 붙일까 
내 아직 화농의 의미를 모른다.




타조

빈 터 모퉁이에 있었다 
강가에 목 늘어뜨리고 있었다
뭍으로 내린 날로부터 취했을까 무얼 잊었을까 
뒤뚱거리며 한편으로만 맴돌고 있었다 
하늘로의 길을 찾음인가
녹여버린 신화의 한편 아프리카여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라 
원시의 습성을 표적 삼음이다
높이 눈을 들어 손길로부터 벗어남이다 
몸뚱이 그 무게로 땅을 더듬음이다
노역의 등을 내어 보임으로 인고를 얘기하라 
적도의 하늘에서 유폐된
제왕의 이름으로 얘기하라
검은 구름 덮이고 큰 숲이 타오를 때
잊지 말라 사방 십만 리 어느 유역에 머물지라도 
세차게 두드리는 그 빗줄기를 따라 날아오르리라 
하늘로의 삶이나 땅에 머묾이나
함께 하였음이라
쫓기어도 두려워 않는 아이들 곁에 있으리라 
퇴락한 사원의 문루에 기대어 조감하리라.




늦가을 빗속 풍경

늦가을 비가 내린다
창 밖의 하늘은 빗줄기 속에 잠겨 있고 
사람들은 음울한 하루를 가늠만 하고 있다 
민들레 채송화 키 작은 꽃들로
한꺼번에 피어난 이 세상 아이들이 
길게 꼬리를 이어 언덕을 오르고 있다 
제 색깔의 꽃잎으로 옷들 갈아입고
아이들은 혼자서 여럿이서 빗줄기를 뚫고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잎들 떨어트리는 나뭇가지들이 
위쪽이다, 너희들 세상은 위쪽이다
하늘을 향해 맨 몸으로 서서 손짓하고 있다 
조그맣고 가냘픈 풀꽃의 모습으로
섬세한 빛깔 순수의 꿈을 피워 입고
이 세상 아이들이 빗속 하늘을 오르고 있다.




2000년 12월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로들 가는가
침묵하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울역으로 
동숭동으로 흘러가고
제 땅을 떠난 농어민들이 경부고속도로 위로 
새만금간척장으로 달려가고
결단이 난 노동자들은 폐쇄된 공장에서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남북南北의 울음과 한숨 속에 한 해가 저무는 
세모의 거리는 음울과 적막에 쌓이고
벤처며 증권이며 하늘 높이 솟구치던 사람들마저 
제 집 문을 닫아걸고 꼭꼭 숨어들고
이곳으로도 저곳으로도 갈 수 없는 넝마의 사람들은 
밀레니엄의 겨울 지하도 바닥에서 결사決死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라, 국회로 가서 국회의원이 되라 
법원으로 가라, 법복 속에 갇혀 버린 법관이 되라 
쇠머리 나라에서 녹이나 파먹고
신지식인이나 되어 제 밥그릇이나 챙겨라 
진실도 부서져도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했으니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들은 허방 짚듯 걷고만 있었다.

* 김남조 시인의 시 ‘생명’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초상

청량리 역사 조립식 철제 건물엔
아직도 부유하는 구름들만 낮게 드리워 있었다 
머리칼 곤두세운 사내들 낮술을 나누느라 
대합실 한 편을 차지하고 앉았고
늦추위가 기승을 떠는 이월二月 퇴출당한 이들이 
가도 오도 못하는 청량리를 기웃거리고
줄을 서 기다리는 전화박스 앞에서 
나는 벌써 어지럼증에 비틀거리고 
왔다 만나서 술이라 마시자
연초의 계획은 벌써 움츠러들어 
속주머니 속으로 기어들고
어둑할 무렵까지 종로에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하고 
경동시장 약초전이나 과일전을 기웃거리다
커피 한 잔에 삶은 달걀 하나 내어 놓은 
한일다방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여직 살아남은 자들의 무료한 기다림에 쌓인다 
시간 맞춰 문 열고 두리번거리다 손들어 보이는 
생존의 안부와 오랜만의 반가움
시장 골목 뼈다귀 고기 몇 점 떠 있는 
탕 속으로 오십대의 아픔을 풀어 넣어 
함께 빠져들고 우리는 그저
살아남은 만큼의 잦아드는 웃음에 묻혀 가는 
푸석푸석한 청량리 밤을 새운다
2000년 눈 많은 서울의 음울한 풍경들 뒤로 하고 
에잇 돌아가 버리자
소주 몇 잔에 해장국이나 한술 나누고 
잘 살아 있거라 취한 눈으로 석별하고 
나는 그래도 새천년의 흰 눈 속에 
차운 바람과 함께 떠날 것이다
계절을 묶어 두려는 눈 쌓인 역 광장을 지나 
살아남으리라 귀향하고 있었다.




소만小滿 무렵

그녀는 옛적 어느
소도蘇塗의 마을에서 나를 찾아
오월 궁궁이 초록 향내로 찻잔을 두고 
길 건너 그늘로 앉아 있다
길이란 늘 암벽으로 내 삶 속에 가로 놓여 
의식의 타오름을 거부하는 잣대의 높이
먼 순례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는 
이제 겨우 쉰을 넘은 사내 
사랑이란 저물녘
강 건너 마을 같이 아슴히 아려 오는 것 
오늘은 어느 물길을 건너
그에게로 갈까.




소서小暑에 석류꽃 꿈꾸다

먼 산 자줏빛 도라지 
무리로 피게 두고 
울안 석류꽃
붉게 물들라 하는 것은 
내 기다림의 
수런거림에
고대 져버릴까 
상심의 마음 
먼저 일어서이다
저꽃 볕 아래 펼쳐 놓은 
오름으로 솟는 기쁨이면 
어둠은 뒷산 두견의
끊일 듯한 울음 같은 것일까 
석류꽃 피워 두고
장자莊子의 꿈속 헤맴은 
네가 꽃 되어선가
내 나비 되어선가.




첫 가을 입추立秋에 밤길을 걷다

토란잎 위 맑은 이슬 흘려보냈으니
그대 저녁 하늘이 별빛으로 비춰 받았다 하오 
길은 아흔 골 굽이 아득 멀어도
밤 이슥토록 그대 빛남으로 한밤을 걷는 
내 마음 새벽이면 오롯이 피 안에 닿아 
산꽃 들꽃 저만치 달맞이꽃 보느니 
달바라기에 노오란 꽃잎 위
먼 길 헤어온 청순의 이슬 만나느니.




입추立秋의 바람

땅에서의 일들이야
늘상 하늘만이 헤아려 왔느니 
그대 돌아앉아 있음은
상심의 마음 일어서인가 
마주보는 슬픔도
때론 심사의 아름다움이거늘 
입추의 분꽃송이
어지러이 바람 속에 어둠도 
처서이면 까아만
열매 맺혀 빛나지 않던가 
땅에서의 아픈 사람들을
오로지 하늘만이 살펴 다독여 왔느니 
슬픔은 기억에서도 쉬 잊히는 것이다 
입추의 바람이야
수많은 세월의
어느 지평을 스쳐가는 것이던가.




백로白露에 고향 산천을 찾아

그대 사랑으로 있으라
강을 거슬러 구월九月 들길을 걷는다 
고향 수수밭 대궁이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그대 웃고 있느니
우리 만남이 어찌 예사로우랴, 그날 
돌아서던 그대 가을 외투 속으로 사라짐도 
저 강물 이름 모를 새암에서 기약되었듯 
백로白鷺 날아오르는 저 막막 하늘에서 
그대 사랑은 기다려 왔음이라
골을 따라 구월九月 산기슭을 내리다 
억새 한 길 자란 잎새 사이로 보이는 
먼 하늘에 그대 웃음으로 있느니 
우리 만남이 어찌 예사로우랴 
머뭇거려 지레 헤매던 혼란함도
바람 한 줄기 스치듯 한 눈빛에서 비롯되었듯 
풀잎 어른거리는 저 구름 밖에서
그대 사랑으로 머물고 있었음이라 
사랑으로 있으라 그대.




정자가 있는 노을

저리도 아름다울까
붉은 천지天地를 펼치며 다가와 
이끼 덮인 돌담 위
강변의 정자를 휘감은 
저물녘 서녘 하늘의 노을을 
그대 보고 있는가
내 곤고한 일상이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돌아와
마주한 웃음으로 반길 수 있는 시각 
온 몸을 사루는 지는 해의 비장함은 
내 안의 사랑이 나를 비추는
황홀한 거울이라
사랑이 깊어져 커다란 떨림으로 몰려올수록 
나는 가슴에 돌 하나씩 쌓는다
허물어져 흩어지지 말라
붉어서 죄 타버릴 때 내 사랑은 
저만큼 견고한 세월의
돌담 같은 것일까.




한로寒露에 단풍 따라 걷다

단풍이 내 느린 걸음으로 따라와 
황지 못물과 함께 흘러내려 
그대에게로 간다
산협의 숨 가쁜 등성이 위 
하늘은 한로의 빛으로 맑고 차서 
그대 눈빛 머무는 곳에
푸르게 얹혀 있다
인생은 한번의 행보를 위해 
준비되어지는 것
내 가슴에 품고 온 그대 
하얗게 핀 억새 곁에 버려두고 
남도의 하늘 아래 남겨 놓은 
그대 살가운 마음을 읽는다 
사랑아
지는 나뭇잎 선홍으로 물든 그늘에 
피는 들국 청초한 10월 강굽이 길 
저물 내 안으로 흘러 그대에게 닿는가 
갈길 먼 가을 저녁
흰 구름 아득한 곳
내 사랑 어느 무늬의 잎으로 빚을까 
먼 그대.




시詩를 쓰고 난 상강霜降의 아침

저 어둠 속
불빛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그 어둠의 밖
눈어림 산기슭 그대 마을
잠들지 못하는 깊은 밤 내 가슴으로 
시詩를 쓴다
웅웅웅 세찬 바람만 불어쌓고 
그대 사는 마을은 지척
지난 밤 고단한 내 꿈의 언저리 
상강霜降의 서리 내린 새벽 산길을 
꿈길을 가듯 홀로 오른다
마음은 언제나 얽기 잔가지로 설키고 
내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다 
속없이 빛 고운 낙엽만 날려오고.




중앙로를 걸으며

첫 추위의 아침
남도南道의 거리를 걷는다 
플라타너스 잎
이른 햇살 사이로 아직 푸르고 
인환의 무수한 발자국에 퇴색한 
끝없는 보도블록
이 길 걸으면 그대에게로 가는가 
외투의 옷깃 여미고
내 어쩌지 못하는 자학의 모순으로 
눈 시린 청명淸明 하늘을 본다
한 세상을 살아
속 터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일까 
술을 불러 빈속을 태운 혼미함으로 
내 여기 흘러 왔느니
그대 아는가
마지막 가을을 밟아가는 아침의 아픔을 
서툰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댐을 지나며

물을 내려다 본다
강물이 두메 여울을 거쳐 
조용한 즐거움으로 흐를 때는
흰 물결 이는 정겨운 노래를 불렀다 
저 물 강마을 산굽이를 흘러와
내 앞에 멈춰 있다
강물도 저렇게 하릴없이 고여서는 
퍼렇게 속으로 우는가보다
모든 것은 그렇게
제 몫의 흐름이고 싶어 한다 
그대에게의 사랑이 내 가슴에 갇혀 
오늘은 그 깊이로 앓고 있다.




입동立冬의 밤

격자무늬 창살 밖의 날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등 두드리며 살 수는 없을까 
그대 사는 마을을 지나 
입동의 밤, 늦어 돌아온다 
계절은 깊어 아파트의 창틀에
하나씩 외로이 단풍잎을 달았다
빈 벤치에 앉은 내 눈가로 배어오는 
설운 그대의 눈물
먼 아픔에 이리도 그리워짐은
우리 몸 부비지 않고 깊어가는 사랑이어선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내 눈을 씻어줄 그대의 별은 어디 있는가 
입동의 밤은 찬데.




분청粉靑 물고기의 사랑

얼마나 비워내면
그 속 다 채울 수 있을까 
얼마를 채우다 보면
텅 빈 속 헤어날 수 있을까 
분청 물고기 한 마리의 사랑 
차운 유리벽 속에 갇혀
가시 지느러미로 박제되어 버린 
회청빛 애끓는 그리움의 시간들 
앙상히 내 너를 껴안고 있느니 
그대 세월은 비우며 살라.




소설小雪 지나 비 뿌리고

소설 지나 온종일 비가 내린다 
빗속에 어렴풋한 먼 산이 한가롭다 
그대 생각하는 오후의
비 뿌리는 조요로운 시간이면 
오롯이 그대 향해 앉은 산이고 싶다 
고층 아파트 열린 창으로
비에 젖은 바람 한 줄기 불어온다 
초겨울 잎 진 뒷산 상수리나무 사이
듬성듬성 자란 이름 모를 나무 나무들 세며 
그대 이름 불러본다.




겨울나무

바람이 길을 걷는 나를 휘감고 지나가 
미루나무 겨울 가지를 겹겹이 에워쌌다 
바람은 내 허한 가슴을 조여 오고
가지들은 저들끼리 부딪히는 아픔으로 서러웠다 
나무는 끝가지의 떨림을 온몸으로 품다가 
끝내는 웅웅 소리 내며 울었다
사랑도 그렇게
그대 야윈 볼 위의 아픔으로 
설운 눈빛에 종일을 앓다가
내 무딘 가슴을 우려내어 온 밤을 새고 
숨 막히어 주검처럼 서 있는
겨울나무 같은 것 아닐까.




겨울 밤바람

한파 몰려온 하늘로 
바람만 모질게 불어쌓는다
밤 깊어 산마을의 불빛 하나 둘 여려질수록 
더욱 세차게 창 두드려 달려드는
밤바람 소리 가슴에 저미어 두고 
마음 깊은 곳에 잠들게 둔
그대 생각는다 
저 벌판의 바람
먼 산등성이 휘적이듯 넘어와 
이 밤 그대 마을에도 들리는가 
곤히 잠든 꿈결로도 찾아가는가
빈 방을 서성이는 내 지천명知天命의 목마른 
적막 한 마당 속없이 부려놓은
겨울 밤바람.




립스틱


추위 가시지 않은 근교의 아침 
굽이 많은 길 버스 타고 시내 간다 
생각을 모듬하는 시각에 
승강장에서 먼 산을 헤듯 기다리는 
그대 파리한 얼굴을 스쳐 지난다 
그런 것이다 사랑은
기다리고 얼핏 지나치고 그리고 
또 한 고개를 넘는
만나야 할, 먼저 만났어야 할 사람 
세월의 부대낌은 어지럼증으로 몰려오고 
강변에 앉아 끝 모를 흐름을 읽는다
되 흐를 수 있는 역수의 땅은 어딜까 
겨울 찬 물 속에 손 담그고
새움 초록 잎새를 만져 본다
그대 엷은 미소 위로 붉게 입술 그려가듯 
손금으로 그려 놓은 우리 물결 같은 언약.




정축년丁丑年 동지冬至날

소설 대설 다 지나고
양지볕 아래 아이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산모퉁이 아파트 걸어내려
바람 불어 추운 날
그대 만나러 길 나서는 나는 
소년처럼 가슴 설레인다 
하늘은 맵고 차서 눈 시리고
거리마다 옷깃 세워 서성이는 사람들 
흐름이 얼어붙은 정축년 동짓달 
근심들 속불 타듯 태우는 날도
그대 눈빛으로 건네는 사랑의 말 들으면 
나는 세월 잊은 소년이 되고 만다.




그대에게 있어 나는 무엇인가

그대에게 있어 나는 무엇인가 
세모의 거리에서
마음만 아득하여 헤매다
찬 바람 속 겨울 한가운데를 걸어 돌아오는 
매 허허로움의 취기 속에
어떤 모습으로 실재하는가 
우리 안고 궁구는 입맞춤도
손 맞잡아 노래 한 마디 부를 수 없는 
그대 가장자리만을 맴도는
허상의 그림자의 그림자인가 
불멸의 밤 뒤척이다 지새는 
나에게 있어 그대는 무엇인가
쿵쿵 큰 걸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날 있을까.




추상이 된 사랑

삶은 의외의 단순함이라 한다
꽃 피고 열매 맺혀 무르익고 떨어지는 
한 생애 그러하면 내 사랑은
톱날에 잘려난 과목의 
추상의 모습 같은 것일까
연일 짙은 안개 속에 안과 밖이 에워싸여 
그리움 차단당한 외곬수의 나무
가지 전부를 잘리고서야
제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어둠 속 눈 비 맞고 선 은행나무 가로수 
얼마를 더 떨워내야 하나
겨울 한길가의 내 추상이 된 사랑아.




우렁각시

그대 우렁각시로 오라
나 오늘도 길 건너 들길 한참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저녁 어스름에 돌아오리니 
그대 우렁각시로 내게 오라.




우리 닮는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은 서로를 닮는구나 
돌아오는 길 초췌한 그대 생각하면 
눈물 난다
사람은 지순의 아름다움만으로 
서로를 닮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쳐 버리는 베풂의 어긋남으로 
왼 밤 끝 모를 그리움의 새김질로 
아픔의 마음 먼저 가버리고
내 가슴 텅 비어버리는 새벽이면 
몽롱한 의식으로 길 위에 서는 
우리 만남의 고리 맺음은 
어디서부터이며 사랑을
필연으로 엮어 애타게 눈빛 찾게 하는가 
야윈 그대 눈자위로 젖어드는 나를 본다.




까치 빈 둥지

저 상수리나무
까치 빈 둥지만 안고 서 있다 
하늘은 하릴없이 푸르고
바람만 일없이 끝가지로 불어오른다 
새들도 그렇게 떠났을까
저 푸른 심연에 몸 던져 올렸을까 
이제 떠나고 돌아옴이 없는 
흔적의 빈 둥지
언제인가 사랑도 허허로움으로 
저렇게 남겨질까
무심의 상수리나무 빈 가지에 매달려 
저리 외로울까.




고전의 사랑

그대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사랑이 죽음일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고전의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예대로 자라고 
하늘을 맴돌던 그 바람 한 줄기까지 
언덕 위 옛 집을 잊은 적 없이 다녀가는
낯익은 풍경으로 있는 오솔길을 걷고 싶다 
눈빛 세워 이 악다물고 외길만을 걷는 
사람들의 분주한 물결 속을 오늘도 
휩쓸리듯 휘적이며 흐른다
겹겹 인파를 헤쳐 흐름의 끝 
먼 길 그대에게로 가는
고전의 난로에 물 끓여 등 기대앉은 
사랑아 오늘은 시詩의 순수로 반겨오라.




세월 다 지나고 나면

참으로 먼 날을 헤매어 그대 찾았음에 
그대 저만치 고즈넉 앉았기만 하고 
산도 물도 붉게 물든
저녁 강변의 노을 속을 걷는 
내 구중궁궐 전생의
첫날 밤 그 기억들 캐려는
수줍은 소년으로 서서 
장엄한 일몰의
황혼에 취해 노래 부른다
세월 다 지나면 우리 다시 만날까 
그대 무릎 베고 누워 한 소절
옛 노래 들을 수 있을까 
우리 세월 다 지나고 나면.




내 마음 속의 새

내 창을 열면
십 리 날개를 펼쳐 
산처럼 앉은
새 한 마리 있다
몇 겁을 그러했듯 사람의 뒤척임을 
그렇게 버려두고
죽음 앞서 한 번 울음 운다는 
애련의 절창 가슴 깊이 재워 두고 
미동도 않은 묵시의 자세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 
어느 세월의 매듭을 풀어 
청천 비상의 날을 맞을까 
내 창을 열면
십 리 날개를 펼치어
이제는 사랑의 인고로 산이 되어버린 
마음속의 새 한 마리 있다.




저 종소리

산사山寺의 종소리 울린다 
내 가슴의 떨림으로 새겨져
그대 고운 눈빛으로 피어나는 
우리 애틋한 사랑의 숙명
끝 모를 그리움으로 일렁이는 
저 종소리 울린다
천 년의 종소리 듣는다 
내 사랑의 굽이를 에돌아
저기 저 산허리를 휘어 넘는 
안타까이 그리움을 두드려
우리 전생의 사랑으로 녹여지는 
저 종소리 듣는다.




