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엮으면서
그 젊은 날 언젠가부터 시는 내게로 왔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행성에 던져진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자각하고서부터였을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나의 시는 아마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는 나에게로 왔다.
철 따라 저 산과 들에서 무시로 피고 지는 나뭇잎이나 꽃들처럼,
바람 불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저 대양의 물결처럼,
광대무변한 우주의 저편에서 명멸하는 무수한 별빛들처럼,
시는 가끔씩 그렇게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젊은 날 한때 나는 시가 땅 위에서 가장 빛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로 시는 신산辛酸한 내 삶 속에서 베어나오는 아픔과 절망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이나 절규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시를 쓰면 어떤 때는 잠시나마 마음에 안식을 느끼기도 했지만, 끝내 나는 시에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연이 닿는 대로 종교를 만나 구도의 길을 걸으며 수행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세월 흘러 노년에 이른 요즈음에 나는 시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내마음에서 일어나는 보푸라기나 먼지, 티끌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거기로 가고 싶은 것이다.
가고 싶다
사람들의 말 이제 들려오지 않고
내 말조차 사라진 외진 오솔길
아니
내 생각의 가는 길마저
문득 끊어진
어느 절벽의
높고 푸른
거기
<졸시 ‘거기’>
이제 근년에 쓰여진 시편들과 전날 펴낸 시집들에 싣지 못한 내 소박한 시편들을 모아 조촐한 시집을 엮는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빚을 진 이 땅의 문우들에게 삼가 드린다.
2022년 코로나 멀어져 가는 봄날에
1부
샹그릴라
살아가면
갈수록
샹그릴라
샹그릴라 그 먼 불빛
찾아가고 싶네
아픈 다리 절며 절며
흙먼지 모래바람 사막을 건너
자갈길 피 흘리며
세월강 거친 물결 노 저어 저어
천 리 벼랑길 차마고도
얼음길 오체투지 미끄러지며
샹그릴라
샹그릴라 그 불빛
멀고도 먼데
*샹그릴라(Shangri-La)는 1930년대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나오는 숨겨진 낙원(Paradise, 이상향)의 이름이다.
티베트 오지의 쿤룬 산맥에 있는, 티베트어로 '푸른 달빛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티베트 불교 성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장소보다 아름다우며 땅에는 풍부한 금광이, 대기에는 장수하게 해 주는 성분이 있는 지상낙원. 종교와 언어에 관계 없이 이 세상의 근원적인 지혜를 탐구할 수 있는 곳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어떤 종교라도 결국 목적하는 바는 한 가지이며, 인류의 근원적인 지혜를 통해 인간을 자멸로부터 구하고 세상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가을날에
저 숲 여름날엔 마냥 푸르기만 하여서
한 겨레붙이들 모인 집성촌 같더니
이 가을날 온갖 빛깔로 물들어
각성바지 마을이었던 걸 이제야 알겠네
여기 많이 모인 축제의 군중들도
어우렁더우렁 정다운 이웃인 듯도 하지만
돌아갈 때는 산산이 흩어져
니 집 내 집 골목길로만 잦아들듯
우리도 마지막 날엔
모두 다른 빛깔의 단풍잎 기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려 내려 쌓이는
고요한 황혼의 마을에 다다르리라
이윽고 캄캄한 그 밤하늘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의 나라가 펼쳐지고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 다른 빛깔로
오직 제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려니
풍경
검은 염색 머리 꽃단장한
무리들 속
홀로 우뚝 수수한
은발의 여인을 보네
초록을 버리고
단풍 낙엽 지는 나무들 뒤으로
단청丹靑이 빛을 잃어
사그라드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생명의 사원을 보느니
강 건너기
남자들 앞에는 가끔씩
여자의 강이 가로 막는다
보통은 수월하게들 잘 건너지만
가끔은 홍수 져서
흙탕물 범람하는 날엔
위험해 지지
물속에 숨어 일격의 순간을 노리는
악어들의 습격을 받는
저 누우떼들처럼
가을날
푸르른 날은 가고
이 가을날
푸르디 푸르던 날은
정말 다 가버리고
지금
여기
이 늦은 가을날
저녁 어스름.
대오大悟
될 듯 될 듯하던 일이
자꾸 뒤집어져 마음 상하는 날엔
오르막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지
인생지사 새옹지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건데 하다가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라는 법어라도 만나면
깊은 산골 절간처럼
한동안은 그윽해지지만
그 마음 또다시 뒤집어지는 날은
배추전을 한 번 부쳐봅니다.
어디 여러 번 뒤집지 않고
노릇노릇 맛깔 나는
배추전 구어지던가요
*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이 변화한다
대오大悟
될 듯 될 듯하던 일이
자꾸 뒤집어져 마음 상하는 날엔
오르막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지
인생지사 새옹지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건데 하다가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라는 법어라도 만나면
깊은 산골 절간처럼
한동안은 그윽해지지만
그 마음 또다시 뒤집어지는 날은
배추전을 한 번 부쳐봅니다.
어디 여러 번 뒤집지 않고
노릇노릇 맛깔 나는
배추전 구어지던가요
*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이 변화한다
꽃 시절에
제철 맞은 나무들이란
온 나무들
하나 없이 죄다 꽃피웠네
혼신을 다해
봉오리만 맺다가
죽어간 것들도
저기에는 있는데
살아 생전
한 번도 꽃 피우지 못한
그대
지금쯤 어느 행성行星의
다사로운 한 녘에서
몇 송이 봉오리라도
맺고는 있는가.
그 길
참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먼 길이여
너무 멀어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던
그 길이언만
바로 옆에 있었던 듯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는 그 길
그 길 한 번 따라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멀고도 먼 길이여
이 세상길 모두 끊어지고
홀로 가는 첫길 너무 낯설어
더더욱 아득 먼 길이여
유용주
간밤에
덩치가 황소만 한 산돝 한 마리
그 억센 주둥이로
내 가꾸던 글밭을
들쑤시고 지나갔다
젊은 날 한 때 목수였던 시절에도
우뚝 빛나던 시의 집을 지으려
밤낮으로 동분서주했던
그는 이 세상 가장 큰 목수가 된 예수*를
불러내어 친구로 삼았던
그 씩씩한 기상이 대단해 나는
지난밤의 일은 그만 없던 걸로 하였다.
오래 전 술자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그는
체구가 임꺽정처럼 튼실하고
한껏 후덕해 보이기는 했는데
그 뒤 두어 번 기별을 주고 받았을 뿐인데도
나는 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내시인들 중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바
오늘 그의 시선집을 읽으면서
그 연유를 이제 의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질박한 말씨로 못을 박 듯
시의 구절구절 마디마디 옹이 백인
그의 살아온 지난 이야기가
너무나도 큰 울림으로 가슴을 치고 와
*그의 시 ‘가장 큰 목수’의 한 구절
그런 나이
지하철 문이 열리자
노인 한 떼가 우르르 들온다
어디 놀러라도 가는 걸까
저 *지공선사들
아내한테
하루에 곤장 두 대쯤 맞고서라도
고맙게 느낄
그런 나이의
*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을 이르는 말.
금시초문今時初聞
친구들과 놀다가
노래방엘 가자는 날이
그녀는 제일 괴로웠다
음치는 커녕 노래도 곧잘 하고
춤도 한춤 춘다는 그녀
거짓 핑계를 대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노라면
복스런 얼굴에서 영글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엔
아니 그녀의 까막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집에 가서 아무도 몰래
얼굴이 부석부석하도록 울고
몇날 며칠을 캄캄한 밤하늘처럼 보낸다는,
칠십 평생에
이런 얘기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지만
내 등을 후려치는 죽비소리로 들려와
‘나에게는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누구엔가는 캄캄한 그늘이 될 수 있다‘는
죽는 날까지 잊지 말아야 할
칼날같이 빛나는 금언金言이 되었다.
*수이픈 강
오늘도
그 강가에 서면
수이픈 수이픈 소리를 내며
강물은 그날처럼 넘실넘실 흘러내려
돌아오길 바라면 바랄수록
강물은 갈수록 더 큰 소리로
수이픈 수이픈 되뇌며
갈대 갈대들 휘저으며
* 옛날 우리 발해땅이었던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있는 강.나라를 지키려 떠난 군사들이 돌아오기 기다리면서 이 강가에서 눈물짓던 발해인들의 한이 서려있고,연해주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으로 최제형이 말년에 살았던 곳이다.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시신을 화장해 수이푼 강에 뿌려 달라고 하던 보재 이상설 선생님의 유허비가 강가에 서 있다.
수이픈이라는 지명은 발해의 5경 12부 중의 한 부인 ‘솔빈’부가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발해인들의 ‘슬픔’이 서려 있는 강이라고 러시아인들의 발음으로 ‘수이픈’강이라고도 전한다.
‘코로나19경經’(주1)읽기
오랜 시절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우한의 박쥐 천산갑들(주2)의 원혼들이
회심의 반격을 시작해 왔다.
생각보다 쉽게 인간들이
신음하면서 쓰러지자
한층 신이 난 그들이
온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사람들은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거리는 페허처럼 적적해 갔다.
