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킬링필드
(1)
영화는 예술이다. 요새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왕의 남자가 놀라운 기록을 갱신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더 늘어났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오래 남는다. 그러나 영화감상은 잘 해야 하는데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라는 가공의 예술이다. 사실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다. 사실이나 역사를 다루면 다큐멘터리다. 또 하나는 소설을 영화한 것을 보고 소설을 읽은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되듯 영화에서 다루는 역사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서 이런 것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조선말기 사대부집안에서는 아녀자들에게 소설 읽기 금지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소설은 풍속을 흐린다는 것이 그 주요한 이유였다. 그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요새도 우리들은 연속극을 많이 보는데 이런 경우에도 극을 통해서 자기의 감정을 정화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폐단이 있을 수 있다. 극은 현실의 반영이지만 현실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극을 잘못 보거나 극 속에 오래 갇히게 되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위의 소설 금지령처럼 풍속을 저해할 수가 있다. 공자는 듣는 음악도 매우 가려듣기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 풍속이나 문화가 고양되는 측면보다는 저속화되는 것은 이런 대중문화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데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 상영을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극력 반대한다고 한다. 바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가 가공의 예술이라는 점을 알고 보는 성숙한 관객이야 관계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독교의 신성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예술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만든 예술가가 순수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동기를 가지고 만든다면 그 예술품은 우리에게 많은 해악을 줄 수 있다.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미국이 그것을 덮으려는 역사왜곡의 의도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전에는 킬링필드에 대해서는 너무 단순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인 폴포트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계기로 이 나라의 현대사를 살피고 나니 그것이 사실과 다른 면이 많았다.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우리는 마지막 여정으로 킬링필드와 관련 있는 한 사원으로 갔다. 캄보디아 안에는 그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세운 위령탑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곳은 그 규모가 좀 작았다. 그 곳에 가니 예의 그 두개골들을 모아 놓은 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처형장면을 담은 사진을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위령탑이 있는 사원의 모습>
(2)
킬링필드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①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② 입헌군주로 군림한 시아누크공은 1970년 친미 성향의 론놀 및 국회에 의해 실각된다.
③ 시아누크공은 과거의 정적인 친중국계 크메르 루즈와 연합한다.
④ 1965-73년 기간 중 베트콩이 캄보디아 내에 기지를 건설하여 월남전의 와중에 들게 된다.
⑤ 론놀은 반베트콩 정책을 펴고 베트공은 프놈펜을 무력으로 점령하려한다.
⑥ 미국, 월남, 크메르 루즈의 반격으로 프놈펜 함락을 막는다.
⑦ 베트남전이 끝날 무렵 론놀은 미국의 도움으로 크메르루즈를 공격한다.
⑧ 미국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죽는다.
⑨ 모든 외국세력을 반대하는 (친중국계) 크메르 루즈는 1975년 4월 프놈펜을 함락한다.
⑩ 1976년 1월 새 헌법이 제정되고, 총리가 된 폴포트는 집권기간인 1979년까지 크메르 루즈를 반대하거나 친미·친베트남 성향자, 지식인, 중산층과 이들의 자녀 등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육을 한다.
㉠ 인도지나의 패권국을 자처하는 베트남(전쟁은 끝나고 베트남은 통일된다)은 1977년부터 국경충돌을 시작한다.
㉡ 1978년 12월 전면적인 침공으로 불과 2주만에 프놈펜을점령하여 후헹삼린 정권을 수립한다. 캄보디아를 통치하기 위해 20만의 병력을 주둔시킨다.
㉢ 1982년 6월에는 3대 저항세력인 시아누크군, 폴포트군 및 손산군 간의 반정부 연합전선이 형성된다. 이들은 1989년 9월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때까지 무력투쟁을 지속한다.
㉣ 베트남 철수가 시작되자 상기 3대 세력과 정부의 훈센파 간에 정권장악을 위한 치열한내전이 일어난다.
㉤ 1991년 10월 캄보디아내전을 종식하기 위해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 크메르루즈는 동협정의 이행을 거부하였으나, 이후 크메르루즈는 거의 소멸하게 된다.
