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떨어진 이삭들
추수하는 가을 들녘에는 군데군데 떨어진 낟알들이 있다. 아주 잔 것들이야 작은 짐승들의 먹이가 되지만 줄기가 달린 이삭들은 버리기에 무척 아깝다. 이 번 여행에서 큰 주제 아래 묶이지 않았으면서도 적어둘 것들이 많다. 사실 버려진 이삭들의 낱알들도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면 잘 자라 큰 나무가 될 수 있다.
(1) 하노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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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식당은 무척 지저분했지만 거기 앉아서 먹는 베트남의 쌀국수는 옛날 우리 나라 장터 생각이 나서 정겹고 맛이 좋았다.
* 하노이의 외곽에서 파리의 개선문 같은 건물 하나를 보았다. 고급 아파트 분양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식민 시절의 추억일까? 나그네가 보기에는 별로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여행객은 가장 그 나라다운 것 보기를 좋아한다.
* 노란색을 베트남 사람들은 좋아한다. 건물의 외벽은 노란색이 많다. 노란색은 황금, 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무슨 색이 많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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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라서 그런지 관청마다 집집마다 황성기(국기)를 달았다. 국기가 강조된다는 것은 개인보다는 국가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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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자이 차림의 여인들이 있는 옷가게
여기서도 미인은 피부가 희어야 한다. 사실은 가무잡잡한 얼굴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프리카에서도 미인의 얼굴은 희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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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화장한다. 평야 지대에서는 논에 유골을 모신다. 언제든지 부모님을 뵈러갈 수 있으니까. 어느 나라이든지 동네 근처에는 죽은 자의 흔적이 있다. 중국에서는 아예 자기 집의 제일 높은 곳에 모신다. 일본의 도회에서는 주택가 아주 가까이 모시는 수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그러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야단이다. 요새는 일부 나라에서는 화장을 하고 유분을 수목장으로 한다는데 여러 모로 그게 가장 친환경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 한 곳에 가니 고속도로 가운데에 유도화를 심어 놓았다. 유도화는 독이 있어 고속도로를 건너다니는 소떼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소 한 마리는 삼십 만원인데 아주 큰 재산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소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물소는 주로 일소의 역할을 한다고….
* 버스 기사의 월급은 10-15만원이다. 식당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들의 초임은 6만원쯤 한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전기료가 비싸서 세탁기를 사는 것보다는 가정부를 쓰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한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밥을 먹이지 못해 딸자식을 남의집살이로 보냈다. 그 집에서 일하면서 성장하여 시집을 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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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도로면 쪽의 폭에 따라 세금이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니 집들이 옆으로 길다. 참 우리가 보기에는 답답하다. 그리고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서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려서 사생활에 비밀이 별로 없다고 한다. 또 모든 토지는 국가에서 임대하는데 자기 농지를 팔 수도 있다고 한다.
* 잔 도둑들이 많아 일층은 철문이나 쇠창살을 많이 해 놓았다. 일층 응접실에는 오토바이를 옆에 세워놓는다.
* 외국인의 경제 행위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오토바이 한 대를 살 때조차 현지인들의 이름을 빌려야 한다. 그리고 세금도 비싸다. 그리고 외국인이 들어오면 항상 신고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교포 식당 주인아줌마는 식당은 잘 되는데 늘 감시를 받는다고 한다.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였다.
* 농기계가 비싸고 귀하기도 하지만 농가에는 일손이 많아 모두 손으로 한다. 그리고 거의 유기농에 가깝다고 한다. 농업이 80%라고 한다. 가끔씩 보이는 산은 헐벗은 산들이 많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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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인근에는 사원들이 보였다. 이 나라에는 포교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
* 베트남 말에는 존대어가 따로 없다고 한다. 오랜 동안 프랑스 지배를 받은 탓일까? 베트남 글자는 식민 시절 프랑스 신부가 로마자를 원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고유한 크메르 문자가 있는데 말이다.
* 과일 중에 선인장 열매란 것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으름 비슷하고 아주 달았다.
* 농촌에는 짚인지 억새인지 그런 지붕을 한 집들이 더러 보였다. 블록 담에 슬레트 지붕을 한 집도 보였다. 60년대 말의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집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월남에 가서 새마을 운동 시범사업을 펼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
* 오랫동안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아서일까? 집들이 프랑스풍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것 하나는 이들보다 나은 것 같다. 일본식 집들이 특수한 지역에만 있는 것을 보면…. 목포에 가면 유달산 바로 밑에 일본 식민지 때 지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동네가 아직도 있는 것을 보았다.
* 호치민은 나라와 민족과 결혼했다고 한다. “ 영웅은 여자를 멀리 했지만 여자들은 영웅을 멀리 하지 않는다 ” 라고 한 안내 아가씨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어딘가에 호치민의 아들이 있다는 말이 들린다고 한다. 부디 낭설이기를 바란다. 왜? 아버지의 큰 그늘에 자식이 그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기 때문이다.
* 도이모이 정책(개혁개방 정책)이란 것이 있다. 집단농장은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들은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이다. 고르바쵸프가 개혁 개방을 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렇다고 한다. 감자를 싣고 가는 노동자가 감자야 굴러 떨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는 사회주의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한다.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불행한 존재인가?