무서리


서리는 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내린다 
산골 교회의 낮은 첨탑의
분교 교정의 사철나무 화단 가로 
개울 돌다리 건너 다락논을 지나
도라지 밭 골막이 노승의 암자 뜨락에도 
저 푸른 소나무 숲에도 내린다
그대 마음의 한적한 뒤뜰에도 
간밤에 무서리 내렸는가.




견우직녀

천 년을 사는 아이 하나 만들라 
십이만 근 청동을 녹여
무인년 칠월칠석날 밤
오작교 다리 위에 우리 얼싸안고 
듬직하니 범을 닮은
동자 하나 만들자
남과 북, 이승과 저승, 지옥과 극락 
전생과 현생을 두루 아우르며
녹슨 어미는 잠 깨어 일어나시라 
포효하는
청동 아이 하나 만들라.




겨울 강가에서

강은 장마 뒤끝 나무들 빼곡한 
여름 산기슭으로부터 내렸다
강은 풀잎 한빛으로 지쳐버린 시절의 
무료한 들녘으로부터 흘렀다
눈 내려 갈대 서걱이는 
황량한 겨울 강가에서
해 저물도록 그대 기다린다
저 강 흐르고 내림이 미망 같은 것이거나 
우리 머무르고 씻김이 애증 같은 것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얼음장으로 나눌 수 있으랴 
종일을 흰 눈발 안고 얼어붙은 
그대 가슴 속으로 흐르리라 
흘러서 함께 바다로 가리라
가서 폭풍우 속 거친 파도에 뒤엉켜 
잠들리라.




천연天緣

그대 만나기 전 내 그대 만났듯이 
나 만나기 전 그대 나 만났으니 
천연이 어디 한 번만의 것일까
나 떠나보낸 뒤의 숱한 날의 한들로 
그대 찾아 헤매던 회오의 눈물로 
전생을 이어 현생에 이르렀으니 
우리 다시 만남을 무어라 하는가 
사랑은 밤하늘의 별처럼 있고
별의 무덤은 물처럼 흘렀다 하는가 
그대 내 홀로 걷는 발자국 밟고 
별빛 고운 날 밤길을 가라.




개망초꽃

애비 못된 애비 어미 못된 어미 말고 
죽어 꽃이 되라
굳이 아름다운 꽃은 말고 
허허벌판 끼리끼리 피어 있는 
개망초꽃이나 되라.




밤 기차

사랑한다는 것은 눈물겹다 
낮과 밤, 가까이도 멀리서도 
내 가슴 속 하나씩 비워내는 
텅 비어져 버리는
그럴수록 채워져 오는 그대 
사랑하는 것이 두렵다
차창에 달라붙는 눈을 털어내듯 
밤 기차가 되어
자꾸만 어디로 가야 하나.




그대 떠나고

그대 떠나고 내 못 산다 
추적추적 겨울비 뿌리는 
외진 주막에서
주모 흥얼흥얼 노래한다
한 달여 흐리고 비 또는 눈뿐인 계절에 
눈빛만으로 아픔을 다독여 오던
설운 사랑은 떠났다
내게서 떠나 제 곳으로 돌아간 것이거늘
하늘 한 편이 기울고 빗길의 불빛 흐느적이는 
취기의 길 위에서 헤매다
가로수에 매달려 와와 고함지르는 
겨울바람과 어울려 휩쓸린다
시도 사랑도 한 곳으로 몰려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곳은 없다 
그대 떠났으니
막막한 길 나도 떠나리라.




언양을 지나며

매 시선이 머문 자리
언양 지나 벼 벤 들녘으로 
갈가마귀 떼 모여 앉았다 
포롱포롱 날며
제 짝을 찾아 사랑하다가 
훌쩍 창공을 날아 떠나버렸다
슬픔이 끝도 없이 푸른 
하늘에 닿아 있다는 것을 
여직 몰랐다
눈물 한 방울로
내 가슴에 채워져 있었나보다 
오늘은 아픔으로 녹아내려 
차창에 어린다.




우수雨水의 매화

매화 난분분하다 
바람은 잔설 위로 불고 
옛 집은 인적 없다
무너진 토담 한 켠 늙은 매화나무 
올해도 꽃을 피웠다
지친 세월의 흔적 따라
나 오늘 찾아와 멈춰 섰다 
떠나간 것들이 사람들만인가
퇴락한 고가古家 잊혀진 역사 앞에 
떨어진 매화 꽃잎을 헨다
우리 이 길로 돌아올 날은 아득하고 
상심의 일상을 불면으로 새우는 
오늘은 잊을 것인가
우수의 바람은 차고 내일도 
매화 어지러이 날릴 것이다.




도계道界를 지나며

봄 강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하얗게 입김을 내 뿜는다
이른 아침 햇살이
상록 침엽수 위로 쏟아진다 
눈부신 칼날로 번득이며 내린다 
봄 옷을 기우려는가
헐벗은 산천에 무명 한 조각 
산 벚꽃 떨기로 뽀오얗다 
가도가도 남루한 심사
도계道界를 지나 남南으로 간다.




사랑 하나

그대 내 잠결에 찾아와 웃는다 그
리고 내 꿈속에 누워 잠들었다 
나는 이렇듯 떠나 있고
그대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가질 수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무어 어려우랴
가질 수 없는 것 하나 
그것을 사랑한다.




찔레

오월 지천地天에 풀어놓은 
옛 유행가 한 자락 
찔레꽃이 피어 있네 
고향에 묻은 꿈속의 날 
잘 있소 잘 가오
눈물로 헤어지던 날 
그대는 대답 없고
구슬픈 산울림만 울려주나 
그 때 피어 있던
찔레꽃이 피어 있네 
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89년>




도라지꽃 소묘素描

함께 모여 뜀뛰며 재잘대던 동무들 
돌아간 고즈넉한 저녁
홀로 풀피리 불며 오던 늦가을 강마을
하얀 머리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 얘기 박꽃 이어 피듯한 달밤 
칼날이 피를 내며 흐르는 
꿈속은 순교의 자리
횟배를 앓고 횟배를 앓고
어린 날 아침 올려다 본 
비릿한 하늘 어울던 구름 
얼레빗을 부는
박지에 퉁겨 되울리는 울음 
무섭고 여리던 날
예닐곱 무렵에 잊은 기억들.
<1989. 7.>




현안

달이 뜨고
동굴 긴 십 년을 기다려 온 사람들이 말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달이 또 그렇게 기운 후에 
사람들은 물 먹은 목으로 말했다 
일흔에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보아야겠다.
<1990년>




주벽酒癖


취하는 밤이면
나는 왜 역驛을 찾는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떠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있는가 
나란히 그리고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쇳덩이와 녹과 기름에 젖은 흙과 
불꽃 번쩍이는 실존의 확인 때문인가 
귓속으로 울려오는
기적이 있는 밤풍경 때문인가 
만날 수 없는
벗들의 얼굴 때문인가 
묻혀져 버린
어떤 날의 의식 때문인가.
<1986. 4. 22.>




파랑새

주렴珠簾을 걷듯 
환히 길로나 트면 
반쯤
바다 걸린 곳으로 
치솟아 오를까 
동남東南쪽
야산野山에다 
집을 모을까
날아도 날아도 갈 곳을 모르는 
아흔 골
내쳐 살던 파랑새
네四 귀에
쳐져 내린 하늘에다 
부리를 두고
가슴이 닫힌 벙어리 
울음으로 채색彩色한 
응사凝思인가
애초에 누가 
파랑
새라 불러 
온 하루 
날개를
쫓고 앉았나.
<1972년>




소요기逍遙記

원형으로부터 일탈된 날로부터 
다면체에 사는 사람들은 
구토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1985. 6.>



을숙도乙叔島

새가 되어
을숙乙叔 갈밭에 뿌려 놓고 
새가 되어
날아오를 순 없는가 
돌이 되어
골 깊은 산편에서 쓸려온 
돌이 되어
잠길 순 없는가 
하늘이 바다를 불러 
바다가 하늘을 불러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바다를 보고 있으면
바다보다 더 커다란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바다가 되고 만다.
<1977. 12.>




광녀狂女

도산호陶山湖 기슭에 피는 
삼동三冬의 꽃이 있어 
옛적엔 낭랑히
긴 긴 목을 돋우고
낙강洛江 흐름으로 가득한 이제 
탈판에 술렁이는
바람 되어 신목 되리라 
도산호陶山湖 아흔 굽이 
어느 양달에
지는 해 그 아쉬움만한 
꽃잎 떨굴까.
<1983. 9.>




헬리 혜성

바야흐로 
일천구백팔십육 년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벼랑으로 자반 뒤집는 사람들은 
바다로 산등성이로 헬리를 따라가고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찢어지고 부서지는 거리에서 
40년 잊혀지지 않는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라 한다 
헬리는 무수한 얼음덩이의 냉기로
70여 년 먼 기억 속의 궤도를 따라
조금은 불만스레 병인丙寅의 하늘을 달려와 
우리들 일상 모여 있는
한길에서 바닷가 목로에서 산정에서 
깊고 깊은 정반正反의 금을 그어 놓고 
영악한 의식의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사카린 녹여 든 뱃속에 출렁이는 해를 담고 
물 사발 맨 밑자리에 음식들을 나눠 들고 
폐허의 사람들을 걱정하던 아이들의 아이들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뛰어 놀던
모퉁이 돌아 빈 터에서나
길 건너 광장에서 조심스레 술렁이다 
헬리를 따라 가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야흐로 일천구백팔십육 년이다. <1986년>






제 3 부   시 인 이   쓴   산 문


* 여기에 실린 산문 5편은 시인이 안동에서 발행되는 잡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에  ‘시인 한생 씨의 외출’이란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다.




운상대에 머문 발길

  세상 어느 곳에 옛 중국의 전국시대 유학을 일으킨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인 노와 추의 국명이 한데 어우러져 지명화한 땅이 있다. 한때 골골이며 더하여 저잣거리에까지 성현의 학문이 유풍으로 휩쓸어 말들 하길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높여 부르며 누대로 사람들은 대단한 긍지 속에 살고들 있었다.
  그 곳 추로지향의 하늘이며 산과 강, 들녘에도 깊게 깔리는 안개처럼 가을이 몰려 들어왔다.
문민시대(김영삼 정권을 그렇게 부른다)에 한생韓生은 시끌시끌한 시가에서 밀려나 산자락에 움을 튼 지도 벌써 이태를 넘겼다.
  창을 열면 어떻게 된 건지 산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정물의 산과 숲은 늘 곁에 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쓸리면 사람들은 회상에 젖고 반복되는 무료함에 책을 구해 읽곤 한다. 갑신정변기.
  외세가 임오군란에 개입하여 정치 및 경제적인 이권을 위해 날뛸수록 왕조와 척족들은 사대적이며 보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개화를 주도하며 일본의 근대 문물을 두루 돌아보아온 개화파는 민씨 정권의 보수적 정책 전환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일본의 지원 속에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 21년(1884) 반기를 든 개화파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수구파의 민태호, 조영하 등 요인을 암살하고 ‘문벌폐지’, ‘사민평등’, ‘관제, 세제개혁’ 등의 법령을 발표하고 혁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개화당 역시 일본의 지원 거부의 배신으로 홍영식 등이 피살되고 요인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역사는 이를 3일 천하의 갑신정변이라 한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 했다. 그러면 갑신년의 정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추로지향의 안개 짙게 낀 가을날같이 모호하기만 한가.
  하늘이 높다. 그 빛깔처럼 가을이 깊었다. 가을 산길을 여직 따가운 볕을 받으며 오른다. 바람에 내어 맡긴 억새밭 공동묘지 사잇길로 드문 드문 비석들이 서 있다. 안동김공○○지묘, 얇은 빗돌 옆면엔 연락처가 또렷하다. 대구시 신천동 ×××번지 ○○○. 한두 기 이장의 흔적들이 보인다. 산들이 깎이고 있다. 아니 세상이 헐리고 있다. 지방도시의 인구는 해마다 줄어든다는데 살 집은 늘 부족하여 경지와 야산 가릴 것 없이 택지를 늘인다. 경제적 발전인가 우리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인가. 
  시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층아파트의 어지러움 속에도 널따란 강폭이 시원스럽다. 옛 기억이 새삼스러워 눈을 멀리 둔다. 처음 몸 둔 곳 옥정동이 어디쯤일까, 넓고 짙은 잎 플라타너스 가로의 숲이 있던 역 앞 큰길, 아, 그렇지 군청 뒤꼍에도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있었지. 눈앞에 태화봉이 보인다. 철제 소방 망루엔 온종일 시가를 내려다보는 제복의 소방원이 앉아 있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산등성이를 오르는 길엔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제법 숲을 이룬다. 보안림이라던가. 한 이십 년생쯤 됐을까. 밑둥으로 무릇풀들이 어지러이 지천이다. 
  산 아래로 모교 중학 교정이 보인다. 옛 방송국의 자리 뒤편. 이중환의 택리지엔 성내 부녀자들의 음풍이 심해 뽕밭을 가꾸었다는 사연 많은 들녘. 이 어디쯤 태화정이 있었지. 아니 서악사로 가자. 산길을 바꾼다. 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산은 적막하다. 키 큰 상수리나무 사이로 볕이 비낀 산길을 초로의 남자가 호미를 들고 올라온다. ‘어딜 가십니까?’ ‘심심해 저기 밭을 일궈 놨더니’ 곁을 지나간다. 이골 저골 제법 편편한 곳엔 밭을 일구어 들깨며 고구마, 고추, 비탈로 호박을 심었다. 가을 가뭄에 뻗어나지 못한 줄기가 말 아니다. 노인은 그저 무료했을 게다. 낙동강 칠백리의 본류. 삼산 이수의 땅. 유독 교각이 많은 넓은 강. 골 한편에 서악사가 조용히 자리했다.
  푸른 대숲이 길을 막고 섰다. 사람이 다녔을까. 아카시아 가지를 잘라 엮어 놓았다. 틈을 헤쳐 서악사 경내로 들어섰다. 인적이 없는 도량 좌편엔 잡동사니 사이로 목어가 먼지에 쌓여 매달려 있고 들보 위로 중수기 현판은 한 귀퉁이가 썩어 부스러지고 있다. 세태인가. 사찰은 오밀조밀하게 기물을 늘어놓아, 한적하여 여유로웠던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 다큐멘터리 속 일본의 사찰을 닮아 간다.
  사이 숲을 헤쳐 관왕루를 찾는다. 기억 속엔 석조 인왕상이 마주했었는데 어딜 갔을까. 누각에 오르는 층계는 위로 굳게 잠겼다.
  토담의 관왕묘 입구에 인왕상이 옮겨져 있었다. 문을 지나 한 칸, 세 칸 낮은 와가는 옛 모습인데 “계십니까 계십니까?” 기척이 없다. 한 길 높이의 관왕 사당을 둘러본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밀어본다. 퉁퉁한 관왕의 모습이 어두움에 붉고 푸른 천들 늘어뜨린 사이로 촛불에 비춰 앉아 있다. 전형적인 중국인들의 인물상이다. 문밖의 밝음 때문일까. 한기가 몰려온다. 귀기의 엄습같이 서늘하다. 관왕의 비장한 최후가 역사의 회한으로 묻어 내린 때문일까. 관왕의 영정이 걸려있고 오른편 구석지에 건립비가 시멘트 좌대 위에 얹혀 있다. 촉나라의 하동사람 관운장이 왜 이렇게 추로지향의 땅에 모셔져 있는가. 영웅의 혼은 그리하여 위대한 것인가. 하오의 관왕묘를 나왔다.
  밝은 가을 하늘이 낯설고 눈부시다. 뜰에 초라히 핀 늦은 무궁화 한 송이를 바라보며 사당의 층계를 내린다. 오를 때 보지 못한 한 칸 와가의 낮은 들보 위에 걸려있는 전서체의 편액 한 점. ‘운상대雲上臺’.
  예계미濊癸未 여흥驢興 민태호閔台鎬 관서盥書, 제자리일 것 같지 않은 단아한 서체를 마루에 올라 올려다본다.
  갑신정변 때의 척족 민태호의 글씨가 어떻게 관왕묘의 와가에 걸려 있게 되었을까. 운상대가 한 칸 와가의 초라한 건물이었던가. 밤길을 걸어 갑신정변과 민태호와 운상대와 계미년을 뇌며 돌아왔다. 연보를 펼친다.
  민태호閔台鎬(1834(순조 34)~1884(고종 21)), 조선시대의 척신. 자 경평景平. 호 표정杓庭 시호 문충文忠. 본관 여흥. 영익泳翊의 부父, 영환泳煥의 입적부父. 문과 급제.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 대제학 등을 지냄. 왕가의 외척으로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 1884년 갑신정변 때 살해 됨. 글씨에 능하여 전서, 예서, 행서, 초서 모두 잘 씀. 영의정에 추증.
  향년 51세에 그는 왕가의 척신으로 수구파의 맹주로서 암살당하였다. 운상대의 편액을 관서한 계미년은 1883년 갑신정변의 바로 전해. 대제학의 품계로 관왕묘 아래 전서 한 점을 남겼다.
  밤늦게 경기도 이천의 지족암으로부터 한 통 전화를 받았다. “혜봉인데 한번 다녀가라.”
  “그러지, 내일 그래 모래쯤.”
  전화가 끊이고, 갑신정변. 운상대. 민태호. 경기도 이천의 지족암-. 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산기슭에도 여느 때처럼 가을밤이 깊어갔다.

<사랑방 안동 1995년 1·2월호>




군자정에서 떠올리는 왜곡된 역사

  젊은 시절 한생은 낙동강의 긴 제방을 걸어 한나절을 보내곤 했던 날이 있었다.
  흰 눈발이 칼날처럼 비껴 나르는 문화재 보수 한창이던 임청각을 지나쳐 법흥 7층 전탑을 돌아 나와 중앙선 철길 한편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강과 모래와 다리를 내려다보며 아스라한 날의 드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말발굽 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도심의 술청으로 난전으로 수몰의 풍문이 돌고 강마을을 뒤지는 화투꾼들의 농간에 보상금을 거덜 내어 파산한 이농민들이 힘없이 어깨 늘어뜨려 떠나는 역 앞 목로에 문우들 여럿 어울려 술잔을 건네다 향토를 지키겠다는 문인다운 오기들이 젊음과 뒤얽혀 수몰지역 답사 계획을 세우고 8월 무덥던 날 배낭 울러 메고 진모래 어귀로 걸어 들어갔었다.