모양도 없고 자취도 없는
이 유령이 불어대는 괴이한 피리소리에 홀리어
사람들은 두려워 대면하기를 꺼리고
여기저기 뿌리도 없는 음모의 안개가 피어나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울부짖는 사이
죽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들은 더욱 더 흥분하여
손오공처럼 수천 수억의 분신으로 화하여
바람보다 빨리 날아서 도시를 넘고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어
지구촌 곳곳을 점령지로 만들어나갔다
거대한 공포가 들불처럼 휩쓸고
음산한 구름이 온 세계의 하늘을 뒤덮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은 동분서주하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 안치할 관이 부족하고
장송곡도 따르는 이들도 없이
주검들은 외딴섬이나 산골짜기로 실려 가
짐승들처럼 무더기로 묻혀 갔다.
이제 우한의 박쥐 천산갑들은
다시는 인간에게 포획당해 학살 당하고
화염에 던져지지 않으리라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사육장과 우리에 갇힌
소들과 돼지와 닭들과 오리들과
질병 예방을 빌미로 살처분 생매장 당한
수천 수억 가축들의 떠돌던 원혼들도 일제히
박쥐와 천산갑들을 부러워하면서
머나먼 서쪽나라 우한의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지난날 한가로이 풀밭을 거닐며 풀을 뜯거나
어미가 새끼들을 불러 함께 모이를 쪼고
밭을 갈며 일손을 도우면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왔던
그들은 언제부턴가 큰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가죽과 털들은 벗겨지고 깎이어
옷과 신발과 장신구들로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피 흘리고 찢기고 잘려진 살은 구워지고 삶겨
맛난 요리로 식탁에 올라
사람들의 배는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주3)
이제 우한은 저 가엾은 짐승들 영혼의 성지가 되는가
박쥐와 천산갑들이 그들의 수호신이 될 날은 언제인가
그리하여
‘식탁 위에 평화 없이 지구에 평화는 없다’는 말(주4)이
현실이 될 날은 또 언제일까
(주1) 이 경의 이름은 본원경本願經(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하려고 세운서원)의 외전外傳에 해 당될 만한 것으로 지은이가 붙인 이름이다.
(주2)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3) ① 너의 배가 죽은 동물의 무덤이 되게 하지 말라. ‘예언자 무함마드, 하디스’
② 뱃속에 들어갈 고기, 고기를 먹은 배, 신은 이 둘 모두를 파괴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6:13’
(주4)현대의 영적 지도자 ‘칭하이무상사’
코로나19경
벌써 한 해가 지난다
돌아보면 정말 끔찍한 시간들
인간의 역사는 거의 늘 비참하지만
이렇게 수모를 겪은 적이 또 있을까
사람의 발새 때만도 못할 것 같은 저 바이러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 냄새도 없는
저 비루한 존재들이 일으킨 난리에
속수무책 당하면서 지리멸렬해 버린
그러면서도 함께 대적하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야 했던
이 비참한 이야기를 후손들은
어떤 전설로 기억할까?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오만했다
머리 위에 까마득 높은 하늘을 이고도
벼락과 뇌우 폭풍과 지진과 해일 홍수의 비참을 겪고도
돌아서면 금방 잊고 두려움을 모르던
우리는 너무 고고했다
제 힘에 겨워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던
어떤 정신 나간 영웅의 만용을 떠받들고 벗삼았던
우리 인간들은 이제껏 제 한몸의 이익을 위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것들을
하나하나 착취하면서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는
자아도취의 역사를 써왔지 아니하였던가
아무 생각 없이 남을 향해 쏜 화살은 언제나
자기를 겨냥하면서 되돌아온다.
그것도 이렇게 치명적인 독화살로
코로나 복음 2
나는 왔다
너희들이 굴리는 바퀴들을 잠시나마 세우기 위해
여기 너희들 곁에 내가 왔다.
너희들이 굴리는 그 바퀴는 너무 크고 너무 빠르다
너희들은 편하기 위해 바퀴를 생각해 냈고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는 바퀴를 만들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저절로 굴러갈 수 있는 바퀴를 만들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만든 바퀴는
처음에는 제 자리에서 맴돌았지만
언젠가부터는 땅위를 구르고 물속을 구르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멀리멀리 우리가 갈 수 없는
낯선 우주 공간을 향할 수 있는 바퀴도 만들었다.
끝없는 탐욕으로 가득한 그 무수한 바퀴들
그 바퀴 때문에 너희들은 편하고 풍족해 갔지만
그 바퀴를 굴리려고 많은 것들이 소모되고
그 바퀴가 지나간 곳은 짓밟히고 파헤쳐지고
더러워져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 가
지금 너희들 삶의 터전이고 후손들이 살아갈
이 행성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워 갔다.
그 바퀴의 구르는 소리는 고요를 깨뜨리고
바람의 길을 휘젓고 사람들은 소음으로 불안해 갔다.
내가 와서 머무는 동안 너희들은
잠시라도 바퀴를 세워서
흐르는 강물과 바닷물은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맑아진 바람은 오염된 먼지와 공기를 날려
사람들의 호흡이 좋아지고
두껍게 쌓인 탁한 대기로 가려졌던
먼데 높은 산맥들이 그 신령스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더니라
그리고
오염으로 더러워졌던 강물은 서서히 살아나
맑아진 물에는 그동안 사라졌던 고기들이 돌아와
세상이 잠시나마 옛모습을 찾기도 하지 않았느냐
이제 나는
일흔에서 여든을 가로지르는
깊디깊은 저 푸른 강물을
무사히 건너갈 거룻배는
열 중 둘을 지나 셋을
넘기지 못한다는데
걸어온 길 너무 아득한
이 황혼녘
지상의 불빛 다 꺼지는 날
알 수 없이 다가올 그날까지
오직 저 하늘만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별을 기다리자
내 노래
내 떠나고 나면
앞뜰의 나무들이란 나무들
모두 잎 피워내지 못할게고
나지 않은 잎들 핑계 삼아
꽃송이들 따라 피어나지 않으리니
무슨 흥에 겨워
벌 나비 날아오르겠느냐
내
지금 여기
떠나고 나면
복실아 나도
벌써 언제부터인가
거실 앞에 오도마니 앉아
덜그럭거리는 수저 소리에 귀를 세우고
뚫어지게 창 안을 들여다 본다
혓바닥으로 주둥이를 싹싹 핥으면서
복실아 나도
철없던 어린 시절 동무네집
밥상에 놓인 잡채 그릇에 마음 뺐겨
그 심술궂은 주인 영감 숟가락질을 따라
내 눈빛은 한없이 오르내리곤 했었지
까까머리 하교길
흰 면발 수북수북 담긴 국수사발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할 때
난전 틀국수집 쳐놓은 흰 포장만
허기진 바람에 애꿎게 펄럭거렸다
내 짧은 도회 유학 시절
집안 어른댁 끼니 때마다
밥상머리 한 모퉁이에
날개짓 서툰 어린 잠자리처럼 붙어 앉아
식객이 되기도 했고
어디서였던가
생시이듯 또렷한
분명 어젯밤 꿈이었다
빈집에 홀로 남기고 온
복실이
북위 삼십 육도에서 남으로
남으로 다섯 시간을 날아온 길을
복실이 제가
날 찾아온 걸까
아니면 내가 북으로
북으로 꿈속길을 거슬러 올라가
홀로 집 지키는
복실이를 찾아간 걸까
2부
어머니산
어머니 산의 품안에 있으면
이야기 속 아이처럼 길을 잃어
어머니 산의 정상을
오를 수가 없습니다.
눈물로 어머니 산을 여의고 나와
그 긴 산 그림자도 닿지 않는
아스라이 먼 곳에 이르러서야
은빛 잔설을 덮어쓴
어머니 산의 꼭대기가
어슴푸레 보일까요.
아내
하늘의 뜻도
알아차린다는 나이의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던 날
비로소 보았네
내 손에 들고 있는
국보급 유리잔 하나
흠도 많고
금도 많이 갔지만
물을 부으면 아직도 철철 넘치는
어리석은 왕께서
함부로 사용하시던
헌 유리잔 하나.
재야在野
조금은 쓸쓸하리라
빈 들녘 찾는 이 없고
먼 바람소리만 가득하리라
수레 한 번 다니지 않는 좁은 들길은
먼지 하나 일지 않고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리라
산이 다가와 아득히 품에 안기고
냇물이 도란거리며 흘러가리라
가장 맑은 소리로 새들이 우짖고
달빛 가득한 뜰 안에
반딧불마저 그만 숨을 죽여라
외등
간밤에 켜두고 잊어버려
아침 햇살 아래 본 외등은
돌아오지 못할 자식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문 걸어 잠그지 못하고
하얗게 밤 밝히며 기다리다가
뜬 눈으로 그만 혼절한 듯 잠든
파리한 어머니의 얼굴 같고나.
늦은 밤
홀로 돌아오는
골목길 어귀
낡은 가게 창문으로
불빛 새어 나온다
사람의 자취 끊어졌는데
홀로 기다리는 등불이여
허리 굽은 늙은 주인은
지금 아마도
문 두드리는 손님 꿈에
웃고 있을 게다.
풍경
하루에 닷 푼밖에 구걸할 수 없는
거지 하나이 있다.
