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식 약 력
47년 안동 출생
69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중퇴
70년 동인지「글밭」참여
13년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책머리에
추사가 친구인 이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오서수부족언 칠십년吾書雖不足言 七十年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 미상일습간찰법未嘗一習簡札法이라고 썼다. 내 글씨에는 아직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칠십 평생에 먹을 가느라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이 뚫렸고 붓이 다 닳아 모지랑이 붓이 된 것이 천 개나 되나 그렇지만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혀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요약하면 그렇게 열심히 글씨를 써와도 아직까지 부족함이 있고 간찰을 쓰는 서체는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 당시에 추사의 글씨를 탐내는 사람들이 추사의 간찰을 요구하였는데 추사가 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추사가 닳는 붓이 천 개나 되도록 칠십년간 써온 글씨에도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는 말이다. 더구나 남에게 내놓는 간찰 서체는 공부한 적도 없다지 않는가. 이야말로 학문의 내공이 깊은 사람만이 운위할 수 있는 겸양지덕이 아니던가.
그런데 실로 공부는 제대로 시작도 못한 초학이 주제를 모르고 세상 눈치도 없이 책을 낸다고 문 밖에서 떨고 서 있다. 그러나 논어 양화편 3장에 오직 상지上智(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하우下愚(가장 어리석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나간 동인지「글밭」의 묵은 먼지를 털어 폭서曝書하듯 몇 년 동안 게재한 것을 헤집어 바람을 쐬고 묶다가 보니 책이 되었다. 이미 화석이 되어 굳은 녹을 벗겨내는 일이라 막상 내밀려고 보니 손이 주저한다.
매 행마다 생각이 많아 발걸음이 엉키고 밟히는 어쭙잖은 작품을 햇볕에 내어 놓고 보니 얼룩지고 절룩거리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경스럽다고 점찍을까 두렵다. 나이 들어 걸음마를 새로 배우는 초학이 쓴 졸필이니 그 이후의 일은 남저지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졸저에도 불구하고 해설을 맡아주신 조동범 시인에게 감사드리고 아울러 도서출판 미래사의 관계자 분, 「글밭」동인 여러분의 도움으로 졸저가 빛을 보게 되어 감사드린다. 이 졸저를 졸필자의 중형이신 전 월간지「여학생」편집장을 역임한 백람白嵐 조윤식 선생 영전에 올린다.
2024. 초봄
寓居에서 백파白坡 조용식
차 례
1부 누가 무현금에게 한뎃잠을 재우는가
겨울소리
몌별袂別
윤사월閏四月
탁설鐸舌
빈집
독거獨居
문바람 팽闏
초승달
놋요강
산명山鳴
모종暮鐘
먼 산이 그리운 것은
둠벙
징소리 정鉦
흐르는 눈물 누淚
여름밤
제설
거기 누구신가
유리문
손수의 술
2부 천리 먼 곳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연
인因
연緣 2
연緣 3
연緣 6
연緣 7
연緣 8
연緣 11
연緣 12
연緣 13
연緣 20
산길 1
산길 2
산길 3
산길 4
산길 5
산길 6
환상통 1
환상통 2
환상통 3
3부 꽃잎이거나 나비이거나
왓 수국水菊
간봄 그리매
진달래꽃
가래나무 암꽃
반개半開
패랭이꽃 거蘧
포스트 잇
겨울나무
미나리 꽃
아카시아 꽃
오목거울
하얀 목련
화문花紋
대 숲
봄꽃
매화 Ⅳ
매화 Ⅴ
4부 없는 줄 알면서도
오래 붙들려 있었다
늙은 달
갈고리달
무지無知
새 날아가다
지나가는 새
육필肉筆
은날개녹색부전나비 암컷
매미소리
그릇
가을산소
춘수春愁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합일