  문우들과 함께한 수몰지역 답사
  지금은 댐의 웅장함에 묻혀버린 수장된 고인돌 군락이며 드럼통을 세워놓고 칡줄기를 삶아 갈포 쪄내던 산협의 좁은 길을 지나 도곡 마을 동구에 닿고 벼가 춤추듯 일렁이는 건듯건듯 부는 바람기에 둘러앉아 땀을 훔칠 때쯤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몰리고 천둥 번개 치며 후두 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숙박지를 정하지 못하고 떠나온 일행은 빗속을 뛰어 산 밑 개울가 낮은 촌가에 들어 수인사를 건네고 하룻밤 숙박을 청했다. 흔쾌히 웃음으로 우리를 맞은 30대 후반의 눈빛이 깊고 깡마른 체구의 소탈한 이철증 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저 유명한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임시정부 태동기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남겨진 혈손과 소나기 쏟아지는 들녘을 내려다보며 사랑에서 저녁을 끝내고, 일행은 사들고 간 소주 됫병을 끌러놓고 술과 얘기로 빗속의 한여름밤을 풀어갔다. 일제치하와 전란의 와중에 폐허가 된 임청각을 두고 도곡으로 옮겨온 얘기에 모두들 비감해 했고 누대로 내려온 수천 점의 희귀본 서책들을 조지훈 선생의 청을 받아들여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에 석주문고石洲文庫를 열어 기증한 일에는 탁견이라 치하하고 아흔 아홉 간이나 되던 임청각의 규모와 솟을대문 옆에 서 있던 나무(현재 안동댐 도로 입구 중앙의 신목)와 집터에 얽힌 전설 같은 명문가의 한 옛날 얘기들이 무르익는 풍성함에 줄기차던 소나기도 멎고 하늘 중천의 별들마저 밝게 빛났다. 비 끝에 싱그러운 풀내음도 마다하고 천하의 주호를 자처한 한생도 거나하게 취해 술 속에 빠져들어 잠들어버렸다.
  일행은 그렇게 해서 내방가사의 보고인 절강마을과 고막이 할매와 돌미륵과 동수나무 서 있던 마동을 지나 배나들 주진 봉수대를 찾고, 반남 박씨 영가 종택에서 조선조 명현들의 서간첩을 살펴보는 소중한 일과들로 수몰지 답사의 한 행보를 끝냈었다.
  한생은 종종 깨끗하게 보수된 임청각에 돌아온 이철증 씨 댁을 찾아가 군자정 층계며 마루에 앉아 못물 내려다보며 마지막 왕조와 한 시대의 반목과 갈등, 역사와 민족의 미래를 화제에 올려 젊은 날의 한 때를 소일했었다.
  한생은 어느 날 위 수술을 끝내고 퇴원해서 초췌한 이 선생을 찾아가 만났고, 그다음 해 가을인가 다시 술을 마신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지금은 산사에 묻혀버린 문우와 술병 나란히 흔들어가며 강변길을 따라 갔었다. 임청각엔 조등이 걸려있고 한생은 가져간 술을 빈소에 돌리고 위패 앞에서 두 사람은 취토록 마셨다. 역사 앞에 무관심한 민족과 편협한 이념의 굴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한 시대의 고뇌를 끌어안고 살아온 이철증 씨와의 만남이 그러했듯 헤어짐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역사에 있어 시대의 변천은 때로 삼류 추리소설 속의 어설픈 반전처럼 치졸할 때가 있다. 작금의 화면 속의 사극에서 방영되는 역사의 왜곡을 재구성해 가는 이 시대는 분명 부끄러움 하나 없이 제 밑 들어 남 보이는 식의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 시대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죄지음은 후손의 번성과 가문의 높낮이에 의해 진실이 묻혀버릴 수 없음을 우리는 떠들며 성토하지 않음에도 익히 살펴 알고들 있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올바른 반성이 절실한 때
  경오년 가을,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실명화하지 않던 석주 선생은 외롭고 곤고했던 만주 벌판의 무덤에서 임정요인 몇 위와 함께 혈손 창수에 인도되어 환국하셨다. 언론은 일제히 묻혀졌던 북만에서의 항일과 북로군 정서며 임정의 활약상을 지면과 화면을 할애하여 재조명했다. 빈소 군자 정엔 흠모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유림에서 말없이 환국한 고인을 맞이했고 지역 시민회관에서는 엄숙히 석주 선생의 크고 위대한 업적을 기렸다.
  역사 앞에서 진정한 용기를 가짐으로써 현명히 대처한 사람은 많지 않다. 저물녘 임청각 군자정에 오르면 북만주의 벌판을 말 달리던 선구자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암울했던 시대의 역사를 두 어깨에 걸메고 우뚝 선 석주 이상룡 선생이 그 곳에 늠름히 계신다.
  병자년 연초의 눈발 휘날리던 날 한생은 상전벽해의 강변을 따라 임청각을 찾아 군자정에 올랐다. 무게 실린 마룻대며 가지런히 서까래 질러놓은 들보 위, 명현들의 편액 사이의 한 편 시편을 찾아 읽는다. 청렴결백하며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부자 함께 순국한 문무 겸전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한시 한 편.

  제시불용지명성題詩不用知名姓 
  과거천태하계진過去天台賀季眞

  제봉 고경명의 임청각 시 중 결구結句 시를 지음에 내 이름자 쓰지 않음은 옛 은자의 산에서 참 사람을 만나려 함이네.
  창량의 맑은 물은 맑은 물끼리의 만남으로 흐르는 것일까. 멀리 육사의 시비는 광야에 아득하고 말발굽 소리 여직 들리고,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강굽이의 수문에서 솟아오르는 포말의 물을 바라본다.
  한생은 스스로 묻는다.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푸른 물끼리 만나 푸르게 흐를 것인가, 맴을 돌며 머무를 것인가, 썩혀진 뻘흙을 만나 흙탕을 이룰 것인가.
<사랑방 안동 1995년 3·4월호>




개나리와 사향가

  봄이다. 뜰에도, 울타리를 넘어 밭둑에도 샛강 둑방을 따라 오르는 노오란 봄빛이 보조댐 산 중턱에 가서 멎었다. 봄은 역시 노란 개나리 꽃잎이 펴야 우리들 곁에 다다른 것 같다.
  한생은 사월 나른한 봄빛을 바라기 하며, 걸으며 무리져 흥겹게들 핀 노오란 꽃들을 본다.
  누구의 작품인진 기억나지 않지만 ‘황색 시인’이란 단편이 있다. 말 로 옮겨 노오랗다는 것만으로도 환장을 한다는 시인의 얘기다. 황색이 야말로 원초적이며 종말적인가 하면 빛의 중용이며 꿈이고 희망이라는 작가의 문맥 가득한 설득에 수긍을 한 적이 있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인가 하면, 봄은 개나리 노오란 그 빛깔이다. 개나리는 ‘Forsythia Koreana’라는 학명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가 원산지이다.
  어린 개구장이들이 갓 입학할 무렵의 콧물 흘려가며 뛰어 놀던 운동장에서 즐겨 불렀던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동요가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서툰 줄을 짓고 팔 높이 흔들어 가며 입을 모아 부르던 노래는 찍어 놓은 듯한 햇병아리들 그들 또래들만의 노래다. 개나리꽃 울타리 사이로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병아리들, 노오란 빛들의 움직임. ‘나리 나리 개나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권태호 선생에 의해 작곡되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전인미답의 본격 성악가의 길을 택한 선생은 안동이 낳은 또 한 분의 선각자이다.
  우리는 지면을 통해 알고 있다. 간단치만 않은 선생의 평생 행장과 암울한 시대에도 낙관적이었고 살벌한 동족의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고 해방과 폐허의 나라에서 돋아난 새싹들에게 불리어질 밝고 힘찬 노래를 만들어 줄 수 있었던 인간적인 넓이와 노오란 빛과의 만남은 선생 말년의 애주가로서의 수많은 일화들과 함께 어울림 자 체가 한 편의 멋진 황색 앙상블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생은 떠나 있을 때나 이곳에서나 벗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 부를 때가 있다. 그렇다. 노래란 절로 제 흥에 겨워 불리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슬플 때의 비감함에서나 지루하고 반복되는 노동과 무료한 일상에 묻혔을 때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언제인가 지역의 방송국에서 안동인들이 즐겨 부르며 사랑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로 했었던 것 같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취지에 결과가 어떠할까 우려의 마음으로 걱정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노래들이 흔히 그러했듯 부르라 해서 불리어지는, 관 주도의 국민가요처럼 마음과 마음의 교류 없는 답답함이 또 어디에 달리 있을까.

  절실한 마음의 노래, 사향가
  그럴 때쯤일까. 세모의 술렁이는 거리에서 돌아와 무심코 켠 TV 화면에서 「대구 음악 100년」을 조명하며, 그 중 한 분 권태호 선생의 음악 연보를 화면으로 정리한 적이 있었다. 한말에 태어나 동경 유학시절과 성악가로서의 서울과 동경에서의 극찬을 받은 발표회, 귀국 후 평양의 교직 생활과 대구와 경주에서의 문인들과의 어울림.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의 편린들 속에 뜻밖의 육성을 들은 일이다. 그저 육성이 아니라, 무겁게 가슴 짓눌러 오는 자작 노래였다.
  주석에서일까. 아니면 쇠약해진 끝에 자탄으로 부르는 최후의 노래 같은 것이었을까. 낮고 쉰 듯한 음성으로 아픔이 가슴 속 깊이 전해오는, 시인에게 절명시가 있듯 그것은 성악가로서의 선생의 일생이 농축되어진 절명가 그것 아니었을까. 고향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삶 을 돌아보는 마음, 사향가思鄕歌는 바로 그러한 절실한 마음의 노래였다.
  한생은 한동안 악보를 구해야겠구나 하면서도 유독 추웠다는 을해년 겨울을 서성이며 웅크리며 보냈다. 우리가 해동의 기운을 바람으로 느끼듯 봄은 또 빛깔의 변화에 의해 확인하게 된다. 되살아나는 빛들에 의해 굳게만 보였던 계절이 풀려가고 뿌리 저 밑에서 끌어 올려진 수액으로 꽃도 잎도 피고 돋는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한다. 변화를 재촉하고 개혁을 소리 높이지 않아도 새롭고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함은 그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이 오듯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튼튼한 뿌리 있음으로 해서 꽃이 새롭고 잎 또한 새로운 것이리라. 우리가 역사 앞에서 갖는 마음가짐 역시 그러한 것 아닐까.
  한생은 개나리꽃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벌써 무더운 분지의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여러 곳에 전화를 넣고, 매일신문의 이태수 시인으로부터 대구방송의 편성국장을 소개받고 수성 들판이었던 두산동 TBC 사옥을 찾았다. ‘대구 음악 100년’을 제작한 팀장 이문정 PD를 만나 보관 필름을 돌려가며 찾는다. 잊혀진 노래 ‘사향가’는 둘째 편 속에 절반쯤만 편집되어 있고, 다시 취재 필름을 훑어 ‘사향가’의 악보를 확대해 본다.
  “옮겨 적을 수 있겠어요?”
  “그러시지 말고 악보를 돌려 드렸으니 아드님께 연락해 보시지요.” 학교(대구 신학교)로 댁으로 통화를 했으나 출타 중이시다. 집으로 찾아 가야겠다며, 안동 사람들이 다시 찾아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만들겠다는 내게 이 차장은 따라나오며 그랬었다. 너무 슬프지 않느냐고­. 아닐 게다. 우리 민족이 원래 아픔과 한엔 무섭도록 익숙하지 않은가. 아리랑을 지난날 혹한의 북만 벌판과 백두산 속에서 독립군가로 비애를 새기며 부르던 민족이 아닌가.
  한생은 저녁 시간을 맞추어 효목동 언저리를 걸어가며 둘째 아드님 권영완 교수께 전화를 드렸다. 지금 급한 외출 약속이 있다면서 안동의 주소를 묻고 부쳐주겠다 했다.
  그러한 사연들로 사향가의 악보는 한생의 손에 들려졌다. 이제 우리 선생을 기억하자. 그리고 잊혀졌던 노래를 부르자.

<사랑방 안동 1999년 5·6월호>




청자 유감

  우리가 지극히 가까이 하였으면서도 쉽게 잊어버린 것들이 빗장의 세월 여러 곳에 이러 저러한 사연들로 숱한 얘기들과 함께 기억 한 편에 갇힌 채 놓여있다. 한생이 이제는 묻혀진 청자 가마를 찾아 나섬도 그러한 것들에 대한 기억의 반추, 사랑이 아직도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한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일의 날씨를 더듬는다. 베란다 한편에 밀어놓은 낚시 도구를 펴놓고 부실한 찌며 줄을 매만지며 일정을 헤아려본다. 지난번이 와룡이었나? 아니지 풍천 만흥 못이었지, 오랜만에 일직을 들러 볼까, 무릉 강변에서 고기를 낚아 조탑동을 찾는다. 한생의 청자 발굴은 언제부터인가 매월 초이면 청자의 소진을 확인하고서
이렇게 준비된 외출로 이어진다.
  이제 도심에서의 청자 담배는 사라져 버렸다. 아마 영원히 그러할지 모른다. 그것은 한생에 있어서 한 세대의 상실을 뜻하기도 한다.
  스물을 넘기고 나서야 한생은 청자의 조용하고 편안한 빛깔을 가까이 두고 완상할 수 있었으며, 지난날 벗들과의 늦가을 여행에서의 이른 아침에 한입 가득 머금는 흰 서리에 곁들인 향과 맛. 겨울 가로등 아래 여인과의 헤어짐에 앞서, 깊은 밤 등 기대어 나누는 얘기 속의 훈기. 청자는 그렇게 해서 한생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자리하며 늘상 함께 하게 되었다.
  하늘은 먼 빛 가까운 빛없이 그 끝을 알 수 없고, 짙은 안개 속에 집도 들도 나무들도 나무들 푸르던 산들도 자취가 없다. 한생은 깊숙이 모자를 눌러 쓰고 낚시 가방을 챙겨 아파트 어귀를 빠져나와 낮은 언덕 같은 산을 걸어 내린다. 저만치 국도 위의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 들이 뿜어낸 듯한 안개 속에 아득하다.

  세월에 묻혀버린 청자를 찾아서
  버스는 강변길을 따라 재를 넘고, 길은 확장과 직선화로 새로 닦여지고 있다. 학교 앞에서 내려 밭둑길을 찾았다. 도로변의 목조 이층집과 처마 낮은 술집들은 없어지고 제법 높다라이 병원과 아담한 주택과 겸용의 상점들이 들어섰다.
  산천은 누가 의구하다 했던가. 고속도로의 구간 개통으로 산은 깎이고 강은 좁혀들어 두터워졌다. 젊은 날 고향을 찾아와 홀로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울 때 틈틈이 시간을 내어 들르던 버드나무 숲 사이의 강이 휘어져 작은 소를 이룬 수초 바깥쯤에 둑 높이 자리를 잡는다. 낚싯대를 편다. 긴 대 하나 둘, 가늠하여 물 가운데에 던져놓고 짧은 대를 수초 사이로 꽂아 놓았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낚싯대 사이로 안개를 뚫고 나온 햇살이 수면에 반사되어 빛난다. 눈부시다. 언제인가 이곳의 이른 아침을 걸으며, 안개 걷혀 가는 청전靑田의 엷은 발묵의 화폭 속을 걸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 때가 있었다.
  긴 대의 찌가 가볍고 급히 움직인다. 피라미다. 그냥 둔다. 등 뒤 머 리 위의 해는 버드나무에 가려 그늘을 지어, 안개에 적셔진 풀잎의 이슬을 여직 매달아 두고 있다. 몇 마리나 될까. 피라미를 걸어 올리고 나서야 수초 속의 찌가 미동을 한다. 조용히 떠오른다. 낚싯대를 채는 손끝에 묵직이 전해지는 긴장의 전율과 함께 한 칸 반 짧은 대는 휠대로 휘어 수초와 함께 떠오르는 널찍한 은빛 비늘덩이, 크다, 낚싯대를 눕혀 줄을 당겨 뚝 위로 끌어 올린다. 튀어 오르는 단오 무렵의 붕어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한참을 풀밭에서 그러다 제 풀에 지쳐 꼼짝 않는다. 몇 마디가 모자란다. 놈은 포로로 잡힌 제왕처럼 분노의 포효를 온몸으로 요동이며 바구니를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당당하기 그지없다.
  일어나 길게 허리를 펴 본다. 실크로드. 사마르칸트. 아프리카. 모카의 향이 여기 비길까. 푸른 하늘에 자향은 구름이 되어 흩어진다.
  고기 바구니를 건져본다. 제법 묵직하다. 파랑이 일어 오후의 햇살은 물굽이를 따라 비춰 천군만마의 돌진처럼 한생에게로 몰려온다. 어지럽다. 해는 서녘 하늘에 여직도 높이 걸렸다. 초여름의 해는 길다. 돌아가야겠다. 낚싯대를 걷는다. 하나 둘 셋 끌어올린 바구니 속의 고기들이 튀어 오른다.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낚시 가방을 추려 강둑을 따라 걸어 나왔다. 개망초가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드문드문 클로버가 풀들 사이 둑길에 순을 뻗고, 갈댓잎이 벌써 서로들 키를 자랑한다.
  다리 밑 좁은 내를 건너 가게에 들러 청자를 찾는다. 없다. 이곳에서도 이제는 없을 거라 한다. 몇 집을 돈다. 낙담이다. 아니, 세월이 이렇게 묻히는 것인가. 60년대 명동의 설파 다방에 온종일 그렇게 앉아 백양을 한 마리씩 우리에서 잡아내어 번제의 제물로 소진시켜가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생각한다. 선생은 줄곧 백양의 제물화에만 일생을 보냈다.
  새로운 것들이 세상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기호의 선택에 놓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놀람과 동경으로 옛 것을 하나씩 버린다.
  청자 가마 그리고 스무 개의 청자. 누군가가 얘기했다. 이렇듯 때때로 갈아치움의 습관에 길들여짐은 아내와 자식까지 버려야 하는 시대를 머지않아 맞게 될 것이다라고-.
  공자는 유상지唯上知 여불우與下愚 불이不移라 했다. 천재와 바보는 변함없음이 진리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바보를 만들어 가는 시대에 서성이고만 있지 않은가. 청자는 우아함과 고결한 자태와 빛깔에서 오래도록 변함없으나 또한 청자는 그 향과 맛에 있어 변함이 아니라 이제 종말을 맞고 있다.
  국민에 의한 지방 자치의 시대이다. 지방 세수의 태반이 담배에 의한 세금이라 한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위해 겉표지에 또 이렇게 적고 있다 .
‘경고 :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습니다.’ 
  청자유감靑磁有感이다.
  청자 담배의 종말을 시작으로 모든 담배는 사라지는 것일까. 그 푸르고 흰 연기와 함께 그 기억 속의 수많은 사연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유감이다.

<사랑방 안동 1999년 7·8월호>




병자년 7월의 이야기

  한생은 요즈음 우울하다. 아침이 우울하고 저녁이 그러하다는 무시로 찾아드는 우울함이 아니다. 중북부에 억수 비가 내려 들녘이며 도시와 휴전선 일대의 초소들이 매몰되고, 북한 쪽 연백평야와 서북부의 도시들이 수마에 휩쓸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언 론 매체의 보도를 접하며 인재라 치부하여 그때마다 울화가 한껏 치밀어서만도 아니다.
  올해 새로이 힘을 쏟는 일들은 마음 쓴 만큼 되어지고 있고, 안팎과 이웃들 또한 무고하여 영남 내륙 한 도시에 사는 한생으로선 별일이란 게 달리 있을 리가 없다. 삼복의 중턱을 넘어선 계절은 그 만큼 더위를 타야 옳은 일일 거고, 바람 한 올 불지 않는 열대야를 맞음도 어디 한 두 해 겪어온 일이었었는가. 한생의 우울은 이 도시의 흉물인 짙게 깔리는 안개의 속, 어릿어릿함, 그 만큼만 하다는 것이다.
  한생은 마흔 여섯 번째의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수없이 다녀 눈에 익은 차창에 펼쳐진 산이고 들녘이건만 제 곳을 자리 잡고 자라는 것들은 항시 싱그럽다.   그렇다. 제 땅, 제 철, 제 것들의 생장은 폭염 속에서도 여전히 풋풋하다.
  태초에 더위가 있었다는 7월의 대구는 역시 대단했다. 몇 곳 둘러보아야 할 곳을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쳐가며 더듬어 찾고, 오후 늦게 형님 댁에 들러 제수를 장만하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 사진을 제상에 올리고 절을 한다. 그렇게 제사를 끝내고 제찬을 나눠들고, 형님네는 바다로 피서를 떠나고, 만나야 할 사람들 모두가 주말을 맞아 급히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다들 떠났다.