㉦ 킬링필드의 원흉 폴포트는 1998년 4월 사망한다.
㉧ 1998년 7월 총선에서는 훈센이 승리하여 현재까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다.
이러한 내외전의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캄보디아는 만신창이가 된다. 2002년 11월 21일에 발표한 국제분쟁 전문기자이며 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인 정문태씨의 글을 통해 킬링필드의 진상을 한 번 살펴보자. 킬링필드 사건은 1969~73년에 미국에 의해서 시작된 제1기 킬링필드가 있고, 1975~79년 크메르 루즈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가 있다.
<제1기는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공을 소탕하기 위한 미국의 폭격이었다. 전쟁선포도 없었고 무차별적인 융단폭격이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의 시민들에게 공습경고 한번 내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양민 60만~80만명을 살해한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라고 한다. 그들은 4년 동안을 폭격하면서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를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고, 군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폭격점까지 지시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군 명령과 보고체계를 무시한 채 이루어진 일이다. 이때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톤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이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이었다고 한다.
제2기는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폴포트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극단성을 드러냈다. 크메르 루즈는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 (혹은 15만 30만)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한다.
또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 기간에 발생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아메리카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때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한 한판이다 보니 처음부터 정의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아메리카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즈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 전문가라 불리며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내는 키신저를 기소하지 않고는 킬링필드도 학살재판도 모두 영원히 반쪽짜리 전설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밀불법전쟁을 주도한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아메리카식 킬링필드에 침묵해온 언론들은 아직도 키신저를 존경하는 석학이라 떠들어대고 있다. 아메리카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현대사에 최고 최대 거짓말인 아메리카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아메리카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3)
나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이런 비극을 살펴보면서 우리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숱한 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캄보디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캄보디아 사태는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폴포트의 만행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미군은 이 땅에 진주하여 전쟁을 수행하면서 무차별 폭격으로 또는 아무 죄 없는 민중을 총기로 학살하였다. 유명한 영동 노근리를 비롯해 거창 산청 대구 부산 여수 진부 익산 유성 등 남쪽에만 60여 곳이 넘으며, 북쪽 지역에도 황해도 은율 신천 평양 정주 등 100여 곳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는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남북한 군인들이 작전 수행을 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 살상이 이루어졌는가? 또한 국가기관에 의한 것도 헤아릴 수 없고, 좌우의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민간인들 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 죄 없는 죽음이 이 산천을 피로 물들였던 것이었다.
캄보디아인들이 위령탑 속에 보기에도 흉한 두개골들을 그대로 모아놓고 보게 한 것은 그들이 겪은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또 그들은 청산되지 못한 그 역사적 비극의 실상을 밝혀 죄인을 단죄하고 역사의 산 교훈으로 삼고 깨우치려고 한 것일 거다. 우리는 어떤가? 그런 비극적인 역사를 밝히려고 하면 아픈 과거를 지금에 되살려 무엇을 하겠느냐면서 극구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어떻게 올바른 미래의 역사가 펼쳐지겠는가?
80년 5월 광주의 잔인한 학살은 한국전쟁 언저리에서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남긴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니던가? 그것은 4.19당시 데모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와도 그 줄기가 같고, 60년대 베트남 파병 때 우리 군인들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도 맥락이 같은 것이다. 광주의 비극은 또 멀리는 한국전쟁 당시의 거창 양민 학살과 4.3 제주도민 학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원한에 찬 듯 눈을 잃고 허공을 향해 움푹 눈자위가 뚫려 있는 두개골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이 땅에 묻혀서 아직 거두어지지 못한 수많은 그 유골들이 언젠가는 햇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리란 생각을 한다. 아직도 구원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한 맺힌 영혼들을 편히 잠들게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공업(公業)으로 이루어진 비극을 우리가 해원(解寃)하지 못하면 누가 그것을 할 것인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또 다시 그런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다.
또한 이제 남북관계가 더욱 진전되면 남과 북의 정권들이 모두 공식적으로 과거의 학살 사건들에 대해서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리라.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적인 공존의 기틀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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