아지랑이
좋은 날 좋은 시
공원풍경
을숙도乙淑島
1부 누가 무현금에게 한뎃잠을 재우는가
겨울소리
삼복에 들문* 접어 올리고
삿자리 깔고 누워 천천히 귀를 튼다
달빛이 제 그림자에 놀라 뒷걸음질하다가
마른 낙엽 밟는 소리
뒤통수 동그란 동자승이 절간 바람 소리에
낮에 들은 속세가 무엇인지
띠살문 좁은 칸에 침 발라 손가락구멍 내는 소리
취설吹雪에 겨울나무가 목검을 들고
산등성이에서 쫓겨 내려온 바람의 허리를 베는 소리
폭설에 등이 휜 뒤꼍의 설해목雪害木 한 쪽 팔이
깊숙하게 꺾이는 신음 소리
개울가에서 오리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빨래가
나뭇가지 위에서 다리를 뻗대며 얼어 죽는 소리
시집간 누이가
코고무신을 끌고 가만히 중문을 들어설 때
발밑에서 서릿발 기둥 무너지는 소리
군불솥에 데운 물로 고양이 세수하고 들어갈 때
언 문고리에 손가락 달라붙는 소리
그믐 밤 돌아눕던 앞 강물이 강심까지 얼어붙는 소리가
절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 쉰 소리
겨울바람이 야경夜警**을 돌다가 열려있는 덧창 너머
부르르 떠는 창틀 사이로 슬쩍 들여다보는 소리
아랫목에 묻어둔 늙은 아버지의
밥그릇 뚜껑이 엄지발가락에 걸리는 소리
겨울비에 젖은 빈 콩대로
토방 아궁이에 군불 때는 저녁
연기가 비를 비켜서 올라가는 소리
뜨거운 소여물을 식히는 새끼 밴 암소의
코뚜레 사이로 나오는 더운 숨소리
오래 된 철도 관사의
얼룩 진 유리창 해묵은 먼지 꽃 위에
덧입혀서 성에꽃 앉는 소리
누가 무현금無弦琴***을 겨울 문밖에 세워
한뎃잠을 재우는가
마루판 틈새로 올라오는 여름 한기
귀 밝은 여름새 발이 시리다
*옛 한옥에 들어 올려서 매달 수 있도록 한 방문
**밤사이에 화재나 범죄 따위가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것 혹은 그 일을 하는 자경대
***줄 없는 거문고.
몌별袂別*
어린 시절
맞절을 하면서 같이 배운 친구
아쉬움이 동구 밖까지 걸어 나왔다
빌려 탄 당나귀가 산모롱이를 돌아간 뒤
말문을 열지 못한 달이
왔던 길을 되돌아 걷는다
가는 곳 없이 마실 돌다가
제 자리에 돌아와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입이 당나발처럼 퉁퉁 부었다
떠돌이 개가 달그림자를 보고 짖는다
*소맷부리를 잡고 헤어진다는 뜻으로 섭섭히 헤어짐을 이르는 말
윤사월閏四月*
초록으로 반짝이는 물고기 떼가
함성을 지르며 산으로 올라갔다
푸른 나무 하나 끌어안았다
계곡에서 살고 있는
햇빛 한 줄기
물이끼 타고
벼랑을 기어오르고
봄꽃 한 겹씩 떨어지는 소리에
조급한 수컷 말매미가 자지러지고
찌르레기도 덩달아 우는데
머리를 뒤로 묶은 초부樵夫
소꼴 한 짐에
윤달을 얹어서 내려온다
때 이른 여름이 지게꼬리에 매달려 있다
소꼴 바지게에서
흰 빛으로
흰 빛으로 익어가는
*박목월의 시 「윤사월」에서 시제詩題를 빌려옴
탁설鐸舌*
동네 암자에서
작은 풍경風磬을 하나 얻었기로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앉은뱅이책상 모서리에 달았는데
봄잠에 취해
잠깐 졸다가
화닥닥 헛발질을 했는데
정정靜靜 동동動動
꿈에 본 것이 아까워
홧김에 풍경을 탁 건드렸는데
정정동동靜靜動動 정동동靜動動
꽃비에 젖은 봄꿈을 벗어
풍경위에 널어놓고
가는 귀 먹은 노인네처럼
못들은 척하고 있는데
정정동동靜靜動動 정정동靜靜動
웬 죽비소린가
화들짝 놀라서 정좌靜坐하고 있는데
동동動動
이명조차
한 줄로 빨려 들어가고
침만 주르르 흘리고 앉았는데
정靜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르겠더라
*풍경의 종벽을 쳐서 소리를 내게 하는 물고기 모양의 추
빈 집
처마가 허리를 굽혀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가 그림자를 서로 감고 버티고 있다
아침과 낮과 밤이
제 키 높이에 맞춰 드나들었다
어제 왔던 햇빛이
오늘 아무 일 없이 또 지나가고
입술 깨진 오지그릇에 묵은 빗물이 반쯤 고여 있다
집 안팎의 시간이 서로 엇갈린 바퀴를 돈다
집 앞에 도랑물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문 안에선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간 시간의 냄새가
물기 빠진 채 켜켜이 말라붙어 있다
간신히 문을 열자
오래 묵은 적막이 삐걱 고개를 내민다