  밤늦은 여름, 역사驛舍의 풍경
  피난이다. 밤 도시에 사람이 없다. 기차역을 찾아 열차의 시간을 알아본다. 밤늦은 시각과 새벽, 그 긴 시간대엔 갈 수 있는 어느 행선지의 차편도 없다. 대합실엔 더위와 일정에 지쳐 잠이 든 사람들뿐이다. 밖을 나 와 흡연 구역 표시판 아래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밤의 광 장 한편에, 무엇을 하다 먹이 때를 잊었을까, 날개 퍼득이며 종종 걸음으로 옮겨 다니며 연신 무엇을 쪼아 먹고 있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있다. 암수 내외의 한밤의 피서 데이트인가, 깃털의 빛깔들이 서로 다르다. 사람들의 왕래에도 아랑곳없다. 건너편 의자에, 잃어버린 제 자식에 대한 몽환에서 벗어나지 못함에설까, 개를 아이처럼 옆구리에 동여맨 실성한 여인이 졸고 있다. 비둘기는 여인의 발밑에서도 먹이 찾기에 분주하다.
  한생의 앞에 제대로 입성 차려 입은 사내가 와서 묻는다. “나는 갈 곳이 없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갈 곳이 없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사내는 선시를 읊조리듯 되뇐다. 먼 곳을 가리키는 나의 손짓에는 영 앞을 떠나려 들지 않는다. 시계를 본다. 이제 겨우 두 시를 넘겼다. 저벅 저벅거리며 정렬을 지은 한 떼의 군인들이 광장을 지난다. 신병 훈련을 끝낸 전속병들인가 보다. 이병 계급장이 눈에 새롭다. 사내는 팔을 휘적이며 그들을 따라 간다. 한생은 거친 군적의 이병 때의 이력을 되짚어 본다. 바닷가 훈련소에서 더블 백 하나만을 울러 메고 고향을 찾고 다시 배속지로 향하던 역사驛舍에서 눈빛에 살기를 띄웠더라는 친구들의 후일담을 생각한다. 한생 오십의 나이에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비둘기는 여전히 역 광장을 맴돌고, 개를 싸안은 여인은 편안히 흐린 불빛 속에 잠들어 있다. 도심의 불빛은, 아직도 제 열을 식히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열대야의 밤을 끈적이며 흐른다. 가끔씩 택시의 불빛들이 돌아들어 멎는 철책 이편에선 차 시간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승객들이 술을 건네며 흥겨운 얘기를 나누느라 밤 더위쯤은 아예 잊고들 있다.
  담배를 피워 문 스포티한 차림의 중년의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옆 의자에 앉는다.
  “어디 멀리 가십니까?” “아, 아닙니다. 집사람을 마중 나왔습니다.” “울산은 오늘 무진 더웠습니다.” “울산 사십니까?” “차편이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멀리 울산에서 아내 마중을 나왔다. 한 시간여 밤길을 차로 달려 온 사람은 시체말로 간 큰 남자다.
  “어디 가십니까?” “안동”, “아!” 한생은 낯선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대해 갖는 그런 그런 경외의 선입견을 애써 풀어내려 들지 않는 버릇을 가진 지도 벌써 오래다. 안동……. 그러다가 한생은 아랫배로 숨을 크게 들어 마셨다. “좋습니다. 덥지 않고.” 그러며 얘기를 끊었다. 두 사람은 불빛뿐인 밤 도시를 바라보며 담배를 건네 입에 물었다.
  ‘안동’, 암울했던 시절 많았던 역사歷史에 있어, 안동은 어떤 모양새로 자리매김하며 지역 사람들은 무엇이라 외지인에게 각인되어졌을까. 우뚝한 인물들과 도저한 학풍, 절대 왕권 하에서도 세도의 한 시대를 연 군림의 기풍. 그것들 속에 가려진 독선과 맹종과 비굴함이 얽힌 위선. 권문세가들의 위세에 억눌림 당한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을 별신굿 속으로 까지 끌어들여 해학으로 녹이어 이음이어 내린, 항산과 항심. 두루 지극히 형식화해온 곳은 아닐까.
  인연이며 만남이 이런 것이구나
  “도착 시간이 다 됐네요. 지루하시겠습니다.” 중년은 출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잠깐의 대화 속에 풀어졌던 더위와 어둠이 시커멓게 다가왔다. 지루하다. 한생은 내려앉은 눈꺼풀을 지압하며 매점을 향했다. 맥주를 사들고 돌아와 목을 축인다. 서류 가방을 든 검은색 양복 차림이 발 앞에서 머뭇거린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한잔 하시렵니까.”
   “오징어를 좋아하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륙색을 뒤척이는 손길에 앞서 그는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맥반석에 구운 것이 랍니다.” 새로이 술과 함께 오징어를 내려놓았다.
  “멀리 가십니까?” “교육박람회를 둘러볼까 해서 서울을 좀-.” “학교에 근무하십니까?” “교육청에….” 술을 주고받으며 둘은 밤을 굽어보며 건성건성 얘기를 건넸다. 떠나는 사람과 떠나온 사람은 조심스러이 서로를 깊이 캐려 들지 않는다.
  “차 시간이 다 돼서……. 한참 기다려야겠습니다.” 사내는 손을 내밀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친다.
  “야! 한생, 살아있네.” “미친 놈, 별 놈의 세상 다 있구만.” “기다려라, 차표 좀 바꾸고…….”
그는 매표구를 향해 걸었다. ‘가만 있자, 저놈 이름이 뭐였더라. 아, 김생이구나’ 고교 시절 김천에서 3년을 죽 통학해 온 옛 과 친구다.
  “새벽차로 바꿨다.” “왜, 가지 않고”
  “동창회에서 얘기 들었다. 신문에서도 봤고, 이 놈의 세상에 그 놈의 시 버려 버려라.” 객 웃어 버리는 한생에게 시간 많다며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자 한다.
  역 앞은 승객들만으로 장사할 수 있나 보다. 식당이 즐비하다. 그러나 밤 더위엔 속수무책인가 보다. 주인을 부른다. 취기에 삼십 년의 세월은 훌쩍 뛰어넘어 십대의 소년시절로 달려가 묻혀 버린다. “그랬었지, 그랬었지.” 반백이……. 머리를 하고 둘은 소리 내어 웃는다.
  삶이 이런 것이구나. 인연이며 만남이 이런 것이구나. 서서히 7월의 여름 새벽이 열린다. 광장 의자엔 개를 싸안은 실성한 여인은 아직껏 졸고, 우리들 취객의 기척에 놀란 두 마리 비둘기가 일시에 날아오른다.
  “연락해라.” “그래.”
  한생과 김생은 그렇게 기차에 나눠 올라 무덥고 지루한 밤의 그러나 결코 우울하지만은 않은 대구를 떠났다.

<사랑방 안동 1995년 9·10월호>






제 4 부    임 병 호  그 리 고  시詩에  대 하 여


명정의 일상에서 명징한 시를 마시는 임병호 시인
안상학(시인)

  돌이켜 보면 인생을 참으로 겁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약관 초년병일 때만 해도 좌충우돌하며 많이도 날뛰었던 것 같다. 비린내 나는 가난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이 서른만 넘으면 무언가 짠하게 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스무 고개를 내려서던 나의 초상은 참혹했다. 나의 청춘은 미망의 바다를 허우적대며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 셋, 누구는 이 나이에 죽음으로써 인생을 완성하고 많은 죄인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 나이에 나는 입지立志의 마음 심자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해 말더듬이가 되었다. 마음심 자를 제거하는 것 이 뜻을 세우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또박또박 말하고 싶은 게 요즘 나의 근황이다. 그 잘난 가슴에도 참으로 많은 말씀들이 지나갔다. 상처 받기도 하고, 추스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받들기도 했다.

  나는 임병호를 닮았다?
  “상학이 네 얼굴이 요즘 보니 시 쓰는 임병호와 많이 닮았는 것 같다. 너 그렇게 살다 임병호 꼴 나는 것 아냐?”
  87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안동학생회관에 있던 독서회 ‘글방’에서 조우한 고등학교 때 문예반 선배의 일갈이다. 참으로 잊히지 않는 말이다. 임병호라니, 내가 그 술주정뱅이 고주망태 꼴 나다니, 저 자식을 그냥 콱, 하고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도 그럴 것이라는 자괴감에 몸서리쳤다. 시 쓴답시고 허구한 날 술에 젖어 헛 폼이나 잡으며 돌아다녔으니까 오죽했으랴. 그날도 하룻강아지조차 겁먹지 않는 ‘두고 보자’는 소릴 연발하며 어김없이 술독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내 속에는 임병호와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점쟁이에게 잠재의식을 노출당한 사람처럼 말이다.
  임병호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말이 떠오른다. 질기다. 하지만 세월이 약인지 한때 나를 그렇게 아프게 했던 그 말도 이젠 내 식으로 다스리는 여유를 부린다. 우선 그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인생에 대한 내 삶의 진정성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정적인 생각일지는 모르나 지금 다시 그 선배가 그런 소릴 한다면 이런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그래? 고마워, 형. 우리 술이나 한 잔 하지?” “난 술 못하는데…….”

  한산의 삶 태백의 술, 강림 임병호
  강림岡林 임병호林炳鎬 시인은 술을 사랑한다. 아니 점잔 뺄 것 없이 그는 술꾼이다. 어쩌다 그를 만나면 십중팔구는 술에 취해 있었으며 한 두 번은 술 마시러 가는 중이거나 주머니에 술병이 꽂혀 있기 일쑤였다. 그의 술 마시는 취향은 주종불문에 두주불사 형이다. 장소도 가리지 않고 상대도 탓하지 않는다. 시도 없고 때도 없다. 자작도 좋고 권작도 마다 않는다. 심지어는 투병 중일 때도 그는 줄기차게 술을 마셔댔다.
  “81년, 법흥교에서 뛰어 내렸지. 허리도 다리도 병신이 다 되었지. 그래도 술을 마셨어. 포도골에서 태파(태화동 파출소)앞 막걸리집까지 기어가서 술을 마셨지.”
  그는 법흥다리에서 투신해야만 했던 이유를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술을 왜 마시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또 그의 일신을 몹시도 흔들어 놓았던 그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이번 글을 위해서 취재준비를 하며 무엇이 임병호를 술과 시와 자학과 방랑의 삶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한 내 지레 짐작에 그의 확실한 알리바이를 더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의 ‘NCND 정책’에 말려 무산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나의 추궁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협박까지 가해가면서 그 ‘어떤’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비치는 날이면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상학이, 잘 알아둬. 내가 검도 3단이야. 만약 그랬다가는 넌 내 손에 죽어. 알았어?”

  그 ‘어떤’ 사건, 힘든 취사선택
  나는 어떤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예술가의 삶을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구나 그 앎이란 것이 액면일 경우에는 예술작품을 자칫 호도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드러나는 것이 전부인 양 마음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려 든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야 어디 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임병호 시인의 변론이 아니다.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이었던 사람이 파행적인 역사 구조 속에서 어떻게 대응하여 살았는지, 또 그 속에서 어떤 시를 썼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진솔한 모습만 파악하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어떤’ 사건을 다루는 것은 무리이다. 또 임병호 스스로 부정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 굳이 밝힐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부질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그의 시와 그의 삶의 단편들로 엮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 이제 알맹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속맛을 보자면 취중에 흘린 그 의 말과 그의 시에 오감을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명정酩酊」, 임병호의 모든 것

한 닷새 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 기차에 올라 휘 한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 한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 던지고 / 생채기 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 외딴집 찌든 처마 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 놓고 /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 술잔이나 건네다가 /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 흰 눈이 살 같이 흐르는 / 그런 시속時速쯤으로 /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 기차 를 배웅할 수 있는 땅이 / 내 사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명정酩酊」 전문

  내가 보기에 그의 시들 중 단연 으뜸인 것은 「명정酩酊」이다.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하고 있다. 여기엔 어떤 취기나 주사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명정酩酊」에는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선 그의 낭인적 기질이 확연히 드러난다. ‘오욕의 땅’의 사슬을 끊고 자유스럽게 그 ‘어디’를 다녀왔으면 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양단의 사슬’로 미루어 보아 ‘생채기’는 분단의 상처로도 이해된다. 어쨌거나 그는 결구를 자기 자신이 탔던 ‘기차를 배웅’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망으로 맺고 있다. 그의 떠돎은 머무르고 싶은 강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정酩酊」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는 늘 취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상당히 명징하다. 명정함 가운데에서도 정신적인 명징함은 늦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몇 번 눈이나 부비며’ 명정 속에서 명징함을 유지하려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의 시가 취중에 썼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정한 긴장과 맑음 즉 명징한 호흡을 한다. 그것 이 바로 별반 비밀스럽지 않은 임병호의 비밀, 다시 말해 불가사의에 가까운 노릇이다.
  아무튼 「명정酩酊」은 대단한 수작이다. 원래 이 작품은 1989년 상반기에 나온 오늘의 시 <현암사> 무크지에 실렸다. 이후 안동지 32호 (1994년 3·4월호)에 재수록했다. 굳이 그런 이유는 안동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광야’ 찻집에서 처음 만나다
  임병호와 첫 만남은 내게 그리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모습은 그리 변한 것이 없다. 시 쓰기와 술, 그리고 낭인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그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들은 다르다. 내가 변한 것일까.
  기억을 더듬자면 그와의 첫 만남은 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전에도 더러 임병호의 프로필은 대충 챙기고 있었지만 진면목은 처음 맞닥뜨린 것이다.
  당시 나는 김승균, 류성우, 김미영 등과 안동국민학교 옆 약전골목에 있는 <광야>라는 찻집에서 <4인의 목소리> 시화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육사의 시제를 빌어 문을 연 찻집이 뒷날 술집으로 바뀌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그런 찻집에서 그는 호기롭게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광야’에는 문학청년들과 이른바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진보적인 청년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육사의 시제인 <광야>라는 상호가 풍기는 인상이 문학적이고 저항적이어서 그런 면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보다 는 ‘광야’의 ‘마드모아젤’ 김미영의 영향력이 컸으리라. 그녀는 임병호의 동생 임미령과 친구였으며, 안동대 민속학과 출신으로 인하대에서 국문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 중에 문학청년 그룹 중 단연 선두 주자이던 한양명(현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문학청년이자 진보적인 청년 그룹의 김승균 등이 있었다. 이런 문학적인 분위기가 그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였을 터였다. 김승균은 얼마 전 임병호와 처남 매부 지간이 되었으니 세상사 모를 일이다.
  이러한 ‘광야’의 분위기는 소주병을 꽂고 찾아오는 임병호 시인에게 는 더없이 좋은 셀프주점이었다. 물잔에 소주를 깡으로 마시며 그는 시종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날 나는 운 좋게도 그와 동석한 채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얘긴 즉 임병호 자신의 시론이 대부분이었다. 듬성듬성 김지하 시인에 대한 혹평과 당시 민족민주화 운동에 대한 사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의 기행 편력은 어린 나에게 신비로움과 난해함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더 강했다. 같이 술을 먹는다는 것이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전술했다시피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의 시를 사랑할 수 있기까지는 그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던 그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건방질지는 모르나 얼마 안 되는 나잇살 탓으로 돌리고 싶다. 그리고 그 많은 기행 편력은 언젠가 여유로운 지면을 만나면 차근차근 짚어볼 것이다.

  낭인 임병호를 집에서 만나다
  지난 6월 3일, 임병호의 집으로 갔다. 시쳇말로 대통령 만나기 보다 더 어려운 그를 근 두 달 걸린 수배 끝에 ‘체포’할 수 있었다. 임병호 하면 겨드랑이에 터럭 숫자까지도 꼽을 ‘글밭’ 동인인 백승초, 김지섭 시인도 그의 행방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내저었었다.
  “지금 사는 이 집에 상학이 너가 처음 찾아 온 거야. <글밭> 동인들이 몇 번이고 이 고지를 점령하려 했지만 다 물리쳤지.”
  그는 지금 옥동 주공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니 그냥 짐을 풀어 놓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성 싶다. 열 평정도 되는데 작은 방은 그가 쓰고 큰 방은 그의 자당께서 쓴다. 시내에서 만나자는 걸 굳이 집 앞까지 찾아가겠다고 한 것은 그의 생활을 엿보기 위해서다. 결국 내 고집이 먹혀들었고 그는 가게에 들러 맥주를 사들고 앞장을 섰다.
  그의 외모는 비교적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몸가짐이 의연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많이 상해 있었다. 허전한 어깨며 허정이는 걸음걸이는 어디에도 예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맑고 강렬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아파트 앞에 난전이 있지. 그 곳에서 장사를 했으면 좋겠어. 솜사탕 장수나 목마쟁이 말이야.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못 봤거든. 손님들도 하나같이 환하고 말이야.”
  그의 일 년 수입은 30만 원 정도다. 원고료만으로 버는 액수다. 그것도 순전히 시로써 말이다. 그는 금전 출납부에다가 작품 명세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쓴 날짜. 발표한 날짜와 지면, 원고료까지 말이다.
  저녁 7시부터 자정이 넘게까지 맥주 다섯 병으로 때웠다. 밤새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 잔만 마시고 한 잔은 남겨두고 나왔으니 내 술의 역사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고작 맥주 4병으로 판을 마무리 지었다. 믿거나 말거나다. 술을 왜 마시냐는 질문에 그는 묵묵히 시 한 편을 건네주었다. 우문현답이었다.

왜 그리 술을 마시는가 // 산이라든지 / 강이라든지 / 꽃이라든지 그 씨앗이든지 // 구름이든 / 천둥이든 / 저 억수 같은 비이든 // 아침이든 / 저녁이든 / 그믐 그 깜깜한 밤이든 //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問答 전문


  임병호의 이력서
  임병호는 1947년(丁亥年)에 안동에서 태어났다. 고 임재기 씨와 천거화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교육계에서 몸담았던 선친의 임지를 따라 많은 이사를 했다. 국민학교만 일곱 군데나 다녔으니 말이다. 대구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중학교를 거처 대구 공고, 중앙대 건축과 중퇴가 그의 학력이다.
  문학적 이력을 보면 대구공고 재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한하운 신드롬’을 겪은 세대다. 누구나 시 몇 수를 줄줄 외고 다닐 정도로 서정적인 세대였다는 것이다.
  그는 <글밭> 동인이다. 전신은 1969년에 김성영, 변호섭, 이홍범, 임명삼, 조병국 등과 결성한 <청포 문학동인회>다. 이 동인은 등단 회원 중심인 <안동문학>과 비등단 회원인 <글밭>으로 갈렸다. 등단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글밭>의 계율을 깨뜨리며 그는 1988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신인으로 데뷔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이 출판사를 소개해주겠다며 그의 원고뭉치 실천문학사에 넘겼는데 「추석」 외 5편 이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시집은 낼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원고는 부산에 있는 도서출판 <글방>에서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 사상공단이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다.

  파행도 길이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내용이 부실한 것을 한정된 지면 탓으로 돌려야겠다. 아니 천박한 글재주 탓이다.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 김기홍 등 80년대를 풍미했던 노동시인들의 반열에 임병호의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그의 시집이야기며, 전우익, 권정생 등과의 교류, 글밭 동인이야기, 결혼관, 고 신승박 시비 건립에 보여준 그의 남다른 노력담 등의 얘기들은 다음 지면을 기약한다.
  그리고 끝내 입을 열지 못한 그 ‘어떤’ 사건은 다 된 밥에 재 뿌린 격이 아니라 쌀도 안치지 않고 불만 땐 꼴이 되었다. 결국 겉몸만 달았다.
  “정론으로 가서 안 되면 파행으로 가지. 파행도 길이니까.”
  어쩌면 이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한 마디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의 방에는 몇 그루 단풍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글밭> 동인인 임명삼이 주지로 있는 경기도 이천의 지족암 뒷산에서 캐어온 것이다. 최근 그는 법명이 혜봉인 임명삼의 암자에 자주 가곤 한다.
  단풍나무랄 것도 없는 겨우 두어 잎이 난 2~3년생 것들로 옹기 뚜껑을 뒤집어 심어 놓았는데 제법 자연스럽다. 푸른 단풍나무 숲이었다. 0.3의 근시인 그는 가까이서 숲을 보고 있었다.
  “근시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음으로써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지.”
  나는 거기서 숲과 나무 이야기의 역설을 보았다.