그것마저 앓아누운
아내에게 네 푼을 앗기고
주린 배 움켜쥐고 떨면서도
남의 집 담을 넘을 수 없어
희뿌연 가로등 하나가
그의 어깨를 둥글게 감싸 줄 뿐
가꾸지 않아도 들풀은
산길이나 들길을 가 보아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은 풀들도 어쩔 수 없이 길을 내주고 있다. 그러나 들풀은 짓밟히며 죽어가면서도 길을 많이 내주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다니면 풀들은 다시 살아나 길을 덮는다. 그들은 하늘과 바람과 비와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자란다.
그런데도 가끔씩 불의의 정복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제 땅이라고 그 풀들을 뽑아내고 베어내어 풀들을 없앤다.그리하여 휘파람을 불며 몰아대는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풀들은 죽어간다.
그러나 풀들은 결단코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 정복자의 임종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땅에 정복자의 시신을 묻고 그 무덤 위에서 더욱 무성한 풀숲을 이루어 간다.
저 바람 소리
저 바람 소리 저리 쓸쓸한 건
내 가슴속 한 그루 시든 나뭇잎새 위로
그 바람 스쳐 지나온 까닭이리라.
어둠 속 저 귀뚜리 소리 또 저렇게 밝은 것은
반짝이는 맑은 강물 숨죽이며
내 마음 한 녘을 흐르고 있는 것일 게다
뜰에 핀 귀여운 한 송이 꽃일지라도
그냥 밟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길 쓸데없이 바빠서일 것이니
실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좋은 것 나쁜 것의 얼굴은 다르지 않고
이름조차 따로이 지어져 있지 않다는 일이다.
상강 무렵
늦가을 짧은 해 기울다가
서산 능선 밟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오
응달진 산기슭 한 녘에서
안쓰럽게 발돋움한 채
그늘빛 한 오라기라도 더 받아
마지막 한 톨 씨앗 여물리려는
이름도 모르는
저 난장이 풀 한 그루
때문이라나요
주모
새벽 세 시 무렵
잠도 취한 술꾼들의
이야기 꽃잎도
한 잎 두 잎 지는데
몰래 하품 숨기는 목롯집 주모
밤새워 기도하는
어느 암자의
중년 비구니의 모습이다.
찔레
여름 내내
타드는 욕망으로 짙푸르던 잎새 사이를
가지마다 다닥다닥 가시가 돋아
작은 멧새 한 마리도
깃들지 못하게 하더니
가을볕 맑게 깊어가자
무수한 잎들 다 비워내고
부끄러운 듯
눈부신 속죄의 붉은 열매
드러내었다.
어찌 그렇게
사람은 어찌 그렇게
쉽게 가는 것일까
정도 많고 한도 그지없는데
온 누리에 가득
꽃송이로 피어나던
그 정도 그냥 두고
하얗게 밤을 밝히던
저 숱한 잔별 같은
그 한도 모두 잊고
어찌 그렇게 사람은
저 구름결처럼
갈 수 있는 것일까
어디 어찌 그것뿐이랴
피었다가 지는 것이 어디 꽃뿐이랴
찼다가 이우는 것이 어디 달뿐이랴
흘러왔다 흘러가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다가왔다 멀어지는 것이 어디 임뿐이랴
졌다가 다시 피는 것이 어찌 꽃뿐이랴
이울었다 또 차는 것이 어찌 달뿐이랴
흘러갔다 다시 흘러오는 것이 어찌 강물뿐이랴
멀어졌다 또 다시 오는 것이 어찌 임뿐이랴
쉬울까
세상 등지고 사는 일
쉬울까 사람들 어울려 웃고 울고 사는데
그들 등지고 사는 일
쉬울까 철새들 다들 모여 돌아가는데
제 혼자 남아
사는 일 쉬울까
우물 안 개구리고 혹은 염세주의자라고
잘 대접해 은자라고 하지만
정말 세상 등지고 사는 일 쉽지 않아
이 좁은 등판에 저 너른 세상 등에 지는 일
쉽지 않아 그리고 마지막
이 세상 완전히 등져야 하는 일 너무 어려워
쓰러져 눕는 것 보면
살아서 세상 등지는 일
참 쉽지 않아.
이유
그렇게 우러러 기다림에도
끝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음은
하늘 저에게도 아무러한 간절한 사연
있음이라.
또한 오늘 이렇게 간절히 빌어도
빗줄기 더욱 굵어지는 것도
하늘 그에게는 말 못할 까닭 있으려니
만약 하늘 그의 마음이 너무 너그러워
우리들 저마다의 뜻대로 이루어들 진다면
이 세상 더욱 어지러워질지니.
우리들은 다만
그 간절한 사연이나 말 못할 까닭 알 수 없어
오히려 저 바위처럼
오늘 밤 편히 잠 이룰 수 있구나.
닭
상처 난 닭이
그 무리들에게 상처를 쪼이며
도망 다니는 걸 보았는가
서로 모여 있는 양은 형제의 의가 부럽쟎지만
그들은 남의 상처를 용서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에는 곧잘 눈물을 그렁거리다가
남의 상처를 물어뜯는 그 견고한 부리로
오늘은 또 빙 둘러서서
맛있게 모이를 쪼고 있다
밤바다에서
바람 부는 밤
방파제에 서면
끊임없는 신음 소리
들린다.
너무나 거대한 몸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잠 못 이루는
바다는 너무 완벽한 이상주의자
끝도 없는 해면의 수평을 위해
쉴새 없이 흔들려야 하는 숙명으로
한 시도 잠 못 이루는
형벌을 받고 있다.
분노의 술잔
어리석은 자 곧잘
분노의 술잔을 든다
처음에 그는 옅은 분노로
잔을 채우지만
잔을 비울수록 취해 가
더 진한 분노로
잔을 채운다
잔이 거듭될수록 붉어진 분노로
그의 눈엔 핏발이 늘어가고
비틀거리다 못해 쓰러져
나중에는 단단한 뼈마저 다친다
드디어 정신을 잃고
신음하는 밤을 지나
밝은 햇살 받으면
그는 부신 눈을 가까스로 뜨고
후회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거기
가고 싶다
사람들의 말 이제 들려오지 않고
내 말조차 사라진 외진 오솔길
아니 내 생각의 가는 길마저
문득 끊어진
어느 절벽의
높고 푸른
거기.
향기로운 꽃
그 꽃
정녕 향기롭다면,
깊은 산 험한 바위 서리에
피었다 스러질지라도
이렇듯 고요한 밤엔
온 산을 향기로운 안개로 적시고
마을까지 그윽하게 내려올지니
병인病人
가기 싫어서
이 세상 등지고
정녕 떠나기 싫어서
아편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저 고통은 찾아온다.
누가 모르는가
이 세상 떠날 수 없는 슬픔이
더 할 수 없는 아픔이 되어
저렇게 마지막으로 하소연하는 것을
그러나 언뜻 다시 보아라
영원히 쉴 수 있는 곳을 가기 위해
그는
이 세상 마지막 고통의
숭엄한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을
강가에서
강물이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 것
그건 또 얼마나 정겨운 일이던가
우리들 인생도 때로는 저처럼
휘뚤휘뚤 굽이치며 살 일이다.
세상 먼지 이내로 깔리는 어스름 녘
한 잔 술 앞에 두고
젊은 날엔 소리쳐 내리는 개울물처럼
마냥 흥겨워도 했지만
이제는 바다 가까이 깊어져
소리 내며 굽이칠 일도 바이 없는가
술잔을 들어 들어도
그냥 무덤덤할 뿐
3부 안동시편
천주동 일기
눈이라도 펑펑 내리시는 날엔
찾아오실 발걸음도 끊어질
천주동 올라 먼눈을 보내면
사람들의 마을이 누워서 앓고 있네
까마득 내려다보이는 세상 쪽으로
마음 바람 환하게 불어가는 걸 보면
사람이란 본래 그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게야
바라고 바라보아도 환한 보름달
*천주동 깊고 푸른 산마을에서
*안동 학가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작은 동네
달빛산행
(1)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작은 공원
시멘트 바닥을 깔고 앉아
남은 추석술 한잔한다.
수은등 불빛 너머 파리하니 엷은
보름달
저 달 제 얼굴빛이 아니여
갇혔던 짐승이 제 발로 우리를 찾아들 듯
방금 고향길을 쫓겨오듯 다녀온 동무 하나가
탄식하듯 뇌뱉았다.
산에 올라 옛날 그 모습 한 번 다시 보자며
밤 산행을 다그친다.
오고가는 숱한 차량들 틈을 비집고
시가를 빠져나가니 자욱한 안개다
도회의 외곽을 성채처럼
겹겹이 포위한 무수한 안개의 입자들
(2)
구불구불 울퉁불퉁 이어지는 십 리 길
가파른 임도를 따라 전조등 불빛이 할퀴고
그르렁거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차를
산의 어깨쯤에서 버리고 나니
구름 사이로 드러난 푸른 달빛이
풀벌레 소리 위로 쏟아진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이슬 젖은 잡목 숲을 헤치며
환한 달빛만 골라 딛고
들꽃 뿌려진 돌길을 오르니
드디어 학이 등을 타고 쉬어 넘었다는
학가산* 정상
달빛 속에 드러난 산의 거대한 등허리가
끝없는 어둠 속을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펼치고
아득 먼 도회의 불빛들은 어지러이 흔들리는데
자식들을 보내고 잠들지 못하는 농가의 불빛들은
골짝골짝 숨어서 졸고
(3)
자정 너머
산을 여의고 내려오는 들녘에는
달빛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은하수가 내려앉은 듯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돌아오는 길
차차 멀어지는 산의 윤곽 위로
고별의 인사인 양 보름달이
늙은 농부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택리지』에 “안동에 있는 학가산(鶴駕山, 892미터)은 두 강 사이에 있으며 산세가 오관산ㆍ삼각산과 흡사하지만 돌 봉우리가 적은 것이 유감스럽다. 산 밑에 풍산(豊山)들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도읍이 될 만하다 하나, 이 세 곳의 산이 모두 위에서 말한 네 곳의 산보다 못하다”라고 기록한 학가산은 안동시 서후면ㆍ북후면, 예천군 보문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학이 나는 형세라고 한다.