누군가 들어와 산다고 해도
사람 사는 연기 한 줄 올라갈 것 같지 않은 집
갈 데 없는 욕심이
바람 한 짐 부려놓고 간 뒤
보이지 않는 문짝이 어딘 가서 삐걱
이빨 빠진 바람만 여기저기 모서리를 핥고 다닌다
벗어 놓고 간 허물
낡은 기둥 하나를 버티기 위해
몇 꺼풀의 세월이 벗겨졌을까
네모지고 구석진 삶을 살았을까
모서리가 깎이고 옆구리는 닳았다
잠시 처마 밑에서 물기를 털고
다시 길나서는 바람
떠들썩하던 이엉이 몸을 낮추고
오다가 지친 달빛이 문고리만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흩어진다
독거獨居
물 한 방울
오래 오래 목매달려 있다가
투욱 끊어지고
쓰레질해 담아도
시나브로 앞가슴에 쌓이는 먼지
혹시나 쪽문 열고 내다보는 바깥
누가 불렀을까
아이들 과자 먹는 소리
귀가 닫히면서
아이들 소리도 풀썩 주저앉았다
문바람 팽闏
문틀 틈에 몸이 끼어서 밤새도록 입술가벼운소리로 울고 있다
멀리 갔던 울퉁불퉁한 바람이
문 앞에 얌전히 놀던 바람을 꾀어 와서
가늠하는 것보다 열배 스무 배는 더 큰 바람이 되어
문틀에 매달려 할퀴고 있다
목청을 돋워 문풍지를 잡고 울부짖는 바람에
죽은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자물려 있다
뿌리 깊숙이 들어있던 울음을 펌프로 잦아 올리고 있다
어디를 긁지 못해 저리 버둥질인가
더넘바람에 푸른 잎 까닭 없이 툭 떨어지듯
누군가 한 생이 자지러지는 처연한 소리
늙은 까마귀가 슬픈 목소리로 상여를 따라가며
눈만 퀭하게 꺼지는데
꺽꺽 느끼던 울음을 잠시 멈추고
속으로만 우는 바람
몸을 바꾸고 싶은 바람소리
저 바람도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것
천정 밑에 검게 매달린 외로움을 뜯어내어 문틈을 막았다
소리를 닫거나
문을 조금만 더 열어두면 될 것을
밭둑의 풀잎이나 겨우 따먹는 하루치의 삶을 껴안고
더 긁어낼 것이 없는 등을 웅크려 쉬고 있는
정소淨掃가 끝난 방
기억의 뼈만 누워있는 방
오늘 일 소리 째 고대로 복사하여
시렁위에 올려놓고
고치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명상하다가
반 정도만 자고 일어나 열어본 창문 앞에
어제 밤에 떨어져 죽은 바람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
동살이 터오면
거뭇거뭇하게 묻혀 조금씩 일어서는 새벽의 소리
석유 등잔불을 잡고 평평한 일상을 시작한다
아직은 사람냄새가 남아있는 가난한 집에
갑자기 기름 떨어진 보일러가 나와 서있다
바람은 들고 있던 모래를 내려놓고
빈손으로 들어 왔다
초 승 달
1
초사흘이나 초나흗날의
우물 속
금가락지 하나 빠져있다
들여다 볼 때마다 조금씩 닳아
이제 반만 남았다
2
여인이
다리를 외로 꼬고 앉아 있다
4B 연필로 선을 그리다가
둔부의 굵은 선만 남기고 멈추었다
나머지는 가렸다
가린 것 보다
더 많이 보여주는
3
서릿발이 솟았다
얼음이 터지면서 비명이 났다
칼끝이 살코기에 박힌다
살치살의 마블링이 손 시리게 선명하다
4
낫날을 벼린다
바닷물이 일렁이면서
달 월月의 삐친 월첨月尖*을 세운다
옛날 옛적부터
낫은 벗은 채 벌려 서있다
*초승달의 양쪽 끝 뾰쪽한 부분
놋요강
옛날에
작은집 할배가 살아계실 적에
늙은 감나무 옆 툇마루에서 잠시 입을 벌리고 볕을 쬐고 있었다
굳어버린 화석에서 풀려 나오는 수룽대 향기
볕에 단 놋요강에 마른 꽃 한 송이 피었었다
산명山鳴
새벽잠이 덜 깬 사미승이
당목撞木*을 민다
한 번
또 한 번
범종소리에 깨어난 벚꽃망울이
환하게 눈을 뜨고
온 산으로 밀면서 번져가는 꽃물결
너울 타고 넘어가는 뒤에서 받는 소리**
명동鳴洞*** 안을 휘둘러 감았다가
천천히 풀려나오는 청정淸淨
아! 이 꽃등燈의 맥놀이여
겹겹의 화엄이여
산울림은 아직 산을 돌고 있다
*범종을 치는 긴 통나무 막대
**민요에서 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뒤따라 여럿이 함께 부르는 소리
***종의 하부에 항아리를 놓거나 땅을 움푹하게 파서 소리가 울리도록 한 것
한 생애를 관통하는 사유의 언어
조동범(시인)