<사랑방 안동 1999년 5·6월호>




내가 만났던 시인, 임병호
김윤한(시인, 글밭 동인)

  임병호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1947년 9월 10일 안동에서 태어나 2003년 5월 1일에 세상을 마치다. 굳이 보태자면 안동중학교와 대구공고를 졸업했고 시인 이상처럼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사람.
  서울에서의 짧은 몇 년을 제외하면 줄곧 안동에서 문학동인회 활동을 했고 198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의 절차를 밟았다. 시 읽기 등 문학 대중화를 위해 힘썼고 ‘누가 에덴으로 가자하는가, 사상공단’과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는 시집을 냈던 사람.
  대략 이 정도 몇 줄로 임병호 시인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굳이 한 줄 정도 더 덧붙이자면 ‘기인’이라는 단어 정도.
  그러나 거기에 진정으로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그는 한 평생을 시를 생각하며 시로써 온 생애를 비척이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온갖 기행은 그 자신이 평생을 현실과 시 세계를 혼동하며 살아온 겉모습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소한 이득이나 영달을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가 사십이 넘을 무렵부터는 그의 모든 생활이 시 자체였을 만큼 시를 제외하고 임병호 시인을 생각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시를 제외하면 그는 직립해 있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에 무수한 시인이 있지만 그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시를 사랑하고 시로써 일생을 살아 온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지금 살아 있는 시인을 논외로 한다면 그가 생전에 공들여 시비를 세웠던 신승박과 함께 안동에 직접 살면서 신시장과 구시장의 장꾼들과 부대끼면서 안동의 현대시의 밭을 일군 1세대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아직은 그가 작고한 지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러한 문학적 행적들은 우리가 두고두고 살펴보아야 할 후세 시인들의 몫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1978년경이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지금 마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김태수 시인으로부터였다. “재미있는 시인 하나 있다.”라는 말에 이끌려 태화동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열두 살 정도 많긴 했지만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보고도 “야 임마.”는 보통이었다.
  내가 습작했던 시를 꺼내 보였더니 “치와라, 임마. 시는 뭐락고 쓸라 하노?”가 전부였고 그 후 몇 번인가 만났지만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어쨌든 나는 그 “재밌는” 시인이 나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해 준 것에 대해 고맙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함께 동인활동을 하며 25년이란 세월을 그와 함께 휩쓸려 다니게 되었다.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시를 쓸 때나 시낭송회 등 시운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술을 마셨다. 어떤 분들은 "임병호 시인이 맨 정신으로 있는 걸 못 봤다"고 할 정도로 술은 시와 더불어 그와 일생을 함께했다. 그래서 그의 시 「명정酩酊」이 대표시로 불리 고 있는지도.
  그가 술을 마시는 시간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1박 2일의 마라톤 주법이었다. 그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어 함께 여인숙 방을 쓰게 되는 날엔 엄청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우리 동인들조차 몸서리치는 ‘자동기술’이 시작되는 것.
  보통사람은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눌 정도의 시간인 자정을 넘어도 처음 술 마실 때처럼 그 속도 그 패턴으로 밤새도록 술을 마셔가며 한 번도 눕지 않은 자세로 ‘자동’으로 혼자 무언가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며 내게 무언가 이야길 거는 줄 알고 대꾸를 해 주다가 밤을 꼴딱 새운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단련이 되어서 임병호 시인이 밤새도록 지껄여대도 나는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엔 덜했지만 서른 초반쯤에는 시인으로서의 객기도 대단했다. 가령 어느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경우, 다른 사람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는 당당하게 남을 밀치고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다른 사람들이 시비조로 바라보면 그는 벽력같이 소릴 질렀다. “난 시인이야 임마.” 그러면 대개의 사람들은 잠시 얼을 놓을 정도.
  임병호 시인은 안동에서 났고 안동에서 시를 써 왔지만 그는 모름지기 ‘전국구’ 였다. 어쩌다 서울이나 외지에 나들이를 갈 때면 그에게는 수입원이 전혀 없는 탓에 만 원 정도의 여비를 받아 간다.
  그는 돈을 빌리는 법이 없다. 당당하게 “돈 만 원만 다오.”가 그가 돈을 가져가는 첨이자 마지막 한 마디. 하도 당당해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기까지 한다. 행여 주머니에 여윳돈이 있어 만 원 한 장 더 붙여 줄라치면 필요한 돈 이상은 한사코 받지를 않았다. 그렇게 받아간 돈 몇 푼이 종잣돈이 되어 한 번 안동을 출발하면 전국의 지인들로부터 당당하게 노자를 얻어 쓰며 한 열흘쯤 돌다가 돌아온다.
  다른 지역의 시인들을 만나 보면 안동은 잘 몰라도 ‘임병호 시인’하면 손뼉을 칠 정도로 그는 안동 시인의 꼬장꼬장한 인식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그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시리즈로 몇 달을 엮어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언제나 당당했던, ‘글시’자에다 진정한 의미의 ‘사람 인’자를 붙여 시인이라고 당당히 부를 수 있는 드문 시인. 이제 그는 우리 곁에서 떠나고 없다.
  지금도 우리 동인들끼리 모여 술 마시다 문득 옆자리에 없는 임병호 시인을 떠올리면 금세 ‘드르륵’ 밀문을 열고 비척거리는 자세로 들어올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어설프게 이 글을 썼다는 걸 알면 ‘시인이 되잖을 글 함부로 썼다’고 벌컥 소리 지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살아 있을 적 많은 문우들이 그를 일컬어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피곤”하다고 표현을 하곤 했다. 그처럼 엄청나게 사람 피곤하게 하던 그런 만남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동안은 그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어 달 가까이 지난 지금, 생전 때처럼 ‘이제 안 보면 보고 싶’을 시간이 지났나 보다. 이제 깡마른 그의 얼굴이 서서히 보고 싶어지기 시작한다. 특유의 약간 높은 톤의 음성이 들린다. 가슴 아래쪽으로부터 무언가 쓰린 기운이 서서히 치받기 시작한다.

<사랑방 안동 2003년 5·6월호>




삶이 고달플수록 보석 같은 시를 쓰던 시인
임혜봉(이천 부석암 주지, 글밭 동인)

  그가 갔다. 삶이 고단하면 고단할수록 시가 보석인양 광채를 발하던 내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임병호가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저 영혼의 세계로 떠나갔다.
  임병호!
  그의 이름을 돈호頓呼하면 그와 얽힌 수많은 기억과 더불어 깊은 슬픔의 강물이 일렁거린다.
  병호와 내가 처음 만난 건 그가 해병대에 복무할 때였다. 구시장에 있던 싸리집이란 술집에서였던가? 나의 빛바랜 30여 년 전의 기억에 의하면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그와 내가 중학교 동기 동창이란 것을 알았다. 당시 나는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화의 어떤 시골학교에 근무하면서 주말과 방학이면 안동에서 병호, 지섭이, 성영이, 조병국 등의 문 우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의기투합한 우리는 글밭동인회를 만들었다.
  병호는 제대 후 서울에서 한동안 음식점을 경영했다. 그때 같은 글밭 동인이었던 김성영과 권중한이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병호의 가게에 자주 들려 영양보충(?)을 했다고 훗날 병호에게 듣기도 했다.
  인심 헤픈 음식점 경영이 오래갈 리 없었다. 그는 음식점을 걷어치운 후 부산의 사상공단과 대구, 안동의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일하다가 불쑥불쑥 안동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다 그는 아예 안동으로 귀향하여 친구가 운영하는 농원에 기숙하면서 일을 거들며 시 쓰기에 몰두했다.

  강변시화전과 해남아가씨
  1979년 여름이었던가. 병호는 친구의 농장이 있는 낙동강변에서 강변시화전을 열었다. 병호가 강변시화전을 열 무렵 소수의 친구들만 아는 일화 하나가 있다. 강변시화전을 열기 직전 나는 태화동에 있는 병호네 집에 들러 그의 방에서 몇 통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그 서신은 해남에 있는 어떤 여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편지를 읽은 나는 매우 놀랐다. 그 편지 속의 문장은 대단히 뛰어난 산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많은 문학작품과 여러 종류의 숱한 글들을 읽었는데 그녀의 글은 그 어떤 문학 작품에 못지않은 훌륭한 글이었다. 말하자면 최상급의 수사로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뛰어난 연애편지였다.
  나는 병호로부터 통칭 해남아가씨로 불리우던 그녀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병호에게 보낸 그 편지들을 보는 순간 병호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고 순수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호에게 알리지 않고 병호가 여는 강변시화전 팜플렛을 해남아가씨에게 우송하였다. 거기엔 병호가 낙동강변에서 시화전을 하니 한번 안동에 오지 않겠느냐는 간략한 내용의 메모를 동봉하였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시화전을 하고 있던 기간이었는데 농장의 허름한 방에 친구들 대여섯 명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에 해남아가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누추하지만 들어오라는 내 말에 망설이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계속 술을 마시다가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내가 그녀에게 병호에게 들으니 노래를 잘한다고 하던데 한 곡 부르라고 권했다. 그녀도 사양하지 않고 가곡 ‘나목’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맑았다. 나를 포함한 그 자리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노래에 적이 감동했다. 정말 그녀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강변시화전에 그 해남아가씨가 찾아온 게 계기가 되어 병호와 그녀의 결혼문제가 양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양가에서도 구체적으로 결혼비용을 논의하는 수준까지 진전되었으나 어떤 일인지 더 이상 결혼문제는 진척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병호의 결혼이 좌절된 구체적인 이유야 두 사람만이 알 일이지만 그 요인 중의 하나는 그녀가 기독교 전도사로 일한다는 점이었다.
  병호는 그녀의 직업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꽤나 부담스러워했다. 어쨌든 해남아가씨와의 결혼이 무산된 후 병호는 더욱 술에 빠져들었다. 곧잘 대취하여 동석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명정기행
  그의 명정酩酊 기행은 안동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를 알고 그와 더불어 술을 마셨던 사람이라면 그와의 명정 일화가 없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명정 시인이었다. 한국 문단에는 술과 기행으로 유명한 3대 기인이 있다. 시인 서정주의 동서이자 한학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김관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그리고 시, 평전, 소설 등 다양한 문학적 업적을 쌓고 있는 시인 고은이 바로 그들이다.
  임병호의 술에 얽힌 기행과 일화는 김관식과 천상병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사실 공리주의와 자본주의, 현실적 이해타산에 충실한 이 시대에 의식주와 돈 따위를 하찮게 여기며 일생을 바람처럼 떠돌며 살았던 시인 임병호는 김관식, 천상병에 비견되는 이 시대의 마지막 기인이었다.
  그가 저 영원의 세계로 간 이 시점에서 볼 때 안동은 물론이고 한국에 다시는 임병호와 같은 명정의 시인, 명정의 기인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대표시 ‘명정酩酊’처럼 ‘3일 장취長醉의 명정’에 빠져 살던 그였음에도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기피하거나 도외시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는 일생동안 그 어떤 삿된 방편이나 조작도 부리지 않았고 추호의 거짓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곧잘 술에 취하여 살았으나 그의 심성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였다.
  그의 해맑고 고운 심성의 일단을 드러낸 행위 중에는 이러한 일도 있다. 내가 인생의 중반에 문득 세속사世俗事를 버리고 출가 입산하였을 때 병호는 가장이 떠나버린 안동의 내 집에 들러 종종 내 아이들에게 과자와 먹을 것을 사다주거나 잔돈푼을 쥐여 주곤 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궁핍하고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면서도 친구가 떠난 집에 들려 어린 아이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하였던 것이다.
  치의緇衣 걸치고 산하를 떠돌던 내가 경기도 이천利川 설봉산 자락의 암자에 정착하자 병호는 해마다 사월초파일 무렵이면 내 암자에 와서 일을 거들어주었다. 지금도 내 암자에 그가 만들어준 안내판이 세 군데나 남아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 볼 일이 있으면 일을 마치고도 용인의 권중한이네 집과 내 암자에 들리는 것이 통례였다.

  최초의 안동 문인장으로 치러진 영결식
  그가 1988년 계간 문예지 실천문학 겨울호에 10편의 시가 발표되면서 등단하는 데는 약간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병호는 그의 일상적 삶이 곤비할수록 그의 시는 더욱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시를 그의 서랍 속에 방치해 두는 걸 안타깝게 생각한 나는 그의 원고 중 시 10편을 간추려 수필가이자 유명한 아동 문학가인 이오덕 선생님께 가져다주었다. 그의 시를 읽은 이오덕 선생님은 병호의 시가 좋다면서 실천문학에 넘겨주어 그의 작품이 문단에 소개, 인정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그가 이승의 삶을 마감한 이 시점에 그의 등단에 얽힌 비화를 소개해도 결코 그의 시업詩業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의 삶과 시를 근접하여 알고 있었기에 그의 생애 중 많은 부분을 지켜 볼 수 있었다. 그가 행한 일 중 가장 빛나는 업적 세 가지를 열거하면 <글밭> 복간에 그가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 그 첫째이고, 두 번째가 ‘신승박 시비’를 건립한 것이다. 그는 건립기금을 모으고 시비를 세울 자리를 물색하여 확정하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다. ‘신승박 시비’ 건립된 것은 전적으로 임병호의 활동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 번째는 ‘한겨레 시읽기운동 연합회’를 창립하여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라는 소시집을 8년간(1996.6~2003.4) 3만여 권이나 무료 배포한 일이다.
  그가 떠나간 이제 그 누가 이 일을 맡아 해낼 수 있으랴. 최초의 안동 문인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 모인 여러 문우와 지기들도 그의 이 일을 맡아 할 사람은 없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이제 그는 갔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일생동안 피맺힌 ‘사모곡’ 같은 시를 쓰며 명정 속에 살던 그는 떠나갔다. 이승의 삶이 곤비했던 그였던 만큼 육신의 고통과 번뇌가 없는 저 세상에서도 그는 더더욱 편안하게 사후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임병호!
  그대는 자신의 영결식에 모여든 문우와 여러 지기들의 면면들을 지켜보며 아, 아 이제는 술도 함께 마실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러나 니네들도 멀지 않아 이 영혼의 세계로 오지 않으랴 하고 중얼거렸으리라.
  그렇다. 친구 병호여, 그대는 조금 먼저 이 세상을 떠났을 뿐 오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잘 있게나. 그대의 맑은 시업처럼 맑고 고운 사후의 삶이 되길 기원하네.

<사랑방 안동 2003년 5·6월호>




임병호론­일탈과 초월의 시학
임두고(시인, 글밭 동인)

  “인간이 자기 자신 너머로 가고자 하는 초월이라면, 시는 그 계속적인 초월하기의, 그 끊임없는 상상하기의 가장 순수한 기호이다."
­옥타비오 파스


  1.

  ‘글밭’ 동인지는 안타깝게도 임병호1) 동인의 시 원고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세속적 가치로부터 일탈逸脫된 무명 시인으로 서의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부하면서 살다가 지난 오월 홀연히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가 하마선인2)을 꿈꾸며 마지막 삶의 보금자리를 틀었던 금소리 ‘시서원’ 고택을 찾아보았는데, 그의 눈빛이 묻은 골목 어귀의 오동나무와 와송 낀 지붕이 허허한 그의 생전처럼 나를 맞아 주었다.

  빈 고택 마루턱에 잠시 걸터앉아 있는 사이 지난 봄 그가 손수 마당가에 묻었음직한 씨앗들이 가을을 맞아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은 채 그의 부재를 더욱 하소연하는 듯했다. 혹여, 그가 이 세상에 뿌리고 간 시들도 저 꽃이나 열매처럼 쓸쓸하게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평생 시를 쓰듯이 삶을 살면서 그러한 삶을 진솔하게 시로 형상화해 온 시인이었다. 그에게는 시가 곧 삶이었으며, 삶이 곧 시였다. 시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의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한평생을 새삼 껴안으면서 그가 남기고 간 두 권의 시집을 펼쳐 들고 다시 꼼꼼히 읽어 보기로 한다.

  2.

  그의 시에는 기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충격적인 표현 구절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평이한 시어로 그가 겪는 삶을 투박하고 진솔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는 투박진 것들의 가치를 모르는 이 시대를 ‘녹슬고 삐뚤어진 시대’로 받아들이며 안타까워한다.

언제부터인가
금기시된 것은 노동의 실체이다 
힘들고 투박지게 빚은 것일수록 
이렇듯 거칠게 버려져야 한다.
-「못 펴기」 일부

  기계로 인해 소외되어 가는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시이지만, 시인의 노동이 곧 시를 쓰는 일이라면 기교의 틀에 끼워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소위 인기 시인들의 시에 밀려 “투박지게 빚은” 시들의 가치가 “거칠게” 버려지고 있다는 함의로 읽힌다.
  그는 평소 옷차림새나 격식을 갖추는 것을 꺼려했다. 궁핍한 삶이 그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그의 가치관 때문 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겉치레나 격식은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부리는 기교에 불과한 것이다. ‘격식(기교)=허위’라는 등식을 그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지니고 살았다. 격식을 요구하는 제도권 문학에 대한 그의 거부감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는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한다”고 누누이 역설한 바 있으며, 「입자놀이」라는 다음 시에서도 “시는 진검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들이 무풍의 도심을 휩쓸어 
조금씩 들뜬 사람들
북으로 남으로 몰려다니는 
저물녘 저자거리에
환영 같은 나를 앉혀 두고 
시는 진검처럼 다루어야 한다.
­「입자놀이」 일부

  이 시대는 말(언어)의 고삐가 풀린 시대다. 시공을 가리지 않고 욕망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그 언어들 속에 사람들은 환영처럼 존재한다. 바람처럼 떠도는 타인의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대인들은 분명 자아를 상실한 환영 같은 존재다.
육화된 시인의 목소리를 갖고 싶어 하는 그는 지금 선술집에서 “환영 같은 나를 앉혀 두고” 술을 마시면서 시는 “진검처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 ‘진검’은 나아가 시의 형식(기 교)보다는 시의 내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와 ‘진검’ 승부를 펼치겠다는 그의 시적 방법론은 이미 미적 충격을 줄 뇌관을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시의 조류를 근원적으로 일탈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그의 시관은 기교로써 시의 질을 저울질하는 이 시대 경박한 시 정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가 평생을 시와 더불어 살았음에도 과작寡作에 그친 까닭은 시도詩道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진지한 시작詩作 태도 때문일 것이다.

  3.

  그는 유년기부터 혹독한 통과 의례를 치러야 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교직자인 엄한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떠돌며 “바르게 살라 바르게 살라/ 알몸 마루 끝에 내세워져/ 매를 맞던 시절”(<못 펴 기>)을 보낸다. 다음 시를 통해 드려다 본 그의 유년은 “소태맛”과 “회색”으로 표상되는 고통과 암울함 뿐이다.

유년의 꿈 속 하늘엔 빛이 없다
무명 반바지를 입은 목이 가느다란 나는 
혼자이고 어린 의식엔
쓴 소태맛과 회색뿐이다.
­「유년의 꿈」 일부

  기술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그는 대구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그곳 문예반에서 ‘한하운’의 시를 애송하며 시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성의 결핍과 엄한 부성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인척이 사상범으로 단죄 받게 되면서 가정이 풍비박산되자 대학도 중도 포기한 채 심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탈출구였던 해병대 제대 직후 고향의 문우들과 ‘글밭’ 동인을 결성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에 뿌리를 내려보려고 서울로 올라가 음식점을 개업했으나 실패하고, 한동안 부산, 대구, 안동 등지의 주물 공장을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삶이 있는 곳 어디든 따라 나서겠다던 
주민등록도 이력도
커다란 불신의 입이었던 
신원증명도 재산보증도
그 흔한 수고로움의 표시도 
이들은 요구하지 않았다.
­「취업」 일부

  이 시는, 일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던 당시 삶의 정황을 짐작케 해준 다. 이즈음 그는 말소된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지 않아 주민등록증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는데(이후로도 그는 오랫동안 주민등록증 없이 지냈는데, 인척의 사상범 단죄에 따른 연좌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한 방 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 그가 흘러든 사상공단에서는 “신원 증명”이나 “재산 보증” 없이 취업을 허락하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이곳에서의 다양한 체험과 습작은 그가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나중에 이곳에서의 삶이 시집 한 권에 오롯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꼈는가?