*용계동 은행나무
나무여 그대도
지는 해 뜨는 달
비바람 눈 서리에
설움도 기쁨도 하 많겠지만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성자처럼 거기 우뚝 섰으니
나는 차라리 우리 사람들보다는
말없이 그대 앞에 우러러
부신 듯 귀 기울여 보나니
* 수령 700년인 열 아름이 넘게 큰 나무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의 위기를 맞자 물가로 옮겨 나와 살고 있음.
강이 있네
강이 있네
천 년 만 년을 흐르는 강이 있네
하늘과 바람과 구름이 만든
그 흐르는 물 위를
수많은 해와 달은 또 지고 뜨고
사람들 한둘 모여 깃을 든
강이 흐르고 있네.
끊임없이 이어져 흐르는 그것은
사람의 영원한 생명
더러운 것들을 씻어 맑히는 그것은
크낙한 하늘의 뜻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흐르는 그것은
겸허하게 살아라는 이야기
마른 모랫벌을 적시는 그것은
끊임없는 사랑의 손길
강물은 그렇게 영원을 흐르고 있네
내륙을 깊숙이 적시던 낙동강이
편안便安히 동東으로 반변천을 반겨 맞는
여기 安東안동
그 옛날은 태백의 신비로운 전설 실은
뗏목이 여울져 내리고
남도의 소금배가 너른 세상 소식 싣고
거슬러 거슬러 오르던 곳
물길 따라 바람 따라
청량 학가 일월 주왕 그 기슭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어 저자를 이루고
땅 일구어 씨 뿌려 꽃 피우던
이곳 사람들은
그 강바람만큼이나 서글서글하고
그 강폭만큼이나 너른 가슴을 가졌지
거기
그 굽이치는 강물 위를 노닐던 흰구름 마냥
한가롭던 옛시절 거기 있었네
풀밭 위를 소떼들이 느릿느릿 봄을 뜯고
벌거숭이 아이들 개구리처럼 뛰어놀고
푸성귀밭 지아비 아낙들
은빛 모래처럼 맑던 사랑도
강 건너간 이별도 거기 있었네
때로 강바닥 말리는 숨가쁜 가물
가뭄 뒤 큰물은 사람을 휩쓸기도 했던
그 시절 강물은 사람들의 애슬픈 노래
때로는 깊푸른 종교였었네
그 강섶 무수히 피고진 갈꽃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피었다 지고
먼 나그네 소리쳐 불러대면
얼른 노 저어가 건네주던 은혜롭던 강
가까스로 건너던 외나무다리 위로
거센 눈보라 높새에 실려 오면
꽁꽁 언 얼음 두드려 가며 건너던
경외敬畏의 강
그 깊은 가슴에 큰 다릿발이 박히고
거기 쇳소리를 지르면서 기적이 울고부터
강은 제빛을 잃었네 제소리를 잃었네
한가롭게 조을던 등불처럼 아늑하던 이곳
식민植民의 날카로운 발톱 할퀴어 가
땀 흘려 이룬 것들 모두 앗기고
끌려가고 팔려가던 저 중앙선 철길 위로
아픔이 굵은 빗발로 때리고
형제가 피 흘리며 서로를 겨냥하던 그 난리통에는
강은 숨죽여 흐느끼며 흐름을 멈추었네
그 고난 속 사람들 굶주리고 산마저 헐벗기어
무너지고 깎여 내린 흙으로
강은 그 깊은 가슴 얕아져 가도
세월의 물길은 끊임없이 굽이쳐 내리고
난데없는 댐이 강의 물줄기를 죄었네
온 들을 휩쓰는 물난리야 없지만
물은 이래로 아래로 사뭇 흘러야 하는 것
고여 있어 서서히 앓기 시작한 강
거기에 숱한 사람들 내쏟은 삶의 찌꺼기
비린 육신을 씻어낸 더러운 물
갖가지 농약과 검붉은 산업 폐수가
고기떼를 해치는 죽음의 물로 흘러
검은 이끼 모랫벌을 뒤덮고
역한 내음 속을 뒤집어도
강은 그 더러움 다 씻어내리지 못해 시름에 겹고
그 시름, 앞을 가릴 수 없는 안개 되어
안개 속 잠 못 이루는 밤은 사뭇 깊어가고
그래도 사람들 그 강 떠날 수 없었음이여
힘겨운 일상의 가슴 답답한 날
한참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강은 푸근한 고향이었네
바라볼 영산靈山 하나 없는 이곳
너른 가슴 안에 우리를 품던 그 강은
그지없는 믿음이네 어머니이시었네.
봄비 갠 강언덕 희디흰 벚꽃 십리 길 밝히면
아프던 사람들도 일어나가 맞고
아직도 파리낚시 즐거운 강 한 녘으로
흰 두루미 두어 마리 그림 속을 날고
가로등 불빛 점점이 떠 있는 외곽지의 밤
어둠 가르며 상행열차 꿈결처럼 지나가고
억새꽃 나부껴 눈부신 강물엔
드높은 가을 하늘 깊은 생각으로 잠기더니
낙동강 축소 부지 5만평 조성
1백 50억 투입 95년 조성
강폭은 현재 630미터에서 100여미터로 줄어
공공 용지와 2만여 평의 택지 조성,
4차선 강변도로 만들어 교통 원활
강을 좁히다니
사람이 하는 일 앞뒤가 있고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 구별 있나니
우뚝 선 산은 들어내도 살지만
강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나니
강은 사람들 것 아니네
저 하늘과 바람과 구름의 것이네
그 강을 좁히다니
지지난 여름 그 장마
임하댐 2000톤 안동댐 150톤 내린 물에도
넘치는 물 사람들 걱정했었는데
손바닥만 사람의 헤아림으로
천만년 세월이 만든 강물을 좁히다니
정말 다시 생각해볼 일
하늘의 하시는 일 함부로 헤아리지 말지니
도대체 이 작은 나라 여기 좁은 골짝에서
요만큼 너른 강이라도 흘러
후련한 가슴으로 살고 있는데
이제 이 숨통마저 막으러 하다니
도대체 우리는 난장이들인가 근시안들인가
말하라 강을 시내로 만들 텐가
양자강 그 강폭은 7000미터라던가
이 작은 나라 올막졸막 모여 사는
우리네 좁은 땅만도 서러운데
천년을 흐른 이 너른 가슴 헤쳐 버리다니
이렇듯 하소연해도 말 없는 강이시여
한번 헤친 강산은 못 살아나며
그 죄값은 다시 사람에게 돌아오나니
부디 저들을 굽어살피소서
이번 일 잘못되어 저 강, 개울 되는 날
훗날 가슴 답답한 사람들
그 시름 너른 강바람에 씻지 못해
깊푸른 살여울로 뛰어드는 일 없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뒷사람들이 이젯 사람들
두고두고 원망하는 일 없도록 하소서
하백河伯이시여,
상늙은이 용계동 할배 은행나무* 살리려고
허벅지 베어 피 흘리던
이곳 사람들 정녕 생각 깊었더니
부디 하백이시여,
당신 가슴 품에 안겨 사는 사람들
살 땅이 좁다며 다닐 길이 좁다면서
긴 밤 지새며 생각던 목민牧民의
얼풋 잠든 어설픈 새벽꿈
부디 밝은 총명으로 깨어나게 하소서
* 안동시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장 운동장에 있던 700년 된 노거수로 천연기념물 175호인 은행나무로 높이는 31m, 둘레는 14m 가량임
92년 임하댐 건설이 끝나면 이 은행나무가 9.7m까지 물에 잠겨 죽게 될 위기에 놓였다.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2년간 여러 가지 어려운 공정을 거쳐 18m 높은 곳으로 옮겨서 살려냄. 당시 공사비로 13억원. 만약 6년 안에 나무가 죽게 되면 공사비 전액을 돌려준다는 계약이 맺어졌을 만큼 성공을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고 함.
그 방문 앞길
― 권정생님께
내 만약 큰 죄 지어
사람들 모두 나에게 돌팔매질로
이 세상 밖으로 쫓겨날 때
마지막으로 꼭 들려갈 곳 있나니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의 종지기였던
올해 예순에도 맑은 열목어로 사시는
몽실 언니네* 먼 친척 오라버님뻘 되는
선생께서 오직 홀로 거하시는 거기
일직면 조탑동
청석 깔린 낮은 언덕배기 외진 오막
비바람 치는 날엔 검정 고무신도 들여놓는
한 평 남짓한 방
그 방문 앞길이시네.