오랜 시간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고 천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욱이 그것을 오롯이 간직하기는 더 쉽지 않다. 시를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여서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오랜 세월 탐문하여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언어를 찾아 헤매다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시적 세계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놓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다. 더구나 홀로 외롭게 문학을 하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이들의 세월은 가혹하기까지 하다. 독자들이 조용식 시인의 자세한 문학적 연대기를 알 수는 없지만 소략한 약력에서 그가 견뎠을 문학과 시간의 무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학을 하는 이들이 홀로 시간을 견디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단의 전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고 침잠한 시인의 시간은 내적 독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침잠하며 견딘 문학적 연대기는 깊이와 넓이를 갖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용식 시인의 시집은 시간의 간극을 횡단하며 다채로운 시공간의 힘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오래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시적 여정은 자칫 낡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감상적 회고가 되기 쉽지만, 그의 시는 담백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딘 사유의 힘이 불교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철학적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조용식 시인은 불교적 사유를 근간으로 작품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시적 정서의 근간으로 삼을 따름이다. 불교가 환기하는 의미와 감각을 통해 조용식 시인의 시는 개성적인 감각과 깊은 사유를 부여받게 된다. 삶을 관통하는 언어의 힘은 불교적 상상력을 내장한 시 세계를 펼치며 독자의 의식을 이끈다. 이때 그의 시가 내세운 불교적 사유는 삶에 대해 해석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관조적 태도를 통해 삶을 통찰하고자 할 뿐이다. 종교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전면에 내세울 때 시적 감각과 사유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시는 깨달음을 직접 호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적 깨달음이 미적 인식과 결합하여 사유 너머를 관통할 때 독자의 마음에 파동을 남기기 법이다.
새벽잠이 덜 깬 사미승이
당목撞木을 민다
한 번
또 한 번
범종소리에 깨어난 벚꽃망울이
환하게 눈을 뜨고
온 산으로 밀면서 번져가는 꽃물결
너울 타고 넘어가는 뒤에서 받는 소리
명동鳴洞 안을 휘둘러 감았다가
천천히 풀려나오는 청정淸淨
아! 이 꽃등燈의 맥놀이여
겹겹의 화엄이여
산울림은 아직 산을 돌고 있다
-「산명山鳴」 전문
텅 빈 여백을 상상한다. 시어가 감추고 있는 지점이 얼마나 큰 세계를 내장하고 있는지 떠올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여기 당목을 미는 사미승이 있다. 당목으로 종을 치는 한 번과 한 번 사이가 있다. 시인은 그런 간극을 시에 적극적으로 배치하여 언어를 넘어서는 확장된 세계를 시 속에 펼쳐 보인다. 조용식 시의 여백은 들뜬 감정을 내세우지도, 이미지의 화려함으로 시적 세계를 위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풍경의 명징한 어느 순간과 지점을 우리 앞에 부려놓는다.