산다는 것은 고난이라 치부해 버리고 
제 나름의 부지런을 떨며 일을 맡아 때로 
힘겹고 피곤해도 젊음으로 삭인다. 
가끔씩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는 것은
사상으로 흘러 온 뼈아픈 내력과 
일의 분량만큼 넉넉하지 못한 현실과
확인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이 얽혀서지만 
하룻밤 지나면 다들 잊고
쌓아 놓은 도시락 하나씩을 들고 방을 나선다.
­「사상 808번지」 일부

  안전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도시락”(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뼈아픈 내력”도, “넉넉하지 못한” 노임도, “내일에 대한 불안”도 잊은 채 밤낮 없이 잔업을 하며 지내는 공단 사람들을 그가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회식」이라는 시에서는 이들을 “쇳가루를 먹어/ 쇳덩이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들의 처절한 삶을 연민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외경스러워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시적 대상인 「최해수」, 「유군」, 「농아 김군」, 「최반장」, 「하중사」 등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의 삶을 투사시키면서 나르시즘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상공단에 펼쳐지는 삶이 “훗날 전설로 남겨져 얘기”해야 할 경이로운 것으로, 그 자신은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하리라는 인식은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곳에서 “노동의 댓가에는/땀과 피의 내음이 배어있다”(「기적」)고 할 정도로 뼈저린 노동의 고통을 맛보기도 하는 한편, 단순하게도 그 노동의 고통만 지우면 세상이 낙원으로 변한다는 신비로운 체험도 한다.
  거푸 나눈 술잔에 취해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일어섰다. 
비누공장 높다란 굴뚝에 매인 바람이 
쇳가루 쌓인 가슴을
조금씩 에덴으로 날렸다. 
내리막길 하단을 걸어 내려
길을 메운 사람들만으로도 조금은 들뜬 
통술집 즐비한 에덴공원 입구쯤에서 
우리는  머뭇거리며 소주를 사들고
<중략>
누가 에덴으로 가자 했는가 
산다는 것은 신비롭구나.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일부

  그러나 이 시를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문제는 ‘술’에 있다. 현실의 고통을 꿈(희망)으로 지워야 하거늘, 술로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술이라는 진통제에 기대어 껴안은 “에덴”(낙원)은 신기루 같은 환영에 불과하다.
  이 진통제의 과다복용은 때로 꿈이 빠져나간 “몸을 부셔”대는 자학이 되기도 하는데, 끝내 그는 “막소주나 마시고 막걸리나 퍼 넣어 가며 / 철망이나 잡고 머뭇거려도 되는가”(「사상 오후」)라고 회의하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문전옥답에 살찐 냉이처럼 뿌리 내려야지
­「사상공단」 일부


  꿈이 없는 삶에는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뿌리가 없는 삶에서는 꿈이 꽃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뿌리를 내리리라 꿈꾸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살찐” 삶이 기다린다고 생각했지만 객지 생활 끝에 다시 돌아온 고향은 그가 꿈꾸던 고향이 아니었다.
  “골골마다 흉흉한 소문”으로 들끓어 하나 둘 떠나버린 “수수끌대기 소름으로 돋는” 고향에는 “산이고 강굽이고 예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귀먹은 동수나무 곁을 서성이고”있거나, “반백의 연륜”들만 남아 “속 다 털려 빈손으로” 쭈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에서 “울면 되는가 거듭나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희망의 ‘봄’ 을 확신해 보기도 한다.

풀이 울면 되는가
먼 길 헤매다 피곤한 몸 
내 절며 돌아온 날
잊은 모태의 강 
빈 들과 마주한다.
<중략> 풀이 우는가
지축에 뿌리박아 요동 않던 산자락으로 
신선한 해빙의 아침 강으로 봄은 오리라 
언 땅 황량한 들판에서 웅크리며 숨죽이던 
내 유년이 부르던 이름 정겨운
풀이 울면 되는가 거듭나라.
­「풀이 울면 되는가」 일부

  그러나 그는 농부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씨앗을 뿌릴 자기 몫의 한 뼘 땅도 남아 있지 못했다. 부득이 그는 남의 농원 일을 거들며 시를 쓰는 한편, 농자재 특허 개발에 뜻을 둔 채 “내 몇 점 농자재를 만들어 떠돌길 몇 해”(「근황」)의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이미 심정적으로 고향의 농부가 된 그는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언저리를 맴돌며 잃어버린 고향의 파편들을 쓸쓸히 더듬어 보기도 하고, 피폐한 고향 현실에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고향 강변에 무심히 던져진 한 개 돌에도 
생솔 내음 가득했던 초가 오두막과
펄펄 눈 내리던 겨울 저녁과
아, 이제는 잃어버린 사람들과 시절을 기억한다.
­「눈 내리는 마을」 일부

천수답 무논 까짓 얼마랴
몽뚱그려 탈탈거리며 수매 바치고는
<중략>
경운기 시름시름 끌고 왔다. 
빛이 좋아 개살구다
빛이 좋아 개살구다
울퉁불퉁 바퀴가 그렇게 굴렀다.
­「뒤풀이」 일부

  또 한편으로는 “상식의 허술함이 켜켜로 내려 누르는/시대의 질펀함”(「95 Summer」)과 “잘난 이념”을 “밥 사먹듯 하는 오늘”을 비판하거나 “돌덩이 시멘덩이 녹슨 철망 빻고 짓이겨/가루 되어 날려가 버려라"(「사물놀이」)며 분단의 한을 풀어내기도 한다.
  “내 삶의 굽이마다 맺혀있는 피멍”든 개인사個人史에 덧씌워지는 이러한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대사時代史는 그로 하여금 급기야 “오욕의 땅”을 벗어나 만사를 훌훌 털어 버리고 싶은 일탈과 초월의 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 올 수 있는 땅을 
한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던지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 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명정酩酊」 일부

  그는 중년기 이후 “무너져 내리는 시대의 변방에서” 아직도 “그대 꿈을 꾸는가”라며 가슴 속에 잔존하는 세속적 꿈(욕망)을 모두 지워낸다. 그는 이 시처럼 “노역의 홑옷”인 결혼도 직장도 벗어 던지고, “양단의 사슬”인 시대적 아픔도 접어 둔 채  “한 닷새쯤” 훌쩍 떠돌아다니며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에나 드는 일탈된 삶을 살았는데, 때로는 “화적패나 되었으면 좋겠다/총 맞아 죽는/화적패나 되었으면 좋겠다”(「수구형님」),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 아니라/ 어수룩한 도적놈이나 되자”(「도적놈이나 되자」)는 등 과격한 일탈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의 일탈된 삶을 바라보는 세상은 그를 부랑자나 기인으로 더욱 소외시켜 갔다. 5공화국 시절 한 때, 그는 부랑자로 몰려 삼청교육대로 끌려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 투신, 자해自害를 가하는 고육지책을 꺼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신장염이란 지병도 얻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저 숲의 나무들이 
울기 시작했다
헤지고 기운 입성의 사람들 가까이서 
눈물과 피와 땀을 먹고 자란
이 땅의 나무들이
조용히 울음 울기 시작했다
<중략>
전란보다 무섭다는 시절을 맞닥들여
그 여름 무섭도록 퍼붓던 폭우에 휩쓸리고 꺾여져 
흉측한 몰골로 패인 뿌리로 얽혀
눈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을 떠받치며 
살아남은 나무들끼리 어깨걸이 하고
저 숲이 조용히 울고 있다.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 일부

  “숲의 나무”에서 한스런 삶의 내력을 읽어낼 정도로 세상은 온통 한恨으로 뒤덮여 있다. 더욱이 “전란보다 무섭다는 시절”을 넘어온 터라 “살아남은” 자체가 한恨 덩어리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한이 농익어 있다는 뜻이다. 삶의 한이 곰삭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삶의 초월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되짚어 보면, 그의 일탈은 삶에 대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결결에 “엉긴 피”를 정화시키며 거듭나기 위한 한풀이 굿과 같은 성스러운 제의였다. 따라서 그의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도 부정적인 소멸의 시간이기보다 긍정적인 생성의 시간으로 해석된다.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으로 표상되는 그의 일탈된 삶은 마침내 그를 참 시 인詩人으로 우화羽化시킨다. 그는 시의 외길로, 「소」의 ‘지순’과 「바위」의 ‘평형’을 넘어 초탈의 세계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

나의 시계視界 안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호시절 가을 볕 뿐일까
광풍에 억수로 비 뿌리는 날 있다. 
남루한 의복을 준비하는 
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선 채로 돌이 되는 수고로움이 
오곡을 다스리는 실체이다 
바람 한 올 거느리고 
영근 이삭의 경배를 받는다 
팔을 벌려 더덩실 춤을 추는 
욕망 한 끝은 비상에 있었다.
참새 떼 제 푼수로 때 없이 놀아도 
큰 눈 속에 들일 뿐이다
먼 들 끝을 지켜보는 나의 심성은 
초동의 하늘처럼 맑다
떨어진 씨앗을 봄들에 싹 틔우는 
대지는 나의 영지다
빈들에 초연히 숙고하는 
동면의 하마선인으로 있다.
­「허수아비」 전문

  가진 것은 “바람 한 올”뿐이지만 “비상”을 꿈꾸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세간의 허물”을 “큰 눈 속에 들”이는 초연한 “하마선인”이야말로 그가 완성한 삶의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을 그리는 순간 그의 삶도 시도 종착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한 초월은 더 이상의 전망도 일탈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규범과 현실의 질곡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반항적 태도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기인이라기보다는 진정한 낭만주의자요 자연인이었다.
  비정한 현대성의 블랙홀에 맞서 일탈과 초월로 일관한 그의 삶과 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왜곡되고 억압된 세계인지를 드러내 줌과 동시에, 우리들 가슴 속에 꺼멓게 죽어 있는 삶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한 열망을 풀무질해 주기도 한다.3) 자신의 인생을 파기하면서까지 펼쳐 보인 그의 시와의 진검 승부는 이미 불가능한 도전이었기에 그 결과를 묻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다만 그 승부의 치열성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것으로 만족함이 옳다.4)


  4.

  “어떤 바람도 아닌 시만이 가득한 세상이면 좋겠다”고 하던 임병호 시인. “소태맛”의 유년과 “술과 쇳덩이”의 젊음을 거쳐, 시와의 진검 승부를 꿈꾸며 일상생활로부터 결연히 일탈하여 시의 세계로 훌쩍 초월해 들어간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같은 그의 한평생은 감히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시의 외길 인생이었다.
  시가 생계의 수단으로, 권위의 증서로, 장신구로, 삶 속에 교묘히 기생하는 이 시대에 그가 보여준 일탈과 초월의 삶으로 쓴 시학은 잃어버린 시의 아우라(Aura)와 삶의 진정성을 되찾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다. 아, 아직도 비루한 세속적 욕망의 진창구렁 속에서 시를 거머쥐려는 내 부끄러운 손아귀여, 가슴아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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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7년 9월 안동 길안 출생. 1969년 ‘글밭’ 창간 동인. 1988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 1996년 ‘한겨레 시 읽기 운동 연합회’ 창립 후, 월간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를 발행. 1999년 ‘안동 민족 문학회’ 초대 회장 역임. 2003년 5월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공단(도서출판 글방, 1990)과,
2)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도서출판 맥향, 1999) 두 권의 시집을 남김. 세상을 등지고 두꺼비와 개구리를 길들이며 함께 놀았다는 옛 중국의 선인.
3)김현은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도서출판 나남, 1990.
4) 조르쥬 바타이유는 “시인은 오직 자신의 파멸을 위해서만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오물이 삶에서 배척받듯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운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하고 피상적인 욕구들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을 선택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 하며, 진정한 시정신은 자기 파멸로부터 빚어진다고 본다. 조르쥬 바타이유, 조한경역, 「저주의 몫」, 문학동네, 2000.

<글밭 26집, 2003년>




임하 금소마을에 있는 시서원을 찾아서
한경희(문학평론가)

  상처 입은 새의 날갯짓
  한 사람이 살다간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기 마련일까, 후손이 든든하게 살아있은들 그 당자가 없으면 속속들이 안 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 사연마다 구구절절 덧말을 붙여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은 참으로 낯설 때 가 많다. 사실, 추억의 호출보다 재구성으로 새롭게 짜여 지는 것이 일반임을 위로 하면서 편하게 길을 나서기로 한다. 오늘 찾아보기로 한 사람은 안동지역 문학의 밑거름이 되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후손이 있을 리 없고, 변변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그 행적이 공식화된 것도 거의 없는 사람이야기이다.
  이 사람이 바로 임병호 시인이다. 시인을 천형으로 알고 살았던 순진 무구의 시인을 들라면 우리는 천상병 시인을 든다. 이에 전혀 뒤지지 않을 우리 동네 시인이 바로 임병호 선생이다. 선생에게 시인은 단순하게 직업에 머무르는 범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술가 반열에 넣어 두 는 것도 아니었다. 지상에 내려온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로 시인을 생각했고, 시 이야기 비슷한 것만 꺼내도 그 흥겨움과 초롱한 눈망울은 천상 소년을 닮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반공이데올로기의 시절을 살면서 비운의 가족사를 겪었던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나고 선생은 다니던 대학도 중간에 그만 둔다. 삶을 전전하다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쇠를 만지는 노동자가 되어 절절한 목소리로 시를 썼다.(<누가 에덴으로 가자하는가, 사상공단>) 노동자의 소외된 삶이 어떤 굴절 없이 그대로 들리는 시집이다. 노동자들의 희망 없는 삶살이를 체험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 서정적인 시집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를 마지막으로 묶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의욕적으로 시 읽기 운동을 앞에서 이끌었고, 엮은 시낭송집을 무료로 직접 나눠주러 다니기도 하였다.
  선생에 관한 일화로 유명한 것은 법흥 고가다리를 공사하던 때, 그 다리 난간에 서서 나비처럼 날았던 것이 두 번이나 있었던 사실이다.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다. 세상을 향해 반드시 할 말이 있었을 시인이란 생각을 한다. 부당한 삶에 모든 날개가 꺾인 어린 새를 만난 기분이다. 발걸음을 익히고, 날갯짓을 배우며 세상을 향해 비상하려는 한 마리 새에게 날개를 빼앗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주벽으로는 밤새 자는 일 없이 면벽 하여 뭔가를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이 또한 선생다운 이야기로 전해온다.
  임병호 시인은 시를 썼으니 당연히 시인으로 부르지만, 시를 살았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표현이다. 시를 살아낸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산 사람일까? 시도 글이거늘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삶, 이것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 정신의 기본이기도 한 것인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시를 살았다는 말은 “~~처럼” 혹은 비슷하게 산 것이 아니라 “시 그대로 살았던” 사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시가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그걸 사는 것으로 한 생을 마감했을까? 이 물음을 들고 임병호 시인의 흔적을 더듬어 보자.

  태화동 언덕배기를 쳐다보다
  임병호 시인의 행적에 관해서 묻자면 김윤한 시인을 통과해야 한다. 시인은 1970년대 당시 인근에서 자취를 하면서 임병호 선생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친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아마 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임은 뻔한 추측이 아닐까. 어디 이야기만 했을까, 당연히 술이 그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김윤한 시인은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 앞에서 당시 드나들던 임병호 시인의 집을 찾아내는 일에 난색을 표했다. 도저히 없던 길이 생기거나 낮은 산만큼 높았던 언덕이 다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30년 전의 안동시 지도라도 봐야 해결될만한 일이 된 것이다.   한때 한전이 있던 자리에서 도로 건너편 언덕에 집이 있었다는데 그 언덕은 너무 낮아져 옛집의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1970년대 이 주변은 택지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지금 평화동 현대아파트 로고 정도 높이의 언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언덕 위에 있던 임병호 시인의 집에 오르면 안동 시내가 훤하게 보였다고 김윤한 시인은 기억하고 있다. 굳이 내가 집이 있던 자리라도 대충 그려달라 하니까 없던 길이 생기고 언덕이 깎여나가서 도저히 집터를 말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지금의 평화동 현대 아파트 102동과 105동 사이에 있는 104동 쪽 부근일 것이라고 일러준다. 결국 선생이 살던 집은 아파트 일부로 포함되고 나머지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아파트 층수만큼 빈 공백의 자리를 갖은 셈이 되는 것인가.
  태화동과 평화동 경계 어디쯤에서 반듯한 한옥 한 채가 규모 있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집 구조를 기억하는 김윤한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체 언덕의 높이는 평화동 현대아파트 높이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고, 그 언덕 위에 아마 4층 양옥건물 정도 높이쯤에 선생의 집이 있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높은 곳에서 숲과 나무며 마당에서 풍기는 여유는 얼마나 다정한 기운이었을까 싶다. 아쉬운 대로 이야기를 전해주다가 김윤한 시인은 현재 누님이 사시는 평화동 집도 90년대에 선생이 사셨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돌아 그 집이 있는 골목길에 닿았다.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들고 나는 사람살이처럼 많은 길을 만들고 넓혀 간다. 그래서 늘 길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물건인가. 감히 문을 두드려 볼 용기는 없었다. 선생의 누님을 뵌다면 무슨 말을 여쭐 용기도 없고 그저 한 때 십여 년 선생이 이곳에서 사셨다는 그 흔적만을 확인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말았다. 대문에서 봐도 삶이 팍팍하거나 바빴을 것이 그대로 보인다. 시를 쓰는 일에 멈추지 않고 시를 살아버린 시인과 가족 관계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꾸러미로 풀어질 내용일까, 짐작하는 일로 멈춘다.
  집 앞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이 골목은 도시의 마을 안이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골목이다. 시멘트로 숨 쉬는 모든 흙길을 다 덮은 골목길에 무슨 특별할 것이 있겠는가. 음력 칠월의 오뉴월 햇살이 내리쬐는 삼복의 기운만이 감지될 뿐이다. 그래도 둑으로 받쳐둔 담장에는 호박 넝쿨이 시원하게 뻗어나가 환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골목 안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녹색생명이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골목길에서 한 5미터 정도 될락 말락 한 거리 안에 선생의 집이 있었다.
  태화동에 있었다는 언덕 위의 멋진 집은 공중에 흩어진 종소리처럼 아련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그곳이 택지로 개발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은 언덕의 흙이 깎이고 나무가 뽑혀나갈 때 함께 사라져 갔을 것이다. 마을이 차츰 개발되고 도시화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함께 살던 공동체가 흩어지는 직접적인 상실 이외 추억이라 부를 동네의 풍경 전 부를 다 놓치고 만다. 어디를 옮겨가 산들 원래 살던 마을의 생활과 비교 되랴. 택지개발과 댐 수몰 등 근대의 안동 역시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애환을 남기는 시간이기도 했음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평화동에 있는 아담하고 나지막한 선생의 집 역시 안을 드려다 볼 수 없으니 뭐라 집을 두고 할 말은 많지 않다. 누님이 사신다니 선생과 관련한 과거의 정보가 필요하면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김윤한 시인의 말에 따르면 사람 오는 걸 반겨하시는 따뜻한 분이라고 하시니. 그러나 그 문 앞에서 들어서지 못한 건 방문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집을 둘러보는 일 이외의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문 안으로 들어가 집 구조를 한번 보는 것은 해보고 싶은 일이었으나 용기가 좀 부족하였다.