* 안동에 사시는 권정생 선생의 동화 속의 주인공 이름
<제1시집 전재>
그의 나라
-병호에게
그 누구나처럼 고향은 어머니였지만
얼굴도 모르는 그의 어머니를 찾듯
그는 시를 찾아 헤맨 어린 나그네였네라.
깊숙한 말의 숲속에 그만 정들어
모든 걸 버린 채 홀로 거기
평생을 살다.
어떤 날은 세상의 경계쯤에 글밭을 일구어
동무들을 불러 모으고
또 어떤 날은 바람처럼 거리를 떠돌며
시의 전단을 뿌리다가
발길에 짓밟혀 구겨진 말들에 홀로 취해
저무는 오솔길 따라
그의 숲속 마을을 향하다.
흐릿한 독백으로 돌아가는 빈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말의 별들 하나둘 돋아오고
마지막날 그의 나라엔
희디흰 시의 눈송이들 내려
그의 깊푸른 말의 숲을 포근하게 덮어 가리라.
<제1시집 전재>
조사弔辭
친구여
우리들이 지금 할 일은 자네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거나 생각나는 지인들에게 울먹임으로 자네의 소식을 전하는 일뿐이구나
올해에도 전처럼 꽃 진 자리마다 새잎 돋더니 온 누리는 마냥 짓푸르러만 가고, 5월 되면 풍치 좋은 곳으로 문학기행 한 번 하자더니, 왜 이렇게 서둘러 다시는 못 올 길을 이렇게 홀로 떠나려 하는가?
먹고 입고 사는 세상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돈 같은 것은 종이 나부랭이로 여기던 이 시대 마지막 기인이라 할 자네. 오직 시의 깃발 앞에 세우고, 험난하고 외로운 시의 길만 걷다가, 시를 베고 누워 잠들던 자네의 외길 생애, 그 순백한 영혼 앞에 서면 자본주의의 충직한 신민인 우리는 끝내 부끄럽기만 하구나.
어느 누구 앞에서도 어떤 이념이나 철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당당했지만, 시 앞에서만은 때로 무릎 꿇기도 한 걸 보면, 시는 차라리 자네한테는 절대의 종교였구나.
우리의 인생길이란 어차피 홀로 왔다 홀로 떠나는 나그네길이란 것은 다 알지만, 자네의 삶은 고행을 하는 수행자와도 같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외로움을 오직 홀로 이를 악문 독백과 인내로 버티면서 살아왔구나!
자네가 와서 남기고 간 시들은 이 땅 문학의 기름진 자양이 되고, 자네가 뿌린 시의 씨앗들은 한껏 자라나 우람한 나무가 되고 우거진 숲을 이루었으니, 자네의 생애는 뒷사람들이 많이도 부러워하겠구나.
이제 이 땅에서 일군 자네의 시업은 완성되었네. 이제는 추위도 더위도 없고, 아픔도 슬픔도 전혀 없는,우리들도 못내 가야할 안식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나.
2003년 5월 3일 임병호 시인 영결식에서
눈물이 나서*
허수아비도
하나 없는
겨울
들판
삼베옷 하나
걸친
빗돌
하나
그예
반변천도
눈물을 보태어
천년으로 흐르는가
* 임병호 시비(안동 시내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임하면 금소리 앞 대마 재배지
공원 안에 있음)에 새겨진 시의 첫 구절
전우익 선생님께
어스름녘 쏟아지던
눈발도 그치고
고개 고개 너머 너머
개 짖는 소리도
그만 잦아든 마을
달빛만 가득한데
세상의 잔을 다 비우고도
취한 기척 없이
먼 산을 동무하고 앉은
낙락장송 한 그루
머리에는 백설을 덮어쓰고
어깨엔 푸른 솔바람 소리.
<제1시집 전재>
*한내
-창간 스무 돌 맞아
아득 먼 처음의 날부터 흘러
다함없이 이어 내려 온 한내
내 어린 날 하루 한 번 씩
둥둥 건너다니던 그 한내
뛰쳐나오듯 그 땅 떠나와서
지금은 내 꿈속으로만 흐르는 한내
그 푸른 한내의 둔덕에
올곧고 결 바른 사람들의 모임 한내
그 한내 위를 해와 달이 건너다니기를
또 스무 해
처음 뜻 한결같이 푸르러
더욱 얼굴 맑은 이들의 한내
학이 등을 타고 넘는 골 깊은 학가산
세월 속 잔설처럼 남아 빛나라.
*경북 예천에서 발간되는 문학 동인지
서시
-새천년 새아침에
하늘과 땅이 무수히 열리고 닫혀
세월은 억겁을 흐르고
강물은 수수만년 이어 끊임없는데
사람은 어이 나타나
아득히 모래알 같은 과거를 헤아리고
지난해와 올해를, 오늘과 어제를 가르는
이 부질없음이여.
더욱이 인류사 수천수만 년이 흐르고
다시 반만년 단군 왕검의 땅에
저 야소 나라의 세월 수레바퀴 굴러 들어와
이제 또 새천년 새천년 세상이 소란하니
하 우습기도 우스우나
백을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 한평생으로
천은 그 열곱이니
어허 새천년은 또 그대로 느껍기도 하구나.
그렇다면 우선 헌 천년은 가거라
저 누더기를 걸친 헌 천년의 것은 어서 가거라.
나 혼자 잘 났다고 울타리를 높이어
이웃들의 얼굴을 서로 외면하고,
나 혼자 편하려고
어미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버리는 세상은 가거라.
힘 있다고 약한 자를 빼앗고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피하고
서로가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는
아수라의 역사는 가거라.
이제 우리들 지난날의
그 모든 어둠과 절망을 불사르고
새로운 세상으로 밝아오는
새천년 새아침을 맞으러
칠십 억 인류 모두 지축을 울리는 함성으로
하얗게 밤 밝히며 이렇게, 이렇게도 기다리노니.
온 누리를 밝혀 올 새천년 새아침해
그것은
정동진에서 보는 동해의 아침해도,
호미곶 건너 영일만 앞바다의 아침해도 아니고,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본다는
뉴질랜드 어느 섬에서 보는 그들의 아침해도,
저 반변천 너머 이름 없는 저 소백의 연봉으로 떠오르는
나의 아침해도 아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으로
용솟음치며 밝아오는 새역사의 금빛 수레바퀴일지니.
오, 새천년 새아침의 햇살이시여
살찌고 잘 달리는 천리마보다는
병들어 비루먹은 말들의 갈기에 먼저 비추어라.
힘차게 잘 굴러가는 바퀴보다는
낡아 삐걱거리는 바퀴들을 잘 구르게 하라.
넓고 탄탄한 큰길보다는
비탈져 외롭고 쓸쓸한 골목길을 먼저 비추라.
배 불러 단잠에 취한 이들보다는
약 한 첩 못 먹고 밤 지새며 앓는 사람들의
불 꺼진 창을 먼저 비추라.
그리고 허리 잘린 백두대간 골짝골짝 마다에서
헤어져 한숨 쉬며 죽지 못하는 이 겨레
서로 만나 껴안는 날 빨리 오게 하시라.
나아가,
오대양 너른 바다의 물결들을 은빛으로 출렁이게 하고,
육대주에 가득한 온 사람들의 마을에
자유 평등 평화의 깃발 물결치게 하라.
새천년맞이 행사장에서
<제2시집 전재>
마침내 오늘
---16대 노 대통령 당선의 순간을 노사모와 함께 보면서
내 이 고난과 시련의 땅에
해방 그, 그 이듬해에 태어나
얼마나 쓰라린 시름으로
오늘까지 연명해 왔던가
그때
우리 민족의 청사에,
다시는 없어야 할
저 수난의 시대에,
가난하고 힘없는 한 민초의 아들로 태어나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온 땅에 피 흘린 민족의 상잔을
꿈결처럼 겪으며
세계 지배의 큰손인
그들이 나누어 준 우유 가루를 얻어먹고
어린 날의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 뒤
악몽같이 이어지는
혼란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 여린뼈를 굵히고
맞은 아, 4.19 신새벽의 찬란한 빛살을
깔아뭉갠 군부독재
저 참담한 굴종의 역사에 숨죽이며 이십 년
청년 시절을 또 암흑 속에서 떨며 보냈거니
줄곧 어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행간에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꽃잎처럼 흩어진
숱한 젊은이들의 깃발은 또다시
5.18 광주 금남로에서 핏물로 젖었고
또다시 이어진 군부의 정권찬탈은
다시 캄캄한 역사의 밤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숨죽이면서만 살지 않는 저항의 불길이
온 민중의 분노와 젊은 피를 불러
드디어 쟁취한 문민정부
그리하여 찾은 민주 세상으로 이어진 어제도
가진 자들과 힘센 자들의 횡포 앞에
끝내 꽃 피지 못하고
짓밟혀만 왔나니
그러나 이 땅은
이 역사는 끝내 침묵하지 못하였느니
오늘 이 시대 피 끓는 젊은 노사모의 시대가 와서
새로운 참된 세상을 꽃 피울 찬란한 꽃맹아리
노사모의 물결이
오늘 새로운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
새 지도자를 일으켜 세웠나니
반만년 역사의 이 땅을 고난의 구비마다 지켜온
우리 선열의 음우가 오늘에
새로운 역사
새로운 대한민국의 드밝은 국운을 열었구나.