* 보트 피플로 조국을 배반하고 떠나 외국에 간 비퓨족(?)들이 돌아오는 것을 베트남인들은 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낙후한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돈이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 숱하게 버려진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외국에서도 자기를 버린 조국과 부모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참 인간들은 영악하다. 하인즈 워드란 미식추구선수 때문에 한반도가 들끓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 하노이를 흐르는 홍강은 철분이 많아서 저녁 무렵에 보면 붉은 색을 띤다고 한다. 또 홍강은 범람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둑이 터지면 모두 함께 둑을 쌓느라고 단결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북베트남이 승리한 것은 남베트남보다는 단결심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홍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롱비엥교와 폴드메르교) 는 100년 전 식민시절 프랑스 에펠탑을 지은 에펠이 설계했다고 한다. 제국들이 식민지를 만들 때는 그 식민지가 영원히 자기의 속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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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시가지의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에는 전깃줄이 어떻게 그렇게 여러 가닥으로 늘어서 있던지? 수백 개의 전선들이 마치 실타래처럼 엉겨 있었다. 고압선이 없는 것일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2)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 캄보디아에서는 30년 만에 최저기온이 기록된 일이 있었는데 13도였다고 한다. 유래 없는 한파에 사람들 많이 떨었으리라. 우리가 생각하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다. 그리고 너무 편벽되고 부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아는 것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많다.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 옆으로 나비들이 날아간다. 그렇게 덥지는 않다. 이름 모르는 나무에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다.
* 현지 안내인 미스터 리의 사인을 받았다. 참으로 그 글자가 난해하다. 도저히 알아볼 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장 쉽고 과학적이란 우리 한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 산 선 손 순 살 설 솔 술 ”을 외국인들이 배울 때 얼마나 구별하기 어렵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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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발마사지는 중국에서 보다 훨씬 더 정성이 깃들어 있다. 임금이 쌀수록 사람들은 더 진실한 면을 보인다. 돈 많은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인정이 많다고 나는 본다. 고생한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인간미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 가설극장에서 본 ‘와룡선생 상경기’라는 영화에서 들은 대사 하나는 내 생애에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있다. “ 사람이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하면 그 아름다운 인간성을 잃게 된다 ” 는 그 말. 그래서 나는 이름 없고 힘없는 보통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간다.
* 씨엠립의 호텔 안 응접세트들은 값비싸게 보이는 나무들로 만든 것들이었다. 열대 우림의 우거진 숲들은 저렇게 베어져서 쓰러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을 갉아 먹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들한테는 독성이 강한 살충제를 친다. 어떤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우리들한테도 독한 농약을 뿌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전봇대가 사각기둥이었다. 뱀이 많은 나라여서 뱀이 올라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한국 안내원이 집에 가정부를 들였는데 행주와 걸레를 구분하지 않더라고 한다. 그 가정부한테 시간이 나는 대로 영어를 배우라고 한단다. 나중에 쓰일 데가 있을 테니까.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필리핀 아줌마를 가정부로 쓰는 집들이 서울에는 있는 모양이다. 이제는 영어권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무 기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 이 나라 사람들은 화초 키우기를 좋아한단다.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는 모양이다.
*톤레샆 호수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히지만 회를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롱배이에서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선상에서 회를 먹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회를 먹었을까? 지봉유설에 나와 있다는 사람도 있고 삼국시대 때부터라는 사람도 있고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설도 있는 모양인데 누가 자세히 아는 사람 없나요?
* 호수로 가는 냇물에서 오리떼들이 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 중의 하나인 저 오리떼들…. 뒤뚱뒤뚱거리는 익살스런 걸음걸이가 나는 참 좋다. 늘그막에 오리 몇 마리 키우면서 살고 싶다. 미나리꽝에 날아오던 빨간 고추잠자리와 앵기 잠자리(왕잠자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을까? 그들은 어디로 다 날아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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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어지러운 길에 학교 가는 소녀
캄보디아에서는 학교 다니는 애들 중에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2%라고 한다. 나머지 아이들은 대체로 비닐 주머니에 책을 싸들고 다닌다고 한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급장을 하던 읍내의 동무 하나가 가방을 메고 다녔다. 나는 그 아이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비로포대를 갈라서 우산을 대신했던 그 어린 날의 추억이여.
* 초등교사의 월급이 25불이라고 한다. 교사 자격증을 대여할 수도 있는데 1년 빌리는 값이 90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팔러 다니는 다섯 개 일불짜리 팔찌장사가 작은 것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팔찌 하나 살 것을…. 그렇게 팔려고 애원하던 그 눈길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아이들의 뒤에 어른 자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잘못인가? 무척 혼란스럽다. 휴지 줍는 아이들은 하루 250원을 번다고도 하였다.
* 시멘트 기둥을 군데군데 쳐 놓고 철조망을 쳐 놓은 것이 보였다. 그런데 중간중간에 나무 기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시멘트나 철조망이 귀한 탓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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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라이 인공호수의 섬에 가니 유적지가 남아 있다. 거기에는 우리와 같이 배를 타고 간 아이들도 있었지만 팔찌를 파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안내원이 아이들을 모으더니 우리나라 동요를 부르라고 하였다. 아마 안내원들도 따분한 생활에서 처음에는 심심파적으로 그 아이들한테 우리 노래를 가르쳤을 것이다. 아이들은 동요를 잘 불렀다. 그런데 순간 내 가슴이 울컥 막혀왔다. 그 아이들은 노래의 뜻이나 잘 알고 불렀을까? 다시 그 순박한 눈매를 한 아이들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 이 나라에서는 무관의 힘이 문관의 힘보다 더 세다고 한다. 근 현대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겠지. 그리고 여자의 생활력이 남자보다 더 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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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에서는 맨발에 노란 가사를 걸친 동승들이 더러 보였다. 과외에다 학원에 찌든 우리 아이들보다는 훨씬 더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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