  길안초등학교 사택을 두리번거리다
  임병호 시인은 아버지가 교사였던 터라 길안초등학교 사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길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택으로 추측 되는 건물이 세 채가 있었는데 이제는 실습원 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다. 아담한 양옥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정겨운 집 구조를 지녔다. 각 그 건물 앞에는 텃밭처럼 옥수수며 들깨, 콩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봉숭아며 여름 꽃들도 있었는데 특히 키 높은 해바라기가 돋보였다. 실습원이란 이름에 손색이 전혀 없을 정도이다.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농사를 지었나 싶을 정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이 불편했을 것이니 길안면으로 발령이 난 교 사들 중에는 사택에 사는 분이 더러 있었을 것이다. 나지막한 양옥 세 채는 바로 그 때 전근으로 들고나던 교사들의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임병호 시인이 이곳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집이 한 채만 달랑 있으면 한적한 시골에서 무섭기도 할 것이지만 세 채가 줄을 맞춰 나란히 있었으니 나름대로 즐거운 이웃으로 살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집은 모두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었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다만, 마을 아이인지 꼬마가 잠시 꽃구경을 다녀가는 게 보이긴 했다.
  운동장 가로 늠름하게 서 있는 플라타너스는 자기의 몸을 거피라도 하는 듯 한 겹 벗겨 내기를 시작했다. 어떤 나무는 수북하게 자기 몸의 일부였던 껍질을 사방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 그늘에 앉아서 하늘을 보 고 주변을 살피니 이 학교는 산 안에 포근하게 놓여 있다. 영천방향으로 길이 곧게 시원하게 뚫린 쪽으로 문을 만들어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쪽으로도 산이 든든하게 앉아 있었다. 둥근 곡선의 산 능선이 출렁거리며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감싸고 있는 형국이니, 아담하고 포근한 감이 든다.
  학교의 정문은 길을 돌아들어 오는데 꼭 규모가 큰 집을 들어서는 것처럼 고색창연한 기운이 감돈다. 길안초등학교는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듬어졌던 곳인가 보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치 가정집 정원처럼 아기자기하게 손이 많이 갔을 여러 조형물이 보인다. 물론 이 멋진 조경에 대한 찬사는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것이지, 현재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잔디가 푸른 정원에는 기린, 코끼리 등의 동물상과 민족의 영웅으로 누구나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첨성대도 의젓하게 보인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안면에 서식하는 풀의 이름을 모아 번호를 매겨두고 그 각각의 풀을 번호에 따라 심어둔 것이다. 백과사전으로 풀 그림이나 사진을 뚫어지게 봐도 그걸 알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번 실제 풀을 보고나면 그 풀의 모양과 이름은 쉽게 기억할 수 있다. 현장교육이 뭔지 실감나게 하는 대목을 만난 것이다. 우리고장의 들풀이란 간판에는 제비꽃, 달개비, 민들레, 패랭이꽃, 엉겅퀴, 강아지 풀, 명아주, 씀바귀, 산나리, 질경이가 소개되어 있다. 또, 암석 역시 길안 하천과 산천에 주로 있는 것들을 모아 번호를 매겨 그 돌을 나란히 줄 세워 놓았다. 아마도 시골 초등학교를 가면 어느 학교나 그 지역 과 관련한 특징적인 조형물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놀라운 모습이었다. 아이들을 배려한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시골 사는 아이들이 차츰 줄어드는 현실은 이 현장교육의 마당에도 그대로 보였다. 이미 들풀들 사이에는 다른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실제 알리고자 하는 풀이 어느 것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또, 길안면에 주로 있다는 암석 역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돌에는 돌 이름을 달고 있던 명패가 떨어져나갔거나 돌이 아예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돌 이름과 돌이 같이 있는 곳은 두 곳도 되기 바빴다. 더구나 방학이라 더더욱 풀이 무성하고 관리도 소홀해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2층 건물의 낮은 학교건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교문부터 학교라기보다 정원이 멋진 곳을 찾아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원을 지나고 건물을 통과해야 운동장과 만나는 구조이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수령이 아주 오랠 플라타너스의 몸은 굵고도 드높았다. 식당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가도록 회랑처럼 길을 내고 지붕을 덮은 모습이며, 키가 낮은 기상대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병설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놀이터도 인상적이었다. 험하지 않은 산세와 맑은 물이 흐르는 길안의 풍경은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오동나무의 운치는 어디로 갔을까
  길안초등학교를 나서서 곧장 달리면 임하면 금소마을이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길안과 임하의 경계가 그 지점 어디인 모양이다. 금소는 길쌈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유명한 분이 계시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몇몇 집 담에 삼을 벗겨낸 삼대가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하늘하늘하게 몸을 말리고 섰다. 마을 골목을 지나가다 삼 껍질을 벗기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찾는 시서원이라 제대로 찾아들지 못해서 몇 번을 돌다가, 마침 호박잎 따는 아주머니께 여쭤 보았다.
  길을 헤매다 보니, 안동시내 동네와는 달리 오래된 집과 흙담벽이 스러져가는 집들, 아예 폐가가 된 집이며, 훌륭하게 새 단장을 하고 과거의 행적을 깨끗하게 정리해둔 집이며, 집마다 풍경이 다른 독특함을 잘 구경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시멘트 골목길과는 차이 나는 골목길이다. 이곳에도 시멘트 포장을 해두었으나 그 여유로움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골목길에는 하수도가 아닌 물줄기가 도랑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흐르는 물의 속도가 잘 보였는데 물살이 꽤나 급했다.
  임병호 시인이 돌아가신 게 2003년 봄인데, 그 전에 더러 이 시서원에 모여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땀을 흘리며 찾아낸 시서원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엔 봉숭아가 색색별로 곱게 피어 있었고 이웃집 담장 위엔 이끼도 적당하게 펴있었다. 시서원이 가까워지자 언제나 이곳에 찾아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던 오동나무가 아니 보인다. 키가 정 말 커서 길이 어둔 객들에게 참 좋은 이정표였는데 집을 잘못 찾은 이유도 여기 있었다고 보면 된다. 키가 워낙 커서 세 등분해서 잘린 오동나무는 비닐로 덮어두었다. 오동나무의 싱싱한 잎을 보니 몸통이 잘린 지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순간, 호박잎 따던 아주머니가 “아까 오동나무를 자르던데”라고 뒷말씀을 흐렸던 것이 정확하게 재생되었다. 잘려나간 오동나무 몸통을 살펴보니 중간에 구멍이 뻥 뚫리거나 썩은 몸이 더러 보였다. 아마도 오동나무의 주요 가지와 줄기가 썩어 들어가자 베어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일까. 베어 나간 자리를 들여다보며 서운한 생각이 드는 까닭은 뭘까. 몇 번 오동  나무를 본 것이 전부인데. 둥근 보름달과 오동나무 잎의 조화로운 그림이 잠시 스쳐 지난다. 오동나무는 딸을 낳으면 심어서 시집보낼 때 베어 장롱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악기에 쓰인다는 소리도 있다. 꽃을 보거나 시원한 키를 보려는 사람들이 정원에 즐겨 심을 수도 있다. 빈 집에 베인 오동나무를 보니 선생의 빈 자리를 재삼 확인하는 마음이 들어 많이 서운해진다. 나무의 몸통도 작지 않으나 큰 키 덕분에 잘려 나온 톱밥이 엄청난 양이었다. 그것도 비닐로 잘 덮어놓았다.
  시서원을 지키던 주인이 없으니 마당은 풀들로 무성할 거라 생각했는데, 부지런한 이웃 사람들인지 그 마당에 옥수수, 깨, 콩, 고추 등을 심어서 밭이 되어 있었다. 오랜 장마기간 동안 이들은 쑥쑥 자라 있었고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숲이 되어 있었다. 쪽문이 조그마하게 달린 바깥쪽은 완전히 엎어져서 쪽문도 떨어져나갔고 겨우 장독 몇 개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가족을 잃은 건지 개구리 한 마리만 내 발길에 놀라 팔짝 뛰어 달아날 뿐이다. 거기다가 모기들은 떼로 달려들었다. 대낮에도 카메라 사람 구분하지 않고 어디에나 앉으려고 했고 붙었다. 팔이 그대로 모기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니 그 부산함에도 불구하고 부채 하나 없이 무방비였다. 그렇지만 순진한 어린모기도 나의 손을 피해서 달아나지 못했다. 그 녀석들은 순발력이 떨어져서 모기잡기 게임은 할만 했다.

  시서원으로 불리던 빈집
  몇 해 전 임병호 시인이 작고하시고 시서원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는 날 <글밭>동인을 따라 나섰다. 금소에 있는 산소에 들렀다가 시서원에 오니 선생의 유품이란 특별할 게 없었다. 농사짓기 위해 정리해둔 것들과 간단한 가재도구가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이 나서 살다가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억거리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 떠난 아쉬움이든 다시 못 본다는 유치하나 솔직한 자기 마음에서든 어쨌든.
  그 때도 마당에는 한창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는데 이번처럼 온 마당이 밭이 되는 일은 없었다. 마당 가장자리를 밭으로 만들어 이것저것 조금씩 심어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건네기도 하셨다. 집이 비는 일은 사람이 없을 때 가능한 일이다. 밭이 비면 묵밭이 되고 집이 비면 폐가가 된다. 집에 사람 기운이 없으면 집은 그 형체도 유지하기 힘들게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가끔씩 시골의 폐가를 만나면 그 집 주인의 빈자리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들고 나는 사람의 자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집이다. 오늘 이 빈집에서, 마당가득 밭이 된 시서원에서 떠난 한 시인을 애써 추억하는 일은 무슨 의미나 있으려나.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선생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옛 가옥이던 이곳에 선생이 들어와 계시면서 이곳 이름을 시서원으로 붙였다. 안동 사방에 이름난 서원이 어디 한 두 곳이랴만. 금소마을 안쪽에 자리한 좁고 허름한 고가를 두고 그리 이름을 붙인 연유를 여쭤본 적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서원의 역할처럼 시의 향연을 부를 장소의 의미로 이름을 그리 붙였을 거 같다. 옛 선비에게는 서원과 후학과 정자가 있었다면 시를 살던 시인에게는 시서원과 글밭이라는 문우와 시를 두고 포기 못할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마음에서 시서원이란 공간이 생겨났고, 문우들은 그 그늘을 즐기거나 구경하거나 기웃거리면서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강변의 축제장에서 임병호 시인의 걸개 사진을 걸어두고 기념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많은 글밭의 동인들과 지인들은 한 가지씩 임병호 시인과의 추억담을 꺼냈다. 사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게임에서 항상 떠난 자가 유리하다. 언제나 남은 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도 그 미안함을 노래로 달래고 술로 달래던 것이 떠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미안함 대신 고마움이 크다. 그것은 선생을 알고 지낸 시간 이 지극히 짧았다는 증거도 된다. 안동의 문학활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일, 특히 글밭의 역사와 안동문인협회의 역사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누가 있어 시를 살며, 시를 나눌 문우들의 향연을 이끌어낼 것인가를 이 빈집에서 물어본다.

<사랑방 안동 2007년 7·8월호>




온 몸으로 시詩를 살다간 시인
- 임병호 시인을 말한다

김윤한(시인, 글밭 동인)


1. 삶 자체가 시였던 시인

  임병호 시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해인 1978년쯤이었다. 나도 학업 이상으로 시에 심취해 있었을 때라 선배 시인들을 더러 따라다녔다. 그럴 즈음 괴상한(?) 성격의 시인 한 분이 있다고 해서 어렵게 만났는데 시인의 첫 마디는 “야 임마, 시는 뭐 할락고 쓰노?” 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도 시를 쓰는 까닭에 임병호 시인이 작고할 때까지 주변에서 함께 만나고 술 마시고 시를 쓰며 그렇게 지내 왔다. 따라서 후배 시인으로서 훌륭한 한 시인이 시적 조망 없이 역사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데 대한 죄스러움이 많았던 차에 어떻게든 시인과 시가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사명감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자료와 기억을 더듬어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은 1947년 9월 10일에 태어나 2003년 5월 1일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대개의 시인들은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가지고 여기 삼아서 시를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과정이야 어찌됐던 직장과 가정 없이 시 하나만 붙들고 시 하나만 가족과 직장처럼 생각하며 살다 간 드문 시인이다.
  ‘온 몸으로 시를 살다간 시인’이라는 표현이 어쩌면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 시인에 대해 솔직히 이 이상으로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다. 굳이 이 표현을 쓰게 된 것은 임병호 시인은 여느 시인들처럼 단순히 ‘시를 쓰’는 것만이 아닌 시를 온 몸으로 껴안고 시와 함께, 마침내 ‘시와 일 체’가 되어 살아온 시인이기 때문이다.
  따로 상세한 소개가 있겠지만 임병호 시인을 이야기하자면 크게 세 가지를 간과하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 세 가지는 술, 기행奇行, 그리고 그가 온 몸으로 껴안고 평생을 살았던 시다.
  임병호 하면 먼저 술을 떠올릴 정도로 그는 평생 술을 마시며 살았다. 그렇게 된 것은 가족사적인 것, 현실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늘 술을 벗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술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다음으로 요즘 시인들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인지 모르지만 시인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는 객기나 기행 같은 것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시인은 김관식이나 천상병 이상의 기행을 일삼으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 역시 임병호 시의 문을 여는 하나의 열쇠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얼마나 제대로 된 시를 쓰느냐이다. 임병호 시인은 한평생 시를 써 왔고 뒤늦기는 했지만 1988년 여름에 ‘실천문학’을 통해 제도권 문학 안에 발을 들인 시인이다.
  그리고 시집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공단’(1990, 도서출판 글방)은 인간애가 넘쳐흐르는 빼어난 노동시이며 두 번째 시집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1999, 도서출판 맥향)도 차원 높은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시인은 동인회와 문학회를 태동시키는 역할은 물론 선배시인의 시비 건립 주도, 자신의 주도로 매월 소 시집을 발간해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시를 쓰는 것 뿐 아니라 시를 대중화하는 데도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최근 들어 시인에 대한 관심과 함께 문단에서 시인의 유고시집 발간, 전집 발간을 추진하고 있고 그가 낸 시집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공단’을 중심으로 한 노동시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음은 매우 다 행한 일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시인에 대한 자료들이 미흡하기는 하지만 고인 생전에 시를 함께 써 온 사람으로서 시인과 시를 정당하게 조명하는 데 조그만 보탬이라도 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물풀처럼 흔들리던 유년

  임병호 시인은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탓에 본적지는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이지만 태어난 곳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안동시 길 안면 길안국민학교 사택인 천지리 556번지에서 5남 7녀 중 8째, 아들로는 넷째로 태어났다.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했던 탓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 형제자매들이 많기는 했지만 연령차가 많은 탓에 가정생활이 심하게 쪼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이 4살 때쯤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인간의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는 민감한 시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시인의 삶 전체,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소태나무를
산 속 깊이 자라게 하고 
6월의 슬픔은
내 꿈의 한가운데서 통곡으로 깨어난다 
밤과 낮이 어지러이 어우러지던
분노의 기억 위에 선 오늘
또다시 유년의 꿈은 찾아오고 
강변에서 빈 들에서 숲속에서 
나는 항상 쫓기기만 한다 
살점 후들리우는 풍란에 몰려
칡넝쿨 옭아맨 산을 기어오르고 
백골로 우우 일어서는
풀잎 나뭇잎 곁에서 숨을 몰아쉬는 
나는 자꾸만 소태껍질을 씹는다 
유년의 꿈 속 하늘엔 빛이 없다
무명 반바지를 입은 목이 가느다란 나는 
혼자이고 어린 의식엔
쓴 소태맛과 회색뿐이다.
­「유년의 꿈」 전문

  어머니가 없는 어린 시절은 시인을 늘 불안하게 했다. ‘강변에서 빈들에서 숲속에서 / 나는 항상 쫓기기만 한다’거나 ‘유년의 꿈 속 하늘 엔 빛이 없다 / 무명 반바지를 입은 목이 가느다란 나는 / 혼자이고 어린 의식엔 / 쓴 소태맛과 회색뿐이다.’라는 독백에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시인의 유년을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느끼게 한다.

바르게 살라 바르게 살라 
알몸 마루 끝에 내세워져 
매를 맞던 시절이 있었다
­「못 펴기」 일부

  시골의 다른 아이들처럼 극도로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어린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과 부재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시 ‘못 펴기’에서 보듯 시인의 상실감을 어루만져주기 보다는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는 ‘바르게 살라’며 ‘알몸 마루 끝에 세워져 / 매를 맞’ 던 기억처럼 오히려 더 엄격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전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국민학교를 일곱 차례나 전학을 다녀야 했을 정도였으니 어디 한 곳 제대로 뿌리 내리고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국민학교는 대구의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는 다시 안동에 돌아와 안동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다시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생전에 듣기로 고등학교에서는 자동차학과를 나온 것으로 들었다. 아마도 그 시기에는 혼자서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어린 시절은 늘 어느 한 곳에 의지하거나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홀로 성묫길에
십 년 강산이 변했다 
죄가 미늘로 내려 
황토엔 피맺힌 맨발이다
구름은 산소 곁에 나를 누이고 
가을별만 서럽게 쌓인다
물여울에 길을 잃고 망연한 아들을 
어머니는 토분으로만 보신다
내가 흙일 날은 언제일까 
돌아오는 밤, 하늘의 별들이 차다.
­「시제時祭」 전문

  이러한 부재와 상실의 의식은 성년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데 ‘구름은 산소 곁에 나를 누이고 / 가을별만 서럽게 쌓인다 // 물여울에 길을 잃고 망연한 아들을 / 어머니는 토분으로만 보신다’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지속적으로 그의 시편에 등장하곤 한다.
  중고등학교에 들면서 시인은 유독 한하운의 시를 좋아했고 이에 깊에 천착했다고 술회하곤 했는데 천형인 한센병으로 인한 상실감을 처절한 의식으로 표현했던 한하운의 시에서 시인이 어떤 강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3. 나비가 되고 싶었던 시인

  시인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앙대학교 이공학부에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자동차학과를,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공학부, 특히 시인 이상처럼 건축분야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했던 것으로 듣고 있다. 훗날 시인은 이러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의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톱밥 난로 부품, 농기계 등의 설계를 손수해서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고 상품화가 되기도 했다. 상품화 되지는 않았지만 사십 중반쯤에는 새로운 형태의 콜라 병을 설계해서 특허를 얻은 일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않은 시기, 시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 이상으로 생애에 영향을 준 큰 사건이 발생한다. 1968년 8월, 당시 최대 규모의 공안사건으로 일컬어지던 통일혁명당 사건에 누님의 남편 김종태가 주동으로 검거되어 1969년 7월, 사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누님도 오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인의 가정은 일대 큰 충격과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당시 시인은 대학 1~2학년 때로 대학 생활에 적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중이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관계 기관에 끌려가 고문도 받고 전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해병대에 징집되어 복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시인은 평소 시국사건이나 이념 논쟁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피하는 것은 물론, 특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할 정도로 화를 내기도 했다.
  대학 생활로 심리적 안정을 찾아가던 시인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돌이킬 수 없는 큰 정신적 충격과 함께 일생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고 어릴 적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과 함께 시작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해병대를 제대한 시인이 다시 대학 복학을 하지 못한 채 서울 어느 곳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한 것으로 들었다. 가정 사정과 분위기 때문에 복학을 하기 어려운 여건도 있었고 친인척의 공안사건으로 취업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식당은 금세 망하고 고향 안동에 내려와 한 때 그가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글밭 동인회(당시에는 청포문학회)를 통해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시대에 절망한 그가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시가 거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 이후 시인은 1970년대 말에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몇 년간 공원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 이후 안동에 있는 주물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있는 주물공장에 취직한 것은 아마도 그가 특허를 받은 주물 톱밥난로 부품과 관련이 있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시인은 어릴 적 물풀처럼 뿌리 내리지 못한 의식이 가족과 직접 관련된 사건으로 더욱 고착화되어 시는 물론 술에도 지나치게 의지하게 되어 날이 갈수록 정상적인 소시민의 생활과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시인에게도 한 때 봄날 돋아나는 새순처럼 파릇한 사랑이 있기도 했다. 시인이 술을 마시면 더러 이야기한 적도 있었는데 해남에 사는 아가씨라고 했다. 1970년대 말 임병호 시인이 안동 낙동강변에서 시화전을 할 때 안동까지 온 적도 있고 결혼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고 시인이 술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생활력이 부재했던 시인은 어느 날 그 해남 아가씨를 만나 결혼 조건으로 “평생 나를 먹여 살릴 자신이 있으면 결혼을 하자.”고 제안했더니 그 아가씨가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고 하며 쓴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꽤 오랫동안 애틋한 연애편지가 오갔고 거리는 멀었지만 만남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세상은 넓었지만 발붙일 곳은 없었고 불씨처럼 피어나려 했던 젊은 날의 사랑도 이내 시들고 말았다. 그 이후 시인은 더욱 더 방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시인을 위로해주는 것은 오로지 술과 시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시인은 늘 나비처럼 홀가분하게 어두운 세상으로 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

날으는 것은 두렵다 
날으는 것은 두렵다 
날으는 것은 두렵다 
산에
산에
조선의 산에
머얼리서 찾아온 이의 손끝에 올려진 

한 송이.
­「나비·3」 전문

얼마나 커다란 원으로 흐를려나 
동토 위에 내리는 빛을 지켜보며 
바람에 눕던 풀들을 기억하며 
너와 나와
잊혀진 모든 것들은 
그렇게 실려가면 된다 
물을 보라
나비가 그 쭉지에다 
무엇을 그렸는가.
­「나비·6」 전문

  1980년대 그의 일상은 거의 매일 술로 보냈고 그렇지 않은 날 새벽에는 시를 썼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생산적인 노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제5공화국 시절이었고 그때는 전과자나 부랑아들을 삼청교육대로 잡아 보내던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가족의 공안사건으로 해병대에 강제징집 되었던 시인으로서는 가족의 전력과 자신의 현실을 돌아볼 때 삼청교육대에 잡혀갈 수도 있다는 대단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것과 힘든 세상을 탈출하는 것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오르는 것만이 전부였다.
  마침내 시인은 마지막 돌파구를 통과하는 심정으로 1981년 겨울 어느 날, 많은 술을 마신 채 안동시 법흥교에서 나비처럼 강바닥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가 추락한 곳은 엷은 얼음판, 결국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고 몸만 꽁꽁 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나 시인은 며칠 뒤인지 몇 달 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법흥교에서 투신, 결국 평생 완전하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해서 시인은 죽을 때까지 평생 허리와 신장 질환을 안고 살아야 했다. 대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일은 모면 했지만 너무나 서글픈 한 시대의 비극이었다.
  후에 언젠가 내가 ‘투신’ 한 이유를 묻자 술에 잔뜩 취해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 시인의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4. 술에 절어 지냈던 평생, 그리고 기행奇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인이 겪었던 일은 한편으로는 한 가족사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대한민국의 아프고 쓰라린 현대사의 한 단면이 통째로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현실 앞에 시인이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픈 현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은 정신적인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맑은 술과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시’, 또 다른 하나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행이었다.
  내가 시인과 함께 교유를 한 지는 25년 정도가 된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술에 젖어 지냈다. 시인은 한 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시인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함께 자는 일도 더러 있었는데 밤에 술을 마시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시인은 혼자 밤새도록 벽을 보고 혼자 독백을 하며 아침까지 술을 마시기가 일쑤였다.