지금부터 이 땅은
외세의 압제는 물론
가진 자의 세상은 더더욱 아니고
자주 평등 평화 통일의 역사로 오리라
다시, 또다시
장엄하라
이 땅에 새로운 빛은
정녕 금빛 광명의
신새벽으로 오라.
기뻐하라 오늘,
마침내 오늘.
그 눈물
――― 안동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그 눈물 아롱아롱
은하수로 흐르고 흘러
아득 높은 거기
눈부신 얼굴이 되신
소녀여
그대,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네 곁을 지나시는
이 땅 모든 가슴 가슴에
시리디 시린
한 줄기 빛이 되리니.
도법, 생명 평화 탁발*에 부쳐
맨머리 사나이 하나 바랑 메고 간다
걸음걸음마다 목탁소리 난다.
흙먼지 속 그 사나이
질주하는 자들 향해 손 흔들어도
수상하다는 듯 차들 더 빨리 그냥 스친다.
어쩌다가 신작로에 차가 나타나면
손 흔들어 주던 어린 시절 생각난다.
차 탄 사람들 흐뭇한 손인사로 멀어가고
우리도 그 시절도
세월 먼지 속도로 까마득 사라졌다.
몇 날 며칠을 달려야 종착역에 닿는다는
어느 꿈같이 먼 나라의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지
인적 드문 외딴집 어린 소녀는
오래오래 철길에 귀 기울이고 가다리다가
기차가 까마득 사라질 때까지 손 흔들면
기관사도 따라 손 흔들고
그러던 그 소녀 오래도록 보이지 않자
역도 아닌 그곳에 기적소리 멈추고
열병에 잦아들던 소녀의 들것이 차에 오르고
그리고 그리고 다시 소녀는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다시 손을 흔들게
되었다는
그 사나이 오늘도 걷는다
그 길 방방곡곡으로 이어지고
길 위에 나부끼는 장삼자락
참 크나큰 법문이다.
* 상호의존의 세계관과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한 몸임을 자각하여 내는 큰 자비심)의 실천론을 축으로 하는 도법의 생명 평화 사상
다시 살려라, 그 불씨
그랬었지
사람들 옹기종기
마음의 추녀 서로 맞대고 살던 시절
마을마다 한두 집 사랑방 있었네.
좋은 일 기쁜 일에 웃음꽃 머금고
대소사 걱정에는 같이 한숨지으며
저녁 어스름 길 찾아드는 과객들
그 괴나리봇짐에서 풀려나오던
바깥세상 소식도 하룻밤 묵어가던,
그 마을 안 고샅길 큰 신작로로 이어지고
이웃 고을 먼 데 소식도 가까워 져
앉아서도 세상일 듣보는
희한한 시절 만나더니
사람들 더는 그 사랑방에 모이지 않았네.
그러구러 갑갑한 세월이 흐르더니
어느 날엔가 그예
이 고을 뜻 푸른 젊은 선각들은 깨어나
의인들 불러 모아
시내 한복판 높은 대臺에
안동의 큰 사랑채 하나 세웠더니라.
인적 드문 깊은 골짝사람들을 얘기로 불러내고
골목길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푸근한 삶도 비추어 내며
정든 고향 떠난 이들의 타관살이 얘기도 전하고
높고 높은 조상들의 자취를 밟아가다 가도
이 고을 일구는 젊은 일꾼들도 찾아내던
향토 문화의 큰 사랑방 그 따스한 아랫목
안동지安東誌 아니던가.
그 아스라한 스물 여섯 해
봄바람 가을비 매운 높새 찬 눈서리에
그 높은 뜻 조금씩 사위어갔던가
수상한 헛소문 떠돌아다니더니
아이고머니나 안되지
다시 살려라, 그 불씨
첫 잎 피워내던 숱한 불면의 밤 다시 떠올리고
첫 꽃잎 피어나던 아침의 기쁨 살리고 살려
천 잎 만 잎 우렁우렁 가지 튼튼 솟구쳐서
저 용계 은행나무 그 기세로 울울창창하여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안동 역사의 푸른 증인, 우뚝한 비碑로 남아라
(스물 여섯 살 ‘향토문화사랑방안동’지 폐간한다는 소문 듣고)
*축시
----안동민예총연합회 창립 한마당에
옛날 옛적
간날 갓적
까마득던 삼한시절의
하늘 우러러 제사 드리던 부족나라 적
춤 노래 즐기던 무리들의 이 고을 후예들
오늘은 여기
겨레 예술의 힘찬 깃발 올리고
고을 한가운데로 모두 몰리어
북 장고 소래 높아 흥겨움 넘쳐 있나니
여기는
육육봉 청량의 정기
자욱한 산안개로 흘러내린 낙강이
일월산 신령님 이야기 주절거리며 이어내린
반변천을 반겨 만나
유유히 굽이치며 흐르다가
하회 옛고을에서 큰 굽이 돌아드는
좋고도 좋은 땅이여
매화 향기 은은한 도산 큰 할아비의 마음이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던
광야의 시인을 낳은 곳
백년 전 천년 전
골골마다 전설 어린 탑 쌓던 그 솜씨로
학가산 그윽한 저녁노을 바라보며
제비원 미륵의 거룩한 미소를 빚어내었고
베 짜며 베틀 소리 논둑길 논매기 소리
풋굿날 흥겹던 북 장고 꽹과리 소리
이제는 모두 잦아진 골짝에
봉정사 저녁 예불 은은한 범종소리는
아직도 옛다이 남아 있어라.
양반 하인 부네 백정 얼싸안고 춤추는 웃음 마당
먼먼 대륙의 바다 건너 섬나라 깊은 궁궐에까지 소문이 나
늙으신 할머니 옛 큰나라 여왕님도
어쩔 수 없이 지팡이 짚고 찾아와
이메탈놈 가당찮은 익살에
꼬부랑 웃음 떠뜨리고 가시었나니
우리에겐 우리만의 것이 있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
여기에만 있어
오늘 우리 문득 다시 이 텃밭에 모이어
안동민족예술인총연합의 큰 횃불 높이 들고
한바탕 흥겨움 펼치나니
휘휘 돌려라 우리는
우리들만의 열 두발 상모를
땅 하늘 바다 온갖 것들 모두 한데 얼려
어깨춤 들썩들썩 신바람으로
한 마당 가득한 세월의 태평소를 불어 젖혀라
흙바람으로 몰려오는 오랑캐 문화의 어둠을 쫓고
높이높이 울려라
겨레 예술 새천년의 들머리를 알리는
아, 힘찬 쇠북소리를.
신안동양반직필풍자적이설부부학
新安東兩班直筆諷刺的異說夫婦學
세상의 남편들이여
아내가 사랑스럽다고
너무 옆에서 맴돌지 말라.
옛 우리 선조들
정말 슬기로웠거니
부인의 기침 소리
겨우 들릴 만큼 떨어져
사랑채 따로 마련하고
내실 출입은 가끔씩 하시었더니.
신식 양옥 지은 우리들은
어미 품으로 기어드는 어린것들
다른 방으로 내몰고
부부만 내실을 차지하는
양이洋夷들 흉내 내어
아이들은 저들대로 서운해하고
여성 상위 부르짖는 눈 푸른 여인들 닮아
박꽃 같던 조선의 아낙들
억새처럼 거세어져 가나니
깨달은 남편들은 알리라
하늘은 마땅히 하늘이어야 하고
땅은 분명 땅이어야 함을
그렇다
향수 내음 짙은 내실을 나와
없어진 사랑채를 다시 지어라.
그리하여 옛 선조들
그 긴 수염의 권위 되찾기 위해
우리들 끓어오르는 정념
부젓가락으로 화롯불 묻듯
서책의 갈피 속에 묻어가면
밤 이슥해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리니 우리 아낙들
기다림으로 타오르는 가슴
그 불길로 달이고 달인
연분홍빛 차 한 잔 받쳐 들고
근엄하게 깊어가는 사랑채의 밤을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오리니.