이 시를 읽은 독자들은 어느새 새벽 산사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새벽 산사 전체를 조망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오로지 소리와 관련된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리는 금방 사라지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시인 앞에 펼쳐진 산사의 풍경은 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므로 텅 빈 여백과도 같은 간결한 울림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의 감각은 불교적 상상력과 어우러지며 명징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뒤통수 동그란 동자승이 절간 바람 소리에
낮에 들은 속세가 무엇인지
띠살문 좁은 칸에 침 발라 손가락구멍 내는 소리
취설吹雪에 겨울나무가 목검을 들고
산등성이에서 쫓겨 내려온 바람의 허리를 베는 소리
폭설에 등이 휜 뒤꼍의 설해목雪害木 한 쪽 팔이
깊숙하게 꺾이는 신음 소리
개울가에서 오리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빨래가
나뭇가지 위에서 다리를 뻗대며 얼어 죽는 소리
시집간 누이가
코고무신을 끌고 가만히 중문을 들어설 때
발밑에서 서릿발 기둥 무너지는 소리
군불솥에 데운 물로 고양이 세수하고 들어갈 때
언 문고리에 손가락 달라붙는 소리
그믐 밤 돌아눕던 앞 강물이 강심까지 얼어붙는 소리가
절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 쉰 소리
겨울바람이 야경夜警을 돌다가 열려있는 덧창 너머
부르르 떠는 창틀 사이로 슬쩍 들여다보는 소리
아랫목에 묻어둔 늙은 아버지의
밥그릇 뚜껑이 엄지발가락에 걸리는 소리
겨울비에 젖은 빈 콩대로
토방 아궁이에 군불 때는 저녁
연기가 비를 비켜서 올라가는 소리
뜨거운 소여물을 식히는 새끼 밴 암소의
코뚜레 사이로 나오는 더운 숨소리
오래 된 철도 관사의
얼룩 진 유리창 해묵은 먼지 꽃 위에
덧입혀서 성에꽃 앉는 소리
-「겨울소리」 부분
그곳에 소리가 있다. 청각을 통해 이미지의 여백을 만들어낸 시인은 더욱 적극적으로 소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시인이 듣는 소리는 불교적 상상력과 연결된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 속 삶의 소리이기도 하다. 소리가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여기며 소리에 마음을 다한다. 동자승이 “띠살문 좁은 칸에 침 발라 손가락구멍 내는 소리”로부터 겨울 “바람의 허리를 베는 소리”와 “설해목 한 쪽 팔이 깊숙하게 꺾이는 신음”에 이르기까지 소리는 세상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그리고 그것은 “빨래가 나뭇가지 위에서 다리를 뻗대며 얼어 죽는”소리나 철도 관사 유리창에 “성에꽃 앉는 소리”처럼 우리 삶의 깊숙한 지점에 놓이는 것이기도 하다. 언뜻 불교와 자연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는 조용식의 시는 그러나 현실의 이야기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살눈이 살며시 내리는 날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누렇게 변색된 옛날 시집 한 권 샀다
삐거덕 소리 나는 첫 장을 넘기자
빛바랜 갱지에
잉크 색깔만 선명한 적바람 한 장
잠이 덜 깬 눈으로 어정어정 걸어 나왔다
누구였을까
오륙십년은 족히 되었을 먼 과거의 어느 하루
눈 내리는 저녁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시집을 한 권 보냅니다
한 줄짜리 적바람을 한 사람은
오래 두고 봐도 닳지 않을
혹여 금방 지나가더라도
마음에는 꼭꼭 여미게 하였을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헌책방에 걸어 다니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을
누군가의 편이 되어
오륙십년 전 어느 날의 마음을
조용히 따라가다가
잉크처럼 파릇해지는 정을
책갈피에 도로 끼워 넣었다
살눈 녹듯
오래 전에 소멸되었을 지도 모를 인연
이즈음에 연을 닫는 것이
후일 또 누군가 이 시집을 열어
새로운 연을 만드는 길임이랴
-「연緣 3」 전문
오랜 기간 침잠하며 시를 써온 만큼 조용식 시인의 시는 시간의 층위를 켜켜이 담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을 관통한 세월의 흔적일 수도 있고 당대의 삶을 표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러한 시어가 지금의 관점에서 낡은 것으로 보일 수 있음을 안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의 정서와 감각 역시 언어와 유사성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을 견딘 시어와 정서는 단순한 낡음과 다르다. 더구나 그것이 현재와 이어진 과거라면 더욱 그렇다. 조용식 시인이 호명한 과거가 낡은 것으로 주저앉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그것이 현재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는 회고의 형태로 현현하지 않는다. 시인은 작품 속 시간이 언제든 바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바라보고 재현한다.