왜 그리 술을 마시는가 
산이라든지
강이라든지
풀잎이라든지 꽃잎이라든지 
구름이든
천둥이든
저 억수같은 비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믐 그 깜깜한 밤이든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 「문답」 전문

  시인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아침이든 / 저녁이든 / 그믐 그 깜깜 한 밤이든 //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가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현실은 그 이상으로 그에게 자꾸 눈물이 나게 했고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시게 되면 더욱 슬퍼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시인이 한 번 술을 마시게 되면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지칠 정도로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어지간히 술에 단련된 사람이 아니면 그 술자리가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면 너무나 천진해져서 술자리를 이끌곤 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지인의 가게나 집에 장미꽃 한 송이를 사서 불쑥 내미는 엉뚱함과 순진무구한 점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병호 시인은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피곤한’ 사람으로 흔히 이야기했다.

추로지향 안동의 술을 마시면 
열두 색 파라핀 색소로 취해온다 
흰 색과 검은 색 사이에 가지런한 
열 개의 파라핀을 녹여가며 
허물어져 가면
우리의 돈키호테는 
휘황찬란한 별들이 보내주는 
빛나는 관을 머리에 쓰고
두 손에 번쩍이는 모순을 들고 
사랑하는 산쵸판자에 이끌려 
우기가 몰려오는
거센 바람 속이 길 위에 선다.
勇者를 기다리다 지쳐
죄 숨어버리고 없는 광장에서
한 마당 살풀이를 벌이고 나면
백마 로시난테는 허연 거품을 뿜으며 
능수버들 늘어선 강변으로 내닫고 
희고 검은 길
하늘로 이는 강둑에서
한 시대의 잠언을 기록한다.
‘역사는 밝음과 어둠 그 과정의
하나씩 빛들이 어울어 이루는 조화이다.’ 
한 시인의 매화 맑은 향내를 찾아 
돈키호테는 오늘 허물어지듯 길을 간다.
­「돈키호테」 전문

  시인은 스스로를 ‘돈키호테’에 비유할 정도로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자재한 삶을 살았다.
  시인은 서울에서 잠시 식당을 경영할 때와 부산의 사상공단에 잠시 취업했을 때, 그리고 안동의 주물공장에 취직해 있을 때 이후, 특히 1980년대 법흥교 투신 이후에는 직장도 수입도 거의 전무했다.
  그럼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씩은 서울이나 부산 등 전국으로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으면 글밭 동인이나 문우를 찾아가 당당한 어조로 “만 원만 다오”라고 이야기했다. 서울까지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 만 원을 더 얹어 드리지만 요구한 금액 이상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돈을 얻어 쓰더라도 전혀 비굴함 없이 당당함. 그런 것은 우리가 흔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병호 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을 나선 시인은 서울에 가면 서울의 시인에게서, 부산에 가면 부산의 시인한테서 술을 얻어 마시고 다시 안동으로 오는 차비를 얻어서 다시 돌아와 시가지를 비척이며 활보하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은 안 해 봤지만 안동으로 돌아오는 차비를 마련하지 못해 심지어 ‘귀천’ 찻집에 가서 천상병 시인의 부인에게 여비를 꿔서 돌아온 일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시골 면 지역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 앞에 임병호 시인이 와 있었다. 둘이서 대폿집에서 술을 한없이 마시고는 시인을 재워 드려야 하는데 내가 신혼 단칸방에 살 때여서 시인을 따로 재울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나와 아내, 임병호 시인이 한 방에 잘 수밖에 없었는 데 한참을 자다가 보니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임병호 시인 잘 아느냐고” 그래서 옆에 함께 자고 있다고 그랬더니 “여기에도 임병호란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방에 돌아와 보니 시인이 자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담요는 시인이 싼 오줌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시인이 새벽에 잠을 깨어보니 벌써 오줌은 싼 상태였고 신혼방에 함께 자기도 뭣해서 안동시내로 돌아가려다 훈련을 하던 예비군들에게 잡혀 파출소로 오게 된 것. 그런데 파출소에서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대며 소란을 피우는 시인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나를 부른 것이었다. 이러한 상식 밖의 기행은 만날 때마다 거의 한 가지씩 있었던 것 같다.
  법흥교에서 투신하여 다친 이후에는 소변을 잘 가리지 못했다. 그래서 성기에다 기다란 튜브 같은 것을 끼워서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초기에는 스스로 소변을 가릴 수 없을 정도여서 튜브에 오줌이 차면 화장실에 가서 튜브에 고인 오줌을 빼어 내곤 했다. 몇 년이 지나서는 튜브 대신 콘돔을 끼고 다니기도 했지만 불편한 허리 때문에 걸음은 늘 비척거렸고 지독한 신장염은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 다녔다.
  한 번은 어느 글 쓰는 지인 서넛이 함께 거의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시인은 벌써 오줌을 가리지 못해 바닥에 흥건히 실례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차고 있던 튜브에서 넘쳐 나온 것은 오줌이라기보다 시뻘건 핏물이었다. 무심코 방문을 열었던 음식점 주인이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시인과 함께 안동역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날씨도 매우 추웠는데 노숙자들이 역 광장에 쫓겨 나와 떨고 있었다. 그러자 시인은 가게에서 소주를 사서는 그들 노숙자들이 먹던 밥그릇에다 따라서 함께 마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물론 나는 자리가 거북해서 금세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지만.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던지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 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삼일장취의 명정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시속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땅이
내 사는 곳이었으면 참 좋겠다. ­「명정酩酊」 전문

  시인에게 술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그래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생 술을 마셔댔고 평생 술을 마시다 돌아갔다. 술은 일생의 벗이요 위안처였다. 그의 시 ‘명정’은 술과 관련한 시인의 모습과 현실과 생각을 오롯이 쏟아낸 시인의 ‘술사리’와 같은 시이다. 생전에도 시인은 시 ‘명정’을 유난히 아꼈고 몇 차례 다시 발표하기도 했다. 주위에서도 자신도 이 시를 대표시라고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에 대한 술 이야기와 이와 관련된 기행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술과 기행을 빼놓고는 그의 시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시 ‘명정’을 비롯한 술에 대한 시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할 정도로.


5. 사상공단 시절, 빼어난 노동시

  시인이 ‘글밭’ 동인으로서 오랫동안 시를 써 왔고 1988년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지만 첫 시집을 낸 것은 44세 되던 1990년이었다. 시집 제목은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공단’ 아마도 그 시기에는 노동 시가 많이 읽힐 때여서 출판사에서 시집 출판을 제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해병대를 제대한 것이 70년대 초반이고 한 때 서울에서 식당을 경영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시인이 부산 사상공단에서 공원 생활을 한 것은 1970대 후반쯤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억하기에 80년대 초까지도 시인은 어느 한 곳에 주소를 둔 적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불행한 가족 사 때문에 당연히 문제가 되기 때문에 번듯한 직장을 구해 취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절차가 생략된 공단 노무자로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도 모른다.

참으로 쉬운 일도 있다 
담벼락을 따라 걷다 보면
녹슨 철문을 만나고
작은 문을 두드려 경비원을 찾을 일이다 
삶이 있는 곳 어디든 따라 나서겠다던 
주민등록도 이력도
커다란 불신의 입이었던 
신원증명도 재산 보증도
그 흔한 수고로움의 표시도 
이들은 요구하지 않는다
조금은 고단하겠지만, 처음이라 부족할 게요 
술과 담배는 여기에 있고
불편하오만 저기서 숙식을 
내일 일찌거니 출근하시오, 
쉬운 일이다
마음을 가난히 하고 
몸을 굽혀 밥을 구하고
생각하지 않음으로 무료하지 않는 
내일은 그저 오늘 만큼이면 족한 
삶에는
참으로 쉬운 일도 있다.
­「취업」 전문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간단한 절차를 거쳐 공원 노릇을 하며 지낸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단의 평범한 외형적인 모습만 보이지만 그 공단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소중한 삶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꿈을 키우며 살아간다.
  시인은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이들의 삶에 주목하며 ‘사상공단의 시’를 쓰기 시작한다. 주목할 것은 ‘사상공단’의 시는 다른 여느 노동시처럼 사용자와 고용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사측을 향해 언성을 높여 소리치며 싸우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임병호 시인의 노동시적 가치가 차별화되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피상적이 아닌 노동자들의 삶 속에 함께 들어가 함께 술 마시며 고민하며 그들의 꿈과 삶을 지극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려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노동시가 더욱 진솔하게 우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이웃 난로공장이 넘어졌다
공단 사람들은 조그맣게 술렁거렸을 뿐 
백여 명 공원들은
닫혀진 문 밖으로 몰려
붉게 쳐진 글을 읽고 분개하고는 
하나둘씩 돌아서 갔다
몇 해를 두고 몇 달을 두고
온 몸으로 매달려 일만 해 온 사람들에게든 
커다란 콘크리트 덩이로 남아있을 뿐인 공장을 
그들도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이 돈을 몰아 오가는 시절에
어디 일할 곳이 없느냐고 술을 나눠 마시고 
연줄 연줄로 새 일자리를 찾아 가고 
구인벽보 밑을 헤매기도 한다
그들은 농성하지 않는다 그곳이 
삶의 발이 아니라고 모두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업」 전문

  순박한 이들은 노동 사상에 의식화되어 있지도 않으며 공장이 부도가 나도 이것을 공장주 탓으로 돌리고 팔뚝 시위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잠시 ‘분개하고는’ 이내 ‘하나둘씩 돌아서’ 떠나갔다. 떠나는 그들은 미련을 가지고 자신들이 일했던 공장을 ‘결코 돌아보지 않’으며 ‘연줄 연줄로 새 일자리를 찾아’ 간다.
  노동현실 인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이러한 시들이 왜 주류가 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개인사적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가족사와 해병대에 강제 징집되었던 이력들 때문에 시인은 노동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여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히려 현실에 대한 담담한 인식이 시인만의 독특한 노동시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고철로 삼천리쯤 떠돌다 
높다랗이 산더미로 쌓여 있다가
내화벽돌 속 1300도 고열로 거듭 타올라 
쇠는 쇠끼리 녹아 흘러라
찌꺼기는 걸러내고 선철 그 매끄러움으로 
살아 숨쉬는 검은 흙을 파헤치고
빼어난 몸으로 다시 태어나라 
철망 밖 개울 저 너머서 밀려나와
다닥다닥 붙은 방 하나씩 삯대 놓고 
쓰러져가며 부서져가며 아들 낳고 딸 낳고 
떠돌이들은 떠돌이들끼리 어운다
사람은 쇠를 닮고 쇠는 사람을 닮아
오늘 만들어 부시고 내일 땀 흘려 다듬어 가는 
생명은 고통 위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주물공장」 전문

  시인은 부산 사상공단에 이어 안동에 있는 주물공장에서도 일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시인은 사람도 주물공장의 쇠처럼 ‘내화벽돌 속 1300도 고열로 거듭 타올라 / 쇠는 쇠끼리 녹아 흘러’ 주물작업처럼 ‘찌꺼기는 걸러내고’ ‘빼어난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사람은 쇠를 닮고 쇠는 사람을 닮아 / 오늘 만들어 부시고 내일 땀 흘려 다듬어가는 / 생명은 고통 위에서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되묻는다. 노동현장의 시가 노동의 가치가 이처럼 인간의 삶과 하나가 되어 시로 아름답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지방에 묻혀 있는 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노동시인에 대해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노동시를 연구하는 대학교수들 을 중심으로 임병호의 노동시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고 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의 연구에 주목한다.


6. 오로지 시가 전부였던 시인

  이 땅에는 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시인이 있고 현재도 수많은 시인이 열심히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되돌아보면 그렇게 많은 시인이 있지만 여기로 시를 쓰거나 액세서리처럼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시인들도 많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에 이 시인처럼 생업을 마다하고 온 몸으로 시만을 위해서 한평생을 살아간 사람이 있을까 반문해보면 적어도 이 시인이야말로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오로지 시만을 쓰며 살아간 진정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만일 시인이 술과 객기만 가지고 적당히 시 몇 줄이나 쓰다가 갔다면 그냥 술과 기행을 일삼다가 죽은 시인으로만 기억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가족도 없이 뚜렷한 직업도 없이 열심히 시를 써 왔고 더욱이 이 세상을 시가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몸을 바쳐 왔기에 더욱 더 시인으로서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습작을 해왔으며 대학에 다니면서 주말과 방학을 이용, 안동 지역의 문학도들과 어울리면서 ‘글밭’ 동인회의 모태인 청포문학동인회를 김성영, 변호섭, 조병국, 임명삼 등과 함께 창립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 시기에는 인쇄소마다 활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활자가 모자라면 다른 인쇄소를 돌며 활자를 찾아 동인지 조판을 해왔다고 전해 온다. 1969년에 창간한 안동의 ‘글밭’동인회는 1949년 창간된 ‘죽순’ 동인지와 함께 현재까지 꾸준히 발간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 인지로 손꼽히고 있다.
  시인은 이후 1997년까지 ‘글밭’ 동인지 7집을 발간하고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창립과 안동문학 창간에도 역할을 했고 안동문학 창간을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글밭 동인지를 1985년 복간하는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글밭‘의 주축으로 동인지 발간에 매달렸다.
  또한 안동에 살면서 안동의 현대시문학의 길을 개척해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신승박 시인의 시비 건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 1993년 가을, 안동시 정하동 영호루 경내에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어 1998년에는 안동민족문학회를 창립했고 이어 ‘안동민족문학’ 창간호를 발행하는 등 지역 문단을 활성화하는데 앞장서 왔다.
  이와 함께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일은 ‘시 읽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일이었다. 시인은 ‘한겨레 시 읽기 운동 연합회’를 창립하고 1996년 5월부터 2003년 4월 타계할 때까지 매월 B5 반 장 크기 40~50쪽 내외의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 소 책자를 발간해서 지역을 돌며 배포하여 시민들이 시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7년 동안 발간한 소 책자는 무려 3만여 부에 이를 정도이다.
  소 책자를 매월 발행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재정적 문제였다. 시인은 소 책자가 발행 되는 대로 이를 들고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배포하고 후원금으로 만 원 또는 5천 원씩 받아 출판에 보태는 등 어렵게 오로지 발품만으로 시 읽기 운동을 해 왔다. 그리고 이 소 책자를 가지고 매월 시내 번화가에서 ‘길거리 시낭송회’를 열었다.
  세상을 뜨기 수 년 전에는 고향마을인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마을 빈 고가를 빌려 스스로 ‘시서원詩書院’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에서 거처 하며 사계절을 시만 생각하며 술 마시며 그렇게 시선詩仙처럼 살기도 했다. 어느 핸가는 ‘시서원 문학 워크숍’을 열어 전국의 시인들을 초청해 시낭송과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처럼 시인의 모든 삶은 시로부터 시작하고 온몸을 다 바쳐 시인으로 살다가 시인으로 이 세상을 마친 인물이다. 평생을 술과 기행으로 보냈지만 그가 한평생 온몸을 다 던져서 사랑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오로지 ‘시’ 뿐이었다.
  달리 가족이 없고 결혼조차 해본 적 없는 그에게는 시가 부인이었고 자식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 시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세계, ‘포엠토피아’를 꿈꾸던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정한 시인이었다.

시를 읽는 소녀가 사는 마을은 향기롭다 
언 땅 속 어디쯤에
시의 삶은 자라고 있을까
풀꽃은 상한 잎 위로 새싹에 쌓여 피고 
외진 산길을 따라 골짜기의 바람은 어디로 
시의 향기를 나를까
작고 어여쁜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시를 닮은 소년이 사는 마을은 싱그럽다 
미루나무 끝 가지 위
시의 하늘은 얼마나 맑은가
푸름이 쏟아내려 큰 강물로 거침없이 흐르고 
떡갈나무 숲에 이는
시의 함성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높고 커다란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풋풋하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시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자유롭다 
풀은 풀끼리 나무는 나무들끼리 바알갛게 
시의 열매를 살찌운다
이웃들 함께 땀 배인 이랑에서 추수를 감사하고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눈부신
시의 빛깔은 자유로움이다
밝고 깨끗한 것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찬란하고 오랜 시의 길을 가자.
­「시가 있는 마을」 전문

  2003년 봄 어느 날부터 한동안 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시간이 날 때면 그가 사는 안동 옥동 11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토요일 밤새도록 술을 함께 마시기도 했지만 바쁜 탓에 만나지 못하고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의 가까운 가족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병호 시인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 다리에서 투신해서 불편했던 몸이 오랜 술 탓에 급격히 나빠졌고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신장염이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했다. 아무리 병원을 가자고 사정해도 끝끝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거부하다가 강제로 병원행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사상공단’ 시를 썼던 시인 그는 1947년 이 땅에 와서 2003년 노동절인 5월 1일에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안동의 문인들이 모두 함께 모여 눈물을 섞어 지역 최초의 문인장으로  가는 넋을 기렸다.
  평생 술에 젖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항상 또렷하게 살아있었던 시인, 그의 유언대로 마침내 죽어서는 어릴 적 떠나보냈던 그렇게도 그립던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구름 골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시인이란 명사에는 시 뿐만 아니라 시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면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시대를 살았던 가장 처절하고도 진실한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간 한국시학 2012년 여름호>





임병호 시인 귀천 10주기 추모 문집


인 쇄·2013년 4월 25일 발 행·2013년 5월 1일 지은이·임병호 외
편 집·글밭동인회 발행인·송복희 펴낸곳·도서출판 영남사
760­220 안동시 광석 1길 27-29
☎ 054­854­5566~7
등록번호 88­3호
ISBN 978-89-7790-109-4
값 15,000원

* 잘못된 책은 바꿔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