노정원사의 은퇴
---평교사로 정년을 맞은 은사님께
한 시대의 빛 엷게 이울고
멀리 황혼의 그림자 설핏설핏 다가올 때
전 생애를 보낸 그의 정원을 떠나
이제 그는 돌아가 쉬어야 할
안식의 계절이 왔음을 알았느니
그가 한 시대의 봄빛이었을 때
언 땅에서 힘차게 돋아나는 새싹의 생명을 보았고
마른 덤불 덮어가는 풀들의 짙푸른 야망과
늙은 가지에서 연연한 꽃피우는 고목의 의지와
봄빛 속 다시 돌아와 우짖는 새떼들
그 부활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는 기꺼이 정원사의 길 택하였더니
그의 꿈은 늘
새 꽃잎처럼 싱그럽고
푸른 하늘 치솟는 나뭇가지처럼 올곧으며
어린잎들 보듬는 햇빛 마냥 다사롭고
피었다가 지는 꽃들인 양 겸허할 뿐
오직 찬란한 태양을 바라며
어머니인 대지를 튼튼하게 딛고 서서
지순하기 그지없는 흙
그 거친 흙 맨손으로 다듬고 고루어
실하디 실한 씨앗들만 가려서 뿌리었나니
다만 그의 바램은
그 씨앗들 빠짐없이 싹 터
거칠고 메마른 땅 푸르게 살찌우고
나무들 바로 자라 하늘 받치는 기둥 되고
숲들 그늘 이루어 사람들 편히 쉬게 하며
탐스런 열매 곱게 익혀
더 푸른 봄을 예비하려던 것
그러나 아 아
반기지 않는 잡초들 뽑을수록 돋아나고
마른 잎새마저 갉아먹는
벌레들 무시로 들끓으며
때로 샘물마저 말리는 큰 가물
가뭄 뒤 큰물은 온 들을 휩쓸기도 했다
그럴 때 그의 정원엔
참담한 안개 자욱이 내리고
그 안개 속 끊임없는 헤맴
헤맴 속 외로움으로
수많은 불면의 밤 깊어 갔어도
끝내 무릎 꿇지 않았었나니
일찌기 그의 시대의 봄빛이었을 때
모든 길 뿌리치고 가고자 한
그 외길 소박한 꿈으로 젊음을 바쳤고
희디흰 그의 소망 갈수록 커져 가
꿈에도 정녕 버릴 수 없었음이여
그리하여 고난 속 그의 정원에도
아무도 모르는 기쁨 가끔씩 찾아왔으니
온갖 꽃들로 그 향기 가득하고
녹음 속 새떼들 몰려와 그 그늘 노래하고
햇볕은 그 열매들 위에
단맛과 고운 빛을 뿌려 주었으니
그의 필생의 땀은 말 없는 축복을 받았어라
이렇게 그의 정원에
봄바람 가을비 수없이 내리고
이제 그의 이마 위에도 흰서리 내리니
그의 노고 안타까이 여기는 사람들
돌아가 편히 쉬기를 권하여
이제 그만 여길 떠나려 하노니
이제 그가 떠나도
일생을 돌보던 저 정원, 그의 영지에는
아침 이슬 머금은 꽃들 더욱 눈부시고
자라던 나무들 더 높이 치솟고
탐스런 열매들 빛 곱게 물들어
다녀가는 이들 모두 머리 숙이리니
떠나는 길
세상 놀라게 할 축포 울리지 않고
환송하는 군중의 도열 또한 없으며
역사에 길이 푸를 송덕비 서지 않아도
지순한 염원으로 지나온 고난 속 외길
평생을 바친 노정원사의 어깨 위에
오
하늘이 내리는 따스한 가호 있을진저
보아라 흙의 아들딸들
--제 23년차 한국 영농학생 전진대회에 부쳐
보라 오늘
이 반도의 남녘
굽이치는 낙동강 언저리
웅부 안동 땅에
이 나라 젊은 흙의 아들딸 모두 모여
한 마당 큰 잔치 펼치나니
이십 삼 년 차
그 오랜 세월의 강 흘러 이룬
한국 영농 학생 전진 대회
큰 서막의 우렁찬 징소리 들려오도다.
짐승처럼 태고의 산하를 떠돌던 인류의 무리들
비로소 아늑한 강섶에 오순도순 모여
처음 밭 갈고 씨 뿌려 살면서
밝은 인간의 역사 꽃 피기 시작하였거니
그 뒤 오랫동안 사람의 생명 살리는
가장 큰 업이던 농경, 이 삶의 터전 위에
산업화의 검은 폐수와 연기 뒤덮여
생명의 땅 버리고 모두 떠나는 오늘
그 버림받은 땅 끝까지 지키려
저 북쪽 휴전선 바로 밑 철원에서
험한 파도 너머 남녘 탐라에서까지
마음 깊은 이 나라 흙의 아들딸들
손에 손에 횃불 밝혀 들고
우렁찬 함성으로 여기로 달려들 왔나니
땅은 우리 모두의 지순한 어머니
그 땅에 씨앗 넣는 일은
생명 태어남의 처음
새싹 보듬어 가꾸는 일은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일임에랴.
천지를 덮은 눈 그 위에 찬 서리 얼어붙듯
우르과이라운드의 높은 파도 거세고
서해 너머 중국 대륙의 황사바람 흙먼지 일어
한 치 앞 가릴 수 없는 여기
조상들 뼈 묻어 지키던 이 터전 위에
우리들 질긴 뚝심 땀과 혼을 쏟아
영농의 과학화 선진화로 세계로 뻗어
이천년대 선진 농업국의 깃발을 드날릴
내일 이 나라의 영농 후계자들
이 땅 젊은 흙의 아들딸이여
장하여라 장하도다
푸른 산 기름진 들 동녘땅 삼천리
그대들 더운 가슴 꿈을 엮는 젊은이들
조국의 내일을 흙속에 그리며
겨레의 앞에 서서 씨를 뿌려라.
보아라 흙의 아들딸 흙을 보아라
젊음을 불태우며 흙과 함께 살아라.
4부
입동 무렵
예불 마치고
내려선 대웅전 앞마당
입동이 지났다고
늙은 나무 빈 가지에서
마지막 잎새 하나 내리고 있다
등줄기를 내려치는 죽비소리에
놀라 다시 우러러보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그분께서
은행나무로 서 계셨다
서녘 하늘 금빛 노을을
광배로 두르시고
노친老親
내가 나서 자란 집입니다
이제 너무 오래되어
눈비 가려주던 지붕도 이울고
그 두텁던 바람벽은 헐어도
아랫목은 예전처럼 따스운
낡고 초라한 집입니다
반쯤 열어놓은 삽짝이
아직도 나를 반기는
그 집 더 기울어 쓰러지는 날은
하늘도 같이 무너져 내려
나는 그냥 눈비 맞으며
캄캄하고 시린 밤을
쿨룩쿨룩 기침하며
마냥 홀로 지새워야 합니다.
교감交感
―밤에 낯선 곳에 문상을 가다가
여기 상갓집이 어딘가요
참으로 오랜만에
고함을 쳐 사람을 불러본다
어둠을 사이에 두고 먼데 불빛을 향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 사람과 사람의 교감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무논의 개구리울음이
들려오는 소리를 방해하고
억지로 들려오는 소리의 파장이듯
개똥벌레들이 빛을 날리고 있었다
아, 어두운 강물을 사이에 두고
하교길 혼자 다녀오던 그 시절
멀리서 어머니가 날 부르던 그 소리.
왼손에게
어릴 때 나는 왼손잡이를 보고는 참으로 야릇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가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신비스럽게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 뒤에도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오른손으로 먹고 오른발로 차고 살았으므로, 오른쪽을 제일로 치고 왼쪽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고서 나는 어른들이 무엇을 주실 때 왼손으로 받으면 왜 꾸중을 하시는지, 행진 훈련을 시작할 때 왼발을 왜 먼저 떼어야 하는지, 또 아이들의 고추는 왜 왼쪽으로 쏠리는지, 그리고 신령님께 잔을 드릴 때 왼손이 왜 술잔을 든 오른손을 은근히 받치며 따라가는지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못을 박으면서 알았습니다. 왼손이 못을 들고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는 동안 오른손은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왼손이 못 박을 자리를 정하고 힘을 주어 못을 고정시키고 난 뒤에야 오른손이 들고 있던 망치를 힘껏 두들겨 대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오른손은 늘 힘드는 일만 하는 하인이며 왼손이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모하거나 가리키거나 도와주고 거두어들이는 주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한참을 살아가다가 보니 그때까지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 집에서도 나는 하인처럼 늘 부대끼며 일만 하는 오른손이며, 아내야말로 도도한 왼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기야 물론 부부 사이란 못 박기로 치면 왼손 없는 오른손이거나 오른손 없는 왼손 사이라는 것을 알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또 그분의 말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하지 않고, 굳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그 높고 깊은 말씀의 뜻도 이제사 정말 앎직도 하였습니다.
산돝을 보며
박제된 산돝을 본다.
인간들은 너의 뜨거운 피를 마시고
쓸개를 날것으로 삼키며
간과 살을 저며 구워 먹지만
너의 가시 같은 털과
아래턱을 비져나온 그 강대한 송곳니는
어찌하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너의 뚫린 가슴에
한 사발 피를 흘려 넣으면
금방이라도 달아날 것 같은
저 우직한 눈매와 너의 굳센 발톱을 보면
눈에 선하구나
야산의 함부로 얼크러진 칡덩굴과
산사태로 흘러내린 바위
살을 베는 억새풀, 꺾인 갈대숲,
가슴에 총알을 맞고도
십리나 추격당하다가 최후를 맞은
너는 이제 다만 설화로 남았구나.
목숨과 자유와 부귀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끝내 귀화하지 않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절처럼,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결국 목을 내준
순교자의 전설 어린 핏자국처럼.
일주문一柱門 풍경
천년 고찰의 입구에
벌레 먹은 굵은 두리기둥 두 개가
나란히 어깨를 겯고
숱한 세월 그 애증의 이끼
겹겹이 덮인 무거운 기와지붕을
머리에 인 채
벌을 선 아이처럼
우는 듯 웃는 듯 섰다.
바로 그 앞에
티 없는 웃음을 나누며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앳된 나이의 부부 한 쌍.
흔적
큼지막한 어미 공룡 자취를 따라
아기 공룡 발자국 달랑달랑 귀엽기도 하다.