조용식 시인은 시간 여행자처럼 과거를 넘나든다. 그의 시는 독자의 먼 기억 속에 있을 법한 지난 순간을 호명하며 우리 앞에 삶을 부려놓는다. 때로는 독자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사연을 소환하지만 그것이 과거에 멈춰 있는 법이 없다. 시인의 과거는 현재와 결합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성을 부여받는다. 그 때문에 그의 시는 시간이라는 낡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다. 시인의 과거는 언제나 열린 시간이며 현재의 독자가 충분히 수용할 만한 것이다. 이때 시인은 흘러간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회한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동 책방골목이라는 현재는 “누렇게 변색된 옛날 시집”을 통해 과거와 만난다. 시인은 헌책방이라는 통로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는데, 이때 시적 화자는 과거로 직접 들어가지 않는다. 시인은 헌책이라는 표면화된 상징을 통해 과거를 회고한다. 그런데 시인이 포착하는 것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나 사연, 소재 등이 아니다. 시인이 상정한 “옛날 시집”은 지나간 시간 전체를 탐문하고자 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환기하고자 하는 과거는 더욱 본질적인 세계를 상정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 전반을 아우르고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지리산중턱 임도林道 옆
지렁이 한 마리 죽어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이유도 없이
홀로 죽어있다
옆구리가 하얗게 말라있다
따가운 햇볕만 옆에서 지키고 있다
콩새가 내려와
죽은 지렁이를 쪼아 흔들더니
반만 잘라서 물고 날아갔다
반 남은 지렁이는
잊힌 기억 몇 개만 들고
헌 신문지에 둘둘 말려 흩어진다
남 몰래 너 죽은 뒤
바람조차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나
바람도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죽은 너를 보고 있는 것이
무슨 인연이겠느냐만
그 조차 여기서 끝나는구나
저 생에서는 그 자리에
산꽃으로 피어날까
좌탈입망坐脫立亡이 아니어도 이제 적멸에 듦이라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서투르게 서있지?
-「산길 4」 전문
시적 언술은 묘사와 진술로 이루어진다. 그중 시인의 사유가 시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 시는 아무래도 진술을 앞세운 경우가 많다. 특히 해석적 진술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은데,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와 세계에 대한 통찰을 중요한 양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진술은 이러한 시 속에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술과 함께 묘사가 제시될 때 시적 사유와 감각은 더 깊은 지점을 견인하기 마련이다. 시 언어 가운데 묘사가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묘사는 감각적인 방법으로 시적 인식을 심화한다. 조용식 시인의 시는 통찰의 가운데 묘사에 대한 끈질긴 양상을 띠기도 한다.