어느 아침 가벼운 산책길이었을까
그들 발에 짓밟혀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흙은 누만년 그 흔적 역사로 남겼을까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갈수록
외로워져 가는 일일까
근해를 지나
먼 절해고도로 떠나듯
정녕 그리 외로운 일일까
그렇게 어느 먼 바다로 흘러가
홀로 그 수평선을 넘는 일일까
송년기送年記
하루가 저물고
또 하루가 저무는
세월의 긴 강변에 서면
어디서 흐느끼듯 종소리 들려오고
이 해의 빛도 기우는
섣달그믐을 바라보면
떠돌던 별들도 잠시 그치고
흐르던 강물도 여기 멈춘다.
돌아보면 굽이굽이 걸어온 길
먼 어스름 속으로 잠기어 가고
그 길섶에 숨어 사는
몇 마리 빛나는 추억의 새떼들
이제 그만 떠나자.
희디흰 눈송이도 가끔씩 흩날리는
바람 소리 가득한 뜨락 이 그믐밤을 지나
새로이 열리는 내일의 푸른 벌판을 가자.
점경
길 가다가 재수 없게
만취한 술꾼들이 게워 놓은
토사물吐瀉物을 보면
잘 다스려지지 못한 왕조의
너무나 충직했던 신민들이
함께 일으킨 반란의
마지막 장면이 스친다.
이상한 나라 이야기
사람들이 모두 서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쪽에서 왔습니다
그들의 출발점은 모두 동쪽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서쪽으로 갑니다
그들의 도착점은 모두 서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들은 한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가끔씩 뒤로 돌아볼 수는 있어도
항상 전진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행진은 참 딱한 노릇입니다
한시도 쉴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 그들은 가다가 잠이 들곤 합니다
사실 그들은 잠이 든 것이 아니라
계속 길을 가고 있었지요 서쪽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한순간의 쉼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그만
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지요
산을 오르다가
산을 오르면
주위의 낮은 산들이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다.
가까운 산들이 읍을 하고 있으니
그 옆의 산들은 덩달아 엎드리고
소리 없는 소문이 퍼져 나간 듯
먼 산들도 일제히 머리를 조아린다.
오를수록 숫자가 많아지는 내 신하들
아뿔싸
나는 저들의 어깨를 밟고 선 제왕이로구나
아직 정상은 먼데
호박밭에서
한로 무렵
어린 순은 여름 못지않게
사방으로 분주히 뻗어 나간다.
생전에 가보지 못한 곳을
한 걸음이라도 더 가고 싶은
늙은 나그네처럼
젊은 아낙 후실로 얻어
마지막 노을로 타는 부잣집 노인처럼
밤기운 차가워질수록
넝쿨엔 수다스럽게 꽃을 피워내어
풍성한 잔치를 벌인다.
늦둥이 빨리 키워 후생을 보고 싶은
병 많은 부모의 간절한 소망처럼
꽃 진 자리에는
올망졸망한 열매들이
하루가 다르게 굵어만 가고
시인
시인은 한 그루의 나무
검붉은 땅속 돌 틈 사이로
뿌리를 박고
머리엔 높푸른 하늘을 이고 있구나.
말씀으로 내리는 빛을 향해 키를 키우며
쭉쭉 빛나는 꿈으로 가지를 뻗고
풍성한 생각의 잎새들을 무수히 달아
천천만만으로 명멸하는 별들의 하늘과
유유한 강물과 첩첩 산맥들의 땅 사이의
이슬 안개 비바람 천둥 벽력의 이야기를
곱고 향기롭고 애잔한
수많은 의미의 꽃송이로 피워내는가
그 해 마지막 엷은 햇살로 기우는
드맑은 예지의 찬 하늘에
구원으로 익어갈 탐스런 열매들을 위하여
병실에서
자정 너머
땅 위의 어둠 더욱 짙어지는
다시 한 점과 두 점 사이
억만 광년 하늘의 별들도
깜박거림에 지쳐 잠시 빛을 잃는
그리고 세 점과 네 점 사이
병들어 앓는 억조창생들의
신음소리 높아만 간다.
이 어둠 걷히면 빛은 다시 오건마는
차라리 이제 한 번 떠나거든
빛도 어둠도 없는 나라로 갈지언정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라
몸을 받고 여기에
거울
그의 방안은 늘 비어 있어
온갖 풍경을 손님으로 맞는다
방안에 들어온 그 어떤 손님한테도
거울은 또 마음 두는 법이 없다
비우고 싶으면 곧 깡그리 비워 버리고
채우고 싶으면 또 언제나 가득 채운다
비워 둠으로 언제나 채울 수 있고
버림으로 다시 들여 놓을 수 있는
거울의 마음은
성자로구나.
저기 사람 하나 간다
산모롱이 돌아 돌아
으스름 밟으며
저기 저기 절뚝이며
사람 하나 간다.
그는 어디쯤서 오늘을 누이고
내일은 또 어떻게 일으키려는지
누구나 저처럼
걸어온 긴 날 있고
밝는 날 떠나야 할 길
또 이어져 있나니.
서울
다 죽어 간다는 소문
바람결에 듣고
어쩔 수 없이
얼굴 한 번 들이밀어 보는
의붓아비 집처럼
세월에 기대어
세월 언덕에 기대어
한 칠십 년 그럭저럭 살아왔네요.
소싯적부터 골골 잔병치레로 젊은 날을 지새던 고종형님, 이제 팔십을 거뜬히 넘어셨으니 복 없다 말 못하겠지요. 육이오 참전용사로 병 얻어 이적지 홀몸으로 입원생활 하지만 현충원 예약이 된 저 분, 그래도 병원 앞뜰 저 환한 벚꽃처럼 참 행복한 분이지요. 사고무친으로 오직 저승에서 올 기별만 기다리다가 어느 시린 골방에서 고독사 하신 그 노인도, 어쩌면 복 있다 해야겠지요. 병들어 몇 년째 호스에 매달려 바스라지며 하루하루 실낱같은 명줄 이어가는 그분도 복 없단 말 못하겠지요. 만년에 병들어 자식새끼들 떠나 요양원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지내다가, 어쩌다 정신 들면 자식 생각에 눈물짓는 저 노인도 복 있다 해야 겠지요.
맹골수도 그 험한 파도에 기울어
물속으로 사뭇 잠기지도 못하고
다시 영원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저 세월호에 기대서면
호스피스 암병동에서
동화책 대신 어려운 경전을 읽어가듯
하루하루 하늘길 계단을 올라가는
저 어린 환자도 어쩌면 행복하다
해야겠지요?
어느 소작인의 혼잣말
난, 주인의 땅을 파는 한낱 소작인으로 만족하오
식솔들을 위해 땅뙈기를 빌려
오직 하늘만을 우러르며
한 알 뿌리면 한 포기만 돋아나는
정말 오롯한 땅의 가슴에 김을 매는
소작인으로만 만족하오.
그 땅마저 뺏기는 날이면 붉은닥세리를 일구거나
깊은 산에 불을 싸질러 부대밭을 가꿀지언정
우리들 절은 땀을 노략질하는
마름만은 정말 될 수 없소
또 못할 것이 딱 하나 더 있소
원님 행차에 제 배에 힘을 주며
아랫것들 시삐 여기며 거들먹거리는
우리들에게는 정말 귀하신 그 아전 노릇은
또 죽어도 못 하겠소
못살아 차라리 바가지 들고 거리를 해매든지
아니면 화적패로 떠돌다가 작두에 목을 베일지언정
그래서 나는 천생 행복한 소작인이오.
석달 열흘을 비가 내려도
비가 내린다 하루건너 한 번씩 쏟아진다.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고 고추밭에 핏빛 진물이 흐른다고 산사태로 사람들이 깔렸다고 허벌나게 뚫어진 하늘의 밑구녕만 욕하다가 또 빗줄기를 덮어쓴다.
어디서 왜 온지는 몰라도 파발마를 타고 급히 온 군사가 대문을 두드린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린다 문을 열어 줄 생각은 않고 도리어 문만 발길로 차면서 불평이다 벌써 며칠째다 어서 문을 열고 그 손님을 맞아들여 그가 전하는 다급한 기별을 들어라.
비가 내린다 망종 때부터 오는 비가 입추 말복 처서를 거쳐 백로 추석을 지나더니 팔순 노인도 처음이라는 태풍에 해일마저 몰아왔다 얼마나 화급했을까 평생을 물위에만 떠다니던 고깃배가 저자의 지붕 위에 벌러덩 드러눕고 골리앗 크레인이 수숫대처럼 구겨졌다.
또 비가 내린다 석 달 열흘을 비가 내린다 이러다간 한로 상강을 지나 입동까지 내리고 소설 대한까지 내리게 되는 날엔 모두 끝장이다
길흉화복
그것들이
방향을 알 수 없이
아무렇게 튀어 다니는
럭비공을 닮은 게 아니라
털끝만큼의 잘못도 없이
제 갈 길만을 정확히 찾아다니는
당구공 같다는 걸
안 것은
그러나
내 생애의 이른 가을 날
찬 이슬 내린 어느 아침이
일이었다.
기찻길 옆
기찻길 옆 사람들은
밤에 가끔씩 잠이 깨어
아이들이 올망졸망 딸렸다지만
기찻길 옆 소나무들도
밤에 자주 잠을 깨는가
가지마다 다닥다닥 솔방울뿐이네
끝
력
1948 예천 출생
원
시집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
도리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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