여기 한 마리 지렁이가 있다. 지렁이는 마치 오체투지를 하다 죽은 것처럼 “옆구리가 하얗게” 말라버린 채 바닥에 죽어 있다. 시인은 지렁이를 그저 응시할 뿐이다. 「산길 4」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묘사를 시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조용식 시인의 시는 「산길 4」가 아니더라도 시적 대상이 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언뜻 진술이 이미지를 압도하는 듯 보이지만 조용식 시의 진술은 시적 대상이 전달하는 이미지의 감각화된 지점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것이 「산길 4」에 이르러 더욱 극대화되었다. 「산길 4」는 절제된 묘사를 통해 하나의 죽음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담담한 사유를 부연함으로써 시적 감각과 사유에 긴장감을 더한다. 그럼으로써 묘사는 사유의 영역을 수용하고 진술은 감각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밀물이 들어온다
어디서부터 밀물이 되는지 분명치 않지만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개펄이 하나 씩 뒤로 누웠다
(중략)
질린 색깔은 거품의 변용이던가
거품과 질린 색깔 어느 쪽이 무상無相일까
거품이 언제 흔적이 남던가
거품은 꺼지고 나면 그 뿐
바닷물이 빠진 자리에
낡고 빈 바짓가랑이가 반쯤 펄 속에 묻혀있고
빈 조개껍질과 비닐봉투가 삐딱하게 일어섰다
(중략)
개펄에 수많은 발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달랑게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아플 준비를 하고 있다
-「환상 통 2」 전문
묘사와 진술의 조화와 힘은 「환상통 2」에도 잘 드러난다. “밀물이 들어”오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된 장면은 “개펄이 하나씩 뒤로” 누운 장면으로 이어진다. 시적 대상을 포착하는 관찰의 힘이 느껴진다. 시인은 언제나 응시하는 자여야 한다. 첨예한 관찰만이 시적 사물을 파악하여 독자 앞에 부려놓을 수 있다. 그렇다고 시적 대상의 겉모습만 제시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언제나 시인의 사유와 이어져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파랗게 질린 바다와 거품이 “무상”으로 이어지는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시적 수사와 사유의 탁월함은 마지막 연까지 이어진다. 개펄의 숨구멍을 “개펄에 수많은 발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고 표현한 부분도 그렇고 그것을 통해 아픔을 떠올린 지점도 그렇다. 조용식 시인은 사유의 힘이 돋보이는 시인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묘사와의 첨예한 대응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솔개가 타원형으로 돈다
겨울나무들이 말없이 서 있다
지나간 계절 내내 바람에 흔들리던 푸른 깁
여름 한 철 빌려 입은 것들을 모두 벗어 주고나면
흔들릴 것도 내줄 것도 없는 빈 손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것이 나무의 본디 생김새다
겨울에는 혼자다
우거진 숲으로 서서
나무끼리 서로 이웃하여 간섭하며
귀가 열리는 이야기들을 묶어두고 있다가
(중략)
당겨 덮을 이불도 술 취한 이웃도 없이
잠적岑寂한 나무 홀로 서 있다
겨울에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죽는다
겨울하늘에 얼어붙은 별을 캐내고 있다
문고리에 모인 추위가 그렇듯
성긴 가지 사이로 내려오던 별
빈 집으로 모여드는 산 그림자도 얼어 있다
무거운 고요를
봄이 흔들어 깨물 때까지
겨울에는 모두 그렇게 서 있다
-「겨울나무」 부분
“겨울에는 혼자다”라는 구절은 시인의 시론이자 시에 대한 투지를 나타낸다. 시인은 시를 쓰는 자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긴 세월 홀로 견디며 쓰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며 시의 자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집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우거진 숲에 서서” 세상 속 “귀가 열리는 이야기들을” 듣고자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세상이지만 시인은 “당겨 덮을 이불도 술 취한 이웃도 없이” 홀로 세상을 견뎌야 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잠적한 나무”처럼 홀로 서 있는 존재이자 “혼자 생각하고 혼자” 죽는 자이다.
오랜 세월을 홀로 견뎌온 어느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곁에 무수히 많은 세상이 스쳐 지나갔을 테지만 그는 묵묵히 언어를 어루만지고 길어 올렸을 테다. 그 시간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시인의 모든 생애를 관통하는 통곡이자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에 기댄 시와 시집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언어를 탐문한 끈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단순한 시의 모음이 아니다. 시인의 시적 여정에 드리운 사유와 통찰이 축복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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